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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제향,행사

2016년 옥병서원 춘향

by 연송 김환수 2016. 4. 25.

2016년 4월 25일 옥병서원 춘향 모습


홍살문의 태극문양 홍살이 탈락하여 보이지 않네요

홍살문 () 이란 ?

 

붉을 홍(), 살은 한글로 화살의 살, 문은 붉은 화살이 박혀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옛날에 가장 똑바른 것이 자 또는 화살이었는데 화살은 한 목표지점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곧고 바르게 만들었답니다.

 

문에도 그런 의미에서 곧은 화살을 달아 놓아 사람의 곧은 마음을 표현 한 것입니다.

(), (), (), 대궐,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세워서 죽 박는다.

[비슷한 말] 홍문2(紅門)홍전문(紅箭門)

 

홍전문(紅箭門)

 

한국에서 능묘나 궁전, 관아등의 건물 앞에 세워 놓은 문. 전체를 붉게 칠하여 성역임을 표시함. 2개의 기둥 상부에 2개의 상하 관()을 걸쳐 놓고 수격자(竪格子) 살을 그 사이에 늘어 놓으며 그 중앙에는 세개의 ()자 살로 장식하기도 한다.

홍살문이라고도 함

 

홍전문(紅箭門)의 붉은색은 악귀를 내쫓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 백성들이 화살 '()' 자를 ''로 발음하여 오늘날 '홍살문'이 라고 전해지게 되었다.


홍살문은 신라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나무 건축물로 출입문의 역할을 했지만, 출입의 기능보다 상징성이 더 중요시 되었던 문()이다.

 

형태는 한자 ''의 형상에서 따온 것이다. 문이지만 주변에 담장이 없었기 때문에 방어를 하거나 출입을 통제하는 목적은 없다.

 

9m 이상의 둥근기둥을 지주석 위에 고정시키고 두 개의 기둥을 양쪽에 두고 문짝은 달지 않았다.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 지붕이 없이 중앙에 태극문양의 삼지창 1개를 포함하여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9개에서 19개정도 나란히 박아 연결하였다. 

홍전문 가운데에는 삼지창을 설치하거나 태극 문양을 설치했으며, 태극문양과 삼지창이 없는 형태도 많다.

(통상적으로 태극문양 삼지창 좌우에 4개내지 9개정도 뽀죽한 홍살을 설치했다.)



태극문양 삼지창 1개를 포함하여 홍살 7개로 되어 있는 경주시 배동에 있는 효자리(孝子里)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


비석에는

孝子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月城金公 相兊之碑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월성김공 상태지비

 

孝子 贈 嘉善大夫 禮曹參判 月城金公 壽萬之碑

효자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월성김공 수만지비

 

현판에는 끝에 지려(之閭)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효각은 정려각(旌閭閣)이라고도 합니다

 

양세정효각(兩世旌孝閣)의 양세의 뜻은 2세대에 걸쳐 효를 실행한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정려문(旌閭門), 정려각(旌閭閣), 정효각(旌孝閣)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두 개의 기둥을 하고 그 사이로 붉은 살을 해 놓은 홍살문은 왕릉 능역이나 향교 등에서 악귀를 쫓는 풍수적 기능을 하는 문임을 알 수 있다. 이 홍살은 능원이나 향교의 홍살문에만 설치한 것이 아니라 궁궐이나 관아의 대문, 사찰의 금강문과 천왕문, 종각, 비각 그리고 정려각과 서원, 재실, 민가의 솟을대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홍살의 수는 홍살문마다 다르며 양수인 홀수로써 9, 11, 13개등으로 양을 나타낸다. 중앙에는 홍살 2개가 태극 모양 있는 곳을 지나면서 위에는 3개가 되지만 1개로 계산을 한다.

 

홍살문 중에 홍살의 수가 9개인 것이 가장 많은데, 그 이유는 9가 완성된 수라 하여 가장 좋은 숫자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태조 건원릉의 홍살은 9개이다. 동구릉의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홍살이 19개인 폭이 넓은 홍살문이 있는데 이 곳의 홍살의 갯수는 입구의 넓이에 따라서 갯수를 정한 것으로 볼수 있다.


1, 3, 5, 7, 9라는 홀수는 음양 중 양()에 속하고, 2, 4, 6, 8인 짝수는 음()에 속한다. 양은 살아 있는 사람을 뜻하고, 음은 죽은 사람을 상징한다. 살아 있는 자의 집인 주택을 양택(陽宅)이라고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은 음택(陰宅) 이라 한다.  


홍살 중앙에 태극이 있다. 태극 문양의 3태극은 하늘사람을 의미한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순리인 천지인사상을 중요시하는 유교정신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가겠다는 뜻으로 태극문양을 왕실 상징무늬 중의 하나로 선택하고, 충효와 학문의 상징으로 귀하게 여기고 그러한 사유로 태극무늬는 왕실과 관계있는 궁궐왕릉종묘와 같은 건축물 또는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장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창경궁의 명정전과 홍화문창덕궁의 돈화문과 대조전경복궁의 근정전과 강녕전등에 태극문양이 있다.


홍살문은 특별하게 정해진 규격이 없는 것인지 화살의 모양도 다양하고 똑같이 생긴 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규모나 형태가 조금씩 다르고, 근래에 세워지는 홍살문은 재료 또한 나무와 석재, 철재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즘 제작하는 홍살문(소나무)  견적은 1500만원에서 2천만원이내로 규격은 높이 5.4m, 4m, 기둥(홍송) 33cm정도부터 제작하는데 홍살문 높이 9m이내에 폭을 지형여건에 맞추어 크게 제작하려면 추가비용이 예상된다.


홍살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은 기둥의 색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상부에 설치한 화살모양의 나무살 때문이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화살은 나쁜 액운을 화살 또는 삼지창으로 공격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홍살문을 설치하는 곳은 서원이나 향교에 설치하였으며, 집안 재실에도 설치하였다. 또한 능과 묘에도 설치했으며 충신, 열녀, 효자 등을 배출한 집안이나 마을에도 홍살문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신성시 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홍살문(紅箭門)이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 (), (), (), 궁전(宮殿), 관아(官衙) 등에 세우도록 한 붉은 문(紅門)이다.

일반 서원에 세워지기도 하는데 이는 고명한 유학자의 위폐를 서원에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정려(旌閭), 정문(旌門), 작설(綽楔), 도설(棹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좌우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없이 斜籠(사롱)만 얹고 붉은 단청을 한다. 붉은 단청을 하는 것은 신성한 곳을 나타내기도 하고 악귀를 내쫓는 의미이기도 하다.

 

홍살문의 유래와 역사

 

홍살문이란 말이 처음 쓰인 곳은 중국의 주례(周禮)로서 임금이 행차시에 임시로 머무는 곳이다. 바깥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 또는 빈객을 만나는 곳을 나타내던 기()나 문()의 표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후대에와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를 표창하여 집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색 문의 표시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우리 나라 홍살문은 신라때부터 발생하여 고려에 들어와서 적지 않게 건립되었다. 특히 성종이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정려[홍살문] 또한 많이 건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전국적으로 상당수 세워졌다.

홍살문은 대개 효행을 중심으로 많이 포상의 형식으로 주어졌으며 조선조에는 의부(義夫), 절부(節婦, 열녀) 등에게도 내려져 효행과 여성의 절개를 중시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하였다.

서원 또한 많이 건립이 되고 유명 서원에서는 유학선현들의 위폐를 모시는 경우가 많아 홍살문 또한 세워지게 되었다. 오늘날 시골에는 홍살문들이 고가(古家)의 대문이나 마을 어구, 서원 입구 등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홍살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와 있는 향덕(向德)의 기록을 보면

 

신라 웅천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신라 경덕왕 14(755) 흉년으로 그 부모가 굶주림과 병이 들자 자기의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내어 이를 아버지에게 먹여 병이 낫게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왕은 벼 3백석과 집한 채와 구분전(口分田)을 하사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돌에 이 사실을 새겨 이 뜻을 표하였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 고을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는데, 거기에는 이름이 향득사지(向得舍知)로 되어 있고 간단한 효행사실과 아울러 벼 5백석을 하사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비록 정려(旌閭, 홍살문)라고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기능으로는 우리 나라 최초의 홍살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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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병서원(玉屛書院) / 향토유적 제26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인조27(1649)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되어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을 제향하였고 숙종 24(1698) 신완(申琓)의 건의로 조정의 지휘를 받아 이의건(李義健) 선생과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배향하고 숙종39(1713) 이이명(李 命)의 건의로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된 서원이다.

* 사액서원 :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

***** 참고로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도 알고보면 우리 안산김씨 상호군 휘 암(의주파)의

        따님 후손(손자) 사위에 해당하시는 분으로 안산김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 분이다.

        우리집안에서는 이분이 우리 안산김씨와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후 150여년을 지나 고종원년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자 서원은 없어졌으나 박순, 이의건, 김수항선생의 유업과 덕행을 잊을수 없어 포천유림들의 발의로 서원구지에 설단하고 매년이월망일에 제향만을 거행하여 오다가 1926년에 안산김씨 김성대선생, 이화보선생 윤봉양선생을 단에 추가배향하였다.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포천군의 유림들이 1978년 춘향시서원복원추진위원회(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고 당국에 건의하여 1980년 국비와 도비의 보조로 기공하여 3차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물은 본당과 동재 서재 삼문 담장을 갖추었는데 본당 숭현각(崇賢閣)은 맞배지붕에 방풍판를 달았다. 숭현각의 규모는 정면7.70m, 측면4.70m이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186cm, 64cm, 두께 33cm이다.



병신년(2016년) 춘향 분정기









사진출처 : 김순진 교수님 페이스북 (facebook) 


2015년 옥병서원 춘향 바로가기 : 사암(思庵) 박순(朴淳)선생 알아보기 

http://blog.daum.net/yescheers/8598991


옥병서원(박순, 김성대 등 여섯분 배향), 창옥병 암각문

http://blog.daum.net/yescheers/8597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