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山島歌(한산도가) - 靈鷲山人 滿山(영취산인 만산) / 통도사 스님
閑山島歌(한산도가)
閑山島月明夜上戍樓 撫大刀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명월야상수루 무대도심수시 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 달 밝은 밤에 / 수루에 / 홀로 앉아 큰 칼 / 옆에 차고 / 깊은 시름 / 하는 차에
어디서 / 일성호가는 / 남의 애를 / 끊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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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한글 '한산도가'는 시조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3장, 6구, 12음보, 45자 이내의 조건을 충족하고,
종장의 첫 부분도 ‘어디서’라는 세 글자로 시작을 한다.
모두 한자로 구성된 '한산도가'의 원문은 한시(漢詩)라는 느낌이 강하다.
한자본과 한글 시조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는데 전해져 온 한시를 시조의 형태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빚어진 오역(誤譯)이든지 아니면, 공식적인 기록인 청구영언(1728년)의 한글 시조를 한시(이충무공전서 1795년)로 표현하는 과정의 잘못인지는 알 수가 없다.
시조는 초장에 “수루에 혼자 앉아”라고 하였으나, 한자본에는 상수루(上戍樓), 즉 “수루 위”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수루 위에 서 있는지, 아니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운데 초장의 원문에 ‘앉아 있다’는 ‘좌(坐)’나 ‘서 있다’는 ‘립(立)’자가 없기 때문이다.
“수루에 혼자 앉다”는 표현은 없다.
‘홀로’라는 의미의 ‘독(獨)’자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배운 ‘한산도가’에는 ‘홀로 앉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분명 원문에 없는 내용이다.
중장 내용에 ‘撫大刀(무대도)’라는 글귀가 나온다.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는 한자본으로 해석하면 “큰 칼 손에 잡고 깊은 시름 하는 때에”가 된다.
무대도(“撫大刀”)의 무(撫)는 어루만지다, 손에 쥐다 등으로 쓰이는데 현재 현충사에 보존된 이순신 장군의 큰 칼(長刀)은 길이가 1.98m인데 이 정도로 긴 칼을 허리에 차고만 있을 수 없다. 붙잡거나 지탱할 손이 필요하다.
큰 칼을 옆에 차고 시름을 한다. 어울리지 않는다. 칼을 잡고 어루만지거나 쓰다듬는 등의 손놀림과 함께 시름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마지막 구절에서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맹랑(孟浪)하다.
한자본에서는 애를 끊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수심을 더하다” 라는 뜻의 경첨수(更添愁)라고 하고 있다.
장군께서 애를 끊는다는 표현인 단장(斷腸)이란 한자어를 몰라서 경첨수(更添愁)라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의 문맥으로 보면 경첨수가 맞고 한자어 해석대로 다시 수심을 더해 준다는 뜻이다.
시조가 처음 실린 기록은 청구영언(靑丘永言)으로 국립한글박물관에서 2017. 4.21일 발간한 청구영언 주해편 77쪽에 실린 '한산도가'이다.
閑山셤 ㄷㆍㄹ ㅂㆍㄹ근 밤의 戍樓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픠 ㅊㆍ고 기픈 시ㄹㆍㅁ ㅎㆍㄴㆍㄴ 적의
어듸셔 一聲胡茄 ㄴㆍㄴ ㄴㆍㅁ의 애ㄹㆍㄹ 긋ㄴㆍ니
청구영언은 1728년이고 이충무공전서는 1795년이기 때문에 청구영언의 시조를 한자로 변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해야 하는데 구전되어온 한시가 먼저라는 전제하에 한시의 한글번역이 시대를 거치면서 미화되어 다듬어 졌다로 보아야 한다.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를 한자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자본은 강적(羌笛)이고 시조는 호가(胡茄)라고 하였는데, 난중일기에 장군이 적(笛)을 불며 음주가무를 한 기록을 보면 당시에는 강적이었으나 청구영언의 시대에서의 대중적인 표현인 호가로 바꾼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청구영언은 “한글로 기록한 최초의 가곡 노랫말”로서 1728년 김천택이 당시의 한글로 편찬한 책으로 시조는 청구영언에 첫 필사본 원본이 있고, 후에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1982)이 오늘날의 한글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기록을 보면 한글은 임진왜란 이후에 널리 퍼졌고, 한글 가사나 시조도 동일한 과정으로 청구영언 이후에 활성화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많은 기록을 남겼으나 한글을 사용한 흔적이 없고, 시조의 시대적 배경인 1592~1598년의 임진왜란 당시에는 한글로 된 시조를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해져 오는 한시를 일부 의역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은 검증된 내용은 아니므로 참고사항 정도로 이해하고 읽어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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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가 - 소전 손재형 (素荃 孫在馨)
소전 선생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가를 최대한 기교를 자제하며,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풍겨나게 썼다고 한다.
소전 손재형 서예가가 바로 서예라는 말을 창안한 사람입니다
손재형(孫在馨, 1902년 6월 4일 (1902년 음력 4월 28일) - 1981년 6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서예가이며, 호는 소전(素荃)이다.
1925년에 양정의숙을, 1929년에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부터 1932년까지 중국의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에게서 서화와 금석학을 공부하였다.
1924년 이래 선전(鮮展)에 출품했다. 1930년 조선서화협회전(朝鮮書畵協會展)에서 특선, 1933년 조선 서도전(朝鮮書道展) 심사위원, 1934년 조선 서화협회 이사 및 동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45년 조선서화연구회 회장, 1947년 고향에 진도중학교를 설립, 이사장이 되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문화위원이 되었다. 1949년-1959년 국전 심사위원, 1954년 1960년 각각 제1대 및 제2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1958년 자유당 소속 4대 민의원의원(民議院議員)으로 선출되었다.
1962년 한국미술가협회 이사와 5월문예상 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동년 예술원장 작품상을 수상했다. 1963년부터 이듬해 1964년까지 홍익대학교 전임교수를 역임하였고 1년 후 1965년 대한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이 되었으며 1970년 국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작품 세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서예가로 특히 한글에도 전서·예서·행서 등의 글씨체를 창안해 내어 한글 글씨를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끌어올리는 데 힘썼다. 서울시 문화상·예술원상을 받았다. 글씨로 한글에 《창경원》, 《화랑대》 등이 있으며, 한문에 《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영빈관》 등이 있다.
일화
대한민국 국보 제180호인 김정희필 세한도는 일제 말에 후지쓰카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2~1981)의 노력과 재력에 힘입어 국내에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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