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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태봉국 (궁예)

궁예의 왕궁 태봉국도성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6) 태봉국도성()

 

입력 : 2007-06-22 16:12:27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요?”

 

강원 철원 홍원리 필승전망대. 의외였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게다가 이곳은 철의 삼각지대가 아닌가.

 

(북한·중국)의 생명선인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깨뜨려야 합니다.”(밴플리트)

 

한국전쟁때 밴플리트 장군이 이름 붙인 바로 그 유명한 요충지인데. 하지만 해발 220~330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금방이라도 가서 썩썩 농사를 짓고픈 충동이 일어날 만큼.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철원 남방한계선에서 바라본 태봉국도성 동벽의 흔적(원 안). 휴전선과 경인선 철로가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철원|이상훈기자>

 

태봉국도성, 백마고지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넓은 철원평야에 기댄 채 해발 395에 불과한 야트막한 고지였고 평범한 야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철의 삼각지대 가운데 철원 꼭지점의 어깨부에 해당되는 요충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야산을 빼앗기면 2억평에 달하는 철원평야는 순식간에 적의 감제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군의 병참선인 3번도로(서울~원산)를 비롯,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5210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 끝에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뀌었다. 피아간 1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고지에 쏟아진 포탄만 275000발에 이르렀다. 고지는 벌집이 되었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능선이다. 또 이어 저격능선,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

 

핵무기 가상표적

 

이곳은 한국전쟁 때 미 극동사령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여 지목한 핵무기 가상표적이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도 늘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언급한다. 비록 영국 등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뻔 했단 말인가. 비극의 현장이 될 뻔한 평강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질 무렵,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이재 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손가락을 내민다.

 

저깁니다. 저기 나무 하나 보이시죠?”

 

손에 닿을듯, 금방이라도 뛰어가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곳,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윤곽이 보이죠? 저기가 바로 태봉국도성 외성의 흔적입니다.”

 

! 태봉국도성. 풍운아 궁예가 1100년전 저기 보이는 풍천원 너른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바로 그곳이라지.

 

어마어마한 들판 아닙니까. 이곳을 한번 보면 왜 궁예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는지 깨닫게 되죠.”

 

아니 이원장의 말처럼 왜 다른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태봉국도성이 단순히 비운의 왕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만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태봉국도성은 전쟁과 분단이 갈라 놓은 비극의 상징이다. 남북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휴전선(군사분계선)이 딱 반으로 도성을 가르고 있으니 말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씩 물러난 공간 사이, 즉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팔자 센 도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뿐 이런가.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도도 도성을 갈라 놓았다.

 

휴전선으로 쪼개진 도성

 

남북으로는 끊어진 경원선이, 동서로는 휴전선이 도성을 잘라 놓은 것이다. 비운의 궁예는 죽어 1000년이 훨씬 지나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텐데도 사지가 잘리는 신세에 놓여있는 것이다.

 

천우 2(905)에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 열전 궁예조’)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난 것이다.”(고려사 태조 원년)

 

굳이 옛 사료를 들추지 않아도 태봉국도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때 지도를 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 신라 월성(1.8), 고구려 국내성(2.7)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성곽(17~18)에 견줘도 그리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단의 땅. 그저 먼발치로 도성의 흔적만을 추측할 뿐이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비무장지대의 관할권이 유엔사 정전위에 있고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정전협정상 금지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먼발치에서 본 궁예의 흔적

 

행사차 평양까지 드나들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조차 우여곡절 끝에 태봉국도성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군 수색로를 따라 먼발치에서.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흔적은 바로 기자가 서 있는 이 필승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도성의 동남벽 부분.

 

지금까지 4번 태봉국도성을 조사한 이재 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흙으로 쌓은 흔적입니다. 사다리꼴 단면으로 성벽 단면 하단폭은 6~7, 상단폭은 5정도이며, 높이는 1.2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성 자체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데다 지뢰지대인 만큼 이원장도 제한된 수색로를 따라가며 제한된 지역만을 먼발치에서 확인했을 뿐이다. 끊어진 경원선과 3번 국도의 흔적은 잘 남아 있었다. 남북이 합의한다면 경원선과 3번국도 복원사업은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궁궐터도 짐작할 수는 있었는데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안됐다.

 

일제가 만든 조선보물고적도보를 보면 태봉국도성터에서 많은 유적·유물이 확인됐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 부근에 있었던 석등은 일제 때 국보 118로 지정되었다. 또한 외성 남대문터에서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궁예는 철원 풍천원 벌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왕궁을 세웠을까. 궁예가 과연 꿈꿨던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기환|철원 풍천원에서

 

 

궁예도성의 석탑(국보 제118- 1940730일 지정)

                      현재 국보 제118호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

태봉국의 수도인 `궁예도성'(弓裔都城) 명칭은 `태봉국도성' 개칭

 

궁예도성의 위치 : 철원군 북면 홍원리

                                (안보관광시 경유하는 월정역 전망대 앞)

 

석탑이 있었던 곳 : 철원군 북면 중강리 봉상동 성 남대문 앞

설치추정년도 : 서기904(궁예가 철원으로 천도시)

규모 : 높이 280cm 재료 : 화강암

석등 : 국보제118(1940730일부)

         현재 국보 제118호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석등은 궁예가 904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풍천원, 홍원, 월정, 중강리) 토축으로 외성 4,370m 내성 577m를 쌓고 그 안에 궁전을 건립하고 통치하였다.

 

도성은 1천년이 지난 오랜 풍상 속에 파괴되어 유지만 남아있다.

성내의 어수정과 봉상동의 석등만은 일제 말기까지도 잘 보존되어 왔다.

 

서기 194073일자로 일제하에서 국보 제118호로 지정 받은 바 있는 중요한 문화재였으나 6.25동란으로 인하여 어수정과 석등은 유지조차 확인할 수 없게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휴전선 비무장지대내에 위치하여 확인할 길이 없다.

 

태봉국 도성 내 석등 (일제강점기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때 촬영된 궁예도성의 석등 당시 국보 118호로 지정

사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규모가 상당합니다. 석등의 조각 표현도 뛰어난 장인 솜씨입니다. 이 석등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이 묘연합니다. 부근에 매몰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 또 다른 궁예의 석등 

 

▲ 사진은 강원 철원군 홍원리 풍천원 일대에 있던 궁예도성 외성의 모습. /철원군청 제공

 

 

▲  사진은 강원 철원군 홍원리 풍천원 일대 궁예도성 남문에 있던 석등의 원거리 모습으로 일제때 국보 118호로 지정됐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철원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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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태봉국 수도 `궁예도성' 태봉국도성'으로 개칭

 

강원일보| 기사입력 2005-10-07 00:03 | 최종수정 2005-10-07 00:03

 

鐵原태봉국의 수도인 `궁예도성'(弓裔都城)이라는 명칭이 `태봉국도성'으로 전면 개칭된다.

 

철원군은 궁예도성이란 이름이 국가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궁예왕을 폄하시키는 의미여서 `태봉국도성'으로 개칭해야 한다는 관련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궁예도성 명칭이 들어 있는 모든 관련 서류 및 상징물 등의 문구를 `태봉국도성'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궁예도성의 명칭을 `태봉국도성'으로 바꾸기로 한 것은 최근 이재 육사교수, 손영식 문화재청전문위원 등 태봉·궁예연구회 소속 고대사연구학자들이 궁예라는 개인의 이름을 붙인 궁예도성은 승자(고려태조 왕건측)의 입장에서 불리워져 현재까지 전해 진 것이라며 역사적으로 국가가 건국됐거나 천도(遷都)를 했던 경우 도성에 국왕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사례는 없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지난 4일 부군수실에서 열린 `궁예도성 축소복원 모형 설계 최종 자문 및 심의회'에 참석해 역사의 승자들은 태봉국을 국가로 인정치 않고 개인의 사유물로 여겨 결국 하극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1918년 일제가 궁예도성일대에 대한 측량 및 발굴조사를 벌일 당시에도 `궁예성' 또는 `궁예도성'으로 불리워졌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을 들어 개칭을 제의, 위원 11명이 만장일치로 명칭 변경에 찬성했다.

 

한편 비무장지대내 풍천원에 있는 태봉국도성은 내성안에 궁성이 있는 3중성으로 외성이 길이 12.5, 내성 7.7, 궁성 1.8이다.

 

또 성벽이 많이 붕괴됐지만 내성의 남벽, 외성의 남벽, 외성의 동벽 등은 유지가 확인됐으며 도성은 철원에서 흔한 현무암을 흙과 같이 쌓았으나 전체로는 토성으로 외성의 높이와 폭이 내성보다 더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李正國기자·jklee@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