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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거북선의 위력

by 연송 김환수 2008. 4. 20.
일본 수군을 공포로 몰아넣은 거북선의 위력

  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실전전투에서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던 위력적인 전함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이후 실증사학이 강세를 나타내면서, 거북선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물론 거북선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증을 하지 않고 다소 과장적으로 전해지는 예가 분명있긴 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거북선은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별다른 활약을 보유주지도 못했다는 의견까지 등장하기도 하였다.

 거북선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주된 근거로는, 우선 거북선이 그렇게 위력적이라면 왜 4년 후 일어난 정유재란에 왜 다시 재작하여 쓰지 않았냐는 것이다. 또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인 판옥선의 평균사망자수가 6명 정도였는데 비해, 거북선 두척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24명으로 거의 배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근거를 뒷받침 해 주는증거라는 주장들이다. 

 이런 무용론의 일환으로 35m로 추측되던 거북선의 길이도 점점 더 작아져 급기야는 절반정도인 18m로 보는 의견도 등장하였다.
사실 거북선에 대해서는 그와 관련된 유물이 현재까지 단 한점도 발견된 적이 없으며, 실측한 자료역시 없기에 연구가의 관점에 따라 제각기일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때 거북선에 탑재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지자총통이나 천자총통역시 고물상에서 구입한 모조품으로 밝혀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돌격선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戰船(전선)으로서 조선수군에 차지하는 중요성도 대단히 컸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야 여러가지 이겠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 보고 체험하고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 보는일일것이다.

 거북선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태종 13년 1449년이다. 이 때 태종은 임진강 나루터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 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고 나와있다. 아마도 실전을 대비한 훈련으로 보이는데, 거북선의 원형은 고려말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태종 15년엔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도  병제 개혁안을 올리면서 거북선에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북선[龜船] 법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하지 못하니 가히 결승(決勝)의 좋은 계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견고하고 교묘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戰勝)의 도구를 갖추게 하소서.”


 
이렇게 거북선 제작과 보유에 대한 논의가 조선 초기부터 있어왔지만, 실제 거북선을 해전에 적용시킨 것은 역시 이순신 장군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591년,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재편성에 따라 전라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2백여 년간 거의 실전경험이 없었던 조선수군을 강화하는 한편, 특수 전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하게 된다.

 이순신장군은 이 거북선을 실제전투에도 유용하게 쓰게 하기 위해, 돛을 개량하여 달고 방포훈련을 하는가 하면 구조자체도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견고하게 만들어 명실상부한 돌격선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 장군은 1592년 5월 29일 사천양해전에서 거북선을 최초 투입, 일본 수군을 공포와 혼란속에 몰아 넣었다.
 그리고 6월 14일에 올린 '당포파왜병장'이란 장계에서 거북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따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전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러한 이순신장군의 장계에 대해 선조임금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6년 병신년조에 대신들과 함께 왜구 격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거북선에 대해 묻기도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귀선(龜船)의 제도는 어떠한가?”

하니, 남이공(南以恭)이 아뢰기를,

“사면을 판옥(板屋)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등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왜선과 만나면 부딪치는 것은 다 부서지니, 수전에 쓰는 것으로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많이 만들지 않는가?”

하니, 조인득(趙仁得)이 아뢰기를,

소신이 황해도에 있을 때에 한 척을 만들어 검(劍)을 꽂고 거북 등과 같이 하였는데, 그 제주가 아주 신묘(神妙)하였습니다.”

이날 논의에서 거북선에 대한 증설계획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요약해 보자면, 우선 당시 조선의 전선이 일본의 전함보다 매우 견고하여 충돌할 경우 1;2.5정도의 비율로 일본 전선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궂이 증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거북선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험많은 사공들과 팀웍이 중요한데 전쟁중에 따로 사공을 착출하거나 군사를 내어 훈련하기 힘들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재정이 바닥난 상태에서,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귀선을 증가 시킬 수 없었다
.


 따라서 정유재란 당시 거북선이 증설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주장대로 거북선이 무용하기 때문에 제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강력했던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격침되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북선은 강력한 전선임이 분명하였지만 무적의 전함은 아니었다. 당시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등으로 인해 조선수군의 팀웍은 상당히 와해된 상태였다. 더구나 거북선의 실전운영은 매우 경험있는 노련한 수군과 사공, 그리고 지휘곤이 일체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여기에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장군의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조선수군은 괴멸당하였고, 거북선 역시 수백여척의 일본전선에 홀로 포위된체 집중 포화를 받아 침몰하고 만 것이다. 당시 거북선 갑판은 일본 조총을 방어 할 수 있을 정도였지, 화포를 정면으로 수십대씩 맞아도 견딜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밑면은 나무로 짜여진 판옥선이었음으로,  운영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관의 통제를 받은 거북선의 침몰은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도 24명이란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거북선의 취약점이라기 보다는 거북선이 맡은 임무의 특성 때문이었다. 이순진 장군은 우리판옥선에 탑재된 화포가 일본전선의 화포보다 사거리도 길고, 다수였다는 것을 활용하기 위해 항상 사거리를 유지하며 싸웠다.
 그러나 거북선은 돌격선이다. 수십 수백대의 일본전선 사이를 �고 들어가며 그들의 대열을 흩뜨려 놓고 맹렬한 공격으로 사기를 꺽어 놓는 역활을 한다.

 이렇게 전열이 흩어지고 사기가 꺽인 일본 수군에게 기다리는 것은, 조선 수군의 집중포화... 더욱이 이순신 장군은 학인진이라는 탁월한 전술을 펼쳐 화포공격의 집중성과 효율성을 최대한 극대화 하였다.
 
 더욱이 당시에는 용과 같은 신화의 동물이 실재하였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바다 한복판에서 마치 거북등과 같은 형상에 입에서 불을 뿜고 화포를 쏘아대는 거북선은 그야말로, 신화에나 나올법한 현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적진 한복판을 유린하고 돌아갔음에도 불과 수명의 사망자 밖에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거북선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거북선이 진정 강할 수 있었던 것은, 거북선이 무적의 함선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조선수군의 노련함과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역량이 있었기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거북선의 유용성으로 인해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실전 배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선조 39년인 1606년에는 나대선이 거북선을 개조한 창선이란 것을 만들기도 하였다.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년간에 순찰사(巡察使) 한효순(韓孝純)의 군관(軍官)이 되어 별도로 전선(戰船) 25척을 감조(監造)하였을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그뒤로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한 번도 전쟁에 쓰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버려두어 썩어가고 있다.
 

  조선 수군은 여전히 조총보다는 활을 선호하였는데, 거북선의 약점은 활을 쏘기 불편하다는 점에 있었다. 만약 조선 수군에게 조총이 적극 활용될 수 있었다면 밀폐된 공간에서 안전하게 조준하여 쏠 수 있는 거북선은 더욱 개량되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7년에 걸친 임진왜란 이후 평화기가 지속되면서 유명무실 해져 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운영이 완전히 중단 된 것은 아니다. 영조 임금 때에는 윤필은(尹弼殷) 이삼(李森)등이 거북선을 개선하여 목 부분에 곡옥이라는 것을 붙였는데 기록에는
(거북선의)선두(船頭)에는 곡목(曲木)을 덧붙여서 그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목과 같으나 조금 뽀족하여 비록 풍랑을 따라서 나가더라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혹시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합니다.”라고 하였다.



▲ 1747년 3월 전라우수영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에
수록된 조선 수군의 전함 해골선의 그림. /고창석씨 제공


 따라서 영조임금은  이 배를, 바다의 매라는 뜻으로 해골이라 명하고, 통영과 여러 도(道)의 수영(水營)에 해골선을 만들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조 때 나온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이 배에는 모두 56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북선 운영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에 근대식 군함이 들어 오기 이전인 1886년에 까지 이어 진다
.

우선 1 대원군 집권시절인 1866년에는 의정부에서는 전 수사(前 水使) 임상준(任商準)이 ‘본 영에서 전선(戰船)·귀선(龜船)·방선(防船)·병선(兵船) 등 배 6척을 모두 개조하였습니다.'라는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

 1886년에는 내무부(內務府)는 전라 우수사의 장계를 바탕으로 하여 고종임금에게 수군에 대한 개편논의를 아뢰게 된다.

  나주(羅州)의 두 귀선장(龜船將)의 부대는 군오(軍伍)가 정제되어 있고 조련(操鍊)에 나가기에도 모두 편리하니 전선(戰船) 1척(隻),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배치하되, 전선 1척에는 원래의 방수군(防水軍) 800명과 사부(射夫) 90명을 부근의 각읍(各邑)에 있는 군병 가운데에서 편리에 따라 떼 주어 급할 때 달려가서 모이도록 하소서

 이와같은 논의를 미루어 볼 때 고종시대에는 서구 세력의 출몰에 맞서 오히려 거북선이 중심 축이 된 수군편제 논의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886년 이후 거북선에 대한 논의는 중단되었다.
 이후에는 양무호와 광제호등 근대식 군함을 구입하는 방향으로 해군양성 계획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혹  우리가 주권을 다시 찾은 것을 망각하고 그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것만을 되새기며 '그럼 머해..'하는 식으로 과거자체를 부정하거나 회의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나라 어느 역사나 영광과 자절은 항상 공존한다. 좌절이나 영광만을 기억하는 역사는 그것만을 강조하는 역사는 결국 몰락 할 수 밖에 없다. 

 
 거북선은 서해와 남해 바다를 누비며 일본 수군을 공포로 몰아놓고, 수백척의 일본 전선을 유린한 당대 최강의 전선임이 분명하다. 
 만약 일부주장처럼 거북선이 무용하다면 왜 수백년간 그 개량과 운영이 지속되었겠는가?

 그러한 영광과 승리에 대한 자긍심은 결국 일제 치하 35년 속에서도, 우리가 민족성을 잃치 않고 암흑기를 헤쳐나가는데 크나큰 원동력이 되었다.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기적을 이루어 냈던 이순신장군, 그리고 그 영광의 순간에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앞자리에 섰던 전함 거북선
 거북선의 강력함은 그것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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