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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방문기

by 연송 김환수 2008. 8. 15.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방문기>  

 

일부 이미지 미 현시로 원문이미지에 가깝게 복원하였습니다.

 

(2008. 3. 25. 항용(제) 소개 )

 

1. 일시 : 2008. 3. 19(수).

             16:30--21:30 .    

                방문자 : 김항용

2. 장소 : 서울시 서대문구 중림동 

              313-6050

3. 교통편 :  지하철 2호선, 6호선

                 <충정로역>

                  5번 출구.--중림파출소,

                  카톨릭 출판사 방향 약 200m.

                 카톨릭 출판사 아래로 약 30m

                 다음의 4층 건물(1층에 쭈꾸미 집) 지하

4. 만남자

  1)金龍石(77세) : 연구실장. 상주 근무자. 경주김씨 영분공파 문선공 종중.

                          반포 거주. 충북에서 초등교 교사 시작. 경기도에서 정년

                          퇴임. 1992년 초기부터 활동.

  2)金應俊(66세) : 92년 초기부터 활동. 건물 소유주. 1층 음식점 경영.

                          본 연구소 무료 임대하고 계심

 

 <도로에서 본 건물>

 

 

   <건물 입구>

 

 

  <지하 사무실 입구의 안내판>

 

 

<건물 소유주이시며 계보연구회 초창기 창립 멤버이신 김응준님, 사무실을

 무료 임대하고 계시다>

 

 <김용석 연구실장님, 계보연구회 상임위원>

 

최근 근황 사진 추가

 

 <사무실 안에서 대담 도중 펼친 자료들>

 

 <장서들>

 

 <장서들>

=======

  <역대 회장, 각종 임명장, 상패 및 감사장들>

 

 평일이지만 직장의 여유가 생겼다. 우리 문중의 선계문제에 대한 의문점으로 늘 개운하지 못하던 차에 이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를 해 오고 있는 <경주김씨 계보연구회>를 찾기로 했다.

 

 미리 전화를 드렸다. 그리고 지하철 <충정로역> 5번 출구에서 나와 가톨릭출판사 가는 길을 따라 약 200m를 간 뒤 가톨릭출판사 아래로 30m를 가니 좌측으로 5층건물 위에 <경주김씨 계보연구회>간판이 보인다. 건물 1층은 <쭈꾸미집>이다. 건물 지하로 가니 작은 표찰이 문에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책들이 전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김용석연구실장님과 김응준님의 환대를 받고 우선 그동안 <연구회>의 연혁과 연구 성과의 말씀을 설명 들었다. 놀라웠다. 1992년부터 연구해 온 이 분들의 노력이 얼마나 위대했던가를 깨닫고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이 연구회는 선계 계보를 바로 잡자는 뜻을 가진 10인의 동지들로 구성되어 수많은 족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족보마다 혼란스럽게 기록되어 있거나 추상적 상태에 있는 선계 계보에 대한 연구를 확증적인 자료 검증을 통해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또 놀라운 것은 경주김씨 대종회로부터 어떤 경제적, 심적 지원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요, 오히려 그동안 오해와 불신 속에서 배척, 시기, 욕설, 때론 소송까지 받아온 단체라는 것이었다.

 

  2002년에는 사단법인으로 등록하여 확실한 연구회로 자리 잡았고, 드디어  2007년에는 부안김씨로부터 제소를 받은 뒤 대법원으로부터 경순왕의 장손 문중은 경주김씨 대장군공파라는 것을 승소 판정받는 쾌거를 이루어 냈으며, 그 외 수많은 경주김씨의 선계 계보를 상당 부분 바로 잡아 놓았고, 우리 안동김씨와 관련해서는 대안군(殷說)의 차자인 淑(叔承) 아래로 <원강(元康)-문웅(文雄)>이 더 있고 난 뒤 일긍(日兢)으로 가계가 이어진다는 놀라운 논거를 찾아내어 정리하여 밝혀 놓았던 것이다.

 

 나는 먼저 평장사공(휘 숙승)에 대한 자료를 여쭤 보았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평장사공 휘 숙승에 대하여>

 1.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행장을 정리해 놓음

   1)인명사전의 강감찬 장군 란 참조

   2)계림지

   3)인명대사전

2. <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 1992년. 124P의 金叔興은 金叔承임

3. <한국사연표>(역임사, 1991, 이만열저) 등에 金淑興이 나타난다.

4. 1011년에 거란이 침입해 오자 구주에서 거란군 1만 여 명의 격멸시켰으며 그 해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대군에게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5. 숙승(叔承)은 <淑, 淑承, 叔興>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6. <고려사, 고려사 절요>에는 叔興으로 기록 되어 있다.


 숙흥(淑興)이란 이름을 찾아보니 많은 자료가 나왔고 그동안 안개 속에 있었던 공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흥분되었다.

 그 대략적 자료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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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한국학에서>(http://koreandb.empas.com/)

 김숙흥(金叔興)  ?∼1011(현종 2). 고려의 무장(武將).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이 친히 40만대군으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갈 때, 구주(龜州)의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병을 쳐서 1만여명을 베고, 이어 거란의 선봉을 애전(艾田:지금의 의주)지방에서 격파하여 1천여명을 베었으나, 갑자기 거란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당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였던 양규(楊規)와 함께 전사했다.

그 공으로 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이씨에게는 한평생 해마다 조 50석을 상으로 주었다.

1019년 공신녹권(功臣錄券)이 내려졌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에 녹권되었다.

또한, 문종이 즉위하자 그 공을 추념하고 표창하여 장려하기 위해 그 형상을 공신각(功臣閣)에 도형(圖形)하도록 하였다.


高麗史, 高麗史節要. 〈河炫綱〉

 

 

  *<경주김씨 계보 연구회 연구자료>에서

<金公淑承將軍(龜州別將) 行狀>

 김공(金公) 숙승장군(淑承將軍)은 955年(?) 대안군(大安君, 母는 文英 崔彦撝의 女)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이때 고려 조정의 제 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은 지방 호족(豪族)의 세력을 억제하고 나라의 기강과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북방 방어에 힘썼으며, 특히 광종은 황해도 중요 방어 기점을 비롯하여 압록강 하류인 평안도 삭주(朔州), 구주(龜州), 태천(泰川), 정주(定州), 선천(宣川), 박천(博川), 철주(鐵州) 등에 축성(築城)을 견고(堅固)히 하였고 압록강 북쪽에서 출몰하는 거란족과 항상 대치하였다.

 975년에는 광종이 승하(昇遐)하고 제 5대 경종(景宗)이 즉위하였다. 이때 김부대왕(金傅大王-敬順大王)은 따님을 경종(景宗)에게 납비(納妃-獻肅王后)하였으며, 대왕에게는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으로 삼고 식읍(食邑) 일만호를 더하였다.

 장군께서 일찍이 24세에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출사(出仕), 축성(築城) 등 토목공사(土木工事) 실무(實務)에 임(臨)하고, 이 방면에 역량(力量)을 발휘하였다. 경종(景宗) 3년 978년 무인(戊寅) 4월 4일, 조부(祖父) 경순대왕(敬順大王)은 유화궁(柳花宮)에서 서거(逝去)하시니 향수(享壽) 97이시었다. 이듬해 979년 경종 4년에는 시세(時歲) 등 발해(渤海) 유민(遺民) 2만여명이 투항(投降)했을 때 북방(北方) 종군(從軍)에 나섰다. 

 982년에는 왕건 태조의 원당(願堂)인 봉은사(奉恩寺)에서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대안군(大安君)과 셋째 아들 염(濂)의 자(子)인 심언(審言)과 함께 회록(回祿)과 절일(節日)에 제(祭)를 올렸다. 이때(983년) 강감찬(姜邯贊)이 문과(文科) 장원(壯元)하고, 989년은 병마사제도(兵馬使制度)가 처음 시행되었다.

 993년 거란 장수 소손령(簫遜寧)이 침입하자 중군사(中軍使) 서희(徐熙)는 적진에 들어가 화약(和約)을 이끌어 냈다. 994년 구주성(龜州城)을 견고히 증축하였다. 996년에 처음으로 주철(鑄鐵)을 만들어 유통(流通)하였다.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승진(昇進)하였으며, 998년 이후인 7대 목종(穆宗) 재위중에 평장사(平章事)릉 역임하였다.

 구주별장(龜州別將)으로 재직 중 1010년 고려 현종(顯宗) 1년 거란의 성종(聖宗)이 목종(穆宗) 시해(弑害)를 문죄(問罪)한다는 구실로 내침(來侵)하여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를 잡아 죽였다. 거란군이 회군(回軍)할 때 구주성(龜州城) 길목에서 숙승장군(淑承將軍)은 거란군 1만여명을 목 베었다.

 1010년 8대 현종(顯宗) 10년, 공신(功臣)에 녹권(錄券) 되고 1011년 신해(辛亥) 현종(顯宗) 2년, 세천(世阡)하셨다. 뒤에 삼한벽상공신(삼한벽상공신)의 호를 받고 장군으로 추증(追贈)되시었다. 

   *상기 행장 자료 구성 기초 자료

 1) 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간. 1992년)-강감찬란, 김숙흥란

 2) 계림지(사단법인 경주김씨 계보회. 200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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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인 평장사공 이후의 계를 <원강(元康)-문웅(文雄)>으로 보는 것에 대한 논거를 떨리는 심정으로 부탁했다. 그 자료는 다음과 같았다.

 

안동김씨(구안동) 인터넷 홈패이지 관지자 김항용씨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방문기 중에서

다음으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인 평장사공 이후의 계를 <원강(元康)-문웅(文雄)>으로 보는 것에 대한 논거를 떨리는 심정으로 부탁했다. 그 자료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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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姓淵源譜> (1차-1642년간, 2차-1934년간. 46-48P)

 

<표지>

 

 

<47p>

 

<48p>

 

 

 

 

<59p>

 

<맨 뒷면>

 

 

 

 <앞의 별지로 붙은 영인판>

<맨 뒤에 붙은 영인본 발문>

 

<신라삼성연원보 해설 요약>

가. 발견 : 1995년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는 경주인 김태원님(계보 연구회원)이 여러 문헌 자료들을 모아 이곳에 복사하여 갖다 줌으로써 최초발견

나. 발간장소 : 평안북도 광성면 풍하동

다. 발간처 : 新羅朴昔金淵源譜 宗約院

라. 기록 내용

1) 역대 신라 제왕과 박,석,김 삼성의 연원과 그 계보를 적음

2) 안동김씨의 계보 중 경순왕--방경까지의 계보를 밝힘(11세손)

敬順王-殷說-淑-元姜-文雄-日兢-利請-義和-敏成-孝印-方慶

3)淑 : 一諱淑承 一作淑永 官工部侍郞 公下二男 系平安北道 龍川郡 龍川面 栢山洞 習敦系 全羅南道 長興郡府 西南 松岩里 金永贊家譜 準記載

(일명 淑承, 일명 淑永, 벼슬은 공부시랑이며 공 아래로 두 아들이 있다. 후손들은 평안남도 용천군 용천면 백산동에 있다. 습돈의 후손인 전라남도 장흥군 서남쪽 송암리에 있는 김영찬 소장 족보를 전재하였다)

4)元姜 : 官禮部侍郞 慶南 全北 譜實

5)文雄 : 官判禮賓寺事

6)日兢 : 官至太師大匡

7)利請 : 官安東太守 居安東知禮村

8)義華 : 衛尉寺主簿 一云禮部侍郞

9)敏成 : 官翰林直學士 墓安東府 西林村. 生五男孝恭 孝印 孝(실사+侯) 孝(실사+爰) 孝(실사+且)

10)孝印 : 文科 兵部尙書 翰林學士 知制誥 追封中書令 善隸字


2. <경주김씨 갑인보>

가. 경주김씨족보(1934년. 경주김씨 雲岩公派譜所 간. 56p)

나. 1914년부터 편집시작. 경주김씨 좌랑공파(추사선생 집안) 족보

다. 기록내용 : 상동

殷說-淑-元康(官禮都侍郞)-文雄(官判禮賓寺事)-日兢

 

<갑인보 표지>

 

 <갑인보 내부-56p)

 <갑인보 내부-맨 뒷면>

 

3. <경주김씨 함흥보>

가. 서명 : <경주김씨 대종보>(卷之九. 兵判公派. 1931년 함흥 발간. 5P)

나. 기록내용 : 상동

<함흥보-표지>

 

<함흥보 내부-5p>

 

 

4. 연안김씨세보(全) (연안김씨대종회. 1940년간. 9-10P )

가. 기록 내용 : 상동  

 <연안김씨족보-내부 9p>

<연안김씨 족보-내부10p>

 

이어 김응준님께서 삼성연원보에 대한 추가 설명을 해 주셨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소화9년(1934년) 발간한 것으로 기록됨. 총독부 도장이 찍힘.

2. 족보의 나이는 서문 기록 내용이 중요

가. 兎山人 李承學이란 사람이 1642년(임신년)에 기술한 서문 내용을 보면 1632년에 종거(鍾鐻-경주인. 초명 景大. 1580년생)가 53세에 삼성연원보를 시작한 것으로 나옴.

나. 서문 기록 연도는 1642년이므로 10년간에 걸쳐 이 작업을 한 것임. 이때는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는 등 매우 국가적으로 위태로운 시기였는데 이 어려운 분위기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이 족보를 만든 것임.

3. 현재의 삼성보는 1934년에 1642년의 목판본 삼성보를 그대로 금속 활자 인쇄한 것으로 봄.

4. 지난 1996년에 삼성보의 <元姜-文雄>기록 위에 있는 근거 문헌 족보 소유자인 전남 장흥의 김영찬 후손 집을 찾아 전화로 문의함

*김영찬은 아들이 없이 딸만 3(?)을 두고 사망. 큰 딸을 찾으니 장흥 인근에서 노점 상을 하고 있었음. 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10세 쯤에 구 족보를 집안의 어른이 가져 갔다고 함. 딸의 숙부를 찾아 문의하니 장조카가 가져 갔다고 함. 장조카는 숙부가 가져갔다고 서로 미룸. 김영찬의 양아들은 제주에 살고 있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상속 받은 것이 없다고 함.

*김영찬 소장 족보를 찾는 것은 어렵다고 봄

5. 삼성보의 중요적 가치

가. 새로운 선계에 대한 내용은 그 근거 자료명을 기록함

나. 1642년에 발간한 족보에 실린 인물들이 고려말까지만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연원보적 목적으로만 제작한 것이라는 점. 즉 어떤 문중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족보 제작이 아니라 순수 학술적, 순수 계보 연구와 자료 보관의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점

다. 일부 내용이 삼국사기와 같으며 일반 족보와는 다른 설득력있는 계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 등이 높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

예) <구족보>

민공-실홍-효종-경순왕


<삼성보>, <삼국사기>

민공-실홍-억렴-유렴-

인경-효종-경순왕-


<정문연의 김창경 교수에게 질의-경순왕 전비 기록내용>

민공-실홍-억렴-유렴-

인경-효종-경순왕-


라. 대구김씨가 경순왕의 4자로 석씨할머니 자인 英자 후손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 대구김씨와 경주김씨 족보에도 없는 英자의 17대 후손까지 이곳에 기술되어 있는 등 설득력 있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

마. 부안김씨가 대안군(은열)의 15대손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기술. 경주김씨 족보와 부안김씨 족보에는 나와 있지 않는 귀중한 상계의 계보 내용을 유일하게 적고 있음. 이는 2007년 부안김씨측에서 경주김씨 대장군공파에 소송을 하여 자신들이 마의태자의 장남 집안이라고 우기던 것이 대법원에서 대장군공측의 승소 판결로 끝난 결정적 자료 임.

바. 삼성보는 선계 계보에 대해 그동안 미상이었던 선조들의 휘와 계보를 정확히 밝혀 놓은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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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30분부터 시작된 대화는 자리를 1층 식당(김응준님 운영)으로 옮겨 밤 9시 30분까지 이어 졌다. 아무런 지원도 없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정신적 심적 지원도 없이, 오히려 주변의 시기와 모함과 욕설 등을 들어가면서까지 묵묵히 16년간을 오직 선계의 계보 연구에만 몰두해 온 이 분들의 노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지고 감동이 밀려 왔다. 연 2회 정도에 걸친 정기 간행물 <계보연구>도 발간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너무도 알찼다. 특히 충렬공의 아우님이신 <玄慶>의 손 <永奎>를 시조로 모시는 수성최씨 문중의 한 분이신 省菴 崔重哲님은 이 <계보연구>(2007년 추 동계호. 제 14권, 3, 4호. 2007. 12. 20. 경주김씨 계보 연구회 간) 간행물 속에 <隋城崔氏씨 상계 정립에 관한 尋究>라는 제목의 논문(28-35p)을 발표하고 계셨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경순왕 이후 충렬공 사이의 선계문제에 대한 글이었다. 최중철님은 상기의 <삼성 연원보> 등을 참고로 하여 선계 계대를 <殷說-淑-元康(官禮都侍郞)-文雄(官判禮賓寺事)-日兢>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서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또 연구소에서는 <계림지>를 발간하여 신라김씨 전체에 대한 모든 선계의 흐름을 정리 발표하고 있었다. 놀랍고 감사했다.

김용석연구실장님과 고속터미널에서 헤어지는 순간까지 금쪽같은 님의 말씀을 들었다. 님께선 “남은 문제는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신라김씨 내 각 성씨 문중회에 어떻게 전달할 것이며, 또 그 분들은 또 어떻게 받아들일까”라고 하시며 변화를 싫어하는 문중회의 습관적 의식구조 문제를 걱정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에 오늘 달빛은 참 밝았다.

 

연안김씨세보(全)(연안김씨대종회. 1940년간. 9-10P )
가. 기록 내용 : 상동 (殷說-淑-元姜(강자가 앞의 康과 다름, 官禮都侍郞)-文雄(官判禮賓寺事)-日兢

김희식
전주김씨 시조되시는분이 김태서인데 이분이 경순왕의 10세손입니다.
두분의 선조님이 새로이 등장하면 우리 중시조님의 아버지(상서공)와 같은 10세손입니다.
전주김씨 시조의 사망년도가 1257년이고 상서공께서는 1253년에 사망하셨습니다.
우리족보에는 2-3분이 누락되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발견입니다.
참고로 김은열께서 937년에 태어나시고 김방경께서 1212년에 태어나셨습니다.
한세대가 30년이면 분명히 2분에서 3분이 누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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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안동김씨들의 말

 

참고 :

<경주김씨 대종보>(卷之九. 兵判公派. 1931년 함흥 발간. 5P) [경주김씨함흥보]

 

 경주김씨족보(1934년. 경주김씨 雲岩公派譜所 간. 56p)

 1914년부터 편집시작. 경주김씨 좌랑공파(추사선생 집안) 족보

 

기록내용 : 상동[殷說-淑-元康(官禮都侍郞)-文雄(官判禮賓寺事)-日兢

 

 

  붙임 첨부파일 : 계보연구 소개 참고로 보세요    

 

2007 추,동계 합본 계보연구 :

사단법인 경주김씨 계보연구회 계보도 ====>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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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는 연안김씨 대종회 보학연구실 자료를 갖고 왔습니다.

 

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에 대한 소견

延安金氏大宗會 副會長 金思均
(존칭 생략)

옛 문헌에 기록하기를“문벌을 말할 때는 으레 延金을 들추었다”고 하였으니 연안김씨는 오래전부터 국중화족이요 숭문사족으로서 도도히 살아온 문벌씨족이다.
연안김씨는 고려 명종조(재위1170~1197) 국자감 사문박사 暹漢을 시조로 한다. 일반적으로 씨족의 상계는 족보를 통하여 알지만, 연안김씨는 족보 외에 상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 있으니 이것이 곧 1514년(중종9) 초주갑인자본으로 간행된『顔樂堂集』이다.
안락당집은 11世 安老(1481성종12)~1537(중종32)‧중종조 좌의정)가 1513년(중종8)에 先考(號,顔樂堂, 諱,訢 1448(세종30)~1492(성종23)‧성종조 공조참의)의 문집을 정리하여 다음해에 간행한 문집이다. 4권 2책으로 되어 있는데 1‧2권은 선고의 문집이고, 3권은 안로 직계의 상세계 족보와 비문이고, 4권은 유행‧묘지명‧발문이 있고, 마지막에 이 족보(上世系)를 만든 연유와 참고문헌을 적었다. 이 문집 3권 첫머리에 연안김씨 상세계가 상당한 분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516년(중종11)에 영천군수 권오기가 이 문집의 번각본을 간행하였다. 현재 대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천간 목판본『顔樂堂集』(奉正大夫行郡守權五紀皇朝正德丙子孟秋榮川郡開刊)은 번각본 4권2책중 3권의 복사본이다. 번각본은 모두 4권2책 156판인데 현재 서문과 1권부터 2권의 36판까지는 서강대학교도서관에, 2권의 37판부터 끝까지는 충남대학교도서관에, 3권과 4권 및 발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1514년간 초주갑인자본은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러니 연안김씨의 상계는 족보를 통하여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안락당집을 통하여 더욱 확실하다고 하겠다. 그러기 때문에 안락당집은 연안김씨에 있어서는 근본문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시조 暹漢의 先世系 기록이 없다. 다만 안락당집 3권 世系말미에 “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由博士公以上世遠無籍不可考”라 하였으니 박사공 이상은 세대가 너무 멀고 상고할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득관 이래 9백년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근간에 와서 몇몇 후손이 시조의 선세계를 찾아야겠다는 숭조일념으로, 고서를 뒤지고 여러 족보를 두루 섭렵하면서 족보 尋究의 열정을 보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만시지탄이 있으나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현황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갈래로 계대를 찾고 있다. 하나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3자 文汪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신무왕의 2자 英光의 계통이다.

系譜硏究(사단법인 경주김씨계보연구회간) 2007년 추‧동계 합본 p36에“延安金氏四門博士 暹漢의 上系文獻에 대한 尋究”(始祖四門博士諱暹漢 30世孫 曉覺 金東熙)라는 글이 실렸기에 그에 대한 나의 소견을 피력한다.

p36“尋究 및 硏究課程”

“1)”항에 대하여
己亥譜(1719년간) 범례에“高麗明宗時始祖博士公以直諫謫 延安仍籍焉”이라고 기록한 것은 顔樂堂集을 보지 아니한 임의적 기록으로 그 근거를 찾을 수가 없고, 후손들이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또 乙酉譜(1765년간) 편저자인 載久(19世 연안부사)도 乙酉譜 序文에서“舊譜謂博士公以直諫謫延安仍籍焉不知何所據也”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顔樂堂集에는“國子博士諱暹漢是其後孫”이라 했을 뿐이니 즉 시염성으로 귀양을 간 분의 먼 후손이 暹漢이라 하였다.

“2)”항에 대하여
新羅三姓淵源譜(1934년),(初木刊本(1642년)金景大刊行) p20 同源金氏分貫錄中 延安金氏는 내용에 허위가 너무 많아 수용이 불가능하다.
①“殷說公十四世孫暹後一云暹漢后”는 殷說의 後孫이 아닌 것이 판명되었고,
②“高麗明宗朝四門博士入大明登科”는 暹漢은 명나라에 가서 제과에 급제한 사실이 없다. 暹漢의 5代孫 濤가 洪武4년(1371년 공민왕20년) 明나라 制科에 120명중 25등으로 급제하여 東昌府丘縣丞의 벼슬까지 받았다. 이 사실은 高麗史列傳. 東史會綱 洪武4年會試記(魏禧-永淑大明人), 연안김씨 세사(1) 등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高麗明宗시기는 중국에서는 宋나라 시대다.
③“新羅王子英光後暹漢”이라는 기록은 확인할 수 없는 기록이다. 英光에서 暹漢까지의 系代 說明이 없고, p45 英光의 아래에 아무런 系代記錄이 없다.


 

 


④“兄弟以直諫忤主旨謫遠地”는 暹漢의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라시대 어느 때에 왕에게 직간을 하였다가 귀양을 간 그 형제를 말하는 것이다. 형제중 아우가 시염성으로 귀양을 와서 살았고, 그 분의 먼 후손이 暹漢이다.
⑤“銑文判書孝獻公后”: 銑은 20世 內資寺尹公派 宗人으로 1750년(영조26)에 나서 1837년(헌종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刑曹判書(1829.순조29)를 지냈다. 이 기사가 본문에 실렸으니 同源金氏分貫錄의 延安金氏는 1870년에 간행된 延安金氏 庚午譜가 결정적으로 참고 되었을 것이다. 銑은 1642(신라삼성연원보)에는 출생하지도 않았는데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만저만한 넌센스가 아니다. 그러니 본항( 신라삼성연원보에 기록된 연안김씨)은 객관성과 신뢰성이 결여된 신용할 수 없는 기록이다. 아마도 후대사람이 신라삼성연원보를 재간행하면서 다른 문헌의 내용을 합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항에 대하여
周元의弟 奈興..顔樂堂集에는“兄居北濱京 弟居豉鹽城 ”이 라고만 했지 北濱京으로 간 사람이 周元이고, 豉鹽城으로 간 사람이 奈興이라는 기록은 일언반구도 없다. 다만, 후대 사람이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顔樂堂集 文獻은 考證資料로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은 시기상조이다.

“4)”항에 대하여
東國金氏文獻錄(1868년 戊辰)중 “延安金氏先祖暹漢新羅王子后也 高麗明宗朝四門博士入大明登第”기록은 신라삼성연원보 p20 同源金氏分貫錄 延安金氏와 동일하다. 내용에 허위가 있고, 1870년에 간행한 연안김씨 庚午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5)”항에 대하여
後孫 裕簡知門下省事一派는 金海金氏가 아니고 延安金氏 로 밝혀졌기 때문에 재론할 이유가 없다.

“6)”항에 대하여
萬姓大同譜에는 暹漢의 上系는 없다.

“7)”항에 대하여
暹漢은 분명히 고려시대 사람이다.
신라시대 어느 때에 시염성(지금의 연안)으로 귀양을 간 분 의 후손이다. 그러니“新羅時有王子兄弟”의 형제는 暹漢의 형제가 아니고, 시염성에 처음 귀양 온 분의 형제를 말한다.

“8)”항에 대하여
“※특히 二子英光을 延安金氏라 한 것은 顔樂堂遺集 新羅 三姓淵源譜에 英光后孫云云에 따라 附記한 것임을 밝힙니 다”에서
① 顔樂堂集(顔樂堂遺集은 존재하지 않음)에는 英光의 後孫 이라는 기록이 없고, 1940년에 간행된 工部典書公派譜(첫 머리에 英光後孫이라 기록)와 顔樂堂集을 혼동하고 있다.
② 新羅三姓淵源譜(p45)에는 英光의 後孫기록이 없고, p20 同源金氏分貫錄 延安金氏는 내용에 허위가 많을 뿐 아니라 英光後孫의 계대기록이 없다. 1870년에 간행된 庚午譜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후대의 어느 분이 합철한 것이다.

“尋究綜合 暫定結論”에 대하여

“『顔樂堂』遺集에〔暹漢은 新羅王子 英光의 後孫〕”에 『顔樂堂』遺集은 공식적으로 “顔樂堂集”이고 “英光後 孫”云云은 工部典書公派譜(1940년간) 첫머리에 있는 기록으로 顔樂堂集과는 관계가 없다.
“※暫定延安金氏系代”표를 보면 新羅三姓淵源譜에 기록된 英光의 後孫系代가 하나도 없는데 어느 文獻을 根據로 하여 이 계대가 나왔는지 궁금하고, 마치 死後養子入系하는 것 같은 짜맞추기식 계대라고 생각되며 판단의 횡포가 될 수 있다.
끝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검정도 확인도 안된 고문서의 한 줄 기록에 현혹되어 씨족사의 근본을 흔드는 우를 범하지 말고, 자기 조상이 쓴 기록에도 족보심구의 열정을 경주 했으면 좋겠다. 팔은 언제나 안으로 굽는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文汪 系統의 尋究

1. 顔樂堂集(1514년간) 世系에는“兄居北濱京弟居豉鹽城”이라고만 하였을 뿐 북빈경에 간 사람이나, 시염성으로 간 사람이 누구라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 그런데 乙酉譜(1765년 간)부터 괄호를 사용하여 “北濱京(今江陵府) 豉鹽城(今延安府)라고 주석을 달았고, 또 1961년 통영에 건수한 始祖高麗國子監四門博士祭壇神道碑文에는 ”兄은 北濱京으로 귀양을 가서 江陵金氏의 시조가 되고, 아우는 시염성으로 귀양을 가니 곧 연안김씨의 원조가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모두 원문을 제대로 전수하지 못하고 후대 사람들 이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덧붙인 결과이다.

2. 興基(24世 내자시윤공파덕산종중, 1857年生. 1934年卒. 進士,양양부사)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1901년(辛丑)에 간행한 연안김씨의민공파보 하권의 말미에 다음의 기록물을 첨부하였다.
<표1>
1閼智→2勢漢→3阿道→4首留→5郁甫→6仇道→7味鄒王→8奈勿王→9卜好→10習寶→11智證王→12立宗→13眞興王→14眞智王→15龍春→16武烈王→17文汪→18大忠→19思仁→20惟靖→21奈興→22慶徵→23榮→24宗儒→25崇一→26康義→27景暎→28頊成→29承興→30獻→31支柱→32珥佰→33陟→34直輝→35用度→36忠霖→37渥→38舜孫→39暹漢

3. 내자시윤공파 괴산종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延安金氏史略」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표2>
1閼智→(생략)→20惟靖→21奈興→22慶徵→23諱榮→24宗儒→25崇一→26康義→27景暎→28頊成→29承興→30巘→31支柱→32珥佰→33陟→34直輝→35用度→36忠霖→37渥→38舜孫→39暹漢

4. 두 기록물은 23대 榮과 諱榮, 30대 獻과 巘이 다를 뿐 내용이 동일하다.

5. <표1>과 <표2>는 1代 閼智로부터 38代舜孫까지는 新羅三姓淵源譜(昭和9년간, 저작겸발행인 金景大) p41(후면) p43(전면·후면) p45(후면) p48(후면)의 내용과 일치한다. 다만, 32代 단(삼성연원보)과 珥佰(표1과2)이 차이날 뿐이다.

6. <표1>과 <표2>는 어떤 문헌에 근거하여 39대에 暹漢을 기록하였는지 그 사유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7. 대수를 따져보면 奈興 21代 暹漢 39代로 대수에 현격한 차이를 보여 문제가 되는 것 같으나, 신라삼성연원보 p48(후면) 仁揆의 사위가 仁川李之彦이니 이는 李資謙의 4子이다. 之彦은 38代 舜孫(暹漢의父)과 동시대가 되니 39代 暹漢의 연대는 1130~1140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표3>
삼성연원보 仁揆 女李之彦
仁川李氏 李資謙 李之彦
표1˙2 渥 舜孫 暹漢
※ 李資謙의 연대 : 1060~1126

8. 결론하여 말하면 현 상황으로서는 文汪의 계열이다 英光 의 계열이다 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오늘의 오류가 내일의 正史가 되는 愚를 범하게 된다. 좀더 시간을 두고서 객관성이 보장되고 많은 사람이 납득하는 확실한 문헌이 제시될 때 비로소 가부를 논해야 한다.

文汪 계통으로의 심구핵심은 暹漢이 어떻게 하여 39代가 되었는가 하는 근거를 찾는데에 있다. 또 英光 계통으로도 계속 尋究하여 公認되는 系代가 제시된다면 중론을 집약할 만하다. 그러니 우리는 양 계통을 계속 심구할 필요를 느낀다.
더는 늦출 수 없는 우리 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므로 모두는 사명감을 갖고 헌신진력해야 할 것으로 안다.

※ 오기 지적
1. 東熙 는 연안김씨개성부윤공파 정주종중 서남문중으로 30世이고, 시조 暹漢의 29世孫이다.
2. 系譜硏究 p36左
본문2행'顔樂堂遺集'은 공식으로 '顔樂堂集'이다.
3. p36 左
본문2행'15世孫 安老'는 '10世孫 安老'이다.
4. p36 左
본문26행'朝鮮肅宗49'는 '朝鮮肅宗45'이다.
5. p37 右
본문14행'顔樂堂遺集'은 1940년에 간행된 '공부전서공파보'를 착각한 것 같다.


계보연구 소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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