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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구나 - 정의송

by 연송 김환수 2017. 8. 14.

작곡가 정의송 - 그랬었구나

 

정의송의 "그랬었구나"는 화해와 용서, 그리고 사과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다.

 


 

그랬었구나 - 정의송

 

그랬었구나 내가 그랬었구나 마음의 상처 주었었구나

그랬었구나 내가 그랬었구나 깊은 실망을 안겨 주었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혼자의 욕심을 부렸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에대한 배려를 못했었구나 오~

 

그랬었구나 내가 그랬었구나 나의 사랑이 많이 부족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혼자의 욕심을 부렸었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에대한 배려를 못했었구나 오~

 

그랬었구나 내가 그랬었구나 나의 사랑이 많이 부족했구나

 

그래 그래 그래 그래 내가 그랬었구나 그래 그래 그래 그래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내가 그랬었구나

너를 더 많이 아껴줘야 겠구나  너를 더 많이 사랑해야 겠구나

그랬었구나

 

정의송, 서정아 그랬었구나 두엣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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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인가요 최고의 작곡가 정의송

 

정의송의 수필집에 따르면 그는 중학생 시절, 하숙집 철도공무원 형의 기타 소리를 듣고 처음 기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인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기타의 달콤한 멜로디는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후 자신의 집에서 하숙하는 철도공무원 형의 방에서 기타를 배우며 노래를 하는 것이 유일한 일과이며 낙이 됐다.

이 같은 시절을 보낸 것에 대해 “그때부터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됐다.

 

정의송은 성인가요 작곡가 부문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등, 성인가요계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 중이다.

 

최근 신곡 ‘그랬었구나’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 정의송은 현재까지 1,500 곡을 발표하는 등 뮤지션으로서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정의송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총 5,000곡의 작품을 발표하는 것을 목표로, 앞으로 3,500곡을 더 만들 때까지 음악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1994년에 김혜연에게 만들어 준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이 히트하였고, 박현빈 ‘빠라빠빠’ 장윤정 '첫사랑' 송대관 '사랑해서 미안해' 등을 작곡한 그의 활발한 행보에 성인가요계 관계자들의 시선이 모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의송은 JS엔터테인먼트를 직접 설립하면서 신인 트로트 가수 발굴을 위한 공개 오디션을 개최하는 등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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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송(鄭意松, 1965년 12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자 가수이다.

 

학력

1978년 삼척국민학교 졸업

1981년 삼척중학교 졸업

1984년 삼척고등학교 졸업

 

생애 

정의송은 1965년 12월 15일에 강원도 삼척에서 8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막노동꾼이었고 어머니가 가족의 살림을 꾸려나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애환을 노래로 달랬는데 트로트 곡들을 자주 부르는 편이었다. 정의송은 늘 어머니의 흥얼거리는 그 노랫소리를 들었고 자연스럽게 그 노래에 동화되어 저절로 따라 부르곤 하였는데 그때 본인에게 트로트의 감성이 베었고 트로트 작곡가로 활동하는 밑바탕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삼척국민학교에 재학할 무렵 맏형이 선물한 아코디언에 매료되어 온종일 연주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지금도 정의송은 악기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아코디언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 정의송은 말수가 없고 수줍움을 많이 타는 학생이었으며 감수성이 예민하여 늘 공상에 빠져들곤 하였다. 하지만 본인은 섬세하고 감성이 풍부한 성격이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중학교 시절 집에 하숙을 하게 된 철도 공무원이 있었는데 직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상 기타를 쳐서 그 기타에 빠져서 매일 그 공무원의 방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결국 정의송은 기타를 구입하였다. 그의 맏형은 정의송의 음악성을 알아차리고 이후 언제나 그의 지원자가 되어주었다. 그때부터 정의송은 독학으로 작곡하고 틈틈이 노래를 만들었지만 음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였다. 단지 음악이 좋았고 그 시간들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의 꿈은 문학가가 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

 

이후 삼척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느 날 조용필의 콘서트를 관람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오로지 가수를 꿈꾸었다. 이후 정의송은 학교에 책가방보다는 기타를 메고 등교를 하였다. 이게 문제가 되어 교사들에게 수없이 야단을 맞았지만 한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3학년 때 그의 담임 교사는 "정의송은 원래 이런 놈이야. 그러니까 놔두자."하고 그를 인정하게 되었는데 본인은 그 담임을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학업은 뒷전이고 노래에만 빠진 그였기에 늘상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 일쑤였고 정의송은 그런 아버지가 너무도 싫었었다고 한다. 그해《삼척시민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후 아버지께서 그를 인정하였고 그제서야 그는 마음놓고 노래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84년에 삼척고를 졸업하였다. 이때 그는 졸업 앨범조차 받을 돈이 없어 결국 앨범을 받지 못했다. 때문이다. 졸업 직후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50000원을 받아내고 기타를 메고 마침내 서울로 상경하였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도착해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야간업소를 찾아다니고 오디션에 응시했지만 그에게 노래를 시켜주는 곳은 없었다.

 

갈 곳이 없어진 그가 성수동 뒷골목 전봇대에 붙어있는 구직 포스터가 눈에 띄어 그곳을 찾아가서 일을 달라고 하자 담당자는 "이 곳은 노래하는 곳이 아니다. 그냥 가라."고 말하며 받아주지 않았다. 기타를 메고 있는 정의송의 행색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갈 곳 없는 정의송은 유일한 안식처가 그 곳이라고 생각하여 겨우 사정해서 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는 마땅히 배운 기술이 없어서 재봉 후에 실밥을 따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일단 직장이 해결된 그의 마음은 행복하였다. 당시 월급으로 110000원을 받았는데 절반은 음악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노래공부를 하였다. 그러면서 동대문에서 종로까지 모든 음악다방을 다니면서 무료로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한지 1년 6개월이 지나 마천동의 '라이브'라는 업소에서 월급은 물론이고 숙식도 다 해결해준다고 하여 공장을 그만두고 업소에 갔지만 그 업소 역시 정의송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업소는 장사가 되지 않아 그는 월급도 받지 못하고 노래를 해야했다.

 

이후 군에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그에게 도착하였다. 사장이 그동안 수고했다며 50000원을 지급하였고 삼척으로 내려갔다. 서울에 상경할 당시에도 50000원을 받았는데 귀향하는 때에도 50000원밖에 받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였다. 육군을 전역하고 다시 서울에 다시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역시나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마침내 1992년에 정의송은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작곡가로 전향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틈틈이 작곡을 연습해왔던지라 작곡가가 되는 것이 어쩌면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로 전향한 후 노래를 하자고 다짐하고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작곡했던 수많은 곡들은 현재도 조금씩 발표되고 있다. 이후 고급 레스토랑에서 샹송과 칸소네를 불렀고 스탠드바나 카바레에서는 트로트를 불렀다. 정의송은 당시의 음악적 경험들이 자신에게 다양한 장르의 곡을 만들게 해주는 원천이 되어 주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던 1994년에 김혜연에게 만들어 준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정식으로 작곡가로써의 명성을 알렸다. 그 이후로 소명의 '빠이빠이야'와 송대관의 '사랑해서 미안해' 등의 곡이 크게 히트하게 되어 정의송은 일약 히트 작곡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겐 언제나 가수에 대한 미련과 못다한 그 꿈에 갈망하고 있었고 결국 1999년에 본인의 앨범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1995년에 박주현과 결혼하였고 1남 1녀를 두었다.

 

수상

2003년 모범 작곡가상 수상

2004년 남인수 기념사업회 작곡가상 수상

2005년 인기 작곡가상 수상

2006년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7년 올해의 작곡가상 수상

2015년 MBC가요베스트 작곡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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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본명: 송서정, 1972년 8월 8일 ~ )는 대한민국 가수이다.

신체 : 165cm

소속사 : BSA 엔터테인먼트

앨범

2004년 북경 내 사랑 - OST 참여

2006년 1집 - 쏩니다

2009년 2집 - 따라갈래요

2012년 소리소 - My Hero

2013년 3집 - 찌릿찌릿

2014년 4집 - 아니 뭐?

 

수상

2005년 세계문화예술대상 신인가수상 수상

 

신안군 압해도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애잔한 멜로디 와 가사의 서정아 “비비각시”가 전국 노래 교실에서 식지 않는 인기로 돌풍을 예고하고 있다.

비비각시 작사 이동창 / 작곡 정의송 / 노래 서정아

 

성인가요계에 요즘 흔치 않는 발라드 음악으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비비각시 가요제”를 별도로 개최할 만큼 그 인기를 증명해 주고 있다.

 

서정아는 드라마 삽입곡 “사랑의 말”로 데뷔하여 첫 앨범 “쏩니다”로 제2의 장윤정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갑상선암으로 중도 하차 후 2013년 새롭게 성인가요계로 돌아와 많은 매체에서 가수를 본업으로 MC, 리포터, 모델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청순하고 앳된 미모, 오랜 공연과 방송 활동으로 다져진 탁월한 가창력과 풍부한 예능 감, 트로트는 물론, 감성 가득한 발라드에서 강렬한 모던 록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성을 겸비한 가수 서정아는 두말할 나위 없는 차세대 트로트 계를 이끌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는 해외시장을 겨냥한 중국어 버전 앨범 발표 와 함께 중국과 멕시코 등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동남아 진출도 코앞아 두고 있는 상태이다.

 

다양한 음원 마케팅과 온라인 시장에 본격적인 발을 들여놓아 인터넷 방송과 웹 콘텐츠 분야도 진출 준비를 완료한 상태라 2017년 가장 활발한 활동을 예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