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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기타성씨 연원

거제 반씨(巨齋潘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6.

거제 반씨(巨齋潘氏)의 연원
 


반씨(潘氏)의 연원(淵源)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 府群玉)’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중국 형양(滎陽ㆍ하남성 개봉도)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계손(季孫)이 반(潘) 땅에 봉해지고, 그곳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반씨(潘氏)의 성(姓)이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반씨대동보(潘氏大同譜)’의 기록에 의하면 계손(季孫)의 9세손인 시조(始祖) 반부(潘阜)는 자는 군수(君秀), 호는 해려재(海旅齋)로 1230년에 출생하였다. 남송(南宋) 이종(理宗)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원나라 정벌을 간청하였으나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원에 사신으로 보내 은밀히 죽이게 하였다. 원(元)의 세조(世祖)는 문무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보고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으며, 그 무렵 고려 충렬왕이 세자로 원니라에 있었는데 그의 충의를 높이 사 입몽(入蒙)한 밀직부사 김방경(金方慶)에게 그를 고려로 데려가라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뒤에 충렬왕비가 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ㆍ원나라 세조의 딸)를 따라 고려로 오게 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ㆍ종1품)에 오르고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ㆍ기성은 거제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그는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으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로 거제의 문절사(文節祠)에 제향되었다.

▲ 경남 거제시 장승포읍 국사봉 중허리에 자리한 시조 반부(潘阜)의 묘.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 반부(潘阜)가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기성 반씨(岐城潘氏)라 하였다가, 아들 정(挺)과 유항(有抗)을 시작으로 가세가 일어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면서 세거지명에 따라 분관하게 되었다. 6세손 자건(自健)이 영평군(永平君ㆍ영평은 남평의 옛 이름)에 봉해져서 그 후손들이 남평(南平)으로 칭관했고, 자건(自健)의 둘째 아들 충(忠)이 광주백(光州伯)에 봉해지자 그 후손들이 광주(光州)로 칭관했고, 반부(潘阜)의 7세손 련(璉)의 후손들은 결성(結城)으로 칭관하는 등 기성(岐城)ㆍ충주(忠州)ㆍ남평(南平)ㆍ결성(結城)ㆍ청도(淸道)ㆍ홍천(洪川)ㆍ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다. 그러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동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를 편찬할 때 거제 반씨(巨齋潘氏)로 통합, 종전의 본관을 분파로 하여 기성파(岐城派)ㆍ남평파(南平派)ㆍ광주파(光州派)ㆍ결성파(結城派) 등으로 일컫고 있다.

▲ 우시중(右侍中) 반익순(潘益淳)과 아들 찬성사(贊成事) 반복해(潘福海)의 임명 기록과 반복해(潘福海)가 우왕의 수양아들이 되는 과정이 기록된 ‘동사강목(東史綱目)’ 권8 정묘년(1387년) 8월조.

시조 반부(潘阜)의 증손(曾孫) 익순(益淳ㆍ?~1388)은 자는 인여(仁輿), 호는 청계(淸溪)로 찬성사(贊成事)에 기용되었다. 우왕 13년(1387년) 아들 복해(福海)가 왕을 따라 사냥을 갔다가 왕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를 쏘아 죽임으로써 왕을 구출한 공으로 왕씨(王氏) 성(姓)을 하사받고 수양아들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1387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우시중(右侍中)에 제수되었다. 당시 권세를 쥐고 있던 아들의 장인인 이인임(李仁任)이 심복 염흥방(廉興邦)ㆍ임견미(林堅味) 등과 함께 권력을 쥐고 재물을 모으기 위하여 왕을 타락시키더니, 얼마 후 염흥방이 그의 종 이광(李光)을 시켜 전 밀직부사(前密直副使) 조반(趙?)의 토지를 빼앗는 등 횡포를 부리자, 이를 계기로 1388년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 등이 당시 세력가였던 이인임 일당을 죽일 때 연루되어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양(忠襄).

 

▲ 반복해(潘福海) 등 50여 인과 그 친당(親黨) 1천여 인을 죽였다는 기록이 실린 ‘동사강목(東史綱目)’ 권8 무진년(1388년) 1월조. 반복해(潘福海)는 아버지 익순(益淳), 형 덕해(德海), 장인(丈人) 임견미 등과 함께 참살당하고, 원나라로 망명한 아들 자건(自健)만 생명을 보존했다.


익순(益淳)의 아들 덕해(德海)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아우인 복해(福海)와 함께 현달하여 명문의 기틀을 마련했다. 특히 복해(福海ㆍ?~1388)는 자는 유술(有述), 호는 석암(石庵)으로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밀직승지(密直承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우왕(禑王)과 함께 서해도(西海道)에서 멧돼지 사냥을 할 때 왕(王)을 구한 공으로 총애가 날로 깊어져 왕씨(王氏) 성을 하사받고 우왕(禑王)의 수양아들이 되었다. 우왕 11년(1385년) 왕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으며, 1387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ㆍ정2품)가 되어 추충양절익대좌명보리공신(推忠亮節翊戴佐命輔理功臣)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조반(趙?)의 옥사(獄事) 이후 반목이 심해진 최영(崔瑩)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였으며, 그 결과 아버지 익순(益淳)을 비롯하여 형 덕해(德海), 장인(丈人) 임견미 등과 함께 모두 참살당하고 아들도 절멸되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되었다. 그리고 처(妻)와 딸은 노비가 되는 등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었으며, 이때 그의 아들 자건(自健)은 원나라에 망명하여 생명을 보전하였다.



한편 복해(福海)의 아들 자건(自建)은 자는 희경(希卿), 호는 영막당(永慕堂)으로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었을 때 원(元)나라에 망명하여 생명을 보전하였으며, 조선개국공신인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의 사위인 연유로 조선이 개국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고, 영평군(永平君)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반씨(潘氏)는 조선조에서는 초기부터 개국에 참여해 번영을 누리는 듯 했으나, 중기부터 쇠운을 맞아 겨우 문과 급제자 5명, 공신 1명을 배출하는데 그쳤다.

자건(自建)의 아들 충(忠ㆍ1348~?)은 자는 평중(平重)으로 8살에 ‘사기(史記)’를 숙독할 만큼 총명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또한 집안 살림이 넉넉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휼하고 덕을 베풀어 남들이 우러러 보았다. 고려시대에 한림(翰林)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고 1375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듬해 정헌대부(正憲大夫) 및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워 1392년 개국원종좌명일등공신(開國原從佐命一等功臣)에 책록되었고, 해양군(海陽君)에 봉해졌다가 광주백(光州伯)에 추봉되었다. 합보(合譜)하기 전 광주 반씨(光州潘氏)의 득관조(得貫祖)였다.

절효(節孝) 반유(潘濡) 등 삼현(三賢)을 제향하는 경북 예천군 보문면 옥천동 옥천서원(玉川書院). 1868년 훼철되고 상덕사(尙德祠)만 남아 있었으나 1985년 중건하였다.

덕해(德海)의 손자 유(濡ㆍ1374~1437)는 부친상을 당하자 여막에서 3년 동안 시묘하였으며, 새로운 세상인 조선에서 벼슬함을 부끄러워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절의와 효행이 뛰어나 ‘절효(節孝)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일이 경상도 관찰사에 의해 조정에 알려져 태종이 1418년 정문(旌門)을 내렸고, 성종은 1477년 오원도 찰방(烏原道察訪)에 증직하였다. 숙종 때 예천 옥천서원(玉川書院)과 달계서원(達溪書院)에 제향되었다.

 

▲ ‘중종실록’ 권1 병인년(1506년)조에 문효공(文孝公) 반
우형(潘佑亨)이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형(佑亨)은 자는 문보(文甫), 호는 옥계(玉溪),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성종 5년(147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고, 성종 17년(1486년) 지평(持平)을 거쳐 사간(司諫)ㆍ대사성(大司成)ㆍ동지성균관사 (同刻成均館事)ㆍ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다가 갑자사화(甲子士窩)가 일어나 파직당했다. 다시 한성부 우윤(韓城府右尹)과 좌윤(左尹)을 지냈으며, 1506년 박원종(朴元宗) 등과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올라 이성군(利城君)에 봉해지고 발탁되어 대사헌(大司憲)ㆍ예조판서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도총관 등을 역임하여 기성군(岐城君)으로 개봉되었다. 중종 14년(1519년) 기묘사화(已卯士禍)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유배당했으며, 명종(明宗) 때 신원(伸寃)되어 복작(複爵)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

▲ 충남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에 자리한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의 묘.


석평(碩枰ㆍ?~1540)은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 서린(瑞麟)의 아들로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어떤 재상(宰相)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그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하여 글을 가르치고, 아들없는 부자집에 보내어 아들로 삼게 하고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중종 2년(150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검열(檢閱)ㆍ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쳐 중종 17년(1522년) 만포진 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고, 함경남도 병마절도사ㆍ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1527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30년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을 거쳐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전라도ㆍ경상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재임되었다가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형조참판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형조판서(刑曹判書)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지냈다. 청렴한 관리로 이름났으며, 뒤에 주인집 자손이 잔미(殘微)하여졌지만 혹 노상(路上)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한다. 시호(諡號)는 장절(壯節).

 

 

 

 

▲ ‘중종실록’ 권20 갑술년(1514년)조 기록에 천얼(賤孼) 출신으로 판서(判書)에 이른 장절공(壯節公) 반석평(潘碩枰)에 대한 사관의 평이 실려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권20 갑술년(1514년)조 사관(史官)의 평에 의하면, “반석평은 천얼(賤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반석평이 학문에 뜻이 있음을 할머니가 알고서, 천얼임을 엄폐하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취학시켰다.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여 중외(中外)의 관직을 거쳐 지위가 육경에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할머니를 현명하게 여겼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신분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례로, 가문에서는 아들을 훌륭히 키우고자 한양으로 이사를 하여 훌륭한 선생을 찾아갔던 어머니를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에 비교하여 ‘경천지교(京遷之敎)’라 하고 있으며, 제8대 유엔사무총장이 된 기문(基文)은 석평(碩枰)의 16세손이다.

▲ 충북 음성군 원남면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된 반석권(潘碩權)의 묘(원남면 하노리)와 제8대 UN사무총장 반기문(潘基文)의 생가가 있는 원남면 상당리 행치마을의 집성촌.


석평(碩枰)의 동생 석권(碩權ㆍ1477~1560)은 자는 평보(平父)로 중종 2년(1507년)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여러 차례 대과에 응시하지 못한 채 중종 35년(1540년) 율봉찰방(栗峰察訪)에 제수되었다. 인종 1년(1545년) 사온직장(司?直長), 1547년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영춘현감(永春縣監) 때 선정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으며, 명종 7년(1552년) 임기가 만료되어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이때 나이 76세로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농장이 마피골에 있어 그곳에서 살았으며, 이로써 반씨가 음성에서 세거하여 뿌리를 내렸다. 명종 15년(1560년) 노직(老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품계되었다.

▲ 신구 두 묘비가 서 있는 충남 음성군 원남면 하노리 국오(菊塢) 반인후(潘仁後)의 묘..

인후(仁後ㆍ1555~1628)는 자는 응선(應先), 호는 국오(菊塢), 선무랑(宣務郞) 사렴(士濂)의 아들로 음성 지역에 거주하였다. 선조 24년(1591년) 사마시(司馬試)에 등과해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글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조령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적군이 쏜 탄알에 부상을 당하자 아들 운익(雲翼)에 의해 구출되었다. 임진왜란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선조 38년(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권되었고, 참봉(參奉)에 초배되어 봉사(奉事)ㆍ직장(直長)ㆍ주부(主簿)ㆍ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을 역임하였다.



근대 인물로 하경(夏慶ㆍ?∼1910)은 일명 학영(學榮)으로, 고종 때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냈다. 광무 9년(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5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에 비분을 억제하지 못하여 남몰래 순국할 뜻을 써서 품안에 간직하고 작은 아버지를 찾아가 결별을 고하고 돌아오다가 품안에 간직하였던 글을 펼쳐 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 왔으며, 이제 임금이 하정(下庭)했는데 내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하며 할복하여 순절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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