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聞慶鳥嶺) / 새재(鳥嶺 :조령)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새재로 932 문경새재관리사무소
지번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88-1
전화번호 : 054-571-0709
도립공원홈페이지 http://saejae.gbmg.go.kr/
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영남의 첫 관문
조선시대 영남지역에서 한양을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던 문경새재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시대 초기 새재 길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나 후삼국 역사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설화들이 남겨진 이곳은 우리 땅에 국가가 형성된 이후부터 중요한 교통로였고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문경과 괴산, 충주를 연결하는 국도가 개통된 지금은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은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옛 길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적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조령산과 주흘산을 넘어가는 길은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세 관문으로 가로막혔다.
임진왜란 당시 관문 하나 없이 무방비로 충주까지 왜군을 통과시켜 한양을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했던 새재 길은 이후 굳건한 성벽을 쌓아 방비하였으나 다시 이곳을 통과하려 했던 외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경상도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중요한 통로였고 영남과 충남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던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의 6.5㎞ 길은 산책을 즐기듯 걷기에 그만이다.
조선 후기 한글 비석인 ‘산불됴심비’와 조령원터, 교구정터 등 옛 모습과 높고 험하였던 고갯길에서 안녕을 기원하는 성황당의 모습이 자연 속의 산책을 더욱 즐겁게 한다.
새재의 옛 모습을 전시하는 새재박물관도 놓치면 아쉽고, 조령관에서 이어지는 조령산 등반도 자연 속으로 더욱 깊이 다가가는 탐방길이 된다.
「태조 왕건」 촬영 이후 역사 드라마의 촬영장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야외 세트장은 새로운 사극의 촬영을 위한 개선작업으로 점차 그 넓이를 확장하고 있다. 새재 길 탐방 이후 피로를 풀기 위해 수질 좋은 문경온천을 찾는 것도 좋다.
대통령의 한 마디가 새재를 지켰다
70년대 근대화의 물결 속에 국토의 중심을 연결하는 새재 길은 충주로 이어지는 국도의 중심지로 예정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문경 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우연히 국도 건설 계획을 확인하고 옛 추억의 새재 길을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로 건설을 지시하였다고 전한다. 긴급하게 건설계획은 재검토되었고 이화령을 관통하는 우회도로가 충주와 문경을 잇게 되었다.
영남 제1관
영남 제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
고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타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
6.25 동란시 비각이 소실되고 총탄을 맞은 비석과 비석주(기둥)만 남아있다.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
문경새재 교귀정 뒤편에 있는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 이 공덕비는 1855년(철종 6)에 유기목(柳祈睦, 1802~?)이 짓고 김진형(金鎭衡,1801~1865)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공덕비 뒷면에는 남선ㆍ임동ㆍ재산 등 안동부 소속 38방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동부에서 기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있은 지 16년이 지난 때이고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이다. 비문 내용은 김수근이 1839년 안동부사를 하면서 조선 말기 삼정(三政)이 문란 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살지 않게 하였고, 아이와 노인의 이름이 중복된 호구를 정리하여 징병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이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의 백성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본부에서는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을 어길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本府遵退陶不敢褒先候之訓 본부준퇴도부감포선후지훈)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백리 밖 새재에 세우는 이유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김수근 본인도 이 고개를 오가며 경관을 즐겼던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밝히고 있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1관문 뒤편 한 곳에 송덕비가 모여진 곳이 있다. 이 곳에는 관찰사, 순찰사, 현감 등 이 곳을 거쳐 간 많은 목민관의 송덕비가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그 의미를 전하고 있다.
또 점촌북초등학교 앞에는 과거 유곡역과 관련된 찰방과 관원 그리고 관찰사들의 송덕비가 한 곳에 세워져 있다.
특히 새재에는 비석형태 외에 마애비 형태로 남아 있는 송덕비로 10여 곳 이상이 된다. 이는 가은과 산양 등을 합치면 매우 많은 숫자가 아닌가 한다.
사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실제로 송덕과 선정과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많은 비석 중 얼마나 백성들의 땀과 눈물을 삼켜버린 것이 많을까?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조선후기 삼정이 문란해 지면서 신임 관리를 맞을 때는 쇄마전(刷馬錢)이라 해 관에서 주는 노잣돈 말고도 백성들이 따로 거둬 바치게 하고, 떠날 때는 입비전(立碑錢)이라 해 공덕비를 세우는데 돈을 모았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컸을까는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문경 땅에 이러한 비석이 많은 연유가 길목인 이유도 한 몫을 차지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비석이 문경새재 교귀정 뒤편에 있는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라 할 수 있다.
철종 5년인 1855년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내려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세운 이 공덕비는 유기목(1802~?)이 짓고 김진형(1801~1865)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국내에는 흔치 않은 명칭인 타루비(墮淚碑)란 중국 진(晋)나라 때 양양지방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을 잊지 못해 그의 비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공덕비 뒷면에는 남선·임동·재산 등 안동부 소속 38방에서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어 안동부에서 기금을 모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있은 지 16년이 지난 때이고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던 해이다.
김수근 타루비는 1관문과 2관문 중간사이에 있는 교구정에서 2관문 쪽으로 약 2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몇 년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교귀정 정비공사를 하면서 주변이 더 깨끗하게 정리가 됐다.
비석은 원래 한 칸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비각은 없어지고 주춧돌 4개와 주춧돌을 연결하는 장대석만 남아 있다.
비는 비신, 개석, 대좌로 구성돼 있으며 비신은 오석, 개석과 대좌는 화강암으로 비석은 6.25때총탄의 상흔으로 비문 일부가 훼손되었다.
안동부사의 비, 왜 문경새재에 세웠나
문경새재에 세워진 송덕비는 대체적으로 문경현감 또는 경상도 관찰사의 것이 대부분인데 상주목사 이익저(李益著)불망비와 안동부사를 지낸 김수근 타루비는 이지역과 무관된 인물들의 비석이다.
김수근 타루비 내용은 김수근이 1839년 안동부사를 하면서 조선 말기 삼정(三政)이 문란 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살지 않게 했고, 아이와 노인의 이름이 중복된 호구를 정리해 징병제도를 바로잡아 백성이 아들 딸 낳고 잘 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동의 백성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우려고 했으나 본부에서는 퇴계 선생의 큰 가르침을 어길 수 없다는 교훈에 따라 비석을 세우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일백리 밖 새재에 세우는 이유는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며 김수근 본인도 이 고개를 오가며 경관을 즐겼던 곳이기 때문에 최적의 장소라고 밝히고 있다.
김수근 타루비는 규모면에서 꽤나 큰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비석을 설치하기 위해 주변에 두었던 초석들의 크기 또한 문경에서는 볼 수 없는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공(公)이 우리 대도호부의 부사로 계시면서 가시는 곳마다 은혜를 베푸셨네 / 악정의 문적을 태워 없애니 그 은택이 두루 미쳤네 / 한창 해가 남루를 비추니 예처럼 춤추며 즐겨 하리라 / 돌에 글을 새겨 기리니 그 은덕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으리 / 공이 떠난 지 16년에 작고하시니 이듬 을묘에 안동 38방의 소민들이 세우니 때가 함풍 5년 9월이라.’
경북 문경시 문경새재도립공원에 있는 안동부사 김수근의 송덕비인 추사타루비(追思墮淚碑)의 내용이다. 철종 5년인 1855년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내려와 선정을 베푼 것을 기려 세웠다.
타루비란 진나라 때 양양 사람들이 양고의 선정(善政)을 잊지 못해 그의 비(碑)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 타루비가 세워진 첫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문경새재로 오르는 길에는 역대 관찰사와 현감들의 송덕비가 일렬로 서 있다.
총 26기의 비 가운데 충렬비 1기, 탑비 2기를 제외한 23기가 지방수령들의 은공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다. 다른 비는 모두 석조(石彫)지만 하나는 무쇠로 만든 철비(鐵碑)다.
여하간 당시 문경과 관련이 없던 인물의 비가 문경새재에 세워진 것만 보아도 당시의 김수근의 위세가 대단 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임종 전 도대체 어떠한 유서를 남기셨길래 퇴계 선생 이후의 안동에 비석이 거의 없는가?
이 유서에는 첫 번째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예를 갖춘 성대한 장례를 피하라는 뜻), 두 번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앞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도산에서 물러나 만년을 숨어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뜻)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한 바와 행적을 간단하게 쓰도록 당부했다.
퇴계의 묘소는 종택에서 남쪽으로 약 1㎞ 가량 떨어진 토계동 하계마을 건지산 남쪽 산봉우리 위에 있다. 여기서 바라보면 평소 퇴계선생이 오가산(吾家山)이라 일컬을 만큼 평소에 즐겨 찾고 좋아하셨던 청량산을 마주하고 있다.
김수근 (金洙根) : (1798年 正祖 22年∼1854年 哲宗 5年)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부(晦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증조부는 김원행(金元行), 할아버지는 김이직(金履直)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김인순(金麟淳)이며, 어머니는 신일식(申日式)의 딸이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김문근(金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활동사항 김수근은 1798년(정조 22) 경기 안산 성곶의 구룡골[지금의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집에서 학문을 익히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812년 가족을 거느리고 미강(渼江)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일가 사람에게 수학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인 김준근(金浚根)이 세상을 떠나자 미강에서 철수하여 서울 집에 돌아왔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온릉참봉(溫陵參奉)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내던 중 1833년 충량과(忠良科)에 수석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되고, 이어 부수찬·부교리·장령·응교·사복시정·사간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37년(헌종 3) 병조참지가 되었다가, 동부승지·대사성에 오른 뒤 이듬해 안동부사, 1839년에 승지가 되었다. 이어 1840년 이조참의·예조참의·첨지중추부사·돈녕부도정을 지내고, 양주목사로 나아갔다가 1845년 승지·부총관·승문원제조·예조참판·공조참판·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1847년 충청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공조판서, 이듬해 우참찬·대사헌, 1852년 이조판서·홍문관대제학·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이듬해 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삼연선생연보(三淵先生年譜)』가 있다. 묘소 김수근은 사망한 이듬해인 1855년 1월 14일에 경기도 광주 의곡면 포우리[지금의 의왕시 학의동]에 안장되었는데, 이때 묘갈을 세웠다. 1861년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으로 이장되었다가 도시화에 따른 시가지 정리로 인하여 1979년 묘를 없애고 유골을 화장하였다. 김수근 묘갈은 지대석 위에 규모가 큰 농대(壟臺)를 얹었고, 그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태이다. 석재로 높이는 244㎝이다. 김수근 묘갈의 지문은 그의 종질(從姪) 김병기(金炳冀)가 찬하였고, 증직비문(贈職碑文)은 1861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영은부원군 김문근이 찬하고 글씨는 홍문관부제학 김병필(金炳弼)이 썼다. 비문에는 김수근의 조상과 후손 등 가계에 대한 내용을 시작으로 하고 있으며, 내용 중에는 특히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철종의 하교와 그에게 내린 시호와 은전(恩典)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2009년 현재 김수근 묘갈은 충청남도 아산시 권곡동에 있는 온양민속박물관에 별도의 증직비(贈職碑)와 함께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철종은 특별히 정문(正文)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철종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墮淚碑) 개석은 팔작형이고 대좌는 방형인데 대좌의 위쪽 네 모서리는 각을 완만하게 하였다. 크기는 비신은 높이 143㎝, 55㎝, 30㎝, 개석은 가로 110㎝, 세로 80㎝, 높이 50㎝, 대좌는 108㎝, 84㎝, 48㎝이다. 비문의 내용은 ‘고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타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이고, 그 왼쪽에 ‘공거십육년몰월명 본부삼십팔방소민등입개 함풍오년구월 日(公去十六年歿?明 本府三十八坊小民等立개 咸豊五年九月 日)’ 오른쪽에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簽黃 思浹○白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平 不洙者德’이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1885년(철종 6)에 세웠다. 비문의 내용은 류기목(柳祈睦, 1802~?)이 짓고 김진형(金鎭衡,1801~1865)이 쓴 것이다. 뒷면에는 비문과 함께 38방의 사람들을 함께 소개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일부가 훼손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 당시 총흔이라고 하나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개석의 일부도 훼손되어 있다. 좌_비석(측면) / 우_비석(후면) ※ 안동부사 김수근 추사타루비 비문해제 (碑石 後面) 道主屹之陽有石穹然臨于其上者曰故正文金公之碑安東府小民爲遺愛立也謹按公以己亥出典是府府巨局也三政俱痼若絲?然又承?存荒世族殆不能按堵??細民之顚連而流散者什八九公思所以釐革而安集之以前承旨柳致明進鄕序堂首任置都監四員得幼學權命夏柳進鴻生員金岱鎭進士金重休鄕之選也與之參鶴就還摠八萬七千石其無名雜色四萬石減作小詳移貿之零四萬七千石皆糠粃沙石乃燒散之量定實摠折半作民留而輕?之査結政中隱卜與浦沙陳之偸弄者定爲夫摠而稅捧焉以布政之最關民? 其黃白疊役與族姻之寃徵者五千一名排諸境內三百餘洞爲永規取舊簽悉燒於市一市人皆下擔起舞所市物狼藉於道方姻徵之爲弊也至有髮華而不得嫁娶者至是婚姻以時每産育必相慶曰此某公賜也及三政就緖離散者盡還而生殖甚繁勉大民以禮讓諭小民以謹度以至於?吏馭校威幷行蕩雇薄而制便懲交?而焚卷凡所以敦俗而矯弊者不能枚擧而播在輿誦玆盖民之於公去而思歿而不忘者也小民嘗欲伐石而頌之以本府遵退陶不敢褒先候之訓曾未有碑之者因寢不果今年春府之薦紳章甫方建院以妥公遺像於是小民相告曰吾?俱以撫字中遺民獨不伸追慕之情可乎且公之治曾爲一若最其德業又爲一國之衿式則其所以鐫頌者夫何必局於百里之區也彼鳥嶺?在漢師南三百餘里爲嶺下全路之??四方大小人員之南爲者必有是焉況公以??嘗臨眺而嘯詠則是嶺之於公亦叔子之峴也苟欲樹之碑捨是奚以僉曰可遂立而書之曰追思墮淚碑謁余請記陰余亦州民於公受知□□義不敢辭乃作而言曰公之碩德巍望冠於當世著於朝野其將銘彛鼎而耀簡冊則又安用碑爲然是碑之立州人之老少□□□□□必彷徨□□□□去而南土宰牧之過是路者亦將取法而施於爲政是碑之助其不遠且大乎庸爲之識助董諸□□□□□□□□□ (후면 해석) 말하노니 주흘산의 북쪽에 비석이 높게 그 위를 임하는 것이었으니 옛 정문김공(正文金公)의 비라고 이른다. 안동부의 소민(小民)들이 유민(遺民)을 사랑했다 하여 세운 것이라. 삼가 삼고해 보건데 공은 을해년에 이 고을을 나가 다스림에 부(府)는 지국(地局)이 큰지라 삼정(三政)이 모두 고질(痼疾)이 되어 실이 얽힌 것과 같고, 또 흉년이 계속되어 세족(世族)들이 자못 안도(安堵)하지 못하고 가난한 영세민들은 전복(顚覆)이 계속되어 유이산거(流離散居) 하는 자가 십중팔구라, 공이 생각한 것이 고쳐서 안집(安集)시키려고 전 승지 유치명(前 承旨 柳致明)으로 향서당(鄕序堂)에 수임(首任)으로 나아가게 하고 도감 사원(都監 四員)을 두니 유학 권명하(幼學 權命夏)와 유진홍(柳進鴻)과 생원 김대진(生員 金垈鎭)과 진사 김중휴(金重休)를 얻게 되니 향중(鄕中)에서 선출함이라, 같이 확실히 참고하여 환수해 나아가니 모두가 팔만칠천석이요, 그 무명(無名)한 잡민(雜民)들의 사만석을 감해주니 소상하게 무곡문서(貿穀文書)로 옮기니 사만칠천석이 떨어졌으나 모두가 쭉정이와 사석(沙石)이라 곧 살라 버린 량이 정량(定量)의 실수에 절반이라 민유정책(民留政策)을 만들어 가볍게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정중(政中)을 조사해 체결하고 몰래 포사진(浦沙陳)의 한량(閒良)들을 가려서 부총(夫摠)을 정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하였다. 정치를 펴는데 가장 백성의 병들음이 관계되니 황구백발(黃口白髮)이 중첩으로 요역(繇役)하는 것과 족인(族姻)들이 원통하게 징용되는 자가 오천일명이라. 모든 경내(境內)의 300여동(洞)에 배열(排列)된 것이 영원토록 규례(規例)되었는지라, 옛 명단문서(名單文書)를 거두어 시장에서 모두 소각하니 온 장에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일어나 춤을 추어 장터에 물건들이 길가에 낭자(狼藉)하였다. 족인(族姻)의 원징(寃徵)의 폐단이 되었던 때문이요, 젊은데도 가취(嫁娶)를 못한 자들이 이 때에 이르러 혼인을 제때에 하게 되어 매번 생산하여 자식을 기름에 반드시 서로 경하(慶賀)하여 이르되 이 아이는 모공(某公)이 준 것이라 하였다. 삼정(三政)이 두서(頭緖)를 잡게되고 이산(離散)했던 자들이 다 돌아와서 생식(生殖)이 매우 번성하였다. 대민(大民)들은 예양(禮讓)으로 힘쓰게 하고, 소민(小民)들은 근도(謹度)로 교유(敎諭)하고 □吏(아전) □校(마부)에 이르기까지 위신(威信)이 병행(幷行)하였고 고용노임이 박한 것을 소탕하고 편리하게 제도하고 서로가 나쁜점을 들어내는 것을 징계하고 문권(文卷)을 살았으니 모두가 풍속을 돈독히 하는 것이요 폐단을 교정한 것을 능히 □거하지 못하고 파문이 여론과 읊음에 있으니 이것이 대개 백성이 공이 간 후에도 사모하고 죽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라. 소민들이 일찍이 돌을 다듬어 송덕하고자 했으나 본부(本府)에서는 퇴도(退陶)가 감히 선후(先候)는 포상하지 못한다는 훈계를 따르라는 이유로 일찍 비석이 있지 아니했는지라 그로인해 잠재우고 결과를 보지 못했더니 금년 봄에 부(府)의 벼슬한 훌륭한 선비들이 바야흐로 서원을 건립하여 공의 유상(遺像)을 타안(妥安)케 되니 이에 소민들이 서로 고해 이르되 우리들이 모두가 무육(撫育)과 자목(字牧)의 혜택을 입은 속에 유민(遺民)으로 홀로 추모의 정을 펴지 못함이 옳을 것인가. 또 공의 치정(治政)은 일찍기 하나의 연자방아가 된 것이 가장 그 덕업(德業)이 되고 또한 한나라의 자랑이요 법이 된 즉 그것을 돌에 새겨 송덕하는 것이 하필 꼭 백리의 국역(局域)에 국한되리오. 저 조령□관은 한양 서울의 남쪽 삼백여리가 되며 영하(嶺下)의 온 길이 수레를 일□하게 되니 사방 대소인원의 영남을 치위(治爲)한 자는 반드시 이곳에 있거늘 하물며 공은 □□(수령을 칭함)의 인물로 일찍 임해 보기도 하고 람경(覽景)하여 읊은, 즉 이 조령이 공에 있어서는 또한 숙자(叔子,羊祐의 字라 名與嶺共壽)의 고개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공의 비를 세우고자하면 이곳을 놓아두고 어디를 하리요. 여러분이 옳다고 이르니 드디어 세우고 쓰니 追思墮淚碑라고 했는지라. 나를 보고 비석의 음기(陰記)를 청탁하니 나도 역시 주민(州民)이라 공에게 사랑한 것을 알고 은혜가 깊으니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할세 곧 작문하고 말하여 이르되 공의 큰덕과 높은 명망은 당세(當世)에 으뜸이요, 조야(朝野)에 현저(現著)했도다. 그것을 장차 □정(주나라 때의 솥인데 鼎名이라 金言人物을 썌껴 경계를 삼음)에 색이고 간책(簡冊,역사책)에 빛나게 한 즉 어찌 써 비를 하리오마는 그러나 이 비를 세움은 주인(州人)의 노소들이 정성을 싣고 뜻을 합했으니 반드시 방황하지 아니하고 이곳 □관 곁에 세우고 가되 영남지방 수령들이 이 길을 지나는 자는 또한 곧 법으로 취해 치정에 시행한다면 이 비의 도움이 굉원(宏遠)하고 또 위대하지 아니하리요, 이것으로 지문(識文)을 삼고 □역을 도운 제원(諸員)들의 명단을 하기(下記)와 같이 쓰노라. ========================================================================= 『잊었던 찬연한 先祖의 偉業을 찾아서...』 安東市長 金暉東 역사에 길이 빛나는 太師公 始祖를 가까이 모실 수 있도록 所任을 맡겨주신 全國의 賢宗諸位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10여년전 ○○嶺에 한 安東府使의 비석이 있다는 지나가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늘 의구심을 가져오다가 지난 2월 안동시청 학예연구사를 동원 죽령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탐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2004년 2월 문경세제 관문을 지나 제 2관문 못 미쳐서 고 안동부사김상국정문공수근추사탄루비(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탄淚碑 : 돌아가신 옛 안동부사 정문공 수근을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를 발견하였다는 보고와 함께 주인공이 안동 김씨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3월 26일 현장을 순방한 결과 아주 놀랍고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는 碑石과 碑閣의 保護石柱가 웅장하고 원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경세제 관광객이 다니는 길옆에 완연한 자태로서 있었으나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관심 밖에 있었으니 부끄러움과 당혹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준비한 祭需로 잔을 올리고 揖禮를 마치자 마침 자전거를 타고 가던 75세 정도의 할아버지가 발길을 멈추고 비석의 사연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원래 보기 드물 정도로 비각이 웅장하였으나 6․25 동란시 비각이 소실되고 총탄을 맞은 비석과 비석주(기둥)만 남아있고 어느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신들은 무었때문에 왔느냐”고 묻기에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간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게 된 의의와 경위, 연혁, 내용과 원문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 安東府使 金洙根 追思墮淚碑 調査結果 □ 그 간의 調査經緯 ○ 2004. 2. : 안동시장 현지 조사 지시 ○ 2004. 3. : 학예연구담당(박장영) 현지조사 ○ 2004. 3. : 확대간부회의시 조사 지시 ○ 2004. 3.26 : 안동시장 현지 답사 □ 建立意義 ○ 안동대도호부사로 봉직한 김수근의 공적이 다대하여 후세 사람들이 추모하고 있으므로, ○ 문경 조령성 교구정터 옆에 건립하여 그 뜻을 기리고 공적을 널리 알려서 후세에 잊혀지지 않도록 은덕과 공적이 영원토록 이어 지기를 기원함 □ 建立經緯 ○ 선생 사후, 그 공덕과 은혜를 기리기 위하여 안동부 36방의 선비와 백성들이 뜻을 모음 ○ 퇴계선생 이후 안동부엔 공덕비 건립이 없어 부에는 세우지 않음에 따라 한양과 안동의 길목인 문경새재 교구정 옆을 선정 ○ 영남 각 고을 수령들과 많은 백성들이 다니는 관문에 세움으로써, 귀감으로 삼게 하여 선생의 공덕을 널리 알리고자 함. □ 人物沿革 ○ 김수근(金洙根, 1798~1854)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회부(晦 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憔老), 시호가 정문(正文). 목사 응순의 아들, 1834년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 헌종 1년(1835)규장각 대교, 1837년 대사성, 1838년에 안동부사 부임, 1839년 안동부사 이임,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 1847년 충청도관찰사, 철종 1년(1850) 이조참판, 동년 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과 대사헌, 1852년 홍문관대제학,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와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 ○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 院君)임. 철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됨. 저서로는『삼연선생연보(三淵先生年譜)』가 있음. 조선 말기 세도가의 집안으로 선생의 아들 병학과 병국은 정승에 오름. □ 碑石 建立年代 및 內容 ○ 건립연대 : 함풍(咸豊) 5년(1855) ○ 규 격 ∙ 비신 높이 143cm, 가로 55cm, 세로 30cm ∙ 비부 높이 48cm, 가로 108cm, 세로 55cm ○ 비석상태 : 비문 일부훼손, 한국전쟁 때 발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총상 흔적이 남아 있음. ○ 비문찬자 : 조봉대부 의금부도사 柳祈睦 ○ 비문근서 : 통훈대부 홍문관부응교 金鎭衡 □ 타루비(墮淚碑) 란? 타루비란 진(晋)나라 때 양양사람들이 양고의 비(碑)를 보기만 해도 눈물을 흘렸으므로 고사(故事)에서 타루비라 하였다. 양고라는 사람은 양양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원근 사람들에게 선정한 인물이다. 그가 오(吳)나라를 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양사람들은 저자를 파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방하여 선조 36년에 영(營)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여수에 타루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을 사모했다. 이 비는 김수근이 안동부사로 재직시 주휼(周恤) 선정하여 안동의 38방 소민(小民)들이 1855(철종5)년에 세운 비이다. 김수근은 1798(정조22)년에 태어나 1854(철종5)년에 졸한 헌종 때의 중신이다. 자는 회부(晦夫)이고 호는 계산초노(溪山樵老)이며 시호는 정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목사 인순(麟淳)의 아들이며 철종의 장인 문근(汶根)의 형이다. 김수근은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34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사후에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병국(炳國)․병학(炳學)은 재상이 되었고 동생 문근은 영은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연보(三淵年譜)가 있다. ○ 내용요약 ∙ 선생의 공적이 지대히 커서 그 공을 기리고자 안동부의 36방 소민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웁니다. ∙ 을해년에 선생이 안동부에 부임하여 백성을 구휼하고 교육에 힘쓰며 삼정을 바로 잡아 부내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 덕과 높은 명망은 당세의 으뜸이요,조야에 현저했도다. 그것을 장차 彛鼎(주나라 때의 솥인데 鼎名이라 金言人物을 새겨 경계를 삼음) 새기고 簡冊에 빛나게 했어나 하나 감히 비석으로 감당하고자 합니다. ∙ 선생의 은덕을 높이기 위하여 영남 각 고을 수령이 모이는 이곳 문경관문에 세우고 씁니다. 영남 각 고을의 수령은 선생을 본받아 치정에 시행한다면 비석의 도움이 크지 아니할까 합니다. □ 文化財 指定計劃 ○ 문화재 지정은 소재지 관할 행정기관에서 고증과 사료 조사에 의하여도 및 문화재청에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어 ○ 문경시에 본 건에 대하여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것임을통보하여 문화재로 신청 되도록 협조하였음. ※ 頌德碑 原文과 번역문 : ♦ 고 안동부사 김상국 정문공 수근 추사 타루비 ♦ (故 安東府使 金相國 正文公 洙根 追思 墮淚碑) 解譯(草) 故安東府使金相國正文公洙根追思墮淚碑(전면 대자)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浹 白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贊銘:기리는 말) 公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記事,幷序) 助役頭民府四面都有司 김맹윤 內外東先風憲 池千興 內外東後面任 千以範 남선면임김일록, 남후면임윤천석, 서선면임김상필 내외서후風憲정만대, 내외북선면임권재경, 내외북후면임임학삼, 임현내면임박성록, 임현남면OOO구, 내외임동면임O면대, 내외임북면임OO문, 내외임서면임OOO, 길안면OOOO,내외일직풍헌김윤범, 풍북풍헌김기영, 풍현내풍헌장미옥, 풍서풍헌최은백, 풍남풍헌신구백, 춘이면풍헌이득이, 감삼면풍헌김철룡, 소천면임박학선, 내성풍헌우효득, 재산풍헌최복태, 董役監官前戶長권기상, 折衝김의민, 前兵敎김철준, 兵使권치상, 嘉善김택실. ------------------------------------------------------------------------- 전면대자풀이: 돌아가신 옛 안동부사 김상국정문공을 그리워하여 눈물 흘리며 세운 비 찬명: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恩)浹 白(?百)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 공께서 옛날 우리를 감읍케 함은 / 따뜻한 새봄이 돌아옴과 같았네 빚 문서 태우시니 / 은혜가 천하에 무젖었네 밝은 햇빛 남쪽 누각에 임했으나 / 어제처럼 다시 뵐 길 없어라 비석이 닳아 (00 평평해지지 않듯) / 가이 없는 덕이로다 병서: 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 공께서 임직을 떠나신 지 16년 만에 돌아가시니 그 이듬해에 본부(안동부)에 속한 서른 여덟 방(마을)의 백성들이 세우다. 함풍 오년 구월에 옛날 다스리셨던 백성 조봉대부의금부도사 유기목이 삼가 짓고, 통훈대부행홍문관부응교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이 삼가 쓰다. 碑陰銘: 道主屹之陽 有石穹然 臨干其上者 曰故正文金公之碑 安東府小民爲遺愛立也 謹按公 以己亥出典是府 鉅局也 三政俱痼若絲棼然 又承洊荒 世施殆不能按堵 皆窳細民之顚 連而流散者什八九 公思所以?草而安集之 以前承旨유치명進鄕序堂首仕 置都監四員 得幼學권명하유진홍생원김대진진사김중O休鄕之迸也 與之參確就還 總87000석 其無名雜色40000석 减作小詳移貿之零 사만칠천석 皆糠粃沙石 乃燒散之量 O實總折半 作民留而輕歛之 査結政中隱卜與浦沙陳之偸弄者 定爲天 總而稅捧焉 우리 도내 주흘산 남쪽(聞慶府治)에 우뚝한 비석이 있으니 그 위에 쓰기를 ‘고 정문공 김공의 비석으로서 안동부 백성들이 애모의 뜻을 남기기 위해 세운다’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이 기해년에 안동부에 부사로 나아가 그 정사를 볼 때에 삼정이 모두 고질이 되어 마치 실타래 엉킨 듯 하였다. 거기다 장마 끝의 흉황이 잇따르자 구황을 위한 시책이 거의 백성을 안돈치 못할 지경이었다. 먼저 게으른 백성이 전도하고 연이어 유리도산하는 자가 십중팔구였다. 공이 처음 (?기틀)을 잡아 안정시킬 방도를 생각하여 전승지 유치명을 향서당 수임에 나아가게 하고, 도감 네 사람을 두되, 유학 권명하 유진홍 생원 김대진 진사 김중?을 얻으니 이름난 고장의 숨은 인재들이었다. 그들과 더불어 환곡한 것을 헤아려 확정해보니 모두 팔만 칠천 석 중에 무명잡색이 사만 석이요 흉황으로 소출이 줄거나 내용이 분명치 않은 것, 다른 물품으로 대납하여 줄어든 것이 사만 칠천석인데다, 전부 쭉정이와 겨, 모래가 섞인 것인지라 근거없이 사라진 분량이 사실 절반이 넘었다. 소작인들은 계속 땅을 부치게 하고 부세를 경감하는 대신, 토지 결수에 올라있는 토지를 은복(결수를 속이는 일)하거나 갯벌, 묵은 땅(휴경지)으로 둔갑시켜 농간을 부린 것들을 조사하여 본래대로(天) 확정하여 모두 부세를 매겼다. 以布政之最關民漠 其黃白 役(?隣)與族(?徵)之 寃徵者오천일명 排諸境內300여동 爲規 取舊 悉燒於市 一市人皆下擔起舞 所市物狼籍於道 方姻徵之爲弊也 至有髮華面不得嫁娶者 至是婚姻以時 每産育 父相慶曰 此某公賜也 及三政取緖 離散者盡還 而生殖甚繁 勉大民以福禮讓 諭小民以謹度 以至於職吏騷校 威惠幷行 陽雇薄而製優 懲交許而焚券 凡所以敦俗而矯弊者 不能枚擧而播在輿 誦玆 蓋民之於公 去而思 歿而不忘者也 군역을 베로 대납하도록 한 포정은 민정의 폐단에 관건이 되는 일로, 문서에 이웃과 친족에 징수케 한지라 그 징수를 억울하게 여기는 자가 오천 일 명이나 되었다. 이에 공이 안동부 경내 삼백여 동리를 조사하여 새 규칙을 만들고 옛 문서를 가져다 저자 한 복판에서 모조리 태워버리자 온 시장 안의 사람들이 짐을 내려놓고 일어나 춤을 추고, 팔러 온 물건들이 길에 낭자히 흩어졌다. 인징(인척이 대신 과세하는 제도)이 폐단이 된 후로 총각과 과년한 규수들이 (인징이 무서워) 시집 장가도 못가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혼인을 때맞추어 할 수 있게 되자 아이 낳고 기를 때마다(성취시킬 때마다) 父老들이 서로 경하하여 이르기를 ‘이는 모두 아무 공이 베푸신 은덕이다’라고 하였다. 삼정이 가닥을 잡게 되자 이산하였던 자들이 모두 돌아오고 농상공(생산과 화식)이 자못 번창하였다. 대민 부호들은 복록과 예양으로 면려하고 소민 빈민들은 근신과 법도로써 가르치며 아전과 구실아치에 이르기까지 위엄과 시혜를 병행하였다. 생산을 장려하여 거간의 이익을 가볍게 하며, 신용을 중히 하여 문서에 무게를 두지 못하게 하니 모두가 풍속을 두터이 하고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일일이 예를 들 수가 없으되 그 여파는 아직 항간에 남아 있어 칭송이 자자한 까닭은 대개 백성들이 공에 대하여 떠난 뒤에도 그리워하고 죽은 뒤에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小民嘗欲伐石頌之 以本府遵退陶不敢褒先後之訓 曾未有碑之者 因寢不果 今年春 府之薦紳章甫 方建院以妥公遺像 於是小民相告曰 吾儕俱以撫字中 遺民獨不伸追慕之情 可乎 且公之治 曾爲一最其德業 又爲一國之矜式 則其所以鐫頌者 夫何必局於百里之區也 彼鳥嶺陡在漢師南300여리 爲嶺下全路之綰轂 四方大小人員之南爲者 必由是焉 況公以蟾帷 嘗臨眺而嘯詠 則是嶺之於公 叔子之峴也 苟欲樹公之碑 捨是奚以 僉曰 可 遂立而書之曰 追思墮淚碑 餘謁請記諸陰 餘亦州民也 於公受知OO 義不敢辭乃作而言曰 公之碩德 巍望冠於當世 著於朝野 其將銘彛鼎而耀簡冊 則又安用碑 爲然是碑之立 州人之老小OOOOOOOOOOOO 去而南士宰牧之過是路者 亦將取法而施於爲政 是碑之助 其不遠且大乎 庸爲之識 以下 幾字毁滅不詳 내가 일찍이 돌을 다듬어 그 공덕을 칭송하려 하였으나 본부의 풍습이 퇴계께서 감히 앞뒤의 공적을 포폄치 못하게 한 가르침을 준수하여 아직 한 번도 송덕비를 세운 적이 없었던지라 오랫동안 결행하지 못하였다. 금년 봄, 부내의 전임직 고관과 여러 선비들이 마침 서원을 지어 공의 유상을 모시자고 발론하였다. 이에 내가 좌중에 서로 고하여 이르되 ‘우리들이 모두 문자 속이나 헤아린다면서도 덕을 입은 백성으로서 유독 추모의 정성을 펴지 못한다니 옳은 일이겠는가. 또 공의 치적은 일찍이 덕업으로 으뜸이었고 나아가 온 나라의 긍식이 되었으니 그 비를 새겨 칭송하는 일이 어찌 반드시 부내(백리는 부사가 관장하는 경역이다)에 국한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저 조령은 서울과의 거리가 남으로 삼백여리이고, 영남 전 도를 연결하는 요충이며 사방 대소인원 중 남행하는 자가 반드시 여기를 경유하게 되어 있다. 하물며 공은 왕의 인친으로 일찍이 여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렸으니 이 고개야말로 공에게 아저씨의 고개(철종의 처백부라는 뜻일 듯한데 전고가 있는지 미상이다)이다. 진실로 공의 송덕비를 세우고자 한다면 여기를 두고 어디로 하겠는가’하니, 모두 이르되 ‘옳은 말이오’ 하였다. 드디어 비를 세우고 글씨를 써 가로되 ‘추사타루비’라 한다. 나머지 배알한 자는 비의 음기에 적기를 청하니 그 나머지 또한 주내의 백성이다. 공에게 지우를 입었던 아무아무(유기목일 것이다)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고 말하기를 ‘공의 석덕은 우러러 볼수록 당세의 으뜸이요 조야에 두드러진 것이다. 그 장차 이정과 같은 조정의 보기에 새겨 실록과 같은 역사에 빛날 것인데 그렇다면 또한 어찌 비석에다 새기리요. 그러나 이 비의 건립은 본 주의 노소 백성의oooooooooo(공의에 따라 새겨진 것이니 이정이나 간책과 다름없다 의 내용일 듯 하다)--------를 떠나 남쪽을 향하는 선비나 군수 목사(외임직의 관리)중 이 길을 지나는 자는 또한 장차 모범을 삼고 정사에 시행하게 되리니 이 비석의 도움이 그 아니 원대하다 하겠는가. 용렬하나 이로써 지한다’ 이 아래 몇 자는 훼멸되어 자세하지 않다. 전면 비문외에 公昔泣我 陽春有脚 簿燒 黃 思浹 白 日中南樓 無蹈如昨 石oo平 不洙者德라는 贊名(銘)이 있고 公去十六年歿 越明 本府38坊小民等立 咸豊5년9월 舊民朝奉大夫義禁府郡事 柳祈睦 謹識.통훈대부行홍문관부응교 겸경연시강관춘추편수관지제교 김진형 謹書. 助役頭民府四面都有司 김맹윤 內外東先風憲 池千興 內外東後面任 千以範 남선면임김일록, 남후면임윤천석, 서선면임김상필 내외서후風憲정만대, 내외북선면임권재경, 내외북후면임임학삼, 임현내면임박성록, 임현남면OOO구, 내외임동면임O면대, 내외임북면임OO문, 내외임서면임OOO, 길안면OOOO,내외일직풍헌김윤범, 풍북풍헌김기영, 풍현내풍헌장미옥, 풍서풍헌최은백, 풍남풍헌신구백, 춘이면풍헌이득이, 감삼면풍헌김철룡, 소천면임박학선, 내성풍헌우효득, 재산풍헌최복태, 董役監官前戶長권기상, 折衝김의민, 前兵敎김철준, 兵使권치상, 嘉善김택실. -------------------------- ★----------★----------★------------------------------- 또한 발길을 돌려 돌아오는 길에 문경세제관문 못 미쳐 송덕비의 집적지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안동 김 先朝 네분의 장엄한 觀察使善政碑를 보고 또 한번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여기 네분의 위대한 송덕비 내용을 소개합니다. ■ 김희순(金羲淳, 1757~1821)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산목(山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인(履仁)이고 어머니는 참봉 이극현(李克顯)의 딸이다. 1783(정조 7)년에 생원이 되고, 1789년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804년부터 1806년까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였고 후에 호조, 예조 등의 참판과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어릴 때부터 문사에 능했고 경술(經術)에 조예가 깊었다. 이 비는 1836(헌종 2)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36년 ◆재직기간: 1804~1806 ◆비문 관찰사김상국희순불망비(觀察使金相國羲淳不忘碑) 丙申 九月 ■김대근(金大根, 1805~1879)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안동, 호는 여연(如淵)이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한순(漢淳)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각(慤)의 딸이다. 1827(순조 27)년에 왕세자청정경과정시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48년부터 1849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였고 후에 한성부판윤, 예조·형조·이조판서, 좌·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시화에도 능하여 영물 등의 시 280여수를 남겼다. 1862년에 쓴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에서 당시 전부(田賦)·군적(軍籍)·환곡(還穀) 등의 폐단을 논하고 그 시정책으로 전부는 곡식과 돈을 혼합징수하지 말고. 지역에 따라 한가지로 통일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군적에 있어서는 일없이 한가로이 지내는 장정들의 병역기피를 방지하고 병역면제를 핑계로 돈을 함부로 징수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환곡에 있어서는 과거의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부활시킬 것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로 여연유고 3책이 있다. 이 비는 1851(철종 2)년에 건립되었다. ◆건립연도: 1851년 ◆재직기간: 1848~1849년 ◆비문 : 순찰사김상국대근선정비(巡察使金相國大根善政碑) ■김세균(金世均, 1812~1879)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호는 만재(晩齋),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서윤 병문으로 현감인 큰아버지 병광에게 입양되었다. 1834(순조 34)년에 진사가 되고 1841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제학, 대사성, 이조참의를 거쳐 1860년부터 1862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였다. 후에 대사헌, 이조판서, 공조판서,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완염통고가 있다. 이 비는 1870(고종 7)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70년 ◆재직기간: 1860~1862년 ◆비문(碑文) 관찰사김상국세균귀애비(觀察使金相國世均貴愛碑) 庚午 八月 日 ■김명진(金明鎭, 1840~?)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치성(稚誠)이다. 아버지는 석균이며 세균에게 입양되었다. 1870(고종 7)년 정시별과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성,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88년부터 1890년까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수취체제의 혼란상에 대해 올린 장계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연간의 사회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후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비는 1890년에 건립되었다. ◆건립년도: 1890년 ◆재직기간: 1888~1890년 ◆비문 관찰사겸남영사김상국명진영세불망비(觀察使兼南營使金相國明鎭永世不忘碑) |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선정비군(聞慶市 聞慶邑 上草里 善政碑群)
문경새재 선정비군
일련번호 | 비 명 | 비형태 | 재임기간 | 건비연대 | 기 타 |
1 | 신길원 충렬비 | 개석有 | 1590~1592년 | 1706(숙종) | |
2 | 관찰사 김연 거사비 | 월두형 | 1704~1706년 | 1709(숙종) | |
3 | 현감 이덕령 선정비 | 말각형 | 1695~1698년 | 1709(숙종) | |
4 | 현감 김희로 선정비 | 말각형 | 1713~1716년 | 1716(숙종) | |
5 | 현감 최두현 불망비 | 방형 | 1704~1706년 | 1706년 전후 | |
6 | 관찰사 김세호 불망비 | 개석有 | 1869-1874년 | 1870년 | |
7 | 현감 홍로영 불망비 | 개석有 | 1824~1827년 | 1826(순조) | 철비 |
8 | 현감 엄사면 거사비 | 말각형 | 1802~1806년 | 1834(순조) | |
9 | 관찰사 김희순 불망비 | 월두형 | 1804~1806년 | 1836(헌종) | |
10 | 관찰사 조병현 불망비 | 월두형 | 1834~1836년 | 1836(헌종) | |
11 | 순찰사 김대근 불망비 | 월두형 | 1848~1849년 | 1851(헌종) | |
12 | 관찰사 이삼현 불망비 | 방 형 | 1865~1868년 | 1867(고종) | |
13 | 관찰사 김세균 불망비 | 말각형 | 1860~1862년 | 1870(고종) | |
14 | 현감 이호숙 불망비 | 개석有 | 1871~1874년 | 1873(고종) | |
15 | 관찰사 박제인 불망비 | 월두형 | 1875~1877년 | 1877년 전후 | |
16 | 관찰사 이근필 불망비 | 월두형 | |||
17 | 안동부사 김수근 타루비 | 개석有 | 1885(고종) | ||
18 | 현감 이인면 선정비 2 | 1888년 | 1889(고종) | 마애비 | |
19 | 현감 이인면 거사비 | 1888년 | 1889(고종) | 마애비 | |
20 | 현감 이인면 애휼비 | 1888년 | 1889(고종) | 마애비 | |
21 | 현감 이인면 선정비 1 | 월두형 | 1888년 | 1890(고종) | |
22 | 군수 이재하 선정비 | 월두형 | 1888년 | 1888 이후 | |
23 | 관찰사 김명진 불망비 | 개석有 | 1888~1890년 | 1890(고종) | |
24 | 관찰사 엄세영 송덕비 | 방 형 | 1896~1899년 | 1897(고종) | |
25 | 상주목사 이익저 불망비 | 마애비 | |||
26 | 별장 이명의 불망비 | 월두형 | |||
27 | 오위장 이영직 추사비 | 말각형 | |||
28 | 김석주 불망비 | 월두형 |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
조곡폭포
영남 제2관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신립장군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한 뒤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를 정찰한 다음 작전 회의를 열었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새재와 탄금대 중 어느 쪽이 유리할지를 묻자 김여물은 “왜적은 큰 병력이지만 우리는 작은 병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보다 지형이 험한 새재의 양쪽 기슭에 복병을 배치한 후 틈을 보아서 일제히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울로 돌아가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종장 또한 “적이 승승장구하고 있어서 넓은 들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불리할 듯싶고, 이곳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교란한 뒤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들판에서 기마로 짓밟아버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전술이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의 진을 쳐야 합니다”라고 한 뒤에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결국 왜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새재를 넘었다.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난 후에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신립 장군이 새재에서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은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를 보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위하로 불러들여 조령 지키는 일을 버리게 되었다. 적이 조령 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접근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하였다.
이 제독(명나라의 이여송)이 조령을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적에게 넘기다니 신 총병(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내가 이듬해인 계사년에 남쪽의 진중을 왕래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보니, 관문을 설치하고 양변을 따라 복병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군읍에 씻은 듯이 사람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의 최정예 부대를 거느렸던 신립은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였다.
신립은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남한강에서 투신 자결하고 말았는데, 그의 흔적은 그가 열두 번을 오르내리며 부하들을 독려하다가 숨졌다는 열두대로에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도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어째서 신립은 문경새재를 방어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 진을 쳤는가’이지만 이는 이미 지나가버린 옛일일 따름이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한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억새가 우거져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는 새재에는 신라시대에 이미 자연히 이루어진 좁은 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문경새재는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천연의 요새임에도 호란이나 왜란 때 제대로 방어된 적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년 전인 1589년에 조헌이 도끼를 옆에 두고 왜적 방비책으로 영남과 새재에 경계를 더할 것을 상소했으나 묵살되었다.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어와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 있는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경상감사의 인수인계인 교인식이 거행되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다.
탄금대 싸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북상하는 왜군에 맞서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왜군은 이곳에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만약 신립이 새재의 지세를 이용해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은 바뀌었을 것이다.
문경초점 낙동강 발원지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영남 제3관
영남 제3관
영남 제3관문 조령관
영남 제3관문 조령관
처음 출발한 문경새재 관리사무소가 있는 주차장에서 영남 제3관문 조령관 여기까지 편도 6.5km입니다.
다시 돌아 가면 왕복 13km 거리입니다.
이곳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조사한 꼭 가봐야할 국내관광지 100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국내 최고의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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