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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열전 / 인종(仁宗) 후비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인종(仁宗) 후비

 

                                         < 국역 고려사 : 열전 >

 

1. 폐비(廢妃) 이씨(李氏)

폐비 이씨는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李資謙)의 셋째 딸이다. 다른 성씨가 왕비가 되면 자신의 권세와 총애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이자겸이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겠다고 청하는 통에 인종이 어쩔 수 없어 맞아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책봉했다. 이자겸이 패망1)한 후 간관들이, 연덕궁주는 왕에게 이모2)가 되니 왕비로 있을 수 없다고 간쟁하여 결국 왕이 그를 내보냈다. 비록 아비 되는 이자겸 때문에 내보내긴 했으나 왕은 폐비를 각별히 돌보아 주었다. 인종 17년(1139)에 죽었다.

 

仁宗廢妃李氏, 朝鮮國公資謙第三女. 資謙恐他姓爲妃, 權寵有所分, 强請納之, 仁宗不得己納之, 冊爲延德宮主. 資謙敗, 諫官累言, “宮主於上, 爲從母, 不可以配極.” 王乃出之. 雖以資謙故出, 恩賚優渥. 十七年卒.

 

2. 폐비(廢妃) 이씨(李氏)

또 다른 폐비 이씨는 이자겸(李資謙)의 넷째 딸이다. 반역3)을 도모한 이자겸이 독약을 떡 속에 넣어 왕에게 올렸는데, 비가 몰래 왕에게 알려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주었더니 까마귀가 먹고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 비로 하여금 왕에게 올리게 했는데 비가 약사발을 들고 가다가 일부러 넘어져 쏟아버렸다.

 

이자겸이 패망한 후 간관들의 건의에 따라 역시 폐비시켰으나 왕은 독 사발을 엎지른 공을 생각해 토지와 자택 및 노비를 내려주는 등 각별히 은혜를 베풀었다. 의종과 명종 두 왕도 또한 폐비를 정성껏 섬기다가, 명종 25년(1195)에 죽자 왕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廢妃李氏, 資謙第四女. 資謙圖不軌, 置毒餠中以進, 妃密白王, 以餠投烏, 烏斃. 又送毒藥, 令妃進于王, 妃捧椀, 陽蹶而覆之. 資謙敗, 亦以諫官言, 廢, 王念覆椀之功, 賜田宅奴婢, 恩眷甚厚. 毅·明二王, 亦事之謹, 明宗二十五年卒, 葬以后禮.

 

3.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

공예태후 임씨는 중서령(中書令) 임원후(任元厚)4)의 딸이자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위(李瑋)5)의 외손녀이다. 비가 탄생하던 날 밤, 이위가 자기 집 중문(中門)에 세워진 황색 큰 깃발의 꼬리가 선경전(宣慶殿)6)의 치미(鴟尾)7)를 휘감고 나부끼는 꿈을 꾸었다. 비가 탄생하자 이위는 그를 각별히 아끼면서, “이 딸은 후일에 선경전에서 노닐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15세가 되자 평장사(平章事) 김인규(金仁揆)8)의 아들 김지효(金之孝)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혼례날 저녁에 신랑이 문에 이르자 비가 갑자기 아프더니 거의 죽게 되었다. 이에 신랑과 하객들을 돌려보낸 후 점쟁이더러 점을 치게 하였더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따님은 말할 수 없이 귀한 사람이니 필시 국모가 될 겁니다.”라고 예언했다. 당시 이미 두 딸을 왕비로 들인 이자겸이 그 소문을 듣자 꺼린 나머지 곧 왕에게 아뢰어 임원후를 개성부사(開城府使)로 좌천시켰다.

 

한해 남짓 후 개성부의 관리가, 태수 청사의 대들보가 갈라져 큰 구멍이 생기더니 황룡(黃龍)이 그리로부터 나오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관리가 관복을 갖추어 입고 임원후를 찾아가 꿈을 들려준 뒤, “부사의 댁에 반드시 예사롭지 않은 경사가 있을 터이니 미리 알아 두십시오.”라고 하례했다. 인종이 일찍이 들깨[荏子] 닷 되와 해바라기[黃葵] 서 되를 얻는 꿈을 꾸고는 이를 척준경(拓俊京)에게 말했더니 다음과 같이 해몽했다.

 

“들깨의 임(荏)은 임(任)과 같으니 임씨 성을 왕비로 맞을 조짐이며, 그 수가 다섯이니 다섯 왕자를 낳을 길조입니다. 해바라기의 황(黃)은 황(皇)이니 황왕(皇王)의 황(皇)과 같고, 규(葵)는 규(揆)이니 도규(道揆)9)의 규(揆)와 같습니다. 이른바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올바른 도리로 나라를 다스릴 상서로운 징조이며, 그 수가 셋이라는 것은 다섯 아들 중 세 아들이 왕위에 오를 조짐입니다.”

 

왕이 이자겸의 두 딸을 내보내고 4년(1126)에 임씨를 궁궐로 뽑아 들여 연덕궁주(延德宮主)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듬해 의종을 낳자 왕이 사자를 보내,

 

“그대 임씨는 덕망 있는 집안 출신으로 궁중에 들어와 여자들을 훈육하는 일을 맡아 늘 조신해 내조했을 뿐, 음험하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또한 맏아들10)을 얻어 길몽[斯干11)]과 부합되게 했으니 이에 근신을 시켜 좋은 선물을 내리게 하노라.”

는 조서를 내리고 은그릇과 채색 비단, 베와 곡식, 안장 딸린 말을 내려주었다. 인종 7년에 왕비로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 현명한 임금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자신의 덕망이 높아서 뿐 아니라 또한 후비의 어진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짐이 외람되게 천명(天命)을 받아 국가의 기업(基業)을 계승한 후 가정을 이룩한 것은 인륜의 대의를 소중히 하는 것이며, 하늘이 짝을 지어준 것은 군자에게 좋은 배필을 주고자 함이로다. 아아! 그대 임씨는 일찍부터 부녀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덕망 있는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거지는 반드시 예절에 맞게 했고, 집에 있을 때는 여자로서 할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처음 빈(嬪)의 자리에 올라 아들을 낳았으니 다만 한 집안의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실로 나라의 큰 경사라 규범에 의거해 위호(位號)를 높이노라. 이제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짐의 사자로 보내 그대를 왕비로 책봉하노라. 아아! 검약을 실천하면 몸을 보전할 수 있으며 공손히 행동하면 직책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것이니, 짐의 뜻을 명념해 길이 경사를 누리도록 하라.”

 

인종 8년에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을 낳자 왕이 또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천부의 자질을 지니고 존귀한 왕비의 자리에 있으면서 짐의 좋은 짝으로 즐겨 내조의 공을 세웠고,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일을 자신의 직분으로 삼았다. 곧 득남의 상서에 부응하여 아들을 낳는12) 경사를 맞았으니 짐은 크게 경탄하고 가상히 여겨 넉넉한 은혜와 예우를 베푸노라.”

 

또한 예물도 내려주었다. 인종 9년에 명종을 낳자 왕이 또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 임씨는 궁궐의 내부를 관장하는 중궁(中宮)의 자리에 있으면서 첫 아들을 낳아 이미 태자를 맡게 하였으며 아들을 많이 낳았으니[螽斯종사13)] 이는 그대의 현숙함 때문이다. 이렇듯 아들을 낳은 상서는 저 연매(燕媒)14)의 후비와 일치한다고 할만하니 의당 이 은총을 받아 길이 큰 복을 보전토록 하라.”

 

인종 16년에 왕비의 모친 이씨(李氏)가 죽자 왕이 소복을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니 백관들도 조위하는 표문을 올리고 사흘 동안 소복을 입었으며, 이씨에게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을 추증하였다. 왕후는 의종,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 명종, 원경국사(元敬國師) 충희(冲曦), 신종, 승경궁주(承慶宮主)·덕녕궁주(德寧宮主)·창낙궁주(昌樂宮主)·영화궁주(永和宮主)를 낳았다. 의종이 즉위하자 그를 왕태후로 승격시키고 거처하는 궁전을 후덕전(厚德殿)이라 정했으며 부를 세워 선경부(善慶府)라 하고 관속을 배치했다.

 

애초 태후가 둘째 아들을 아껴 그를 태자로 세우려15) 하였으므로 왕이 그 처사를 원망했다. 하루는 태후를 모신 자리에서 왕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더니 태후가 맨발로 전(殿)을 내려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자 갑자기 뇌우가 몰아치며 왕이 앉은 자리로 번갯불이 들이쳤다. 왕이 기겁을 하여 태후의 옷자락 아래로 기어들어갔는데 잠시 후 궁전 기둥에 벼락이 떨어졌다. 이 일로 왕은 크게 뉘우쳤으며 마침내 모자의 사이도 처음과 같이 회복되었다.

 

명종 12년(1182)16)에 충희(冲曦)가 죽자 왕은 태후가 비통해 할 것을 걱정해 알리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서야 그 소식을 접한 태후는 장수들이 살해한 것이라 여겨 분노가 치민 나머지 홧병에 걸렸다. 당시 신종은 평량공(平諒公)17)에 봉해졌는데 그 역시 치질 때문에 오랫동안 문안드리러 가지 못하자 태후는 신종도 충희와 함께 화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왕이 평량공으로 하여금 요여(腰輿)18)를 타고 들어와 배알하게 하니 태후가 너무나 기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뜻밖에 다시 너의 얼굴을 보는구나.” 하며 울먹였다. 이에 평량공은, “모후(母后)의 병환은 근심 때문이오니 풍악을 열어 즐기심으로써 기분을 풀도록 하십시오.”라고 권했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는 한편 왕과 평량공이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려 기분을 돋구자 홧병이 조금 낫는 듯 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병이 도져 75세로 죽었다. 순릉(純陵)에 장사하고 공예태후(恭睿太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듬해 금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이러하다.

 

“영령께서는 좋은 가문 출신으로 제후의 빈이 되었도다. 처음에는 부도(婦道)로써 그 지아비를 도왔고 만년에는 자애로운 모성으로 자식을 보호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부의를 보내는 은혜를 베풀어야 마땅하기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제사를 드리노니 정결한 영혼이 계신다면 짐의 은총을 흠향하시라.”

 

恭睿太后任氏, 中書令元厚之女, 門下侍中李瑋之外孫. 妃誕夕, 瑋薨有黃大旗, 竪於其第中門, 旗尾飄縈於宣慶殿鴟尾. 妃生, 瑋奇愛之曰, “此女後當遊宣慶殿.” 及笄, 平章事金仁揆子之孝聘之, 婚夕, 之孝至門, 妃暴疾幾死. 乃謝遣, 卜人占病曰, “勿憂, 此女貴不可言, 必爲國母.” 時李資謙已納兩女于王, 聞其言, 惡之, 卽奏貶元厚爲開城府使. 歲餘, 府倅夢太守廳事樑棟坼, 作大竇, 黃龍從竇而出. 詰朝, 倅具朝服, 詣元厚, 具陳其夢, 以賀曰, “使君家必有異慶, 公其識之.” 仁宗嘗夢得荏子五升, 黃葵三升, 以語拓俊京, 俊京對曰, “荏者任也, 納任姓后妃之兆也, 其數五者, 誕五子之瑞也. 黃者皇也, 與皇王之皇同, 葵者揆也, 與道揆之揆同. 所謂黃葵者, 皇王執道揆, 御邦家之瑞也, 其數三者, 五子之中, 三子御國之兆也.” 王旣出資謙二女, 四年, 選入宮, 號延德宮主. 五年, 生毅宗, 王遣使下詔曰, “汝任氏起自德門, 入司陰敎, 受儆戒相成之道, 無險陂私謁之心. 得純震之長男, 協斯干之吉夢, 爰勑邇臣, 式將好賜.” 賜銀器·彩段·布穀·鞍馬. 七年, 冊爲王妃, 詔曰, “古先哲王之有天下也, 非獨由已德之茂, 盖亦有內助之賢. 朕叨承景命, 嗣守丕基, 王假有家, 重人倫之大義, 天作之合, 宜君子之好俅. 咨! 爾任氏, 夙以婦才, 起於德閥, 動必由於禮節, 居不忘於女功. 自初作嬪, 爰得有子, 豈特室家之好, 實增邦國之休. 是用擧以典章, 加之位號, 今遣某官某, 持節冊命, 爲王妃. 於戱! 儉約可以保厥身, 肅恭可以共其職, 當體朕意, 永孚于休.” 八年, 生大寧侯璟, 王又遣使下詔曰, “汝以俔天之資, 居儷極之貴, 樂關雎之窈窕, 服卷耳之勤勞. 乃符帶韣之祥, 載見弄璋之慶, 歎嘉無己, 恩禮當優.” 仍賜禮物. 九年, 生明宗, 王又遣使下詔曰, “玆爾任氏, 典予內職, 正位中宮, 震索得男, 旣主其器, 螽斯多子, 亦由爾賢. 謂玆羆熊之祥, 協彼燕媒之后, 宜膺寵數, 永保洪休.” 十六年, 妃母李氏卒, 王素服避正殿, 百官表慰, 素衣三日. 贈李氏, 辰韓國大夫人. 后生毅宗及大寧侯暻, 明宗, 元敬國師冲曦, 神宗, 承慶·德寧·昌樂·永和四宮主. 毅宗卽位, 尊爲王太后, 殿曰厚德, 立府曰善慶, 置官屬. 初后愛次子, 欲立爲太子, 以故王怨之. 一日, 侍坐語侵, 后跣下殿, 仰天而誓, 忽雷雨大震, 電光入座. 王驚懼, 俛入太后衣下, 俄而震殿柱. 王悔悟, 遂爲母子如初. 明宗十二年, 冲曦死, 王恐后悲痛, 不白. 居數月, 后聞之, 意諸將害之, 憤恚, 得氣攻鬲病. 時神宗封平諒公, 亦患痔, 久不入覲, 后疑神宗與曦同禍. 王命腰輿入謁, 后且嘉且泣曰, “吾以爲死, 不意復見爾面.” 平諒公曰, “母后之疾, 勞心致然, 請張樂悅解.” 於是, 奏管絃, 王與平諒公上壽爲樂, 氣少下, 未幾復篤, 薨壽七十五. 葬純陵, 上謚恭睿太后. 明年, 金遣使來祭, 其文曰, “惟靈, 早自慶閥, 來嬪侯藩. 始以婦道, 相其夫, 終以母慈, 保厥子, 遽違榮養, 良可哀憐. 宜加賻贈之恩, 仍致酒殽之奠, 貞魂如在, 寵數其歆.”

 

4. 선평왕후(宣平王后) 김씨(金氏)

선평왕후 김씨는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선(金璿)19)의 딸로, 인종 5년(1127)에 차비(次妃)가 되었다. 의종이 왕태비(王太妃)·연수궁주(延壽宮主)로 높여 주었으며 명종 9년(1179)에 죽자 시호를 선평왕후라 하였다.

 

宣平王后金氏, 兵部尙書璿之女, 仁宗五年, 納爲次妃. 毅宗尊爲王太妃延壽宮主, 明宗九年卒, 謚宣平王后.

 

 

선평왕후(宣平王后) 김씨(金氏)

 

선평왕후 김씨는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선(金璿)19)의 딸로, 인종 5년(1127)에 차비(次妃)가 되었다. 의종이 왕태비(王太妃)·연수궁주(延壽宮主)로 높여 주었으며 명종 9년(1179)에 죽자 시호를 선평왕후라 하였다.

 

宣平王后金氏, 兵部尙書璿之女, 仁宗五年, 納爲次妃. 毅宗尊爲王太妃延壽宮主, 明宗九年卒, 謚宣平王后.

 

김선 (金璿 ? ~ ?)

 

김선(金瑄)이라고도 하며, 인종 때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역임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추증된 문신관료이다. 그의 두 딸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낸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지우(金之祐)의 처 및 인종의 제2비인 선평왕후(宣平王后)가 되었다. 아들 김이영(金貽永)은 인종 10년(1132) 윤4월 지공거 최자성(崔滋盛)과 동지공거 임존(林存)이 주관한 과거에서 최광원(崔光遠)·윤인첨(尹麟瞻) 등과 함께 급제한 후 내시(內侍)·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지도성사(知都省事)·우부승선(右副承宣)·상서(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동래 정씨(東萊鄭氏) 정항(鄭沆)의 셋째 딸과 혼인하였다.

김용선 편, 「정항(鄭沆) 묘지명(墓誌銘)」·「김지우(金之祐)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1) 패망 : 예종~인종 때 왕실의 외척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자겸(李資謙)이 인종 4년(1126) 5월 척준경(拓俊京)에게 체포되어 유배된 사건을 말한다.

 

2) 이모 : 예종 비인 문경태후(文敬太后) 이씨(李氏)는 이자겸(李資謙)의 둘째 딸이다.

 

3) 반역 : 예종~인종 때 왕실의 외척세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주 이씨(仁州李氏) 이자겸(李資謙)이 인종 4년(1126) 2월 왕위를 찬탈하려던 반란사건으로, 같은 해 5월 이자겸이 척준경(拓俊京)에게 제거되면서 종결되었다.

 

4) 임원후(1089~1156) : 처음 이름이 임원애(任元敱)이며,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정안 임씨(定安任氏) 임의(任懿)의 막내 아들로 같은 왕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인종 때까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문신관료이다. 당대 문벌인 파평 윤씨(坡平尹氏) 윤관(尹瓘), 인주 이씨(仁州李氏) 이식(李軾), 부평 이씨(富平李氏) 이위(李瑋)의 딸들과 혼인하였다.

 

5) 이위(1049~1133) : 이위(李偉)라고도 하며, 문하시중을 역임한 부평 이씨[富平李氏·樹州李氏] 이정공(李靖恭)의 아들로,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선종 때까지 문하시중을 지낸 문신관료이다. 그의 딸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 문하시중을 지낸 정안 임씨(定安任氏) 임원후(任元厚)에게, 그의 다른 딸 계양군대부인(桂陽郡大夫人)이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지낸 인주 이씨(仁州李氏) 이식(李軾)에게 각각 시집가는 등 당대의 문벌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6) 선경전 : 현종 때 제1정전(正殿)으로 창건된 회경전(會慶殿)인데, 인종 16년(1138) 5월에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경하(慶賀) 내지 경찬(慶讚)을 선포하는 전이라는 의미를 지닌 선경전은 ‘모여서 경하한다.’ 혹은 ‘모여서 경찬한다.’는 의미를 지닌 회경전의 뜻을 계승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회경(會慶)’이 모여서 경사스러운 일을 서로 나누는 수평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선경(宣慶)’은 경사스러운 일을 위에서 선포하는 수직적인 측면이 강한 느낌이다. 여기에는 이자겸의 정변과 묘청의 정변을 겪으면서 해이해진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바람과 경사스러운 일을 국왕이 주도한다는 의미를 담음으로써 상처 입은 왕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바램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치미 : 호와(鯱瓦 : 물호랑이) 기와로, 궁전 성루(城樓) 등의 용마루에 장식한 기와인 솔개를 말한다. 『병아(騈雅)』 석궁(釋宮)에는 “치미는 기와 짐승이다(鴟獸 瓦獸也).”라 하였다.

 

8) 김인규(?~1142) : 김인규(金仁規)라고도 하며,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경용(金景庸)의 아들로,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인종 때까지 참지정사(叅知政事)를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9) 도규 : 도리(道理)로서 헤아려 일의 마땅함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이루장구상(離婁章句上)의 ‘위로는 일에 마땅한 도리가 없고 아래로는 법도를 지킴이 없다(上無道揆也 下無法守也).’ 주에는 “임금이 도덕과 학술이 없어도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음을 말한다(言君無道術 可以揆度天意).”라 하였다.

 

10) 맏아들 : 순진(純震)이란 장남의 뜻으로 진(震)은 역(易)의 괘명(卦名)인데 동방에 배당하여 장남의 상(象)이라 한다. 『국어(國語)』 진어(晋語)에는 “진은 장남이다(震 長男也).”라 하였다.

 

11) 길몽 : 사간(斯干)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선왕(宣王)이 궁실을 축조하여 그 낙성을 읊은 내용이다. 그 내용에 길몽을 풀이하여 “사간은 선왕이 궁실을 살펴본 것이다(斯干 宣王孝室也).”라 하였다.

 

12) 아들을 낳는 : 농장(弄璋)이란 남자가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남자가 나면 장(璋)의 완구(玩具)를 주고 여자가 나면 실패[瓦]의 완구를 주었다고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는 “아들을 나으니 / 침상을 장식하고 / 옷을 장식하고 / 농장을 장식하네(乃生男子 載寢之牀 載衣之裳 載弄之璋).”라 하였다.

 

13) 종사 : 여치의 종류인데 한 번에 많은 알을 낳으므로 부부가 화합하여 자손이 번성할 징조에 비유한다. 『시경(詩經)』「주남(周南)」 종사(螽斯) ‘종사의 깃 화목도 하여라 / 화목도 하여라 자손들 함께 모였구나(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의 집전(集傳)에는 “종사는 메뚜기의 일종이며 선선은 화목하게 모인 모양이다(螽斯 蟥屬 詵詵 和集貌).”라 하였다.

 

14) 연매 : 매(媒)는 매(禖)의 오기인 듯하다. 매(禖)는 황자(皇子)를 구하는 제(祭)의 이름을 말한다. 연(燕)이 양(陽)에 감응하여 아들을 낳는 까닭에 연(燕)에 오는 날을 매(禖)라 한다. 여기는 황자(皇子)를 낳는 후(后)의 뜻이다. 두목(杜牧)의 「두추낭시(杜秋娘詩)」에는 “아들 낳는 제사 지내 황제의 아들 낳았네 / 왕성한 머리털 푸르게 늘어졌구나(燕禖得皇子 壯髮綠綏綏).”라 하였다.

 

15) 태자로 세우려 : 인종이 공예태후(恭睿太后)와 함께 둘째 아들 대령후(大寧侯) 왕경(王暻)을 태자로 삼으려고 한 사실을 말한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변란과 묘청(妙淸)의 정변으로 개경(開京)의 문신세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위축된 정국상황에서, 인종과 공예태후는 의종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의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가졌는지 염려하여, 둘째 왕경을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의종 때 김존중(金存中)·정함(鄭諴) 등이 무고한 대령후 왕경·정서(鄭敍)의 모반사건도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16) 명종 12년 : 『고려사』 권90, 열전3, 종실전에는 충희(冲曦)가 이듬해인 명종 13년에 죽었다고 하였다.

 

17) 평량공 : 『고려사』 세가에는 평량공(平涼公)이라 표기되어 있다.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명종의 동모제(同母弟)인데, 인종 22년(1144)에 태어나 뒤에 평량공에 책봉되었다가 명종 27년(1197)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시킴에 따라 즉위하였다.

 

18) 요여 : 손으로 끄는 수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