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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태봉국 (궁예)

궁예 황제의 능과 사당 / 궁예의 후손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태봉국 궁예 황제 무덤 기록한 문학 작품 발견

방북 신청을 통해 구체적인 사실 확인 필요

[2008-04-11 오전 10:26:00]

 

 

철원에 도읍지를 정해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 황제의 능과 사당을 기록한 문학 작품이 본사의 추적으로 발견됐다.

 

그 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궁예왕은 폭정으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것으로 기록돼 무덤과 사당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19091214일 경기도 수원군(현재 화성시) 양감면 정문 2리 포당동에서 출생한 수필가 박승극은 수필 기행 <다여집 多餘集> '삼방폭포행'(三房瀑布行)라는 제목으로 궁예 왕릉을 묘사하고 있어 태봉국 재조명의 필요성이 제고 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작가가 기행문 형식으로 집필한 것으로 보여 궁예왕의 능과 사당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철원군이 그동안 추진해 오던 태봉국 복원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내용의 일부를 살펴 보면

 

- 나는 여기 오면서부터 삼방팔경의 하나인 삼방폭포가 좋은 곳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이 짧은 시일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마셔야할 약수가 축이 날까봐 구경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또 며칠 전 일보지국 주최의 관폭대회에도 동반의 권유를 받았으나, 각층 잡인과 어울리기가 싫어서 그대로 거절하였다.

 

오늘은 내 이곳을 떠난 날도 결정하였고, 삼방의 명물인 궂은비도 개어서 날이 좀더 더운 편이므로, 다섯 명 정도가 한 그룹이 되어 삼방폭포를 볼 숙원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 약수터에서도 여름 한철에 더위를 모르고 지나는 것이지만, 삼방폭포는 무더운 날에도 도리어 선선해서 특별히 더운날을 택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일보지국을 중심으로 모인 우리 다섯 명은 약수를 먹으러 와서 어쩌다 만나 인간적으로 친근하게 되어 서로 놀기도 하고, 물을 같이 먹으러 다니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철새보다 더 못한 비조직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제각기 헤어져 갈 운명을 올 때마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만은 삼방폭포구경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앞세우고 모두들 마음에서 우러나 친근미가 있는 행동을 하였다.

 

우선 점심거리도 논의해서 조선적 떡인 <증편>을 장만하고 화려한 말소리로 떠들어대며 준비를 마친 후 약수터로 쉬엄쉬엄 걸었다.

 

삼방의 북촌! 서울의 북촌과 마찬가지로 빈궁한 사람만 모인 곳! 이들은 정말 환자로서 약수를 먹으러 왔지만 돈이 없는 탓에 이 깨끗지 못한 곳에 있게 된 것이다.

여기를 지날 때에 무슨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동구를 나서면 좌편으로 궁예릉이 있는데 참으로 빈궁해 보였다. 늙은 전나무가 서있고 다 헐어진 돌담이 둘러있으며 그 안에 두어 간이 되는 기와집 - 이것이 궁예의 능이다.

 

한때는 왕! 최후의 전사를 하게 된 이곳에 저것만이 최대의 유적으로 남아 있을 줄이야 어찌 예측하였을까?

 

문 위에는 <尊敬閣(존경각)>이라고 쓴 조그만 현판이 걸려있으며 내실에는 궁예-태봉왕의 아주 무섭게 생긴 초상이 붙어 있다.

 

이 구석 저 구석 검은 현판에 흰 글씨로 추억의 한시와 긴 글이 써 있으며 그 중에는 <丙午年五月泰封殿宇重建(병오년오월태봉전우중건>이니 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 하 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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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대왕(弓裔大王) 왕릉

1. 문헌 자료

1) 대동지지(大東地志)의 태봉주 궁예묘(泰封主弓裔墓)

  ○《대동지지(大東地志)의 능침조 안변도호부 편

 

능침태봉주 궁예묘(泰封主弓裔墓) 서남쪽으로 120리이며 삼방로(三防路) 왼쪽이며 석축(石築)이 수십 길이나 되고, 높다란 형대(炯臺)가 있는데, 지금은 절반이나 허물어졌다.

 

 

궁예왕의 후손

 

광산이씨(光山李氏)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 태봉왕(泰封王) 궁예(弓裔)의 후손인 정()을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순백(珣白)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있다.

 

삼국사기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궁예는 후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 자신이 부인과 청광보살신광보살로 칭하던 아들을 무 자비하게 죽인 사실이 그것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궁예의 후손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순천김씨와 광산이씨는 그들의 족보에 궁예의 후손임을 밝혀놓고 있다.

 

순천김씨 세보에는 궁예가 신무왕(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김우징)의 다섯째 아들로 되어 있으며, “궁예의 후손 중 하나는 순천김씨가 되었고, 하나는 광산이씨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족보에 수록된 시조 부분의 사실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후손들이 족보를 만들때 대체로 자기 조상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황당한 전설이나 신화를 싣고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순천김씨 족보 는 궁예를 선조로 실어놓고 있다.

 

, 순천김씨 철원공파의 세보에 따르면 자신들의 시조는 청광이고, 청광의 아버지는 궁예라고 밝혀놓고 있다. 또 광산이씨 세보에도 궁예가 23세조로 기록되어 있다. 즉 광산이씨 세보에는 궁예는 경문왕의 서자이며, 그 아들 청광은 순천김씨의 시조, 신광은 광산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더욱 흥미있는 것은 순천김씨의 중시조인 김종서와 광산이씨의 중 시조인 이선제는 궁예를 부정적으로 서술한고려사편찬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김종서는 조선초 정승에 오른 인물로 실제로고려사편찬을 관장하였고, 이선제 역시 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고려사의 한 부분을 집필하였다.

 

이들은고려사에 궁예가 어떻게 서술되는가를 알면서도 그 궁예를 선조로 모시고 살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궁예가 순천김씨와 광산이씨의 선조라는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들 가계의 전통은 궁예를 정사에 전하는 탐학한 왕 이 아니라 태평성대의 이상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개혁군주로서 시대 의 영웅이었음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문학박사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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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후손과 최후

 

순천 김씨의 시조는 김총(金摠)으로 궁예의 장손(맏손자)이라고 전해진다. 궁예가 신라 경문왕의 아들이라 전해지므로 경문왕 - 궁예왕 -청광(靑光) - 순천김씨 시조 김총(金摠)으로 이어진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김씨나 광산이씨도 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삼성연원보

신라김씨 선원록

   순천김씨 상계도

순천김씨 사이트 : http://www.sunchunkim.com.ne.kr/

광산이씨(光山李氏, 光州)는 아득히 김알지대보공(金閼智大補公)으로부터 연원(淵源)하여 신라천년(新羅千年)의 영고(榮枯)를 거쳐 국운(國運)이 쇠잔(衰殘)함에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는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웅지(雄志)를 펼쳐 고려국(高麗國)을 송도(松都)

세운 궁예왕(弓裔王)의 후예(後裔)로 궁예의 5대손 이종금(李宗金)이다.

광산이씨 사이트 : http://www.광산이씨.kr/

 

참고로 전라도 광주(光州)를 본관으로 하는 광산이씨(光山李氏, 光州)와 경기도 광주(京畿道 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시조가 다른 성씨이다.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始祖)는 이자성(李自成)이다.

 

철원궁씨(鐵原弓氏) 시조는 궁예(弓裔) 또는 궁예의 손자인 총(摠)이라고 하는데 대부분 철원궁씨 시조는 궁예라고 전한다.

 

궁예는 신라 제48대 경문왕(또는 헌안왕의 손자)의 아들이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궁씨는(弓氏)철원궁씨(鐵原弓氏)0가구 7명이 있고, 토산궁씨 (兎山弓氏, 상원궁씨)183가구 555명이다.

 

철원궁씨는 가구수가 없고 7명만 등재되어 그런지 본관은 1본(토산궁씨) 183가구에 562명(철원궁씨 7명포함)으로 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 자료)

 

토산궁씨 (兎山弓氏, 상원궁씨)

 

궁씨(弓氏)는 본래 중국(中國) 태원(太原) 숙궁(叔弓)의 후손 궁흠(弓欽)이 은나라 말기에 기자가 우리나라에 올때, 태사(太師 : 고려 정1)로 기자를 수행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산(兎山)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궁씨(弓氏)의 연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도의교육에 힘써 토산군(兎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토산궁씨세보(兎山弓氏世譜)에 따르면,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 되어 후손인 궁계신(弓繼信)1세조로 받들고, 그의 출신지인 토산(兎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궁씨(弓氏)의 본관(本貫)은 토산(兎山) 외에도 순천궁씨(順天弓氏)가 문헌(文獻)에 전하나, 상고(詳考)할 근거가 없으며, 현존하는 관향(貫鄕)은 토산(兎山) 단본으로 알려졌다.

 

토산은 황해도 금천군과 신계군의 일부지역을 포함한 옛 지명으로, 757(경덕왕16) 토산으로 개칭되었다.1062(문종16) 개성의 직할지역이 되었고, 예종때 감무(監務 : 중앙에서 작은 속 현에 파견한 5~6품의 감독관)를 두었다.

 

1952년에 금천군의 일부지역을 독립시켜 토산군으로 환원하였다. 토산궁씨는 1985년조사에서 127가구 480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83가구 562(철원궁씨 7명포함)이었다.

 

궁씨(弓氏)의 주세거지는 평남 순천과 개천군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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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정개 5)년 왕건을 옹립하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쿠데타는 패서 고구려계 호족들이 궁예에게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궁예는 변장을 하고 도망치다가 배가 고파 보리 이삭을 날로 처묵처묵하던 중 백성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 처묵처묵 : 보리서리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리이삭은 사람이 날로 처묵처묵할 만큼 만만한 게 절대로 아니다(입안이 악어가죽이 아니라면). 불에 그슬려 서리를 한다면 모를까. 그 보리까지 날로 먹어야 할 정도로 굶주리고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얘기일지도

 

궁예의 최후에 대해선 분분한데 궁예왕은 측근 몇 사람을 거느리고 현 평강(平康)방면으로 도주 중 수풀속에 숨은 폭도의 죽창에 찔려 삼방(三防)땅에 이르러 말 위에서 분사하였으나 생시처럼 꼿꼿히 앉아 있었다 한다.

 

왕건이 달려와 조문하나 유해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모든 사람이 겁내어 부득이 직립한 채로 입관케하여 석축으로 수십 길이나 높다란 분묘를 만들어 왕후의 례에 따라 정중히 장례를 지냈다고 하며 오래도록 연 1회 향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광산이씨소고 참조)

고려사에는 궁예 세력이 간단히 붕괴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철원지방에서는 궁예가 강을 건나 도망갈때 한탄했다면서 한탄강이란 이름이 붙었다거나 궁예가 군대를 이끌고 왕건의 군대와 대결하거나 산에 은거해서 싸웠다거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길안내까지 해줬다는 민간전설도 있다.

 

실제로 궁예 사후 청주에서 잇달아 반왕건 반란이 일어났고, 열렬한 궁예 지지자였던 명주의 김순식은 4년이 넘도록 왕건에게 항복하지 않았을 정도였던 걸로 볼때 왕건의 쿠데타는 전체적인 지지를 받은게 아닌 것이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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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를 보면 왕건(王建)의 역성혁명( 혹은 무력정변 )은 무혈로써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철원, 포천 지방의 전설들을 보면 궁예(弓裔)는 최후까지 왕건의 반란군과 대전했다고 하여 사서의 기록들을 의심케 하고 있다.

 

철원이 태봉의 수도였을 때 궁예가 왕좌를 빼앗기고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이 강가에 와서 모든 돌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고는 좀이 먹은 것으로 여겨 '나의 운명이 다했구나'라고 한탄했기 때문에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다.

 

산정호수 북쪽에 명성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은 고려 건국 때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하여 산새들이 울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궁예가 왕건과 항전했다는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 싸우다 달아났다는 패주골, 군사들이 한탄을 하며 쫓겨났다는 군탄리, 궁예가 피신했다는 명성산의 개적동굴이 있다.

 

신라 마의 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목놓아 울었고, 왕건에게 패한 궁예(혹은 그의 부하들)가 피를 토해 울며 산기슭에서 터뜨린 통곡이 산천을 울렸다는 전설 때문에 명성산은 울음산으로 불린다.

 

경기 포천군 이동면과 가평군 북면에 걸쳐 우뚝솟은 국망봉의 국망(國望)이란 산이름도 왕건의 정변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도망치던 궁예가 이 산에 올라 자신의 도읍지 철원땅을 바라보며 한숨과 장탄식을 연발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궁예와 그의 부대가 왕건군과 격전을 벌였던 야전골(野戰)이나 궁예가 은신했던 궁예왕굴, 끝내 항복하면서 항서를 전했다는 항서받골(혹은 태봉 초기,왕건이 항복했다고도 한다.)이라는 지명들도 전한다.

 

파주골 지명의 유래는 궁예가 명성산에서 왕건에게 패한 후 도망친 곳이 '패주(敗走)'로 불리다가 시대가 지나 지금은 파주골로 불리고 있다.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고개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군사들이 궁예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다고 하여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이 있다.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쫒기어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로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이 있다.

 

종합해보면 궁예는 왕건의 무력정변으로 인해 부하들과 궁궐을 탈출해 명성산에 웅거해 왕건의 군대와 싸우다 패하고 궁예는 도망치다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시해 당했다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