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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교,건강,사랑방/가볼만한 곳(여행)

아버지의 집 - 송석헌 고택 (松石軒 古宅)

by 연송 김환수 2017. 10. 1.

봉화 송석헌 고택 (奉化 松石軒 古宅)

 

송석헌은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이며, 유학자이신 경북 봉화의 권헌조(權憲祖, 1930∼2010) 옹이 거처했던 곳이다. 이 곳 송석헌은 2010년 겨울 KBS스페셜 “아버지의 집”으로 방영되었다.

 

이보다 앞서 1990년 6월 인간시대 선돌마을 부자전(유학자 부자의 삶)으로 소개되었고, 1993년 천붕의 아픔을 겪는 유학자 편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송석헌(松石軒)은 권이번(1678∼1763) 선생이 아들인 선암 권명신(1706∼1778)에게 지어준 가옥이다.

 

 

 

사진출처 : http://www.jirisan.com/mountain/12472

 

 

 

 

사진출처 : http://www.jirisan.com/mountain/12472

 

 

 

 

 

 

 

송석헌 고택과 그 집에 살던 이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집”이란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경북 봉화의 선돌마을에 있는 송석헌(松石軒)은 300년 된 고택으로 중요 민속문화재이다.

 

송석헌은 안동 권씨의 종손으로 8대째 송석헌에 사셨던 권헌조 옹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자식들마저 타지로 가면서 홀로 송석헌에 남았다.

 

1999년에 권옹의 모친이 별세하시고 같은해 부인도 77세로 돌아가셨는데 가장 사랑한 두 여인을 연이어 잃다보니, 자식으로서 지아비로서 그지없는 애통함이었다.

참고로 부친은 1992.12.13일에 돌아가시었고 다음해인 1993년 1월 인간시대 "하늘이 무너지다" 에 방영되기도 하였다. 

 

권옹은 경북 안동 봉화일대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통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의관을 갖추고(정제)하고 집 뒤 언덕에 있는 부모님 산소를 찾아 배례(성묘)를 하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다시 묘지를 찾았다.

 

 

사진출처 : http://www.jirisan.com/mountain/12472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고 산소를 둘러보신다.

산소 옆 길의 흔적은 오로지 한 사람의 반복된 동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 사진 한장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선대가 번듯한 벼슬을 한 적도 없고, 본인 또한 공부가 부족해 자신은 한사코 한학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봉화 안동 일대의 한학자들이 제자를 자청하며 정기적으로 찾아와 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53년 조부 권종도가 돌아가시었는데, 조부는 젊어서부터 퇴계문집을 교정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로 꼽힐 만큼 영남 지역에서 이름이 높은 학자였다. 이런 조부에게서 글과 예를 배운 권헌조 역시 덕망이 높아 배움을 구하러 오는 제자들이 많았다.

- 안동 권씨 검교공파 사복재 6대손 동애 권헌조 연보 중에서 -

 

자식들이 서울에 살고 있지만, 권옹은 송석헌에서 생을 마감할 작정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부모님이 살던 이 집을 놔두고 어떻게 떠나느냐는 것. 그가 품고 사는 가치는 여전히 과거에 있다. 그래서 과거는 과거일 뿐인가. 모든 오래된 기억에는 기억되어야만 될 무엇인가가 있다. 기억은 그렇게 완성돼 마침내 하나의 가치가 된다.

 

출간된 책에는 예와 도리에 관해 공부하며, 무엇보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이 집을 건사하는 것, 이는 권 옹이 선비로서 살아온 80여 년 삶의 전부였다.

 

“집 안 곳곳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먼지 너머로 먼저 간 아내의 희미한 웃음이 남아 있고

그 먼지 사이로 아버지의 표정이 남아 있다.

… 사람이 살아서 집이다. 그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책 본문 중에서 -

 

송석헌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는 동안 권헌조 옹께서는 요양병원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계시다가 새로 단장된 송석헌은 못보시었지만, 병원이 아닌 송석헌에서 마지막을 맞이하셨는데

2010년 12월 13일 향년 83세로 별세를 하시었다. 


"집 때문일 겝니다. 집을 떠나 계셔서 몸도 떠나신 것이지요."
"너무 아까워. 그런 어른 다시는 없는데."
 

 

권옹을 취재하셨던 지리산닷컴의 마을이장 권산 이란분이 인사동에서 유동종 PD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다.

 

권옹이 별세하고 아버지의 집을 이어받은 장남 권동재씨가 100일이 지나지 않아 2011년 3월 봄에  세상을 뜨셨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젔고, 지금 송석헌에는 권옹의 막내아들 부부가 거주하고 있는데 문화재 송석헌을 고택으로 잘 관리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990. 6.18 인간시대에 유학자 부자의 삶 <권정선옹(87)과 권헌조 (63부자> - 동아일보, 경향신문

 

 

1993.1.17 인간시대 하늘이 무너지다.  천붕을 겪는 유학자 - 한겨레 신문

 

 

 

 

 

 

 

 

 

 
봉화 송석헌 고택 (奉化 松石軒 古宅)
 
규모 : 정면4칸(사랑채), 측면2칸(사랑채), 정면2칸(영풍루), 측면1칸(영풍루), 정면3칸(선암재),
           측면 2칸반(선암재)
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선돌안길 10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석평리 320
문화재 지정번호 : 중요민속문화재 제249호 / 문화재 지정일 : 2007년 10월 12일
 
중요민속문화재 제249호. 동암(東巖)권이번(權以番)이 아들 권명신(權命申)을 위하여 1700년대에 지어준 집이다. 산기슭 경사진 터전을 이용하여 ㅁ자형 안채와 영풍루(迎風樓)·선암재(仙岩齋)·방앗간·사당·대문간채를 지었다.
 
안채는 앞부분에 높게 기단을 축조하여 산기슭의 겅사도를 완화하였다. 사랑채가 부설되면서 ㅁ자형에 우측날개가 형성되었고 사랑채에 이어 남쪽으로 영풍루가 연속해 있어서 일견 복잡한 구성인 듯이 보인다. ㅁ자평면 자체는 아주 간결하다
 
3칸 대청을 중심으로 하고 향좌측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이어 부엌 그리고는 중문간채로 이어지면서 작은 사랑이 된다. 우측엔 1칸의 상방. 앞에 마루 그리고 방이 되면서 사랑방에 이어진다. 이 사랑채는 정면4칸 측면2칸 규격이다.
 
영풍루는 정면2칸 측면1칸의 다락집이다. 아래는 수장공간이고 다락 위는 개폐할 수 있는 창을 설치해서 풍광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선암재는 정면3칸 측면 2칸반으로 좌우협간에 방을 들였고 나머지는 마루이다. 방 사이 마루에 분합을 달아 폐쇄할 수 있게한 점이 특이하다.
 
여기에 감실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5량이다. 사당은 선암재 뒷편 놓은 자리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간반통에 앞퇴가 개방되었다. 못채는 대문 좌측에 있는데 사위와 외손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정면4칸 측면1칸, 방앗간 채는 3칸이고 대문간채는 9칸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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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송석헌(松石軒)의 소유자 겸 관리자는 권영부 님입니다.
권이번(1678∼1763) 선생이 아들인 선암 권명신(1706∼1778)에게 지어준 가옥으로
선돌마을 입구에 경사지반을 이용하여 정침을 세웠다.
 
정침 우측에는 사랑을 두고, 사랑과 연하여 2층의 영풍루와 연결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후기 영남지방 사대부 저택의 다양한 기능과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한 높은 기단과 특이한 평면 배치, 완벽에 가까운 민구(民具)등
전통적 풍습을 잘 담고 있는 격조 높은 고택이다.
 
당초에는 경북봉화 민속자료 봉화 송석헌(제95호)로 지정(1991. 5.14)되었으나 신청(2007. 4.12)을 받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49호로 지정(2007. 10.12)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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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헌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外道 / 아버지의 집 - 경북 봉화 송석헌 이야기  http://www.jirisan.com/mountain/12472

장터 / 책 - 『아버지의 집』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http://www.jirisan.com/mountain/41427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를 준비하지 못했다.
'만약 권 옹이 별세하신다면' 그런 장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다. 휘날리는 만장과 긴 상여행렬은 없었다.
시골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례행렬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外道 / 못난 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 권헌조 옹 가시는 길에 http://www.jirisan.com/mountain/12518

 

 

아버지의 집 :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http://banbi.tistory.com/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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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安東權氏)에 대(對)하여
 
1. 시조(始祖) : 권행(權幸)
 
2. 유래(由來) : 시조(始祖) 권행(權幸)은 신라(新羅) 왕실(王室)의 후손(後孫)으로 본래(本來)의 성(性)은 김씨(金氏)이다.
 
신라(新羅)말(末)에 경애왕(景哀王) 때 신라(新羅)가 극도(極度)로 부패(腐敗)하고 잇단 민란(民亂)으로 국운(國運)이 기울어가자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新羅)를 침입(侵入) 포석정에서 경애왕(景哀王)을 살해(殺害)한다.
 
이에 격분(激忿)한 권행(權幸)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大軍)을 몰아 이 고을에 침입(侵入)하여 고려(高麗) 태조(太祖)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太祖)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戰功)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 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열세에 있던 태조 왕건이 우세해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병산전투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했다.(能炳機達權)"라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권행의 묘소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성곡리 천등산 능골에 있으며 향사는 매년 한식일과 10월 중에 한다.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시조 권행과 김선평, 장정필을 모시기 위해 983년(고려 성종 2년)에 세운 삼태사묘는 경북 안동시 북문동 24번지에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에 제향한다.
 
3. 가문의 번영
고려 개국과 함께 이땅에 뿌리를 내린 안동권씨는 무수한 인물들을 배출한다.
고려시대 추밀원부사을 지낸 권수평(權守平)은 고려사에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기록된 인물,
 
그의 아들 권위는 태자의 태사로 권씨가문 최초로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은인물이며,
 
권수평의 증손이며 찬성사 권단의 아들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명성을 떨쳤다.
당대 9봉군(當代九封君)은 역사상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면서 안동권씨는 3백59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찬란한 꽃을 피운다.
 
4. 계파
-검교공파 : 권척을 파조로 한다.
-광석공파 : 권대의를 파조로 한다.
-군기감공파 : 군기감을 지낸 권사발을 파조로 한다.
-동정공파 : 고려 호장동정을 지낸 권체달을 파조로 한다.
-별장공파 : 고려 별장을 지낸 권영정을 파조로 한다.
-복야공파 : 고려 상서좌복야 상장군을 지낸 권수홍을 파조로 한다.
-부정공파 : 고려 식록부정을 지낸 권통의를 파조로 한다.
-부호장공파 : 고려 때 부호장을 지낸 권시중을 파조로 한다.
-수중공파(종파) : 권수중을 파조로 한다.
-시중공파 : 고려 시중을 지낸 권인가를 파조로 한다.
-좌윤공파 : 고려 호장좌윤을 지낸 권지정을 파조로 한다.
-중윤공파 : 고려 호장중윤을 지낸 권숙원을 파조로 한다.
-호장추공파 : 고려 호장을 지낸 권추를 파조로 한다.
-추밀공파 : 추밀원부사 권수평을 파조로 한다.
-급사중공파 : 권형윤을 파조로 한다.
 
안동권씨는 10세(世)를 전후하여 크게 15파로 갈라지는데, 그 중에서도 추밀원부사공파(樞密院副使公派:守平)·복야공파(僕射公派:守洪)·인가파(仁可派)·좌윤공파(佐尹公派:至正)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추밀공파〉 고려 말·조선 초의 대학자 근(近)은 안동권씨 제일의 인물로 꼽힌다. 그는 많은 저서와 문집·문학작품을 남긴 경학(經學)·문학의 소양을 겸비한 학자였다. 그의 아들 제는 세종 때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친 대제학이었다. 이 밖에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철(轍)과 임진왜란의 영웅이며 도원수(都元帥)를 지낸 율(慄)은 부자지간이다.
 
〈복야공파〉 복야공 수홍(守洪)의 증손 한공(漢功)이 고려 충숙왕 때 시중(侍中)을 지냈고, 그의 아들 중화(仲和)는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 올랐다.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벌, 공조판서 응수(應銖) 등도 손꼽히는 인물이다.
 
〈부정공파〉 고려시대의 부정공(副正公) 통의(通義)가 파조이다. 조선 문종의 국구(國舅)인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전(專)과 예조판서를 지낸 자신(自愼) 부자가 알려졌다.
 
〈인가파〉 인가파의 인물로서는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성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함,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진으로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의 저서를 남긴 상하(尙夏), 그의 아우로 학자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상유(尙游), 상유의 아들로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혁(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돈인(敦仁) 등이 인가파에서 손꼽는 인물이다.
 
〈좌윤공파〉 좌윤공 지정(至正)이 고려 시대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그의 아들 세위(世位)가 정용별장(精勇別將)을 지냈으며, 세위의 제6대손인 진(軫)이 조선 전기 형조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세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밖에 안동권씨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는 선조 때의 유명한 시인으로 《독락팔곡(獨樂八曲)》,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등의 시가(詩歌)와 《송암집(松巖集)》을 낸 호문(好文)이 있다.
 
5. 항렬표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병(丙)


중(重)


태(泰)


영(寧)


오(五)


혁(赫)


순(純)


용(容)


구(九)


승(升)
41세 42세 43세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일(一)


원(元)


전(全)


택(澤)


서(書)


명(溟)


칠(七)


준(駿)


욱(旭)


갑(甲)
51세 52세 53세 54세 55세 56세 57세 58세 59세 60세


의(懿)


항(恒)


옥(玉)


덕(德)


조(肇)


경(京)


세(世)


팔(八)


집(執)


구(求)
 
6.집성촌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안동군 와룡면 이하동
-경북 안동군 북후면 연곡동
-경북 안동군 풍천면 가곡동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동
-경북 월성군 양북면 구길리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리
-경북 영주시 영주동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7. 본관지    
경상북도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