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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봉산재 - 재실

by 연송 김환수 2020. 7. 17.

광주안씨(廣州安氏) 봉산재(蓬山齋) 재실(齋室)

 

광주안씨는 안방걸을 시조로 하고, 안유를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함안 지역의 세거 성씨이다.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광주안씨 시조 안방걸 재실 (봉산재) / 방문일자 : 2020. 6. 18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경기도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며, 고려태조 때 대장군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安邦傑)을 시조로 삼고 있다.

 

오늘날 광주 안씨는 모두 함안 입향조 안유(安綏)의 후손들이다. 광주 안씨를 '광릉 안씨(廣陵安氏)'라고도 한다.

 

연원(淵源)

 

함안군의 입향조 안유는 시조 안방걸의 13세손이다.

고려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영남 안찰사(嶺南按察使)를 역임하였다. 그 현손(玄孫) 안기(安器)는 충선왕과 공양왕대에 걸쳐 이부 상서를 지냈고, 안기의 큰아들 안국주(安國柱)는 공민왕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 겸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역임하였다.

 

둘째 아들 안성(安省)은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학사와 상주 판관을 지냈다. 조선 개국 후 청백리에 뽑히고 전라북도 장수의 용암 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셋째 아들 안몽득(安夢得)은 조선태종 때 생원으로 권농 판사(勸農判事)에 등용되었으며, 사후 함안봉산재(蓬山齋)와 양산(梁山)소계 서원(蘇溪書院)에 배향되었다.

한강(寒岡)정구(鄭逑)[1543∼1620]가 편찬한 『함주지(咸州誌)』인물 편과 총묘 편(塚墓篇)에 광주 안씨로는 유일하게 광능자(廣陵子)안택(安宅)이 실려 있다.

 

안택의 아버지는 안용지(安勇智)이며, 할아버지는 안몽득이다. 선대는 경상남도 의령군에 살았으나 안택이 함안군 두곡(杜谷)에 살던 조세번(趙世藩) 딸과 혼인함으로써 의령에서 함안으로 옮겨 와 살았다. 함안여양 서원(廬陽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병곡리(竝谷里) 두곡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 안씨는 크게 여섯으로 분파되었다.

 

안유의 큰 아들 안정(安禎)을 파조(派祖)로 하는 총랑공파(摠郞公派), 안국주를 파조로 하는 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안성을 파조로 하는 사간공파(思簡公派), 안몽득을 파조로 하는 판사공파(判事公派), 안충(安沖)을 파조로 하는 호군공파(護軍公派), 안창(安昌)을 파조로 하는 위위주부공파(衛尉注簿公派) 등이다.

 

이 중 오늘날 함안에 자손이 세거하고 있는 것은 중랑장공파와 사간공파이다. 안국주의 증손자인 안효문(安孝文)의 사위가 오졸재(迃拙齎)박한주(朴漢柱)[1459∼1504]이며, 졸암(拙菴)안여거(安汝居)의 사위가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1495~1554)이다.

 

입향 경위

 

중시조 안유가 함안 배씨(咸安裵氏) 집안에 장가든 후 함안군 안인촌(安仁村)으로 처음 옮겨 와 살았다. 이후 후손들이 고려 말까지 함안에 거주하다 조선 초기부터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 함안에 세거하고 있는 광주 안씨는 입향조 안유의 현손인 안기의 후손들이다.

안기의 세 아들은 안국주·안성·안몽득인데, 이들은 각기 중랑장공파·사간공파·판사공파의 파조이다.

 

중랑장(中郞將) 안국주의 후손은 법수면 대송리, 군북면 장지리, 칠서면 용성리, 가야읍 가야리 선왕 마을, 여항면 주동리, 군북면 월촌리, 칠북면 가연리와 영동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이 외에 사간공 안성의 둘째 아들 서령공(署令公) 안철산(安鐵山)의 후손은 대산면에 세거해 오고 있다.

다만 판사공 안몽득의 후손은 양산·울산·경주 등지로 옮겨 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0년도 통계청 인구 조사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종원 수는 총 1만 3517가구에 4만 3609명이며, 함안에는 216가구에 5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관련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선왕 마을에 광주 안씨 시조 안방걸 이하 12세까지의 설단(設壇)이 있으며, 봉산재에는 38분 선조의 위패를 모신 안령사(按嶺祠)가 있다.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안기와 중랑장 안국주 부자(父子)의 묘소가 있다.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에는 천연기념물 제319호로 지정(1982년 11월 9일)된 함안 영동리 회화나무가 있다.

 

신재주세붕의 장인 졸암안여거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에 있는 함안 대송리 늪지 식물 역시 천연기념물 제346호로 지정(1984년 11월 19일)되어 있다. 광주 안씨가 정착하면서 풍수지리설에 따라 후손의 번창을 위해 보존해 왔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광주 안씨 대동보』

『국역 함주지』(함안 문화원, 1995)

『함안의 인물과 학문』(함안군·함안 문화원, 2005)

『함안 군지』(함안 군지 편찬 위원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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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安氏御史亭遺墟碑 (광주안씨 어사정 유허비)

 

廣州安氏御史亭遺墟 (광주안씨 어사정 유허)

▲ 위치 : 경남 함안군 산인면 안인리 186번지 (산인초등학교 뒷편)

 

이곳은 광주 안씨가 함안으로 이거한 후 약300년을 기거한 곳이다.

 

광주 안씨의 사간정(司諫亭) 비문은 안씨(安氏)의 사간정(司諫亭) 옛터에 세운 비(碑)이다.

 

고려 때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안공(安公) 휘 유(綏)가 옛날에 정자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정자는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村)에 있다.

 

공은 본래 광주(廣州)에 살았는데 이사하여 이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는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었으며, 해마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 되면 이 곳에 올라와 사방을 조망하면서 스스로 자적(自適)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 영남 지방을 안절(按節)한 일이 있는데, 그 때 훌륭한 치적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여 이 정자의 이름을 ‘어사정(御史亭)’이라고 하였다.

 

그 뒤 공의 아들 관찰공(觀察公) 지(祉)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顯達)하였는데, 어느 날 용감히 산림(山林)으로 물러나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정자 옆에 우물을 팠는데 그 물맛이 달고 시원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또한 이 우물을 사랑하여 이름을 ‘관찰정(觀察井)’이라고 하였다.

 

관찰공의 아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지낸 수(壽)인데, 그 또한 문장으로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어사공이 심었던 나무가 이미 세월이 오래 되어서 늙어 모지라지고 말았으므로, 공이 다시 정자의 동쪽에 나무를 새로 심고는 정자의 이름을 ‘만세정(萬歲亭)’이라 하였다. 대저 이는 그 수명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이 정자를 ‘사간정(司諫亭)’이라고 고쳐서 불렀다.

 

이에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조부가 창건하고 아들이 계승했는데 (祖刱子述)

손자가 또 이것을 확충하였구나 (孫又擴之)

사람들이 즐겨 이것을 말하면서 (人樂道之)

싫증을 모르고 싫어함이 없어라 (無厭無射)

그렇다면 옛날에 심은 것은 (昔之所種)

나무가 아니라 바로 그 덕이요 (非樹伊德)

 

옛날에 팠던 저 우물은 (昔之所疏)

우물이 아니라 은택의 못이로구나 (非井伊澤)

그러니 안씨 가문의 복록이 (安氏之福)

길이길이 그 끝이 없으리라 (其永無極)

하였다. 그리하여 상하 7, 8대에 걸쳐서 대대로 장덕(長德)과 거인(鉅人)들이 이 가문에서 나와서 실로 안인(安仁)의 촌주(村主)가 되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다들 이 곳에 사간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사간공으로부터 6대를 전하여 참봉 보문(普文)에 이르러 마침내 밀양(密陽)으로 이사를 하게 됨으로 해서 이 정자는 자연 황폐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옛 나무만은 홀로 우뚝하게 울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하여 그 뒤 7, 8백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 마을의 부로(父老)들은 이 곳을 가리키면서이 나무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왕년에 어떤 무수(武帥 ; 무장(武將)가 이 나무를 베어서 재목으로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힘껏 다툰 결과 이를 그대로 보전할 수가 있었다.

 

그런 뒤 다시 공의 여러 후손되는 자들과 상의해서 그 남아 있는 터에 비석을 깎아 세움으로써 이에 대한 표지(標識)를 하기로 하였다.

 

지금 추밀원 의관(樞密院議官)으로 있는 안공 종덕(安公鍾悳) 씨와 전임 무산 군수(茂山郡守)를 지낸 안군 태원(安君泰遠)이 편지를 보내어서 나에게 그에 대한 비문을 부탁하여 왔다. 내가 비록 글솜씨가 없기는 하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겠기에, 기꺼이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사대부(士大夫) 가문 중에 글과 학문으로 가문을 일으켜서 세대를 전한 것이 오래 되고 풍류가 넓고 길어서 그 남은 운치가 끝나지 않은 경우로 말한다면, 오직 광주(廣州)의 안씨(安氏) 가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하겠다.

 

지금 이 가문의 근고(近古)의 인물에 대하여 한번 말해 본다면 옥천(玉川 안여경(安餘慶) )이나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과 같은 여러 선생들이 특히 저명한 분들이며, 그 이외에도 숨어 살면서 고을에 가르침을 베풀거나 벼슬을 해서 백성들에게 은택을 드리움으로써 우뚝히 한 시대의 추복(推服)을 받는 자들로 말하면 자못 그 수가 수두룩하게 연이어져서 이를 새삼 일일이 세어 볼 수조차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럴 만한 연유가 없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뿌리가 반드시 튼튼하고, 흐름이 긴 강물은 근원이 필연코 깊은 법이다. 따라서 이것은 저 어사공이나 사간공이 심어서 가꾼 나무와 관찰공이 파서 친 우물을 두고 본다면 가히 징험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일찍이 이와 같이 기거(起居)하고 생활하던 그 정사(亭舍)의 터전이 이처럼 남아 있는데도 또한 지금 이 곳에 아무런 표지를 남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른바 바라보면서 회상하고 돌아보면서 그리워하는 바가 또 어찌 단지 저 나무나 우물에 대해서만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요컨대 심어서 가꾼 나무나 파서 친 우물에는 더욱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 서로 권면해서 길이 변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지금 이 남은 터전에 빗돌을 깎아 세워서 표지를 남기는 일 또한 그것을 이어서 지켜 가도록 하는 도리[嗣守之道]에 도움되는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로써 저 안씨의 후손들에게 일러 주고자 하는 바이다.

 

안인(安仁)은 옛 이름이 안니(安尼)였다. 그런데 한강 선생(寒岡先生 정구(鄭逑) )이 이 고을에 고을살이를 나왔을 때에 ‘니(尼)’를 고쳐서 ‘인(仁)’으로 바꾸었던 것이니, 이처럼 대현(大賢)이 그 이름을 고친 취지가 어찌 또 우연한 것이었겠는가. 이 점도 같이 기록하여 두는 바이다.

 

[참고]

 

위에서 "그 뒤 사간공으로부터 6대를 전하여 참봉 보문(普文)에 이르러 마침내 밀양(密陽)으로 이사를 하게 됨으로 해서 이 정자는 자연 황폐해지고 말았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사간공은 사간공(司諫公)으로 참봉 보문(普文)공의 6대조 휘 수(壽) 선조를 말하며, 중랑장공의 동생 사간공(思簡公, 휘 省)이 아니다.

 

廣州安氏 司諫亭 舊蹟碑 (광주안씨 사간정 구적비) / 후손 병업(청사 안광석)의 글이다.

 

좌측 청계 안정환 선생님이 부친(병업)의 비석 글을 설명해 주셨다.

 

 

비석의 글은 안내해 주신 청계 안정환 선생님의 부친이신 秉業(청사 안광석) 선생의 글이다. 丁亥(194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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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재 답사에 함께 했던 분들과 함안 강나루 생태공원 나루터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봉산재 재실, 어사정 유허비 안내를 해주신 청계 안정환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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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無終始(효무종시)는 소학(小學)에 나오는 말로 "효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는 말이다.

孝無終始(효무종시) - 晴溪 安定煥(청계 안정환)

 

文曰 孝無終始 釜山市無形文化財 第二十四號 篆刻匠 後孫 定煥 作

문왈 효무종시 부산시무형문화재 제24호      전각장 후손 정환 작

 

위 서각작품은 단청작업이 남아 있는데, 완성이 되면 광주안씨 함안군 재실에 걸어두시겠다는 청계선생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효무종시는 소학(小學) 제2 명륜편(第二 明倫篇)에 나오는 말이다.

 

故 自天子至於庶人(고 자천자지어서인) / 그러므로 천자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孝無終始(효무종시) : 효도는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이니 한결 같이 하면

而患不及者未之有也(이환불급자미지유야) / 우환이 미치지 않으며 아직 그러한 우환이 있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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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재 관련 예전 포스팅 자료

 

blog.daum.net/yescheers/5869319

 

광주안씨 서령공파 파조(안철산) 숙부인 안산김씨

좌명공신 숭정대부 이조전서 연성군 위정공 김정경 有明朝鮮 佐命功臣 吏曹典書 蓮城君 謚 威靖 金公 神道碑銘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 위정 김공 신도비명 推忠奮義 翊戴同德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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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광주안씨 뿌리공원 매회 대나무를 좌우로 배치하여 선비정신을 상징화 / 청계 안정환 작품

광주안씨 유래 연원(淵源)

 

광주안씨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 태조조에 대장군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기미보(己未譜) 이전의 구보에 대장군의 묘소가 광주의 갈마치에 있었다 하고. 혹은 개성부 동쪽 15리 지금의 장단군에 속해 있는 양안촌(兩眼村) 마을이 있다.

 

이곳에 광주안씨 시조의 묘가 있으며, 재궁(齋宮)이 있어 이름하여 안재(安齋)라 하였다 하나 지금은 미상이다. 기미보(1739:己未)의 별록(別錄)에 대장군 이하로, 중흥조(中祖)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겸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 안유(安綏)이상으로 13대의 휘함(諱啣)과 직명(職名)만 전하면서, 상세한 고증을 후대(後代)에 기대하였다.

 

이는 원주에 사는 안처대(安處大:1675-?.29세손.감찰공파후손)가 충주 위류면(忠州圍柳面)의 순흥안씨집에서 순흥안씨 간판구보(順興安氏刊板舊譜)를 1719년에 베껴와 한성의 안서우가(安瑞羽 家)에 傳한 것이 【12代 缺世謄錄】인데 광주군(휘 邦傑)을 시조로 하여 13세(忠季)까지 기록이다.

 

사간공 안성(思簡公 安省)이 조선조초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보첩 3권이 있었는데 본문이 유실되고 서문만 전해 오고 있어 상대계보를 알 수 없어 유감이며, 1725년. 1737년에 문중에서 안처대의 【등록】을 재확인이 안되므로 중조14세 휘 유(綏)를 1세로 기록하고,[12대결세]는 별록(別錄)으로 기록하였는데,병인보(1866). 임술보(1922)의 사간공유사(휘省.思簡公遺事)의 기록(十七世仕前朝侍中八人學士七人云)과 안처대의 등록(謄錄)을 고찰하여 1922년(임술보)에서 12대결대를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이어서 계해대동보(1983) 간행때에 종의(宗議)로 시조이하 세대를 연계(連系)하기로 결정하여 12대결대를 본기에 세우고 간행하였다.

 

그 후 구보의 기록에 따라 두 차례 종의에서 아래와 같이 광주안씨 연원을 공포하고(2008), 광주안씨 유래를 정립하였다.(2015)

 

본관지 연혁(本貫地 沿革)

 

백제 시조(百濟始祖) 온조왕(溫祚王)이 서기전18년( 癸卯)에 국도(國都)를 위례성(慰禮城)에 세웠다가, 온조13년(서기전7년 乙卯)에 한수(漢水) 남쪽의 땅이 좋다하여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하여 【남한성(南漢城)】이라 이름하였다.

 

한산(漢山) 아래에 나아가 목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기며, 궁궐을 짓고, 14년 병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 남한성(南漢城)이라 하였는데, 3백 76년을 지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辛未.371)에 도읍을 남평양(南平壤)에 옮기고 【북한성(北漢城)】이라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멸한 후, 문무왕(文武王) 【한산주(漢山州)】로 고치고, 문무왕8년(庚午. 670.)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하였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丁酉.757)에【한주(漢州)】로 고쳤고,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매, 신문왕(神文王)이 비로소 신라 경내(境內)의 사벌(沙伐)·삽량(歃良)·거열(居列)의 3주(州)와 백제의 옛땅 웅천(熊川)·완산(完山)·무진(武珍)의 3주와 고구려의 옛땅 한산(漢山)·우수(牛首)·하서(河西)의 3주로써 9주(九州)중에 하나가 되었다.

 

고려 태조가 3국을 통일한 후에 고려 태조(太祖) 23년(庚子.940) 【광주(廣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 (癸未.983) 12주·목(州牧)을 두니,【광주】가 그중의 하나이다. 성종 14년 (乙未에 12절도사(節度使)를 두고 【광주 봉국군 절도사(廣州奉國軍節度使)】라 하였다가, 현종(顯宗) 3년(壬子.1012)에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戊午.1018) 8목(牧)을 정함에, 【광주목(廣州牧)】이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광주목(廣州牧)】이라하였다. 별호(別號)는 회안(淮安)이다.검단산(黔丹山)은 주(州) 동쪽에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진산(鎭山)이라고 일컫는다. 도미진(渡迷津)은 주(州) 동북쪽에 있으며, 나룻배가 있다. 그 서쪽을 진촌진(津村津)이라 하며,주(州) 북쪽에 있고, 또 그 서쪽에 광진도(廣津渡.광나루)가 있다.州官衙는 지금의 河南市에 있었다.

 

특히, 성씨조(姓氏條)에 광주의 土姓으로 李. 安. 金으로 安씨가 있으니 광주안씨는 토착성씨이다.

 

조선 선조6년(宣祖6年:1577)에 부사(府使)를 두었다. 인조원년(仁祖元年:1623)에 류수(留守).부윤(府尹)을 두다가, 동14년(1636)에 호란(丙子胡亂)으로 관아(官衙)를 남한성(南漢城)에 옮기고.류수 겸 수어사(留守 兼 守禦使)라 하였다.

 

그 후 부윤으로 되어 있다가 행정개편으로 1896년에 군(郡)이 되고,군청은 지금의 광주시경안동에 있다. 1900년대에 일부가 서울로 편입되고,성남시(城南市). 하남시(河南市)가 분리되어 현재는 8개 읍면(8個 邑面)이 남아, 광주시(廣州市)로 승격하였다.

 

주요 세거지(主要 世居地)

 

14세 안유(安綏)가 광주(廣州)에서 경남 함안(咸安)땅으로 옮겨서 살았고, 19세 안선(安善)의 대에 와서 다시 함안(咸安)에서 김해(金海)로 이거 하였던 후손들이 있었음이 “계해보”(癸亥譜)에 밝혀져 있다.

 

19세 안국주(安國柱)의 후손은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村)에 그대로 눌러 살았으며.

19세 안성(安省)의 후손은 광주군(廣州郡) 일원으로 옮겨 살은 것으로 보인다.

 

20세의 대에 오면 안철관(安鐵關)의 후손들이 충북 진천(鎭川)과 괴산(槐山)의 청안(淸安), 충남의 당진(唐 津) 등지에 나누어 터를 잡았던 것 같고, 20세 안철산(安鐵山의 후손들은 광주군(廣州郡)의 감북(甘北)에 터를 잡았으며, 20세 안종생(安從生)의 후손들은 광주군(廣州郡)의 덕곡(德谷)에 터를 잡아 세거 한 것으로 보인다.

 

19세 안몽득(安夢得)이 경남 의령(宜寧)으로 이거 한 이래 그 손자 대에 양상(梁山)․경주(慶州)․울산(蔚山) 등지로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지역은 광주아씨(廣州安氏)의 후손들이 10~20여대 동안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켜져 왔으므로 후손들의 세거의 터였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22세 안보문(安普文)이 함안(咸安)에서 밀양(密陽)의 김포(金浦)로 이거한 이래, 손자 대에 와서 안증(安嶒)의 후손들이 경북 영천시(永川市) 도동(道東)으로, 안순(安峋)의 후손들이 경남 창녕(昌寧)으로, 안길(安吉)의 후손들이 전남 승주(昇州)로 옮겨가 자리잡음으로써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계해보”癸亥譜에 22세 안한손(安漢孫)이 광주(廣州)에서 경북 예천(醴泉) 일대로 이거 했다고 나타나 있고, 아들 안자온(安子溫)의 대에 상주(尙州)에 일부가 옮겨가 10여 대를 세거 한것 같다. 또한 23세 안승효(安承孝)의 대에 광주 감북(廣州 甘北)에서 전북 장수(全北 長水)로 옮겨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21세 안팽조(安彭祖)의 후손들은 안동(安東)의 하회(河回)에서, 살았으며 21세 안팽명(安彭命)의 후손들은 24세 안극충(安克忠)의 대에 일부가 전북 남원군(南原郡)의 보절(寶節)로, 24세 안극영(安克永)의 후는 광주군(廣州郡)의 도척(都尺)에, 24세 안극효(安克孝)는 당진군(唐津郡)의 석문(石門)에, 24세 안극제(克悌)는 보은군(報恩郡)의 금굴(金堀)에 각각 이거 하여 이곳에서 정착하였다고 믿어진다. 24세 안지(安智)로부터 2대에 걸쳐 경기도 강화(江華), 충남의 공주․부여(公州․扶餘)에도 살게 되었던 것 같다.

 

19세 안우시(安遇時)가 천안의 광덕산(廣德山) 아래에 정착하여 21세 안숙인(安淑仁)이 삼포왜란평정(三浦倭亂平征)에서 순절함으로 아들 안필성(安弼聖) 이래로 서산의 덕송(德松)에 이거 하여 살았고, ,21세 안숙신(安淑信)의 후손은 충남 천안에 그대로 눌러 살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630년대 이후 파별 세거지(派別 世居地)는 15세 이부총랑(吏部摠郞) 안정(安禎)의 후손 가운데, 안덕개(安德凱) 군자감 봉사(軍資監 奉事)의 자손인 봉사공파(奉事公派)는 김해군(金海郡)의 상리(上里)와 신기(新基)에 많이 살았고, 안후개(安後凱)의 자손들인 락도공파(樂道公派)는 김해군의 의전․칠산․정리․안평(蟻田․七山․井里․晏坪)에, 안세경(安世慶)의 자손들인 동주공파(東注公派)는 김해군의 오척(烏尺)에서 살았다.

 

또한 19세 중랑장 안국주(中郞將 安國柱)의 후손들은 진사공파(進士公派)가 안성․청원․청양(安城․淸原․靑陽)에, 불언재공파(不言齋公派)는 밀양군(密陽郡)의 금포(金浦) 임고(臨皐)에, 완귀공파(玩龜公派)는 영천시(永川市)의 도남동(道南洞)에, 사맹공파(司猛公派)는 밀양(密陽)의 성만(星萬)에, 사직공파(司直公派)는 화순군(和順郡)의 주암(住岩)에, 선략장군공파(宣略將軍公派)는 밀양군(密陽郡)의 류방(留芳)에, 각각 살았으며. 참봉공파(參奉公派)는 함안군(咸安郡)의 남산(南山), 외송(外松)에. 도곡공파(道谷公派)는 칠원․영동․관동․정동(漆原․英洞․冠洞․鼎洞)에. 월호공파(月湖公派)는 함안군(咸安郡)의 가야(伽倻)에.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는 김해군(金海郡)의 예동(禮洞)․함안군(咸安郡)의 주동(柱洞)․진양군(晉陽郡)의 대사동(大寺洞)에 세거 하여 살았다.

 

한편, 조선 최초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19세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의 후손들을 사간공후((思簡公后)로서, 한성(漢城)에서 살다가 20세 주부공파(主簿公 安鐵關)는 충북(忠北) 진천(鎭川)과 괴산(槐山)의 청안(淸安), 광주군의 고읍(古邑)․웅천(熊川)․당진(唐津)의 고대(古垈)에 살았으며, 20세 서령공파(署令公 安鐵山)의 후손도 22세 안식(安湜. 司贍寺直長)까지 한성에서 살다가, 23세 안승효(安承孝)가 전북 장수(全北 長水)로 옮겨 세거하였고, 또, 양주 백석,연곡(白石,蓮谷)․ 창녕군의 영산(靈山)․춘성(春城)․광주(廣州)감천(甘泉)에 옮겨 살고,․24세 안사언(安士彦)과 그의 아우들도 한성에서 살다가 그의 후손들은. 광산(光山)․보령(保寧)․청양(靑陽)․전주(全州)․김해(金海)․함안(咸安)․남원(南原)․서천(舒川) 비인(庇仁)․서산(瑞山)․홍성(洪城)․부여(扶餘)․괴산(槐山)․문경(聞慶)․상주(尙州)․의성(義城)․안동(安東)․곡성(谷城)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한편 “계해보(癸亥譜)”에 22세 안한손(安漢孫)이 광주(廣州)에서 경북 예천(醴泉) 일대로 이거 했다고 나타나 있고, 아들 안자온(安子溫)의 대에 상주(尙州)에 일부가 옮겨가 10여 대를 세거하였다. 20세 감찰공파(監察公 安從生)의 후손은, 24세 안지(安智)로부터 2대에 걸쳐 경기도 강화(江華), 충남 공주․부여(公州․扶餘)에도 살게 되었고.24세 여경(汝敬)부터 28세 신행(信行)까지는 한성(漢城)에서 살았는데, 그 후대에서 광주(廣州)의 덕곡(德谷)․ 부여군의 온산(溫山)․청주(淸州)․남원(南原)․당진(唐津)․서천(舒川)․나주(羅州)․덕산(德山)․영암(靈岩)․시흥(始興)․파주군(坡州郡)의 문산(汶山)에 살았다. 또한 21세 안팽조(安彭祖)의 후손들은 안동(安東)의 하회(河回)에서 살았으며 21세 안팽명(安彭命)의 후손들은 24세 안극충(安克忠)의 후손들이 전북 남원군(南原郡)의 보절(寶節)로, 24세 안극영(安克永)의 후손은 광주군(廣州郡)의 도척(都尺)에, 24세 안극효(安克孝) 후손은 당진(唐津)의 석문(石門)에, 24세 안극제(克悌) 후손은 보은군(報恩郡)의 금굴(金堀)에 각각 이거 하여 정착하였다.

 

씨족사의 개요(氏族史의 槪要)

 

시조 대장군(大將軍) 안방걸(安邦傑)의 아들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안국신(安國信)을 비롯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던 안여중(安礪仲), 역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던 안홍미(安弘美), 안충계(安忠季),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를 지내다가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로 내려온 안유(安綏), 이부총랑(吏部摠郞)을 지낸 안정(安禎), 군기시판사 상호군(軍器寺判事 上護軍)을 지낸 안지(安祉), 조단명봉(朝端鳴鳳)으로 칭송 받던 안해(安海),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낸 안기(安器), 중랑장 겸 합문지후(中郞將 兼 閤門祗侯)를 지낸 안국주(安國柱),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을 지낸 안성(安省)등 광주안씨(廣州安氏)가 고려조(高麗朝)에 배출한 인물은 칠시중팔학사(七侍中八學士)로 알려져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안씨는 남한에 48,0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 - 광주안씨 조상 인물

 

■고려조(高麗朝)

 

안방걸(安邦傑) (대장군. 광주군).

안유(安綏) 명종조 문과 (시어사. 영남안찰사.)

안정(安禎) 고종조 문과. (이부총랑).

안지(安祉) 고종조 문과. (군기시판사).

안수(安壽) 충열왕조 문과. (도평의사사)

안창(安昌) (위위주부)

안해(安海) 충선왕조 문과. (밀직제학).

안충(安冲) 충숙왕조 문과. (호군)

안사충(安社忠) (이부총랑)..

안기(安器) 공민왕조 문과. (판전농시사)

안국주(安國柱) (중랑장, 겸 합문지후). .

안성(安省) 우왕조 문과 (밀직제학).

안정(安鼎) (중랑장).

 

■ 조선조(朝鮮朝)

 

안성(安省) (? ~1421)은 큰 벼슬보다는 그 청렴함이 후세에 전한다.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 상주판관(尙州判官) 등을 지냈으며, 판관(判官) 재직중 다 허물어진 상주성(尙州城)을 중수(重修)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봉상시 소경(奉常寺 少卿)이 되었으며, 개국 후 최초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태종12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정조부사(賀正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후에 개성류후사 류후(開城留侯司 留侯)를 거쳐 태종 18년 평양감사(平壤監司)를 역임했으며, “임기를 다하고 떠나올 때에 공의 짐짝을 눈 여겨 보았 드니 평 소에 탐독하던 서적 몇 권과 누더기 이불 몇 채가 나귀등에 매달려 가는 것을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북 장수(全北 長水)의 용암서원(龍岩書院)과 남원(南原)의 호암서원(湖岩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태종 14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될 때에 고신(安省 江原道都觀察黜陟使 告身 )과 함께 특별히 “과인치내 경치외 사차만민 개득기소(寡人治內 卿治外 使此萬民 皆得其所-과인이 조정을 다스리고 경이 지방을 다스리면 만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편안함을 누릴 것이라.)”라는 15자 어필편지(御筆便紙)를 받았다. 고신(告身)과 어필판각(御筆板刻)은 전북 장수군(全北 長水郡) 어필각(御筆閣)에 소장하고 있다.

 

안극사(安克思) (1419~1479)는. 1443년에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등용되고 다음해에 진사시(進士試)가 폐지되었음으로 한성갑자시(漢城甲子試)에 등과하여 의정부 도사(義禁府 都事)가 되었다. 1455년에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선정하였으며, 1465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고, 1468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진향사(進香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였고, 1471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1477년에 덕원부사(德原府使)로 외직에서 선정하다가 임지에서 순직하였다. 좌익원종2등공신(左翼原從2等功臣)이다.

 

안팽명(安彭命) (1447~1492)은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며 1469년(세조14년)에 사마시(司馬試), 1471년(성종2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郞)․장령(掌令)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492년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으로 왕명에 따라 평해(平海)를 다녀오다가 강능(江陵)에서 병사하였다. 청백리에 록선(淸白吏에 錄選)되었다..

 

안경우(安景祐) ( ? ~1548)는 호:호산(湖山)으로 벼슬은 성주판관(星州判官)을 지냈다. 1519년(중종14년)에 성주판과(星州判官) 재직 중에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지목되어 화를 입었다. 중종 “을묘사화록(乙卯士禍錄)”에 등재되었다.

 

안완셩(安完慶) ( ? ~1456)은 1423년(세종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사재직장(司宰直長)․병조좌랑(兵曹佐郞)․종부시윤(宗簿寺尹)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사은부사(謝恩副使)․주문사(奏聞使)로 두차례 명나라에 다녀왔고, 단종1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일파로 몰려 양산(梁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1791년(정조15년)에 왕명으로 직첩이 회복되고 장릉(莊陵)에 배향 되었다.

 

안엄경(安淹慶) (1392~ ? )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주목사, 호조참판(忠州牧使, 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태종 17년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재임시 전과(全過)․원욱(元郁)․류사식(柳士植) 등 19제현과 총마계(驄馬契)를 조직하여 동심사국에 힘썼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란(癸酉靖難)에 그의 사위 홍달손(洪達孫)이 협찬한 것을 알고 엄히 밀책(密責)하고, 자신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안억수(安億壽) (1427~ ? )는 1441년(세종3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냈는데 숙부인 대사언 안완경(大司憲 安完慶)이 순절하자 현감직을 버리고 밀얀(密陽)으로 은거(隱居)하였다. 청염록(淸廉錄)에,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임시 그 지방에 거목장(椐木杖)이 명물이 이었는데, 모인(某人)이 거목장(椐木杖)을 선물함에 애용하다가 사임할 적에 “이 물건도 이 땅의 물건이니 내 어찌 가져가리요” 하면서 주위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버리고 왔다 한다.

 

안구(安覯) (1458~1522)는 호(號);태만(苔巒).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으로 1494년(성종25년)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이 비(碑)를 새우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어 있다.

 

안증(安嶒) (1494~1553)은 호(號);완귀(玩龜), 1548년(명종3년)에 별시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侍講院) 사설(司說)로 재직중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예측하고 전원에 물러가 정자(亭子)를 짓고 학문에 전념했을 때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이곳 정자(亭子)에 찾아와 공의 위상(偉像)과 학덕(學德)을 찬양하여 불급운문 만장기“(不及雲門 萬丈奇)”라 시를 남겼다. 이 시에 따라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도 욕거남여 나이득“(欲擧藍輿 那易得)” 이라는 시를 지어 남겼다. 또한 주신재ㆍ신독재(周愼齋․愼篤齋)와 돈독한 도의지교(道義之交)가 있었다. 호연사(虎淵祠)에 배향되었다.

 

안여경(安餘慶) (1538~1592)은 호(號);옥천(玉川). 도의(道義)와 문장이 뛰어났다. 관산서원(冠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안신(安迅) (1569~1648)은 호(號);오휴자(五休子).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으로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였다. 임난군공(壬亂軍功)으로 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벼슬이 내렸다. 가례부췌(家禮附贅 三冊)등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안진(安軫) (1560~1635)은 자(字):경숙(敬叔) 평소에 학문에 치중하여 덕망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초유사 김성일(招諭使 金誠一)을 도와 종군하였으며 1594년(선조27년)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봉사ㆍ주부(訓練院 奉事․主簿)를 역임하고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 三等)에 녹훈되었다.

 

안윤손(安潤孫) (1450~1520)은 1471년(성종7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經筵)에 참가했으며 부교리ㆍ지평ㆍ장령(副敎理․持平․掌令) 등을 지냈다‘ 연산군 6년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를 역임했고 이후 대사간ㆍ형조참의(大司諫․刑曹參議) 등을 거치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남겼다. 중종조에 대사헌ㆍ한성부좌윤ㆍ형조참판(大司憲․漢城府左尹․刑曹參判)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안윤덕(安潤德) (1457~1535)의 자(字);선경(善卿), 시호(諡號):익헌(翼憲). 1483년(성종14년)에 식년시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497년(연산3년)에 문과 중시한 이래 정언ㆍ지평ㆍ사간ㆍ직제학(正言․持平․司諫․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후에 경상ㆍ경기 도관찰사(慶尙․京畿 道觀察使)를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김제(金堤)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 都巡察使)로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다. 다시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호조판서(戶曹判書)․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등용되었으며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재직중 단군ㆍ기자(檀君․箕子)의 사당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안여경(安汝敬) (1523~1585) 군시호(君諡號):광계군(廣溪君), 여주목사(驪州牧使)와 광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廣州鎭管 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議政府左參贊 兼 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순충적덕보조공신 광계군(純忠積德補祚功臣 廣溪君)에 추증되었다.

 

안용(安容) (1522~1586)은 자(字);사묵(士黙), 호(號); 송파(松坡). 1558년(명종13년)에 식년시 병과로 급제하여 영남어사(嶺南御使)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황해감사(黃海監司)․호조참판(戶曹參判)․안동부사(安東府使)를 두루 역임하고, 1585년(선조1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안사언(安士彦) (?-?) 자는 언경(彦卿)이고, 호는 빙호자(氷壺子)이다.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조부 안윤손(安潤孫). 부 안자흠(安子欽).제 안사웅(安士雄). 안사준(安士俊)‧안사영(安士英),

1513년(중종 8) 식년시 생원 , 1522년(중종 17) 식년시 을과 3위로 문과 급제.

1524년(중종 19)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1525년(중종 20) 3월 이조좌랑(吏曹佐郞).

1526년(중종 21)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27년(중종 22) 4월 사간원헌납(獻納),11월 사헌부지평(持平).

1536년(중종 31) 사헌부장령(掌令). 1537년(중종 32) 1월에 경차관(敬差官)으로 이천(利川)과 용인(龍仁)에 파견되어 옥사를 다스렸고, 7월에 사간원사간(司諫)과 사헌부집의(執義). 1540년(중종 35) 청주목사(淸州牧使).

 

안사웅(安士雄) (1529-1592)은 1546년(명종1년)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ㆍ지평(正言․持平)을 거쳐 좌승지ㆍ병조참의(左承旨․兵曹參議)에 이르렀으나 청백리 안성(淸白吏 安省), 안윤손(安潤孫)의 정신을 이어받아 청렴하였음으로 선조가 특별히 낙산(駱山) 아래에 집을 내렸다 전한다. 그 집이 세칭 삼청동 안가(安家)이다.

 

안대진(安大進) (? ~ ?)은 1586년(선조19년)에 증시 문과(文科)에 올랐으며, 같은 해에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학사(藝文館 翰林學士)가 되었는데 이산보(李山甫)의 문인으로 문장에 뛰어나 이산보 이정립(李山甫 李廷立)과 함께 삼대문장(三大文章)으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해운도감(海運都監)의 현직(顯職)에 있으면서 큰공을 새웠고 왕의 서천(西遷)때에 호종(扈從)하였으며,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홍주목사 홍가신(洪州牧使 洪可臣)과 함께 이를 평정하는 공을 새웠다. 그리하여 선무(宣武)․호성(扈聖)․청난(淸難) 등의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많은 사패지를 받기도 했다.

 

안민학(安敏學) (1542~1601)은 자(字);이습(而習), 호(號);풍애(風涯), 시호(諡號): 문정(文靖), 글씨가 뛰어났던 안담(安曇;1535~1585)의 아들로, 역시 문재로 이름을 남겼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고 필법과 문장에도 뛰어나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주회보“(廣州會報)”8에 보면, 안민학(安敏學)은 사암 박순(思菴 朴淳)에 배우고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희능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 감찰(監察)을 거쳐 대흥․아산․현풍(大興․牙山․玄風)등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소집사(召集使)가 되어 군량수송을 맡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애도문이 남아있다.

 

안황(安滉) (1523~1585) 자(字);경호(景浩). 군시호(君諡號):광양군(廣陽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사도시정(司導寺正)이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에 올라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호성공신2등(扈聖功臣二等)에 록훈(錄勳)되었다.

 

안응원(安應元) (1565~1604)은 자(字);선백(善伯), 군시호(君諡號):광원군(廣原君), 1606년(선조34년)에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재임시, 식년시 갑과(式年試 甲科)에 급제하고 훈련원 정언(訓練院 正言)을 역임하였다. 임난후 호성원종공신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나 41세로 졸 하였다.

 

안응형(安應亨) (1578~1655) 자(字);숙가(叔嘉), 호(號);정재(靜齋), 1611년(선조39년)에 식년시 병과(式年試 丙科)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 장령(司憲府 持平, 掌令)과 홍문관 교리, 수찬(弘文館 校理, 修撰)을 역임하였고 남양(南陽)과 제주군수(濟州郡守)로 재임시, 선정으로 공덕비(功德碑)가 새워졌으며, 안동부사(安東府使)와 평안(平安),경기(京畿)등 7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예조 형조 참판(禮曹,刑曹 參判)과 개성류수(開城留守)를 거처 1640년(인조18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재임하고 1653년(효종4년)에 대사헌(大司憲)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제수 받았으나 년노하여 재임하지 못하였고 임난후 호성원종공신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록훈되었다.. 78세로 졸하니 효종이 치제문(致祭文)을 내렸다.

 

안헌징(安獻徵) (1600~ ? )은 1621년(광해군13년)에 증광시 을과(增廣試 乙科)에 급제하고, 1626년(인조4년)에 중시(重試)하여, 검열․이조좌랑(檢閱․吏曹佐郞)을 지냈고, 다시 예조정랑․장령․부승지(禮曹正郞․掌令․副承旨) 등을 거쳐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안시현(安時賢) (1601~1649)은 자(字);군망(君望), 1626년(인조4년)에 정시 을과(庭試 乙科)에 급제하여 필선(弼善)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후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록훈(錄勳)되었으며, 당시 문장가 였던 오준(吳俊) 황상(黃床)등과 함께 팔학사(八學士)라 칭할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 났으나 49세로 일찍 졸하였다.

 

안후열(安後說) (1632~1724)은 1652년(효종3년)에 증광시 을과(增廣試 乙科)에 급제, 호당(湖堂)에 들었고 사경기사관․지평․수찬․암행어사(司經記事官․持平․修撰․暗行御史)를 지냈다. 현종조에는 교리․수찬․장령․헌납․집의․승지․동부승지․좌승지․도승지(敎理․修撰․掌令․獻納․執義․承旨․同副承旨․左承旨․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안서우(安瑞羽) (1664~1735) 호;양기재(兩棄齋). 일찍이 문명을 세상에 떨친 인물이다. 1691년(숙종17년)에 생원이 되고, 이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앞서 성묘종사(聖廟從祀)의 의론에 참여했으므로 승문원(承文院)에 뽑히지 못하고 태인군수․울산부사(泰仁郡守․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호(號);순암(順菴). 시호(諡號):문숙(文肅), 군시호(君諡號):광성군(廣城君) 광주안문(廣州安門)이 배출한 영․정조(英․正祖) 시대의 실학자(實學者)이다. 그는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봉사․직장․별제․감찰(奉事․直長․別提․監察)등을 지낸 후 세자익찬(世子翊贊)․세손사부(世孫師傅)로 있으면서 세손을 가르쳤다. 이어 회인현감(懷仁縣監)․돈녕부 주부․첨지중추부사(敦寧府 主簿․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을 사숙하였고, 이익(李瀷)의 뒤를 이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는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전심하였다. 특히 역사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 하였다. 많은 저서(著書)와 편서(編書)가 있다.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안응로(安應魯) (?~?)는 검열․헌납(檢閱․獻納)을 거쳐 이조정랑․지평(吏曹正郞․持平) 등을 지냈다.

 

안세징(安世徵) (1639~1702)은 1675년(숙종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우승지․형조정랑․공조참의(右承旨․刑曹正郞․工曹參議)를 거쳐 보사원종공신1등(保社原從功臣 一等)에 록훈(錄勳)되었다.

 

안상즙(安商楫) (1696~1774)은 용안․연산․창녕현감(龍安․連山․昌寧縣監)을 지내고, 삭녕․해주군수(朔寧․海州郡守)를 거처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를 역임하여 선치(善治)하였음으로, 영조가 속대주첩(續代柱帖)을 만들어 공의 십고십상(十考十上)을 등재하라 하고 대녹피(大鹿皮)를 하사(下賜)하였다. 사후(死後)에 서유대가 청백리(淸白吏)에 천거하였다.

 

안정최(安廷最) (1725~1794)는 영조․정조 조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했으며, 1794년(정조18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안종화(安鍾和) (1806~1924)는 자(字);사응(士)應, 호(號);수재(漱齋)로 궁내부낭관․법부참서․세자시강원 시독․중추원 의관(宮內府郞官․法部參書․世子侍講院 侍讀․中樞院 議官)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조약의 폐기를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였다. 역사에도 관심이 깊어 광범한 문헌을 인용하여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를 편찬하였다.

 

안종수(安宗洙) (1849~1896)는 자(字);경전(敬專), 호(號);기정(起亭), 1882(고종19년)에 진사가 되고, 1895년에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1906년에 황해도 시찰관(黃海道 視察官)을 거쳐 나주군수(羅州郡守)가 되었다. 남달리 학문에 조예가 깊어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정양과 함께 국외(國外)를 두루 다녀와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하였다. 가선대부 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 奎章閣 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안몽득(安夢得) (1372~1452)은 문행이 높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선발되었으며, 조선 태종조(朝鮮 太宗朝)에 생원으로 권농판사(勸農判事)에 등용되었다, 13세 때의 헌수시(獻壽詩)가 유명하다. 함안봉산재(咸安蓬山齋)의 안영사(按嶺祠)와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용지(安勇智) (?~?)는 성종 경자(庚子)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청하현감, 순천도호부사(淸河縣監, 順天都護府使)하다. 정치청평(政治淸平)하니 백성이 칭송(稱頌)하여 청하만경 읍공심청“(淸河萬頃 挹公心淸)”이라 노래하였다.

 

안우(安 宇) (1498~1550)는 호(號);계산(戒山), 1524년(중종19년)에 문과별시(文科別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홍문관 수찬․춘추관 편수관(弘文館修撰,․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권신(權臣)의 유혹을 거절하여 환향(還鄕)하였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이 소(疏)를 올려 권했으나 출사하지 아니하였다.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주(安 宙) (1500~1569)는 호(號);치암(恥庵), 1533년(중종28년)에 식년을과(式年乙科)에 장원(壯元)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비롯하여 청도군수(淸道郡守), 밀양부사(密陽府使),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권신(權臣)의 횡행(橫行)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환향(還鄕)하였다.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택(安 宅) (?~1560)은 자(字);태거(太居), 호(號);광능자(廣陵子). 1540년(중종35년)에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하고. 벼슬은 도사(都事)하다. 함안팔현(咸安八賢)의 한사람으로 함안 여양서원(咸安 廬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신명(安信命) (1575~1636)은 자(字);군실(君實), 호(號);매죽헌(梅竹軒). 임진왜랄(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새워 후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증질(增秩)되고, 선무원종공신3등(宣武原從功臣三等)의 록훈(錄勳)을 받았다. ※숙질(叔侄), 재종간(再從間)의 5名이 모두 록훈(錄勳)을 받으니 세칭 안씨일문의 5충(世稱 安氏一門의 五忠)이라 하였다. 양산 소계서원․보령 호국사․울산 충의사(梁山 蘇溪書院, 保寧 護國祠, 蔚山 忠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절(安 節) (1420~149?)은 자(字);정수(靖叟). 호(號);묵용당(黙容堂), 1447년(세종29년)에 사마(司馬)하고 1456년(세조1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으며, 1472년(성종3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弘文館 直提學 知製敎)와, 대사성 대사헌(大司成, 大司憲)을 거처,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吏曹參判 兼 同知成均館事)에 오르고, 세자시강원 부빈객(世子侍講院 副賓客)을 역임하였다.

 

안숙인(安淑仁) (1467~1510)은 호(號);방수재(守防齋), 성종때 진사가 되어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로써 삼포왜란 평정(三浦倭亂 平定)에 출사(出仕)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안경철(安景喆) (1818~1898)은 자(字);성돈(性敦), 호(號);학암(鶴巖). 1880년(고종17년)에 진사가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오르고,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에 승질(陞秩)되었다.

 

안학로(安學魯) (1824~1895)는 호(號);지와(芝窩), 고종 7년에 지독한 흉년(凶年)으로 온 국민이 아사지경(餓死之境) 일 때 자진하여 교통요충지에 가마솥을 걸고 탕죽(湯粥)으로 왕래하는 굶주린자를 수년간 진휼(賑恤)하였으며 1885년(고종22년)에 진사로서 선감역(繕監役)과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을 지냈다.

 

안택중(安宅重) (1858~1929) 초명(初名):우중(瑀重), 자(字):중거(仲擧), 호(號):지정(之亭), 광무7년(1903)에 법관양성소 교관(法官養成所 敎官)으로 등용되어 사범학교 교장(師範學校 校長)을 역임하고, 1907년에 수학원 교관 겸 동궁사부(修學院 敎官 兼 東宮師傅)로 승진(陞進)되었다. 그 후 동궁(東宮)이 일본에 억류(抑留)되고 국정이 위미(萎靡)함을 보자 사직(辭職)을 고했다.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어구마일필(御廐馬一匹)을 하사(下賜)하고, 손수 소귀정 삼자(疏歸亭 三字)를 써서 주었으니 곧 이소(二疏)가 같다는 뜻이다. 동궁(東宮)이 영친왕(英親王)으로 강칭(强稱)된 후 귀국(歸國)하면 선생(先生)을 비원(秘苑)으로 불러 1~2일식 동숙하면서 통한(痛恨)의 눈물을 지웠다 한다.

 

광주안씨(廣州安氏)는 누대로 여러 자손들이 요직에 등용되어 광주안씨(廣州安氏) 문중을 빛냈으며, 그중 에서도 청렴한 관리로서 이름을 남긴 선조들이 후세의 존경을 받는 인상이다.

 

안성(安省)․안윤손(安潤孫)․안팽명(安彭命) 안완경(安完慶) 안구(安覯)등이 그러한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근래에 와서 이루어진 광주안씨 문중(廣州安氏 門中)의 사업은 1982년에 시조 안방걸(始祖 安邦傑) 이하 12대에 대해 봉위설단(奉位設壇)하여 매년 양력 4월 1일에 시향(時享)하게 된 일이다. 그리고 1984년 10월, 조선조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근거, 왕자맥(王字脈)의 명당자리 라 하여 강제로 이장(移葬)되었던 18세 판전농시사 안기(判典農寺事 安器)의 묘소를 원자리로 복원한 일을 꼽을 수 있다.

 

▴문과(文科)

 

안완경(安完慶)(중시:대사헌). 안철손(安哲孫)(호참) (安彭命)(대사간ㆍ청백리) 안윤손(安潤孫)(대사헌) 안구(安覯)(사간․청백리). 안윤덕(安潤德)(참찬․翼憲). 안여경(安汝敬)(목사․廣溪君). 안의(安義)(정언). 안증(安嶒)(사설). 안극효(安克孝)(장령). 안응원(安應元)(정언). 안종록(安宗祿)(동의금). 안응형(安應亨)(참판). 안응로(安應魯)(이조,정), 안헌규(安獻規)(병조,정), 안후열(安後說)(승지). 안후창(安後昌)(병조,정). 안후태(安後泰)(승지). 안세징(安世徵)(형의). 안서우(安瑞羽)(부사). 안후정(安后靜)(학정) 안후석(安后奭)(兵佐). 안정보(安廷輔)(병좌). 안팽로(安彭老)(판관). 안한준(安漢俊)(부사). 안황(安滉)(廣陽君). 안시성(安時聖)(첨정). 안시현(安時賢)(필선), 안극(安極)(진사). 안정복(安鼎福)(順庵). 안철중(安喆重)(현령). 안경로(安景魯)(진사). 안효근(安孝根)(현감). 안종수(安宗洙)(참봉). 안한언(安漢彦)(부사). 안한영(安漢英)(홍박). 안사언(安士彦)(참의). 안우(安宇)(수찬). 안주(安宙)(교리). 안택(安宅)(도사). 안사웅(安士雄)(병의). 안용(安容)(감사). 안묵지(安黙智)(형정). 안대진(安大進)(원정). 안욱(安旭)(첨정). 안정대(安鼎大)(좌윤). 안제원(安濟元)(승지). 안극제(安克悌)(승지). 안경설(安景說)(감찰). 안경철(安景澈)(승지). 안효술(安孝述)(승지). 안희원(安禧遠)(승지). 안긍원(安兢遠)(승지). 안종화(安鍾和)(사간). 안기윤(安基輪)(지평). 안용지(安勇智)(부사). 안응균(安應鈞)(부사). 안윤신(安潤身)(진사). 안학로(安學魯)(도정). 안효필(安孝弼)(진사). 안처선(安處善)(관찰사). 안엄경(安淹慶)(감찰어사). 안여경(安余慶)(관찰사). 안윤조(安胤祖)(부정). 안수관(安守寬)(진사). 안규화(安奎華)(진사). 안민중(安珉重)(진사). 안인달(安仁達)(승지). 안격조(安景祖)(참판). 안수중(安琇重)(진사). 안효철(安孝轍)(부정). 안효구(安孝構)(진사). 안효가(安孝可)(진사). 안홍원(安弘遠)(진사). 안명언(安命彦)(통덕랑).

 

▴음사(蔭仕)

 

안몽득(安夢得)(권농판사). 안강(安崗)(진찰방). 안현(安峴)(좌랑) 안제(安齊)(현감). 안종생(安從生)(감찰). 안경시(安慶禔)(지의금). 안경선(安慶船)(부호군). 안명(安命)(호판). 안숙량(安淑良)(시직). 안보문(安普文)(인의). 안절(安節)(정랑). 안계옥(安啓沃)(부사). 안리(安理)(부사). 안충(安忠)(증승지). 안세립(安世立)(도사). 안사백(安師伯)(증호참). 안숙량(安淑善)(서사). 안순(安峋)(사맹). 안길(安吉)(사직). 안우(安雨)(참봉). 안우시(安遇時)(판사). 안처선(安處善)(청백리:동국문헌록). 안억수(安億壽)(현감). 안헌(安憲)(시직). 안극서(安克緖)(정랑). 안효충(安孝忠)(嘉善). 안효구(安孝九)(감찰). 안덕원(安德遠)(참봉). 안효흥(安孝興)(오위장). 안신행(安信行)(별검). 안건행(安健行)(동지). 안철중(安喆重)(익찬). 안석우(安錫瑀)(감역). 안녕수(安寧洙)(통정). 안응춘(安應春)(충순위). 안호(安琥)(내금위). 안귀명(安龜命)(첨지). 안담명(安聃命)(동지). 안만춘(安萬春)(부사직). 안후현(安后賢)(가선). 안경식(安敬植)(참의). 안병수(安秉洙(도정). 안익수(安翊洙)(통정). 안규수(安奎洙)(능참봉). 안상수(安尙洙)(통정). 안치수(安致洙)(첨지). 안진훈(安震勳)(도정). 안정훈(安鼎勳)(가선). 안석훈(安錫勳)(가선). 안사노(安師魯)(가선). 안기중(安騏重)(도정). 안교현(安敎鉉)(도정). 안희강(安熙綱)(의관). 안익원(安翼遠)(의관). 안희선(安熙善)(통정). 안여충(安汝忠)(병마우후). 안여효(安汝孝)(만호). 안홍립(安弘立)(교위). 안응정(安應井)(사과). 안한영(安漢楹)(사과). 안문중(安文重)(가선). 안효천(安孝千)(통정). 안효정(安孝貞)(통정). 안효응(安孝膺)(도사). 안붕원(安鵬遠)(의관). 안대원(安大遠)(사과). 안익원(安益遠)(도사)> 안병원(安炳遠(의관). 안종호(安鍾祜)(통정). 안응조(安應祖)(사직).

 

공신(功臣)

 

안윤덕(安潤德)(중종조․삼포왜란평정). 안숙인(安淑仁)(중종조․삼포왜란평정). 안여경(安汝敬)(명종조․ 순충적덕보조공신). 안황(安滉)(선조조․호성2등공신). 안응원(安應元)(선조조․호성원종3등공신) 안응형(安應亨)(선조조․ 호성원종3등공신). 안응인(安應仁)(서조조․호성원종3등공신). 안시성(安時聖)(선조조․扈聖原從3等功臣) 安大進(선조조․선무 호성 청난 원종1등공신). 안이명(安以命)(선조조․선무원종1등공신). 안근(安瑾)(선조조․선무원종3등공신). 안수(안수)(선조․선무원종3등공신). 안시명(安諟命)(선조조․선무원종3등공신). 안진(安軫)(선조조․선무원종3등공신). 안신명(安信命)(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덕남(安德男)(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응조(安應祖)(중종조․정사원종공신). 안극사(安克思)(세조조ㆍ좌익원종2등공신).

 

봉군(封君)

 

안여경(安汝敬)(광계군:廣溪君). 안황(安滉)(광양군:廣陽君). 안응원(安應元)(광원군:廣原君). 안극(安極)(광평군:廣平君). 안정복(安鼎福)(광성군廣城君).

 

시호(諡號)

 

안성(安省)(사간:思簡). 안윤덕(安潤德)(익헌:翼憲). 안민학(安敏學)(문정:文靖).

 

문형(文衡)

 

안헌(安獻)(광해조).

 

호당(湖堂)

 

안완경(安完慶)(세종조). 안윤손(安潤孫)(성종조). 안한영(安漢英)(중종조). 안종록(安宗祿)(선조조). 안민학(安敏學)(성종조). 안후열(安後說)(효종조). 안명하(安命夏)(철종조).

 

청백리(淸白吏)

 

안성(安省)(세종조. 개성류후사 류후). 안팽명(安彭命)(성종조․사성), 안구(安覯)(연산조). 안황(安滉)(명종조). 안민학(安敏學)(선조조). 안중관(安重觀)(선조조). 안후열(安後說)(효종조). 안처선(安處善)(태종조:동국문헌록).

 

학행(學行)

 

안정(安侹)(1574~1636) 호(號),도곡(道谷), 한강정구(寒岡鄭逑)선생문인, 사친과 우국에 충효하며. 학문에 진전함을 득하여 조정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으로 포양하고 사림들은 태양서원(泰陽書院)을 창건하여 봉향하다.

 

안종희(安鍾禧)(1896~1985) 호(號),근파(槿坡), 정통 퇴계학파의 마지막 거유로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문장덕행이 세상에서 유종으로 추앙받았으며, 사림들이회동(會同)하여 선생(先生)으로 추존하다. 재궁 근파재(槿坡齋)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문집(文集)

 

楓厓集(安敏學) 順庵集(安鼎福) 橡軒隨筆(安鼎福) 東史節要(安鍾和) 鷗浦集(安獻徵) 雙槐堂遺稿(安赫重) 禮岡集(安彦浩) 式好堂遺稿(安彦繆) 松窩集(安命夏) 竹北集(安仁一) 晩浦集(安瑜重) 玩龜實記(安嶒) 省齋集(安后靜) 愼庵集(安景說) 晩悔集(安景時) 六非軒集(安瑛洙) 怡軒逸稿(安文煥) 家禮附贅(安迅) 蓮棲文集(安孝文) 石河集(安鍾悳) 時軒集(安禧遠) 道谷集(安侹) 希齋集(安鍾彰) 槿坡集(安鍾禧) 五休堂集(安迅) 小岡集(安珉重) 藕亭草稿(安孝政) 通政耕庵集(安孝千) 石泉集(安景南) 由軒集(安鍾瑨) 隨筆集(安明洙)

 

유적(遺蹟)

 

시조이하12세지단(始祖以下 十二世之壇),

광주안씨유허비(廣州安氏遺墟碑) : 중흥조 영남 안찰사 이하 누대 세습지).

 

위위주부(창)이하오세지단(衛尉主簿(昌)以下五世之壇), 이조참판(제)이하삼세지단(吏曹參判(齊)以下三世之壇), 중랑장(원발)이하삼세지단(中郞將(原發)以下三世之壇),

 

재우(齋宇)

 

봉산재(蓬山齋)․경사재(敬思齋)․이택재(麗澤齋)․오휴정(五休亭)․식호당(式好堂)․건척정(乾惕亭)․완귀정(玩龜亭)․호연사(虎淵祠)․육우당(六友堂)․만회정(晩悔亭)․삼괴당(三槐堂)․정심재(整心齋)․취성재(聚星齋)․경모재(景慕齋)․계당재(桂堂齋)․고호정古湖亭․망추재(望追齋)․수서재(壽瑞齋)․영사재(永思齋)․용강재(龍岡齋)․태양사(泰陽祠)․의학서당(義學書堂)․근파재(槿坡齋)․영모재(永慕齋)․보본재(報本齋)․경추재(敬追齋)․가산재(伽山齋)․봉강재(峯康齋)․훈지정(塤篪亭)․초려재(草廬齋)․사숙당(思肅堂)․서령공재실(署令公齋室)․대산재(大山齋)․취정재(聚精齋)․경모재(敬慕齋)․원모재(遠慕齋)․소계서원(蘇溪書院)ㆍ경모재(景慕齋:울산)․완계정(翫溪亭)․모선재(慕先齋)․둔옹정(遁翁亭)․모렴당(慕濂堂)․송연정(松淵亭)․어필각(御筆閣)․용암서원(龍巖書院)․임연재(臨淵齋)․상로재(霜露齋)․이출재(履怵齋)․문송정(聞松亭)ㆍ예남재(禮南齋)․무거재(無去齋)․념수재(念修齋)․우복재(愚伏齋)․경지재(敬止齋)․이연재(詒燕齋)․일신당(日新堂)․영모재(永慕齋:정리)․벽우정(碧藕亭)․임심재(臨深齋)․농아재(聾啞齋)․경모재(敬慕齋:남원)․만취재(晩翠齋:남원).

 

정려(旌閭)

 

尹齊의 妻 廣州安氏(楓崖 安敏學의 손녀) : 병자란에 그의 남편이 심양으로 납치되니 세 번이나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자진하였다. 그 뒤 旌閭하였다.

 

李玄聃의 妻 廣州安氏(李時茂의 손부. 廣陽君 安滉의 딸) : 임진왜란 때에 가족이 몰살되니 19세의 나이로 연못에 뛰어들어 자진하였다. 나중에 건저 보니 그의 얼굴이 생시 그대로 였다.

 

열부:언양김씨(貞烈婦:彦陽金氏)는 24세 안극충(安克忠)의 처이다. 열부는 그의 집에 화적이 들어와 부군을 죽이려 하자. 몸으로 익폐(翼蔽)하야 대신 흉도에 맞아 치사하고, 부군은 온전하였다. 1696(숙종병인에 명:정려(命:旌閭)하고, 동리 이름을 고절(高節)로 명명하였다.

 

孺人 延安李氏 孝烈碑閣,

 

효행(孝行)

 

쌍효자:24세(世) 안덕평․안덕창(安德平․安德昌) : 이 두 형제는 성품이 지극한 효성으로 가친을 봉양하였으며, 가친의 위급한 병세로 촌각을 다툼에, 두 형제가 연달아 지혈(指血)을 짜서 드리니 생명이 3일을 더 회생하였다. 장사 날에는 폭우로 개울물이 불어 불가도강(不可渡江)이라 앙천통곡(仰天痛哭)하니 홀연히 수분하야 순행안장 하였다. 시묘살이 3년에 두 호랑이가 두 효자를 호위하였다. “세칭 쌍효자”라 하였으며. 장수군지 도덕편에 실려있다.

 

효자:26세(世) 안대정(安大楨) (대사헌 安潤孫의 현손) 자(字);윤보(允甫), 임진왜란 때에 선친과 함께 광주 무갑산(武甲山)에 피신하였는데 적병이 그의 아버지를 해치려 하자 대정(大楨)이 대신 죽기를 각오하고 아버지를 감쌌으나 결국 부자가 함께 죽었다. 우암(尤菴)이 경연에서 정포를 청하였으나 미과하다

 

효자:27세(世) 안우(安瑀)는 안극충(安克忠)의 증손이니 곧 열부 언양김씨(貞烈婦 彦陽金氏)의 증손이다. 어릴 때부터 효행이 천출하야 부상(父喪)에 낮에는 봉묘칙(奉墓側)하고 밤에는 봉모(奉母)하였다. 모친이 병환으로 퀑 고기를 요청함에 활을 끼고 서 있으려니 설치가 자추(雪雉 自墜)하고, 또 물고기를 요청함에 물고기가 얼음을 깨고 자출(自出)하였다. 효자가 시묘 살이 할 적에 동민이 근죽(勸粥)하고 그 곳을 효자정 이라 하였다. 1723(경종3연)에 증 형조좌랑하고 1854(철종5년)에 명 정려(命 旌閭)하다.

 

효자:28세(世) 안재(安載) (풍애 안민학의 증손) 자: 중후(仲厚), 12세의 나이에 그의 아버지 병환이 위중함에 단지(斷指)하여 아버지를 회생(回生)하니 세상에서 효자문을 새워 “십이세 효자 안재지문(十二歲 孝子 安載之門)”이라 하였다.

 

효자:28세(世) 안사백(安師伯)은 자(字):사감당(四感堂)이다. 효성이 천출하여 봉양이친(奉養二親)함에 그 행적(行績)이 특출하였다 1, 부친이 대종병(수중다리 병)으로 백약이 무효하야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어 환부에 부쳐 차도가 있었다. 2, 가뭄을 당하여 밭머리에 앉아 호읍호천(號泣昊天)하여 기우(祈雨)하니 독주기전(獨注其田)하였다. 3, 거상에 골립삼년(骨立三年)을 오직 미죽(穈粥)으로 지새웠다. 4, 길가에 감나무를 심어 행인을 도우니 안정효시(安亭效柿)라 하였다. 1897년(光武丁丑)에 효행(孝行)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하고 명 정려(命旌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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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과 시조 안방걸이 이원의 아들이라는 설(說) 논란

참고로 이러한 설이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겨봅니다.

 

역대 광주 안씨 시조 기록에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이나 시조 안방걸이 807년 동래(東來)한 이원(李瑗)의 아들이라는 설은 족보기록에 나오지 않기에 조선말(1790년) 또는 1984년에 제기된 근거가 불분명한 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광주안씨 대종회의 공식 입장인 듯 하다.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 논란에 대해 토성분정(土姓分定)도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통설이고, 광주안씨 시조 안방걸이 이원의 아들이라는 설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여기에 대한 광주안씨의 공식입장 기록을 참고자료로 보기로 한다.

 

역사기록이 뒷받침 되지 않는 여러 설(說)들은 관련 기록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언급해 둔다.

 

◇ 시조 안방걸이 807년 중국 농서출신으로 동래(東來)한 이원(李瑗)의 아들이라는 설(說)

 

광주안씨 시조는 고려태조 때 대장군으로 광주군 (廣州君)에 봉해진 안방걸 (安邦傑)이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 877년 1월 31일(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 왕건은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국왕 (재위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안씨는 원래 안씨(安氏)가 아니라 이씨(李氏)로 신라 애장왕 7년에 중국에서 건너온 이원(李瑗)의 후손으로 신라 제48대 경문왕(景文王, 846년 ~ 875년, 재위: 861년 ~ 875년)이 이원의 사후에 안원(安瑗)으로 성씨를 바꾸어 주었다.

 

중국의 농서 출신의 이원(李瑗)이 사신을 따라 신라 애장왕 7년(806)에 신라에 왔다가 신라의 풍물과 인심에 반해 그대로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

이원은 신라 여인을 아내로 맞아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지춘(枝春), 둘째 엽춘(葉春), 셋째가 화춘(花春)이었다.

 

풍수에 능했던 이원이 자신이 죽으면 마을 뒷산 어디어디에 무덤을 쓰라는 유언을 했다.

 

“너희들은 머지않아 성씨(姓氏)가 바뀔 것이다. 비록 성씨가 바뀌더라도 좋은 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 괘념치 말라”고 하였다.

지춘, 엽춘, 화춘 3형제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유언대로 아버지가 미리 정해놓은 자리에 묘를 썼다. 이때가 신라 경문왕 4년(864)의 일이었다.

 

신라 경문왕때 이들 3형제가 살던 마을도 왜구들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아원의 아들 3형제가 분연히 일어서 관군에게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지 말고 스스로 지키자고 자위대를 조직하여 왜구들을 물리쳤다.

 

왜구를 물리친 공으로 경문왕이 3형제를 불러 벼슬을 내리고 새로운 성씨와 이름을 하사하였다.

 

새로운 성은 안씨(安氏)이고, 새로운 이름은 방준(邦俊), 방걸(邦傑), 방협(邦俠)이다.

성을 안씨로 한 것은 안국(安國), 즉 나라를 평안케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방준은 죽산군(竹山君), 방걸은 광주군(廣州君), 방협은 죽성군(竹城君)으로 봉했다.

 

죽산군 방준은 죽산 안씨의 시조, 광주군 방걸은 광주 안씨의 시조, 죽성군 방협읕 순흥 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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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안씨 족보의 시조 기록은 이렇다.

출처 : http://botw.egloos.com/10696522

 

kwfou by botw 2011/05/05 04:54 botw.egloos.com/10696522

 

광주안씨 시조와 성씨 연원에 관한 가장 권위 있고 믿을만한 문헌은 역대 족보 뿐이다. 광주안씨 시조에 대해 가장 잘 알았던 분들은 광주안씨 선조들이므로, 선조들이 남긴 족보의 시조 기록에 나오지도 않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은 전혀 믿을 것이 못 되니,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광주안씨 족보의 시조 기록은 이렇다. : 경술보(1790), 병인보(1866), 임술보(1922)의 시조 기록

 

조선말 이후에 족보에도 없고 역사 기록에도 없는 설들이 문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데, 이런 근거가 없거나 모호한 설을 끌어들여 족보의 시조 기록을 고쳐야 된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역대 광주 안씨 시조 기록에는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도, 시조가 807년 동래(東來)한 이원(李瑗)의 아들이라는 설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천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 시조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가 불가능한 근래(1984년) 또는 조선말(1790년 전후)에 처음 나온 근거가 불분명한 설에 지나지 않는다.

 

광주안씨 들은 이런 말에 속지 말고 배척해야 하며, 족보의 시조 기록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조에 관해 전해오는 기록이 소략(疏略)하여 불만스러운 점은 있으나, 시대가 오래 되어 새로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전해오는 기록이나마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믿을 수 없고 근거도 불분명한 후대에 나타난 설로 시조 기록을 덧칠하거나 바꾸는 것은 조상들께 죄를 짓고, 후손들을 오도(誤導)하는 일이다. 족보나 사서(史書)에 나오지도 않는 가공(架空)의 정책이나 인물(人物)을 끌어들여 시조 기록이나 성씨 연원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그럴 듯한 이유를 제 아무리 많이 끌어다 대더라도 역사서에 없는 일은 역사적 사실이 되지 못하며, 불필요한 논란만 만들어 낸다.

 

시조 연원을 두고 문중 내에서 이런 저런 논란이 자꾸만 벌어지는 것은 족보 기록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외부 사람들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끌어 들이려는 사람들이 계속 있기 때문이다. 선조님들이 물려준 시조 기록을 이런 사람들의 말을 따라 고쳐 적게되면 족사는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종원들은 족보에도 사서(史書)에도 없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문중 외부의 사람들이 광주안씨 시조에 대해 선조들보다 더 잘 알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광주안씨 연원으로 족보에 없는 이러한 설들을 올려 놓은 곳이 보이나, 이는 잘못된 것이니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선생의 변무(辨誣) : 안씨의 농서이씨 기원설은 맹랑하고 근거 없다.

역사학자 순암 선생의 말을 따르면 중국서 온 안씨들 조상이라는 이원(李瑗)이나 아들 3형제는 실존하지 않은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므로, 이 설을 믿으면 광주안씨는 허깨비 후손이 된다. 광주안씨 시조는 고려 태조(太祖, 877∼943, 재위 918∼943) 때 분으로 신라 때인 807년 중국서 왔다는 이원의 아들이 되기에는 연대도 맞지 않는다. [순암 선생의 변무(1790년)가 이 설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임.]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 논란에 대해

토성분정(土姓分定)도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광주안씨 대종회에서 성씨 연원 문안을 정할 때 이 정책에 따라 안씨 성을 가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 것은 특정인의 주장을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인 줄로 잘못 알고 정한 것이다. 이제 이것이 역사 기록에는 나오지도 않고, 학계에서도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개인 학설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 이상 이 부분은 삭제해야 한다. 광주 안씨가 있지도 않았던 정책에 따라 안씨 득성을 했다고 하면 유령 성씨가 되고 만다.

 

토성분정설의 출자(出自)도 모르면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우기기만 하는가?

학계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는 개인 학자의 학설인 토성분정설은 학자들끼리 논란하게 놓아두면 되지, 굳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족사에 끌어들여 역사 전문가도 아닌 종인들끼리 얼굴까지 붉혀가며 논란할 하등의 필요가 없다. 종인들간의 논란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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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을 처음 주장한 이수건(李樹健) 교수 본인의 요약 설명

 

토성분정(土姓分定)이 사실이면 이원(李瑗) 동래(東來)도 사실이다.

 

이모(李某ㆍ1935~2006) 씨가 1984년에 역사 책에 없는 고려초 940년(1044년전)에 시행된 성씨 정책을 알아낼 수 있다면, 죽산안씨들도 1805년에 807년(998년전) 중국서 온 조상을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못 알아낼 리가 없다.

 

A도, B도, C도 ...토성분정(土姓分定)이 맞다고 한다면, α도, β도, γ도...안씨는 동래(東來)한 이원(李瑗) 후손이 맞다고 한다.

D도, E도, F도 ... 이원(李瑗) 동래설(東來說)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δ도, ε도, ζ도 ...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이 문제 있다고 한다.

 

따라서 토성분정설(土姓分定說)의 믿을만한 정도는 우리나라 안씨 대다수가 807년 동래(東來)한 이원(李瑗)의 후손이라는 설의 신뢰도와 정확히 똑 같다.

 

토성분정(土姓分定)이 사실이면 이원(李瑗) 동래(東來)도 사실이고, 이원(李瑗) 동래(東來)가 사실이 아니면 토성분정(土姓分定)도 사실이 아니다.

 

1984년에 나온 토성분정설을 믿는 것보다는 차라리 200년 앞서 1700년대 말에 나온 농서이씨 기원설을 믿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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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수건씨의 토성분정설의 문제점들을 지적한 문헌들이다.

 

이수건씨의 토성분정설에 대한 관련 학자들의 다른 의견 : 토성분정은 없었다 / 토성분정은 995년 ...

이수건교수 본인이 토성분정은 학계 공통 견해와 다르다고 함 : 토성분정은 학계 정설(定說)도 못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토성분정설 문제점 지적

정구복(鄭求福) 전 한중연 교수의 토성분정설 문제점 지적

이태진(李泰鎭) 국사편찬위원장(전 서울대 교수)의 토성분정설 문제점 지적

 

모든 토성이 940년의 토성분정 때 생겼다는 말이 정말 맞는가?

토성분정이 940년에 시행되었다는데, 그 해의 고려사, 고려사 절요 기록에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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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문중 시조기록을 존중한다면 없는 말을 덧붙이려 하지 말라.

광주안씨는 있지도 않은 정책으로 득성한 유령 성씨인가?

신안씨동원보(新安氏同源譜)

어느 토성분정(土姓分定) 맹신자의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