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 아닌 박연 ?
한국경제 28면2단
기사입력 2012-10-04 18:33
최종수정 2012-10-05 00:09
◇ 박연과 훈민정음 (박희민 지음)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가 세종이 아니라 난계 박연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난계유고》《세종실록》 등의 기록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20일의 기록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요건으로 운서를 아는 사람,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나온다는 것.
저자는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춘 박연이야말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고 말한다.
훈민정음의 정착을 위해서 임금이란 강력한 힘이 필요했기에 박연이 문자를 창제했지만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했다는 것이다.
(박희민 지음, 휴먼북스, 380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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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박연과 훈민정음』은 난계 박연 가(家) 500년 역사와 박연의 음악과 시 등에서 발휘된 찬란한 업적 또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연의 성장환경에서부터 계유정난의 간당으로 귀양을 떠나기까지의 박연의 삶은 물론, 이후 영조 43년(1767)년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고 박연이 추복되기까지 양반 아닌 양반으로 살아야 했던 난계 후손들의 질곡까지 담아냈다.
익히 알려진 악성으로서의 음악 세계와 난계가 남긴 시 12편에 대한 해설도 소개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소와 ‘가훈 17칙’을 통해 박연의 사상 또한 밝히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저자 박희민은 경북 김천시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수학하였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교육대학교와 영남대학교를 거쳐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계명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이다. 초등학교 시절, ‘난계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난계 박연에 대한 존경심을 품게 된 이후, 숙명처럼 이 책을 펴내기에 이르렀다.
9년여에 걸친 자료 수집과 치열한 연구 끝에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확신하고 500년 박연 가(家)의 역사와 난계의 업적을 모아 펴낸 《박연과 훈민정음》을 통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실(史實)이 사실(事實)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머리말
1. 박연의 성장환경
충북 영동
빙옥정
다섯 명문
할아버지 박시용
박연의 학연
2. 박연의 결혼과 왕실
박연의 아내 여산송씨
원경왕후ㆍ정순왕후
44년의 관직생활
3. 계유정난과 핏들의 전투
계유정난
이산가족
핏들[피야평]의 후예들
4. 박연의 유고
《난계유고》를 만든 사람들
《난계유고》 서문과 사육신
《난계유고》의 허ㆍ실
5. 박연의 훈민정음
훈민오음정성
언문[훈민정음] 28자의 등장
훈민정음 창제자의 세 가지 조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의 역할
박연을 신뢰한 세종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과정
훈민정음 반포
왜 세종의 훈민정음이라 할까?
왜 박연의 훈민정음일까?
6. 박연의 음악 세계
율관ㆍ악기의 제작
악서 편찬
악공의 처우개선
의식음악 정비
신악의 창조
7. 박연의 시 12편
안평대군ㆍ송유ㆍ서거정
사촌 형제 박흥생ㆍ박흥거
함흥ㆍ교하ㆍ울산
8. 박연의 도학사상
박연의 도학사상
박연의 충효사상
박연의 애민사상
박연의 ‘가훈 17칙’
출판사 서평
■ 한글은 정말 세종이 창제했나?
진정한 훈민정음 창제자는 박연이다!
한글날 556돌을 맞아 훈민정음의 창제자가 세종이 아니라 난계 박연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출간되었다.
밀양박씨 난계파 후손인 박희민 씨가 쓴 《박연과 훈민정음》이 바로 그 책이다.
저자는 애초 《난계유고》 증보판을 내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난계유고》와 《세종실록》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난계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확신하고 9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이 책을 펴내게 되었다. 세종 주도, 집현전 학자들의 보조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고 통용되어 온 상식에 반기를 든 셈이다.
저자는 9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찾아낸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사실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창제의 모든 영광이 세종에게 돌아간 정황과 이유 등을 분석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근거로 저자는 《세종실록》의 기록과 《난계유고》의 상소문을 제시한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세종의 반박논리가 《세종실록》 세종 26년 2월 20일의 기록에 나온다. 이 반박논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사람의 세 가지 조건이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 그것은 첫째, 운서를 아는 사람, 둘째,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인지 아는 사람, 셋째, 백성에게 훈민정음으로 된 삼강행실을 반포하자고 주장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려신서》와 《홍무정운》 등 운서에 정통하고, 사성칠음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1번 소에서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며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한 박연이야말로 훈민정음의 진정한 창제자라고 밝힌다.
박연이 각각의 자격요건을 갖추었다는 역사적 근거와 정황 또한 분석하고 있다.
특히《난계유고》 1번 소는 그간 박연을 위대한 음악가로만 본 탓에 ‘방음부정(方音不正)’이라는 어구를 ‘음악이 바르지 아니하여’로 해석하였으나, 조선 초에 음악은 악(樂)이라 하였고, 말은 음(音)이라 하였기 때문에, 바른 해석은 ‘우리말이 바르지 아니하니’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훈민오음정성이정민풍(訓民五音政聲以正民風)’을 주장하는데, 박연의 이러한 주장이 세종의 언급에서도 그대로 인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박연 주도, 세종의 지원 하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는 것.
이 외에도 박연이 훈민정음의 주자를 제작하고 세종에게 훈민정음을 교육하였다는 정황 등 훈민정음 창제 전 과정에 개입한 근거들을 제시하며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를 증명한다.
■ 난계 박연 가(家) 500년 역사와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한 박연의
업적!
박연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는데 왜 오랜 역사 동안 훈민정음의 창제자로서의 박연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자로 알려져 온 것일까?
이에 대해 저자는 훈민정음 창제에 세종의 역할이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 당시 사대부가 아닌 일반 백성을 위한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와 정착을 위해서는 임금이란 강력한 힘이 필요했던 것. 즉 박연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해서는 박연의 신변만 위태로울 뿐이어서, 세종과 뜻이 일치한 박연이 이를 창제하고 세종의 이름으로 반포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는 강력한 왕권시대였기 때문에 왕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근세에 와서는 한글의 위대함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세종의 이름이 필요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거기에다 저자는 1910년 이전까지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해방 후까지도 학자들이 한문으로 된 영인본 위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도 그 이유로 제시한다. 그런 사이 세종과 집현적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고정 관념화 되었다고 말한다.
반면 박연은 아악을 정리한 위대한 음악가라는 편견이 고착화되어 훈민정음과 연계하여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박연의 아들 박계우가 계유정난 간당으로 몰려 교형을 당하고 자신 역시 귀양을 가게 되는 역사적 비극의 와중에 그의 업적이 축소 및 외면당하는 양상이 나타났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 민족 최대의 업적 중 하나인 한글의 진정한 창제자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박연과 훈민정음》은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혀 있기는 하지만, 난계 박연 가 500년 역사와 박연의 음악과 시 등에서 발휘된 찬란한 업적 또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연의 성장환경에서부터 계유정난의 간당으로 귀양을 떠나기까지의 박연의 삶은 물론, 이후 영조 43년(1767)년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고 박연이 추복되기까지 양반 아닌 양반으로 살아야 했던 난계 후손들의 질곡까지 담아냈다. 익히 알려진 악성으로서의 음악 세계와 난계가 남긴 시 12편에 대한 해설도 소개하고 있으며, 《난계유고》의 소와 ‘가훈 17칙’을 통해 박연의 사상 또한 밝히고 있다.
저자는 〈박연과 훈민정음〉을 통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실(史實)이 사실(事實)이 되기를 바라며, 국가적 차원에서 ‘박연’과 ‘훈민정음’에 대해 새롭게 연구 검토할 것을 주장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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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연표(年表)
세종 05년(1423) 03월 23일 :《율려신서》홍무정운 등 문헌 연구 세종 09년(1427) 06월 23일 : 훈민정음 창제 상소문 세종 21년(1439) 04월 24일 : 훈민정음 창제 완료 세종 21년(1439) 04월 25일 : 공조참의로 주자제작 실정 파악 세종 22년(1440) 06월 26일 : 공조참의로 훈민정음 주자제작 완료 세종 22년(1440) 07월 02일 : 예조 업무 복귀 세종 24년(1442) 10월 27일 : 예조참의로 훈민정음 창제 발표를 위한 환경 조성 세종 25년(1443) 08월 22일 : 중추원 부사로 숙위(宿衛)하며 세종에게 훈민정음 교육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 훈민정음 창제 발표
자료출처 : http://bb112288.blog.me/ |
박연 (朴堧, 1378년 음력 8월 20일 ~ 1458년3월23일)
조선 초기의 문신, 도학자, 경세가, 문장가, 천문학자, 음악가이다. 초명은 연(然), 자는 탄보(坦父), 아호는 난계(蘭溪), 당호는 송설당(松雪堂)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며, 밀양 박씨 좌복야공파후 난계파조이다.
세종의 고갱지신(股肱之臣)으로 훈민정음을 실제 창조하고 양보하여 왕이 감동하고 총애가 극에 달하였다 함. * 股肱之臣(고갱지신) :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臣下)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신임(信任)하는 중신(重臣)을 이르는 말
생애 박연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308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학문이 탁월하였으며, 효심이 지극하여 시묘를 6년하여 1402년(조선 태종 2년)에 조정에서 효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1405년(태종 5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1411년 문과에 제1위(장원)로 등과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집현전 교리(敎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찬집(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1427년(세종 9) 편경 12매를 제작,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로 연주케 했고 3년 후 다시 미비한 율관을 수정했다. 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을 폐하고 아악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했다.
1431년 남급(南汲)·정양(鄭穰)과 회례(會禮)에도 아악을 채택케 하고, 조회와 회례에서 종전까지 기생이 추던 춤을 무동(舞童)으로 대치하여 문무이무(文武二舞)의 작변지절(作變之節)과 속부남악지기(俗部男樂之伎)를 추게 하여 궁정 음악과 예법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1433년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되어 아악에 종사하였으며, 공조 참의·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 부윤(仁壽府尹)·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다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집현전 한림 이었던 세째아들 박계우가 구금되어 국문당하고 처형(1454.9.9)되어 숙종조(1698)에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어 영월 장릉에 배향된후 정조조(1791) 어정배식 정단 31절사로 배향되었다.
박연은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고산에 안치 (1454.9.9 ~ 1458.2.2)되어 가훈 17장을 지으니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 ~ 1746)가 서문을 찬(撰)하였다.
사후 1767년 영조 43년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197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영동에 난계사를 세우고 1973년부터 매년 연례 행사로 난계예술제를 지내고 있으며 서울에 난계로와 난계공원이 있다.
평가 특히 적(笛 : 피리)의 명 연주가였으며 조선 초 미비한 궁중음악을 정비하여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린다.
가계 장인 : 판서 송윤 부인 : 정경부인 여산(礪山) 송씨 아들 : 박맹우(朴孟愚) 아들 : 박중우(朴仲愚) 아들 : 박계우(朴季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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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과 훈민정음 책 표지
머리말
*** 저(笛) ==> 적(笛 : 피리 적)
독자를 위한 tip(조언)
笛(적)이란
뜻을 나타내는 죽(竹 : 대나무)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구멍을 뚫는다는 뜻을 가지는 유(由)자로 이루어진 글자로 대나무에 구멍을 뚫어 만든 악기(樂器)를 말합니다.
적(笛)의 고자(古字)는 적(篴 : 피리)입니다.
적 (笛 = 篴)
한국 전통악기 가운데 죽부(竹部)에 속하는 공명악기(共鳴樂器).
단소와 같이 세로로 부는 관악기로 취구의 모양도 단소와 같이 U자형이다. 지공(指孔)은 앞쪽에 5개, 뒤쪽에 1개로 모두 6개이다.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에서 전해졌고 음열은 2율4청성이다.
〈악학궤범〉을 보면 원래는 4공이었는데, 후한(後漢)의 경방(京房)이 1공을 더하여 5공을 갖추었다고 한다.
황죽(黃竹)으로 만들고 관대 아래 끝의 마디에 십자공(十字孔)을 만들며, 앞에 5공, 뒤에 1공, 밑과 양 옆에 각각 1공씩 하여 모두 8공인데, 제1공이 뒤에 있다.
오늘날 적을 만드는 재료는 오죽(烏竹)을 쓰며, 아래 끝마당에 십자공을 뚫은 점이 특색이나 현재는 십자공을 뚫지 않고 단소와 같이 관통시켜놓았다.
음색은 부드러우나 음량이 약하다. 현재는 문묘제례악에서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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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아악 팔음 중 죽부(竹部)에 속하는 관악기이다. 취구와 지공6이 있어서 청공없는 퉁소와 비슷하다. 관대 끝은 그냥 뚫는 것이 아니라, 네 개의 구멍을 파고 도려내어 십자공 모양으로 만든다. 또한 끝에 양쪽으로 옆구멍을 하나씩 뚫는다. 예종 11년(1116)에 수용된 대성아악을 통해 고려에 들어와서 현재 문묘제례악에서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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