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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전시,강암,해정 등

죽(竹) - 효강(曉崗)

by 연송 김환수 2020. 12. 16.

죽(竹) - 효강(曉崗)

 

기개가 넘친 죽(竹) / 효강(曉崗) 박득봉 (朴得鳳)

 

玉立蕭蕭竹數竿 (옥립소소죽수간)

아름답게 서있는 모습, 우수수 들리는 대나무 몇 그루

/ 옥처럼 서있는 쓸쓸한 대나무 몇그루

風枝露葉帶淸寒 (풍지로엽대청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이슬 맺힌 잎사귀는 맑고 서늘한 기운을 띠고 있구나

/ 바람이는 가지와 이슬맺힌 앞사귀 맑고 찬 기울 둘렀네.

 

己巳晩秋 (기사만추) 扵 內院寺(어 내원사) 水閣主人(수각주인) 曉崗(효강) / 박득봉 (朴得鳳) 

*** 기사만추 : 1989년 늦가을 / 어 내원사 : 내원사에서 (扵는 於의 속자)

 

 

玉立蕭蕭竹數竿 (옥립소소죽수간 )

아름답게 서있는 모습, 우수수 들리는 대나무 몇 그루

風枝露葉帶淸寒 (풍지로엽대청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 이슬 맺힌 잎사귀는 맑고 서늘한 기운을 띠고 있구나

 

去年湖曲人家見 (거년호곡인가견)

작년 어느 날 호숫가의 뉘 집에선가 보았는데

底事移來紙上看 (저사이래지상간)

늘은 어인 일로 종이 위에 옮겨와 다시 보이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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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득봉 (朴得鳳) / 효강(曉崗), 선곡(仙曲), 심허(尋虛)

 

출생 : 1920-05-06 ~ 1995-05-02(별세)

분야 : 서예

경력사항

1973. ~ 1980. 정읍검도회 회장

1980. 전주 한민서화회 이사

1980.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운영위원

1980. 한국 미술문화 대상전 초대작가

1981. 정읍시 정책자문위원

1981. ~ 1982. 정읍 로타리클럽 회장

1982. ~ 1990.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정읍지부 지부장

1984. ~ 1990. 미술협회 정주지부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정주지부 지부장

19850 한중일 서화문화교류협회 이사

1989. ~ 1991. 정주시립국악원 원장

1990. 한국게이트볼협회 정주시지회 지회장, 한국서화작가협회 이사

1991. 정읍 충열사보존회 회장

1991. 전북 노인대학총동창회 회장

1992. 정주시 여성회관 여성교육 묵화담당 강사

1993. 한국서가협회 전북지회 감사

1993. 정읍 노휴제 제장

1994. 대한노인회 정주시지회 부회장

1994. 중국 북경 아주서법교류대전 참가 및 서화 연구

1994. 정주시 생활체육게이트볼연합회 회장

 

수상내역

제8회 서울신문 향토문화대상

전북도민문화상

정주시민문화상

예총 예술문화상

1981 도쿄 아시아미술대전 금상

문공부장관상

1975 전라북도 미술대전 특선

 

논문/기고

1989"T.S Eliot의 The Waste Land에 나타난 구원의 길", LIGHTHOUSE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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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 효강(曉岡) 박득봉(朴得鳳, 정읍교당)

 

효강은 음악· 서예 등 예술 활동 뿐 아니라 운동을 하고, 또 공직생활을 오래 하면서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지었다.

 

우선 효강의 집을 찾으면 서예를 하는 많은 지인들이 효강을 위해 써 준 액자들이 안방 벽이나 문지방에 또 마루 벽에 수업이 붙어 있다.

 

의재 선생이 4절지에 그려준 쳇줄 란, 서예가 석전 황욱의 「계기 삼락」, 소공 스님이 그려준 포대화상 상, 안방에 걸린 「충효」 액자는 서예가 오곡 정성봉씨(전주 청묵회장)가 서예를 통하여 자기를 수양하며 동양인의 윤리관인 충효사상에 철저한 효강을 위해 특별히 써 준 것이며 그 옆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의재 허백련 화백의 절친한 친우 김철수씨가 의재 화백에게 사사한 것을 알고 써준 것이다.

 

마루 벽에 붙어있는 「공심정좌(空心靜坐)」「지과심개(知過心改)」는 인천의 동정 박세상(국전심사위원 역임· 고인)이 효강을 위해 써준 글들이다. 효강의 성격이 호방한 것처럼 사회활동도 다양하다.

효강의 생활철학이 「조금도 쉼이 없이 무엇인가 하자.」처럼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면 했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일을 했다.

 

비록 정읍이라는 지방 읍 소재지에서의 활동이지만 그는 고향에 대하여 남다른 애착과 긍지를 갖고 있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에서 작품을 하고, 고향을 위해 일했는지 모른다.

우선 효강의 작품에 관계된 활동으로 그는 전북 수석회 회원이며 서예 그룹인 「청묵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정읍 로타리 회원이기도 하다.

 

효강의 폭넓은 친교로 인하여 정읍여중고 육영회 이사, 호남고교 장학회 이사를 역임했고, 모교인 정읍 농림고 동창회 일을 맡아 보기도 했다.

후배들에게 건전한 체육을 통하여 정신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검도회」창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효강은 기필코 창립을 보았으며 이로 인해 5년간 회장을 연임하여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지만 검도공인 4단(74년)을 인증받기도 했다.

 

또한 집안일로는 「신라 5능 보존회」정읍지부장과 「정읍 박씨 종친회」총무를 맡고 있다.이처럼 작품 뿐 아니라 사회 각층에서 활동하는 효강은 건강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작품과 건강과는 일치합니다. 건강이 약해지면 당장 작품에 힘이 없어 생명력을 느낄 수 없으며 몸이 피곤하다든지 게으름이 나면 작품도 진부해져요.

지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청소와 맨손 체조 정도하지만 2~ 3년 전만 해도 봉사단체 축구시합에 선수도 나갔으며 아침에는 검도를 했는데 아무리 정신으로 이기려고 해도 육체는 늙어지나 봐요.』한다.

 

『그러나 우리 목숨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육체는 정신이 5할 정도 유지시켜 주는 것 같아요. 작품을 하면서 정신을 흩트리지 않고 모으니 이것이 힘이 되어 육신도 건강하나 봐요. 잔병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건장한 체구에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젊음이 같은 움직임은 내년에 환갑을 갖는 사람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효강은 생활이나 건강, 신앙 등 모든 것이 바로 작품과 연결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그 건장한 체구와 팔놀림을 보면 어떻게 그처럼 연약하고 섬세하여 우아하기까지 한 난을 그릴 수 있을까 생각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처럼 인간적일 수 없고 효강의 말대로 『평범한 한 사회인으로 자식 노릇하고, 부모가 되어 살면서 예술로 자기를 가꾸고 취미로 사는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행복은 찾는 것은 남의 생활과 비교가 아니라 새 생활을 즐겁게 꾸려 가는 것』이라면서 중둥만 그린 왕대를 보고 있으면 그이 쿵쿵 뛰는 심장을 보는 것 같다.

 

수각인(水閣人)」의 가통

 

효강은 1902년 5월 6일 정읍의 토반 오성 중 가문이 제일 큰 태안 박씨 집안에서 부친 박종남 옹과 모친 은인기씨 사이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정읍에서 커서 정읍에서 직장을 마친 정읍 토박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정읍 사람이면 효강을 전부 알고, 심하게 말해 효강을 모르면 정읍 사람이 아닐 정도로 효강은 정읍 사람이다.

 

집안이 넓은 것 못지 않게 그가 각 분야에서 활동도 무시할 수가 없다.

태안 박씨가 정읍에 정착하여 토반 5성 중 제일 큰 가문이고 행세를 하게 된 것은 고조부 박민경 옹이 종이품 벼슬로 가선대부 작위를 얻었으며 왕실 직함은 동지중추부사 겸 창덕궁 위장(호군의 대장· 현 벼슬로는 중장정도)이어서 이때부터 가문이 번창하여 정읍의 중시조가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옹은 정읍 중앙을 흐르는 조그마한 시내(현재 각시 다리천)를 집안의 넓은 뜰로(현 정주읍 장명리 116번지 일대) 물길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그 연못 위에 누각을 지어 시를 짓고, 삼현육각을 잡히고 노래를 하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박옹이 풍류를 즐기며 멋진 생활을 하자 친구들이나 종친들이 모여들어 함께 시작도 하면서 풍류를 즐기게 됐다.

 

이 멋진 생활은 정읍인근 뿐 아니라 널리 한양에까지도 소문이 날 정도였는데 대원군이 섭정하고 있을 때의 영의정 정병조는 마침 정읍지방을 순찰하려 내려왔다가 박옹의 사랑채에서 쉬며 연못 위 누각에서 함께 풍류를 즐기었다.

 

정병조는 이튿날 떠나며 대문에 「수각(水閣)」이라고 크게 써 붙이고 떠났다.

그래서 그 당시 박옹을 「수각대인」이니 「수각집 어른」으로 호칭되었다 한다.

 

현재 효강이 자기 작품 끝에 「수각인」이라고 당호를 쓰고 있는 것은 고조부인 박옹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풍류를 즐기었던 선조들을 생각하며 그 멋을 이어받고 선조들의 영화를 다시 되새겨 보겠다는 그의 긍지이기도 한 것이다.

 

출처 : 원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