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 예 방/추사 김정희

수선화부 (水仙花賦) - 추사 김정희

by 연송 김환수 2020. 4. 8.

추사 김정희 수선화부 (水仙花賦)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禿潁亂抹橫蔬, 其揆一也. 憨翁

  조이옹이쌍구작수선, 금내역지이독영란말횡소, 기규일야. 감옹

 

  중국 원나라의 조맹견(彛齋 趙孟堅)이 쌍구로써 수선화를 그렸는데, 지금 모지랑 붓으로 바꿔

  되는 대로 그렸으나 그 법도는 한 가지다. 감옹

  위 내용 중 감옹(憨翁)은 우봉 조희룡의 호()인 석감(石敢, )으로 보아 수선화 그림과

  글씨가 추사가 아닌 조희룡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소치 허련(許鍊, 1809-1892)

 탁본첩 /  34.037.04.5(cm)  / 예산군 추사고택 소장

 

수선화부(水仙花賦)는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글로,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옮겨 적은 것인데, 소치 허련(許鍊, 1809-1892)이 이를 다시 간인(刊印)한 것이다.


앞부분에 추사가 그린 수선화가 있고, 뒤이어 완당탁묵(阮堂拓墨) 벽계청장관장판(碧溪靑嶂館藏板)’과 추사의 상반신을 그린 완당선생진영(阮堂先生眞影)’과 함께 추사의 화상자찬(畫像自讚)’, ‘문생 소치 허련 공모(門生小癡許鍊恭摹)’가 있다.


소치가 간인한 추사 탁본첩 가운데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출처 : 예산군청



===================================================================================


[탁본] 수선화부(水仙花賦), 추사, 또는 우봉 조희룡 / 원각사 성보 박물관

 

김정희(金正喜)의 작품으로 알려진 수선화도(水仙花圖), 이에 대해 글을 쓴 수선화부를 목판에 음각하여 인출한 탑본첩이다. 추사체의 기준작 중 하나로, 널리 목판본으로 보급되었다. 권두에 청기간고(淸奇簡古)라는 대자(大字)를 써 놓았고, 권말에는 난화(蘭畵) 다섯점을 덧붙여 따로 첩을 꾸며 놓았다.

수선화도의 낙관과 화제가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의 것이고, 개인 소장 중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부는 목판본과 필체가 달라 추사의 제자 조희룡의 작품이라는 설도 있다.

 



   水仙花賦 (수선화부)

   22.1×17.5  /  1冊 拓本  發行者不明 發行年不明  揷圖


 

추사의 유명한 [수선화] 서화 목각탁본과, 완당 김정희의 서법첩으로, [수선화부]의 합본첩이다.

권 후반까지 [수선화부]란 제목의 추사 김정희의 탁본첩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로 뒤 2쪽에 걸쳐 추사가 그렸다는 유명한 수선화 그림과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글을 추사가 옮겨 적었다는 목각 탁본이 있다.

 

수선화 그림 옆에는 다음의 화제(畵題)와 함께 낙관이 새겨져 있다.

 

趙彛翁以雙鉤作水仙, 今乃易之以禿潁亂抹橫蔬, 其揆一也. (낙관)憨翁

조이옹이쌍구작수선, 금내역지이독영란말횡소, 기규일야. 감옹

 

위 내용 중 감옹(憨翁)은 우봉 조희룡의 호()인 석감(石敢, )으로 보아 수선화 그림과 글씨가 추사가 아닌 조희룡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 책의 권두에는 필사로 한쪽 당 1글자씩 크게 청기간고(淸奇簡古)’라 써 추사의 기품을 칭송하고 있으며, 권말에는 10쪽에 걸쳐 난()5점 그려 두었다.

 

이성(伊城) 공립초등학교(公立國民學校)’라는 소장자의 글씨가 뒷 표지에 적혀 있는데 전북 완주에 소재했던 학교의 이름과 동일하다.

-----------------------------------------------------------------------------------


조희룡 (趙熙龍) / 1797(정조 21)~1859(철종 10) /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敢())·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매수(). 중인출신으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46(헌종 12) 헌종의 명으로 금강산을 탐승하고 시를 지어 바쳤으며, 1848년에는 궁궐편액의 글씨를 쓰라는 명을 받았다. 1851(철종 2) 김정희(金正喜) 일당으로 지목되어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20대에는 이학전(李鶴田이재관(李在寬) 등과 교유했으며, 1847년에는 유최진(柳最鎭전기(田琦) 등과 벽오사(碧梧社)를 결성하고 김정희파의 여항문인 서화가들과 시··화를 통해 교유했다.

 

김정희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화를 배우고 19세기 중엽 화단에서 중추적 구실을 했다. 고서화와 함께 골동품을 좋아했고 중국과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청나라 화적을 직접 소장하고 비평을 하는 등 그림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었다.

 

화론에서는 수예(手藝)를 강조하고 재능을 중시하여 서화가에게는 학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손의 재주, 즉 기량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산수와 함께 사군자를 특히 잘 그렸으며, 김정희가 강조했던 간일한 남종문인화풍에 토대를 두되 다양한 구도와 담채의 대범한 구사, 필치의 자유로운 운영,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는 실험의식, 거리낌없는 표현력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했다.

 

글씨는 추사체를 따랐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매화서옥도 梅花書屋圖(간송미술관) 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인전기집인 호산외사 壺山外史, 귀양시의 기록인 해외난묵 海外蘭墨, 회고록인 석우망년록 石友忘年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