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호호공(且呼好共) 등 - 추사 예서(隸書) 작품
차호호공(且呼好共)
김정희 필 차호호공(金正喜 筆 且呼好共)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예 작품이다. 2018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79호로 지정되었다.
且呼明月成三友 (차호명월성삼우) /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好共梅花住一山 (호공매화주일산) /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
이 작품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정희의 학문이 예술과 결합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필획 사이의 간격이 넉넉하고 자획의 굵기가 다양하며, 빠른 붓터치로 속도감 있는 비백(飛白) 효과를 내는 등 운필(運筆)의 멋을 최대한 살린 김정희 서예의 대표작이다.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 桐人仁兄印定. 阮堂作蜀隸法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친구를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더불어 한(같은) 산에 사네.
- 동인 인형께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바라며 완당이 촉예법으로 쓰다.
첫 번째 폭에 '桐人仁兄印定'의 '仁兄'이라는 말은 친구이거나 혹은 손아래 사람이라도 친한 사이에 상대를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印定'이라는 말은 '도장을 찍듯이 정확하고 정직하게 바른 말로 내 작품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미의 겸사이다.
추사가 쌍낙관으로 쓴 '桐人'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추사에게 글씨를 배운 동암(桐庵) 심희순(沈熙淳)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폭에는 “촉(蜀)의 예서 필법으로 쓰다(作蜀隸法)”라는 글귀를 넣어 중국 촉나라 시대의 비석에 새겨진 서체를 응용했음을 밝혔다.
일반적으로 촉예(蜀隷)는 날카로운 파체(破體)를 구사한 한나라 예서[漢隷]에 비해 단정하고 예스러운 필치가 특징이다.
관지의 마지막 구절에 '촉예법(蜀隸法)'은 “촉(蜀)의 예서 필법으로 쓰다(作蜀隸法)”라는 글귀를 넣어 중국 촉나라 시대의 비석에 새겨진 서체를 응용했음을 밝혔다.
차호호공의 내용과 서예 분석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김정희 묵서 대련 <차호호공>’은 각각 135.9 × 30.2㎝ 크기의 종이에 예서로 대련을 쓴 작품이고, 견으로 장황한 족자의 형태이다.
본문은 각각 7자씩 14자를 예서로 썼고, 방서(傍書)는 각각 행서로 쌍관(雙款)을 하여 동인(桐人)에게 써 준 작품이다. 본문과 방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서로 쓴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且呼明月成三友 好共梅花住一山 (차호명월성삼우 호공매화주일산)
잠시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을 이루고, 좋아서 매화와 함께 한 산에 사네.
행서로 쓴 방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桐人 仁兄印定 阮堂作蜀隸法 (동인 인형인정 완당작촉예법)
○ 桐人(동인)은 『澗松文華』제71호에 의하면, 심희순(沈熙淳)인 듯 하다고 하였다.
심희순(1819-?)은 자가 호경(皞卿), 호는 동암(桐庵)이다. 우의정 심상규(沈象奎, 176-1838)의 손자이고, 심정우(沈正愚)가 족손인 그를 양자로 맞아 후사로 삼았으며,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헌종 10년(184)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헌종 12년(1846)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으며,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삼사의 여러 직을 거쳐 철종 7년(1856)에는 이조참의, 다음 해에는 대사성을 지냈다.
김정희의 문하생으로 구양순체를 잘 써서 칭찬을 받았다. 그는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만났던 제자로 1년 동안 30여 통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이고, 북청 유배시절에는 큰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 印定(인정)은 고정되어 변함이 없다는 뜻이니,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작품을 바로잡아 달라는 의미의 겸사(謙辭)이다.
○ 蜀隷法(촉예법)은 촉(蜀)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각석들 예를 들면, <개통포사도마애각석(开通褒斜道摩崖刻石)>ㆍ<석문송(石門頌)>ㆍ<서협송(西狹頌)>ㆍ<부각송(郙閣頌)> 등과 같은 예서 필법을 일컫는다.
------------------------------------------------------------------------------------
大烹高會(대팽고회)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여손)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김정희 필 대팽고회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세상을 뜬 해인 1856년(철종 7)에 쓴 만년작(晩年作)으로, 행농(杏農)이라는 호를 쓴 인물에게 써 준 작품이다. 두 폭으로 구성된 분당지(粉唐紙) 위에 예서(隸書)로 쓴 대련(對聯) 형식이다.
글씨의 내용은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吳宗潛)의 「중추가연(中秋家宴)」이란 시에서 연유한 것으로,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ㆍ오이ㆍ생강ㆍ나물이고, 성대한 연회는 부부ㆍ아들딸ㆍ손자이네(大烹豆腐瓜薑菜」高會夫妻兒女孫)”라는 글귀를 쓴 것이다.
평범한 일상생활이 가장 이상적인 경지라는 내용에 걸맞게 꾸밈이 없는 소박한 필법으로 붓을 자유자재로 운용해 노(老) 서예가의 인생관(人生觀)과 예술관(藝術觀)이 응축되어 있는 만년의 대표작이다. 김정희의 인생에 대한 태도와 성숙한 필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서예사에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작품이다.
---------------------------------------------------------------------------
春風秋水(춘풍추수) / 春風大雅(춘풍대아), 130.5×29㎝, 간송미술관 소장
春風大雅能容物(춘풍대아능용물)
秋水文章不染塵(추수문장불염진)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 대아 - 시경의 편명.
* 추수 - 장자 외편의 편명.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만년에 서울 봉은사에 머물면서 휘호(揮毫)한 유작으로 유명하다. 추사의 60평생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 구절은 중국 북송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 형제의 인품과 학덕을 칭송하는 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정명도에 대해 春風大雅能容物이라고 했고, 정이천에 대해서는 秋水文章不染塵이라 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일컬어 이정(二程) 또는 이정자(二程子)라 했다. 두 사람의 학문을 일러 '이정이학(二程理學)'이라 했다.
또한 두 사람은 소강절(邵康節), 주렴계(朱濂溪), 장횡거(張橫渠)와 함께 북송(北宋) 5현(賢)으로 꼽혔다.
여기에 주희(朱憙)를 포함시켜 육군자(六君子)라 부르기도 했다.
春風大雅(춘풍대아) = 春風秋水(춘풍추수)
春風大雅能容物 (춘풍대아능용물) 봄바람의 큰 부드러움은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고
秋水文章不染塵 (추수문장불염진) 가을물의 물무늬는 티끌 먼지가 더럽힐 수 없다
봄바람 같은 시(詩)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다 받아들인다.
가을 물빛 같은 산문은 세상의 한 점 티끌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깨끗하다.
「춘풍대아」는 추사의 만년 명작이다. 추사는 1809년 10월, 24살 때 생부인 동지부사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갔다.
이 때 등석여(1743-1805)의 대련 「춘풍대아」를 보았을 것이다. 등석여는 추사보다 마흔 세 살 많은 사람으로. 그 때 그는 이미 4년 전에 작고한 뒤였다.
등석여는 청대 중기의 서예가로 모든 체에 뛰어났다. 특히 전서는 진의 이사와 당의 이양빙에 필적하고, 예서도 청조의 제일인자로 불리워지고 있다.
비학파(碑學派)의 비조이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동안 전서는 많은 서예가들에게 부담스러운 서체였다. 인장 글씨,부적,비석의 머리글에 쓰여 신성한 글자로 인식되어 왔다.
이 서체가 잘 쓰이지 않은 것은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서체에 능한 사람들도 전혀 필법이 다른 전서를 쓰려면 거의 초보수준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등석여는 오랫동안 고서를 연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전서는 그 법을 알고 나면 어린 아이라도 일주일이면 쓸 수 있다, 전서의 법식은 역입도출이다.”
그는 설명한다. 먼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붓을 역입해서 붓을 움직이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필봉을 감추어진 상태로 누른 뒤 그 탄력으로 운필을 해 마지막에 가서는 붓을 반대로 오던 방향으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이와 같 이 운필을 하면 시작과 끝이 둥글게 되고 모든 붓의 털이 종이에 고르게 힘이 미쳐 만호제력(萬豪齊力)하니 필획에서 윤기가 나고 힘이 충만해진다고 그는 말한다. 이 노하우가 등석여를 전서의 신품의 경지에 올려놨다.
추사는 서예가이자 전각의 달인인 그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이상국, 추사에 미치다, 295 P 부분 발췌)
등석여 春風大雅(춘풍대아), 폭 121.5 x 25.5 cm 소장자 미상
등석여의 춘풍대아는 추사가 연경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행방 불명이다.
등석여가 쓴 '가을 추(秋)'자의 모습이 이상하다.
등석여가 쓴 '가을 추'는 '가을 추'로 읽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추사가 남긴 메모를 보면 분명히 '가을 추(秋)'라 쓰여 있다,
------------------------------------------------------------------------------------
積雪滿山(적설만산) / 27.0×22.9cm
積雪滿山 江氷欄干 指下春風 乃見天心 - 居士 題(거사 제)
(적설만산 강빙란간 지하춘풍 내견천심)
눈이 쌓여 산을 뒤덮고 강의 얼음은 난간을 이루었는데
손가락 끝에 봄바람 이니 이내 천심을 알겠구나
2018년 2월 보물 지정 심사 당시 화법서세, 호고연경을 탈락시켰다.
간송미술관 측의 이야기로는 '화법서세(畵法書勢)'는 "더 수준 높은 추사 작품이 많다",
'호고연경(好古硏經)'은 "보존 상태가 나쁘다"는 것이 탈락 배경이라고 한다.
畵法書勢(화법서세)
화법서세(畵法書勢), 129.3×30.8cm, 간송미술관 소장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書勢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화법(畵法)에는 장강(長江) 만리(萬里)가 들어 있고,
서세(書勢)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협서(夾書), "근래 사람들은 붓에 먹을 적게 찍어 가지고 원대(元代)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황한간솔(荒寒簡率)한 맛을 내려고 하는데 이는 모두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왕유(王維), 이사훈(李思訓), 이소도 부자(李昭道父子), 조영양(趙令穰), 조맹부(趙孟採)는 모두가 청록색을 사용한 것이 더 우수하였다. 품격이 높다는 것은 형태가 아니요 정신이다.
이 정신을 체득한 사람이면 청록이나 니금(泥金)을 사용해도 좋다. 서법도 마찬가지다."
好古硏經(호고연경)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
硏經婁日罷吟詩(연경루일파음시)
옛 것을 좋아해 때로 깨진 비갈을 찾고,
경전연구 여러 날에 끝내면 시를 읊는다.
好古硏經(호고연경)
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 (호고유시수단갈 연경루일파음시)
"옛 것을 좋아해 때로 깨진 비갈을 찾고, 경전연구 여러 날에 끝내면 시를 읊는다."
측면의 긴 관기(款記)는 ‘죽완(竹琬)’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에게 이 글씨를 보내면서 쓴 것으로, 그가 늘 주장하던 서법(書法)의 기원이 예서와 촉비(蜀碑)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관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竹琬雅鑑幷請削定 近日隸法 皆宗鄧完白 然其長在篆 篆固直遡泰山琅邪 有變現不測 隸尙屬第二如伊墨卿 頗奇古 亦有泥古之意 只當從五鳳黃龍字 參之蜀碑 似得門徑
(죽완아감병청삭정 近日隸法 개종등완백 연기장재전 전고직소태산랑사 유변현불측 례상속제이여이묵경 파기고 역유니고지의 지당종오봉황룡자 참지촉비 사득문경)
“죽완(竹琬) 선생님,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근래에 모두들 예서로 등완백(鄧完白)들 으뜸으로 생각하나 사실 그의 글씨는 전서가 대표적입니다.
그의 전서는 태산과 낭야에 새겨져있는 진(秦)나라의 전서법을 그대로 재생해서 변화불측의 묘를 얻었고 예서는 오히려 그 다음입니다.
이묵경(伊墨卿, 秉綏)과 같이 기고(奇古)한 면은 있으나 역시 옛 법에 얽매이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예서는) 서한(西漢)의 오봉 황룡(BC)시대의 문자를 좇고 촉비(蜀碑)를 참작해야만 실마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
2018년 2월 보물 지정 심사 당시 계산무진, 명선, 화법서세, 호고연경을 탈락시켰다.
학계 및 전문가들의 의견과 사회적 상황을 고려할 때 더 수준 높은 추사 작품이 존재하고 있거나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 또는 섣불리 진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로 지정하려면 학계에서 이견이 없어야 한다"며 "해당 작품의 경우 '정말 추사의 작품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등 이견이 있었다"고 탈락 배경을 설명했다.
당시 문화재청 보물로 지정 신청된 작품은 총 8점이다. 모두 간송미술관 소장이며 이 중 4점이 보물로 지정되고 나머지 4점은 탈락했다. 보물로 지정된 작품은 △대팽고회 △차호호공 △침계 △서원교필결후 4점이다. 탈락한 작품은 △계산무진 △명선 △화법서세 △호고연경이다.
金正喜 筆 書員嶠筆訣後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 - 서울특별시 성북구 간송미술관
○ 수 량 : 1첩(帖) / ○ 규 격 : 26.1×15.0cm / ○ 재 질 : 종이 / ○ 형 식 : 첩(선풍엽)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서결ㆍ전편』의 자서(自序)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을 행서로 쓴 것이다.
2018년 6월 27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82호로 지정되었다.
김정희의 친필 원고이자 이광사의 서예 이론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글씨를 연마하는 데 있어 금석문 고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은 우리나라 서예이론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이는 김정희의 서론(書論)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며, 추사체(秋史體)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행서는 조선 말기 서예를 대표할 만한 격조를 보여준다.
서첩에 수록된 3점의 수묵산수(水墨山水) 역시 김정희가 즐겨 그린 문인화(文人畵)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서 예 방 > 추사 김정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란(墨蘭)-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0) | 2020.07.06 |
---|---|
김정희 필 난맹첩(金正喜 筆 蘭盟帖) (0) | 2020.04.21 |
사서루(賜書樓) - 추사 (0) | 2020.04.12 |
[조선의 아버지들] 조선 최고 서예가 김정희 (0) | 2020.04.11 |
추사 김정희 간찰, 암행어사 보고서 (0) | 2020.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