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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를 찾아서

고려 문관이 오랑캐 섬멸, 문무 겸비 덕장, 용장 조충 장군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9.

[역사속의 강원인물]

무신 집권한 고려사회에서 문관이 조국 유린하는 오랑캐 섬멸

 

문무 겸비한 덕장과 용장 조충 장군 - 원영환 도문화원연합회장

 

도유형문화재 제110. 고려시대의 문신인 문정공 조충(11711220)의 묘지석. 묘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소의 위치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묻어놓는 것이다. 이 지석의 재료는 청석으로, 표면을 거칠게 다듬어 앞면에만 글을 새겼다. 앞면의 가장자리에는 덩굴무늬를 두른 후 그 안쪽에 테두리선을 그었다. 전체가 네 조각으로 갈라지고, 파인 곳이 많아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보기 어려우나, 조상들에 대한 소개, 그의 생애, 인품과 일화, 가족관계 등을 적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충 장군이 세상을 뜬 고종 7(1220)에 만든 것이다. 원래 그의 묘소는 개성에 있었으나 38선으로 남북이 갈리게 되자 그의 후손들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참조:문화재청(www.cha.go.kr)

 

 

1171년 횡천(횡성) 출생

 

고려중기 무신이 무소불위 정권 휘두르던 시대에 문신으로 출발

조영인·조충·조계순 3대 모두 무신의 직책인 '원수' 지내

 

후손들 횡성 공근면 상동리에 사당 지어 '세덕사'라 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 지내

 

우리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강원인의 긍지요, 민족의 자랑

 

3년간 거란과의 전쟁 완전히 평정 타고난 천품 총명해 박학다식

 

당당한 용장으로서 면모 보여줘 몽고군 대장 합진과의 담판에서

술잔은 무한정으로 돌리며 안주는 칼 끝에 고기 꿰어

상대방 입에 넣어주며 분위기 제압

 

연합진으로부터 형님 대우 받아 거란족 지도층은 모조리 처형

그외 5만여명 거란군은 모두 석방 갈 곳 없는 사람들 살 곳 마련해줘

 

 

조충 장군은 1171년 강원도 횡천(횡성)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담약이고, 본관은 횡천이며, 시중을 지낸 조영인의 아들이다.

 

조영인, 조충, 조계순 3대가 모두 문신으로서 무신의 직책인 원수를 지냈으므로 후세인들은 고려의 삼원수라 불렀다. 후손들이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에 사당을 지어 `세덕사'라 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곳을 `삼원수골'이라고 부른다.

 

조충장군의 부친인 조영인(1133~1202)은 천품이 총명하여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후 전주의 서기가 되어 선정으로 명성을 떨쳤고,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의 보도가 되었으며, 1171(명종4)에는 좌사원외랑으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영인은 이후 동지추밀원사·참지정사·정당문학·한림학사·승지·동지공거·판이부사·개부이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평장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특히 국방과 외교에 능하여 명종과 신종 때 어려운 외교문제를 잘 처리하는 등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이었다.

 

부친의 탁월한 재능을 계승한 조충 장군은 천품이 총명하여 박학다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한 장상의 기질을 타고난 희대의 인물이었다. 고려사 열전에 `조충은 생후 한 달 만에 모친을 여의었고, 성장하면서 어머니를 지극히 사모하여 주위에서 효동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조충 장군은 부친이 고관대작을 지냈으므로 과거를 보지 않고, 음직을 받은 후 태학에서 공부하여 1190(명종20)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내시부 근무를 시작으로 이후 각문지후·상식국봉어·호부원외랑·공부낭중 등 많은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성과 열을 다하여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196(명종26)에는 26세의 나이로 금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왔고, 1209(희종5)에는 국자감의 제례담당책임자인 국자좨주가 되었다.

 

1211(희종7)에는 대체로 대제학이 겸임하는 국자대사성이 되었고, 이후 한림학사로서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동지공거가 되었다. 그 후 군사를 지휘하며, 국방을 담당하는 동북면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정중부의 난으로 무신이 집권한 고려사회에서 문관이 무관직을 받은 것은 문극겸에 이어 두 번째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다.

 

동북면병마사는 동계의 군정책임자로서 지금의 함경남도·강원도 동해안의 행정을 주관하는 동시에 동북방면의 국방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다. 이후 조충 장군은 국가의 제례, 교육, 외교, 과거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예부상서를 맡아 문신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도 차지하였다.

 

조충 장군은 문무의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의 탁월한 자질을 발휘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1216(고종3)에는 추밀원부사·한림학사·승지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시대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그 시대를 다스린 예는 종종 있었다. 조충장군이 활동하던 시대는 최충헌이 절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거란, 여진, 몽고 등의 고려 침략이 극히 심하였던 시대였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살고 있던 거란족들은 몽고군의 침략으로 생활터전을 잃고 살기위하여 모든 가족이 모두 군인이 되어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기 위해 싸워야 했기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침략하였다.

 

고려에서는 참지정사 정숙첨을 중군원수로 하고, 조충 장군을 부원수로 삼아 경도인(개성인) 가운데 종군이 가능한 자와 승군을 모집하여 출정하였다. 그러나 도처에서 패전을 거듭하여 철원, 원주, 횡성, 강릉, 춘천 등이 거란군에 점령되었다.

 

고려정부는 1217(고종 4) 김취려를 원수로 하고, 조충장군을 부원수로 하여 거란군을 공격하였다. 경기도 여주(황려현) 전투와 충청북도 제천(제주)의 박달재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강원도 명주 전투에서 거란군을 여진지역으로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여진군의 협력을 얻어 세력을 회복하고, 다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때 김취려장군은 갑자기 병이 위독하여 개경으로 돌아갔고, 고려군은 도처에서 패전하여 결국 철령 이북의 땅을 대부분 거란에게 빼앗겼고, 조충장군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이때 조충 장군은 한수의 시로 그의 애국충정을 토로하였다.

 

만리 빙판길을 달리던 말이 넘어지니, 병마의 비명소리에 시절 바뀐 줄 몰랐네. 반드시 조부의 본을 받아 주마에 가편하여 조국을 유린하는 오랑캐를 섬멸하리라.”

 

1218(고종5) 거란족이 재침하였다. 고려정부에서는 조충 장군을 서북면원수로 임명하여 거란군을 막게 하였다. 조충 장군은 김취려, 정통보, 오수기 등의 장군을 앞세워 평안도 쪽으로 침략하는 거란군을 방어하였다.

 

거란군은 1차 침입 때와 같이 남쪽으로 침략하려 하였으나 조충 장군은 1차 때 실패한 경험을 살려 탁월한 작전으로 적을 강동성으로 몰아넣고, 성을 포위한 후 장기전을 벌였다.

 

이때 몽고군이 고려를 원조하겠다고 고려로 들어왔다. 조충 장군은 몽고군을 수용하고, 합동작전으로 거란을 공략하여 다음해 1월 항복을 받음으로써 3년간 거란과의 전쟁을 완전히 평정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전후처리에서 조충장군은 두 가지 특수한 문제를 용기와 배짱으로 과감하게 처리하였다.

 

첫째 몽고군의 대장 합진과의 담판에서 술잔을 무한정으로 돌리면서 안주는 칼끝에 고기를 꿰어 상대방의 입에 넣어주는 몽고식으로 담판하자는 합진의 제의를 조충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흔쾌히 수용하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분위기를 제압하여 연합진으로부터 형님의 대우를 받고 돌아와 여몽합동작전의 결과처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조충 장군의 의도대로 처리하였다.

 

둘째 거란족의 지도층은 모조리 처형하였으나 그 외의 5만여명의 거란군은 모두 석방하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살 곳을 마련하여 생활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문무를 겸비한 용장과 덕장으로서의 조충 장군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거란의 침입을 완전히 평정한 조충 장군은 정당문학판예부사에 오르고, 이어서 수태위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와 상장군을 역임하였다.

 

조충장군이 무신정치하에서 문관직과 무관직을 두루 겸무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여 학문에 뛰어났으므로 국자대사성, 동지공거를 역임한 당대최고의 학자였으며, 당당한 용장으로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고, 또한 그의 타고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 열전에 조충 장군은 `재질이 문무를 겸비하여 특별히 두 관직을 주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충 장군은 거란족을 복속시킨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평양에 머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충헌에게 도전하여 당당히 부당성을 주장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던 것이니, 조충 장군의 곧은 절개와 정정당당한 장상의 풍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할 일이 많았던 조충 장군은 50세의 나이로 1220년의 생을 마감하였다. 국가에서는 3일간 조회를 철회하고, 개부의동삼사문하시중을 추증하였으며, 고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 태조·고종·문종·원종과 함께 고려충신 16인중 한분으로 숭의전에 배향하였다.

 

조충 장군의 아들인 조계순은 1215(고종2)에 중낭장과 추밀원부사를 받았고, 그 후 은청광록대부가 되었으며, 고려를 침략한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재상이 되었다.

 

계순은 문관으로서의 활동도 빛났으나 무신으로서의 활동이 더욱 빛났으므로 무신의 직책인 상장군으로 임명되었다. 1250(고종37) 좌승선·추밀원부사가 되었고,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고려중기 무신이 무소불위의 정권을 휘두르던 시대에 문신으로 출발한 조영인·조충·조계순 3대가 모두 무신 직인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특히 문무를 겸비한 지장이고 덕장이며 용장으로서 전형적인 위국충정의 인물인 조충 장군은 세계 어느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물로 강원인의 긍지요, 민족의 자랑이다.

 

800여 년이 지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조충 장군 같은 인물을 민족의 표상으로 삼아 영원히 선양해야 할 것이다.

 

원영환 도문화원연합회장 프로필

1936년 평창 출생.

서울 광운고, 성균관대 문리대 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

강원대 인문대학장, 강원대 평의회 의장, 의암학회 이사장 겸 학회장,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장 등 역임.

강원대 사학과 명예교수, 춘천문화원장, 도문화원연합회장으로 활동.

상훈=서울시장공로상(1980), 서울시문화상(1991), 강원도문화상(2001).

저서=`서울육백년사 I·II·III()' `한국사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