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封王 弓裔 (태봉왕 궁예)
弓裔(궁예)는 金氏王系(김씨왕계) 第33代(신라왕계 제48대) 景文王=膺廉(경문왕=응염)의 아들이고 모친은 헌안왕(憲安王)의 따님 雪花公主(설화공주)이다.
▲ 태봉국을 세운 궁예는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던 역사가들 때문에 ‘폭군’이라는 고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다는 학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철원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는 태봉제 행사 중 궁예왕 행차 장면.
그는 五月五日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에 흰 빛이 지붕위로 무지개처럼 뻗어 하늘에 닿아 있었다.
日官이 이를 왕에게 고하기를 이 아이는 重午日에 낳앗고 나면서 이(齒)가 나온 것으로 보아 장래 국가에 불행한 일이 있을까 걱정 되오니 양육하지 않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使者에게 명령하여 그 집에 가서 처치하라 하였다.
사자가 아이를 親母에게서 빼앗아 강보에 싼채로 다락 밑으로 던져버렸느데 그 때에 乳母가 다락 밑에 숨어있다가 아이를 얼른받아 들었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이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되었다.
유모는 궁예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 온갖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를 양육하였는데 나이 十여세가 되도록 장난이 심 하여 이를 그치지 아니하므로 유모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낳자마자 나라에서 버림을 받았으므로 내 이를 차마 볼수 없어서 남이 몰래 도망하여 너를 길러왔다.
그런데 너는 그런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미친사람처럼 장난이 심하니 이는 불행한 일이며 만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 당장 너와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할 것이냐?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면서 말하기를 만약 그러하오면 제가 어디로든지 가서 어머니의 근심이 되지 아니하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世達寺=高麗의 興敎寺에 가서 머리 깎고 중이되어 스스로 善宗이라 하였는데 그는 자라면서 不法의 僧律(승율)에 구애됨이 없이 뚜렸한 담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날 山神에게 정성을 드리려 가는데 까마기 들이 무슨 물건을 물어다 그가 가지고 있는 바리대 속에 떨어뜨리고 가는지라 이를 주어보니 王이라 하는 글자의 籤書(첨서)가 있으므로 곧 이를 감추어 말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왕이 될 것을 자부하고 있었다.
이 때에 신라는 날로 쇠약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은 분산하여 다른 나라의 지방으로 이사를 하는가 하면 원근 각처에서 도적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몰려다녔다.
이를 본 선종 궁예는 이러한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있다고 믿었다. 진성여왕 五年(八九一辛亥)에 죽주(竹州 = 安城郡)의 괴수(鬼首) 箕萱(기훤)을 찾아가서 궁예가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훤은 본래 성질이 오만하여 그를 예로서 대접하지 아니하므로 궁예가 울분한 나머지 몰래 기훤의 부하인 元會 申煊(신훤)등과 결탁하여 그들과 다정한 벗이 되었다. 기훤이 사람됨이 거칠어 弓裔를 無禮하게 對하자 기훤을 버리고 다시 양길의 幕下(막하)로 들어갔다.
○ 진성여왕 六년 (八九二壬子)에 북원(北原=原城郡)의 賊鬼 梁吉에게로 가니 양길은 궁예를 잘 대우하여 모든 政事를 위임하고 군사를 나누어 동쪽지방을 격략하게 하였다. 이에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雉岳山 石南寺에서 자고 그 다음날 떠나 酒泉 내성(奈城=寧越郡) 울오(鬱烏) 御珍縣등을 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 진성여왕 八년(八九四甲寅)에 궁예가 명주(溟洲=江陵)로 침입하였는데 그 무리 三五00명을 十四대로 나누고 金大黔(김대검) 毛昕(모흔) 長貴平 張一등을 舍上으로 하여 군사들과 줄거움과 괴로움을 탈취함에는 公을 위하고 私를 버리고므로 이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 은 그를 공격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뒤이어 궁예는 군사를 거느리고 猪足城(저족성=麟蹄郡) 生川城(생천성=華川郡) 부약성(夫若城=春川) 금성(金城=金華郡) 철원성(鐵原城=鐵郡)등을 격파하니 군세가 심히 강성하였다. 궁예는 스스로 開國하여 임금이라 칭하고 內外官職을 설정하였다. 그런데 이 때에 王建이 송악군(松岳郡=開城)으로부터 궁예에게 來降하여 마침내 鐵圓太守 벼슬을 받았다.
○ 진성여왕 十년(八九六丙辰)에 僧嶺縣 臨江縣등의 二縣을 攻取하였다.
궁예오만하고 광폭한 애꾸눈 통치자 弓裔
겁나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너의들의 역한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
후삼국의 혼란 統一新羅 末期의 豪族(호족)이나 地方勢力들은 各 地方을 支配하여 中央政府에 對抗할 만한 獨自的인 勢力을 갖추기도 했는데, 그 代表的 人物들이 豪族出身의 甄萱(견훤)과 弓裔(궁예= ?∼918)였다.
弓裔는 복원의 도적인 양길의 部下로 활약하다가 松嶽(송악=개성)을 中心으로 나라를 세우고, 國號를 後高句麗라 하였다.(901년). 後高句麗는 후에 國號를 泰封으로 고치고 都邑을 鐵原으로 옮겼다.
弓裔가 다스린땅은 지금의 江原道, 京畿道, 黃海道 大部分과 平安道, 忠淸道의 一部로서 대체로 高句麗 옛 땅의 南部에 해당된다.
애꾸눈 궁예의 지략
애꾸눈 弓裔의 出生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異說이 있어 確實한 섯을 알 수 없다. 一說에는 憲安王의 後宮 소생이라고 하고, 혹은 景文王의 後宮 소생이라고도 한다.
그는 나이 10여 세 때부터 僧侶生活을 하기 始作했는데, 당시의 新羅 形便은 國政이 紊亂(문란)하여 各地方에는 盜賊(도적)이 일어나 王命이 지켜지지 않았고, 오직 都城 근처만이 나라의 命脈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우면 道德과 법령보다는 힘과 간사한 꾀가 앞서게 마련이다. 弓裔도 男子로 태어나 중 노릇만 하다가 一生을 마칠 그런 위인은 아니었다.
어느 날 까마귀가 弓裔앞에 王자가 새겨진 부적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소년 弓裔는 이것을 보고 자신이 장차 왕이 될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품게 되었다.
靑年으로 成長한 弓裔는 自己도 天下를 한번 號令해 보고 싶은 衝動을 갖게 되었다. 그는 僧侶生活을 청산하고 도적의 괴수 기훤의 部下로 들어갔으나 기훤이 사람됨이 거칠어 弓裔를 無禮하게 對하자 기훤을 버리고 다시 양길의 幕下(막하)로 들어갔다.
兩吉은 弓裔를 信任하여 軍隊의 一部까지 내주는 등 隆崇(융숭)한 대접을 하였다.
弓裔는 勇猛할 뿐 이니라 지략도 있었다.
그는 빼앗은 物件을 골고루 나누어 주어 信望을 얻었고. 곧 여러 사람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將軍이 되었다.
이후 弓裔는 軍卒의 數가 점점 늘어나 勝戰을 거듭하면서 江原道 여러 고을을 차지하였고, 진성여왕 9년경에는 松嶽 出身 王建도 弓裔의 部下로서 新羅의 북변 地方을 휩쓸기도 하였다.
북원의 양길은 自己 部下가 크게 成功한 것을 시기했으며, 弓裔 또한 옛날 弓裔가 아니었다. 形勢가 兩立할 수 없게 되자 북원의 양길이 먼저 弓裔의 땅을 侵犯하니, 弓裔가 反擊을 가하여 양길의 占領地를 모두 合兵하는 데 成功했다.
○ 효공왕 5년에 궁예는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송악을 首都로 나라를 세우고 옛날 高句麗를 回復할 目的할 나라 이름을 後高句麗라 하였다.
○ 효공왕 8年에는 勢力이 점점 늘어나 國號를 동방을 全部 무마하여 平安히 한다는 뜻으로 摩震(마진)이라 하였다. 안으로 政事를 討議(토의)하는 廣評省(광평성)을 두어 내정을 통괄하였으며, 各 地方에 官廳을 두웠으니 摩震(마진)의 基礎(기초)가 튼튼해져 갔다.
○ 天佑(천우) 2年에는 宮闕(궁궐)과 가종 樓臺(누대)등을 豪華(호화)롭게 꾸미고, 宮闕의 新築(신축)을 記念하는 뜻에서 연호를 聖冊이라 하였다. 또한 밖으로 大洞江까지 쳐 올라가 平壤까지 占領함으로써 新羅의 北部領土를 거위 다 차지하게 되었으니, 新羅보다 국력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에 弓裔는 新羅를 아주 없앨 計劃을 세웠으며 신라에서 도망온 장군이나 文人 등을 自己마음에 거슬리면 모두 죽여 버렸다. 그의 잔악한 本性이 나타나기 시작한것이다.
궁예 태봉과 미륵불
乾化元年에는 國號를 泰封이고 고치고, 연호를 水德萬歲라 하였다. 이 해에 나주를 쳐 甄萱(견훤)의 海外 交通을 遮斷(차단)시키는 데 成功하여 後三國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지녀온 애꾸눈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더욱 深解만 갔다.
이러한 心情을 달래기 爲하여 그는 남은 餘生을 佛敎에 意志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미룩이라 칭한 왕은 머리에 金冠을 쓰고 方袍를 걸치고 다녔으며 받아들은 淸光菩薩(청광보살), 막내아들을 神光菩薩(신광보살)이라 稱하여 참다운 佛弟子 가족처럼 만들었다.
王은 親히 佛經 20券을 만들었는데 當時의 승 釋聰(석총)이 그것을 보고 이것은 佛經이 아니라 邪說怪談(사설괴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하자, 노하여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性質이 더욱 暴惡해졌으며 남을 믿지 못하고 시기하는 마음만 늘어갔다. 어느 날 王后는 왕의 이같은 行動은 念慮하여 간곡한 말로 간했으나 이것이 亦是(역시) 허사였다.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되어, 너는 다른 사람과 姦通(간통)하지 않았느냐?
왕의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罔測(망측)하여이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까? 婦人은 부드러운 말로 대하였다.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하느냐. 나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다. 너희들의 악한 마음을 궤뚫고 있으니 이실직고하였다.
쫓겨난 거인
그래도 왕후는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왕의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努力하였으나. 왕은 暴惡한 本性이 暴發하여 暴言과 함께 손에 쥔 鐵槍(철창)으로 내리쳤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은 왕은 王后를 단근질로 몸을 지지는 등 미치광이처럼 날뛰었다.
보다 못한 아들 淸光菩薩(청광보살)과 神光菩薩(신광보살)이 만류하자.
네놈의 새끼들도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다. 라고 때려 죽이고 말았다.
이후부터 왕의 行動은 걷잡을 수 없이 亂暴(난폭), 橫暴(횡포)해지기만 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루자 918년 신숭겸·배현경·홍유·복지겸 등 君臣들은 德望이 높은 王建을 왕으로 추대하니, 왕건이 1萬 軍士를 거느리고 王宮을 包圍(포위)하기에 이르렀다.
弓裔는 이미 나라가 亡骸(망해)가는 것을 알고 몰래 도망하여 부양(斧壤, 지금의 평강)까지 가다가, 도중에서 민중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로써 20여 年間의 泰封國의 영화는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태봉왕 궁예
○ 효공왕 원년(八九七丁巳)에 人物縣(인물현=准陽郡)의 항복을 받았다.
이에 궁예는 송악군(개성)은 漢北의 名郡으로 山水가 특히 뛰어난 다하고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孔巖城(金浦郡) 黔浦城(검포성=김포부근) 穴口城(강화군) 등을 격파하였다.
이 때에 양길은 아직도 北原(원주)에 있으면서 國原(충주)등 30 여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궁예가 그 領土를 넓이고 인구가 많다 하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그래서 양길이 30여 성의 군병을 동원하여 이를 습격하였으나 궁예는 몰래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먼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 효공왕 3년(899己未) 2월에 궁예가 송악 성을 수리하고 王建을 精騎大監으로 삼아 楊洲와 見州(楊洲郡)를 정벌하였다. 11월에 처음으로 八關會를 개최하였다.
○ 효공왕 4년(900庚申)에 또 왕건에게 명하여 廣州城 忠州城 唐城(화성군) 靑州城(아산군) 槐壤城(槐山郡) 등을 평정하니 공로로 왕건에게 阿飡(아찬=六級) 벼슬을 주었다.
○ 효공왕 5년(901년辛酉)에 궁예는 스스로 王이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난 날에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으므로 옛날의 平壤(舊都)은 사냥터가 되어 초목이 우거지게 되었으니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 하였는데 궁예 왕은 날 때부터 왕실에서 버림을 받은 원한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궁예 왕이 일찍 남쪽으로 순행하여 興州(영주군내)의 浮石寺에 이르렀을 때에 新羅王像의 壁畵가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이를 쳐서 없앴는데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있다.
○ 효공왕 8년(904甲子)에 궁예 왕이 國號를 세워 摩震이라 하고 年號를 武泰라 하였다.
이에 비로소 廣平省을 설치하고 官員을 갖추는데 匡治奈(광치내) 除事 外書 등을 두고 또 兵部 大龍部 壽春部 奉賓部 義刑臺 납화부(納貨部) 調位部 內奉省 禁書省 南廂壇 水壇 元鳳省 飛龍省 物藏省등을 설치하고 史臺 植貨府 障善部 珠淘省등을 설치하고 또 正匡 元輔 大相 軍尹 中尹등의 品職을 설치하고 그 해 7월에 靑州(牙山郡)사람 1,000호를 옮기고 鐵原城으로 들어가 서울을 정하고 尙州등 30여 州와 縣을 공취하니 公州將軍 弘奇가 그 부하와 함께 항복해 오다.
○ 효공왕 9년(905乙丑)에 궁예 왕이 송악으로부터 새 서울(新京) 鐵原으로 들어가 관걸누대(觀闕樓臺)를 수리하여 사치를 다하고 年號를 武泰로 했다가 聖冊 元年으로 하고 패서(浿西=平壤)를 13鎭으로 분활 하였는데 平壤城主 黔用將軍(검용장군)이 投降하자 甑山城(증산성=龍岡郡)의 赤衣 黃衣 明貴 賊 등이 항복해 오다.
이렇게 되자 궁예 왕은 强盛함을 스스로 믿고 新羅를合倂하려 하는 뜻을 두고 나라 사람들로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하고 무릇 신라로부터 투항하는 사람을 모조리 처형했다.
○ 효공왕 15년(911년辛未)에 궁예 왕이 연호를 고쳐 水德萬歲 元年으로 하고 국호를 泰封으로 하였으며 왕건을 보내어 錦城(錦山郡) 등을 정벌하여 羅州로 하였는데 그 공으로 왕건을 장군으로 삼았다. 이때에 궁예 왕이 스스로 彌勒佛이라 칭하고 머리에 金금채)를 쓰고 몸에는 方袍를 입고 맏아들을 靑光菩薩(청광보살)이라 하였으며 외출할 때에는 항상 白馬를 타고 비단으로 말 머리와 꼬리를 장식하였으며 童男童女로 幡蓋香花(번개향화)를 받들어 그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으며 또 比丘僧 200여명에게 명령하여 범패염불(梵唄念佛)을 하며 그 뒤에 따르게 하고 또스스로 經書 20여권을 지어냈는데 그 말이 요망하여 僧(중) 석총(釋聽)이 말하기를 이는 사설괴담으로 가히 가르칠 것이 못되다 하였다.
궁예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철주(鐵椎)로 그를 打殺하였다.
○ 신덕왕 2년(913癸酉)에 궁예왕이 왕건을 파진찬시중(波珍찬侍中)으로 삼고 그 다음해에 연호 수덕만세(年號 水德萬歲)를 고쳐 정개원년(政開元年)으로 하고 왕건을 배강장군(百舡將軍)으로 삼았다.
○ 신덕왕4년(915乙亥)에 궁예왕이 자기 부인 康氏가 왕의 모든 政事에 非法性이 많음을 말하자 궁예왕이 이를 싫어하여 말하기를 너는 다른사람과 어찌하여 간음(奸淫)을 하였느냐? 하였다 강씨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어찌 그런일이 있아오리까? 하니 궁예왕이 또 말하기를 나는 신통법(神通法)으로 이를 아는 것이라 하고 쇠를 달궈 음부(淫部)를 찌져죽이고 그가 낳은 두 왕자까지 죽였다.
그뒤부터 궁예왕은 모든것을 의심하고 성질이 급해져 군신(群臣)과 백성에이르기까지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는 일이 많았으며 이때에 부양(斧壤=平康郡)과 철원(鐵圓) 사람들은 그 혹독한 폭정을 이겨낼 수 없었다.
○ 경명왕2년(918戊寅)에 이보다 먼저 왕창근(王昌瑾)이라 하는 商人이 당나라로부터 와서 鐵圓市慶에 살았는데 시장에서 어떠한 사람을 보니 용모가 기위(奇偉)하고 백발이 된 사람이 낡은 의관을 하고 왼손에 자완을 들고 오른손에 古鐵을 들고 왕창근에게 말하기를 나의 이 거울을 사겠는가? 하므로 왕창근이 곧 이것을 쌀과 바꿔는데 그사람이 쌀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이디론지 사라졌다.
이에 왕창근이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벽 위에 걸어 놓았는데 햇빛이 거울에 비치니 그 거울 면에 가느다란 글씨가 있었으므로 그 글을 대략 읽어 본즉 古詩와 같았다.
그 글에 말하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리시니(上帝降子於辰馬) 먼저는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으리라 선조계후박압(先操鷄後搏鴨)사년사이에 이룡이 나타나(어사년중이룡견(於巳年中二龍見) 하나는 몸을 푸는 나무속에 감추고 일칙장신청목중(一則藏身靑木中)하나는 모양을 검은금이 동쪽에 나타냈도다 일칙현형흑금동(一則顯形黑金東)하였다.
왕창근이 처음에는 글의 뜻을 알지 못하였으나 이를 잘 읽어보고서는 비상한 것이라 생각하고 궁예왕에게 이를 알리니 궁예왕이 곧 有司에게 명하여 왕찬근과 함께 그 거울 주인을 찾아 오게 하였으나 그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발삼사(勃立風寺) 佛堂의 진성삭상(鎭星朔象)이 거울을 판 사람과 같으므로 궁예왕이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탄식하다가 글 잘하는 송함홍(宋含弘) 白卓 許原 등에게 명령하여 그 뜻을 해석해 올리라 하였다.
이에 송함홍 등이 그 글의 뜻을 풀어 본다음 서로 말하기를 上帝가 아들을 馬辰에 내렸다 하는 것은 辰韓 馬韓을 말하는 것이요.
二龍이 나타나 하나는 푸른 나무속에 감추고 하나는 검은 금속에 나타났다 하는것은 푸른 나무는 곧 소나무(松)로 송악군(松岳郡) 사람으로 龍자로 이름을 한사람의 자손을 뜻하니 지금 파진찬시중왕건(波珍飡侍中王建)을 말하고 금은 곧 쇠니 서울(鐵圓)을 말하는 것이니 지금 주상(主上=弓裔王)이 처음 여기에서 일어나고 여기에서 멸망한다.
하는 징조요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 하는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鷄林)을 얻고 뒤에 압록(鴨綠)을 취하여 거둔다하는 뜻이라 해석하였다.
그런데 송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주상(主上=弓裔王)의 포악 난잡함이 이와 같으므로 우리들이 만약 이를 사실대로 말한다 하면 틀림없이 우리들을 죽음을 당하고 파진찬 시중(波珍飡 侍中 : 王建)도 또한 반드시 살해 당할 것이다 하여 마침내 좋은 말로 적당하게 꾸며 이를 알렸는데 궁예왕의 포악 방자함은 날로 더하여 관직자(官職者)들이 크게 두려워 하여 어찌 할바를 몰랐다.
그해 6월에 장군 弘述, 白玉, 三能山, 卜沙貴등 四名이 비밀히 모의하여 밤에 왕건의 집을 방문하고 지금 주상(主上 : 弓裔王)은 음난하여 그 妻子를 살륙하고 신료(臣僚)들을 죽이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살수없게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어두운 임금은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天下의 大義이니 청하건데 公은 湯과 武의 일을 행암이 어떠하오?
하니 왕건이 낯빛을 붉혀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忠節을 스스로 믿고있거늘 지금 주상(弓裔王)이 포악하다 할지라도 감히 두 마음을 먹으리요
신하가 임금을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그런 不忠의 일을 어떻게 하리요 하였다. 이말을 들은 제장(諸將)이 말하기를 때는 다시 오지 아니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잃기가 쉬운 것이라 어찌 하늘이 일을 받지 아니하리요?
이는 도리어 그 재화를 받게 되는 법이라 하고 지금 국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와 백성들은 모두 주상(弓裔王)을 원수 같이 보고오직 德望이 있는 공외에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하며 또한 왕창근이 가지고 있는 경문(鏡文)에도 그와 같거늘 어찌 가만히 업드려 악한(惡漢)의 손에 잡히는 바 됨이 옳으리요 하였다.
이때에 부인 유씨(柳氏)가 제장(諸將)의 말을 듣고 왕건에게 말하기를 仁義로 아님을 주장함은 부당한 처사입니다. 지금 衆議를 듣자오니 첩도 분을 참지 못하겠아온데 항차 대장부로서 어찌 참으리요?
하고 지금 민심이 이렇게 변한 것은 하늘이 명하는 바이니 하늘의 명령을 따를 뿐인 것입니다. 하면서 손수 갑옷을 들어다 왕건에게 입히고 모든 장수들이 이를 부축하고 받드니 왕건이 결심하고 문을 나섰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앞을 서서 부르짖기를 王公의 義旗를 들고 일어섰다 하니 이 때에 앞 뒤로부터 따라 나서는 사람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먼저 宮城에 이르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루며 왕건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10,000여명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궁예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변복을 하고 궁중을 빠져 나와 山林속으로 도망쳤으나 얼마 아니하여 부양(斧壤 : 平康郡)의 백성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궁예왕은 진성여왕 五年(891辛亥)부터 일어나서 경명왕2년(918己卯)에 이르기까지 무릇 28년동안 나라를 유지하다가 멸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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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 궁예(泰封 弓裔) : 후고구려의 왕 재위 : 901년 ~ 918년 종교 : 불교 출생일 : 869년 사망일 : 918년 7월(49세) 왕후 : 왕후 강씨(王后 康氏) 부왕 : 신라 헌안왕 또는 신라 경문왕 모후 : 왕후 장씨(王后 張氏)또는 왕후 김씨(王后 金氏) 다음 왕 :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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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 869년? 음력 5월 5일 ~ 918년 7월 24일, 재위: 901년 ~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는 신라의 왕가 서족(王家 庶族) 출신이며 태봉(후고구려, 마진)의 군주이다. 그는 신라 헌안왕 또는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도 존재 한다.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金)씨, 본관은 경주(慶州),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善宗)이고, 별명은 미륵(彌勒), 일목대왕(一目大王)이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었으므로 시호는 없다.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에 의해 피신되어 죽음을 모면하였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였다가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호족이 되었다. 892년 스스로 왕을 칭하고 900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 등으로 변경하였으나 호족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을 추대한 부장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생애 초반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는 신라 제47대 국왕 헌안왕(혹은 경문왕)의 빈어(嬪御) 소생, 즉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음력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부터 무지개를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있었고 날 때부터 이가 있었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했는데, 왕명으로 궁예를 죽이러 온 중사(中使)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에서 던졌다. 누대 아래로 떨어진 궁예를 유모가 밑에서 받아서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잘못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되었다. 유모는 궁예와 함께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궁예가 10여 세가 되었을 무렵, 유모는 주위와 말썽을 일으키고만 있는 궁예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리며, "너는 왕자로서 태어났고, 살해당하는 것이 안되게 생각되어 그래서 너를 목숨을 걸고 길렀는데, 너는 매일 소동을 일으켜 나에게 걱정만 끼치고 있다.
너의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는 살해당할 것이니 슬프다." 라고 했다. 궁예는 울면서 "그러면 내가 집을 나가서 더 이상 어머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와서, 세달사(世達寺)에 몸을 기탁하여 스스로 성명을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궁예의 승려 시절에 대해 《삼국사기》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태조세가에는 궁예 정권의 핵심인물로서 궁예가 축출되고 왕건이 즉위한 지 7일 만에 내군장군(內軍將軍) 은부와 함께 주벌된 소판 종간이라는 인물에 대해 "젊어서 승려가 되었던 자"라고 적고 있어, 일찍부터 궁예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종간이 궁예의 승려 시절, 즉 세달사에서 궁예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달사에서 승려로 지내던 궁예가 어느 날 재(齋)에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가 그의 바리때에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앗대를 떨어뜨리고 간 것을 보게 되었고 궁예는 이때부터 장차 자신이 크게 떨쳐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출사
진성여왕 5년(891년)부터 신라의 각지에서는 거듭되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 징수를 견디다 못해 도망쳐 도적이 된 자들의 봉기가 잇따랐는데, 궁예도 절을 떠나 서 죽주(竹州)의 적수(賊帥) 기훤(箕萱)을 찾아가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기훤이 궁예에게 오만하고 무례한 자세로 대하자 이에 반발해, 다시 죽주를 떠나 북원(北原)의 적수 양길(梁吉)의 휘하에 들어갔다.
《삼국사기》는 이때 기훤의 휘하에 있던 원회(元會), 신훤(申煊)이 궁예를 따라 함께 북원으로 왔다고 적고 있다. 기훤과는 달리 양길은 궁예를 신임하여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며 북원 동쪽 땅의 경략을 맡겼고, 궁예 자신은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에 머무르며 진성여왕 6년(892년)까지 주천(酒泉) · 내성(奈城) · 어진 등 명주 관내의 10여 군현(《삼국사기》 신라본기. 같은 책 궁예전에는 주천과 내성, 울오, 어진의 4개 군만이 기술되어 있으며 시점도 본기와 열전에 차이가 있다)을 공략하여 모두 항복시켰으며, 진성여왕 8년(894년)에는 드디어 명주를 점령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전은 이때 궁예가 거느린 무리가 3,500인(신라본기에는 600인)에 이르렀으며, 궁예는 이를 14대(隊)로 나누어 편재하고 김대(金大) · 검모(黔毛) · 흔장(昕長) · 귀평(貴平) · 장일(張一) 등을 뽑아 사상(舍上), 즉 부장으로서 임명하여 지휘하였다고 적었다.
나아가 궁예는 명주에 들어간 뒤부터 장군(將軍)을 자칭하였는데, 하대 신라에서 반란의 지도자나 호족 세력이 장군을 자칭한 것은 궁예가 최초였다.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신라에 등을 돌린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세상이 끝나는 날 현신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미륵불이라 자처하였고, 백성들은 그런 궁예를 자신들을 구원해줄 대상으로 삼았다.[
명주를 장악한 궁예는 진성여왕 9년(895년), 동해를 끼고 북상하여 영서 지방으로 넘어와 저족, 성주(화천), 부약(금화), 금성(금화군),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하여 세력 기반을 다졌고, 지금의 강원도 전 지역을 장악한 궁예는 이듬해 철원을 자신의 도읍으로 삼았다.
즉위와 전쟁
후고구려 선포 궁예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浿西) 즉 예성강 이북 지역의 호족들이 차례로 궁예에게 자진 투항하였는데, 송악(松嶽)의 해상 호족이었던 왕륭 · 왕건 부자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궁예에게 투항해 오자 궁예는 왕륭의 아들인 왕건을 철원군태수로 임명하였다.
왕륭의 제의를 받아들인 궁예는 효공왕 2년(898년)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고, 왕건을 시켜 양주와 청주(淸州)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겨울 11월에 궁예는 처음으로 팔관회를 열었다.
효공왕 3년(899년) 청주 지방을 점령하여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은 궁예는 송악의 성을 중수한 뒤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3월에 왕건을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공략하게 하였다. 궁예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북원의 양길은 자신의 관할 및 한산주 지역 호족들을 끌어들여 궁예를 공격하지만 거꾸로 비뇌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신도 몰락하고 말았다.
비뇌성에서 양길을 패배시킨 뒤인 효공왕 4년(900년) 왕건에게 명하여 광주·국원경(충주)·청주·당성(唐城)·괴양(槐壤) 일대를 정벌하여 광주를 우선 평정하고, 국원경과 청주·괴양의 적수 청길(淸吉)·신훤(莘萱) 등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효공왕 5년(901년) 7월에 스스로 후고려왕(후고구려왕)을 칭하였다(《삼국유사》 연표에는 고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당병을 청해 고구려를 멸망시켜서 평양의 옛 도읍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그 원수를 내가 갚겠다"고 선언한 궁예의 발언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분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하였고, 궁예가 부석사에서 신라왕의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칼로 쳤다는 일화도 함께 전하고 있다.
효공왕 6년(902년)부터 왕건을 서해안에 파견해 당시 후백제의 해상으로의 대중 교역로를 차단하게 했고, 효공왕 7년(903년) 3월, 수군으로 후백제의 후방에 위치한 중요한 해상 거점이었던 금성(錦城)을 점령하면서 영토를 넓혔다. 나아가 왕건은 금성 공략과 함께 양주(良州)의 호족이었던 김인훈(金忍訓)을 구하여 돌아온 공으로 궁예로부터 알찬의 관등을 받았다.
마진[편집]신라 효공왕 7년(904년) 7월에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쳤으며 연호를 정하여 무태(武泰)라 하였다. 또한 공주(公州) 지역의 호족으로 장군을 칭하고 있던 홍기가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이보다 앞선 903년부터 궁예는 수도를 이미 송악에서 자신의 첫 거점이었던 철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철원과 부양 등지를 친히 돌면서 산세를 살피기도 하고, 청주의 민호 1천여 호를 철원으로 옮겼으며, 이듬해인 무태 2년(905년)에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한 뒤에 세운 궁터는 구 철원 북쪽 30리,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의 지명은 풍천원(豊天原)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철원의 궁궐과 누대는 크고 화려하게 세워졌으며, 연호도 무태에서 성책(聖冊)으로 바뀌었다.
또한 평양성주 장군 검용(黔用)이 항복하였고, 증성(甑城)의 적의(赤衣) · 황의(黃衣)의 도적 명귀(明貴) 등이 복속해 왔는데, 《삼국사기》는 이때부터 궁예가 강성해졌다며 자만하고는 신라를 병탄하고자 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게 하면서 신라에서부터 귀순해 오는 자는 모두 죽였다고 적고 있다.
성책 2년(906년), 견훤의 군대를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맞아 크게 격파했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은 궁예 성책 5년(909년) 다시 나주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지금의 영산강 하구에서 영광 서쪽 해안인 염해현까지 진출하였다.
6월에 왕건의 수군이 광주(光州)의 진도(珍島)를 쳐서 차지하고 고이도(皐夷島)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목포에서 덕진포까지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패퇴시켰으며, 압해현의 호족 능창이 왕건의 수군에 붙잡혀 궁예에게 보내졌다.
성책 6년(910년) 후백제의 견훤이 다시 3천 군사를 내어 나주를 포위 공격하자, 궁예는 포위 공격 10일 만에 수군을 내어 견훤을 쳐서 몰아내고 나주 지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었다. 이 무렵 궁예의 판도는 남으로는 공주와 상주, 동북으로는 증성(甑城), 서북으로는 지금의 황해도·평안도까지 이르러 국세를 크게 떨쳤다.
태봉
911년(효공왕 14년) :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개칭하고 궁궐을 증축했다. 태봉(泰封)의 뜻은 주역에서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뜻이라 하고, 봉(封)은 봉토, 곧 땅이다. 결국 궁예는 철원을 기반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곧 미륵세상인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삼국사기》는 궁예가 태봉을 선포한 때부터 스스로를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행차할 때면 금관을 머리에 쓰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을 얹은 말에, 행차 앞뒤로 향로를 받쳐 든 남녀 어린아이 수십 명을 세워 걷게 했으며, 자신의 두 아들도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 부르게 했다. 또한 직접 경전을 짓기도 했는데, 당시 석총(釋總)이라는 승려가 이 불경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서 입에 담기도 어렵다"고 혹평했고,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패 죽이고 말았다.
수덕만세 3년(913년) 왕건을 파진찬 겸 문하시중으로 임명하여 수도로 불러들인지 1년만인 정개 원년(914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해 오자 "수군의 장수가 지위가 미천해서 위엄을 널리 보일 수 없다."며 다시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백선장군으로 삼아 나주로 내려 보냈다.
이는 왕건 자신 또한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지위가 시중에 이르면서 주변에는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생겨났고 궁예가 언젠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 생각해 위기의식을 느낀 왕건 스스로가 궁예에게 자청하여 변방으로 나갈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궁예는 그로 하여금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고, 왕건이 다시 수군을 맡게 되자 한때 나주 지역을 압박해 오던 후백제 군사들은 다시 위축되었다. 왕건이 나주 지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궁예는 "나의 여러 장수들 중에 누가 이 사람과 비길만 하겠는가?"며 왕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한편으로는 왕건의 세력과 입지가 강화되자 점차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정개 2년(915년), 그의 포악함을 보다 못한 왕후 강(康)씨가 자신에게 간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쇠꼬챙이를 가져다 왕후의 음부를 지져 죽이고, 자신의 두 아들마저 죽였다. 소위 '관심법'이라 칭하며 사람의 마음을 읽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고 스스로 떠벌이곤 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가혹한 공포정치를 행했다.
정변과 죽음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을묘일), 궁예의 숙청에 반감과 위기의식을 느낀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배현경(裵玄慶) 등이 일부 호족들과 제휴하여 왕건을 추대할 계획을 세우고, 한밤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궐로 쳐들어갔다. 궁예는 철원을 탈출하여 달아나다가 죽었다.
《삼국사기》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다 먹다가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으며,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연천군 청산면 장탄리 자살바위에서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
궁예가 쫓겨나고 왕건이 즉위했지만, 한동안 왕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건재하여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다.
마군장군(馬軍將軍) 환선길은 왕건 즉위 직후 병사와 결탁하여 거병하였으나 복지겸의 밀고로 실패했고, 마군대장군(馬軍大將軍)으로써 웅주(熊州)를 쳐서 차지하고 주둔하던 이흔암은 천수 원년(918년) 6월 왕건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고 거병을 준비하였으나 실패하고 후백제에 투항하려 하였으나 한찬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이었던 염장(閻萇) 등이 웅주를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고, 이흔암 일가가 처형되고 2개월 뒤 공주는 운주(運州) 등 10여 주현과 함께 후백제에 귀부해 버렸다.
9월에는 순군리였던 임춘길(林春吉)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하였다. 대부분 공주, 또는 청주 지역 출신 호족들이었다.
명주의 성주 김순식도 왕건이 즉위한 뒤로도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아, 왕건이 천수 4년(922년) 7월에 김순식의 아버지로 승려로서 출가해 있던 허월(許越)을 보내 타일렀을 때에도 장자 수원(守元)만 보내고 자신은 오지 않았다. 천수 9년(927년) 8월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장명(長命)만을 보내어 숙위하게 했을 뿐 순식 자신은 오지 않다가, 이듬해 1월에야 친히 왕건을 찾아옴으로서 완전히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전설
《삼국사기》 및 《고려사》는 궁예를 몰아낸 세력에 의해 편찬된 텍스트, 또는 그 텍스트를 저본으로 편찬된 것이다. 특히 궁예의 최후에 대해서, 미복차림으로 도망치던 중에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민간의 전승에서는 궁예가 오히려 왕건을 상대로 항전을 벌이다 죽었다고 하는 전승을 전하고 있다.
유명한 것이 포천 산정호수 인근의 명성산 전설로, 왕건에게 쫓긴 궁예의 말년을 슬퍼해서 산새들이 울었다고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명성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서 이름 붙었다는 개적동굴, 궁예가 왕건의 군사가 쫓아오는 것을 살폈다는 망무봉의 지명 유래담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철원의 보개산성, 성동리성에는 궁예가 왕건에 맞서 항전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패주골은 궁예가 싸움에 패한 고을이라 붙은 이름이고, 궁예와 그의 군사들이 한탄하며 도망쳐서 군탄리가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평가
반신라 정책과 폭정[편집]《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록된 궁예의 폭정에 대해, 궁예 자신의 개인적인 결함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기존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전제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하는 기록부터, 기존의 학설은 "신라 왕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원한을 품고" 행한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처음 일어날 당시의 지지 기반과 왕건과의 차이점, 나아가 신라로부터의 귀순자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어느 정도 궁예의 행동에도 설득력이 부여되고 있다.
우선 궁예가 처음 거병할 당시의 지지기반은 신라 말의 초적으로, 이들 초적들은 극심한 천재지변에 신라 왕실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해 무장화하여 도적으로까지 불리게 된 이들로서 신라 조정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자들이었다. 정통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이 신라 귀순자들을 너그럽게 다 받아주었던 것과는 달리, 초적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룬 궁예로서는 신라 조정이나 그로부터 귀순해온 세력들에 대해서 마냥 우호적일 수만은 없었다.
개인적인 신격화
궁예가 지은 경전을 보고 "하나같이 요사스러운 말로 교훈거리가 될 수 없다."고 혹평하여 궁예에게 살해된 석총이라는 승려와 관련해 《삼국유사》에는 《왕대종족기》를 인용해, "진표의 제자인 석충(釋忠)이 간자 108개를 태조에게 바쳤다."고 적고 있는데, 《삼국사기》의 석총과 《왕대종족기》의 석충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궁예가 지향했던 불교와 석총의 불교가 같은 법상종 계열이면서도 궁예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중심이었던 데 반해서 석총은 미륵보살, 지장보살 중심이었던 차이점이 지적되어, 양자간에 알력은 일찍부터 있었으며 적어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울컥해서 죽이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건과의 관계[편집]《삼국사기》에는 궁예와 왕건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 가지가 소개되어 있다. 하루는 궁예가 왕건을 대궐 안으로 급히 불러들였다. 마침 처벌된 자들로부터 몰수한 물품들을 점검하고 있던 궁예는 왕건을 보자 성난 표정으로 "경이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고, 왕건은 태연하게 웃으면서 "어찌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궁예가 다그치며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뚧어볼 수 있다. 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꿰뚧어보리라." 하고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이 때 최응이 옆에 있다가 가만히 붓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스스로 자복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겁니다."라고 중얼거리고 지나갔고, 왕건은 곧 "사실은 제가 모반을 계획하였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경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며 왕건에게 주연까지 베풀어 주고, 금은으로 장식한 말안장과 굴레와 금 한 덩이를 왕건에게 특별히 내려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흔히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기지를 보여주기 위한 기록으로 해석된다.
처자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청광보살과 신광보살이라 불린 아들은 강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철원 궁씨가 궁예의 아들이라는 신광의 후손임을 자처했으며, 순천 김씨나 광산 이씨도 궁예의 후손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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