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 예 방/전시,강암,해정 등

관음보살(觀音菩薩) - 탁본

by 연송 김환수 2020. 12. 16.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像) 탁본(拓本) / 관음보살(觀音普薩) 탁본(拓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像) 탁본(拓本) - 수월(水月) 김만술(金萬述)

 

근대(近代)의 조각가(彫刻家) 수월거사(水月居士) 김만술(金萬述) 선생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像) 탁본(拓本) 작품이다.

 

김만술(金萬述) 선생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근대의 조각가이며 호는 수월(水月)이며 별호는 수월거사(水月居士)이다.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본 동경 하나코 지츠조(日名子實三) 조각연구소에서 조각을 공부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조각가로 활동했다.

 

1942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김광작’이라는 이름으로 「박군의 상」, 「와다나베씨의 상」을 각각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8ㆍ15광복 이후에는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소녀 두상」 특선하였으며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흉상」 무감사 입선하였다.

 

한국근대기와 광복 직후의 우리나라 조각은 대체로 사실적인 인체조각인데, 김만술의 조각은 이러한 일반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약 2년 동안 경주예술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1956년에 신라불교조각연구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며 대구효성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57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경주지역에 각종 동상을 비롯해 다수의 공공조형물을 제작했다.

김만술의 순수미술 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1947년에 제작한 「해방」이다.

젊은 남자가 몸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어내고 있는 모습으로, 민족의 해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70cm 정도의 석고상(청동으로 주조됨)이지만, 인물의 받침대가 한국 지도의 형상이며 인물의 의지에 찬 얼굴 표정과 상체를 구부려 힘을 응축해서 밧줄을 끊으려는 듯한 자세는, 해방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시각적으로 조형화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경주예술가협회가 주최한 ‘미군진주환영기념 미술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외에 순수조각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는 「역사(力士) I」과 「역사(力士) II」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높이 3-4미터의 대작인데, 상체를 벗고 한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는 남성상으로, 「역사 I」에서는 횃불을 들고 전진하는 모습이며 「역사 II」는 망치를 들어 내리치려는 모습으로, 산업의 역군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점의 조각상은 시멘트로 제작되어 있었으나 1999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계기로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김만술은 주로 경주에서 활동하면서 김유신, 신사임당, 박목월, 김동리의 동상을 비롯하여 경북 일대에 동상, 충혼탑, 기념조형물을 다수 제작하였다.

 

O 조각가(彫刻家) 김만술(金萬述)  

- 이칭별칭 : 김광작 / 호 : 수월(水月) / 별호 : 수월거사(水月居士) 

- 출생 : 1911년 1월 23일 ~ 1996222(음력 병자년 정월 초나흗날) 동국대 경주병원 영면(永眠) 86

- 1942년 제2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박군의 상」 입선

-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와다나베씨의 초상」 입선

-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소녀 두상」 특선

-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흉상」 무감사 입선

- 1967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수월선생의 관음보살 탁본 작품 낙관(落款) : 수월거사(水月居士) 김만술(金萬述)

 

관음보살(觀音菩薩)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불교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나 대자비심을 베푼다는 보살이다.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므로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33신(身)이 있다고 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脇侍)로서 태장계(胎藏界) 만다라의 중대(中臺) 팔엽원(八葉院)의 서북방에 거처하면서 동시에 연화부원(蓮華部院)의 주존불이기도 하다.

 

손에 들고 있는 연꽃은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 것을 뜻하며,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는 번뇌망상에 물들지 않고 장차 피어날 불성을 각각 상징한다.

 

관음보살상이 다른 보살상과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보관에 표현된 화불(化佛)과 손에 연꽃가지나 연꽃 봉오리 또는 정병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보살상에 따라 왼손 또는 오른손에 들고 있다.

 

정병은 물 중에서도 가장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이라는 뜻이고, 깨끗한 물은 감로수라는 말과도 통한다.

감로수는 중생의 고통과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정병은 감로병이라고 한다.

 

관세음 또는 관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와라(Avalokite○vara)의 한역이며,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로 음역(音譯)되기도 한다. 밀호(密號)로는 정법금강(正法金剛) 또는 청정금강(淸淨金剛)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현장(玄奘) 이전의 구번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관음(觀音), 관세자재(觀世自在) 등으로 번역했으나, 신역에서는 관자재(觀自在)라고 번역했다.

 

원어의 아바로키타(Avalokita, 觀하다)와 이슈와라(i○vara, 신 또는 自在天)’의 합성어이기 때문에 더 정확한 번역이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에 나오는 ‘관음’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해탈시켜 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신·구역의 번역자가 접한 산스크리트 원본의 문자가 전래과정에서의 상위 때문에 서로 달랐을 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번역어가 생겨났다고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역어 중에서도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구역의 ‘관음’이란 용어이다.

 

그 종류로는 6관음이 일반적이며 그 중 성관음(聖觀音)이 본신이고 나머지 다섯 가지 모습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6관음의 역할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성관음(聖觀音): 주로 아귀도를 구제한다. ② 천수관음(千手觀音): 주로 지옥중생을 구제한다. ③ 마두관음(馬頭觀音): 주로 축생의 고통을 구제한다.

 

④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주로 아수라의 고통을 구제한다. ⑤ 준제관음(准提觀音): 주로 인간의 고통을 구제한다. ⑥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주로 천상의 고통을 구제한다.

 

이 관음보살의 정토, 즉 상주처는 인도 남부의 말나야(Malaya)산 동쪽 구릉인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이라고 믿어졌는데 관음도량으로 유명한 우리 나라의 동해안 낙산사는 바로 여기서 절 이름을 따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절강성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산(普陀山)진제사(晋濟寺)를 관음보살의 거처로 믿고 있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따르면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간절하게 염원하면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성난 파도가 잠잠해지며, 높은 산에서 떨어져도 공중에서 멈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목을 치는 칼날이 부러지게 된다고 하는 등 관음보살은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관음보살은 현세이익 신앙의 대표적인 경배대상이라고 볼 수 있다.

 

종래의 불교신앙이 자력적 특성을 지녔음에 비해 관음신앙은 다분히 타력적 요소가 짙다. 오히려 이 점이 대중들에게 호응받을 수 있었으며, 불교의 종교적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민간신앙으로 널리 유포되었으니만큼 다양한 조각과 회화 등으로 관음상을 나타내었다. 현존하는 아잔타의 제26굴과 오랑가바드 및 칸네리 등에는 각각 ‘관음6난구제도’와 ‘8난구제도’, ‘10난구제도’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모두 관음보살이 현세이익적인 보살로서 널리 신봉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관음보살상은 보통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가지고 있거나 때로는 천관(天冠)을 쓴 모습인데, 이것은 이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관세음보살이 다른 국토에서 왔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보살은 이란의 종교문화적 영향을 받아 북서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모또(岩本裕)에 의하면 이란의 수신(水神)인 동시에 풍요의 여신인 아나히타가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정착되어 있었으므로 관음보살은 이 여신이 불교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타키브스탄에서 출토된 아나히타상은 물병을 들고 있는데, 왼손에 지니고 있는 항아리에서는 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손에 물바가지를 든 관음상과 여신상과의 관계이다.

 

한편으로는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수월(水月)관음이나 양류(楊柳)관음 등의 오른손에 들린 버들가지도 역시 아나히타 여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는 점이다.

 

관음보살은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도 기도대상으로 널리 신봉되었으며, 또한 문화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보살로서 갖가지 종류의 불상과 신앙을 낳았다.

 

한 예로 관음신앙이 확대됨에 따라 각지의 민간신앙은 관음을 예배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관음신앙은 각 고장의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불교화시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성으로 취급된 경우도 많이 있다.

 

관음은 초기 대승경전인 『법화경』·『대아미타경』 등에서도 남성명사로 나타나며, 그 이후의 그림과 조각에도 흔히 남성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성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관음보살은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든 보살인데, 기원적으로 볼 때 여성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불교에서 발전한 ‘변성 남자’, 즉 여자가 성불할 때는 일단 남성으로 전환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정토 경전류의 사상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변성 남자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나 아직까지 정설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와 같은 사상은 당시의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여성 경시 관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녀가 평등하게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사상을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관음보살이 여성신에서 남성신으로 변화되어 온 것도 그와 같은 인도의 종교문화적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특히 이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이 전국적으로 많이 산재해 있다. 그 중에서도 강화도의 보문사(普門寺)와 남해의 보리암(菩提庵), 그리고 양양의 낙산사(洛山寺)가 대표적인 기도처로 꼽힌다.

 

========================================================================

 

조각가(彫刻家) 수월(水月) 김만술(金萬述) 선생 작품

 

김유신 장군 동상 제작시 작업실에서.

(주)경주신문사

황성공원 내 김유신 장군 동상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명각(銘刻) 휘호(揮毫)하신 이 우람한 기마상은 1975년 4월 17일 동상을 다시 만들어 방향도 바꾸어 세우라는 분부를 받들어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김유신장군의 위훈을 오늘에 되새기며, 온 겨래의 호국정신을 일깨우고 조국의 평화통일 과업을 이룩해 나가는 벅찬 앞길에 찬연한 횃불을 밝혀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여기 화랑의 정기 넘치는 서라벌 옛 터전에 자리 잡아 멀리 북녘을 향해 우뚝 세우다.

 

1976년 7월 15일에 기공하여 1977년 9월 1일에 준공하다.

세운이 경상북도

만든이 경주 김만술

 

이 건립문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동상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 시점이 1975년 4월 17일 박정희 지시라는 대목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김유신 동상이 있었는데, 고쳐 다시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방향도 바꾸"는 일이 생겼다.

 

그런 의문을 우리는 이 동상 제작이 발의되고, 실제로 건립될 무렵 경상북도지사를 역임한 김수학(金壽鶴)이 남긴 경주 관련 회고록에 이 사건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도시재생사업으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라는 것이 있어, 이 사업에 관련한 생존자들이 경주개발동우회라는 친목 단체를 결성하고, 내친 김에 그들의 회고록을 모아 정리한 책자 하나를 1998년 고려서적(주)라는 출판사에서 펴냈으니 《그래도 우리는 신명바쳐 일했다》가 그것이다.

 

이 경주개발동우회 이 책자 간행위원장이 바로 김수학이라, 이 책자에다가 김수학은 '경주개발 고금(古今)'이라는 제목으로 경상북도도지사 재직시절 경주개발에 얽힌 이야기들을 정리했으니, 이 회고록에 문제의 김유신 동상 재건립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엿보인다.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도로변 황성공원에 유서 깊은 독산이 있다. 이 산은 모양이 큰 고분 같기도 하고, 작은 인조산 같기도 한데, 왜병과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 이 산위에는 김유신장군 기마상이 북쪽 하늘을 노려 보면서,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원래 이 기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대통령께서 포항종합제철을 방문하시는 길에 이 동상을 지나면서 기마상이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연유를 내게 물었다. 동쪽을 향하든 서쪽을 향하든 보통사람은 관심없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나도 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마 옛날 왜구를 상기하는 뜻에서 일본을 향하게 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민족의 통일을 생각하고,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는 뜻으로 북쪽을 향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말을 듣고 보니, 대통령 말씀대로 북쪽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마침, 시멘트 동을 입혀 만든 칼에 금이 가 재건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터라 순동을 개조하면서 방향으로 북쪽을 향하게 했던 일이 기억난다.(113쪽)

 

덧붙여 기존에 이 자리에 같은 김유신 동상이 있었고, 그것이 시멘트에 구리물을 부어 만든 것이었음을 추찰한다. 그 기존 김유신 기마상이 같은 김만술 작품이다.

 

김만술 선생의 생전 말씀에 김유신 장군 동상은 두 번 만들었는데, 1960년대 처음 만들 때는 모든 게 다 어려울 때였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지방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던 때라 경주에 신라문화제도 열리고 하는데, 그 지방 인물의 동상은 그 지방 조각가가 만들도록 하는 방침이 있어서 서울사람 제쳐놓고 내가 만든 거지. 혼자 하기에는 일이 벅차서, 그 왜 이북에서 내려온 시몽 현성각이라고 있지. 그 시몽하고 같이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 사정동 경주공고 뒷편으로 추정되는 작업실에서의 수월 선생.

(주)경주신문사

 

수월 선생이 작업하는 모습.

(주)경주신문사

 

1972년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제막식에서.

(주)경주신문사

 

 

‘해방’ 이외 순수조각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는 ‘역사(力士) I’과 ‘역사(力士) II’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원했던 민족 통일의 염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높이 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는 김만술이 후기에 주로 제작한 기념 조형물의 대표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점의 조각상은 시멘트로 제작되어 있었으나 1999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계기로 청동으로 주조됐다.

 

선생은 주로 경주에서 활동하면서 김유신, 신사임당, 박목월, 김동리의 동상을 비롯해 경북 일대에 동상, 충혼탑, 기념조형물을 다수 제작했다.

 

황성공원에 있는 최초의 김유신 장군 동상은 1966년 4월 30일 380만원의 예산으로 시멘트로 조성됐으며 동남향이었다.

이후 1975년 북향의 청동상으로 재건립됐다. 1, 2차 김유신 동상 제작은 모두 선생의 작품이다.

그 밖에도 보문사, 황성사, 상월사, 황룡사 등의 불상과 불국사 천왕문에 조각된 사천왕, 신사임당상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해방’, 1947년, 브론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주)경주신문사

 

- 김동리, 박목월, 손일봉, 박봉수, 김범부 선생 등 경주 출신 문화예술인들 흉상 다수 제작

선생은 말년에 김동리, 박목월, 손일봉, 박봉수, 김범부 선생 등 경주 출신 문화예술인들의 흉상을 다수 제작했다. 아래 자필 에세이를 통해 흉상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다.

 

‘나는 천부적이라 할가 취향에 따라 한 평생 조각에 심혈을 기우려 선전 초 입선과 힘입어 여러 불상 기마상 등등 조각에 전념해 왔다. 세월의 흘음에 따라 노경에 남은 힘을 다하여 향토 인물의 평소 존경하는 문화 사랑하는 사람의 흉상을 만들어 사비로 전시하여 나의 유물을 남기고져 하오니 식(式) 후세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앞으로 졸작이나마 관리에 일반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선생의 자필 에세이를 그대로 옮겨 적어 보았다.

 

「역사(力士) I」과 「역사(力士) II」

 

박목월 인물’, 1980, 브론즈, 개인 소장.

(주)경주신문사

 

-“선생의 작품 더 멸실되기 전에 거푸집 원형으로 석고나 브론즈로 재현했으면”

경주미술사 연구회 수석연구원이자 서양화가인 최용대 선생은 “수월 선생은 그 시기에 조각가로서 전국에서 활동을 한 작가는 드물었다. 회화는 많았지만...,경주인이어서 경주가 뿌리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인왕상, 보살상 등 우리 신라의 석조각에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 신라라는 콘텐츠로 창작과 재현을 하신 분이다”고 했다.

 

‘김동리 인물’, 연도미상, 브론즈, 개인 소장.

(주)경주신문사

 

“서라벌문화회관 로타리 자리에 분수대 조각이 다 없어져 버렸다. 당시 작품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보인다.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내 모자상, 교육청 비천상도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작품 일부는 배양골(비파 마을) 빈 집에 임시로 맡겨 놓았는데 그 집을 새로 지으면서 포크레인으로 집을 철거하던 중 선생의 작품 상당수가 파손됐었다. 여러 흉상 일부가 파손된 채 수습된 것이 있으나 이들도 온전치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선생의 작품이 더 멸실되기 전에 거푸집 등의 원형으로 석고나 브론즈로 재현시킬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존 작품의 보존관리가 시급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면서 거푸집이 다소간 남아있어서 석고를 부어 브론즈 등으로 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전했다.

 

===========================================================================

 

다른 조각가 작품인 김유신 장군상 - 김경승

 

서울 남산공원 김유신 장군 기마상(1969) - 김경승 작품

 

김경승 작가는 황해도의 유명한 지주집 둘째로 태어나,부친은 메이지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김세형씨로 개성서 인삼포를 경영하는 유지였고, 장남인 金仁承씨는 유명한 사실화의 대가 이다.

 

김유신장군상은 1969년 9월 23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시청광장 앞에 건립한 동상입니다. 이후 지하철 공사로 인해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조각가 김경승이 청동으로 제작한 김유신장군상의 높이는 11.3m이며 오른손으로는 말의 고삐를 잡고 왼손으로는 칼을 쥔 채 앞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상>(1955), <안중근의사상>(1959), <세대왕상>(1968), <김구선생상>(1968), <김유신장군기마상>(1969), <정몽주선생상>(1970) 등과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상>(1957) 등이 주요 동상 작품들이고, 그밖에 청동주조의 많은 초상작품들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