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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무원 이돈섭

풍우일배주 강산만리심 - 無圓(무원)

by 연송 김환수 2020. 5. 11.

중국 2천여년의 역사에서 공자의 직계 후손인 산동곡부의 공부세가는 77세 적손까지 이어져 왔는데, 77대 형제자매는 공덕제(孔德齊), 공덕무(孔德懋), 공덕성(孔德成) 3명이다.

 

왼쪽부터 공덕성의 큰누나 공덕제, 둘째누나 공덕무, 공덕성, 세 남매의 스승 왕육화

 

공덕성의 부모는 요절하여 두 누나와 함께 살며, 오누이간의 정은 깊었으나, 큰누나 공덕제는 혼인이 불행하였고 일찍 사망하였다.

 

외동아들인 공덕성은 1920223일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태어나 20081028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시에서 89세로 사망하였다.

 

공덕성이 1949년 고향을 떠나 대만으로 갈 때, 중국 대륙에는 둘째누나 공덕무만 남았다.

 

공덕성과 공덕무는 가장 가까운 혈육이지만, 공덕성은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거절했을 뿐아니라, 오랬동안 중국의 친누나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정부가 문화대혁명기간동안, 공자와 유가학설을 모조리 부정하고 곡부의 공묘가 파괴되는 등 공림의 수십기 분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했기에 고향을 찾지 않은 것이다.

 

공씨집안의 이 오누이는 헤어진지 40년이 지나고서야 1990년말에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누나 공덕무는 동생 공덕성이 일본여택(麗澤)대학에서 강의하는 것을 알고 일본친구들의 도움을 청하여, 일본윤리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공덕성이 강의하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그가 지나갈 복도에서 기다리다 이국타향에서 동생을 만났다. 서로를 보고 놀란 오누이는 서로 마주보고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함께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했다.

 

1993, 공덕성은 "풍우일배주, 강산만리심(風雨一杯酒, 江山萬里心)"이라는 글을 써서 사람을 시켜 북경의 누나에게 보냈다

공덕무는 동생의 글을 표구한 후에 거실의 벽에 걸어두고 동생을 생각했다.

 

風雨一杯酒 (풍우일배주)

비바람 불어 술 한잔 하니


江山萬里心 (강산만리심)

내마음은 만리밖 고향에 가 있네

 

 

風雨一杯酒 江山萬里心(풍우일배주 강산만리심) - 無圓(무원) 李敦燮(이돈섭) 

공자 77세 직계후손 공덕성이 누나 공덕무에게 1993년에 보낸 글을 쓰다.

 

 

공자의 적전(嫡傳) 후예중 산동성 곡부의 공부(孔府)를 떠난 사람이 바로 공덕성(孔德成)인데, 장개석이 1948-1949년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도망치면서 대량의 황금과 문화재 이외에 일부러 3명을 데리고 갔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당시 27세로 공자의 직계 후손인 공덕성이다.

당시의 문화재와 골동품은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에 수장되어 있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옮겨올 때 공자 종손인 공덕성 박사를 특별히 모셔왔는데, 이는 그가 중국에서 역대 황제가 서로 전했던 옥새(玉璽)와도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종손은 대만에서 봉사관 외에도 9년간 고시원(考試院) 원장을 역임했고, 총통부 고문역을 맡고 있을 정도로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종손은 저명한 학자로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정치학 석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를 지속했고, 우리나라의 성균관대학교와 영남대, 일본 레이타쿠대학(麗澤大, 東京), 대만대학교 등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손은 학자로서 국립대만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는데, 예학(禮學)과 문자학(文字學) 등에 더욱 조예가 깊다.

종손이 남긴 예기석의(禮記釋義, 1951), 금문선독(金文選讀) 등은 공부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되는 책이다.

 

유교의 성현 공자(孔子)77대 직계후손인 쿵더청(孔德成공덕성) 전 대만고시원장은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학자요, 서법 연구가요, 미식가로 살아온 쿵(공덕성) 박사가 2008.10. 28일 오전 10시 타이베이 츠지(慈濟) 병원에서 폐기능 저하로 사망했다"

 

유교문화 창시자인 공자의 77대손 공덕성 박사 영결식에 유교문화의 중흥지인 안동시 대표단(단장 :김휘동 시장)20081130일 대만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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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옮겨올 때 데리고 온 "전국옥새"와 같이 중요한 사람중에 공덕성이라는 사람은 당시 나이는 겨우 27세로 공자의 77대 적손(嫡孫)이며, 2천년이래의 공자의 신성한 혈맥을 전승해 온 사람이므로, "국지중보(國之重寶, 국가의 중요한 보물)"로 대우받았다.

 

공덕성은 태어난지 100일이 되던 날, 당시의 대총통이던 서세창(徐世昌)은 영을 반포하여 "연성공(衍聖公)"에 봉했다. "연성"은 성인 공자의 덕을 연속(이어가는)하는 고귀한 혈통이라는 의미이며, 수천년을 이어온 유가의 문화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난세에 태어난 공적성은 이미 마지막 연성공이 되었는데 서학동점으로 공자유학은 타도되었다.

 

 

공덕성의 대만에서의 생활은 약간의 파란은 있지만 비교적 평탄했다고 한다면, 공덕무의 대륙에서의 생활은 해방, 문혁, 개혁개방등 시대의 변천을 겪었다.

 

공덕무와 공자가족들은 문혁때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인방'이 분쇄된 이후에는 비로소 명예회복을 한다.

공덕무는 전국정협위원, 공자기금회 부회장등 직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조상의 부침과 더불어 기복이 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조상이 성인에서 한푼의 가치도 없는 '공노이(孔老二)'로 전락하는 과정을 친히 목격했다.

 

5.4운동때 나온 구호는 '타도공가점(打到孔家店)'이고, 문혁기간동안은 더욱 비판을 받아 공자와 그 자손은 무덤에서 끌려나와 부관참시를 당한다.

 

문혁기간동안, '파사구(破四舊)'의 풍랑과 비공투쟁(批孔鬪爭) 속에서, 흑백이나 시비를 가리지 않고 공자와 유가학설은 모조리 부정했다. 곡부의 공묘를 파괴하고, 공림의 수십기 분묘를 파헤치기도 했다.

공자의 묘가 파헤쳐지고, 공덕성의 부친 공령이의 묘도 파헤쳐져서 관을 부수고 시신을 꺼내놓았다.

파낸 대부분의 묘가 빈 묘이기는 했으나, 중국문화의 근본을 파헤치고, 2천년간 이어져온 유가문화의 전승을 파괴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19475, 해방군이 곡부에서 철수한 후, 공덕성은 남경에서 출발하여 8년간이나 떠나있었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당시 공부에는 수백명의 종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대대손손 공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많은 종들이 말했다. 다시 연성공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공덕성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먹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에서 주는 것이다.

나도 공부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일하는 사람중 우두머리일 뿐이다. 이 말을 한 후, 이 공부의 주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공덕성은 1947년 곡부를 떠난 후, 다시는 공림으로 가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지 못했는데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유감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0세기말, 곡부에는 공부로 명명한 전국을 풍비한 백주 공부가주(孔府家酒)”, “공부연주(孔府宴酒)”가 나타난다.

 

곡부정부대표단은 대만으로 가서 공덕성을 예방하며,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와서 고향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곡부의 대표단은 공덕성에게 호화롭게 포장된 공부가주를 선물했다.

 

공덕성은 포장에 쓰여 있는 공부가주라는 글자를 본 후에 담담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 공씨 집안에 이런 술은 없다

공부가주로도 공덕성의 향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중에 공림이 홍위병의 만행으로 파괴된 사실 때문에 분격하여 이런 술은 모른다고 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1989, 곡부에는 국제공자문화절이 열리고 여러해 동안 중단되었던 공자에 대한 제사의식도 되살렸지만, 마지막 연성공 공덕성을 모시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문혁때의 여러가지 사태들로 인하여 공덕성의 마음에 영원히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1920, 공덕성은 그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공부에서 태어났고, 부친인 공령이(孔令貽)은 공덕성이 태어나기 수개월전에 사망했다.

 

공령이의 첩인 왕씨(王氏)가 출산할 때, 어떤 사람이 영아를 바꿔치기하거나 의외의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당시 북양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산방(産房)을 포위했었고, 곳곳에 보초를 세웠다. 그리고 장군 1명이 공부에 주둔하였으며, 성에서도 관리를 파견했다. 공부내에도 공씨 일족의 어른들이 모여들어 출산을 지켜봤다.

 

공덕성이 출생한 후, 공씨의 족장은 즉시 북양정부 대총통, 총리, 내부총장 및 산동성장에게 서신을 보냈고, 100일후에 작위를 승계했다. 이로부터 공씨집안 사람들은 장유배분을 불문하고 모두 "공야(公爺)"라고 그를 불렀고, 예를 표했다.

 

그 당시는 이미 민국시대였으나, 선통황제는 아직 자금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1924, 풍옥상은 선통제를 황궁에서 쫓아내고, 황제라는 허울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가 없는데, 연성공의 "()"이 어찌 지속될 수 있겠는가? 가죽(황제)이 떨어져 나갔는데 터럭()이 어디에 붙어있을 것인가? 이렇게 하여 19288, 공덕성은 중앙정부에 "연성공"의 작위를 취소해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이 때도 그는 아직 어린아이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대신해서 요청한 것이다.

 

일생동안 삼민주의의 신도라고 자처하던 장개석은 공자의 유가에 대한 보호자이다.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1935118일 남경정부는 결의를 하나 통과시킨다.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는 관직으로 변경시키고 특임관(特任官)의 지위를 부여했다.

19357월 진입부가 주재하고, 대계도가 감독하며, 장개석이 참관한 가운데 공덕성은 취임선서를 하게 된다.

 

장개석은 공덕성을 계속 돌보아 주었고 다음 해 1216, 공덕성이 청나라때 장원급제하였던 손가내(孫家鼐)의 손녀인 손기방(孫琪芳)과 결혼할 때,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하였으나, 돌발한 서안사변으로 참석할 수는 없었다.

 

 

 

 

1936공덕성(쿵더청)의 결혼식

 

1937년에 대일항전이 전면적으로 개시되고, 연말에 일본군이 산동남부로 진입하였다. 곡부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전에, 장개석은 국민당 제20사단 사단장인 손동선에게 명령하여, 부대를 동원해서 공덕성 부부를 공부에서 무한으로 갈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공덕성은 무한에서 항일선언을 발표하고, 무한이 함락된 후에는 다시 중경으로 갔다.

장개석은 중경의 가락산에 그를 위하여 따로 봉사관부를 마련해주고, 국민당 참정회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일항전승리 후에 진행된 국공내전때에도 장개석은 공덕성을 잊지 않고 대만섬으로까지 데려간 것이다. 나중에 공덕성은 대만에서 "고시원장"의 직에 9년간 있었고, "총통부자정(總統府資政, 대통령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대만대학에서 강의하는데 보냈고,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2005년 그는 대수학자인 구성동과 함께 대만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공덕성의 장손인 공수장(孔垂長)"견습봉사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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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대 연성공 공상가부터 시작하여, 공자의 적계후손은 5대때 외동아들로 이어지고 있다.

공덕성의 독자인 공유익(孔維益)은 1989년사망했고,  유일한 손자인 공수장(孔垂長)"견습봉사관"이 되었다.

2006년 원단, 공자의 제80대 적손 공우인(孔佑仁)이 탄생하여 공덕인이 한달동안 고심한 끝에 증손자의 이름를 공우인으로 지어주었다. 우(佑)는 항렬이고 인(仁)은 공자의 핵심사상이다.

이천년을 이어져온 중국제일가인 공자의 성맥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2006년 원단, 공자의 제80대 적손 공우인(孔佑仁) 탄생 (공덕성, 손자 공수장, 증손 공유인)

 

공덕성은 89세를 일기로 2008.10. 28일 오전 10시 타이베이 츠지(慈濟) 병원에서 폐기능 저하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에 따라, 공덕성의 유해는 대만의 삼협공묘에 묻혔는데 역사상 공림에 묻히지 않은 두번째 연성공이 되었다.

곡부의 공림은 공자의 가족묘지로 약 이천여년간 사용했으며, 공씨 자손의 묘가 10여만기에 이른다.

 

만일 역사적인 원인이 아니었다면, 공덕성의 내심에 남은 영원한 상처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죽어서도 이국타향의 고혼이 될 줄은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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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의 후회 / 여씨춘추

 

 

 

사람의 눈과 머리는 너무 믿을 것이 못된다.

 

단면을 보고 단정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채()나라로 갈 때의 이야기이다.

 

도중에 양식이 다하여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그들은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공자도 힘이 없어 잠시 잠이 들었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에 안회(顔回)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어디선가 쌀을 조금 얻어 왔다.

 

그는 빨리 밥을 지어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다.

 

밥이 익어갔다.

 

그 때 공자도 잠을 깼는데 마침 밥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공자는 웬일인가 하여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마침 안회는 솥뚜껑을 열고 있다가

 

밥을 한 움큼 꺼내어 자기 입에 넣는 중이었다.

 

 

 

공자는 생각했다.

 

'안회는 평시에 내가 밥을 다 먹은 후에야 자기도 먹었고

 

내가 먹지 않은 음식이면 수저도 대지 않았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평시의 모습이 거짓이었을까? 다시 가르쳐야 되겠구나.’

 

그 때 안회가 밥상을 차려 공자에게 가지고 왔다.

 

 

 

공자가 어떻게 안회를 가르칠까 생각하다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말했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시더구나.”

 

 

 

공자는, 제사 음식이야말로 깨끗해야하며

 

누구도 미리 손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회도 알기 때문에 그가 먼저 먹은 것을 뉘우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안회의 대답은 달랐다.

 

선생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공자가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런가?”

 

 

 

이 밥은 깨끗하지 않습니다. 제가 조금 전 뚜껑을 열었을 때

 

천장의 먼지가 내려앉았습니다.

 

선생님께 드리자니 어렵고 그렇다고 밥을 버리자니 너무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덜어 내어 먹었습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안회를 의심한 것이 부끄러웠다.

 

공자는 곧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너희들은 알아두거라.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사람의 눈과 머리는 너무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이에 따라 함부로 다른 사람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관한 한 성인 공자도

 

자기의 눈과 머리를 믿지 않았다.

 

독선과 오해는 자신의 눈과 머리를 너무 믿는 데서 생긴다.

 

 

 

- 여씨춘추(呂氏春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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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孔林) 공자 묘(무덤)

 

중국, 한국의 공묘(孔廟)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자의 비석은 1443년 명나라 정통8년에 세운 것으로 <대성지성문선왕묘 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써 있다.

 

1307년 원나라 3대 황제 무종(武宗)이 원나라도 공자의 유교 전통을 계승한다고 표방하며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 大成至聖文宣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공림(孔林)의 공자 무덤 비석을 정면에서 보면 왕() 자의 세로획이 길게 늘어져 있고 맨 아래 가로획이 정면에서 보이지 않게 감춰져 있다.

 

정면에서 보면 왕(王)자가 간()자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 황제가 신분이 낮은 공자 ""에게 머리 숙여 인사(절)하는 게 부적절하기 때문에 이런 꼼수를 쓴 거라고 전하는데 일리는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사연을 보면 글자 한자에도 많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씨춘추 (呂氏春秋)

 

중국 진()나라 때의 사론서(史論書).

구분 : 사론서

저자 : 여불위(呂不韋)

시대 : 중국 진()

 

진시황(秦始皇)의 재상 여불위(呂不韋, ?~235B.C)가 식객들을 시켜 짓게 한 책으로 26권이다. 여람(呂覽)이라고도 한다.

 

전국말(戰國末) 각가(各家)의 사상을 8(), 6(), 12()로 분류하여 수록했는데, 수록량으로는 유가(儒家), 법가(法家), 노장가(老莊家)의 순이며 후세의 고증학자(考證學者)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진나라의 정치가 여불위(呂不韋)가 빈객(賓客) 3,000명을 모아서 편찬하였다.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자부(子部)>의 잡가편(雜家篇)에 수록되었는데, 도가(道家)사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 유가(儒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형명가(刑名家) 등의 설()도 볼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시사(時事)에 관한 것도 수록되어 있어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론서이다.

 

내용은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나누어, <십이기>는 춘하추동 4계절을 맹() ·() ·()3기로, <팔람>은 유시(有始)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으로, <육론>은 개춘(開春) ·관행(慣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으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자 여불위는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하여 완벽한 내용을 과시하였다. 한국에서도 김근(金槿)의 번역으로 1995년 민음사(民音社)에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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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孔子 , Confucius)

 

 

 

출생 - 사망 BC 551 ~ BC 479

 

대표분야 : 유가철학

 

대표이론 : 정명론

 

대표학파 : 선진유학

 

대표저서 : 논어

 

관련철학자 : 맹자

 

 

 

공자의 조상은 송나라 미자(微子)의 후손이다. 아버지 숙량흘은 안씨의 딸 징재와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만 아홉을 두었고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다리 장애인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원했던 그가 안씨의 딸과 혼인하기를 구하자 그 딸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혼인을 했다. 야합(野合)이란 숙량흘은 70살이 넘었는데 안징재는 16세여서 예에 맞지 않음을 일컬은 것이라고도 하나, 아무튼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 안씨가 이구산(尼丘山)에 기도하여 공자를 얻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라고 이름지었다. 공자가 출생한 후 곧 숙량흘은 죽어서 방산(防山)에 묻혔다. 공자는 아버지의 무덤의 위치를 몰라, 어머니가 돌아가자 거리에 빈소를 차렸다. 지방의 나이든 여인이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자 공자는 어머니를 방산에 합장했다. 공자는 가난하고 천하여 자라서는 계씨의 창고지기도 하고 축사지기 노릇도 하였다. 공자는 키가 96촌이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 키다리(長人)'라고 부르며 이상하게 여겼다.

 

 

 

공자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대부 맹희자(孟釐子)가 병이 나서 곧 죽게 되었을 때, 그는 후계자인 의자(懿子)에게 훈계하며 말하였다. "공구(孔丘)는 성인의 후손인데, 그 조상은 송나라에 있을 때 멸망당하였다. 그 조상 불보하(弗父何)는 원래 송나라의 후계자였으나, 아우 여공(厲公)에게 양보하였다. 정고보(正考父)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을 섬길 때,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매번 명을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에 새겨놓은 명문(銘文)에 이르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 절을 한 뒤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중앙을 걷지 않고 담장가를 따라 다녀서 누구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라고 하였다. 그 공손함이 이와 같았다. 내가 듣기로 성인의 후손은 비록 국왕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해도 반드시 재덕(才德)에 통달한 자가 있다. 지금 공구는 나이는 어리나 예를 좋아하니 그가 바로 통달한 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시거라." 희자(釐子)가 죽자 의자는 노나라 사람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해에 계무자(季武子)가 죽고 계평자(季平子)가 대를 이어 경()의 자리에 올랐다.

 

 

 

노 소공(魯昭公) 20, 공자는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과 함께 노나라에 갔는데,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진 목공(秦穆公)은 나라도 작고 외진 지역에 위치하였지만 패자(覇者)가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라는 비록 나라는 작아도 그 뜻이 원대하였고, 비록 외진 곳에 처하였어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 매우 정당하였습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몸소 등용하여 대부(大夫)의 벼슬자리를 내리고 감옥에서 석방시켜 더불어 3일간 대화를 나눈 뒤 그에게 정사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면 (목공은) ()도 될 수 있었는데, 패자가 된 것은 오히려 대단치 않은 것입니다." 경공은 매우 기뻐하였다.

 

 

 

공자가 35세 되었을 때,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 끝에 노 소공에게 죄를 지었다. 소공이 군대를 이끌고 평자를 공격하자 평자는 맹씨(孟氏), 숙손씨(叔孫氏)와 연합하여 3()가 함께 소공을 공격하였다. 소공의 군대는 패해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제나라는 소공을 간후(乾侯)에 거하도록 하였다.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을 토론하였는데 "()"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워,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잊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였다.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고 말했다. 다른 날에 또 정치를 묻자 공자는 정사는 비용을 절약하는 데 있다고 하자, 경공이 기뻐서 장차 공자를 봉하려고 하자, 안영(晏嬰)이 반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유자(儒者)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禮服)을 성대하게 차려 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논어를 보면 공자는 안영은 타인과의 교우 관계가 몹시 좋았다. 관계가 오래 지속될수록 더욱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5-17)라며 안영을 찬양하고 있다. 그 후 경공이 공자를 보더라도 예를 묻지 않았다. 다른 날 경공은 공자에게 선생을 계씨처럼 받들지는 못하더라도, 계씨와 맹씨 사이로 대접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제나라 대부들이 공자를 해치려고까지 하였다. 경공은 나중에 내가 늙었는지라 등용하지 못하겠다"하니, 공자는 다시 노나라로 돌아갔다.

 

 

 

계씨는 공실(公室)을 업신여기고 배신(陪臣)이 국정을 잡으니, 이 때문으로 노나라에서는 대부 이하 모두가 바른 길(正道)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벼슬을 포기하고 물러나 (), (), (), ()을 닦으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시험해 볼 곳이 없음을 답답해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과 호() 지방에서 일어나 왕이 되었다. 이제 비 땅이 비록 작지만,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하고, 가려고 했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를 막자, 공자는 말하였다. “나를 부르는 자는 어찌 아무 생각이 없었겠는가? 만약 나를 써준다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그 뒤에 정공(定公)이 공자를 중도(中都)의 읍재로 삼았다. 일년 만에 사방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공자는 나이 56세에 대사구(大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맡게 되자 기뻐하였다. 또 정치를 어지럽힌 노나라의 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은 지 삼 개월 만에 염소나 돼지를 파는 자는 값을 속이지 않았고, 남녀는 걸을 때 길을 달리하였고,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주워 가지 않았으며, 읍으로 오는 사방의 손님들이 관리에게 허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고, 모두 대접받고 돌아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 일을 전해듣고 두려워하며, “공자가 정치를 하면 반드시 노나라가 패자가 될 것이고, 패자가 되면 우리나라부터 먼저 합병할 것이다하면서,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제나라 가운데서 예쁜 여자 80명을 뽑아, 춤을 가르치고 화려한 옷을 입혀 장식을 한 말이 끄는 수레 30 대에 태워 노나라 임금에게 보냈다. 이에 노나라 임금 이하 신하들이 종일 구경하면서 정치에 태만했다. 그러자 공자는 제사 고기를 보내주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공자는 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위나라 영공(衛靈公)이 묻기를 노나라에서는 녹봉을 얼마나 받으셨습니까?” 하자, “곡식 육 만(2000)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나라에서도 곡식 육 만을 주었다. 얼마 지난 뒤에 공자를 참소하는 일이 생기자 공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열 달 후 위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로 가면서 광 땅을 지나는데, 광 사람들이 공자를 노나라의 양호로 착각하고 공자의 행차를 멈추게 했다.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비슷한 관계로 5일 동안을 구금했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의 집에 머물렀다.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기를 원한다고 했다. 공자는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만났다.

 

 

 

부인은 갈포(葛布)로 만든 발(휘장) 안 쪽에 있었다. 공자가 문으로 들어와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했다. 부인은 발 안에서 재배를 했는데, 차고 있던 패옥이 쨍그렁 소리를 냈다.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마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보지 않지만, 만나는 예로 답을 합니다하였다. 이 일로 자로가 화를 냈다. 공자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내가 만일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릴 것이다!"

 

 

 

공자가 조()나라에서 송()나라로 가는 도중,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를 익혔다. 송나라 사마(司馬) 환퇴(桓魋)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쓰러뜨렸다. 제자들이 떠나기를 재촉하자 공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리셨으니, 환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진()나라에 이르렀을 때,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진나라를 정벌해서 세 읍을 빼앗았고,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회계에서 쳐부수었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무는 3년 동안, 여러 나라들이 계속 전쟁을 벌였다. 진나라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어서 그 나라를 떠나갔다.

 

 

 

또 포 지방을 지나면서 반란자들이 공자를 붙잡아두고 괴롭히며 말하기를, 만약 위나라로만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놓아주겠다 하였다. 그러자 일행은 곧 맹세를 하고 동문으로 나갔다. 그러나 공자는 곧장 위나라로 갔다. 자공이 묻기를 어찌 맹세를 저버릴 수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강요된 맹세는 귀신도 듣지 않는다하였다.

 

 

 

위령공이 늙어 정사에 태만하고 공자를 쓰지 않자, 공자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를 써주기만 한다면 1년만 되어도 좋고, 3년이면 성과를 낼텐데하고 위나라를 떠나갔다. 공자는 서쪽으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황하에 이르렀을 때,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공자는 황하 강물에 서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름답다, 물이여! 저렇게도 출렁거리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지 못함은 운명이로구나!”

 

 

 

자공이 감히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말하였다. “두명독과 순화는 진()나라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세력을 잡지 못했을 때는 그 두 사람 말을 들은 뒤에 정사를 했는데, 세력을 잡은 뒤에는 그들을 죽이고 정사를 하고 있다. 나는 들으니 태를 쪼개 어린것을 죽이면 기린이 들판에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 고기를 잡으면 교룡이 음양을 합하지 못하고, 둥지를 뒤엎고 알을 깨뜨리면 봉황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 군자는 자기와 같은 부류를 해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새나 짐승도 의롭지 못함을 오히려 피할 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랴!” 마을로 돌아와 거문고 가락을 연주하며 슬퍼하였다.

 

 

 

가을에 계환자가 병이 들어 수레를 타고 노나라의 성을 보며 옛날 이 나라가 흥성할 수 있었는데, 내가 공자에게 죄를 얻어 흥하지 못하였구나하고 탄식하며, 아들 계강자에게 내가 죽거든 너는 노나라의 정승으로서 반드시 공자를 모셔와라하고 당부하였다.

 

 

 

아버지를 장사한 다음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려 하자, 공지어(公之魚)가 말하였다. “옛날에 우리 선군께서 그를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하고, 끝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등용하여 끝까지 쓰지 못 하면, 또 다시 제후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대신 제자인 염구(冉求)를 불러들였다. 자공(子貢)은 공자에게 노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있음을 알고 염구를 환송하면서 당부하기를 자네가 등용되거든 곧 공자님을 부르게 하라하였다.

 

 

 

공자가 진·채의 국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초나라에서 공자를 초빙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진·채의 대부들이 모의하면서 공자가 초나라에서 등용되면 우리들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 일행을 들판에서 에워싸고 억류하자 공자는 초나라로 가지 못하고 식량마저 떨어졌다. 따르는 제자들은 굶고 병들어 잘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그런데도 공자가 강송(講誦)과 현가(弦歌)를 그치지 않자, 자로가 성을 내며 군자도 이처럼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자, 공자는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이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자로를 불러 말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했는데, 우리의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로가 말하였다. “우리가 아직 어질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하니! 우리가 아직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억류하고 있으니!” 공자가 말하였다. “대답이 그것뿐이냐! 자로야, 만약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남의 신임을 얻는다면 어째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겠느냐? 또 만약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사람들에게 억류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있었겠는가?”

 

 

 

자로가 나오고 자공이 들어가니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 도가 바로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천하에 어느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낮추시면 어떨까요?”

 

 

 

공자가 말하였다. “자공아, 솜씨 좋은 농부가 씨를 잘 뿌린다고 잘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가 기술을 잘 발휘한다고 꼭 사람들 뜻을 맞출 수는 없다. 군자는 도를 닦아서, 강기(綱紀)하고 통리(統理)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사람들에게 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너는 네 도를 닦지 않고, 포용되기만을 기다리는구나. 자공아, 네 뜻은 원대하지 않구나!”

 

 

 

자공이 나가고 안연이 들어와 뵈니 공자가 말하였다. “안연아, 시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광야를 헤매고 있구나' 하였는데, 우리의 도가 그런 격인가? 내가 여기서 어찌 한단 말이냐?” 안회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천하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선생님께서는 밀고 나아가시면 되지, 남이 용납하지 않음을 어찌 걱정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그가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못함은 나의 부끄러움이나, 도를 크게 닦았는데도 써 주지 않음은 임금들의 부끄러움(잘못)입니다. 용납되지 않음을 어찌 근심하십니까? 용납되지 않은 연후라야 군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냐, 안씨의 아들이여! 만약 네가 재물이 많다면, 나는 너의 재무 관리인이 되리라.” 이에 자공을 시켜 초나라로 보냈다. 초나라 소왕(楚昭王)이 군사를 일으켜 공자를 맞이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마침내 계강자가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불러들이자, 공자는 노나라로 돌아왔다. 노나라를 떠난 지 14년만이었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않자, 공자도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후 육예를 편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데 몰두하였다. 공자가 72세 때 자로가 위나라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공자가 병이 깊은 후 자공이 찾아왔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다가 자공아, 왜 이제야 오느냐?” 하였다.

 

 

 

공자는 탄식하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부러지려나! 철인(哲人)이 시들려나!” 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된지라 아무도 나를 받드는 이가 없구나. 어제 저녁 나는 은나라 식으로 제사 받는 꿈을 꾸었으니, 나의 선조가 은나라 사람임이라고 말하였다. 그 뒤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노나라 애공은 만사(挽詞)하기를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니, 나는 괴로운 아픔 속에 있네. 아아 슬프다! 이보(尼父仲尼 존칭)시여!” 하였다. 이에 자공이 말하기를 애공 임금은 노나라에서 죽지 못할 것이다. 살아서는 써 주지 않고, 죽어서야 만사하여 시호를 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성 북쪽 사수(泗水) 가에 묻혔다. 제자들이 모두 3년 동안 복을 입었다. 자공은 홀로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다시 3년이 지난 후에야 떠나갔다. 제자와 노나라 사람 중에 묘소 밑에서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100여 집이었다. 그래서 공리(孔里: 공자 마을)'가 되었다. 공자 무덤에서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세시(歲時:새 해를 맞을 때)에 제사를 드렸고, 선비들은 향음주와 대사의 예를 행하였다.

 

 

 

한나라 고조 황제는 노나라를 지나가다 태뢰(太牢: 천자에게 드리는 제사)로 제사지냈으며, 제후와 경상들이 오면 항상 먼저 공자 무덤에 참배하고 정사에 나아갔다. 사마천은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하였다. ( 사기』 「공자세가의 내용에서 발췌)

 

 

 

생애 연보

 

B.C.551 아버지의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탄생

 

 

 

B.C.549( 3) 아버지 죽음

 

B.C.535(17) 어머니 죽음

 

B.C.533(19) 결혼

 

B.C.532(20) 아들 리() 출생, 자는 백어(伯魚)

 

B.C.522(30) 자로, 증점, 염백우, 염구, 중궁 등의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함

 

B.C.518(34) 노나라 맹리자가 죽으면서 맹의자 등 두 아들에게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예를 배우라고 당부함

 

B.C.517(35)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함

 

B.C.502(50) 공산불요가 공자를 부름

 

B.C.501(51) 처음 벼슬을 하여 노나라 중도재(中都宰)가 됨

 

B.C.500(52) 다시 사공(司空)이 되고 다시 대사구(大司寇)가 됨

 

B.C.497(55)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감

 

B.C.496(56) 광 땅에서 액운을 만남. 필힐이 부름

 

B.C.495(57) 위나라 영공을 만나 벼슬하고 남자(南子)를 만남

 

B.C.494(58) 벼슬을 그만두고 위나라를 떠남

 

B.C.492(60) 조나라를 거쳐 송나라로 가다가 환퇴의 액운을 당함

 

B.C.489(63) 진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거쳐 위나라로 돌아감

 

B.C.488(64) 다시 위나라(출공 재위4)에 벼슬함

 

B.C.484(68) 노나라 계강자가 공자를 부르자 노나라로 돌아감,

 

          고국을 떠난 지 14년만임. 이후 유약, 증삼, 자하, 자장 등의

 

          제자를 가르침

 

B.C.483(69) 아들 리가 죽음

 

B.C.481(71) 제자 안회가 죽음, 제나라 진항이 임금을 시해하자

 

           노나라 임금에게 토벌을 간했으나 실현되지 않음,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이 사로잡히자 낙심하여 춘추

 

           저작을 절필함

 

B.C.480(72) 자로가 위나라 난리에 죽음

 

B.C.479(73) 세상을 떠남(錢穆, 공자전, 삼련서점, 200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