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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선동열 / 장호연, 김일융

by 연송 김환수 2014. 3. 26.

최동원·선동열보다 먼저 '노히트 노런' 달성한 장호연은 어떤 선수?

 

 

최동원과 선동열이 주름잡고 있던 시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차별화 전략으로 이들보다 먼저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투수가 있었다.

 

그는 바로 투수 장호연이다.

 

전설의 두 투수보다도 먼저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게 하였던 그의 공은? 초고속 LTE급 강속구?!  아니면 스릴 만점 변화구?!  놀랍게도 장호연은 빠르지 않은 공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가?

그리고 타자들은 속수무책 당한 것일까?

 

그 비밀은 바로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대한 느린, 느려도 아주 느린 일명 아리랑 볼을 던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장호연이 타자를 대하는 자세는?

 

자신만의 4차원적인 방법으로 타자와의 심리전에서도 흔들림 없는 한 수 위의 신공을 선보이며 최대한 여유롭게 던졌던 장호연.

그리고 평상시 느린 공을 구사하다 보니 전속력으로 한 번 던질 때면 타자들은 강속구로 느끼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렇게 여유롭게 최동원 선동열보다도 먼저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주인공이 됐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장호연의 노히트 노런 기록에는 삼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삼진을 잡으려면 타자 한 명당 최소 3번의 공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이 4차원 장호연에겐 납득 불가였다고 한다.

장호연은 삼진 하나 없이 상대 타자를 땅볼로 맞춰 잡으며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그렇게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자신만의 구위와 경기운영을 선보였던 장호연. 그리고 그가 남긴 "가늘고 길게 갈게요"라는 명언처럼 그는 정말 OB 베어스에서 10년 동안 109승을 달성하며 길게 투수생활을 하는 선수가 됐다.

 

당대 모두가 넘고 싶어했던 최고의 투수 최동원, 선동열.

그리고 이들을 넘기 위한 경쟁자들의 눈물겨운 사투.

이런 열정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프로야구 역사가 더 값지게 빛나는 건 아닐까.

 

 

 

↑ OB 장호연(왼쪽)과 롯데 윤학길은 개막전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1988년 4월2일 부산 개막전에서 장호연은 사상 첫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개막전의 사나이'란 명예를 얻었고, 윤학길은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다. 한국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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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투수' 최동원의 한국 시리즈 4승 기록을 먼저 달성할 뻔한

선수는김일융 선수

 

 

 

국보급 투수 선동열도 트라우마에 빠지게 한 선수가 있다.

 

모두가 선동열을 잡고자 할 때 선동열이 잡고 싶었던 단 한 사람! 바로 최동원이다.

 

그는 83년 롯데 입단과 함께 다음 해 정규리그 27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롯데의 상징이 되었고, 약체로 평가받던 롯데를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위엄을 달성한다.

 

그리고 팀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4승 투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불멸의 신화를 이룩하는데, 그런데 이 한국시리즈 4승의 주인공이 최동원이 아닌 또 다른 선수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

 

바로 최동원의 불멸의 한국시리즈 4승 기록을 얻게 될지도 몰랐을 재일교포 김일융 투수다.

요미우리에서 이미 실력을 검증받은 김일융은 삼성 입단 첫해부터 거뜬히 16승을 달성하며 3시즌 54승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그렇게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두 투수의 운명이 걸린 대결이 펼쳐졌다. 5차전까지 최동원은 2승 1패를 기록, 김일융은 3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4승에 한 발 먼저 다가가 있었다.

  

그리고 6차전 최동원도 김일융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삼성의 김시진과 롯데의 임호균이 나란히 선발로 등판. 4회까지 롯데가 잘 막으며 31로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최동원이 5회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던 걸까?

 

4회 말이 끝난 더그아웃에서는 선배 임호균이 최동원을 직접 찾아가 공을 쥐여주게 된다. 당시 임호균은 자신이 던지는 것보다 팀 승리를 위해서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배 마음을 받은 최동원은 마운드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5회부터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한국시리즈 7차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쇠 팔 최동원도 연이은 등판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최동원에게 들린 희소식. 우천으로 7차전이 하루 연기된 것이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는 나란히 3승씩을 기록하고 있는 최동원과 김일융이 각 팀의 선발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단 한 번의 경기로 불멸의 한국시리즈 4승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이 결정되는 것이다.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찌 된 일인지 무쇠 팔 최동원은 2회말부터 지친 기색을 보이며 연이은 실점을 허용하고 만다.

반면 김일융은 7회까지 43으로 아슬아슬하게 승리의 여신을 자신 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8회 초, 롯데 자이언츠의 극적인 3점 홈런이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김일융은 2회만을 남겨두고 이 한 방으로 한국시리즈 4승 타이틀을 먼저 내려놔야만 했다.


1차전 : 최동원 완봉승 (산발 7안타)

3차전 : 최동원 완투승 (삼성 선발 9명을 상대로 모두 삼진 기록)

6차전 : 최동원 구원승

7차전 : 최동원 완투승

 

김일융이 내려간 그 자리에는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4승 타이틀을 노리며 올라섰다.

그리고 그의 무쇠 팔은 언제 지쳤느냐는 듯 위력을 뽐냈고, 그렇게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41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최동원 선수

 

해태 선동열과 롯데 최동원

 

 

 

최동원 1984년 한국야구선수권대회 MVP

 

대구 삼성-삼미전을 앞두고 그라운드에서 마주친 김일융과 장명부. 무엇이 웃으운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나이는 장명부가 50년 12월 27일 생이어서 5개월 16일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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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융 : 한일통산 170승의 에이스, 한국에서 54>

 

도쿄 도 세타가야 구에서 출생하고 시즈오카 현에서 자랐으며 일본 프로 야구와 한국 프로 야구에서 뛰었던 한국계 일본인 투수이다.

 

 

 

귀화 전의 한국 이름은 김일융(金日融)이며, 현재는 일본 후쿠오카 방송, 도호쿠 방송 야구 해설 위원, 한국 동아일보의 스포츠동아 일본 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6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1971년에 1군으로 승격했다.

 

 

19841월경, 한국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료 1,000만 엔, 계약금 2000만 엔, 연봉 2500만 엔을 받고 이적했으며, 그 후 일본 야구계로 복귀하여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서 컴백상을 받을 만큼 맹활약을 했다.

 

1992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면서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후 현역을 은퇴한 프로 야구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인 '삿포로 앰비셔스'(札幌アンビシャス)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3년의 삼미 슈퍼스타즈가 장명부의 덕으로 3위까지 수직상승하는 것을 본 여러 구단들은 재일교포선수 영입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4, 삼성라이온즈는 OB와의 경쟁 끝에 이적료, 계약금, 연봉을 합해 5500만엔이라는 돈을 들여 김일융을 영입한다.

 

한국에서의 첫 해 1984, 김일융은 14번의 완투와 222이닝을 던지면서 16승과 2.27의 성적을 기록, 재기에 성공하면서 김시진에 이어 확실한 선발카드로 에이스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해 한국시리즈 7차전 8회초 1982년의 이선희처럼 던진 3구는 1할타자 유두열에게 3점홈런을 맞으며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삼성은 다시 한번 기회를 미뤄야 했다.

 

그 악몽같은 해를 보내고 맞이한 1985, 삼성라이온즈는 홈런,타점왕 이만수와 타격왕 장효조를 앞세우고 원투펀치 김시진, 김일융이 25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을 차지해 한국시리즈마저 생략해버려 통합우승을 이뤄냈다.

 

김일융은 226이닝을 던지며 2.79의 평균자책점과 256패를 거두면서 통합우승에 한 몫 했다. 삼성의 에이스로 자리잡은 세번째 해, 1986. 혹사와 당뇨병, 향수병 때문에 138.2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2.53의 평균자책점과 13승을 올려 그의 능력을 증명했다.

 

결국 하향곡선은 그릴 것이라고 판단한 삼성은 그를 일본의 다이요웨일스로 이적시키면서 일본프로야구에서 116, 한국에서 54승을 거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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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등번호 18번 친필사인 (1987. 4. 4)

 

축 개막 해태 타이거즈

1987년 한국야구 선수권대회

44일 광주 무등 경기장 선동열 싸인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