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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고종황제 해군을 양성

by 연송 김환수 2008. 4. 20.

고종황제 해군을 양성하다.

 군함 구입을 둘러싼 논쟁

우리나라 근대식 군함의 효시로는 1903년 인천항에 닻을 내린‘양무호(揚武號)’와 그 이듬해 서해안 경비를 위해 만들어진‘광제호(光濟號)’를 꼽는다. 국내에서 군함 도입을 계획한 것은 1902년. 당시 고종황제는 해군창설을 위해 일본에 군함 구입을 의뢰했고, 다음해 미쓰이물산 합명회사(三井物産合名會社)가 군함을 납품함으로써 4월 15일 인천항에 국내 첫 근대식 군함이 선을 보이게 된 것이다.

3432톤급 1750마력으로서 최대 13.5노트를 내고 먼 바다에까지 항해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이었던 양무호가 시커먼 연기를 하늘로 내뿜으며 인천항에 들어오는 위용은 대단했다. 전장 105미터 폭 12.5미터에다 8센티미터 포 2문을 좌우에 각각 장착하고 또 5센티미터 기관포 1문을 역시 좌우에 각각 장착한,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고종은 왜 당시 열악한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군함을 구입하려 하였을까? 또한 고종의 그러한 노력은 적절한 것이었으며 얼만큼의 결실을 맺었는가? 
 
 최초의 군함 제작

19세기 무렵 제국주의 열강들이 보유하고 있는 배는 범선이 아닌 증기선이었다. 이런 이양선들의 위력을 처음 우리나라가 처음 경험한 것은 병인양요때인데, 서양인들이 가진 증기선은 빠르게 움직여 구식 화포로는 좀처럼 적중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함선에 탑재되어 있던 함포는  강화 해안에 있는 진지와 포대를 초토화 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대원군은 전국에 특명을 내려 장인들을 불러모았다. 신식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대동강 유역에서 가라앉았던 제너럴 셔먼호를 본 따 함선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그 배는 운항조차 못하고 좌초되어 가라앉고 말았다.

고종의 비밀지령

 군함 보유에 대한 노력은 고종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비자금과 함께 고종의 첫번째 비밀 지령을 받은 사람은 승려 이동인이었다. 하지만 이동인은 군함 구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동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군함을 구입하려는 고종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고종의 비자금도 이동인과 함께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고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군사관학교 설립

일본은 모든 첩보망을 총동원해서 조선의 군함 구입을 원천봉쇄 한다. 이에 고종은 군함구입에 앞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강화도에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를 세운다. 생도는 모두 160명이었지만 강화도조약이후 폐쇄되어 학생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최초의 군함 양무호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군함 양무호가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해군사관학교의 폐쇄 8년후인 1903년 4월15일이다.
3천5백톤급 증기선 양무호. 드디어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군함 한 척 없이 나라를 지키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고종의 결단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 군함인 양무호는 도입과정부터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양무호 단 한척의 군함을 사들이는데 무려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나 지출하였다. 더구나양무호는 1888년 영국 딕슨사가 건조한 3천424t급의 화물상선으로 1894년 일본의 미쓰이물산 합명회사가 석탄운반용으로 구입해 무려 9년간이나 쓴 중고제품이다.

그런데 군함구입당시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이 되는 기간이었고, 그럴듯한 기념행사가 필요하였다. 이 때 외국사절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군함이 축포를 쏘면 기념식도 훌륭할 뿐 아니라 우리의 국방력을 과시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고종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조선의 자주국방을 과시할 수 있다면 이보다 괜찮은 선택은 없어보였다. 고종은 흔쾌히 승낙했고 도입할 군함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근대적 함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거래상담이 급진전되어 1903년 1월 계약을 체결하였고, 계약가는 일화 55만원이었다.

9년 전에 25만이었던 배가 두배가 넘는 55만원으로 둔갑하엿다. 구식 함포와 기관포를 장착한 가격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터무늬 없는 배값이었다. 그런데 양무호에 장착한 함포와 기관포도 사실은 청일전쟁 이후 폐기처분된 일본 군함에서 뜯어낸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실제 해전이 전개될 경우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함포였던 것이다.

 결국 양무호는 미쓰이 물산과 조선주재 일본 공사관, 그리고 일부 친일 관료가 만들어낸 완벽한 삼각 로비에 의해 대한제국으로 판매된 것이다.

 이러한 매각경위에도, 본래부터 군함으로 건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도 함포사격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석탄 연료 소모량이 하루 43t에 달하여 대단히 비효율적이었다. 

값을 치르지 못해 인천항 도착 이후에도 4개월간 우리나라에 인도되지 못했으며 연료인 석탄 대금조차 마련하지 못해 항구에 정박해 있기 일수였다고 전한다.

양무호 선장 신순성(양무호의 항해일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크기에다가 대포를 장착해 유사시엔 언제라도 전투를 벌일 만반의 준비를 갖춘 양무호. 그토록 소원하던 군함을 구입했지만 그로부터 2년 뒤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됐고, 7년 뒤에는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다면 양무호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단 한사람. 최초의 양무호 선장 신순성이다.

 양무호 초대 함장 신순성은 박영효의 추천에 의해 국비로 동경상선학교에서 항해기술을 익힌 인물이다. 그의 원래 목표는 일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지만, 해사측에서 일본인만에게만 입학허가를 해준다고 하자 동경상선학교로 입학 할 수 밖에 없다.

 양무호의 항해는 신순성함장 휘하 72명이 맡았지만, 일본은 항해기술을 전수해 주겠다는 애초의 약속을 가볍게 어겨 버려, 많은 항해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연료로 쓰이는 석탄을 너무나 많이 소모한 탓으로 수시로 항구에 정박하여 원할한 항해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석탄 대금을 지불할 대금조차 마련하지 못하기 일 수 였다.

 결국 양무호는 군함으로써는 단 한차례의 임무도 수행하지 못하고 1907년 선원실습용배로 전락하다가, 1909년 하라다 상점에게 단돈 4만 2천원에 매각하고 만다.

광제호(光濟號)의 구입

양무호 문제로 속을 태웠던 우리 정부는 일본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에 1천56t급 광제호를 새로 건조했다.

전장 220척, 너비 30척, 선심 21척, 화물적재량 540톤, 총톤수 1056톤으로 해안경비 등대순시 및 세관 감시에 이용되었다.


광제호는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군함으로 우리나라에선 최초로 무선전신시설이 설치된  군함이기도 하다. 

1904년 11월 건조된 광제호는 전장 220척, 너비 30척, 선심 21척에 화물적재량 540t, 총중량 1천56t, 출력 2천483마력, 최대 속도 14.77노트의 최신 기선으로 3인치 포 3대가 장착돼 해안경비, 등대 순시와 세관 감시 등 여러 목적에 사용됐다. 따라서 실제적인 군함은 양무호가 아니라 광제호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광제호의 선장역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근대식 군함 항해 경력이 있던 신순성함장이 다시 맡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계기로 해군군함으로서의 사명을 끝내고 인천항을 모항으로 하는 탁지부 관세국 소속의 연안세관 감시선으로 전락하게 되지만 1909년까지 태극기를 달고 항해를 지속하였다.
 그후 1910년 9월15일 처음으로 무선전신시설을 설치해 한국 최초의 무선전신시설을 갖춘 감시선박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후 광제호는 1912년 일제에 의해 강제 구조당한 이후, 조선우식주식회사로 넘어가 상선으로 이용되다,  인천 해원양송소 설립이후에는 신순성씨를 교관으로하는  실습선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자주국방을 위해 구입하였던 광제호는1941년 태평양 전쟁발발 이후로는 석탄운송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광복을 계기로 일본으로 철수하여 우리역사 속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군함구입에 대한 효율성재고

 현대에도 3천톤급 이상의 군함은 3000명 이상의 전투력을 담당할 수 있는 기능을 갖는다. 물론 구입과 유지비 역시 3000명 의상의 육군을 운영하는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따라서 당시에 3천톤급 군함이라면 적어도 1만명 이상의 근대식 육군을 창설할 수 있는 비용과 맞먹었을 것이다.

 해군을 양성하고 군함을 구입하여 육해군을 모두 갖추고 싶었던 고종의 계획이 전혀 무모하다거나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고종은 일본에의해 그토록 우리나라의 주권이 상실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군을 양성하려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종의 그러한 계획은 무리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우선 고종은 단 한 두척의 배로는 일본 해군의 전력에 별다른 위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더구나 군함구입자체를 원천봉쇄하던 일본이, 일개 운송회사를 내세워 함선을 판매하려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의심할만한 것이었다. 또 양무호를 구입할 당시에는 아직 러일전쟁 전이었음으로, 러시아나 미국등의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최소한 조언을 구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에만 급급하여 국방예산의 30%가 들어가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너무나 성급하게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제호의 도입은 양무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앉고 있다. 양무호는 최초도입이라 실수하였다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광제호의 도입당시는 이미 러일전쟁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광제호의 성능은 양무호보다는 띄어나 해전이 가능하긴 하였지만, 두척의 배로는 일본 해군전력에 위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 할 수 있었다. 그것은 1894년 청일전쟁때 청국이 거금을 들여 해군을 양성하고도 일본군에게 참패한 것을 참조했어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종은 해군을 양성하여 일본과 대등한 전력을 갖춘다는 생각보다는, 대한제국의 해군보유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사들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 자체가 대한제국은 자구국임을 드러내려는 행위 일수도 있다. 
 그러나 고종은 지나친 과시욕 때문에 최소 1만명에서 최대 3만명에 이르는 육군을 양성할 재정을 낭비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계획을 진행하였다고 해도 일제의 간섭에 의해 와해되어 버렸을 것이지만, 단 한번의 공식적인 전쟁도 없이 국가를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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