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이전까지의 인물에 대한 향명(鄕名)은 본관향(本貫鄕)과 세거향(世居鄕) 이다.
왕조실록 전기(傳記)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에 대한 향명(鄕名)은 본관향(本貫鄕)으로 기록되거나 세거향(世居鄕)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니면 출신지명(出身地名)인데 이것은 본관향이나 세거향으로 볼 수도 있고 별도의 출신지역으로 볼 수도 있어 논제에서 제외한다.
묘지명과 고려사 등을 고찰해 보면 묘지명과 고려사 등에는 성관지(姓貫地,본관지)가 아닌 기거지(寄居地)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봉작명 역시 기거지(寄居地)가 성관지(姓貫地)와 같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墓誌銘과 高麗史 및 封爵名 考察 : 본문하단 등재
본관(本貫)
조상들이 살던 지방을 일컫는 것으로서 '원적(原籍)'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본관'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개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姓)의 출자지(出自地). 향관(鄕貫)·관적(貫籍)·본적(本籍)·성관(姓貫)·본(本)·관향(貫鄕)·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보통 성(姓)과 병칭되어 개인의 부계 친족의 범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기 이후 성립된 것으로, 본관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성과 본관의 우열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본래 성씨와 더불어 본관제도가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의 상징으로 대두되었고, 그러한 신분관념이 아직까지도 민간의 사고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소급할수록 더욱 심하였겠지만, 성씨와 본관의 등급은 동성동본의 성원을 범주화시켜 내적으로 성원들을 결속시키고, 나아가 그들이 가진 지체를 유지시킨다.
또한 같은 등급의 성씨와 본관의 성원들은 하나의 계층으로 형성되고, 각 계층간에도 신분의 우열이 파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종사(宗事)나 혼사 등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으며 본관은 혈통계열을 표시하는 것으로 그 좋고 나쁨에 따라 등급이 부여되는 것이다.
성이 바로 부계(父系)의 혈통을 나타내면서 시간선상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보여준다면, 본관은 어느 한 시대에 정착하였던 조상의 거주지를 나타내므로 공간상의 의미가 크다.
즉, 성은 공동의 조상을 나타내는 부계의 핏줄을 뜻하며, 본관은 지명으로 표기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성립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성이 같고 본관이 같다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만 부계친족의 친근성이 밀접해지는 것이지, 성과 본관의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경우는 판이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성과 본관의 상관관계를 열거하면 동성동본(同姓同本)·동성이본(同姓異本)·이성동본(異姓同本)·이성이본(異姓異本)의 경우가 있다.
근대적인 호적제도가 시행되어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 본관의 사회적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지만, 특정 성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분관념의 상징으로서 잔존하고 있다.
|
우리사회의 본관 개념은 족보제도가 일반에게 뿌리 내리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인 점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초 까지 왕조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향명(鄕名)은 본관향(本貫鄕) 또는 세거향(世居鄕)이다.
당초에는 본관과 거주지가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국가적인 사민(徙民) 정책과 유이민이 발생하고, 지방 토성(土姓)의 상경종사(上京從仕)로 일치하지 않은 계층이 점점 증가하게 되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상경한 귀족과 관료층은 대체로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하지 않았다.
고려초기에 신라의 고관대작들이 경주에서 고려 개경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본관향(本貫鄕)과 세거향(世居鄕)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한, 집안에 큰 인물이 나게 되면 출세를 위해 다수의 인원이 포함된 본관향보다 자신의 일족만 포함된 세거향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왕조실록에 기록된 인물의 향명(鄕名)이 본관향(本貫鄕)인지 세거향(世居鄕)인지의 구분은 사학자들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고 세거향(世居鄕)으로 적용된 우리나라의 명문거족 광산김씨의 단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광산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유래에서 "별파의 고찰" 내용 발췌
광산김씨 현령공 효민(縣令公 孝敏)은 조선 초기의 인물로 문헌비고(文獻備考) 조선씨족통보(朝氏族統譜) 전고대방(典故大方)의 만성시조편(萬姓始祖編)등에 광산김씨의 일파(一派)로 등재되어 있으며,
세 아들이 모두 등과 하였는데 국조방목(國朝榜目)에도 모두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바,
장자 양경(良璥)은 1442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직을 거쳐 충청, 전라, 경기의 감사(監司) 공조, 호조, 병조의 참판(參判),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요,
차자 양완(良琬)은 1457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군수이며,
삼자 양전(良琠)은 1462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승문원교감(承文院校勘)으로, 모두 현달 하였으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성종실록 제167권(성종 15년 6월 21일자, 1484년)에 김양경의 전기(傳記)가 있는데 다음과 같이 '상주인(尙州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丙子, 前工曹判書 金良璥卒 綴朝賜賻弔祭如例 良璥字子寶 尙州人 正統壬戌登第..... 이하생략
21일자(병자), 전 공조판서 김양경이 사망하였는데 상례(常例)대로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부의(賻儀)물품을 내려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양경의 자(字)는 자보(子寶)요, (본관은?) 상주인(尙州人)이다. 세종 24년(1442) 과거에 급제하여 .... 이하생략】
아울러서 한국 인명대사전(韓國 人名大事典辭典: 1967年 新丘文化社 發刊)과 한국 인명 자호사전(韓國 人名字號辭典:1988年 啓明文化社 發刊)등에도 위의 실록에 따라 김양경의 본관이 상주(尙州)로 표기되어 있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 김양경의 상주인(尙州人)은 본관향이 아닌 세거향일수 있다.
김양경(金良璥) ?∼1484(성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자보(子寶). 아버지는 효민(孝敏)이며, 어머니는 박중유(朴仲游)의 딸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2년(세종 2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에 제수되었다. 그 뒤 박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 외직으로 옮겨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이어서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 지평(持平)을 거쳐 1461년(세조 7) 전첨(典籤)이 되었고 1463년 보덕(輔德)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467년 통정대부에 올라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1468년 통신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71년(성종 2) 형조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지방행정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호조참판·병조참판을 거쳐 1475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내고, 1479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안질로 실명하여 사임하였다. 성품이 과감하고 결단성이 강하여 공무를 잘 처리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참고문헌≫ 世祖實錄 ≪참고문헌≫ 成宗實錄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참고문헌≫ 國朝榜目 |
성명(姓名) |
김양경(金良璥) |
본관(本貫) |
광산(光山) 광주(光州) | ||
시대(時代) |
|
자(字) |
자보(子寶) |
호(號) |
|
이력(履歷) |
김양경(金良璥) ?∼1484(성종 1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보(子寶). 아버지는 효민(孝敏).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2년(세종 2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에 제수되었다. 그뒤 박사에 승진하였고, 1450년 외직으로 옮겨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이어서 성균관주부·지평을 거쳐 1461년(세조 7) 전첨(典籤)이 되었고 1463년 보덕(輔德)이 되었으며, 이듬해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467년 통정대부에 올라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1468년 통신사가 되어 일본을 다녀왔으며, 예종이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1471년(성종 2)형조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며 지방행정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공조참판·호조참판·병조참판을 거쳐 1475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부유수를 지내고, 1479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안질로 실명하여 사임하였다. 성품이 과감하고 결단성이 강하여 공무를 잘 처리하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世祖實錄, 成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김양경 [ 金良璥 ] 김양경 [ 金良璥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보(子寶). 시호 공숙(恭肅). 효민(孝敏)의 아들. 1442년(세종 2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성균관박사를 지낸 뒤, 1450년 석성현감(石城縣監)으로 나갔다. 이어 성균관주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461년(세조 7)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이 된 뒤 보덕(輔德)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당상관에 올라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 1468년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예종 즉위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고, 1471년(성종 2) 형조참의를 거쳐 전라도 ·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72년 종2품에 올라 공조 ·호조 ·병조의 참판을 두루 지내고, 1475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대사헌을 지내고, 1480년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안질로 실명하여 사직하였다. 결단성이 강하여 공무처리에 능했다.
<국조 문과 방목> 왕/년도 : 세종(世宗) 24년 과거시험연도 : 1442 임술 시험명 : 친시(親試) 등위 : 병과4(丙科4)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량경(金良璥) 자 : 자보(子寶) 본관(本貫) :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공숙(恭肅) 소과 : 1441(신유) 진사시 전력(前歷) : 진사(進士) 품계 : 정헌대부(正憲大夫) 관직(官職) : 형조/판서(刑曹/判書) [가족사항] 제(弟) : 김양완(金良琬) 부(父) : 김효민(金孝敏) 외조부(外祖父) : 박중유(朴仲游) | ||||
형제(兄弟) |
제(弟) 김양완(金良琬) <국조 문과 방목> 왕/년도 : 세조(世祖) 3년 과거시험연도 : 1457 정축 시험명 : 친시(親試) 등위 : 정과3(丁科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량완(金良琬) 본관(本貫) : 광산(光山)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지인(知印) 관직(官職) : 군수(郡守) [가족사항] 형(兄) : 김양경(金良璥) 부(父) : 김효민(金孝敏) 외조부(外祖父) : 박중유(朴仲游) 처부(妻父) : 노효공(盧孝恭) | ||||
형제(兄弟) |
제(弟) 김양전(金良琠) <국조 문과 방목> 왕/년도 : 세조(世祖) 8년 과거시험연도 : 1462 임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정과3(丁科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김양전(金良琠) 자 : 대가(待價) 본관(本貫) : 광주(光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교감(校勘) [가족사항] 형(兄) : 김양경(金良璥) 부(父) : 김효민(金孝敏) 외조부(外祖父) : 박중유(朴仲游) | ||||
문헌(文獻) |
1. 광산김씨(光山金氏) 몽시(蒙諡) 世 휘자(諱字) 직 위 (職 位) 생졸(나이) 시호(諡號) 별파 김양경(金良璥) 공조판서(工曹判書) ?-1484 공숙공(恭肅公) |
--------------------------------------------------
또 다른 예를 보자
고려시대 문신 김양감은 광산김씨 7세로 되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일부 사서에 광양김씨로 되어 있다.
이는 광산(光山)은 본관향(本貫鄕)이고 광양(光陽)은 세거향(世居鄕)으로 보이는데 김양감에 대한 자료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出身)으로 나와 있다.
-------------------------------------------------------
김양감(金良鑑: 광산김씨 7世)은 문종조에 급제하여 상서우승․좌간의대부․어사대사를 거쳐 태복경(정3품)에 이르렀으며, 문종 27년(1073) 송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일부 사서에 광양 김씨로 나온 것은 잘못이다.
1074년에 태복경으로 중서사인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 절강성)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산기상시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판상서병부사․권판중추원사를 거쳐 1082년 좌복야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로서 문하시랑평장사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올랐다.
1090년 문하시랑으로서 지공거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 등을 뽑았다. 이자겸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文秀鎭(문학박사, 한국사)
http://www.kwangsankim.co.kr/family.php?main=kkysa1.html&PageNum=2&sub=1&m=27&subM=sub27
한자 : 金良鑑 (김양감) 영어음역 : Gim Yanggam 이칭/별칭 문안공(文安公)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 인물/전통인물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시대 :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 박상일
성격 : 문신 출신지 : 충청북도 음성군 성별 : 남 생년 : 문종조 몰년 : 선종조 본관 : 광산 대표관직 : 시중(侍中)
[정의] 고려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아들은 학문에 힘써 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른 김약온(金若溫)이다.
[활동사항]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尙書右丞)·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었다. 1074년에 태복시경(太僕寺卿)으로 사은사가 되어 송나라에 가서 고려 사신들이 이용하는 등주(登州)를 요(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로 바꿀 것을 청하여 합의하였다.
이듬해에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예부시랑(禮部侍郞)·참지정사(參知政事)·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를 역임하였다. 1082년(문종 36)에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 초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086년(선종 3)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이듬해에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1090년(선종 7)에 문하시랑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李景泌) 등을 뽑았는데,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에 시중(侍中)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하기도 한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음성군지』(음성군지편찬위원회, 1996)
출처 : 디지털 음성문화대전 http://eumse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100756
|
김약온(金若溫 1059~1140 : 광산김씨 8世)은 양감의 아들로서 예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상의봉어(尙衣奉御 정6품)를 거쳐 광주통판(廣州通判)이 되었다가 중서사인이 되었다. 1122년에는 지추밀원사겸 태자빈객이 되었으며, 인종이 즉위한 뒤 참지정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 다음해 검교사도수사공상주국, 1140년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하고 죽으니 나이 82세였다. 시호는 사정(思靖)이라 하였다. 성품이 공검(恭儉)하고 염정(廉靜)하여 일찍이 부귀하면서도 남에게 교만하지 않고 이자겸과 인척이라도 선비들이 다투어 붙는데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세상이 그 정의로움에 놀랍게 여겼다. 이자겸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광산 김씨 김정준의 외손자이다. 『고려사』에 그의 열전이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김부식의 앞에 있다. 이 당시 이름난 문벌로 유홍(柳洪)의 문화 유씨, 김부식의 경주 김씨, 김인존의 강릉 김씨, 김은부의 안산 김씨, 이자겸의 인주 이씨, 윤관의 파평 윤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광산 김씨였다.
김의원(金義元 : 광산김씨 8世)은 문안공 김양감의 아들로 아버지의 음덕으로 장사랑, 군기주부동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종 4년 병마판관이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예종 8년에는 형부시랑으로 요나라에 가서 사례하고 돌아왔다. 인종 4년 동지추밀원사(종2품)로 발탁되었으나 이자겸의 실각으로 인척이라 하여 양주로 좌천되었다. 인종 10년 공부상서 수대도호부사․호부상서 겸 삼사사를 제수하고 금자광록대부(정2품)에 특진되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자겸이 전횡을 부릴 때에도 그와 동조하지 않고 문중을 지켜냈다.
김양감 (金良鑑) 고려시대의 문신. 문종 ·선종 대에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이자겸과 인척이면서도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출생-사망 ? ~ ? 본관 광산 시호 문안(文安)
본관 광산. 시호 문안(文安).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尙書右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尙書左丞) ·어사대지사가 되었다.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되고, 중추원동지사 ·예부시랑(侍郞)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병부판사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1087년(선종 4) 상서호부판사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이르렀다. 이자겸(李資謙)과 인척이면서도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출처 : 두산백과 |
김양감 (金良鑑) 이칭별칭 : 시호 문안(文安) 유형 : 인물 시대 : 고려 출생 - 사망 : 미상 ~ 미상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광양(光陽) 저서(작품) : 가락국기 대표관직(경력) : 판상서호부사, 수태위, 문하시랑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양(光陽). 1070년(문종 24) 상서우승 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가 되고, 이듬해 상서좌승 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종전의 등주(登州)를 거치는 항로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명주(明州 : 浙江省)로 변경하는 데 합의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호부상서·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로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이정공(李靖恭)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1090년(선종 7)에 문하시랑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우간의 손관(孫冠)과 함께 진사 이경필(李景泌) 등을 뽑았는데, 그 답안이 격식에 맞지 않아 주사(主司)에 밝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자겸(李資謙)과 인척이면서도 정의를 지켜 끝까지 그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하기도 한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송사(宋史)』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사정이 이러함에도 일부 사학자들은 조선중기 이전부터 고려시대에 기록된 향명(鄕名)이 본관향(本貫鄕)인지 세거향(世居鄕)인지 아니면 출신지명(出身地名)인지 명확하지 않음에도 본관향(本貫鄕)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본관향(本貫鄕)이 압도적으로 많았겠지만, 당시에 일부 명문가나 세도가들은 각종 기록에 세거향(世居鄕)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본관향(本貫鄕) 보다는 세거향(世居鄕)이 집안의 내부결속을 다지고 입신 출세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본관향(本貫鄕), 세거향(世居鄕), 출신지명(出身地名)을 혼용하여 사용하다가 조선중기 이후 각 문중에서 족보를 만들게 되면서 본관향(本貫鄕)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 것인데 이러한 기본 개념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아쉽다.
------------------------------------------------
본문에 대한 참고자료
墓誌銘과 高麗史 및 封爵名 考察 (묘지명과 고려史 및 봉작명 고찰)
1153년에 金光中이 撰製한 김의원 묘지명이 1910년에 출현되었는데 일부학자가 그 묘지문에
"公諱義元 羅州光陽縣人也"(공휘의원 나주광양현인야) (韓國金石文追補 P.132.)라 한 점과 고려사 열전 김약온전(高麗史 列傳100)에 김약온을 "光陽縣人"이라 기록한 점, 그리고 김의원 장녀인 "崔允儀 妻 金氏墓誌銘 최윤의 처 금씨묘지명에″ "光陽郡夫人"이라 한 점과 김약온의 사위인 "尹彦이墓誌銘"에 윤언이 처 김씨를 "光陽郡大夫人"이라 한 점 및 "東國與地勝覽" 광양현 인물편에 김약온이 있는 점을 들어 인명의 전후에 "0 0 인"이라 한것은 부계혈통을 뜻하는 성관일 것으로 단정하고 "김의원묘지명"에 기록된 김길까지를 모두 광양김씨라고 해석하므로 인하여 상계를 알 수 없어 우왕좌왕하던 광양김씨종중에서 이 그릇된 일부학자의 주장을 1997년에 간행한 족보에 등재하고 광산김씨 선대를 그들의 선대로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묘지명과 고려사 등을 고찰해 보면 묘지명과 고려사 등에는 성관지(본관지)가 아닌 기거지가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봉작명 역시 기거지가 성관지와 같이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墓誌銘 검토
묘지명은 탑비(塔碑)에서 유래되었다. 中國漢代에 탑비가 크게 발달했는데 漢末인 205년에 조조(曹操)가 후장(厚葬)의 폐단을 없에기 위해 입비금지령(立碑禁止令)을 내리면서 지상(地上)에 비를 세우는 것을 억제했다.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역시 278년에 입비를 억제했다. 그 사이 탑비를 대신해서 소형의 묘비를 만들어 묘광(墓壙)속에 매장하는 풍습이 성행했고 묘지명은 그것에서 유래했다.
묘지명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특히 북위(北魏)에서 더욱 발달하였다. 북위의 묘지명에는 標題, 姓氏, 諱, 字, 籍里, 世系, 行蹟, 官歷, 卒年, 追增官位, 諡號, 年齡, 葬年, 葬地 등으로 되어있다. 世系는 家의 선조를 적는데 曾祖, 祖父, 父, 外祖의 四祖가 通例이다. 이 경우 조상의 官位와 諡號를 적는다. 위에 적은 북위시대의 서술형식이 唐, 宋의 시대에도 거의 변화없이 이어졌으며 우리나라에도 같은 형식이 수용되었다.
(中田勇次郞 "中國墓誌精華" "中國의 墓誌" 1975년)
고려시대 묘지명은 標題, 姓氏, 諱, 字, 籍里, 世系, 行蹟, 官歷, 壽年, 家族關係(妻 子). 葬年(卒日), 葬地 등 대체로 12項目의 誌文이 基本項目이었다.(韓國精神文化院 "高麗時代硏究")
위에 지적한 북위(北魏)시대(386-584)부터 唐, 宋代에 이르는 중국의 묘지명과 고려시대 묘지명에 기록하는 "적리(籍里)"는 오늘날의 姓籍(本貫)과는 달리 籍을 올리고 居住한 기거지적(寄居地籍)을 뜻하는 것이었다. "大漢和辭典"(諸橋轍次 1955년)에 貫籍을 出生地 戶籍, 寄居地에서 얻은 籍이라 하였고 "辭海"에는 籍貫을 속칭 世居地名籍이라 함은 이 때문이다.
묘지명에 기거지를 기록한 예.
泉男生 誌文 : "公姓泉 諱男生 字元德 遼東郡 平壤城人" (679년. 한국금석문추보 255면)
泉男産 誌文 : "君諱男産 遼東朝鮮生也" (702년. 男生 弟. 한국금석문추보. 261면)
泉獻誠 誌文 : "君諱獻誠其先高麗國生也" (692년 泉男生 子. 한국금석문추보 261면)
泉毖 誌文 : 諱毖 字孟堅 京兆萬年人也(729년 泉男生 曾孫. 한국금석문추보 264면)
*泉男生, 泉男産은 연개소문의 아들이요 泉獻誠은 孫子며 泉毖는 玄孫이다.
高句麗國本紀에 연개소문은 봉성인(鳳城人)이라 하였으니 위 묘지문의 이름 뒤 地名은 姓貫地가 아닌 寄居地임을 알 수 있다. 천비의 묘지문에 "京兆府 興寧里之私第卒"이라 함은
천비가 경조부 만년현 흥녕리 자기집에서 졸하였다는 뜻이다. 천남생의 집이 장안(長安)의 興寧坊에 있었다고 했으니 천비는 증조인 천남생의 집을 물러받아 살다가 그 집에서 졸하였음을 알 수 있다. (史念海 "西安歷史地圖集"-1977년-)
靜眞大師 碑文 : "大師諱競讓 俗姓王氏 公州人也"(965년. 朝鮮金石總覽)
*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 성씨편에 왕씨는 없으니 寄居地名이다.
惠居國師 碑文 : "師 法諱 智ㅇ 惠居軒 號也 俗籍 溟州朴氏 川寧郡 黃驪縣人也"
(994년. 羅末麗初金石文)
* 혜거국사의 성관은 명주박씨로 川寧郡 黃驪縣에 적을 올리고 居住한 기거지명이다.
崔함 誌文 : "書遷 有二子 其季諱韓用 入朝仕- - - 始居京師 其後世 爲王京人"
(1060년. 朝鮮金石總覽)
* 崔함묘지명에 최한용의 후손들은 모두 왕경인 즉 개성인이라 했으나 이는 기거지를 뜻함이니 그의 후손들이 모두 수원최씨로 되어있다. (崔함 誌文, 崔士威 誌文, 崔繼芳 誌文, 崔褒抗 誌文, 崔觀奧 誌文, 崔精 誌文, 崔祐甫 誌文, 崔孝思 誌文, 水原崔氏譜)
盧卓儒 誌文 : "君諱 卓儒 杞溪縣人也" (1191년. 朝鮮金石總覽)
* 노탁유는 交河伯 盧塢의 후손이며 기계현 출신으로 교하노씨이다. (交河盧氏譜)
白任至 誌文 : "姓 白氏 大興郡人"( 1191년. 朝鮮金石總覽)
* 백임지는 수원백씨 8세로 수원백 白揮의 玄孫이다. 백임지의 祖인 白可臣이 藍浦의 峨嵋山下 태을동에 살다가 洪州로 이사해 살았으며 남포인 子婦를 얻었고 이로 인해 백임지는 외가인 남포에서 살다가 대흥군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적을 옮겼기 때문에 묘지에는 대흥군인으로, 고려사 열전에는 남포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高麗史 白任至傳, 水原白氏譜)
尹智 誌文 : "寶城玉菓縣人也" (1149년. 韓國金石文追補)
*世宗實錄地理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 玉菓縣 성씨편에 尹氏는 없으니 윤지가 옥과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는 뜻이다.
金喧 誌文: "字 用晦 義城縣人也"( 1305년. 韓國金石文追補)
*김훤은 廣州金氏 2세이다.
金開物 誌文; "義城縣人也" (1327년. "韓國金石文追補" 605면)
*김개물은 廣州金氏 3세이다.
琴儀 誌文 :"金浦縣人"(1354년. "朝鮮金石總覽" 605면)
*금의는 봉화금씨로 김포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奉化琴氏譜)
韓宗愈 誌文 : "字曰 師古 漢陽人"(1353년. "朝鮮金石總覽" 669面)
*한종유는 청주한씨 9세로 한양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崔安道 誌文: "先世 海州人 後徙 龍州人 占籍(1340년. "朝鮮金石總覽" 625面)
*최안도는 해주인으로 후에 이사하여 용주(수원)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趙公卓 誌文: "淳昌郡人 後徙 姻아 水原府 龍城縣"(1344년. "朝鮮金石總覽" 634면)
*조공탁은 순창군에 적이 있었는데 혼인으로 인해 후에 이사하여 수원부 용성현에 적을 올리고 거주하였다.
*朴恩卿교수는 '호적은 본관지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있는 곳에 올리는 것이므로 본관(姓貫)과 호적등재지는 다른것이다. 고려의 호구단자에서 호주의 거주지와 본관이 일치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호적은 본관성립이전 국가의 성립과 그 시기를 같이 하면서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또한 본관은 국가의 의도적 장치로서 보다는 각 씨족의 지역적 의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호적 등재지와 본관을 일치시켜 이해하려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고 하였다.("高麗時代鄕村社會硏究" 31面 本文 및 註44.)
고려사에 "開城에 사는 大小人員의 자제들이 부역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에 附籍하지 않고 고향친척호적에 附籍함을 禁한다"는 내용이 있다. 호적은 성관과 상관없이 거주지에 부적해야 하는 것이다. (高麗史 卷99. .食貨2, 戶口, 仁宗13년 2월)
위에서 고찰했듯이 김의원묘지명에 "公諱義元 羅州光陽縣人也"라 한것은 姓貫地를 뜻함이 아니고 寄居地를 뜻하는 것이므로 '김의원이 나주광양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2. 高麗史 검토
高麗史 列傳 등에 姓貫地가 아닌 寄居地를 記錄한 例
申崇謙 : "光海州人"(高麗史 列傳 -洪儒 傳 附-)
*신숭겸은 평산신씨(太祖가 平山으로 賜籍)시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평산도호부 인물편에 '申崇謙 本來 全羅道 谷城人'이라 하였다.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출신으로 광해주에서 살다가 전사하였다. 묘는 春川남쪽 悲方洞에 있다. 1584년(선조17)에 谷城 天德山下에 신숭겸을 享祀하는 祠宇가 세워졌으며 1695년(肅宗 21)에 "德陽祠" 라 賜額하였다. 그의 출생지로 알려진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신숭겸의 壇所가 있다.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谷城郡誌, 平山申氏譜)
崔凝: "黃州土山人" (高麗史 列傳)
*최응은 황주토산 출신으로 開城崔氏 2世이다.(고려사, 開城崔氏譜)
李靈幹 "潭陽人" (高麗史)
*이영간은 담양출신으로 文宗時에 宰相이며 新平李氏 4世이다.
(高麗史, 海東金石苑, 新增東國輿地勝覽, 新平李氏譜)
盧永淳 : "杞溪縣人也" (高麗史 列傳)
*노영순은 기계현출신이며 交河盧氏 3세로 交河伯 盧塢의 후손이니
父는 盧卓儒, 祖는 盧康弼이다. (고려사, 新增東國輿地勝覽, 交河盧氏譜)
孫변 : "樹州人" (高麗史 列傳)
*손변은 밀양손씨 15세로 樹州(富平)출신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密陽孫氏譜)
趙暾: "世居龍津" (高麗史 列傳)
*조돈은 한양조씨 4세로 祖父인 趙暉가 龍津으로 이사하여 용진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高麗史 列傳 趙暉 傳. 漢陽趙氏譜)
白文節: "藍浦郡人" (高麗史 列傳)
*백문절은 남포(保寧屬面)출신으로 수원백씨 7世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白氏譜)
白任至: "藍浦縣人" (高麗史 列傳)
*백임지는 수원백씨 8世로 光山人 文貞公 金策의 외손인 白可臣의 손자이다.
백임지는 외가의 鄕인 藍浦에서 적을 올리고 살다가 후에 大興郡으로 이사하여
대흥군에 적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열전에는 藍浦縣人으로,
묘지명에는 大興郡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白任至墓誌銘, 新增東國輿地勝覽, 水原白氏譜)
白文寶: "稷山人" (高麗史)
*백문보는 수원백씨 10世로 稷山(天原屬面)출신이며 稷山府院君에 封爵되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白氏譜)
李子松: "靑陽人" (高麗史 列傳)
*李子松은 수원이씨 시조이며 본래 公州李氏 33世孫 李仁濟의 次子로 靑陽出身이다.
1365년(공민왕13)에 公川君, 公山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묘는 靑陽郡 靑陽面 교월리에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水原李氏譜)
文正: "長淵人" (高麗史)
*문정은 南平文氏로 장연출신이다. 그는 문종초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종34년(1084)에 동여진을 정벌했으며 선종 때 문하시중이 되고 만년에 私學을 일으켜 그 學徒들을 貞獻公徒라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南平文氏譜)
文益漸: "晉州江城縣人" (高麗史 列傳)
*문익점은 남평문씨 12세로 남평문씨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高祖인 文得俊이 晉州 江城縣으로 이사하여 이 때부터 강성현에 적을 올리고 살았기 때문에 新增東國輿地勝覽 丹城縣(江城縣) 인물편에 문익점이 등재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南平文氏譜)
金希제 : "本群山道人 開城留居以爲籍" (高麗史 列傳.)
*김희제는 萬頃金氏 시조로 선조가 商船을 따라 開城에 가 살면서 부터 籍을 개성으로 하였다. 그는 1227년(高宗14)에 全羅道都巡問使로 있을 때 崔瑀가 해치려하자 바다에 몸을 던져 自殺하였다. 후손들은 선대의 전 世居地인 만경(金堤屬面)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萬頃金氏譜)
韓彦恭: "湍州人" (高麗史 列傳)
*한언공은 淸州韓氏 3世로 湍州(長湍)출신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韓安仁: "湍州人" (高麗史 列傳)
*한안인은 淸州韓氏 7世로 단주(장단)출신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韓宗愈: "漢陽人" (高麗史 列傳)
*한종유는 淸州韓氏 9世로 漢陽출신이다.(한종유묘지명,, 淸州韓氏譜)
韓文俊: "大興郡人" (高麗史 列傳)
*한문준은 대흥군(禮山屬面)출신으로 淸州韓氏 12世이다.(고려사절요, 淸州韓氏譜)
金暄: "義城人" (高麗史 列傳)
*김훤은 金開物의 父로 廣州金氏 3世이다.(金開物墓誌銘, 廣州金氏譜)
위와 같이 사료에 성관지와 함께 기거지가 기록되어 있으니 이러한 예는 朝鮮初에도 散見(산견)되고 있는바 國朝榜目에 광산인 金孝敏의 세 아들, 金良璥(世宗 24년 及第), 金良琬(世祖 3년 及第), 金良琠(世祖 8년 及第) 삼형제의 본관이 광산으로 되어 있는데 성종실록에 있는 김양경의 卒記에는 "尙州人"이라 하였고(成宗實錄 167卷 成宗15年 6月21日 丙子) .
- 이 기록에 의해 "韓國人名大辭典"과 "韓國人名 字號辭典"에 김양경의 본관이 尙州金氏로 되어있음-
1501년(연산 7)에 광산인 忠正公 金克成이 저술한 "憂亭集"에 '曾祖 護軍公(김남호)墓碣"에서 "曾祖以下凡四世不遷金氏遂爲保寧人" 라 하여 曾祖이하 4世가 보령에 世居하여 保寧人이 되었다고 하였다.
(憂亭集 卷4. 429면 -奎章閣所藏-)
3. 封爵名(봉작명) 검토
일부학자가 봉작명은 성관지(본관지)와 동일하다고 단정하여 김약온 女를 "광양군부인",
김의원 女를 "광양군대부인"이라 한 묘지명 기록을 本(姓)貫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봉작명은 寄居地와도 연관이 있으니 그 例는 다음과 같다.
* 封夫人은 文武常參官 以上의 母 또는 妻에게 주어졌다.
(高麗史 志 卷29. 選擧)
姓貫地와 相異한 封爵 例. (성관지와 상이한 봉작 예)
貞州人 太祖妃 柳氏 : 河東郡夫人 -柳天弓의 女로 神惠王后- (高麗史 列傳1)
郎州人 崔知夢 : 東萊郡侯 (高麗史 列傳23)
淸州人 李(王)可道 : 開城縣開國伯 (高麗史 列傳7)
牛峰人 崔忠獻 : 晉康郡開國侯(熙宗元年), 晉康公 (高麗史 列傳12)
牛峰人 崔瑀(怡) : 晉陽侯, 晉陽公 (高麗史 列傳42)
金仁俊 : 翼陽郡開國伯 -翼陽은 김인준의 外鄕- (高麗史 列傳43)
全州人 柳邦憲 : 河東縣開國侯 (朝鮮金石總覽 柳邦憲墓誌銘)
安東人 金方慶 : 上洛郡開國伯 (高麗史 列傳17)
南陽人 洪子藩 : 慶興郡開國侯 (高麗史. 忠烈王 21年)
慶州人 李齋賢 : 金海侯 (高麗史 列傳23)
全州人 李成桂 : 和寧郡開國侯 (高麗史. 恭讓王 元年)
南陽人 洪子藩 : 慶興君 (高麗史 忠烈王 33年)
延安人 印侯 : 平陽君 (高麗史 忠烈王 34年)
陽川人 許悰 : 定安君, 定安府院君 (高麗史 列傳, 許悰墓誌銘)
水原人 白英臣 : 夫餘君 (水原伯 白揮의 6世孫. 水原白氏譜)
竹山人 朴全之 : 延興君 (竹山朴氏譜, 仁川李氏譜 - 外家가 慶源李氏-)
竹山人 朴遠 : 慶源君 -慶源은 仁川古號- (박전지의 子, 祖母가 慶源李氏, 죽산박씨보)
裵挺 : 高興君 (忠宣王 1年), 完山君(忠宣王 2年) (高麗史)
慶州人 李진 : 臨海君 (臨海는 金海古號) (高麗史 忠肅王 元年)
慶州人 李琯 : 駕洛君 (駕洛은 金海古號) (李 의 子, 경주이씨보)
慶州人 李齋賢 : 金海君 (高麗史 列傳, 李齋賢墓誌銘)
全州人 朴恩德 : 昇平君 (昇平은 順天古號) (全州朴氏譜)
全州人 李定 : 永川君 (全州李氏譜)
迎日人 鄭夢周 : 永原君 (高麗史 列傳), 益陽君 (高麗史 恭讓王 2年)
信川人 康允成 : 象山府院君 (信川康氏譜)
信川人 康舜龍 : 銀城府院君 (신천강씨보)
信川人 康昱 : 花山君 (신천강씨보)
全州人 崔誠之 : 光陽君 (高麗史 列傳, 忠惠王 元年)
豊川人 任子松 : 西河君 (高麗史 忠肅王 7年)
水原人 白이正 : 上黨君 (高麗史 忠肅王 10年)
平康人 蔡洪哲 : 順天君 (高麗史 列傳, ,蔡洪哲墓誌銘)
昌寧人 曺精通 : 鐵冶君 (高麗史 忠烈王 代)
安東人 權載 : 鷄林府院君 (高麗史 忠肅王 元年)
同福人 吳潛 : 龜城君 (高麗史 忠肅王 3年)
淸州人 韓仲禮 : 繼城君 (高麗史 忠定王 2年)
淸州人 韓宗愈 : 漢陽人 (高麗史 忠惠王 復位 4年, 韓宗愈墓誌銘)
彦陽人 金敬直 : 均球君 (金倫 妻 金氏墓誌銘)
遂安人 李壽山 : 春城君 (高麗史 列傳)
仁川人 李元紘 : 連山君 (高麗史 禑王 10年)
淸州人 李邦直 : 狼川君 (高麗史 禑王 10年)
水原人 白天鳳 : 稷山府院君 (水原白氏譜)
水原人 白文寶 : 稷山府院君 (수원백씨보)
德水人 李千善 : 樂安君 (-外家가 樂安金氏-, 新增東國輿地勝覽, 氏族源流, 德水李氏譜, 樂安金氏譜)
晉州人 柳成庇 : 文山君 (陽川許氏譜)
晉州人 柳良梓 : 金姓君 (양천허씨보)
晉州人 柳資成 : 文山君 (양천허씨보)
晉州人 柳元庇 : 文平君 (양천허씨보)
務安人 兪千遇 : 長沙君 (고려사, 고려사절요, 務安兪氏譜)
安東人 金利請 : 上洛君 -上洛은 尙州古號- (씨족원류, 安東金氏譜)
安東人 金孝綬 : 上洛君 (김방경 叔父,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孝組 : 上洛侯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흔 : 上洛君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恂 : 上洛君 (김방경 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旽 : 上洛府院君 (김방경 孫,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縝 : 上洛君 (김영돈 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永 :上洛君 (김영돈 제,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厚 : 上洛君 (김방경 증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昻 : 上洛君 (김방경 증손, 씨족원류, 안동김씨보)
安東人 金忠甲 : 上洛君 (안동김씨보)
驪興人 閔寧 女 : 龜城郡夫人 (崔繼芳墓誌銘)
漢陽人 趙琳 : 龍川府院君 (趙暉 孫,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暾 : 龍城府院君 (高麗史 -恭愍王이 漢陽에 집을 下賜-,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世珍 : 漢山伯 ( 趙琳, 趙暾과 6寸兄弟, 씨족원류, 漢陽趙氏譜)
漢陽人 趙仁璧 : 漢山府院君 (趙暾 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仁沃 : 漢山君 (조인벽 弟,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英茂 : 漢山府院君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溫 : 漢川府院君 (조인벽 長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漢陽人 趙涓 : 漢平府院君 (조인벽 次子, 씨족원류, 한양조씨보)
* 고려사 열전 趙暉전과 趙暾전에 依하면 조돈의 祖인 조휘가 龍津에 이사하여 그곳에 적을 올리고 살다가 1352년에 공민왕이 조돈에게 한양에 집을 하사하여 조돈의 자손들이 한양에 적을 올리고 살았다. 기거지가 용진이었던 조림과 조돈은 "용"자로 봉군받았으나 한양에 적을 올려 세거했던 조돈의 자손들 14명은 "漢"字로 封君받았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봉작명은 성관지와 함께 기거지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김약온과 김의원의 女가 "光陽郡(大)夫人"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하여 김약온과 김의원의 姓(本)貫을 광양김씨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으로 관찬 광양읍지(奎章閣所藏)의 고려시대 科臣편에 김황원은 광양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김약온은 광산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전기에 광산김씨 가문과 인척관계에 있던 해주최씨 문헌록에 문헌공 최충의 文徒名單이 등재되어 있는데 김양감과 김약온을 광주(산)김씨라 했으며
광산김씨와 연혼관계에 있던 인천이씨 보첩에도 김정준의 본관을 광산김씨라 했고 萬曆 28년 庚子季秋 初一日(宣祖 33年 1600년 9월 1일)에 光山卓氏族譜 序文을 外裔인 淸州人 栢谷 鄭崑壽가 撰했는데 그 서문에 광산탁씨시조 卓之葉이 "어릴 때 光山金문정공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번연히 卜地의 계획을 각오하고 - 중략-
經書를 안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드디어 瑞石의 남쪽(광주 무등산)에 一室을 쌓아 瑞石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으니 문정공 金策께서는 관직에서 퇴임하여 광주지방으로 낙향해서 그 곳에서 후학을 가르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일부학자의 주장은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 晟峰. 자료출처 : 광산김씨 시중공파 홈페이지
'안김 뿌리찾기 > 뿌리찾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 성(姓)의 유래 / 본(本)의 기원 (0) | 2013.08.31 |
---|---|
옛날 지명 찾기 / 가나다 순 (0) | 2013.08.31 |
자신의 뿌리를 찾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0) | 2013.08.10 |
서긍이 본 5명의 고려 관리에 대한 풍모 - 고려도경 (0) | 2013.07.30 |
신라김씨 김알지의 선조는 누구인가 ? (0) | 2013.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