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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內系外系

인천이씨 공도공파 오륜대 문중 재실

by 연송 김환수 2014. 1. 19.

인천이씨 공도공파 오륜대 문중 재실

(仁川李氏 恭度公派 五倫台 門中 齋室)

 

오늘 산책 길에 인천이씨 소문중의 재실이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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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고려초기에 안산김씨 시조 김긍필과 인천이씨 시조 이허겸의 통혼(通婚 : 사돈)으로 시작된 두 집안의 인연이 일천년을 이어왔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인천이씨 소문중의 기록을 남겨 두기로 했다. 

 

 

 

먼저 재실(齋室)의 역할대해서 알아 보겠다.

재실은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음복(飮福), 망제(望祭)를 지내는 곳이다.

 

묘직(墓直)이라는 관리인이 묘와 재실건물을 관리하고 문중의 토지인 묘전(墓田 : 묘제 및 묘지관리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는 토지)을 경작하여 묘제 비용을 충당하였다.

 

재실 현판에는 수륜재(修齋) 라고 쓰여 있다. 

 

세로 현판에 인천이씨 공도공파오륜대문중(仁川李氏 恭度公派 五倫台 門中)이라고 적혀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무덤 3기의 크기가 재상급이다.

비석이나 상석이 없어 어느 분의 무덤인지 궁금했다.

 

사실 재실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 숲길의 봉분 크기가 예사롭지 않아 주위를 살펴보니 현대식 건물인 재실이 보였다.

 

현판을 보니 우리 문중과 오랜 인연이 있었던 인천이씨 소문중 재실이어서 반가웠다.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씨족(氏族)이요 아득한 원대의 뿌리는 가락국(駕洛國)의 김수로왕과 아유타국의 공주 출신인 허황옥의 후예(後裔)로서 10명의 왕자 중에 두 명(둘째와 셋째)의 왕자에게 허황후의 요청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하였다.

 

그 후손들이 허()씨 성을 쓰게 되었으며 양천(陽川), 태인(泰仁),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가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후의 후손들이다.

 

이후 허기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 양천허씨의 시조), 허사문(許士文: 태인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다.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 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 李許謙)을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이허겸)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고려 현종 조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에 올랐다.

 

또한 소성현에 식읍 15백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았다.

 

인천이씨의 본관은 지명에 따라(소성 : 邵城, 경원 : 慶源, 인주 : 仁州, 인천 : 仁川)바뀌어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조 500년 역사의 전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지금의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忠剛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그중 공도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그 후손들이 인천 이씨의 80 %를 이루고 있다.

 

 

 

오륜동은 동래부지에 동면에 '오륜대리'가 나오면서 동래부에서 20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동래부지의 고적(古跡)을 말한 자리에는 오륜대를 "어떤 사람이 대(臺) 곁에 살았는데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오륜(五倫)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오륜이라 이름 하였다"고 했다.

 

그러니 오륜동(五倫洞)의 이름은 오륜대(五倫)에서 온 것이다.

 

삼강(三綱)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군위신강(君爲臣綱):(임금과 신하사이의 도리)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

부위자강(父爲子綱):(어버이와 자식사이의 도리)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

부위부강(夫爲婦綱):(남편과 아내사이의 도리)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

 

오륜(五倫)에는 다음 다섯 가지가 있다.

 

父子有親(부자유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朋友有信(붕우유신):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륜대는 부산의 8대의 절경의 대() 중의 하나로 부산시 금정구 오륜대 일대의 회동수원지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곳이다.

 

산과 바위의 조화로 병풍을 이룬 철마면의 아홉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마치 골짜기에서 봉황이나 백구가 날아 올듯하다 하여 오륜대라 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때 동래부지에 따르면 동래부에서 동쪽자리에 있고, 암석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오륜대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오륜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하여 이를 기려 오륜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부산의 8(八臺) 해운대, 태종대, 몰운대, 이기대, 신선대, 자성대, 오랑대, 오륜대 중 바닷가가 아닌 곳에 있는 유일한 곳이 회동수원지의 오륜대이다.

 

기존의 오륜대의 모습은 1964년 회동수원지로 지정되면서 물에 잠겨버리고 지금은 회동수원지를 둘러싼 아름다운 모습을 일컬어 오륜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오륜대를 포함한 회동수원지의 모습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부엉이산에 위치해 있는 오륜대 전망대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오륜본동 마을에서 올라가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최근에 새로 생긴 기와집(음식점) 골목길을 통해서 김해김씨 재실 옆으로 올라가는 약간 평탄한 길이 있는데 산책하시는 분들도 잘 모르고 있다.

 

저는 이길을 추천하지만 안내표지판을 세우지 않은 이유가 있는 듯 하다. 마을 쪽의 길이라 일상에 방해 받고 싶지 않은 마을 사람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 생각해 본다.

 

다른 길 하나는 마을버스 정류소 앞에서 올라가는 길인데 경사가 약간 더 있는 길이다. 이곳은 공식 안내표지판이 조그만하게 있다15분정도 올라가면 전망대에 도달할 수 있다.

 

부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현마을 모습 (맨윗쪽 가운데  마을)

겨울철이라 얼음이 얼려 있는 모습이다.

 

부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새내마을 모습 (가운데 마을)

부엉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륜동 본동 마을 모습

 

마을과 수원지 가운데 있는 산이 땅뫼산인데 맨발로 걸을수 있도록 황토 산책길을 조성해 놓았다. 

참고로 땅뫼산 전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황토 산이다.

 

아직까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 조용하고 수원지 쪽으로 가면 쉴수 있는 정자와 공간이 있고 근처 편백나무 숲에서도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부엉산 절벽 바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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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둘러 보다가 김해김씨 재실을 발견하였다.

 

처가쪽이 김해김씨(경파)라 친근감이 간다.

사진 기록으로 남겨야 겠다는 생각에 스마트 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김해김씨 목경공파 오륜재 (金海金氏牧卿公派五倫齋) 모습

 

현판에 오륜숭모재(五倫崇慕齋) 라고 적혀있다.

 

 

김해김씨 목경공파 오륜재 (金海金氏牧卿公派五倫齋)

 

김해김씨(金海金氏) 금령군(金寧君) () 목경공파(牧卿公派)

 

경파에 속한 후손 파로는 참판공파, 횡성공파, 안경공파, 석성공파, 호참공파, 참찬공파, 봉상공파, 밀직사공파, 문간공파, 밀직공파, 평장사공파(큰집 자손 순) 가 있다.

 

京派(경파, 목경파, 김녕군파)의 시조는 諱(휘) 김목경(金牧卿)이다.

 

고려의 문관이셨고, 휘() 목경(牧卿)은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때 입조(入朝)하여 조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는 공훈(功勳)을 세워 봉() 금녕군(金寧君)이 되고, 품계는 三重大匡(삼중대광)에 이르셨다.

   

이후 국사의 어지러움을 왕에게 고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치셨다.

이후 후손들이 서울울 중심으로 거주하여 경파라 칭하였고, 시조의 존함을 빌어 목경파라 칭하였다.

 

경파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높은 관직에 이르지 못하여,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으나, 이조참판, 부사, 판서, 판관 등의 벼슬을 하였다.

 

경파 諱(휘) 목경의 네 아들이 파를 이루어 현재 11개파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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