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귀화 중국인 후손 묘지명 발견
연합뉴스| 기사입력 2009-04-17 15:50 | 최종수정 2009-04-17 18:01
신라 귀화 중국인 후손 묘지명 (서울=연합뉴스) 당 제국 해체기인 880-890년대 무렵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인 `송고석인왕씨묘지명'(宋故碩人王氏墓誌銘)이 2005년 5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남쪽 룽먼(龍門)에서 출토됐다. 사진은 그 덮개. 현재 뤄양대학이 소장한 이 묘지명 주인공은 고려사와 송사에 각각 왕림(王琳)과 왕빈(王彬)이라는 표기로 보이는 인물의 손녀다. 2009.4.17 << 문화부 기사참조, 백석대 민경삼 교수 제공 >>
민경삼 교수 '부인 왕씨 묘지명'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당 제국이 급속한 해체기에 접어든 880-890년대 무렵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 묘지명이 공개됐다.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백석대 민경삼(閔庚三) 교수는 18일 서강대 마테오관에서 열리는 신라사학회(회장 김창겸) 제82차 학술발표회를 통해 지난 2005년 5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남쪽 룽먼(龍門)에서 출토된 '송 고 석인 왕씨 묘지명'(宋故碩人王氏墓誌銘)에 대한 연구성과를 내놓는다.
민 교수에 의하면 이 묘지명은 현재 뤄양대학이 소장하고 있는데 부인의 가계 내력과 품성, 행적 등을 기록한 몸돌과 덮개돌이 함께 발견됐다.
덮개돌에는 전서체(篆書體)로 각 행 3글자씩 3행에 걸쳐 '宋故碩人王氏墓誌銘'(송나라의 돌아가신 부인 왕씨 묘지명)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몸돌은 검푸른 빛이 도는 청석(靑石)을 한 변 길이 73㎝인 정방형 판석으로 깎아 만들었으며 그 표면에는 각행 39글자씩 38행에 걸쳐 묘지문(墓誌文)을 새겼다.
이 묘지문을 분석한 결과, 그 주인공 왕씨는 고려사(高麗史)에는 '왕림'(王琳), 송사(宋史)에는 '왕빈'(王彬)이라는 표기로 각각 등장하는 중국 귀화인 후손의 손녀이면서, 송사에 열전이라는 형식으로 그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남은 양외(楊畏)라는 사람의 부인으로 밝혀졌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부인 왕씨는 송나라 선화(宣和) 6년(1124) 8월15일 향년 66세로 사망해 그 해 10월 29일 룽먼에 있던 남편 양외의 무덤에 합장됐다.
가문 내력에 대해 묘지명은 "고조가 난리를 피해 배를 타고 바다 남쪽으로 가니 신라왕이 한번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증조는 이름이 인간(仁侃)인데 아버지를 이어 국가 권력을 잡았다가 훗날 광록경(光祿卿)에 봉해졌다"고 했다.
신라 귀화 중국인 후손 묘지명 (서울=연합뉴스) 당 제국 해체기인 880-890년대 무렵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귀화한 중국인의 후손인 `송고석인왕씨묘지명'(宋故碩人王氏墓誌銘)이 2005년 5월 중국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남쪽 룽먼(龍門)에서 출토됐다. 사진은 그 탁본. 현재 뤄양대학이 소장한 이 묘지명 주인공은 고려사와 송사에 각각 왕림(王琳)과 왕빈(王彬)이라는 표기로 보이는 인물의 손녀다. 2009.4.17 << 문화부 기사참조, 백석대 민경삼 교수 제공 >>
민 교수는 이런 묘지명 내용과 자치통감, 송사, 그리고 고려사 등의 각종 문헌 관련 기록을 종합할 때, 부인 왕씨의 부계는 아버지 왕종망(王宗望), 조부 왕빈(王彬), 증조 왕인간(王仁侃), 고조 왕언영(王彦英)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가문은 880-890년대 무렵 왕언영-인간 부자가 신라로 귀화해 고려 초기까지 정착해 왕실의 후원을 받다가 왕빈 시대에 이르러 다시 본국인 중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부인 왕씨의 할아버지는 고려사에서 "경종 5년(980), 최한(崔罕)과 왕림(王琳)을 송나라에 유학 보내 태학에 입학게 하니, 성종 11년(986)에 두 사람이 모두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는 기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서 보이는 '왕림'(王琳)은 송사에서는 '왕빈'(王彬)으로 표기되는데 이번 묘지명을 통해 '왕빈'이 옳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려사에서는 고려 경종이 왕빈을 유학생으로 파견했다고 했지만, 이번 묘지명에서는 18살에 송의 조광윤이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고려왕에게 요청해 중국으로 돌아가 총애를 입어 각종 고위직을 역임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鑒長編)이란 문헌에는 "순화(淳化) 3년(992)에 황상이 직접 도공거인(道貢擧人)을 시험하고는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들인 왕빈(王彬)과 최한(崔罕) 등에게 급제의 조서를 내리고 관직을 제수하고는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민 교수는 "이런 기록들을 통해 왕빈은 고려에서 파견되어 송나라 태학에 들어갔다가 진사에 급제하고 잠시 고려로 돌아왔다가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생애를 마쳤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묘지명은 그의 손녀인 부인 왕씨가 "기이한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며, "부모를 섬김에도 효녀로 소문이 났"고 "시부모 또한 극진히 봉양했다"고 칭송하면서, 하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으며, 평소 불교에 심취해 정각(淨覺)이라는 법명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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