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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묘지명 (李子淵 墓誌銘)

by 연송 김환수 2013. 6. 23.

 

이자연 묘지명 (李子淵 墓誌銘)

 

 

시대 : 고려

연대 : 1061(문종15)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세로 635cm, 가로 116cm, 글자크기 2cm

출토지 : 미상

소재지 : 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168-6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이성미(李成美) / 미상 / 미상

 

 

  

이자연(李子淵 : 1002~1061)은 인주(仁州) 사람으로 자는 약충(若沖), 시호는 장화(章和)이다. 아버지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낸 이한(李翰)이고, 어머니는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 최씨(崔氏)이다.

 

현종(顯宗) 대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덕종 때 우보궐(右補闕이부낭중(吏部郞中어사잡단(御史雜端우승선(右承宣)이 되고, 정종 때 급사중(給事中중추원지사(中樞院知事)를 거쳐 1047(문종 1) 이부상서(吏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1050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승진되고, 세 딸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됨으로써 세력을 장악하였다.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 후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부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傅 三重大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가 되었고, 사후에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에 추증되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낙랑군(樂浪君) 김씨(金氏)로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이 되었다.

 

슬하에 83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정()은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 둘째 적()은 전중소감(殿中少監), 셋째 석()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넷째 의()는 합문지후(閤門祗候), 다섯째 소현(韶顯)은 출가하여 대덕(大德)이 되었고, 여섯째 호()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 일곱째 전()은 일찍 죽었고, 여덟째 안()은 예빈주부동정원(禮賓注簿同正員)이 되었다.

 

세 딸은 모두 왕비가 되었으니, 큰 딸은 문종의 왕비인 인예태후(仁睿太后)로 순종(順宗선종(宣宗숙종(肅宗)의 세 왕과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의 어머니이다.

 

둘째와 셋째도 모두 문종의 비로 각각 인경현비(仁敬賢妃)와 인절현비(仁節賢妃)이다. 여섯째 아들인 이호(李顥)의 아들이 인종대의 권신으로 난을 일으킨 이자겸(李資謙)이니, 그는 바로 이자겸의 할아버지가 된다.

 

묘지명은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의 관직에 있던 이성미(李成美)가 지었다 .

 

 

이자연 묘지명 (李子淵 墓誌銘)

 

고려국의 돌아가신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부 삼중태광 문하시중 판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傅 三重太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이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증받은 장화 이공(章和 李公) 묘지명 및 서문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이성미(李成美)가 짓다.

 

공의 이름은 자연(子淵)이고, 자는 약충(若沖)이며, 그 선조는 소성(邵城) 사람이다. 고조, 증조와 조부가 모두 귀한 을 거쳤으므로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왕가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작고한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이자 거듭 추증되어 사공(司空)이 된 한(),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친의 큰 누이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인데 바로 덕종· 정종(德宗· 靖宗) 두 임금과 지금 임금<文宗>의 외조모이니, 그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실로 사직의 근원이 되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큰 도량과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고, 마음씨와 인품이 맑고 그 빼어남이 남달랐다. 태평(太平) 연간에 현종(顯宗)이 학문을 장려하고 교화를 일으켜 친히 뛰어난 인재들을 뽑을 때, 공이 두 번째로 진사(進士)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니, 앵수(鸎手)는 이리저리 나부끼고 용두(龍頭)는 값어치를 더하였다. 벼슬길에 나가 양온령(良醞令)이 되고, 얼마 있다 옮겨 어서유원관 직사관 비서성교서랑 감문위녹사참군사(御書留院官 直史館 秘書省校書郞 監門衛錄事叅軍事)가 되었다. 발탁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자 승진의 영예가 조정의 질서에 부합되고, 임금의 뜻을 펼치는 능숙함이 오로지 대()에 돌아갔다. 곧 우보궐 지제고(右補闕 知制誥)에 임명되고 비어(緋魚)를 하사받았다.

 

덕종(德宗)이 우()임금의 검소함을 계승하자 여러 차례 높은 품계를 거쳐 후(喉舌)의 직책에 뽑히니, 이 자리는 현량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중추원 우부승선(中樞院 右副承宣)을 지니면서 금자(金紫)를 받았다. 또 형부(刑部)와 이부(吏部)의 원외랑(員外郞)과 이부낭중 어사잡단 좌부승선(吏部郞中 御史雜端 左副承宣)에 임명되었다. 억울하고 정체된 옥사를 정밀히 결단하여 하고, 전형(銓衡)의 권한을 바로 들어 잘못됨이 없었으며, 추상같은 법망을 다시 엄하게 펴서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정종(靖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대우가 더욱 두터워졌는데, 특별히 기거주(起居注)를 제수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또 내사사인 중추원지주사 급사중 지상서이부사 시랑 예빈경 조청·조의대부(內史舍人 中樞院知奏事 給事中 知尙書吏部事 侍郞 禮賓卿 朝請·朝議大夫)를 더하고, 다시 지이부사(知吏部事)가 되었다.

 

얼마 후 중추부사(中樞副使)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다시 ▨▨대부 지중추원사 우산기상시 주국(▨▨大夫 知中樞院事 右散騎常侍 柱國)이 되었다. 또 중추사(中樞使)에 제수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 총애가 대낮에 . 누가 만 백성의 풍족함을 그러모아서 뭇 사람을 빛나게 하고 높이 받들고 모두 우러르게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고굉(股肱)의 어진 있어야 ()가 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임금께서 요순(堯舜)[唐虞]처럼 시운을 열었으므로 직설(稷契) 같은 이도 그 신하가 될 수 있는 것이니, 곧 생각하건대 천하의 안위(安危)는 백시(伯始)가 아니면 찾아내지 못하고, 조정이 믿고 의지하는 곳은 곧 공이 아니면 있지 않다.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삼고,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상서예부사(吏部尙書 叅知政事 判尙書禮部事)로 책립하였으며, 또 흥록대부 수사공 상주국(興祿大夫 守司空 上柱國)을 더해 주고, 멀리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책립하고, 또 특진 검교▨▨ 권판상서형부사(特進 檢校▨▨ 權判尙書刑部事)를 더하였다.

 

중희(重熙) 연간에 사직(社稷)을 건립하려던 일이 아직도 미루어지고 있자, 조서를 내려 옛 제도를 살펴서 새로이 단()을 쌓게 하였다. 공이 그 일을 감독하여 적절하고 마땅하게 일을 마치자 임금이 수레에 고운 옷감을 가득 실어 몸소 보답함을 보였으며, 바라던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려 은택이 널리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영사(領使)의 중책으로 인하여 조서를 내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주었다. 그 해에 공의 큰딸을 봉하여 왕비로 삼고, 이어 수대위(守大尉)를 더하고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에 임명하였다. 또 검교태보 추성좌운보사공신(檢校太保 推誠佐運保社功臣)을 더하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에 임명하였다.

 

국가는 천심의 보살핌과 도우심에 순응해야 길이 나라의 근본이 굳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맏아들을 세워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임금의 장인[元舅]이라는 귀함으로 인하여 검교대사(檢校大太師)를 더하고, 또 수대부 중대광 삼중대광 판삼사사(守大傅 重大匡 三重大匡 判三司事)를 더하였다. 신묘년(1051, 문종 5 )에 지공거(知貢擧)되니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다.

 

공이 추정(樞庭, 中樞院)에서 임금을 돕고 상부(相府, 中書門下省)에서 정책을 편 지 20여 년이나 되었으나, 국가의 이로움을 알아서 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총척(寵戚)의 귀함으로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작록(爵祿)의 중함으로 남에게 뽐내지 않았으며, 충정(忠貞)이 해와 달에 걸리니 예의가 겉모습에서 우러나왔다. 태산의 높음도 쓰러진 이삭에서 미리 노래로서 알리는 것이고, 태성(台星)의 빛남도 떨어지는 별에 먼저 징조를 보여 닦는 것이다. 병이 든 지 며칠 만인 신축년(문종 15, 1061) 830일 묘각사(妙覺寺) 법우(法宇)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9세이다.

 

, 슬프다. 임금의 슬픔이 후비(后妃)의 친정을 에워싸고, 조정과 저자의 시끄러움도 거의 그쳤으며, 승려와 도사들도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바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의 예를 펴도록 하고, 다시 중귀(中貴)를 보내어 법부(法賻)의 의식을 관장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수대사 중서령(守大師 中書令)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화(章和)라고 하였으니,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國戚 元臣)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공이 임종할 때에 잠깐 정신이 맑아져서 유언을 남겼는데, 모두 불교의 다비법(茶毗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하늘에 여쭙고 유해를 받들어 그 해 10월 초 6일에 임진현(臨津縣) 경내에 장례지내니, 뜻에 따른 것이다. 공은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 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 아들이 8명 있는데, 첫째는 정()으로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이고, 둘째는 적()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이며, 셋째는 석()으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며, 넷째는 의()로 합문지후(閤門祗候)인데 양주사(楊州使)가 되어 나갔으며, 다섯째는 소현(韶顯)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바로 유가업 대선장(瑜伽業 大選場)에 나아가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여섯째는 호()로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이며, 일곱째는 전()으로 공보다 일찍 죽었고, 여덟째는 안()으로 예빈주부동정원(禮賓主簿同正員)이다. 딸이 3명 있는데 모두 임금에게 시집갔다. 큰딸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왕비이며 태자와 국원후(國原侯)가 그 아들이다. 둘째는 수령궁주(壽寧宮主)가 되었으니 조선후(朝鮮侯)가 그 아들이고, 셋째는 숭경궁주(崇慶宮主)이다. 대대로 번성함을 이어서 가문의 명성이 빛난 것은 글자가 생겨난 이래로 공과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슬프다, ()은 하늘에 달린 것으로 사람이 능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붓을 잡고 슬피 탄식하며 명()을 짓는다.

 

푸른 언덕은 쓸쓸하고 고요한데, 찬 샘의 물소리는 급하기만 하다.

무덤 문이 한 번 닫히니 속세와는 영원한 이별이구나.

슬프다, 넓은 하늘에 물어볼 곳이 없으니, 나무가 급하게 부러짐을 애통해 하도다.

언덕과 골짜기가 변하여도 옥돌은 굳건하듯, 흰 눈 속 난꽃 향기는 흩어지지 않으리.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2001)]

 

高麗國故推誠佐運保社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大傅三重太匡門下侍中判尙書吏部三司事上

柱國監修國史贈守太師中書令章和李公墓誌銘幷序

 

        將仕郎尙書兵部員外郎知制誥賜緋魚袋李成美製

公諱子淵字若冲其先邵城人也高曾大父皆歷貴稱名芬俊域籍

 王家故中樞副使吏部侍郎累贈司空諱翰樂浪郡大夫人崔

氏考妣也考之長娣安孝國太夫人是爲德靖二宗與 今上之

外祖母也其族系之滋盛實 社稷之源府 公天生偉量嶽降英

標襟韻淸通華頴秀大平中 顯宗右文興化親選殼雄 公以

二上得進乙科鸎手恣飛龍頭騁價解褐良醞令尋遷御書留院

官直史館秘書省校書郎監門衛錄事參軍事擢拜監察御史衣繡

之譽允洽於朝倫演綸之能須歸於大就加右補闕知制誥賜緋

德宗繼統 禹服屢軫 高恣簡喉舌之攸司匪賢良而莫處帶授

中樞院右副承宣賜金紫又加刑部吏部二員外吏部郎中御史雜

端左副承宣寃滯之獄精斷而用銓衡之權正擧而毋枉霜綱再

 天咫不違 靖宗繼統 睿眷彌厚特授起居注餘並如故又

加鸎史舍人中樞院知奏事給事中知尙書吏部事侍郎禮賓卿朝

請朝議二大夫再知吏部事未幾冊拜中樞副使餘如故又加▨▨」

大夫知中樞院事右散騎常侍柱國拜中樞使餘並如故▨▨▨」

寵於晝以誰聯萬民之膽屬赫師而僉仰信乎股肱良▨▨事康

  今上唐啓運稷契爲臣以謂天下安危非伯始而不究朝

中倚賴非公而勿居以  公爲檢校尙書右僕射册拜吏部尙

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又加興祿大夫守司空上柱國遙授西

京留守使▨▨▨餘並如故册拜内史侍郎同内史門下平章事又

加特進檢校▨▨權判尙書刑部事重熙中社稷之設因巡未置

詔稽舊制  命築新壇  公監視其事酌宜以畢  鑾輿備

  躬展於報祈雷解沛 恩普沾於庶以領使之重

詔加開府儀同三司其年  公之長女封爲 王妃尋加守大

尉册拜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又加檢校太保推誠佐運保

社功臣拜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  國家順

天心之眷佑固邦本於緜長克樹  元良俾登  儲副以元舅

之貴加檢校大師又加守大傳重大匡三重大匡判三司事辛卯年

知貢擧事人之麟鳳與琳瑯梓皆出門下矣  公樞庭翊亮

相府經綸二十有年閒公家之利知無不爲以寵戚之貴不驕

於人以祿之重不矜於物懸忠貞於日月服禮義於衣裳其

山之高早歌於頽秀台星之爛先兆於殞芒寢疾數夕以辛丑秋八

月三十日卒于妙覺寺法宇中享年五十有九嗚呼痛極  王宸

悲纒椒掖朝市之喧幾罷緇黄之涕交流  上函命有司申

之禮復  遣中貴將法賻之儀  詔贈守大師中書令諡曰章

和蓋  聖皇褒紀國戚元臣之至也  公啓手之際方寸益明

綽有遺言俾從佛域茶毗之法爰禀  理命奉  靈骨以其年

十月初六日歸葬于臨津縣境內所願也  公娶樂浪郡京兆氏

陰儀婦德眞一代之秀以  王妃副君之故累加鷄林國大夫人

有子八人長曰頲檢校衛尉卿行尙書右丞知閤門事次曰頔殿中

中少監次曰碩禮部員外郎次曰顗閤門祇侯出爲楊州使次曰韶

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爲大德次曰顥尙食直長同正

次曰顓先 公而逝次曰顔禮賓主簿同正員女三人並

 至尊長爲延德宮主王妃  大子及國原侯其子也次爲壽寧宮

主朝鮮侯其子也次爲崇慶宮主世嗣繁延家聲赫自有書契巳

來未見踵於  公而同日語者歟惜哉命之在天匪生人之能制

乎握管咨嗟爲之銘曰翠阜兮寥寥  寒泉兮咽咽  玄扃兮一閉

素凡兮長別嗟琁昊之莫問  林之遽折  陵遷谷變兮珉斯貞

雪白蘭芳兮名不滅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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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 열전(신하) 오류는 누가 정정하는가 ?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1390~1453) · 정인지(鄭麟趾, 1396 ~ 1478)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인 고려사의 기록중에 우리 선조의 기록에 대한 오류가 있음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서 문제 제기를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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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신하)의 김은부 기록은 1072년(문종26년) 경덕국사 묘지명의 기록으로 정정되어야 하는데 담당하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묘지명(1061년,문종15년)에도 그 기록이 있습니다.

 

 정정사항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 ===>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고려사 오류 발췌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경덕국사 묘지명 발췌 (1072년)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 이후 생략 -

 

                                                           ▲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 - - 이후 생략 - - - -

 

 

 

이자연 묘지명 발췌 (1061년)

 

高麗國故推誠佐運保社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大傅

三重太匡門下侍中判尙書吏部三司事上」

柱國監修國史贈守太師中書令章和李公墓誌銘幷序」

        將仕郎尙書兵部員外郎知制誥賜緋魚袋李成美製」

公諱子淵字若冲其先邵城人也高曾大父皆歷貴稱名芬俊域籍」

繼 王家故中樞副使吏部侍郎累贈司空諱翰樂浪郡大夫人崔」

氏考妣也考之長娣安孝國大夫人是爲德靖二宗與 今上之」

外祖母也其族系之滋盛實 社稷之源府 公天生偉量嶽降英」

- - - - - -   이하 생략 - - - - - - -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고려국의 돌아가신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부 삼중태광 문하시중 판

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傅 三重太

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이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

증받은 장화 이공(章和 李公) 묘지명 및 서문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이성미(李成美)가 짓다.

 

공의 이름은 자연(子淵)이고, 자는 약충(若沖)이며, 그 선조는 소성(邵城) 사람이다. 고조,

조와 조부가 모두 귀한 ▨을 거쳤으므로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왕가의 후손을 잇게 하였

다. 작고한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이자 거듭 추증되어 사공(司空)이 된 한

(翰)과,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친의 큰 누이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인데 바로 ▨ 덕종· 정종(德宗· 靖宗) 두 임금과 지금 임금<文宗>

의 외조모이니, 그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실로 사직의 근원이 되었다.

- - - - - -   이하 생략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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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부내용

 

김은부 (金殷傅)

○ 金殷傅水州安山縣人性勤儉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하였다.

 

주) 1009~1031년 현종 초에 양광도() 남경수부 양주 소속의 수주군() 안산현()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곳이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된 뒤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成宗朝授甄官丞穆宗時累遷御廚使顯宗初爲公州節度使.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으로 임명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어주사(御廚使)로 되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되었다.

 

王避契丹南下次公州殷傅備禮郊迎曰: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녘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豈意聖上跋涉山川凌冒霜雪至於此極." 獻衣帶土物王遂更衣以土物分賜扈從官.

 

“성상(聖上)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띠며 지방 산물을 바치니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王至巴山驛吏皆遁御廚闕膳殷傅又進膳羞分供朝夕

 

왕이 파산(巴山)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 공궤조차 못 하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하여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공궤하였다.

 

契丹兵退王還次公州殷傅使長女製御衣以進.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게 유숙하였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因納之是爲元成王后元惠元平二王后亦其女也

 

이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원성(元成) 왕후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

 

尋除刑部侍郞如契丹賀生辰還至來遠城契丹 女眞執之以歸數月乃得還.

 

그는 미구에 형부 시랑으로 승차되어 거란 왕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에 도착하였을 때 거란이 여진을 시켜 그를 붙잡아 갔다가 몇 년 지난 후에야 돌려 보냈다.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고려사. 열전(신하)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시대

고려

연대

1072년 (문종26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37.5cm,  가로 75.5cm, 글자지름 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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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묘지명 (李子淵 墓誌銘)

 

이자연 [李子淵, 1003~1061]

 

고려시대 문종 때의 문신. 세 딸이 각각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으며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사(太師) 겸 중서령(中書令)·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이 되었다.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高麗國故推誠佐運保社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大傅

三重太匡門下侍中判尙書吏部三司事上」

柱國監修國史贈守太師中書令章和李公墓誌銘幷序」

 

        將仕郎尙書兵部員外郎知制誥賜緋魚袋李成美製」

公諱子淵字若冲其先邵城人也高曾大父皆歷貴稱名芬俊域籍」

繼 王家故中樞副使吏部侍郎累贈司空諱翰樂浪郡大夫人崔」

氏考妣也考之長娣安孝國大夫人是爲德靖二宗與 今上之

外祖母也其族系之滋盛實 社稷之源府 公天生偉量嶽降英」

標襟韻淸通▨華頴秀大平中 顯宗右文興化親選殼雄 公以」

二上得進▨乙科鸎手恣飛龍頭騁價解褐良醞令尋遷御書留院」

官直史館秘書省校書郎監門衛錄事參軍事擢拜監察御史衣繡」

之譽允洽於朝倫演綸之能須歸於大▨就加右補闕知制誥賜緋」

德宗繼統 禹服屢軫 高恣簡喉舌之攸司匪賢良而莫處帶授」

中樞院右副承宣賜金紫又加刑部吏部二員外吏部郎中御史雜」

端左副承宣寃滯之獄精斷而用銓衡之權正擧而毋枉霜綱再」

肅 天咫不違 靖宗繼統 睿眷彌厚特授起居注餘並如故又」

加鸎史舍人中樞院知奏事給事中知尙書吏部事侍郎禮賓卿朝」

請朝議二大夫再知吏部事未幾冊拜中樞副使餘如故又加▨▨」

大夫知中樞院事右散騎常侍柱國▨拜中樞使餘並如故▨▨▨」

寵於▨晝以誰聯萬民之膽屬赫師而僉仰信乎股肱良▨▨事康」

哉  今上唐啓運稷契爲臣以謂天下安危非伯始而不究朝」

中倚賴非▨公而勿居以  公爲檢校尙書右僕射册拜吏部尙」

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又加興祿大夫守司空上柱國遙授西」

京留守使▨▨▨餘並如故册拜内史侍郎同内史門下平章事又」

加特進檢校▨▨權判尙書刑部事重熙中社稷之設因巡未置」

詔稽舊制  命築新壇  公監視其事酌宜以畢  鑾輿備」

采  躬展於報祈雷解沛 恩普沾於▨庶以領使之重」

詔加開府儀同三司其年  公之長女封爲 王妃尋加守大」

尉册拜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又加檢校太保推誠佐運保」

社功臣拜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  國家順」

天心之眷佑固邦本於緜長克樹  元良俾登  儲副以元舅」

之貴加檢校大師又加守大傳重大匡三重大匡判三司事辛卯年」

▨知貢擧事人之麟鳳與琳瑯梓皆出門下矣  公樞庭翊亮」

相府經綸二十有年閒公家之利知無不爲以寵戚之貴不驕」

於人以祿之重不矜於物懸忠貞於日月服禮義於衣裳其▨泰」

山之高早歌於頽秀台星之爛先兆於殞芒寢疾數夕以辛丑秋八」

月三十日卒于妙覺寺法宇中享年五十有九嗚呼痛極  王宸」

悲纒椒掖朝市之喧幾罷緇黄之涕交流  上函命有司申▨襚」

之禮復  遣中貴將法賻之儀  詔贈守大師中書令諡曰章」

和蓋  聖皇褒紀國戚元臣之至也  公啓手之際方寸益明」

綽有遺言俾從佛域茶毗之法爰禀  理命奉  靈骨以其年」

十月初六日歸葬于臨津縣境內所願也  公娶樂浪郡京兆氏」

陰儀婦德眞一代之秀以  王妃副君之故累加鷄林國大夫人」

有子八人長曰頲檢校衛尉卿行尙書右丞知閤門事次曰頔殿中」

中少監次曰碩禮部員外郎次曰顗閤門祇侯出爲楊州使次曰韶」

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爲大德次曰顥尙食直長同正」

次曰顓先 公而逝次曰顔禮賓主簿同正員女三人並」

配 至尊長爲延德宮主王妃  大子及國原侯其子也次爲壽寧宮」

主朝鮮侯其子也次爲崇慶宮主世嗣繁延家聲▨赫自有書契巳」

來未見踵於  公而同日語者歟惜哉命之在天匪生人之能制」

乎握管咨嗟爲之銘曰翠阜兮寥寥  寒泉兮咽咽  玄扃兮一閉」

素凡兮長別嗟琁昊之莫問  痛▨林之遽折  陵遷谷變兮珉斯貞」

雪白蘭芳兮名不滅」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고려국의 돌아가신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부 삼중태광 문하시중 판

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傅 三重太

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이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

증받은 장화 이공(章和 李公) 묘지명 및 서문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이성미(李成美)가 짓다.

 

공의 이름은 자연(子淵)이고, 자는 약충(若沖)이며, 그 선조는 소성(邵城) 사람이다. 고조,

조와 조부가 모두 귀한 ▨을 거쳤으므로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왕가의 후손을 잇게 하였

다. 작고한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이자 거듭 추증되어 사공(司空)이 된 한

(翰)과,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친의 큰 누이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인데 바로 ▨ 덕종· 정종(德宗· 靖宗) 두 임금과 지금 임금

<文宗>의 외조모이니, 그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실로 사직의 근원이 되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큰 도량과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고, 마음씨와 인품이 맑고 ▨ 그

빼어남이 남달랐다. 태평(太平) 연간에 현종(顯宗)이 학문을 장려하고 교화를 일으켜 친히

뛰어난 인재들을 뽑을 때, 공이 두 번째로 진사(進士)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니, 앵수(鸎手)

는 이리저리 나부끼고 용두(龍頭)는 값어치를 더하였다. 벼슬길에 나가 양온령(良醞令)이 되

고, 얼마 있다 옮겨 어서유원관 직사관 비서성교서랑 감문위녹사참군사(御書留院官 直史館

秘書省校書郞 監門衛錄事叅軍事)가 되었다. 발탁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자 승진의

영예가 조정의 질서에 부합되고, 임금의 뜻을 펼치는 능숙함이 오로지 대▨(大▨)에 돌아갔

다. 곧 우보궐 지제고(右補闕 知制誥)에 임명되고 비어(緋魚)를 하사받았다.

 

덕종(德宗)이 우(禹)임금의 검소함을 계승하자 여러 차례 높은 품계를 거쳐 후▨(喉舌)의 직

책에 뽑히니, 이 자리는 현량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중추원 우부승선(中樞

院 右副承宣)을 지니면서 금자(金紫)를 받았다. 또 형부(刑部)와 이부(吏部)의 원외랑(員外

郞)과 이부낭중 어사잡단 좌부승선(吏部郞中 御史雜端 左副承宣)에 임명되었다. 억울하고 정

체된 옥사를 정밀히 결단하여 ▨하고, 전형(銓衡)의 권한을 바로 들어 잘못됨이 없었으며,

추상같은 법망을 다시 엄하게 펴서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정종(靖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대우가 더욱 두터워졌는데, 특별히 기거주(起居注)를 제수하

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또 내사사인 중추원지주사 급사중 지상서이부사 시랑 예빈

경 조청·조의대부(內史舍人 中樞院知奏事 給事中 知尙書吏部事 侍郞 禮賓卿 朝請·朝議大夫)

를 더하고, 다시 지이부사(知吏部事)가 되었다. 얼마 후 중추부사(中樞副使)에 임명되고 나

머지는 전과 같았다. 다시 ▨▨대부 지중추원사 우산기상시 주국(▨▨大夫 知中樞院事 右散

騎常侍 柱國)이 되었다. 또 중추사(中樞使)에 제수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 총애

가 대낮에 ▨. 누가 만 백성의 풍족함을 그러모아서 뭇 사람을 빛나게 하고 높이 받들고 모

두 우러르게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고굉(股肱)의 어진 ▨ 있어야 ▨사(▨事)가 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임금께서 요순(堯舜)[唐虞]처럼 시운을 열었으므로 직설(稷契) 같은 이도 그

신하가 될 수 있는 것이니, 곧 생각하건대 천하의 안위(安危)는 백시(伯始)가 아니면 찾아내

지 못하고, 조정이 믿고 의지하는 곳은 곧 ▨ 공이 아니면 있지 않다.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삼고,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상서예부사(吏部尙書 叅知政

事 判尙書禮部事)로 책립하였으며, 또 흥록대부 수사공 상주국(興祿大夫 守司空 上柱國)을

더해 주고, 멀리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내

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책립하고, 또 특진 검교▨▨ 권판상

서형부사(特進 檢校▨▨ 權判尙書刑部事)를 더하였다.

 

중희(重熙) 연간에 사직(社稷)을 건립하려던 일이 아직도 미루어지고 있자, 조서를 내려 옛

제도를 살펴서 새로이 단(壇)을 쌓게 하였다. 공이 그 일을 감독하여 적절하고 마땅하게 일

을 마치자 임금이 수레에 고운 옷감을 가득 실어 몸소 보답함을 보였으며, 바라던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려 은택이 널리 ▨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영사(領使)의 중책으로 인하여 조

서를 내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주었다. 그 해에 공의 큰딸을 봉하여 왕비로

삼고, 이어 수대위(守大尉)를 더하고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에 임명하였다. 또 검교태보 추성좌운보사공신(檢校太保 推誠佐運保社功臣)을 더하고 문하

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에 임명하였다.

 

국가는 천심의 보살핌과 도우심에 순응해야 길이 나라의 근본이 굳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맏아들을 세워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임금의 장인[元舅]이라는 귀함으로 인하여 검교

대사(檢校大太師)를 더하고, 또 수대부 중대광 삼중대광 판삼사사(守大傅 重大匡 三重大匡

判三司事)를 더하였다. 신묘년(1051, 문종 5 )에 지공거(知貢擧)가 ▨되니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다.

 

공이 추정(樞庭, 中樞院)에서 임금을 돕고 상부(相府, 中書門下省)에서 정책을 편 지 20여

년이나 되었으나, 국가의 이로움을 알아서 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총척(寵戚)의 귀함으로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작록(爵祿)의 중함으로 남에게 뽐내지 않았으며, 충정(忠貞)이 해

와 달에 걸리니 예의가 겉모습에서 우러나왔다. 태산의 높음도 쓰러진 이삭에서 미리 노래

로서 알리는 것이고, ▨ 태성(台星)의 빛남도 떨어지는 별에 먼저 징조를 보여 닦는 것이다.

병이 든 지 며칠 만인 신축년(문종 15, 1061) 8월 30일 묘각사(妙覺寺) 법우(法宇)에서 돌

아가시니, 향년 59세이다.

 

아, 슬프다. 임금의 슬픔이 후비(后妃)의 친정을 에워싸고, 조정과 저자의 시끄러움도 거의

그쳤으며, 승려와 도사들도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바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수(▨襚)의

예를 펴도록 하고, 다시 중귀(中貴)를 보내어 법부(法賻)의 의식을 관장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수대사 중서령(守大師 中書令)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화(章和)라고 하였으니, 성황(聖

皇)께서 국척 원신(國戚 元臣)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공이 임종할 때에 잠깐 정신이 맑

아져서 유언을 남겼는데, 모두 불교의 다비법(茶毗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하늘에 여쭙

고 유해를 받들어 그 해 10월 초 6일에 임진현(臨津縣) 경내에 장례지내니, 뜻에 따른 것이

다. 공은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 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 아들이 8명 있는데, 첫째는 정(頲)으로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

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이고, 둘째는 적(頔)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이며, 셋째는 석(碩)으

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며, 넷째는 의(顗)로 합문지후(閤門祗候)인데 양주사(楊州使)가

되어 나갔으며, 다섯째는 소현(韶顯)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바로 유가업 대선장(瑜伽業 大選

場)에 나아가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여섯째는 호(顥)로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이며,

일곱째는 전(顓)으로 공보다 일찍 죽었고, 여덟째는 안(顔)으로 예빈주부동정원(禮賓主簿同

正員)이다. 딸이 3명 있는데 모두 임금에게 시집갔다. 큰딸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왕비이

며 태자와 국원후(國原侯)가 그 아들이다. 둘째는 수령궁주(壽寧宮主)가 되었으니 조선후(朝

鮮侯)가 그 아들이고, 셋째는 숭경궁주(崇慶宮主)이다. 대대로 번성함을 이어서 가문의 명성

이 빛난 것은 글자가 생겨난 이래로 공과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슬프다, 명(命)은 하늘에 달린 것으로 사람이 능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붓을 잡고 슬피

탄식하며 명(銘)을 짓는다.

푸른 언덕은 쓸쓸하고 고요한데, 찬 샘의 물소리는 급하기만 하다.

무덤 문이 한 번 닫히니 속세와는 영원한 이별이구나.

슬프다, 넓은 하늘에 물어볼 곳이 없으니, ▨나무가 급하게 부러짐을 애통해 하도다.

 

언덕과 골짜기가 변하여도 옥돌은 굳건하듯, 흰 눈 속 난꽃 향기는 흩어지지 않으리.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안효국대부인 판독오류 수정완료 (안효국태부인 ===> 안효국대부인)

*** 판독문 한자는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고 한글 해석문만 수정

     하여 판독문 한자까지 정정요청하였으나 몇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