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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불사사의,기타

현대 7대 불가사의

by 연송 김환수 2008. 10. 19.

 

중국만리장성   로마콜로세움  영국스톤헨지 

이스탄불          이탈리아       알렉산드리아 

성소피아 성당   피사의 사탑    파로스등대   

이집트

피라미드

 


만리장성

 

허베이 성[河北省] 북부 옌산 산맥[燕山山脈]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축조된 만리

 

장성, 총길이 약 2,700km

 

중국 역대 왕조가 변경을 방위하기 위해 축조한 대성벽.

허베이 성[河北省] 북부 옌산 산맥[燕山山脈]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

보하이 만[渤海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 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海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허 강[黃河]을 건너며, 산시 성[陝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뚫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關]에 다다른다. 지도상의 총연장은 약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이다. 베이징의 북서쪽 바다링[八達嶺] 부근부터 쥐융관[居庸關]을 경유하여 다퉁의 남쪽 안먼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km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이것을 전(塼)이라고 하는데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바다링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 4.5m, 아랫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약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황허 강 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 있다.

 

기원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전국시대의 장성은 북방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중원에 나라를 세운 제(齊)·중산(中山)·초(楚)·연(燕)·조(趙)·위(魏)·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했다. 조·연·진 3국이 쌓은 북변의 성벽은 문헌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최근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츠펑[赤峰] 부근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방은 간쑤 성[甘肅省]의 민 현[岷縣]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황허 강의 북쪽을 감아돌아 조의 장성과 합쳐지는데, 그 동쪽 끝을 연의 장성과 연결하여 츠펑부터 랴오양[遼陽] 부근에까지 증축했다.

 

전한시대 장성의 동부는 거의 진대(秦代)의 것 그대로였으나 서부에는 간쑤의 회랑지대를 흉노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무제시대(武帝時代)에 우웨이[武威]·주취안[酒泉] 2군(郡)을 설치하여 그 북쪽에 장성을 쌓았다. 그후 장예[張掖]·둔황[敦煌] 2군을 설치하여 거기에 축성했던 장성도 주취안으로부터 서쪽의 위먼관[玉門關]까지 연장시켰다. 후한시대에는 흉노(匈奴)의 세력이 쇠퇴하여 중국과 싸울 힘을 잃었기 때문에 장성의 보수는 행해지지 않았다.

 

삼국시대에서 진대(晉代)에 이르기까지 5호(五胡)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어 대거 중국으로 침입해왔다. 그들은 자유롭게 장성을 출입했고 내지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족이 세운 진이 양쯔 강[揚子江]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화북지역으로 들어온 선비(鮮卑)는 북위(北魏)를 세웠으나 급속히 중국화했고, 외몽골에서 일어난 유목민족인 유연(柔然)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장성의 개축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이것은 시황제시대의 것을 보강하는 수준이었다. 북위의 영토를 이어받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도 큰 돈을 투입하여 성벽을 대규모로 축조했다. 이 장성은 산시 성[山西省] 리스 현[離石縣] 부근부터 보하이 만 부근까지 약 1,500㎞에 이르는 규모로서 현재의 장성 선의 위치에 새로이 축성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방의 고대 장성, 즉 전국시대에 시작되어 한과 북위시대에 보수되어온 옛 장성은 버려져 유적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개수와 변천

수(隋)는 중국 통일 후 장성의 보수에 힘쓰는 한편, 오르도스 남단에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당대(唐代)에 들어와서는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자세가 방어보다는 공격 위주로 되었기 때문에 장성을 보수하거나 신설하는 일은 없었다. 오대(五代) 이후 장성 일대가 요(遼)·금(金)·서하(西夏) 등 이민족의 영토가 되어 장성은 거의 방치되었다.

 

금대에 들어와 몽골 고원의 동쪽 끝에 살고 있던 타타르족(몽골족의 한 부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싱안링 산맥[興安嶺山脈]의 서쪽에 새로 대규모 장성을 축조했다. 이 장성은 현재의 치치하얼[齊齊哈爾] 북서부의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을 넘어 그 일대부터 남쪽으로 뻗어내리다 인산 산맥[陰山山脈] 북측 초원의 서쪽으로 뻗어 바오터우[包頭] 북방에 이르렀는데 그 유적은 지금도 단속적으로 남아 있다.

 

원은 몽골과 중국땅 모두를 지배했기 때문에 장성이 필요없었으며, 만리장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몇 번이나 만리장성을 넘었던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 Livre des merveilles du monde〉에 만리장성에 대해서 단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다. 아마도 축성 이후 수백 년이 지나 만리장성의 자태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거의 명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은 영락제시대(永樂帝時代)까지 북방민족에 대해 공격적이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방어적으로 되어 역대로 만리장성을 개축했다. 주로 북제시대의 유적을 기초로 했으나 지역에 따라서는 상당 부분 신설한 것도 있다.

 

장성의 축조는 이미 영락제시대에 시작되었다. 우선 산하이관부터 다퉁에 이르는 구간을 강화했고, 이어 정통연간(正統年間)에는 베이징의 정면 부분이 2중으로 축성되었다. 더욱이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이 개수되었는데 이 부분은 수의 장성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몽골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가정연간(嘉靖年間)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을 시작했다. 이 공사는 동부에서 착수되어 오늘날과 같은, 전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장성이 만들어졌다. 서쪽 부분은 한대에 축성된 이래 거의 버려진 채로 있었으나 오르도스 남단의 장성에 이어 간쑤에 이르는 부분이 축성되었고, 이어 란저우[蘭州]에서 자위관까지 연장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이 거의 완성된 것은 16세기말이었다.

 

명은 만리장성을 북방의 제1선으로 삼아 거대한 주둔군을 배치하고 구역을 나누어 방위를 담당시켰는데 이것을 구변진(九邊鎭)이라고 불렀다. 명대에는 만리장성을 변장(邊牆)이라고 불렀다. 북변의 변장 이외에도 요동(遼東) 변장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이 변장은 산하이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 랴오닝 성[遼寧省] 선양[瀋陽]·카이위안[開原] 부근에까지 이른 뒤 남하하여 압록강 기슭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만주 및 몽골에서부터 신장[新疆]에 이르는 지역이 중국을 통일한 청의 지배하에 들어왔기 때문에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를 잃고 황량한 상태로 20세기 전반까지 방치되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정비사업에 착수하여 산하이관과 바다링이 국내외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과거의 만리장성은 오로지 판축공법(版築工法)을 써서 흙으로만 축조되었다. 황토를 건조시키면 단단한 점토가 되므로 판축은 간단한 공법이었으며 비가 잘 오지 않기 때문에 상당한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황토를 틀에다 넣어 건조시키면 햇빛에 말린 벽돌이 되는데 이것을 구운 것이 전이다.

 

전으로 장성의 외곽을 둘러싸는 공법은 명대 특히 16세기 후반 이후의 것으로서 지역적으로는 산시[山西] 동쪽 구간에 한정되어 있다. 산시 서쪽 구간에는 전 이외에도 햇빛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부분도 있다.

 

군사 및 경제적 역할

만리장성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가 설치되어 있고,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출입문이 설치되었으며 수비병이 주둔했다. 이러한 장소를 관(關) 또는 구(口)라고 부르는데 산하이관·구베이커우[殺虎口]·쥐융관·두스커우[獨石口]·자위관 등이 특히 유명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만리장성은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선으로서의 군사적 의미이다.

 

그러나 북방민족은 세력이 강력해지면 간단히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의 농경지대를 침입했고 화북의 농촌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다퉁과 사후커우[殺虎口] 사이, 장자커우[張家口] 부근, 두스커우, 구베이커우가 그들의 중요한 돌파지점이었다. 또 명대 말기에는 산하이관 정도가 청군의 침공에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에는 돌파되고 말았다. 만리장성을 둘러싼 몽골과 만주 간의 무역이 오래전부터 행해져왔다.

 

만리장성 부근의 촌락에서는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고, 대규모적인 것은 만리장성 안의 도시를 기지로 하여 대상을 짜서 오지에 들어가기도 했다. 명말 이래 귀화성(歸化城)과 같이 만리장성 밖에 있는 도시가 상업도시로 번영한 곳도 있다. 청대에는 중국의 상인들(특히 산시 상인들)이 정부의 뜻과는 달리 귀화성부터 몽골 고원의 오지에까지 상업을 위해 들어가기도 했다.

 

만리장성 너머의 무역로로는 러허[熱河:지금의 청더(承德)]·만주 방면으로 가는 것이 있다. 이 경로로 만리장성을 빠져나오는 지점은 당 이전에는 구베이커우였으나, 요대에는 산하이관이 설치되면서 2곳이 되었다. 몽골 방면은 다퉁으로부터 북상하여 더성커우[得勝口] 부근의 관구를 통하는 것이 주요경로였으나 명말부터는 귀화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로마콜로세움 

 

로마에 있는 거대한 원형경기장.

 

플라비아누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원래는 플라비아누스 원형경기장이라고 불렸

 

다. 70~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 때 100일간

 

의 경기가 포함된 제전을 위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82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상층을 덧붙여 공사를 완성했다.

 

 

 

여분의 떠받치는 힘을 더하기 위해 적당한 언덕을 파서 세운 이전의 원형경기장과

 

 

 

는 달리 콜로세움은 돌과 콘크리트로 세운 완전한 독립구조물로서 가로, 세로가 각

 

 

 

각 190m, 155m에 이르며 5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있었다.

 

 

 

 

 

이 경기장에서 수천 회에 걸친 검투사 시합과, 맹수들과 인간의 싸움, 모의

 

 

 

해전 같은 대규모 전투장면이 실연되었다.

 

 

 

중세 때에는 낙뢰와 지진으로 손상되었으며 반달족에 의해 더욱

 

 

 

심하게 파손되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던 좌석과 장식물들은 남아 있지 않다.

 

 

 

 

 

 

 

 

 

스톤헨지

 

 

 

 

외곽이 흙구조물로 둘러싸인 원형으로 배치된 거대한 선돌[立石] 구조물.

 

선사시대인 BC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했고, 영국 윌트셔의 솔즈베리에서

 

북으로 13㎞ 떨어진 곳에 있다. 드루이드와 관계가 있다고도 하나 근거는 없으며

 

주로 1919년부터 특히 1950년 이후 런던 고대유물협회가 실시한 발굴을 근거로 해

 

석되고 있다. 이 발굴에 따라 스톤헨지 건축은 크게 3기(Ⅰ, Ⅱ, Ⅲ)에 걸쳐 이루어

 

졌고, 마지막 시기는 다시 3단계(Ⅲa·Ⅲb·Ⅲc)로 나눌 수 있음이 밝혀졌다.

 

 

 

스톤헨지 Ⅰ기(BC 3100경)에는 신석기시대인들이 사슴의 뿔을 곡괭이로 이용해 직

 

 

 

경 98m, 폭 6m, 깊이 1.4~2m 크기의 원형 도랑을 파고, 거기서 파낸 자갈은 도랑에

 

 

 

높은 둑을 쌓는 데 사용했다.

 

 

 

 둑 바로 안에는 원형으로 배치된 56개의 구덩이(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오브리 구

 

덩이'로 불림)와 북동쪽 둑이 터진 곳에서 밖으로 뻗어난 통로에 35t 무게의 사암표

석덩어리를 세웠다. 이 구덩이들은 파고난 직후 다시 메워진 것으로 보인다.

 

 

스톤헨지 Ⅱ기(BC 2100경)에는 전반적으로 개축하여 통로를 동쪽으로 약 3.2㎞ 떨

어진 에이번 강까지 연결시키고, 유적 중심부에는 청석(靑石)이라 불리는 4t짜리 화성암 기둥을 2중 동심원 형태로 세웠다.

 

 이 돌은 약 385㎞ 떨어진 웨일즈 지방의 프레셀리 산에서 바다나 강, 또는 육로를 통해 직접 또는 시간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는 2단계에 걸쳐 수입한 것들이었다. 최초에 세운 청석의 입구는 하지에 해가 뜨는 방향에 맞추어 배치되

 

었고, 스톤헨지에 가장 가까운 통로도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중원의 석렬(石列)은 완성되지 못했고 다음 시기에는 해체되었다.

 

 

스톤헨지 Ⅲa기(BC 2000경)에 이 기념물은 전체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거대한 표석덩어리로 된 30개 기둥으로 구성된 원이 가운데 말발굽 모양으로 배치된 5개 삼석탑(三石塔)을 에워쌌는데, 이 삼석탑은 1쌍의 큰 돌에 상인방돌 하나를 얹어 이루어진 것으로 길이 8m, 무게 50t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보여준다. 이것은 유럽 거석기념물 중에서 독특한 것이다. 겉면이 돌 해머로 두드려 잘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리스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 미노스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은 고고학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스톤헨지 Ⅲb기에는 스톤헨지 Ⅱ기에 세웠던 청석 중 약 20개를 다시 다듬고 타원형으로 배치하여 세웠다. 그 배치형태는 오늘날 볼 수 있는 내부의 말굽형 청석의 선과 대체로 일치한다. 스톤헨지가 세워진 마지막 단계인 스톤헨지 Ⅲc기는 BC 1400년 전에 끝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 시기에는 스톤헨지 Ⅲb기에 건립한 타원형 구조를 해체하고 오늘날과 같은 원형과 말굽형 구조로 재배치했다.

 

 

스톤헨지는 일종의 종교적 숭배장소로 건설되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어떤 성격의 종교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중심축을 1년 중 중요한 날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배치한 사실은 스톤헨지가 하늘을 숭배하던 사원이었다는 일반의 생각을 뒷받침해주지만 이 증거 역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이스탄불  성소피아 성당

 

 

 

이스탄불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1453년 이후 터키의 지배 아래 들어가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되고, 4기(基)의 미너렛(첨탑)이 추가되어 아야 소피아로 부르게 되었으나 본래는 하기아소피아대성당이라 부르던 비잔틴건축의 걸작이다. <하기아소피아>란 <신성한 예지(叡智)>, 즉 성삼위일체의 제 2 의 페르소나인 로고스,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제와 후계자의 시대에 건조된 성당(36년 헌당식)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유스티니아누스제(재위 527∼565)는 전연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재건을 시작하였다. 설계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로스가 담당하고,

 

 100명의 감독 밑에서 1만 명의 공인이 작업을 하여 5년 10개월만에 완성하였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속도이며, 537년 12월 7일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기본적으로는 라틴십자형플랜의 삼랑식(三廊式) 바실리카에 대원개를 씌운 원개식 바실리카형 성당인데, 중앙에 대원개를 둔다고 하는 당시의 건축가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안깊이 77m, 나비 71.7m로 하였으므로 거의 정사각형의 그리스십자형플랜에 가깝다. 지름 33m, 바닥면으로부터 56m 높이인 대원개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4개의 큰 지주와 대아치, 삼각궁우(穹隅)를 채용, 동서로 원개와 같은 나비를 가진 2개의 반원개를 설치하는 등, 독창적인 구조이다.

 

 헌당식에 임한 황제는 깊이 감동하여, <오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라고 외치며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무종교의 박물관이 되어 있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고고학단원의 청소작업으로, 이슬람교 지배 아래 오랜동안 석회칠로 덮여 있던 모자이크벽화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헌당 당시의 것은 장식모티프 등의 사소한 것에 불과하고, 거의가 이코노클라슴(성화상파괴운동) 종결 후인 9세기 이후의 것이다.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325년에 지어졌고, 이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되었다.이 사원에 있어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높이 55미터,폭 33미터에 달하는 장대한 규모의 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기둥이 아닌 15층 높이의 거대한 돔이라는 사실이다.

 

15세기에 이 사원은 개조되어 터키 공화국 때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 뛰어난 성모마리아의 모자이크화와 이슬람교의 코란의 금문자, 미나레트 등이 동거하는 신비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스탄불(현재 터키의 수도이며 이슬람이 많은도시라는 뜻)이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조되었다.

 

비잔틴 문화의 최고 건축물로써 아야 소피아(Aya Sophia)라는 현지어로 불리며 현재 소피아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현재의 소피아 대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건립된 것(532~537년)으로 세계의 교회 중 4번째(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로 크며,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360년 나무 지붕의 작은 교회로 지어졌으나, 404년 알카디우스 황제 때 화재로 무너졌으며 그 후 데오도시우스 2세 때 두 번째 성 소피아 대성당이 완공(415년)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일어난'니카의 반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니카의 반란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비인 데오도라(이집트 출신의 댄서) 때문에 생긴 반란이었다.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그러나 그녀가 천민 출신이라는 것과 이집트에서는 그리스도의 단성론(콘스탄티노플에서는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하느님 자신이라는 양성론을 채택했다)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히포드롬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반란군의 기세에 눌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난을 피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려 했으나 그를 데오도라가 저지했다.다음 순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히포드롬에서 농성하는 반란군을 단숨에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제2차 소피아 성당이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 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황제의 권위와 교회의 영광에 걸맞는 새로운 성당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건축가 안테미우스와 수학자 이시도르를 투입하였다.건축을 시작한 후 5년 10개월 만인537년에 소피아 성당은 마침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 斜塔, Torre Pendente di Pisa]

 

영)Leaning Tower of Pisa.

피사에 있는 중세 건축물.

 

기단이 가라앉아 수직면에서 5.2m 기울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피사의 성당 복합체 가운데 3번째이며 마지막인 구조물로 1174년에 착공된 이 종탑은 56m 높이로 설계되어 흰 대리석으로 지어졌다. 건물의 기초부가 무른 땅속으로 기울어지게 가라앉는 것을 발견한 때는 이미 전체 8층 중 3층까지 완공되어 있었다.

 

책임 기술자였던 본나노 피사노는 기울어진 모양을 보정하기 위해 새로 층을 올릴 때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더 높게 만들었으나, 추가된 석재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게 되었다. 기술자들이 해결방안을 찾으려고 몇 번씩 공사를 중단했으나 결국 14세기에 맨 꼭대기층이 기울어진 채 완성되었다. 근대에 들어서 기초에 액상 시멘트를 주입해 보강했음에도 20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붕괴의 위험이 있어 사탑을 구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이 구상되고 있다.

 

 

파로스 섬의 등대 [─ 燈臺, Pharos of Alexandria]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가장 유명한 고대의 등대로 기술적인 위업이며 이후 세워진 모든 등대의 원형이다. BC 280년경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토스가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2세를 위해 알렉산드리아 항 안에 있는 파로스 섬에 세웠고 높이가 135m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등대는 3단식으로 맨 아래층은 4각형, 중간층은 8각형, 꼭대기층은 원통형이며 모두 약간 안쪽으로 쏠리게 지어졌다. 폭이 넓은 나선형 경사로가 옥탑으로 이어져 있었으며 옥탑에서 밤에 불을 밝혔다.

 

이 등대 위에는 거대한 조상(彫像)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를 태양신 헬리오스의 형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등대는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불가사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최초의 목록은 그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꼽고 있음). 중세 아랍인들은 꼭대기 등대를 작은 모스크로 바꾸었다. 이 등대는 12세기 이후에 무너졌으며 1477년경 맘루크 술탄 카이트 베이는 그 잔해를 이용해 요새를 지었다.

 

 

기자의 피라미드 [Pyramids of Giza]

 

이집트의 알지자(기자) 근처 나일 강 서안(西岸)의 바위고원에 세워진 제4왕조(BC 2575~2565경) 3개의 피라미드로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

 

대(大)피라미드라고도 하며, 밑변 평균길이 230.4m, 원래 높이 147m이다.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8명의 왕 중 4번째 왕 카프레(그리스어로 케프렌)가 세웠고 각 밑변길이 216m, 원래 높이 143m이다.

 

남쪽 끝에 있는 마지막으로 세워진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6번째 왕 멘카우레(그리스어로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로 밑변길이 109m, 완공 때 높이 66m였다. 3개의 피라미드는 내부·외부가 모두 고대에 이미 도굴당해 시체안치실에 있던 껴묻거리[副葬品] 대부분이 사라졌다. 무른 흰색 석회석의 외벽도 거의 모두 벗겨져버렸기 때문에 피라미드들의 높이가 원래보다 낮아져 대피라미드도 지금은 138m 높이에 불과하다. 가운데 있는 카프레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삽도(揷圖)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도 석회석 외벽이 남아 있다.

 

이중 가장 북쪽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그리스어로는 케오프스)가 세웠다.

쿠푸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단일 건축물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옆면 경사가 51°52'이며 밑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대피라미드의 중심부는 황색 석회암 벽돌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거의 없어진 바깥벽과 내부통로는 그보다 고운 입자의 옅은 색조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시체안치실은 커다란 화강암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에는 1개당 평균 2.5t 무게의 돌 230만 개가 사용되었다.

 

쿠푸는 다른 두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정교함이나 공법에서 탁월한 걸작품이다. 특히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용된 돌덩어리들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할 때 설계의 기하학적 정밀성이나 돌을 깎은 정확도는 감탄할 만하다. 아직 제자리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외벽 돌들은 무게가 16t까지 나가는 것도 있지만 이 외벽 돌은 물론 내벽까지도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 어느 곳의 석조건축보다도 더 정교하게 연접되어 있다. 대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 측면, 지상 약 18m 위에 있다. 입구에서 비탈져 내려가는 복도는 피라미드 내부를 경사지게 내려가 피라미드가 서 있는 돌이 많이 섞인 표토층을 지나 완성되지 않은 지하실에서 끝난다.

 

이 하강 복도는 올라가는 복도로 연결되는데, 이를 따라가면 여왕의 방으로 알려진 방과 46m 길이의 커다란 경사진 회랑(回廊)이 나온다. 이 회랑의 윗부분에는 흔히 왕의 방으로 불리는, 시체안치실로 통하는 길고 좁은 통로가 있다. 왕의 방 내부 벽과 천장은 모두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방에서 2개의 좁은 구멍이 내부를 비스듬하게 통과해 외부로 나 있는데, 이것이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인지 통풍을 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왕의 방 위쪽에는 거대한 화강암 석판이 수평으로 배치된 5칸의 방이 있는데, 석판을 설치한 목적은 시체안치실 천장에 놓인 석재 덩어리들이 누르는 엄청난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피라미드를 세운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한 해답이 없으나 당시 이집트인들은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는 고패와 도르래가 없었으므로 벽돌·흙·모래로 제방을 쌓고 그 제방 위로 썰매·굴림대·지렛대를 이용하여 돌을 끌어올린 듯하다. 제방은 피라미드가 만들어지면서 점점 높고 길어졌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으며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나일의 홍수로 들에서 할 일이 없을 때 피라미드 공사를 진행한 듯하다.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와 이에 딸린 장제전(葬祭殿)과 장제전에서 나일 강 가까운 계곡에 있는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헤테페레스 여왕의 장비(葬備)를 담고 있는 구덩무덤이 발견되었다. 돌이 들어찬 깊은 구덩의 밑바닥에는 여왕의 빈 돌널[石棺]이 제4왕조 장인(匠人)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는 가구와 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3개의 피라미드 둘레에는 왕들의 친척이나 대신(大臣)들의 장지(葬地)로 사용된 '

대피라미드의 남쪽 카프레 계곡 사원 부근에는 대(大)스핑크스가 있다 (→ 스핑크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이 스핑크스는 얼굴은 카프레 왕이고 몸은 누워 있는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길이는 약 73m, 높이는 20m에 달한다(→ 스핑크스).

 

1925년 쿠푸의 둑길 상단 가까이에서 쿠푸의 어머니 헤테페레스 여왕의 장비(葬備)를 담고 있는 구덩무덤이 발견되었다.

 

 

돌이 들어찬 깊은 구덩의 밑바닥에는 여왕의 빈 돌널[石棺]이 제4왕조 장인(匠人)

 

 

 

들의 탁월한 예술성과 완벽한 기술을 보여주는 가구와 보석들에 둘러싸여 있다. 3

 

 

 

개의 피라미드 둘레에는 왕들의 친척이나 대신(大臣)들의 장지(葬地)로 사용된 '

 

 

 

스타바'로 불리는, 꼭대기가 평평한 장례용 구조물의 큰 분포지가 있다. 기자에는

 

 

 

격자모형으로 늘어서 있는 제4왕조의 중심적 마스타바를 비롯한 많은 마스타바가

 

 

 

발견되었는데, 이중 몇 개는 제3왕조(BC 2650~2575경)의 것이고, 나머지는 제5~6

 

 

 

왕조(BC 2465~2150경)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