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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

청산면 장위리(장사래)

by 연송 김환수 2008. 8. 10.

충북 옥천군내 마을 단위 쌀 생산량 최고

청산면 장위리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주민수는 모두 2백28명이다. 가구의 수는 86호. 면 소재지가 아닌 마을로 따지면 큰 규모이다. 통일벼가 한창 재배될 당시에는 이 마을 한군데에서만 7천2백개의 벼(40kg 기준)가 나와 웬만한 면단위 보다도 생산량이 많다고 했었다.

 

사정은 달라졌지만 흉년이 들었던 지난해만 해도 3천3백12개를 수매했던 마을에서 올해는 풍년 등의 영향으로 수매량이 4천개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미 농협 미곡처리장으로 수매한 양만도 1천9백개에 달한다.

 

장위리가 군내 최대의 쌀 생산 마을이란 사실은 경작면적으로 살펴도 가늠할 수 있다. 현재 마을에서 경작하는 논이 23만3천여평(77.7ha), 밭이 8만4천여평(28ha)에 이르는 등 논밭을 포함하면 1백5ha가 넘는다. 호당 경작면적이 우리나라 평균을 넘어서는 1.2ha에 달한다. 마을 구역의 경지정리율이 1백%에 가까운 99%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 마을의 대단위 쌀 생산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따라서 이 많은 농토를 경작하기 위한 농기계만 해도 엄청나다.

 

현재 마을에서 보유하고 있는 농기계는 콤바인이 9대, 트랙터가 15대에 이른다. 쌀농사를 짓기 위해 구입해야 하는 농기계 자금 등 부채가 이 마을 경제를 주름지게 하는 요인이다. 다른 작목에 비해 소득이 상대적으로 낮은 쌀농사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쌀농사 이외에 마을에서 소득작목으로 경작되고 있는 작목은 인삼과 담배 등이다. 현재 인삼은 10여가구, 담배는 6가구 정도다.

 

이 마을의 지명이 장위리(長位里)라고 불리기 이전에 장사래(長沙來)라고 불리웠다는 말이 전한다. 이는 장사래라는 지명에서도 느낄 수 있듯 한곡리에서 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천을 따라 모래가 깔려 있었다는 얘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이 얘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을에 위치한 농경지를 조금만 파들어가도 자갈로 이루어진 땅으로 물을 얻기가 쉽다는 것은 주민이면 누구나가 인정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예전에는 양지말, 음지말, 영싱이 등 3개로 이루어진 각각의 자연마을마다 각기 다른 성씨가 주로 모여사는 대성촌을 이루었다. 양지말에는 전주유씨가, 음지말에는 경주김씨가, 영싱이에는 밀양손씨가 주로 모여 살았다.

 

안산김씨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고는 전하나 현재는 1가구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은 경주김씨가 16호 정도로 가장 많고, 전주유씨 7∼8호, 밀양손씨 6∼7 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벼 재배시 다수확 마을로 선정된 바도 있는 마을은 결국은 그 상금을 기반으로 마을회관을 건축했다.

 

영싱이 윗쪽에는 옛날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때 양식의 큰 절터가 있다. 지금은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의 절의 규모는 출토되는 탑부재 등으로 보아 제법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주민들이 발견해 보존하던 돌부터를 어느 해인가 잃어버려 지금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영싱이라는 자연지명으로 보아 이 절의 명칭은 영신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마을에서는 장위천 석축쌓기와 아직도 포장이 되지 않은 마을 안길포장 등의 숙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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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리는 원래 청산현(靑山縣) 현내면(縣內面) 장위리(長位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한곡리(閑谷里)와 장위리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739년 기록이나 1890년 기록에 다 같이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라 하여 129호가 살았으며,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폐지 분합때 청산현이 없어지고 옥천군(沃川郡) 에 소속되면서 현내면과 동면(東面)등이 합하여 청산면이 되었고, 이때 장위리를 한곡과 장위로 나누었다.

장위리(長位里)라 부르게 된 것은 장위리에서 한곡리까지 비산비야(非山非野)가 길게 있다하여 긴장(長), 자리위(位) 자를 써서 장위리라 하였다. 그리고 영신(迎神)이 마을 뒤에는 고려때의 절터(迎神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농경지로 변해 찾아볼 수가 없다.

장위리의 자연부락으로는 음지말, 양지말, 영싱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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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靑山面 )

 

 

청산면은 원래 신라(新羅) 초에는 굴산현 (屈山縣)이었는데, 제35대 경덕왕 (景德王) 16년(757년)에 삼국을 통일한 후 기산현 (耆山縣)이라 고치고, 삼년산군 (三年山郡 : 현 보은군) 영역 (領域)으로 하였다.

고려 (高麗) 현종 (顯宗) 9년(1018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청산현 (靑山縣)으로 고치고 경상도 상주목 (尙州牧)의 직속으로 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년)에 행정구역제도가 일대 개편될 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면서 충청도의 10현(十縣)중의 하나인 청산현이 되고, 현감 (縣監)으로 종6품 (從六品)과 향교(鄕校)에서 가르치는 훈도 (訓導)로 종9품이 각각 배치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태종 14년 (1414년)에 황간현 (黃澗縣)과 폐치 분합되면서 황청현 (黃靑縣)이라 고친후 청산현감을 두고, 상주 (尙州)의 주성부곡 (酒城副曲)을 청산에 부속시케게 되었다.

1739년에 발행된 여지도서 (與地圖書)에는 청산현에 북면(北面), 동면(東面), 현내면(縣內面)과 남면(南面), 서면(西面), 주성면(酒城面) 등 6개면(面)이 있었으며, 현 청산면 관내인 북면에는 장연동리(長連洞里), 만월리(萬月里), 대사전리(大寺田里), 예곡리(藝谷里) 등 4개리 262호(戶)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1,281명이 살았고, 동면(東面)에는 가지리(加旨里), 효림리(孝林里), 인정리(仁政里) 등 3개리(里) 262호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1,281명이 살았다. 그리고 청산현의 소재지인 현내면은 백운동리(白雲洞里), 저전리(楮田里), 하동리(下洞里), 장위리(長位里) 등 4개리 479호에서 15세 이상된 사람이 2,209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 청산현이 청산군(靑山郡)으로 잠시 승격되어, 군청이 있다하여 군내면이라 하여 평상, 교동,백운, 상지전, 하지전, 하동, 천서, 자매, 학촌, 신평, 덕곡, 대사, 장위 등 13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군내면과 동면의 가지, 의동, 한곡, 효림, 목동, 판수, 인정의 7개리와 북면의 내례곡, 외례곡, 가삼, 사방, 명월, 척치, 법곡, 화동, 성촌, 대사전, 월남, 상만월, 하만월 등 13개 동리와 군내면의 국화동을 병합하여 청산군의 이름을 따서 청산면이라 하여 옥천군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산면의 행정구역은 백운리, 지전리, 교평리, 하서리, 신매리, 대덕리, 장위리, 한곡리, 인정리, 판수리, 효목리, 의지리, 예곡리, 삼방리, 명치리, 법화리, 대성리, 만월리 등 18개리, 3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산면의 면적은 77.5km이며 군내에서 가장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의 동(東)은 경북 상주군 모서면에, 서(西)는 청성면에, 남(南)은 영동군 용산면에, 북(北)은 보은군 마로면에각각 닿는다.

[참조자료]

  -충청북도 (忠淸北道)

  -옥천군 (沃川郡)

 

 

 

 

 

읍면 (邑面) 명칭의 변천

군 (郡) 읍면 (邑面)의 지명은 한자 (漢字)가 들어온 때 부터로 신라 (新羅) 제35대 경덕왕 (景德王) 16년(757년)에 삼국을 통일한 후 종래의 각각 다른 문자가 순 한자어화 (漢字語化) 됨에 따라 군현 (郡縣)의 이름은 물론 읍면등 주요 지명을 고유어의 2~3자 씩에서 일제히 한자의 두자 지명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이때에 한자로 고치면서 발음대로 썼거나, 그 글의 뜻을 새겨 이름을 지었다.

고려 때에 와서 삼국사기 (三國史記), 고려사지리지 (高麗史地理志) 간행때에 새로운 지명이 수록되었고 지명끝에 ~川 (천) 또는 ~山 (산)자가 많이 든 지명을 ~州 (주)로 바꾸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太祖)때에 지명 끝자가 ~州 (주)로 된 지명을 ~山 (산) 또는 ~川 (천)으로 다시 환원하였으며,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의 간행때에 지명을 많이 바꾸었다.

일제수난기에는 창씨 (創氏) 개명 (改名)과 함께 일본들의 사용에 편리하도록 변질된 지명이 많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많은 곳에 합성지명 (合成地名)이 많이 생기었다.

 

고장의 來歷

○ 신라 경덕왕 3년 (서기 1009) 보은(報恩) 領域에 屬
○ 고려초 共讓王 2년 (서기 1310) 경상도 상주에 屬
○ 조선 태종 3년 (서기 1403) 縣務를 두다
○ 조선 태종 13년 (서기 1413) 충청도에 屬
○ 조선 태종 14년 (서기 1414) 黃靑縣 (황간과 합)
○ 조선 고종 32년 (서기 1893) 靑山縣
○ 서기 1914. 3. 1 沃川郡을 합병되고 靑山面이 되다 

 

위    치

○ 인접도군 : 1道, 3郡, 7面

- 군청소재지로부터 동남방향 39.2km 지점 위치
- 도청소재지로부터 남방향 87.0km 지점 위치
- 동쪽은 경상북도 상주군 (化東面,  牟西面)
- 서쪽은 충청북도 옥천군 (靑城面)
- 남쪽은 충청북도 영동군 (龍山面)
- 북쪽은 충청북도 보은군 (三升面, 炭釜面, 馬老面)

 

 지역 특성

- 옥천군 동부지역
 .  청산  → 청주간 87 km 
 .  청산  → 옥천간 39.2 km
 .  청산  → 보은간 24 km
 .  청산  → 영동간 25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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