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숭례문(남대문) 사진

by 연송 김환수 2008. 2. 16.



1897년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도성의 관문으로 역할을 하던 시기의 모습.
당시 관문 밖에는 길을 따라 움막 같은 것을 지어놓고 장사하는 무리들이 꽤 있었다고 들었는데 사진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이하게 가로로 써내려간 현판이 어렴풋이 보이는군요.





1930년대 일제 강점기 때의 숭례문의 모습입니다.
기껏해봐야 30-40년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모습이 엄청나게 변해버렸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박격포탄에 피격되어 망가진 숭례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이게 가장 많이 부서진 모습이었습니다.

숭례문(崇禮門) (서울 중구)

 

 
위    치 :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개    요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 태조 5년(1396)에 최초로 축조되었고 1398년 2월 중건되었다. 
           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1448년에도 크게 고쳐지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양측에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1908년 도로를 내기 위하여 헐어
           내고 성문만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2006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지금과 같은 모습
           을 하게 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아래.위층이 모두 5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의 
           윗면인 중앙칸만이 우물마루일 뿐, 다른 칸은 흙바닥으로 되어있고 위층은 널마루이다. 
           편액의 필자에 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지봉유설> 에는 양녕대군이 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문의 편액은 가로로 쓰여 있으나 숭례문이 세로로 쓰여 있는것은 숭
           례(崇禮)의 두 글자가 불꽃을 의미하여, 경복궁을 마주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게 하
           기 위해서라고 한다.          
 

현존하는 성문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남대문은 전형적인 다포(多包)양식 의 건물로 견실한 목조건축물의 수범을 보이고 있는 한국 건축사상 중요한 건물의 하나이 다. 1997년 초 서울시에서 이 문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조명설비를 새로이 한 바 있다. 서울 중구는 2005년 10월부터 통로 보수공사와 홍예문 입구 등 5곳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 시, 조선 세종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랫부분 석축 기단과 지대석(맨 아래 기초석), 박석 (바닥에 까는 돌), 문지도리(문을 다는 돌 구조물) 등을 발굴했다. 이는 1907년께 남대문 을 관통하던 전차선로를 내면서 문 주위로 흙을 1미터 가량 쌓아올려 아래쪽 기단과 박석 들이 완전히 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따라서 중구는 시민들이 지반보다 1.6m 아래 에 있는 이들 구조물을 볼 수 있도록 중앙통로 시굴 부분을 그대로 남겨둔 채 관람시설을 설치했다. 숭례문 개방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까지이며며, 숭례문의 중앙통 로인 홍예문을 따라 숭례문을 둘러볼 수 있다.(출처:한국관광공사)

 

 불타버린 서울 : 600년 역사의 숭례문 화재 사진







 

 



     
     
     
     
     
     
     
     
     
     
     
     



한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지금은 정말 처참한 마음이 드네요.

 

 

 

 

 

 

훼손된 숭례문 현판

 

 

 


 

 

'역 사 방 > 역사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운아 홍국영  (0) 2008.04.20
호랑이의 역습과 조선의 대책  (0) 2008.04.20
거북선의 위력  (0) 2008.04.20
고종황제 해군을 양성  (0) 2008.04.20
경복궁을 지키는 돌 짐승들  (0) 2008.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