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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기타

남태령 송덕비 - 세상 모두 도둑놈 뿐

by 연송 김환수 2014. 4. 20.

남태령 송덕비(頌德碑) - 세상 모두 도둑놈 뿐

 

옛날 과천 남태령에 송덕비가 하나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 비명(碑銘)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였습니다.

 

조선조 지방 수령 중에 과천 현감은 서울이 가깝고

오가는 고관을 접촉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세금징수가 많기 때문에 재물을 모아 뇌물을

상납하여 조정의 좋은 자리로 영전하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어느 때 과천 현감이 영전하여 서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전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며 비문을 어떻게 할까 문의하였죠.

 

그러자 현감이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여 아전들이

남태령에 송덕비를 세우고 현감에게 제막식을 하고

가시라고 했습니다.

 

현감이 잠시 행렬을 멈추고 포장을 벗겼습니다.

비문에는

 

今日送此盜 (금일송차도)/ 오늘 이 도둑놈을 보내노라. ”

라고 쓰여 있었지요.

 

이를 보고 현감이 화를 내기는 커녕 껄껄 한번 웃고

그 옆에 한 줄 더 씁니다.

明日來他賊 (명일래타적)/ 내일 다른 도둑놈이 올터인데.”

 

현감이 떠나자 아전이 기가막혀 또 한 줄을 보태 씁니다.

此盜來不盡 (차도래부진)/ 도둑놈들만 끝없이 오는구나.”

 

행인이 지나가다 이를 보고 또 한 줄을 더 보태어 씁니다.

擧世皆爲盜 (거세개위도)/ 세상에 모두 도둑 놈뿐이구나."

 

 

실화인지, 지어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만한 풍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 가운데 과천현감은 한양이 가깝고, 오가는 고관을 접촉하기 쉬우며, 세금징수가 많기 때문에 재물을 모아 뇌물을 상납해 조정의 권좌로 영전하는 자리였다.

 

과천 현감이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가게 되면 그의 공을 찬양하기 위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당시 검은 돈을 벌기에 가장 좋은 벼슬로, 감사는 평안감사, 목사는 의주목사, 현감은 과천현감을 쳤다.

 

비석(碑石)의 사전적 의미는 '고인의 사적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문장에 새겨놓은 돌'이다. 이 비석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기적비(紀跡碑.발자취를 적은 비석), 기념비(紀念碑), 순수비(巡狩碑), 공덕비(功德碑), 송덕비(頌德碑), 송적비(功績碑),  공로비(功勞碑 등등 주위에서도 비석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비석중에 옛날부터 관직을 지낸 사람들의 공덕비나 송덕비에는 말들이 많았다.

* 순수비 : 순수<狩>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事迹(사적비), 事蹟碑(사적비), 事跡碑(사적비)의 차이

 

事迹(사적), 事蹟(사적), 事跡(사적)은 동일한 단어들이며 이 대표자이고 이체자(異體字)입니다.

 *** 이체자(異體字) : 음과 뜻은 같으나 모양이 다른 한자

事績(사적)도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구분하면

 

事績(사적 : 事蹟,事跡)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이룩했던 큰 업적을 뜻하고

事迹(사적)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경과를 뜻합니다.

 

事績碑(사적비)가 위대한 성취와 공적 등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事迹碑(사적비)는 어느 시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다는 말입니다.

 

事績碑(사적비)神道碑(신도비)와 같이 주로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고

事迹碑(사적비)遺墟碑(유허비)와 같이 선인들의 자취를 기리는 것입니다.

 

事績碑(사적비)가 더 功致辭(공치사)에 치중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고창읍성 입구 송덕비 (공덕을 기린 공덕비 표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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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렬왕((1277)때 순천부사로 재임하던 최석(崔碩)이 선정을 베풀어 내직(內職)으로 들어갈 때에 당시의 관례대로 순천부민들은 말 8필을 주었는데 최석 부사는 이같은 관례를 폐습으로 생각하고 서울(개성)에 도착하여 도중에 낳은 새끼말 1필까지를 합해 9필을 다시 순천 부민들에게 되돌려 보내 이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부터는 부사들에게 이러한 헌마(獻馬)의 폐습이 없어지게 되었고 고을 사람들은 최석 부사의 청렴 한 뜻을 기리고자 팔마비(八馬碑)를 세움.

 


 

 

전남 순천시는 스스로 팔마(八馬)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더없이 자긍심 높은 이름이다.

 

이곳에선 학교, 체육관, 거리, 회사 이름을 비롯해 팔마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심지어 산악회에도 팔마는 인기 있는 이름이다. 죽도봉공원엔 팔마탑이 서 있고, 승주군청 앞에는 아주 오래된 팔마비가 세워져 있다. 팔마는 청렴의 표상이다.

 

여기에는 한 청백리에 얽힌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 고려 충렬왕 때의 일이다. 이곳 목민관이었던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이 비서랑이 되어 수도 개경으로 돌아갈 때 백성들과 향리들이 고을 관례에 따라 좋은 말 일곱 필을 선물로 주었다.

 

일종의 전별금이다.

 

최석은 일곱 필이나 되는 말이 필요 없다고 사양하다 마지못해 받아 이삿짐을 나눠 싣고 왔다.

 

개경에 도착한 뒤 최석은 이 말을 모두 돌려보냈다. 백성들은 일곱 필이었던 말이 여덟 필로 불어나 있어 어리둥절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편지 한 통이 있었다. 개경으로 올라오는 길에 낳은 망아지를 함께 돌려보낸다는 사연이 쓰여 있었다.

 

부사 시절에도 청렴결백하던 최석이었다. 감읍한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며 송덕비를 세우고 팔마비라고 불렀다.

 

이 비석은 고을 백성이 스스로 세워 준 우리나라 최초의 선정비(善政碑)라는 게 정설로 전해진다. 이 일을 계기로 말을 전별 선물로 주는 폐습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