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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년전 은나라 홍도관, 한국에서 발견 최하 1500억원 가치

by 연송 김환수 2012. 7. 7.

 

【서울=뉴시스】이예슬 기자 = 대만 신생보(新生報)가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帝辛)이 '목야(牧野)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참고로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은나라가 아닌  '상나라' 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제목(殷商古物現身韓國 占星紅陶罐出土) 아래 7개 서브타이틀(前言, 輾轉經手 不知是寶物, 陶罐甲骨文 暗藏天機, 熱釋光檢測 真偽解惑, 殷古物 總算驗明正身, 歷史價值 金錢難衡量, 專訪甲骨文專家 朴大鍾: 紅陶罐 來歷不凡)로 대서특필했다.

 

 

 

 

 

 

◇은나라 유물 한국에 현신(現身),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토

 

원래는 단지 어깨부위에 꽃무늬가 있는 일개 화병으로만 여겨졌던 향토적 홍도관이었다. 처음엔 그 둘레에 원형으로 새겨진 불규칙적 꽃무늬가 곧 갑골문임은 명확히 인지되지 않았다. 고증을 거치면서 이 일단의 갑골문은 역사적 '목야(牧野)의 전쟁' 사실과 관련이 있고 이 물건은 중국역사의 은상 유물인 것으로 능히 검증돼 현재 한국에 현신(現身)했다.

 

1899년 중국대륙 은허 유적지에서 발견된 갑골문 이후 지금까지 약 15만 편의 갑골이 출토돼 세상에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그 중 대부분은 귀갑수골 위에 새겨진 것이고 또한 대부분은 모두 파손된 불완전한 것들이며, 도기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드물 뿐만 아니라 물건이 거의 완정에 가까운 것은 더욱 보기 어렵다. 그리고 출토된 물건 위에 새겨진 갑골문 내용을 연구해보면 점복으로써 길흉을 묻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점 사실(史實)을 기술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은(殷) 주왕(紂王) 홍도관의 출토는 별도로 상조문화의 신영역에 대한 일개 연구를 개창하는 것이 된다.

 

특히 홍도관 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주왕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이 홍도관이 상나라 주왕의 왕실유물일 수 있음을 증명, 가히 일건의 세계급 문화유산이자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 및 역사 형성에 대한 충격은 모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여러 손으로 옮겨가는 동안 보물인 줄 몰랐다

 

한국인 골동품 수집가인 안 선생은 중국대륙을 자주 다닌 사람으로, 1992년 또는 1993년 요녕성 부신(阜新)시 외곽지역에서 현지 골동상으로부터 1차로 물건들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 이 홍도관이 포함돼 있었다. 그 후 안 선생은 이 물건을 요녕성 심양시 만융촌 내 거주지에 보관해두었다. 2005년 7월20일 전후로 안 선생은 이 홍도관을 또다른 한국인 골동품 수장가인 석 선생에게 팔았고, 석 선생은 8월18일 홍도관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중국 북경공항에서 X레이 검색을 받은 뒤 북방항공편을 이용해 한국 인천공항으로 들여왔다. 홍도관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석 선생은 또 8월 말에 또다른 김 선생에게 팔았고, 접수자인 김 선생 또한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에게 소유권을 양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동 과정 중에서 소유인 모두는 홍도관 상에 새겨진 것을 단지 꽃무늬가 수려하고 독특하다라고만 생각했지, 그 특별한 의의와 가치는 진정으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현재 소장자인 조 선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 선생은 홍도관을 획득한 후에도 특별히 중시하지 않고 단지 일반가정에 진열해놓았다. 텔레비전 받침대 위에 놔둬 평시에는 그것을 수장함(收藏盒)이 되게 하고 손길가는대로 일부 잡동사니와 어린 아들의 장난감들을 담아놓았다. 2005년 12월24일 저녁시간, 조 선생은 TV를 보는 도중, 동시에 시선이 이 홍도관에 이르렀는데, 곧 그것을 손으로 붙잡고 자세히 한 번 감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문득 이 독특한 꽃무늬가 중국 고문자와 닮았고, 만일 그렇다면 이 홍도관은 진정한 골동품일 수 있음을 경각(驚覺)했다. 또한 이 고문자에 대해 도대체 무슨 뜻인지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이에 이튿날 그는 즉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을 찾았고 그때부터 홍도관이 갖는 진정한 신분의 역정(歷程)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천기가 암장된 제신홍도관(帝辛紅陶罐) 갑골문

 

갑골문은 일종의 매우 중요한 고한자(古漢字) 자료이다. 절대 부분은 은허에서 발견됐는데 기본적으로는 모두 은상왕조 통치자의 점복기록이다. 은허는 저명한 은상시대 유적지로 그 범위는 하남성 안양시 서북 소둔촌, 화원장, 후가장 등지를 포괄한다. 이곳은 일찍이 은상 후기 왕조들의 도성 소재지인 까닭에 은허라 불리운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 하나는 바닥부위에 있고, 나머지 60개 글자는 도관 견부에 있는데, 중복된 부분을 제외하면 총 49자이다. 도관 견부의 60개 글자들은 각자 모두 하나의 완전한 원을 형성하고 있는데 결코 조금의 간격도 없이 단원횡행(單圓橫行) 방식으로,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서사돼 있다. 그 주요사항은 성상(星象)을 관찰하고 전쟁결과를 추구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은 왕조때의 고유 점자 새겨진 홍도관

 

연구에 따르면 '주왕(紂王)'이라고도 하는 은상 최후의 황제 '제신(帝辛)'의 재위 만기 시에 '태백경천'이라고 하는 금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반란 및 국가기강을 파괴하는 대흉조였으니 은상으로서는 왕조 존망이 걸린 절박한 지경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때마침 주나라 무왕이 기병해 주(紂) 왕을 치려는 시기여서, 주왕은 화근을 소멸시키기로 결정하고 이에 출병 전에 제사의 예를 거행하고 성상을 관찰, 그 결과를 구해 물었다. 주왕이 평상시처럼 그 결과를 수골(獸骨) 위에 새기지 않은 까닭을 규명해보면, 그 주된 원인은 중국전통의 천간과 지지는 60으로써 한 사이클을 이룬다는 사고방식이 있는데 주왕은 응당 천자의 군대가 작전 중에 전체 과정을 끝까지 가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둥근 원에 꽉 차게 표시를 한 것은 승리를 획득해 상왕조의 사직을 지키는 의의가 있다. 이에 주왕은 특수한 정황에 직면한 상태에서 특수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장차 결과는 60개의 글자들을 둥근 도관 위에 새겨 구웠으니 이것이 곧 현재의 이 홍도관이다.

 

60개의 갑골문자는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다. 제1조 복사는 '금(金)'에서 '후(侯)'까지로, 추구해 묻는 사항을 설명하고 있다.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제2조복사는 '조(祖)'에서 '어(御)'까지로 계속해서 질문을 구함과 아울러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년 전 주왕과 주후서백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진위 의혹을 풀기 위한 열석광검측(熱釋光檢測)

 

옛 물건에 대한 진위를 고증하는 일은 일단 힘들고 고생스러우며 또한 완전무결함을 얻기가 매우 어려운 과정이다. 각 방면으로부터 힐책이 따르게 되는데, 물론 선의도 있고 혹은 악의도 있다.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상세하게 하나하나 해설을 해줘야 한다. 진정한 것인지에 이르러야 의문자로 하여금 진심으로 신복(信服)하게 만드니 오직 '진인사청천명(盡人事聽天命)' 밖에 없는 것이다.

 

홍도관의 고증에 대해 갑골문 방면의 의혹이 따랐는데,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박대종 저 '상제신(商帝辛)의 점도문(占陶文)에 관한 연구' 논문에 매우 상세하게 설명돼있어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해, 이 갑골문은 도대체 어느 때 새겨졌는지, 도기를 굽기 전에 새겼는지 아니면 도기를 구운 후에 새겼는지 등의 의문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경기도무형문화재 제37호인 김일만 옹기장은 비록 홍도관 상의 각문을 한 글자도 알지 못하지만 집안 대대로 6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옹기 명인으로, 그가 제기한 견해는 전문적일 뿐만 아니라 권위도 있다. 그는 "홍도관 위에 새겨진 문자는 점토로 기물의 형태를 완성한 다음 완전히 굳기 전에 새기고 나서 자기에 비해 낮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며, 이미 구워낸 도기에 이처럼 섬세한 곡선을 새겨넣는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홍도관과 글자'는 함께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이 홍도관은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가 낮고 묵직해 일반적인 그런 맑고 듣기 좋은 소리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장기간 흙속에 매장돼 습기를 받았기 때문이며, 사용한 도토는 곧 강 근처의 토질이다”고 표명했다. 이 두 가지 견해 또한 홍도관이 장기간 지하에 묻혀 있었던 것과 은상 도성의 위치 및 실제정황이 모두 완전히 부합한다.

 

이밖에, 갑골문이 발견된 연대가 1899년이므로 그 이전에는 이런 종류의 문자를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자연히 위각(偽刻)이 나타나기는 불가능하므로, 홍도관의 소성연대가 1899년보다 더 이르다는 것이 증명되기만 하면 홍도관 상의 갑골문의 진실성은 실증된 것에 해당한다. 그래서 홍도관 소장자인 조 선생은 중국 고문자학자인 중산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선진의 '열석광검측'을 진행, 홍도관의 연대를 판단키로 결정했다.

 

◇검측으로 정신(正身)이 증명된 은나라 유물

 

2008년 3월 조 선생 등은 홍콩의 고동감정유한공사(古董鑑定有限公司), 중과연발유한공사(中科研發有限公司), 성대전업고문유한공사(城大專業顧問有限公司) 및 중국상해박물관 문물보호 고고과학실험실에 열석광검측을 신청했다. 홍도관의 안전을 고려해 한국에 방문해 시료채취(샘플링)하는 조건이었는데 결과는 오직 성대(城大)만이 받아들여 그 책임자인 량보류(梁寶鎏) 박사가 4월15일 방한했다. 이와 동시에 조 선생 등은 또한 상해박물관 하군정(夏君定)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홍도관 분말을 칼로 긁어내어 국제우편으로 상해박물관에 보내 검측을 진행했다.

 

2008년 4월23일 홍콩 성대(城大)의 검측보고가 나왔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465년이었다. 이는 홍도관이 옛 물건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이어 바로 며칠 뒤 4월25일에 상해박물관 또한 검측결과를 제출했는데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미만이고, 또 홍도관은 모방제작한 모조품이라 말했으니 양가(兩家)의 감정결과가 1000년 이상 차이가 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할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년이 경과해 전자우편으로 연락, 상해박물관은 제2차검측 및 하군정을 파견키로 결정한다. 그는 2009년 12월14일에 친히 한국을 방문해 직접 시료채취를 했는데, 22일자 발표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이고 오차는 ±100년이었다. 이러한 검측결과는 비록 홍도관이 진정한 옛 물건임을 실증하는 것이었지만 검측연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사람들로 하여금 완전히 신복(信服)케 하기 어려운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유감을 풀 길이 없어 조 선생 등은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에 요청, 최종 검측을 진행키로 결정한다.

 

2012년 2월26일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는 요원들을 한국에 파견, 시료를 채취했다. 3월8일자로 발표된 검측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700~2700년 전이었다. 홍도관은 출토된 지 20년 이상이 지나 비로소 열석광검측을 진행했고 더욱이 출토 후 뜨거운 햇빛을 받고 뜨거운 물로 세척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검측결과로 인해, 물건의 연대가 오직 감소할 수는 있지만 증가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지금에 이르렀음을 감안하면, 홍도관은 정신(正身)을 밝힌 것으로 응당 은상의 고물(古物)이라는 점에 추호의 의문도 없게 된다.

 

◇역사적 가치 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무왕벌주(武王伐紂)', '목야(牧野)의 전쟁'은 우리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제신홍도관의 출토는, 고대도자발전사 발전과정을 명백히 나타냈다는 의의 외에 도관상의 갑골문 또한 은상시대 언어문자학 및 천문성상학 방면에 대한 천석(闡釋)을 갖추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가장 적극적인 의의는 상(商)과 주(周) 왕조가 서로 대항하는 균형성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기(史記)', '상서(尚書)'에 기술된 역사 내용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검증해줬다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돈으로 값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

 

◇갑골문 전문가 박대종 전방(專訪), 평범치 않은 홍도관의 내력

 

박대종은 갑골문을 연구한 한국인이다. 그가 2005년 12월25일 처음으로 제신홍도관을 보았을 때 그의 표정은 거의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는 홍도관 바닥 부위에 새겨진 ‘占(그 외부에는 囗이 있음)’자가 은상시대 복사 전문용어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것이 은나라의 유물임을 알고 놀랐다. 그가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지 15년간에 오직 보통의 점복 사건을 기재한 100여 건의 갑골문만을 접촉한 적이 있었을 뿐이고 이번 경우는 전연 그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홍도관은 현저하게 그 내력이 평범치 않았다. 갑골문을 연구한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구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고 또한 만날 수는 있으나 구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의 손은 바야흐로 한 건의 완정한 역사적 사실을 기재한 3000년된 유물일 가능성을 붙잡고, 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말 청천벽력 같았으며, 일순간 온 몸의 감각이 소름이 끼치고 전율했다고 한다.

 

3일이 경과해 자지도 쉬지도 않고 연구한 끝에 그는 홍도관 견부상의 60개 갑골문자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것은 상왕조 말엽 국가가 긴급사태에 직면해 황제가 별점을 쳐 점괘를 구한 결과를 기술한 것이었다. 또한 그 새김 문자들 중에는 황제와 강적 라이벌의 이름이 명백하게 나와 있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이것이 상 왕조의 역사 사실을 완정하게 기술한 홍도관이며 이처럼 완정하게 보존된 세계 유일의 국보급 유물임을 인식했다.

 

2006년 2월 박대종은 제신홍도관의 갑골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뒤이어 수년 동안 그는 부단히 논문을 개진했고 외부의 질의들에 대해 일일이 해설해 지금은 의심을 품은 목소리가 갈수록 적어지게 됐으며, 홍도관의 신분은 점차 모두의 인정과 동의를 획득하게 됐다. 이 모두는 박대종의 공헌이며, 그 공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ashley85@newsis.co

 

 

 ▲ 은대(殷代) 홍도관

 

 

 

 ▲ 일본의 고문자학 대가인 나리케 테쓰로(成家徹郞) 교수는 "홍도관

    글자의 필획 부분의 색이 도기의 흙색과 같은 것으로 보아 글자를

    새기고 나서 구운 것으로 은대(殷代)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 홍도관 바닥면(殷代 의占자 확대)

 ▲ 열석광(TL) 측정을 위해 홍도관 윗부분에서 조각칼을 사용하여

    시료를 채취하고 있는 중국 상해박물관 하군정(夏君定) 선생의

    모습. (2009년 12월 15일)

▲ 중국 문화부 문물보호기술 직인이 찍힌 은대(殷代) 홍도관에 관한

    상해박물관 열석광 연대 측정보고서.(2010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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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

"61개글자 해독과정 다큐로 남기고파"

한국과 중국을 포함해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닌 은대(殷代)의 홍도관은 고문자연구가인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박 소장이 홍도관에 새겨진 61개 글자를 해독함으로써 가능해진 것. 박 소장은 "홍도관을 연구하고 나니 보다 많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며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관련성을 더 심도 있게 연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 은대의 홍도관을 연구하게된 계기는

"중국으로부터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홍도관을 구입한 사람은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공예품으로 여겼지 은대 문자가 새겨진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역사에 조예가 있는 지방지 기자가 홍도관을 접하고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고대 토기 관련 전문가, 고문자 전문가들을 수소문하다 나를 찾아왔고, 그래서 홍도관을 연구하게 됐다

 

▲ 박대종 대종언어연구소 소장.

- 홍도관 연구가 쉽지 않았을 텐데

"홍도관 명문(銘文)을 해석한 후 국내 전문가와 논의를 해보려 했으나 갑골문에 대해 정확히 아는 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의 고문자, 고고학 전문가들과 토론을 했고 여러 성과를 거뒀다. 연구 중간에 홍도관의 진위가 거론되곤 했는데 2008년 홍콩에 이어 올초 중국 문화부의 고고과학적 검측 결과 진품임이 확인돼 일단락됐다"

- 이번 홍도관의 중요한 가치를 꼽는다면

언어문자학적으로는 기존 갑골문 및 금문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글자들이 발견되었다. 천문점성학 면에서는 중국천문학이 인도천문학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증빙자료가 되어 이 부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또 역사고고학적 분야에서는 은나라가 망할 무렵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이 현대의 첨단 천문학에 의거하여 그 연대를 밝힐 수 있고 나아가 그 연대로써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할 수 있으니 그 또한 큰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이 홍도관으로 인해 각필부호의 기원, 서법의 역사, 중국도자사의 역사 등 여러 면에서 기존의 학설이 수정되어야 하는 일들이 뒤따를 것으로 판단된다."

- 향후 계획은

"홍도관 주둥이 아래의 측면에 빙 둘러 원형으로 새겨진 고대의 글자들을 탐색하고 그 진정한 가치를 밝히는 과정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원정대가 겪었던 것 못지 않게 매우 험난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신비스러운 일도 많았는데 그간의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남기고 싶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홍도관이 자신의 진가를 빛내줄 곳에 안착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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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이 새겨진 은대(殷代, BC 1600~BC 1046년) 유물이 한국에 있습니다. 무려 3000년이 된 자기입니다. 은나라 마지막 왕 제신(帝辛, 일명 주왕 紂王)이 글을 새겨 남긴 홍도관(紅陶罐)이 금년 1월 중국 문화부의 고고과학적 검측 결과 진품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은 그의 <商帝辛(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2006년) 논문에서 홍도관의 은문(殷文) 61개 글자가 은왕조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 주왕紂王)이 주(周, BC 1046~BC 256년)나라 무왕(武王)과의 국가 흥망이 걸린 결전을 앞두고 별점(星占, 角星占)을 친 내용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 갑골문

 

▣ 판독문

金見. 率辛師 亡周侯元西伯行 右師田自州西邑 祖丁乙爪 有明紀斁任 允自西伯侯. 祖丁乙! 征文夕祀, 辛丁乙師眉走 亯井, 朕御皿(蠱) 曰: 角眀, 有余征導舟0玄, 田封, 它肯御.> (O=民밑에 巴)

 

▣ 번역문

"(대낮에 불길하게도)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辛의 군대를 이끌까요. 서백(주 무왕)의 항오(군대)와 그 우군(연합군)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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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은대 마지막 제왕인 신<辛(=子受辛)>이 주나라 武王(무왕)과의 전쟁을 앞두고 별점(金星占, 角星占)을 친 내용이 기록돼 있는 '홍도관'엔 역사적 실존 인물이 등장, 300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생생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관심을 끌고 있다.

1992년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신시(阜新市) 외곽지역에서 구입, 한국인이 소장하고 있는 홍도관은 갑골문을 제외한 현존 은문 유물 중 유일하게 밑바닥에 '점'(큰입구 囗 안에 占)자가 새겨져 있다.


13일 문자해독자 박대종씨(45.대종언어연구소 소장)는 홍도관 명문 원문과 해독 전문을 공개했다.

1조=金見. 率辛師? 亡周侯元西伯行右師田自州西邑? (금현, 솔신사? 무주후원서백항우사전자주서읍?)<(불길하게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나(辛)의 군대를 이끌까요? 周侯元 서백의 항오(군대)와 그 우군이 洲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祖丁乙爪? 有眀紀斁任? 允自西伯侯. (조정을조? 유명기두임? 윤자서백후). <승하하신 조왕 文丁과 부왕 帝乙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로 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2조=祖丁乙! 征文夕祀, 辛丁乙師眉走? 享井, 朕御蠱? (조정을! 정문석사, 신정을사미주? 향정, 짐어고?) <조왕 文丁과 부왕 帝乙이시여! 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辛丁乙) 군대가 끝까지 갈(승리할) 수 있을까요? 井星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曰 : 角眀, 有余征導舟‘民+巴’玄, 田封, 它肯御.(왈 : 각명, 유여정 도주민현, 전봉, 타긍 어)<왕이 星兆를 살펴 길흉판단을 하여 가로되, “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文을 정벌하여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정벌된 文의 땅 서읍은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가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홍도관 명문엔 은나라 紂王(주왕)의 명호인 辛(신)과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칭위인 '西伯(서백)' 등이 최초로 등장해 놀라움을 더해주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 史記 등엔,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기원 1000여년 전) 殷나라의 제후국 통치자인 周 무왕이 두차례 은나라 침입을 시도, 첫 번째는 회군했고 두 번째 침입에서 비로소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사실을 감안하면 홍도관 명문은 주 무왕의 2차 침입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대종 소장은 “중국 최초의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현으로 복사(卜辭)하면 갑골문(甲骨文)만 떠올리던 기존관념은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며 “商 帝辛(제신)과 周侯(주후) 西伯(서백)의 전쟁 직전 상황을 기록한 내용은 실존인물의 생생한 증언으로 史記와 尙書(상서), 春秋(춘추), 竹書紀年(죽서기년) 등 주요 史書 기록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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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은나라)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

 

상(商)은 문헌에 따라 은(殷)이라는 명칭도 나타나 한때는 국가의 명칭을 은(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은은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일 뿐이며, 은(殷)이라는 명칭은 상 왕조가 멸망한 뒤 주(周)에서 상의 주민들을 낮게 호칭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상(商)이다.

 

하(夏)·상(商)·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전승되는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는 그 존재 자체가 아직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다행히 상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實在)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상은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오랜 국가이다. 상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상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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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辛占陶 논문(제목: 商帝辛의 占陶文에 관한 연구) 중 陳煒湛 先生의 序와 結論

제신점도 논문(제목: 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 중 진위담 선생의 서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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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현재 한국에 있는
은나라 마지막 천자 제신 왕의 유물
3천여년된 星占 紅陶罐이

세계 최고 권위의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에서
금년 2월말 한국에 요원들을 파견,
Gong Art Space에서 시료를 채취하여
TL(열석광) 측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700~2700년전(1st Millenium BC)으로 나왔습니다.
옥스퍼드 추가 소견서에는 'Neolithic Age(신석기시대)' 유물이라 기재돼 있구요.
옥스퍼드 감정공사의 감정결과서를 위에 첨부합니다.

도기를 땅속에서 발굴하자마자
검은 비닐 등에 싸서
실험실에 보내 과학측정을 하면 연대가 정확히 나오는데요.
그렇지 않고 뜨거운 햇빛에 노출되거나
도기 표면의 흙을 닦아낸다고 뜨거운 물로 씻으면
열을 이용하여 나오는 光의 강도로써 연대를 측정하는
열석광측정 결과는 감소되게 마련인데요.

그래서 그러한 감소오차를 감안하면
이 홍도관에 대해
지금으로부터 3천여년 전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이 남긴 유물이라 감정한
박대종 소장의 해독이 정확하였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중국 대만의 CNA와 新生報 기자들이 직접 유물을 취재하였는데요.

어제 2012년 7월 5일에 신생보에서
전면 특집기사로 이 제신홍도관에 대해 아주 상세히 보도하였습니다.

그동안 엄청나게(!) 노력을 하였는데요.
이렇게 좋은 결실을 맺게 되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바랍니다.

殷商古物現身韓國 占星紅陶罐出土
◎記者藍賓誠/專題報導 2012/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