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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서예 5체 학습자료 등

한자서체 종류 및 변천

by 연송 김환수 2020. 3. 12.

한자서체(漢字書體)의 종류와 변천사

 

중국 한자의 서체 변천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문자이다 보니 그 변천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자 서체는 갑골문, 금석문(금문,석문), 간문(죽간,목간), 백문(비단글씨), 전서(소전), 예서, 해서, 간체자(간화자)의 순서로 변천이다.

 

한자 서예는 "전예해행초(篆隷楷行草)" 곧 전서(篆書)ㆍ예서(隷書)ㆍ해서(楷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분류한다.

행서와 초서는 예서와 해서의 필기체 일종으로 보완적 서체이다.

 

일반적인 순서는 대략 갑골문, 금석문, 전서(소전), 초서, 예서, 해서, 행서, 간체자(간화자)의 변천이다.

 

전서는 갑골문, 금문, 석문 등과 대비하여 전문(篆文) 이라고도 하고,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과 대비하여말할때는 전서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篆書(전서)를 새기는 것을 篆刻(전각)이라 말한다.

 

□ 서체종류

 

◇ 甲骨文(갑골문) : 거북 배딱지와 소의 어깻죽지 뼈에 새긴 글자

◇ 金文(금문) : 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

◇ 璽文(새문) : 황제나 황후가 사용하는 인장에 새겨진 문자 / 小篆(소전)에 속함.

◇ 簡文(간문) : 대나무에 새겨진 문자 / 한나라 문자

◇ 摹印(모인) : 고인(古印)을 후인들이 모방해 새긴 문자

◇ 小篆(소전) : 진()의 시황제가 문자의 정리와 통일을 하기 위해 재상인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만든 한자서체의 하나

◇ 篆書(전서) : 진나라 때 제작된 小篆(소전)이전의 甲骨文(갑골문), 金文(금문)을 묶어 大篆(대전)이라 칭하고, 小篆(소전)과 大篆(대전)을 묶어 篆書(전서)라 한다. 이것을 새기는 것을 전각(篆刻)이라 한다.

甲骨文(갑골문)이 가장 오래되었고, 璽文(새문)은 小篆(소전)에 속하고, 簡文(간문)은 한나라 때 문자이다.

◎ 甲骨文(갑골문) / 은(殷)나라 = 商(상)나라

지금까지 수집된 상(商)나라 갑골문자의 수는 대략 4천개에 달하는데 약 1000글자 정도 해독이 되었다.

 

◎ 金文(금문) / 은(殷)나라, 주나라

지금까지 수집된 주나라 금문의 수는 6천여 개에 달하는데 그 중 절반 정도 해독 되었다.

 

◎ 小篆(소전) : 전서(篆書) / 대전(大篆) : 주나라, 춘추전국시대 / 小篆(소전) : 진나라

주나라가 망하고 춘추전국시대(BC770~476)가 되면서 각 제후국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글자를 쓰다가 시황제 영정이 나라를 통일하면서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字體(대전체)를 바탕으로 문자를 통일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小篆(소전)체다.

갑골문, 금문으로 이어진 자체가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면서 소전체로 굳어진다. 진시황의 이 업적이 한자의 표준화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업적으로 만리장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일이다.

 

◎ 草書(초서) - 진말한초(秦末漢初, 전한 (한나라)

발생시기는 "한조(漢朝)가 흥하자 초서(草書)가 나왔다"는 《설문해자(說文解字)》서문(序文)을 보듯이 예서(隸書)가 한창 번성하던 한(漢)나라시대에 함께 등장했는데, 초기의 장초(章草)에서 동진(東晋)시대의 금초(今草)와 당(唐)나라 때의 광초(狂草)까지 다양하게 발전을 하지만 실용성은 떨어지게 된다.

해서와 함께 한 왕조 초기에 예서를 빠르게 변형시킨 草書(초서)가 나왔다.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의 규격성과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 획을 연결해서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발전한다.

 

◇ 장초(章草) : 초기의 초서체로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예서체(隸書體)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장제(章帝)가 즐겨 써서 장초(章草)라고 합니다.

 

◇ 금초(今草) :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시대에 장초(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 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초서(草書)의 틀을 의미하게 됩니다.

 

◇ 광초(狂草) :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의 광초(狂草)는 당(唐)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합니다.

 

◎ 隸書(예서) / 한나라

진나라 말기부터는 소전체를 바탕으로 隸書(예서)라는 자체가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 자체가 漢(한) 왕조에서 통용되었던 자체다.

獄司(옥사:감옥을 관리하는 하급관리)들이 사용했던 자체라고 하는데, 옥사를 맡아보던 사람들이 주로 노예 신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예가 쓰던 글자라고 해서 隸書(예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예서의 특징은 마치 八(여덟 팔)자처럼 좌우로 납작하게 나뉘어(分) 늘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예서를 八分(팔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楷書(해서) / 남북조, 당나라 초기

한 왕조 말기에 이 예서를 바탕으로 하여서 지금까지 통용(주로 한국에서. 일본은 세자, 중국은 간자/간화자/간체자를 쓴다)되는 글자인 楷書(해서)가 쓰이게 된다. 글자의 모범, 바탕이 되는 자체라고 해서 ‘楷(본보기, 모범 해)書(글씨 서)’라고 하는 것이다.

 

◎ 行書(행서) / 위진시대 이후

草書(초서) 이후에 예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인 行書(행서)가 만들어졌다.

예서보다 빨리 쓸 수 있고, 초서보다 읽기에 쉬워서 널리 쓰인 서체가 행서다.

 

◎ 簡化字(간화자) : 간체자(簡體字) / 현대 중국

行書(행서) 이후 중국에서는 簡化字(간화자)를 발표하여 쓰고 있는데; 해서체가 익히기 어려워서 문맹률이 높은 것이라면서 만든 것이 바로 간화자(간체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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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골문 (甲骨文)

 

甲骨의 '甲(갑)'은 거북의 배 껍질의 의미이고, '骨(골)'은 소 같은 짐승의 어깨 뼈나 넓적다리 뼈 같은 것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1,000년 무렵까지 있었던 중국 고대 은(殷)나라[商(상)이라고도 함]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등의 국가 중대사부터 모든 행위와 현상을 제사장이 천신(天神)이나 자연신(自然神), 혹은 조상신(祖上神)에게 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습니다.

 

점을 치는 방법은 주로 갑골에 구멍 같은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에 올려놓고, 열로 인해 그 흠집으로부터 갈라진 방향에 따라 길흉(吉凶)의 판단했습니다. 주로 점을 친 후에 그 결과를 갑골에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갑골문은 "복사(卜辭)"라고도 불리고, 칼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계문(契文)'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1899년 홍수 때 처음 발견된 갑골문은 그 지역[현재 하남성(河南城)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이 은(殷)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옛터'라는 의미로 '은허(殷墟)'라고 불리고 그 문자를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합니다.

 

- 갑골문의 특징

갑골은 그 자체가 아주 딱딱하기 때문에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 청동(靑銅) 같은 금속이나 경옥(硬玉) 같은 단단한 칼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갑골문은 서체가 가늘고 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갑골문은 먹이나 붉은 먹을 이용해 붓으로 쓰여진 것들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은 원시 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화적 요소가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묘사해 문자화했기 때문에 상형문자(象形文字)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로 단독적인 독체자(獨體字)[文]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대략 4,000여 자 정도를 확인했는데, 아직 상당수의 글자는 해독을 못하고 있고, 특이한 점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도 그 모양의 차이가 상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금문(金文)

 

'金(금)'은 고대부터 금속의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글자이기 때문에 금문의 '金'은 중국 고대 청동(靑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 틀[거푸집]에 새겨 넣은 글자들인데, 이로 인해 금문의 다른 명칭으로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악기류(樂器類)의 쇠북[鐘]이나 예기류(禮器類)의 솥[鼎]의 이름에서 유래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합니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 시절의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이전 왕조인 은(殷)나라에서 사용된 금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후대 철기(鐵器) 시대인 한(漢)나라 때까지 금문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사용 시기로 인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골문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자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아울러 금문이 새겨진 기물(器物)에는 한 글자만 주조된 것부터 몇 백 글자가 주조된 기물까지 발견되었는데, 새겨진 내용으로는 주조된 청동 기물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표시하거나 주조된 연원이나 기물의 주인 등을 표시했고, 또한 전반적인 당시의 상황인 전쟁이나 제례(祭禮), 계약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나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금문의 특징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의 틀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기에, 주조되어 완성된 기물(器物)에 명확하게 글자가 보여지기 위해서는 새기는 글자의 크기가 크고 굵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늘고 긴 서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갑골문과 비교하면 금문은 넓고 굵은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유로 인해 동일한 글자가 여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체자(異體字)가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에 비해 금문은 회화적 요소로부터 점차 문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기호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 점차 문자의 틀이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두 개 이상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합체자(合體字)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3. 전서(篆書)

 

1) 대전(大篆)

전서(篆書, 篆;새기다, 도장, 꽃무늬)는 대전과 소전으로 나뉘는데, 대전(大篆)은 청동기 시대 주(周)나라 의왕(宜王) 때 태사(太史) 주(姝)가 갑골문(甲骨文)과 금석문(金石文) 등의 옛 글자체를 다듬어 만들었다고 한다. 공자님이 쓰시던 글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2) 소전(小篆)

주나라 후기인 춘추전국시대에는 대전체가 성립된지 오래되어 나라마다 글자체가 조금씩 다르게 변하면서 서로 읽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진(秦)나라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아마도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그 동안 각 나라마다 각기 다르게 쓰이던 각종 글자를 통일하고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소전(小篆)이다. 재상 이사(李斯:?∼BC 208)가 대전을 간략하게 하여 만든 문자를 황제에게 주청하여, 이제까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하고 통일하였다고 한다.

 

본래 전서(篆書)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소전(小篆)을 주로 말합니다. 은대(殷代)와 주대(周代)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주(周)나라 말기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 지역별 문화의 특성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문자 역시 각 지역의 국가별로 개별적 특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문자통일(文字統一)이라는 것이 바로 소전(小篆)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이 승상(丞相)이었던 이사(李斯)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키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진나라가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주나라 선왕(宣王)때 태사(太史)인 사 주(史)가 만들어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까지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량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통일 이전 사용하던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한 조형미를 지녔던 문자를 대전[大篆 - 혹은 주의 태사가 만든 글이라는 의미로 주문(文)이라고도 함]이라 하고, 통일된 새로운 문자를 소전[小篆 - 혹은 '진나라의 전서'라는 의미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함]이라 합니다. 하지만 진의 흥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소전이었기에, 사용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金文字의 서체인 예서(隸書)가 등장하게 됩니다.

 

- 전서(소전)의 특징

앞서 소전(小篆)의 특징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골문과 금문이 지닌 단점 중의 하나인 동일 글자의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들로 인해 통일성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비해 소전은 인위적으로 통일을 시켰기 때문에 자형의 불일치를 완전하게 해소해 여불위(呂不韋)의 말대로 '一字千金(일자천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상형(象形)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문자학(文字學)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한 문자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가장 미흡한 점이 서체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을 모두 둥글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4.초서(草書)

초서(草書)가 전한(前漢) 무렵에 전서(篆書)의 필기체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서를 간략하게 쓰는 고초(古草)와 예서를 간략하게 쓰는 장초(章草)가 초서의 조기 형태라고 한다. 초서는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을 흘려서 나타내 빠르고 간단하게 쓸 수 있지만, 글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실용성을 잃고 서예로서의 가치만 지니게 되었다.

 

초서는 아주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초솔(草率)하다"는 의미에서 극도로 흘려서 쓴 서체라는 의미로 초서(草書)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의 단점인 서체(書體)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극도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규격을 갖춘 서체인 예서(隸書)로부터 해서(楷書)로 발전했지만, 글자를 쓸 때 너무 복잡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 쓰는 시간도 꾀 필요한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략하게 흘려 쓰는 초서(草書)가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 초서는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여 그 멋을 자랑하고 있지만,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간략화시켜 흘려 쓰게 된 결과 해독(解讀)의 어려움을 가져와 실용성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5. 예서(隸書)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체에 가까운 예서(隸書, 隸;종, 예속, 죄인)는 전국시대 진나라에서 당시 공식서체였던 전서(소전,小篆)와 함께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전서를 간략하게 해서 사무용으로 쓰기 위해 예서가 만들어졌으며, 예라는 뜻은 전서에 예속된 글자체라는 뜻에서 왔다고도 하고, 노비가 만든 글자라는 뜻에서 왔다고도 하는데 노예도 쓸 수 있을 만큼 쉬운 글자체가 성립한 것이다.

예서가 대세를 이룬 시기는 한나라 때부터이며, 전한 말기(BC 1세기경)에 완성되었다. 한(漢)의 무제(武帝) 대에 국가의 공식 글자체가 되었다.

 

예서의 명칭에 대한 이해는 예서가 형성된 배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로는 법가(法家)를 바탕으로 철권통치를 행했던 진(秦)나라였기에 강한 형벌(刑罰)의 행사로 노역(勞役)의 죄수들이 많아 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형리(刑吏)들이 간편하고 쉬운 행정 문서를 다루기 위해 고안했다고 해서 '노예 예[隸]'자를 쓴 예서(隸書)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문자의 흐름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이어 한(漢)나라 초기까지는 예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한(漢) 무제대(武帝代)에 예서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정착되고 유학(儒學)이 국교(國敎)가 된 이후 경전(經傳)의 해석을 둘러싼 왕성한 학문적 발전과 함께 서체 역시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 무제의 앞 경제(景帝) 때 산동(山東) 지방 곡부(曲阜)의 공자(孔子)의 고택(古宅)을 개축하다가 벽 속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경전(經傳)에 대한 해석으로 훈고학(訓 學)이 발전하는데, 이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에 기록된 문자는 한대(漢代)의 예서보다 훨씬 이전의 서체였기에 이를 고문경서(古文經書)라 하고 당시 사용되던 경서를 금문경서(今文經書)라 합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 연구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데,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된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이 고문경서의 서체를 고문(古文)이라 제시하면서 기본 소전(小篆) 자형과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설문해자》는 당시 규격화되어 가는 서체[예서]로 인해 정확한 한자의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와 경전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예서의 특징

진나라의 소전(小篆)은 이전의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한자의 개념을 제시한 서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자 자체로 보면 획이 둥글고 자형의 성분들을 그대로 살린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적 방향으로 의미전달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고 빨리 쓸 수 있는 형태로 간략하게 된 것입니다.

곡선의 둥근 자형으로 인해 아직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던 소전의 자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선의 기호적 성격을 지닌 서체를 만들어 전체적인 자형이 사각형 모양으로 되는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현대의 한자에서 둥근 원형 모양의 획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예서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한자들마다 각기 복잡한 모양의 서체를 유사한 모양이면 공통의 모양으로 간략화 시켜 실용성을 더한 것인데, 이 부분은 후대에 한자의 자형만으로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소 부적절하거나 난해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전(小篆)과 같은 고문자(古文字)의 자형이 한자의 자원을 이해하는 중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 해서(楷書)

해서(楷書, 楷; 모범, 본보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자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후한 말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위 ·진(魏晉)시대를 거쳐 남북조(南北朝)시대에 해서가 예서를 대신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해서를 금례(今隷), 즉 '당대에 쓰이는 예서'라고 불렀는데, 해서가 예서로부터 진화 발전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해서의 전형은 당나라 초기에 완성되었다.

 

중국 후한(後漢)시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해서(楷書)는 '楷'자가 '본보기'나 '모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표준으로 삼을 만한 서체라는 의미입니다. 위(魏)·진(晉), 남북조(南北朝)시대에 그 기틀이 완성된 해서(楷書)는 동진(東晋)의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당(唐)나라에 들어서 구양순(歐陽詢)이나 안진경(顔眞卿)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 이름의 서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서체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서(楷書)가 현재까지 표준 서체로서의 면모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가지 해서체(楷書體)의 정착에 앞서 예서(隸書)에서 또 다른 한 축을 이룬 서체로 팔분체(八分體)를 언급합니다. 한(漢)나라 중기에 채옹(蔡邕)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팔분체는 전서(篆書)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예서의 틀을 완성시킨 서체인데, 특히 장식미를 더한 양식의 서체로 후한시대에 많이 사용됨으로 해서 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단계의 서체라고 보기도 합니다.

 

- 해서의 특징

예서(隸書)에서 발전된 해서체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예서체(隸書體) 자형의 전체 윤곽이 다소 가로로 퍼진 형태라면, 해서(楷書體)는 다소 세로로 퍼진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입니다. 이는 서체가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양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역시 유명한 서예가들의 서체 전형으로 인해 정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7. 행서(行書)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도 있는데 오늘 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중요한 글자체는 아니다.

행서는 예서나 해서의 필기체이다. 일상에서 널리 쓰였지만, 정서(正書)인 해서체의 보완적인 글자체로 쓰였다.

후한 말기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해 진(晋)의 왕희지(王羲之)에 의해 그 틀이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행서와 해서(우리가 알고 있는 번체자 한자)는 거의 비슷한 시기인 위진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해서(楷書)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행서(行書)입니다.

 

발생시기에 대해서 흔히 행서(行書)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초서(草書)가 서체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흘려 쓴 형태이기 때문에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곧 규격체에서 흘림체로 변천하는 과정으로 볼 때 초서가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書體)로 보여, 발생시기도 초서가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후대의 서체는 행서(行書)입니다.

 

- 행서의 특징

후한(後漢) 말기부터 시작되어 진(晋)의 왕희지(王羲之)가 등장하면서 확고한 틀이 완성된 행서(行書)는 해서(楷書)의 필기체(筆記體) 형태를 띠고 있어 초서(草書)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 좋은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특히 서예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특징인 표현의 다양성과 형태의 변화감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서와의 차이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해서(楷書)가 쓰는 방식이 획을 정성들여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쓰는 감추는 방식인 '장봉(藏鋒)의 필체'인 반면에 행서(行書)는 자연스럽게 필기하는 방식이어서 획의 연결선 등을 드러내는 방식인 '노봉(露鋒)의 필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8. 간체자(簡體字)

중국은 1946년에 한자의 자획을 간략화하기 시작하여 1956년에 한자 간화방안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현재 쓰고 있는 간체자는 중국 문자 개혁 위원회가 1964년에 공포한 인쇄 통용 한자자형표(印刷通用漢字字形表)에 의거한 것이다. 한편, 그 이전에 쓰이던 글자체를 간체자와 대비하여 번체자(繁體字)라고 부른다.

우리는 해서체에 익숙하고, 우리가 접하는 거의 모든 한문고전들이 해서체로 되어있어 간체자를 보면 별로 반갑지 않다. 아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자 자형의 변천사를 보면 곧 간체자가 표준으로 정착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