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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방/조용필

조용필 가수의 숨겨진 선행

by 연송 김환수 2013. 9. 14.

조용필 가수의 숨겨진 선행

 

최근 10년만에 조용필이 돌아오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향수와 반가움이겠지만 어린 사람에게는 듣보잡 가수가 갑자기 싸이와 포미닛을 이기고 있으니 자연히 궁금해지는 것이다.

 

화제의 중심이 되면서 네티즌이 움직이고 언론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잠잠하던 조용필 선생의 때 늦은 기부 소식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언론에 보도된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자.

 

지난 2003년 고인이 된 부인이 남긴 유산 24억 전액을 심장병 어린이 돕기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조용필 장학재단은 소아암 어린이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 매년 3억원 이상을 내놓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2010년 콘서트 수익금을 서울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에 입원한 소아암 어린이 500여명에게 기부했고 그동안의 공연 수익금 상당부분도 기부금으로 내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2010년 한센인들의 섬 소록도에서 공연을 했는데 "꼭 다시 소록도를 찾겠다"고 약속하고, 1년 후 그 약속을 지켰다는 이야기도 다시 언급되고 있다.

 

또한 조용필은 소속사 YPC프로덕션의 최대 주주인데 조용필에게 현금배당 대신 사회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수익이 지급됐다고 해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게다가 그는 10년째 전셋집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작은 집은 아니고 70평대의 빌라이기는 하지만 요즘 재테크를 위해 전세를 살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과는 다른 케이스다.

 

충북 제천에 1만평 땅이 있지만 이도 공시지가 기준 35백만 원 수준으로 투자 목적의 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9헬로’(Hello) 발매기념 쇼케이스에서는 조용필 팬클럽이 쌀 340kg을 모았고 전부 기부했다.

 

얼마전에는 아주 오래된 선행이 공개돼 네티즌을 감동케 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엔 조용필 명곡인 '비련' 에 얽힌 일화가 공개된 것이다.

 

공개된 일화는 조용필 전 매니저인 최동규씨가 과거 조용필 4집 발매 당시 인터뷰했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최동규씨에 따르면, 조용필이 과거 4집 발매 후 한창 바쁠 때, 한 시골의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병원 원장은 자신의 병원에 입원 중인 14세의 지체장애 여자 아이가 조용필 4집에 수록된 '비련' 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환자는 입원 8년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인 것이라고 한다.

 

이어 병원 원장은 이 소녀의 보호자로부터 돈은 원하는만큼 줄테니 조용필이 직접 이 소녀에게 '비련' 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를 받았고, 그게 어렵다면 병원을 방문하여 얼굴이라도 직접 보여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고 한다.

 

최동규 씨는 "당시 조용필이가 캬바레 무대에서 한 곡 부르면, 지금 돈으로 3,000만원~4,000만원 정도를 받았다" 고 한다.

 

당시 조용필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피던 담배를 바로 툭 끄더니

병원으로 출발하자"고 했단다.

 

"그날 행사가 4개였었는데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을 물어주고 시골 병원으로 갔다" 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병원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조용필은 병원에 가자마자 사연 속의 소녀를 찾았다.

소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용필이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기 시작하자...

소녀가 펑펑 울기 시작했고... 이 소녀의 부모도 울었다.

 

조용필이 여자애를 안아주며 사인한 CD를 건네주고 작별하고 차에 오르는데. 여자 아이의 엄마가 따라오며

"돈을 어디로, 얼마나 보내드리면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용필은

"따님이 오늘 흘린 눈물이 제가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최동규 씨는

"용필이가 그때 한 말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다고..." 되뇌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조용필이 예전에 한창 인기몰이를 할 때 그를 최고인기 가수로 만들어 준 것은 팬클럽도 젊은이들도 아닌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그는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다시 베풀고 갚는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멋지게 실천하고 있다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베풀고 있었다.

 

요즘 인기도 한 때라고 재테크에 빠져있는 연예인들에게는 선배로서 귀감이 된다.

   

그가 다시 언론과 국민에게 주목받고 있는데 나이들고 인기가 사라지면 무시받는 연예인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른들, 선배들에 대한 공경과 대우의 문제로 확산될 수 있으면 좋겠다.

 

1950년생인 그가 아직 늙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을 음악으로 증명했고 그 음악에 후배들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여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기에서 젊은 후배들은 선배와 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을 연세드신 어르신 들은 일에 대한 열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트롯 음악과 외국 팝송이 주류였던 시절에 세련된 우리의 대중가요를 최초로 전파한 가수가 조용필 선생이다.

 

그리고 2013년에 아이돌 일색의 가요계에 다시한번 큰 의미로 다가왔다.

 

이런 열정과 집념을 가진 분들이우리곁에 있어 우리사회는 건강하고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이사진은 통도사 입구에서 조용필 화환이 보여서 기념 인증 샷......

 

 조용필 : 가수 

 출생 :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 

 소속 : YPC프로덕션 (대표) 

 학력 : 경동고등학교 

 수상 : 2013년 제7회 Mnet 20's Choice 20's 레코드상 

 경력 : YPC프로덕션 대표 

 관련정보 

 네이버[뮤직] - 아직 끝나지 않은 신드롬사이트 

 공식사이트,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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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의 본관은 임천조씨 (林川趙氏)이다.

계보 블로그답게 임천조씨에 대해 간략 기술()합니다. 


임천조씨 (林川趙氏)는 충청남도 부여군(忠淸南道 扶餘郡)에 있는 임천에 본관을 두고 있으며, 시조는 고려 때의 조천혁(趙天赫)이다.


묘소는 충남 부여군 장엄면 상황리에 있으며 매년 10월에 향사한다.


임천 조씨(林川趙氏)의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 후손이다.


증조부는 송 태조 조광윤, 할아버지는 연의왕(燕懿王) 조덕소(趙徳昭), 아버지는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이고, 숙부가 배천조씨(白川趙氏) 시조 조지린(趙之遴)이다.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에서 서두공봉관을 지내다가 979년(고려 경종 4년)에 국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아와 호서지방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 후 고려 현종때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군을 토벌한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올라 임천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후 후손들은 조천혁을 시조로 하고 임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11세손 조지서가 조선에서 이름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대표적 인물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면,

조응공 : 조선 중종 때에 황해도사 겸 춘추관기사관

조원경 : 성균관사성

조명정 : 우승지 충청도관찰사 이조판사

조병호 : 조선말기 문신

조지서 : 성종 때 청백리

조  원 : 시문, 선조 때에 정언이 되어 단쟁의 폐허를 상소, 승지

조희일 : 예조참판 등 역임

조석형 : 시문, 인조 때에 진사시에 1등, 벼슬 거부 학문 전념

조경호 : 흥선대원군의 사위, 공조, 예조판서, 일본정부 남작 거부


임천조씨는 조선조에 상신 1명 호당 1명 청백리 1명 문과급제자 38명을 배출하였고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임천조씨는 3,476가구 총 11,04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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