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루(賜書樓)는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구자 영재(泠齋) 유득공(柳得共, 1748~1807)이 정조(正祖) 이산(李祘, 1752~1800)이 하사한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마련한 서재이다. 김정희 “賜書樓(사서루)”, 19세기 중엽, 종이에 묵서, 26×73㎝, 개인 소장 사서루(賜書樓)는 정조 대왕께서 하사하신 서적을 유득공이 보관하기 위해 마련해둔 서재이다.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 지은 「사서루기」에 사서루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사서루는 내 선군(先君 = 선고先考, 선친先親)이 정조대왕께서 하사하신 서적을 봉장하던 곳이다. 옛교서관 골목에 있는데 다락은 세칸이고 구조는 치밀하고 깨끗하다. 앞에는 작은 밭이 있고 곁에는 찔레와 앵두 대여섯 그루를 심었다. 선군(先君)께서는 퇴근하시면 늘 이곳에서 한가하게 지내셨다. 정조가 1776년 규장각을 건립 하자, 규장각 학사들이 문필이 뛰어난 선비들을 선발하여 속관으로 삼자고 주청했다. 선군(유득공)과 정유 박차수, 아정 이무관이 먼저 여기에 선발되었다. 박공은 시필이 절묘했으며 이공은 박식으로 유명 했다. 선군께서는 내원에 드시자 임금의 은총이 보통을 넘어 안팎으로 관직을 지내시고 마침내 문 학으로 집안을 일으키셨다. 20년을 공직에 계시면서 임금께서 하사하신 국조의 사책, 모훈과 경서, 동국문집, 산록, 집찬이 수백 권이었다. 종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글자체는 가지런했으며 빼곡 이 서가에 꽂혀 있는데 손을 대면 옥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선군께서 이를 위해 건물을 지은 것은 전대에 없던 영광을 드러내고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다. 불초한 형제도 선군을 이어 내원에 출사했는데, 하사하신 서적이 수십권이나 된다. 은영은 더욱 극에 이르렀지만 사실 선군께서 남기신 음덕 때문이었다. 삼가 함께 수장하고 글을 지어 기록해둔다. (박철상,『서재에 살다』,93.4쪽) 사서루를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써주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유득공의 사서루 편액임은 분명한 것 같다. 추사는 신위,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 등과 가깝게 지낸 사이이다. 1813년 어느날 추사는 술에 크게 취해 유본학의 시집을 읽고 그에 대한 비평을 시집 표지에 기록해 둔 사실이 있었다.(위의 책,95-96쪽) 추사는 연행을 다녀온 후 금석문에 몰두했다. 이 때 유본학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유득공의 금석학에 대한 지식들을 접했을 것이다. 유득공은 조선 금석학 연구의 선구자였으며, 김정희는 바로 유득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득공처럼 사서루라는 명칭에 걸맞는 장서를 갖춘 인물도 없었다. 또한 사서루의 조형미에서 장중함이 묻어나는 것도 사서루가 임금님이 내린 서적을 봉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위의 책, 95쪽)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미를 두고 있는 추사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사서루는 추사와 교분이 깊었던 유득공의 아들에게 써준 편액임이 틀림없다. 글씨체로 보나 연대로 보나 사서루는 유득공의 생전에 쓴 작품은 아니다. 「사서루」는 구성과 조형이「잔서완석루」와 거의 같다.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김정희(金正喜,1786-1856),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31.8×137.8cm 같은 연대에 씌여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추사는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지 3년만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길을 떠났다. 이 시절에 추사는「잔서완석루」,「불이선란」 같은 생애 최고의 걸작을 남겨놓았다. 이 때는 이미 유득공의 사후 40여년이 지난 뒤였다.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김정희(金正喜,1786-1856), 조선 19세기, 종이에 먹, 54.9×30.6cm 사서루(賜書樓)는 사라졌으나 사서루(賜書樓)의 글씨는 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추사의 편액 으로 추사는 유득공에게 진 학문의 빚을 갚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씨 하나가 잃어버린 시간의 징검다리가 되어 새로운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유홍준의 사서루의 조형미 감상을 덧붙인다. 예서체의 중후한 골격을 기본으로 행서의 자율적인 변형을 가한 작품으로, 글씨의 머릿줄을 가 지런히 하고 하단을 자유자재로 풀어주는 힘과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내리긋는 견획 은 모두 기둥뿌리처럼 튼튼하게 하고 가로 삐친 횡획은 서까래같은 기분까지 내었다. 완당 글씨의 탁월한 조형미는 여기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 남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파격의 개성미를 완당은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유홍준의 ‘완당평전’에서) “추사의 재능은 감상이 가장 뛰어났고, 글씨가 그 다음이며, 시와 문장이 또 그 다음이다. (秋史之才 鑑賞最勝 筆次之 詩文又次之).” 여기서 말한 감상이란 예술적 가치를 변별해 내는 안목과 감식(鑑識)을 의미한다. 추사는 자신이 감정한 작품에는 ‘추사상관(秋史賞觀)’ ‘추사심정(秋史審定)’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그 중에는 아마도 가짜에 찍었을 ‘오(誤)’라는 도장도 있다. 추사는 중국의 서화까지 감정하였다. 그의 평생 지기인 이재 권돈인이 송나라 황정견의 글씨, 원나라 조맹부의 말그림, 명나라 심석전의 산수화 등 중국 서화 10여점의 감정을 추사에게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각 작품의 질, 내력, 도서 낙관, 문헌자료, 그리고 자신의 소견을 밝힌 글을 보면 그 엄격한 논증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權敦仁筆歲寒圖 (권돈인필세한도) 權敦仁筆歲寒圖 (권돈인필세한도) 권돈인(權敦仁) : 1783년~1859년 / 조선 말기 문신 서화가/ 1845년 영의정 종류 : 수묵화 재질 : 지(紙) / 종이에 먹 기법 : 지본수묵 (紙本水墨) 크기 : 21.0 x 101.5cm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歲寒圖(세한도)제목 서체는 추사의 솜씨로 알려져 있다. 두 거장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합작도인 셈인데 이재 권돈인의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가려져 덜 알려졌지만 비슷한 시기에 세한도를 남겼다. 세한도 하면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지만, 조선 후기 삼정승을 지낸 이재(彛齋) 권돈인(1793-1859)도 '세한도'를 남겼다. 이재와 추사는 같은 시대 사람으로 추사와 서첩을 주고받았던 절친한 관계였다. 세한도 제목 옆에 찍힌 장무상망(長毋相忘 : 서로 오래 잊지 말자)이란 인장을 보면 서로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된다.
추사는 일찍이 서화 감상에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강역사 같은 무서운 눈,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 같은 치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금강안이라고 불렀다.
그 추사 일파 중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흥선대원군인 석파 이하응이다. 석파는 낭인시절에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돌아온 추사를 용산의 강상으로 찾아가 난초 그림을 배웠다. 그런데 2년여 뒤, 추사가 이번엔 북청으로 귀양가는 바람에 그 가르침이 중단되었고 그 후 1년 지나 과천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자신이 그린 난초 그림을 갖고 추사에게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때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 화첩에 쓰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하응, ‘석란’(대련), 1887년, 비단에 수묵, 각 폭 151.5×40.8㎝, 호림박물관 소장
“보여주신 난초 그림에 대해서는 이 늙은이도 의당 손을 오무려야겠습니다. 압록강 이동에 이만 한 작품은 없습니다. … 내가 난초를 그리지 않은 지 2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이 늙은이에게 난초를 요구하는 사람은 석파의 난초를 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사는 절대로 그냥 칭찬만 하는 분이 아니었다. 이런 찬사는 애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격려 차원인 것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글 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구천구백구십구 분까지 이르렀다 해도 나머지 일 분만은 원만히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일 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2% 부족이 아니라 0.01%의 부족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추사는 만년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사자는 코끼리와 싸울 때도 온 힘을 다하지만 토끼를 잡을 때도 온 힘을 다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추사를 타고난 천재라고 말하곤 하지만 추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추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실로 자랑스러운 고백이다. 추사는 이처럼 무서운 장인적 수련과 연찬을 거쳤다. 추사 김정희의 금강안은 진정한 장인정신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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