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서심원, 70여년 만에 디지털로 부활
충남대 도서관, 방대한 기호유학 고문헌 DB 구축 성과
이정복 | conq-lee@hanmail.net 승인 2014.02.04 18:13:00
우리나라 양대 학맥 중 하나인 기호유학(畿湖儒學)을 대표하는 서적인 『육서심원(六書尋源)』이 70여년만에 새로 태어나고 있다.
충남대 도서관은 ‘기호유학 고문헌 DB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육서심원 등의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 지원으로 1~2년차년도 사업을 마친 결과 총 30책에 달하는 육서심원 전체 내용 가운데 9책(한자 215만자)에 대한 디지털화 구축을 완료했다. 수편(首編, 2편)과 본편(本編, 27편), 보편(補編, 1편)으로 구성된 전체 내용 가운데 본편 27편 중 1편~9편의 디지털화 작업을 완료하고,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서비스가 ‘기호유학 고문헌 통합정보시스템(http://giho.cnu.ac.kr)’을 통해 일반에 제공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서 59책(한자 165만자), 고문서 2,464종(한자 127만자)에 대한 디지털화 사업을 마치고 최근 원문 이미지와 텍스트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기호문학 고문헌 통합정보시스템의 성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육서심원은 권병훈(1864~1940) 선생이 충남 공주에 거주하며 저술한 한자 자전(字典)과 자학(字學)을 겸한 서적으로, 한자의 구성 원리와 법칙을 연구한 것이다. 이 책은 중국의 설문해자(說文解子)를 토대로 연역, 보충, 재해석, 재정리, 재편성하는 차원을 넘어서 육서(六書-상형류, 지사류, 회의류, 형성류, 전주류, 가차류)에 기초한 독자적인 원리와 방법에 의해 한자의 자형과 의미, 음운을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육서심원은 1909년부터 39년까지 31년간 총 358종에 달하는 관련 서적을 참고해 저술한 것으로, 대상 한자 수는 중국의 강희자전(42,174자)이나 집운(53,525자)를 뛰어 넘는 7만여 자에 달한다.
특히 전체 30책, 9,496면에 실린 총 700여만자의 방대함은 세계 최대의 자전(字典)/자학(字學)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육서심원이라는 책은 한국에서 만들었는데 전무후무한 대단한 책이다.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자서의 집대성이다”라고 대만 학자 둥쭤빈(董作賓)의 평가와 같이 육서심원의 학술적 가치는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대만 등 국외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고 있다.
육서심원의 역사적,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발간 당시 30부만 출간된 점, 현재 남아 있는 원본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될 우려가 높은 등사본이라는 점 등이 고려되어, 국가 DB 구축사업의 주요 구축 사업으로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충남대 도서관은 육서심원과 함께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 등 기호유학 및 유학자들과 관련한 소장 도서 3만 8,000면, 고문헌 2만 7,000건 등에 대한 원문 이미지 및 원문 텍스트 디지털화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기호유학 고문헌 DB구축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고 있는 이은종 팀장은 “한 개인이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이루어낸 학술적 거작이 디지털화를 통해 영구 보존되고 재탄생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기호유학 고문헌 DB구축 사업이 큰 의미를 갖는다”며,
“육서심원을 비롯해 현재 디지털화 작업이 끝난 자료들은 충남대 도서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기호유학 고문헌 통합정보시스템(http://giho.cnu.ac.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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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유학 고문헌 통합정보시스템
육서심원연구소(六書尋源硏究所) http://ilye.org/
육서심원은 대한大韓의 권병훈權丙勳이 펴낸 한자 해설서이다.
수편首編 2책과 본문 27책 나중에 추가된 보편補編 1책을 포함하여 모두 30책의 거질巨帙인데 누구라도 그 방대함에 먼저 놀라고 창의성에 두 번 놀라고 혼자서 반평생을 바쳐 이룩한 업적이라는 것에 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육서심원을 옛날 책처럼 만들면 무려 100책도 더 넘을 것이라 하였다. 실제로 쪽수도 10,000쪽 가까이 된다.
육서심원은 설문해자說文解字, 옥편玉篇, 자휘字彙, 강희자전康熙字典, 광운廣韻, 집운集韻 등 수많은 도서를 인용하여 편찬한 자학서字學書이고 췌획설贅劃說과 은의설隱意說 등 독창적 이론을 설파한 전무후무한 대저술大著述이다. 설문해자가 9,353자, 강희자전이 42,174자, 집운이 53,525자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더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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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서심원(六書尋源)
조선 말기의 학자 권병훈(1864∼1941)이 저술, 자전(字典)과 자학(字學)을 겸한 책. 한자의 구성 원리와 법칙을 연구, 분석한 것으로 자수(字數)가 6만여에 달한다.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권병훈(權丙勳)이 저술하고, 최규동(崔奎東)이 펴낸 문자서. 30책. 1940년 2월에 유인본으로 30부를 간행하였다.
각 문자를 설명한 예증은 《강희자전(康熙字典)》· 《집운(集韻)》보다 많고, 현재 통용되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도 문자적 측면에서는 이 책에 미치지 못한다.
권병훈(1864~1941)은 숙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대운(大運)의 후손으로, 경술국치를 당하여 사법권이 일본 정부에 넘어가자, 판검사로 몸담고 있던 법조계를 물러나 일반백성이 되어 공주에서 문자학에 몰두하였다. 23년 동안의 각고 끝에 70세 되던 1933년 초고의 완성을 보았는데, 이때 오랜 동안의 집필 끝에 손이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각고의 결정은 중동학교(中東學校) 교장이었던 최규동에 의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정인보(鄭寅普)를 통하여 이 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던 최규동은 권병훈을 자기집에 유숙하게 하고, 막대한 경비를 부담하여 중동학교 구내에서 사자(寫字)한 지 7년 만에 출간을 보게 하였다. 이 책은 간행된 문자서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독특한 견해에 따라 문자를 설명하고 있다.
그 중 특기할만한 것으로 췌획설(贅畫說) · 은의설(隱義說) 등이 있는데, 의미작용 없이 덧붙여진 획이 있다는 설과 어떠한 획에 숨은 뜻이 있다는 설로, 전자는 중국의 동작빈(董作賓)도 인정한 바 있다.
문자배열도 독창적인바 이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부수(部首)에 의한 배열이고, 둘째는 획수의 다과 및 자형의 구조에 따른 배열이다.
부수는 기본부수와 첨가부수가 있는데, 기본부수는 《강희자전》의 체계를 따른 부수이고, 첨가부수는 기본부수의 아류가 되는 부수로 이를 모두 합쳐 660여 부수를 설정하고 있다.
이 책은 양적인 면이나 내용면에서 문자서의 신기원을 마련한 책으로, 동작빈이 말한 것처럼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문자서의 집대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83년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수편(首編) 2책, 본문 27책, 보편(補編) 1책 총 30책. 저자가 함흥지방 재판소 판사로 있을 때 국권피탈이 되자 관계에서 은퇴하여 필생의 사업으로 설문학(說文學) 연구에 전념, 당시 중동학교장(中東學校長) 최규동(崔奎東)의 후원으로 20여 년간에 걸친 연구와 저술 끝에 1936년 완성, 1938년에 출판하였다. 한자의 구성원리와 법칙을 연구 ·분석한 총 30책에 8,766면으로 수록된 자수(字數)만도 약 6만 자에 달하는 대저술이다. 특히 췌획론(贅劃論) ·은의설(隱義說) 같은 것은 전인미답의 독창적 견해라 할 수 있으며 그 학설과 내용의 방대함은 중국의 유서(類書)를 능가한다는 평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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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惺臺 권병훈權丙勳은 어떤 위인인가?
권병훈은 1864년생으로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현 강서구 방화동)에서 태어났으며, 호號가 성대惺臺인데 애초 직업은 법관이었다.
권덕주에 따르면, 광무 9년(1905) 육군유년학교교관에 임명이 되었고, 다음해 광무 10년에는 6품 승훈랑에 승진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충남재판소 검사에 임명이 되었고, 융희 2년(1907) 8월 황해도 재판소 검사로 전보되었고, 같은 해 12월에 주임관 3등으로 승임되었고, 융희 2년(1908) 원산재판소 판사로 전임되었다가, 융희 3년 6월에 함흥지방재판소 판사로 다시 전임되었다고 한다.
바로 다음달 7월에 기유각서에 의해 나라가 사법권과 감옥사무마저 일본정부에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자, 당시 함흥지방재판소 판사직에 있던 저자는 법복을 벗어던지고 공주公州로 내려가 변호사로 개업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로부터 77세(1941)로 별세할 때까지 오직 육서六書의 연구에만 몰두하였다고 한다.
무려 30년이 넘는 반평생을 문자학 연구에만 전념한 것이다. 육서심원 서문에서 정인보는 이에 대해, "그 전후 준비하여 지내온 어려움을 더듬어 비유하면 길에 가시와 진흙이 곤란하게 하는 바요, 큰 산과 긴 강이 막는 바요, 여우, 요괴, 귀신이 아찔하게 하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오며 칠흙같이 어두워 두려운 바이다. 뜻 있는 자들은 크게 탄식하며 혀를 내둘렀다.
만약 스스로 깨달은 것을 보존하지 않았다면 또한 얼마나 번거로웠겠는가. 그런데 다행히 선생께서 굳게 참고 극기하였고 또 기하산수에도 크게 통하였으며 동식물의 이치, 음양오행, 의약, 성력星曆, 복서卜筮, 산명算命에 이르기까지 또한 마음 속에 기억함이 많아 깊게 품을 도울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김태수 번역 인용).
육서심원의 험난한 편찬과정과 그 귀중함
육서심원의 초고를 마련하는 과정도 가시밭길이었겠지만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 그것을 출판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은 일이었다. 인쇄에는 후일 서울대학교 총장이자 당시 중동학교 교장이었던 백농 최규동 선생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정인보는 육서심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생께서 이 책을 씀에 원고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가운데는 매번 얇은 종이 서너겹을 취하여 사이에 기름 먹지를 끼고 각필로 그 위에 써 획을 깊게 그어 상하가 통하여 물들게 하여 이에 복사된 몇 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몇 본에 또 첨삭하여 거의 두루함에 선생의 오른 손가락이 병이 나 아는 사람은 마음 아파하였다." 복사기를 쓸 수 없었던 시절에 먹지로 베끼는 방법은 단순 필사보다는 빨랐겠지만 손가락이 마비되는 불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더욱 나이가 들었다. 좌우에 쌓아놓은 것을 돌아보면 모두 초고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다시 잘 쓸 수가 없은 즉 또한 스스로 마음 아파했는데 요즈음 선생께서 한성에 이르러 중동교장 최규동군을 만났다.
최군은 원래 소학에 마음을 두고 있던 중 선생께서 자의를 설함을 듣고 곧 이에 마음을 기울였다. 얼마 후에 그 책이 아직 초고를 옮기지 않았음을 듣고, "슬프도다! 일생을 덮어 고고枯槁의 학문을 어렵다 아니하였는데 또 장차 홀로 얻은 것이 없어져 초목의 썩음에 따를 것이니 이는 아울러 세상 사람의 책임이도다"라 하고 이에 선생에게 학교의 방을 주고 서수書手를 고용하여 쓴 것을 받아 또 이를 인쇄함에 무릇 6년이 지나 일이 끝났다." 하였다(김태수 번역 인용).
권덕주의 논문에 따르면, 중동학교에서 6년이 걸려 간행한 책은 30질에 불과하였고, 1971년 현재 국내대학(서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 동국대학, 대전대학)과 중앙도서관에 각기 1부씩 기증되어 있고, 해외로는 자유중국의 대만대학, 일본의 덴리대학天理大學, 미국국회도서관에도 기증되었으며, 그 외 몇 나라에도 보내졌다고 한다. 국회도서관 기증본에는 기증자가 전 중동학교 이사장인 최성장崔性章으로 나타나 있다.
경향신문 1962년 6월 2일자 기사에 따르면 최성장박사가 육서심원 1질을 일본 덴리대학 학생부장 이시하라(石原六三)교수에게 전했다고 하는데, 지금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장서 검색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에 일본국회도서관이 육서심원을 소장하고 있는 것은 확인된다.
전세계적으로 단 30질밖에 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육서심원을 실제로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983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을 출간하였으나, 이 역시 한 질 600,000원이라는 고가와 30권의 부담스러운 분량때문에 별로 팔리지 않았는지 곧 절판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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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가 만들어진 원리 육서(六書):한자를 만들거나, 만들어진 한자를 이용하는 6가지의 원리 | |
상형(象形) |
구체적인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 (산의 모양을 본떠 山을 만듬) |
지사(指事) |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과 선으로 나타낸 글자. (기준선 위에 점을 찍어 위라는 뜻의 上을 만듬) |
회의(會意) |
이미 만들어진 둘 이상의 글자들을 결합하되, 글자들이 지닌 뜻과 뜻을 합쳐서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글자. 休 : 사람(人)이 나무(木) 그늘에서 '쉰다(休)'는 뜻을 나타냄林 : 나무(木)와 나무(木)가 모여 '수풀(林)'을 이룬다는 뜻을 나타냄 |
형성(形聲) |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결합하되, 일부는 뜻을 나타내고 일부는 음을 나타내는 글자. 洋 : 水(물->바다 : 뜻) + 羊(양 : 음) => 洋(큰 바다 양)燈 : 火(불 : 뜻) + 登(등 : 음) => 燈(등불 등) |
전주(轉注) |
어떤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와, 뒤에 만들어진 다른 글자로서 발음이 같거나 달라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간의 관계를 말한다. 老(늙은이) ↔ 考(늙은이), 走(달리다) ↔ 趨(달리다)似(비슷하다) ↔ 像(비슷하다) |
가차(假借) |
이미 만들어진 글자를 본래의 뜻에 관계없이 음이나 모양만 빌려다가 쓰는 방법, 특히 의성어, 의태어나 외래어 표기에 많이 쓰임. 亞細亞(아세아) : 영어의 'Asia'의 음역(音譯) |
육서통자전 뒷편에 나오는 서체 형식은 각 단의 서체가 어떤 서체인지 설명이 나와 있다. 어떤 서체인지는 먼저 그것으로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초서체는 초서의 종류나 서체의 구분에서 일반적인 초서는 금초(今草)에 해당하고, 장초(章草)의 경우는 초기의 초서체로 예서에서 발전된 것으로 간략하게 흘려쓰는 자형을 보이고 있다.
장초(章草) : 초기의 초서체로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예서체(隸書體)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장제(章帝)가 즐겨 써서 장초(章草)라고 합니다.
금초(今草) :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시대에 장초(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 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초서(草書)의 틀을 의미하게 됩니다.
광초(狂草) :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의 광초(狂草)는 당(唐)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합니다. |
▲ 최신 육서통자전(最新 六書通字典)을 보면 전서‧예서‧초서‧행서‧해서로
분류 기록하였고 특별히 초서는 두체로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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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에 관한 명칭
1. 갑골문(甲骨文) : 한자 최초의 형태로 거북의 등껍질에 새겼던 문자.
2. 금문(金文) : 중국 상나라, 주나라 때 청동기에 새겼던 문자.
3. 전서(篆書) : 진나라 때 통용되었던 문자.
다른 말로 대전, 소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도장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전각이
라고 부르는 말은 전서로 조각한 것을 말한다.
4. 예서(隸書) : 한나라 때 통용되었던 문자.
보통 비석 등에 많이 사용되어진 것으로 전서와 해서의 중간형태로 하급 관리들이
전서의 복잡한 획을 간소화 한데서 출발한 것이다.
5. 해서(楷書) : 현대 사회 서체의 표준이 되고 있는 문자. 정서(正書), 진서(眞書)
6. 행서(行書) :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글자체.
7. 초서(草書) : 필획을 가장 빨리 흘려 쓴 서체. 예서에서 변했다.
8. 간자체(簡字體) : 현재 중국에서 쓰고 있는 간략한 글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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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서체의 종류 (漢文書體의 種類)
서체의 종류라고 하면 흔히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5종류를 말하지만 사실은 좀 더 여러 가지 입니다.
한자는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쓰는 형태가 바뀌어 왔습니다.
한번은 세로로 길쭉한 모양의 서체가 성행하면 다음에는 가로로 넓은 서체가 유행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체의 변화는 한나라 말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중국 서예사는 한나라 말을 기준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말 이전에는 서체가 변천해 가는 시기이며 글씨가 예술이 된다는 분명한 생각이 없이 글씨를 쓰고, 쓰는 김에 자연스럽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서체는 여러 모양으로 바뀌어 오늘날 이야기하는 서체의 모든 종류가 이시기에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1. 갑골문(甲骨文)
갑골문이란 거북의 배 껍질[腹甲]이나 소의 어깨뼈[牛肩骨]에 새긴 글자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복사(卜辭), 계문(契文)이라고도 합니다.
갑골문은 1899년 중국 은(殷)나라 수도가 있던 자리[殷墟]인 현(現)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국가에서 동작빈을 중심으로 한 여러 학자들에게 대대적으로 발굴 작업을 하도록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읽을 수 있는 글자는 현재 1,000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갑골문을 발견한 이후 서예는 새로운 매체를 얻어 표현의 범위를 넓히게 되었습니다.
문자배열방식이 세로쓰기(동물의 모양도 세워서 표현), 오른쪽부터 쓰기가 이미 이때 시작되었다는 점, 글자의 좌우, 상하 배열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반문(反文)의 근거가 확인되었다는 점들은 서예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2. 금문(金文)
금문이란 상(商)·주(周)시대의 청동기에 주조하여 만든 글씨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종정문(鐘鼎文 : 종이나 솥에 주로 새김), 이기문(彝器文 :제사에 쓰던 그릇에 주로 새김)이라고도 합니다.
금문은 한대(漢代)에 이미 발견된 흔적이 있으나 송대(宋代) 구양수가 지은 집고록에 금문에 관한 자료가 상당수 실려 있다고 합니다.
금문은 제사나 국가적인 의식목적으로 제작되어 의젓하고 장중한 맛이 나는 것으로 일반서민의 생활 용품 이라기보다는 기념하는 용도로 쓰였다. 또한 글씨는 쓰는 것 이외에 거푸집에 주물로 만드는 특이한 과정 때문에 새겨진 글씨는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3. 전서(篆書)
전서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뉩니다.
대전(大篆)은 진(秦)나라의 이사(李斯)가 소전을 만들기 이전의 글자(갑골문 포함)를 모두 합쳐 대전이라 하고, 이후의 글자를 소전(小篆)이라 합니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승상 이사(李斯)의 주도로 지금까지 각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던 글자들을 통일하여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를 소전(小篆)이라 합니다.
소전은 자형이 세로로 긴 형태이며, 선과 획이 정확히 대칭을 유지하고 있고, 운필에서 중봉과 장봉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4. 예서(隸書)
예서는 옥졸관리들이 문서를 작성할 때 빠르고 쉽게 쓰기 위하여 전서를 간략하게 해서 만든 서체라고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죽간. 목간이 발견되면서 소전이 쓰이던 秦 나라 때 이미 예서의 초기형태가 쓰여지고 있었고, 1975년 호북에서 "운몽수호지진간(雲夢睡虎地秦簡)"이 발견되면서 전국시대 말기 또는 진나라 초에 이미 예서의 흔적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동안 알려져 왔던 대로 "대전→ 소전 → 예서"로 바뀌어 왔다는 설은 옳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대전에서 일부는 소전으로 일부는 예서로 나란히 발전해왔다고 보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러한 예서 이후에는 글자 획에 더 이상 더하거나 빼는 것이 없고 정형화되었으며(隸化), 이에 따른 변화와 예술성은 다음과 같이 넓어졌습니다.
① 둥긂이 변하여 모가 남 (變圓爲方)
② 구부러짐이 변하여 곧음이 됨 (變曲爲直)
③ 끊어지고 이어짐이 조절됨 (斷連調節)
④ 필획을 생략하고 감하였음 (筆劃省略)
⑤ 세로가 변하여 가로로 됨(變縱爲橫)
⑥ 필획 변형이 풍부해 짐
위와 같이 예서는 전서체를 써오던 그 때까지 여건에 비해서 한자 자체의 큰 개혁이었으며 또한 모필의 특성과 지완(指腕)운동의 해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과 해방으로 인하여 초서, 해서, 행서가 출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고예(古隸)와 한예(漢隸)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고예는 진예(秦隸), 전한예(前漢隸)의 일부와 같이 파책이 불분명한 것을 말하며, 한예는 후한에 들어 파책이 분명하게 나타나서 예서가 꽃을 피우는 시기의 서체를 말합니다. 파책이 분명한 후한의 예서를 팔분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5. 초서(草書)
초서는 한나라 때 이미 성행하였습니다.
초전, 초예, 장초, 금초 따위 초고로 대강 쓴 모든 글씨를 초서라 하고, "예법을 풀어서 급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하여" 쓴 글씨라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초서의 특징은 필획이 갈고리처럼 얽혀서 연결되는 것(鉤連性)이므로 "예법을 풀어서 급한 상황에 부응하기 위하여" 라는 것은 정확한 설명이 못됩니다. 초서는 크게 장초와 금초로 나뉩니다. 장초(章草)는 초기 초서와 한예가 서로 더해져 고상하게 쓰인 것으로 파책이 남아있으며 글자마다 각각 독립되게 쓰였습니다. 금초(今草)는 동진시대 왕희지가 형성한 초서로서 여러 글자가 연결된 오늘날의 초서 형태를 말합니다.
6. 행서(行書)
행운유수(行雲流水)의 필세라고도 합니다.
행서는 후한 유덕승(劉德升)이 만들었습니다. 즉, 정서(正書)가 좀 어그러지고 편리함을 힘써 추구하며, 서로간에 흐름이 있는 것을 행서라 합니다. 또한 진서(眞書)도 초서(草書)도 아닌 이것을 행서라 합니다.
7. 해서(楷書)
위로는 서한(西漢)에서부터 시작되어 수당(隋唐)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그 기원을 제시하며 여러 설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육조시대 묘지명을 통해서 해서가 정착되었다고 봅니다. 해서란 그 시대의 표준자체를 말합니다. 해서는 정서(正書) 진서(眞書)라 불렀으며 당대이후 천천히 정형화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해서와 예서의 구분 기준을 파책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랐지만 사실, 해서에도 파책이 있으므로 합리적인 구분기준은 되지 못합니다. 실질적인 구분 기준은 구획(갈고리)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구획은 상당히 어려운 획인데도 서체가 변천하는 원리인 간단함과 빠름을 구하면서도 여기에 아름다움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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