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제향,행사

위정사 불천위(국불천위) 연성군 할아버지 제사

by 연송 김환수 2011. 8. 19.

 2011. 8.14 (음력 7.15) 연성군 정경 할아버지 불천위 제사가 충북 괴산군

장연면 위정사에서 있었다.

 

안산김씨 대종회 임원과 소종회장이 모두 참석해서 기제를 지냈다.

 

 

 

 

 

 

 

 

 

 

 

 

 

 

 

 

 

 

 

 

 

 

=================================================================================================

 

위 정 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위정사 불천위(국불천위) 제사

 

불천위 제사 (국불천위 제사)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부조위(不조位)란 불천위(不遷位)라고 해서, 본래 제사는 고조할아버지까지 4대 봉사를 하고 4대가 지나면 조묘제조(墓祭)를 지내고 더이상 제사 지내지 않게 되어 있으나,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영원토록 위패를 옮기지 않고 4대 봉사 이후에도 대대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했는데 그것을 불천위라 하며 공신이 된자들은 경국대전 봉사조항 세칙에 의해 국불천위(國不遷位)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그 가문의 영광이며 권위인 것이다.

 

1667년(숙종 8) 김정경()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위정사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7월 15일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다.

 

========================================================

 

불천위 [不遷位]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불천지위(不遷之位) 또는 부조위(不祧位) 라고도 하며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으신 분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특별히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게 되어 있으나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다.

 

불천위에는 나라에서 인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와 유림에서 발의하여 정한 향불천위(=유림불천위), 문중에서 모셔야 한다고 뜻이 모아진 사불천위(私不遷位=문중불천위)가 있다.

 

국불천위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하며 왕이나 왕자, 부마 등도 국불천위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향불천위보다는 국불천위가 더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되며 향불천위와 사불천위는 조선후기 그 수가 너무 많아져 권위와 질서가 문란해 지는 결과를 낳았다.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므로 불천위제사는 이러한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시제사보다 휠씬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게 된다.

 

대표적으로 은혜리의 퇴계 이황 종가, 하회마을 겸암 류운룡 종가와 서애 류성룡 종가, 봉화 닭실마을 충재 권벌 종가, 의성의 학봉 김성일 종가의 불천위제사가 많이 알려져 있다.

 

 

조선조에서는 나라에서 정하여준 국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공신들에게만 해당되었다. 차등봉사를 규정한 경국대전 봉사조항 세칙에는 공신이 된 자는 대가 비록 다하여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따로 방 하나를 세운다고 되어 있다. 별묘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조선조는 건국과 태종· 세조의 왕권확립 과정에서 수많은 공신이 생겨났다. 조선왕조실록 세조3년(1457)의 기록을 보면 예조에서 "천자 7묘, 제후 5묘, 대부 3묘이지만 천자와 제후 모두 백세불천위가 있고 대를 이어온 대부의 경우에는 처음 봉해진 사람을 불천위로 제사지냈으니 개국공신(開國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정난공신(靖難功臣)·좌익공신(左翼功臣) 이 다섯 공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삼묘(三廟) 이외에 별도로 일실(一室)을 만들어 그 제사를 받들게 하라"고 건의하자, 세조가 허락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정사에 봉안된 연성군 김정경의 위패

 

 

위정사 :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광석마을)

 

1994년 1월 7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12호로 지정되었다.

1667년(숙종 8) 김정경()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이다. 매년 음력 7월 15일(불천위 제사)과 10월 29일 2차례 향사한다.

 

{* 10월29일 향사는 양력 4월 5일 위정각(하남시 감북동) 향사로 바뀌었다}

 

 

위정각 :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157 (안촌마을)

 

김정경(1345~1419)은 본관은 안산, 시호는 위정()이다. 진주목사(使) 성경()의 아들로, 태조()에서 태종까지를 섬긴 조선시대 초기의 장군이다.

 

1396년(태조 5) 예빈시판사()로 전라·충청 각지의 성을 수축하고 군비의 점검과 병선()의 허실을 조사하였다.

 

삼군절도사(使), 이조전서() 등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 6)에는 정조사(使)로서, 또 1410년에는 성절사(使)로서 2차례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 4등으로 책록되고, 연성군()에 봉해졌다.

 

사당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위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김수해(金秀海) (1569~?) 宣祖2 己巳(기사

 

본관(本貫)은 안산(安山)이며 김인손(金仁孫)의 아들이다.

선조(宣祖)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때 공(公)은 현재 광석리에 은거(隱居)하면서 위선사업으로 5대조의 위정공(威靖公)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였고

 

벼슬이 형조(刑曹)참의(參議)인 옥(보배鈺, 자는 仲鈺)은 9조대인 연성군의 위정사(威靖祠)를 건립(建立)하고 벼슬은 병조(兵曹)참판(參判)을 지냈다.

 

공(公)의 신도비(神道碑)는 종중(宗中)의 발의(發意)로 사당(祠堂)앞에 건립(建立)하였다. 건립기 1980년 18대손 김제천(金濟千) 괴산군지(槐山郡誌) 인물(人物)

 

金鈺(1617 - ?)은 김정경의 9대손으로 자는 仲玉이고,

부는 덕제, 모는 河濱李氏이다.

묘는 서향으로 부인(淑夫人漢陽趙氏)과의 합장묘이다.


봉분의 크기는 4.4×1.5m이며 상석, 망주석, 묘비를 갖추고 있다.

묘비명 : ‘贈 通政大夫 刑曹參議 安山金公 鈺 之 墓’

 

괴산 장연면 광석리는 괴산파의 뿌리이며 안산김씨의 집성촌이기도 합니다

좌 우측에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은 안산김씨 선산으로 조상님들의 묘소가 있으며

가장 오래된 묘소는 6대조 할아버지 묘소 입니다.

 

 

 

 

김정경의 신도비


김정경의 신도비는 2기가 있다.


①위정사 앞마당에는 199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18대손 濟千이 撰하고 성균관 典學 崔奎煥이 썼다.


비의 크기는 260(140)×54×24㎝이며 비 앞면에

‘推忠奮義 翊戴 佐命功臣 崇政大夫 行吏曹典書 蓮城君 諡 威靖安山 金公 諱 定卿 之 神道碑’ 라 쓰여 있다.


②동리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1980년에 안산김씨 대종회에서 세운 것으로 크기는 265(165)×56×29㎝이다.

 

 

 

 

 

 

위정공은 일찍이 남용이 세 번 반복했다는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말을 좋아하였고, 황석소서를 즐겨 읽어 무릇 벼슬하여 일을

처리 할 때에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발굴 : '황석공소서'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1405년 제주도판 '황석공소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가 발굴됐다.

고문서 연구가 박철상(42)씨는 조선 태종 5년(1405) 11월에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
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판각한 '황석공소서(黃石公
素書)'를 발굴했다고 4일 말했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황석공소서란 황석공이란 사람이 유방을 도운 한나라 개국공신 장자방, 즉 장량
(張良)에게 전수했다는 병서다. 현전하는 판본은 이 때의 텍스트가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가 만들어낸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손자(孫子) 등과 더불어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포함되어 병가(兵家)에서는 매우 중시된 텍스트였다.

목판본인 이 황석공소서 1책은 크기가 19.5 × 13.5cm에 22장(44쪽)이며 각 쪽당
10행 20자에 걸쳐 텍스트를 기록했다.

앞 부분에는 송나라 때 인물인 장상영(張商英.1043-1121)이 쓴 서문에 붙었으며
끝에는 판각에 관한 사정을 기록한 대목이 발견된다.

박씨는 "이 판각 부분이 탈락이 극심하지만 "(年)十一月日濟州…刻手僧性"과 같은
구절이라든가 "兼勸農兵馬團練判官儒學敎授官 韓彛, 兼勸農管學兵馬使濟州道按
撫使 李原恒"과 같은 대목을 판독할 수 있으므로 이 황석공소서가 조선 태종 때
제주에서 목판본으로 찍어낸 판본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말했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따라서 이 황석공소서는 현전하는 국내 최고 병서이자 현전하는 최고 제주도 간행물이 된다고 박씨는 덧붙였다.

병서는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줄곧 간행됐지만 이번에 발견된 황석공소서 이전
으로 올라가는 판본은 하나도 없으며, 나아가 1296년(고려 출렬왕 22년)에 간행
됐다고 알려진 금광명경문구소(金光明經文句疏)가 제주도판 최고 인쇄물이라
하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번 황석공소서는 형태 측면에서는 고려시대 판본의 특성을 농후하게 띈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한국 인쇄술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박씨는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산아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 위정사 위쪽으로 4차선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괴산 - 수안보 간 도로공사중 (2010년 12월 개통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