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제향,행사

옥병서원(박순, 김성대 등 여섯분 배향), 창옥병 암각문

by 연송 김환수 2010. 4. 7.

병서(玉屛書院) 

 

향토유적 제26호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인조27년(1649)에 사림의 건의에 따라 창건되어 사암(思庵) 박순(朴

淳)선생을 제향하였고 숙종 24년(1698) 신완(申琓)의 건의로 조정의

지휘를 받아 이의건(李義健) 선생과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배향하고

숙종39년(1713) 이이명(李 命)의 건의로 ‘옥병(玉屛)’이라고 사액된 

서원이다.         * 사액서원 :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 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

 

그후 150여년을 지나 고종원년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자 서원은

없어졌으나 박순, 이의건, 김수항선생의 유업과 덕행을 잊을수 없어 포천유림들의 발의로 서원구지에 설단하고 매년이월망일에 제향만을 거행하여 오다가 1926년에 김성대선생, 이화보선생 윤봉양선생을 단에 추가배향하였다.* 김성대 선생 알아보기 동음사 (직장공 후손 촌로공파)

 

1978년에 이명우(李命雨)를 회장으로 한 포천군의 유림들이 1978년 춘향시서원복원추진위원회(옥병서원복원추진회)를 결성하고 당국에 건의하여 1980년 국비와 도비의 보조로 기공하여 3차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건물은 본당과 동재 서재 삼문 담장을 갖추었는데 본당 숭현각(崇賢閣)은 맞배지붕에 방풍판를 달았다. 숭현각의 규모는 정면7.70m, 측면4.70m이다.

 

서원 앞에는 1909년에 건립된 옥개와 비좌를 갖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신도비의 규모는 높이 186cm, 폭 64cm, 두께 33cm이다.

 

≪참고문헌≫ 太學志
≪참고문헌≫ 典故大方
≪참고문헌≫ 京畿道史(京畿道, 1982)

 

 

 

=================================================================

 

서원 터는 사암 박순 선생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하여 배견와(拜鵑窩)라는 집을 짓고 살던 곳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영의정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 중종 18년(1523)~선조 22년(1589)] 선생은 영평의 산수를 사랑하여 노년에 이곳으로 낙향하여 훈학으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공이 죽은 뒤 1649년(인조 27년) 포천유림에 의해 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배견와 자리에 사우(祠宇)를 지었습니다.


선생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충주이며, 서경덕의 문인으로 선조 5년(1572)부터 영의정에 14년동안 재직했고,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었으며, 시·문·서에 모두 뛰어났습니다.


박순 선생은 1553년(명종 80)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대사성, 대사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으며 선조가 <송균절조수월정신(松筠節條水月精神)>이라고 극찬한 청렴하고도 강직한 관리였습니다. 저서로는 「사암집」이 있습니다.

 

적자의 후손이 없자  당시의 예대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군수 이희간에게 출가)간 포천을 낙향할 곳으로 삼아 돌아가시기 4년 전에 은퇴하여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기에 그곳에 묘소가 있고 유적지가 있으며 서원이 세워져 있다.

 사암 박순과 부인 고씨의 묘소

 

1909년 5월에 외십대손 이승회가 전액 하고 외십일대손 이최수가 글을 써 신도비를 세웠으며 이후 외손마저 혈맥이 끊긴 탓인지 덩실한 묘소나 우뚝 솟은 신도비, 넉넉한 모습의 ‘옥병서원’ 건물이 있어도 어딘지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포천의 유림들이 해마다 서원에 제향을 올리고 충주박씨 종친회에서도 묘소에 시제를 지낸다고 하니 외롭지는 않다고 봅니다.  *  전액 : 전자()로 쓴 비갈()

 

------------------------------------------------------------------------

 

충주박씨

시조는 고려시대 부정()을 지낸 영()이다. 조선시대에 20명의 문과 급제자, 1명의 상신과 대제학, 1명의 청백리를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청백리에 오른 상(),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순(), 그 밖에 우()·희수() 등이 있다.

성씨의 역사

 

충주박씨(忠州朴氏) 시조 박영(朴英)은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인 사벌왕(沙伐王) 박언창(朴彦昌)의 11세손으로서 《충주박씨세보(忠州朴氏世譜)》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박신(朴臣)은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孫子) 박원숭(朴元崇)은 삼사우사(三思右使)를 역임했으며, 증손 박득승(朴得升)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관향을 충주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충주는 고구려 영토로 국원성(國原城) 이었는데, 신라가 유리왕 때 그 곳을 점령해서 진흥왕 때 소경(小京)으로 삼고 귀족인 박씨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동경(東京: 경주의 옛 이름)에서 옮겨와 대를 이어 살면서 상주박씨에서 분관하여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 외 자료가 없이 신라사(新羅史)의 기록에 의한 추론일 뿐이다.

 

분적종 및 분파

의정공파(參議公派), 강릉공파(江陵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제주공파(濟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함경도파(咸鏡道派), 평안도파(平安道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영동공파(永同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문간공파(文簡公派), 의정공파(議政公派)

 

주요 세거지

대전광역시 중구 도안동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충주박씨는 8,559가구 총 27,48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옥병서원 전경

 

 안산김씨 족보에 실린 옥병서원 모습

 

새로운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예전 신도비는 왼쪽으로 이전된 모습

 

 

  

 

 박순(朴淳) 신도비

 

=================================================================================================

 

송호영당

 

조선 중기의 문신인 눌재() 박상(, 1474~1530)과 사암() 박순(, 1523~1589)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영조 4년(1728)에 충주박씨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원래 박상의 출생지인 서창동 절골마을에 있었으나 후에 현 위치(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로 옮겼다.

 

충주박씨 6대조인 박상은 순천부사·나주목사를 지내고,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조선 중종 때의 대문장가로 칭송받았으며, 저서로 《눌재집》을 남겼다. 명종 때 우의정·좌의정,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박상의 조카)은 시·서·문에 모두 능통했으며 저서로 《사암문집》을 남겼다.

 

 송호영당 전경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박상과 박순의 영당(堂)

 

  

 

 

 

박상과 조카 박순의 위패

 

  

송호영당의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위패

 

 

 사암 박순의 영정

 

=================================================================================================

 옥병서원 찾아가기

 

   37번 국도를 따라서 옥병교 다리(청암유원지 반대편)를 건너서 바로 왼쪽 "주원4리 마을회관"

   방향으로 직진하면 오른쪽 위에 옥병서원 있음.

    * 네비나 지도에서 옥병서원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 (안내 없음)

  

 

  

 

=================================================================================================

 

박순 신도비 (朴淳神道碑) 

 

조선국 영의정 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병조판서 증시문충공 사암 박선생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치사 봉조하 송시열은 글을 짓다.


국조에서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었으나 을사년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세도가 크게 변하고 사문이 땅에 떨어져, 성현의 글은 화근으로 지적되고 선비가 일삼는 것은 과거시험보기 위한 글뿐이어서 국세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비들이 대거 배출되어 명종, 선조 시대에는 정치와 교화가 크게 밝아짐으로써 선비된 이가 공자 · 맹자와 정자 · 주자를 근본으로 삼아 인륜이 위에서 밝아지고 백성들이 이 아래에서 새로워 삼대(하 · 은 · 주)의 융성한 치도에 가까워졌다.

 

이때에 맑은 의론을 주창하고 선비들을 끌고 나아가 우뚝하게 영수가 된 이는, 사암 선생 박공이니, 휘는 순이요 자가 화숙인 바로 그분이다. 그런데 세운이 험악하고 시론이 뒤틀려, 공이 그만 낭패을 당하여 덕업이 중도에서 막혔으므로 지금까지도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긴다.

 

공은 본관이 충주이다. 박씨의 계보는 고려시대 부정 영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뒤 8세손 소가 처음 조선조에 벼슬하여 은산군수가 되었다. 아들 지흥은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아들 우는 생원과에 장원, 명경과에 합격하여 벼슬은 우윤에 이르고, 호는 육봉이다. 그 형인 상은 세칭 눌재 선생으로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다.

 

육봉이 당악 김씨를 맞이하여 가정 계미년(중종 18, 1523년)에 공을 낳았는데, 뛰어난 자품에 기색이 맑고 평이하여 마치 금의 정수와 옥의 윤기 같았다. 8세에 입을 열어 사물을 읊으면 으레 온 좌석을 놀라게 하였으므로 이웃에 사는 교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너의 스승 노릇을 하겠느냐?”하였고, 육봉도 평소 문장으로 자부해 왔으나 공의 글을 보고는 말하기를, “마땅히 이 늙은 무릎을 꿇어야 되겠다.”하였다.

 

18세에 진사과에 합격, 서경덕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정미년(명종 2, 1547년)에 육봉의 상을 당하여 초막을 짓고 시묘하였는데, 너무 애통해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하였고, 소상이 지난 뒤에도 죽을 먹었다. 상을 마친 뒤에는 산으로 들어가 글을 읽다가 1년이 넘어 돌아왔고, 치재 홍인우를 찾아가 장횡거의『정몽』 「태화」 편 등의 글을 강론하자, 치재가 감탄하기를, “학문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화숙(和叔)뿐이다.”라 하였다.

 

계축년(명종 8, 1553년)에 명종이 직접 경서로 선비들을 시험하였는데, 공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논설이 정확 투철하여 온 시험장 안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므로, 드디어 수석 급제를 내렸다. 여러 관직을 역임, 이조 좌랑 · 홍문관의 수찬 · 교리를 지내고 호당에서 사가독서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호당의 학사들을 불러 경의를 강론시키고 제술을 명한 다음, 손수 푸른색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권하고 또 소식의 금련촉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 이튿날 대신 상진 등이 그들을 거느리고 궁전의 섬돌에 나아가 사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당대의 성사로 여겼다.

 

검상 · 사인이 되었고, 어명으로 호서에 나가 재변을 조사하고 돌아와서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다. 그때 홍문관에서 임백령의 시호를 의논하여 올리게 되었다.

 

원래 임백령은 을사사화 때 윤원형 · 정순붕 · 허자 · 이기 등과 어울려 간악하고 음흉한 짓을 멋대로 부려 문충공 규암 송인수 이하 제현을 남김없이 희생시키고 사당에 고해지고 훈적에 기록되었으며, 윤원형은 왕실의 가까운 외척으로 마침내 영의정이 되어 국권을 잡았으므로, 간당들이 그를 배경으로 삼고 바른 선비들을 노리고 있는 터이라, 임백령에게 만약 좋은 시호가 주어지지 않으면 큰 화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홍문관 관원들이 서로 눈치만 살피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공이 홀로 분연히 나서서, 공소로 의정하였으니, 이는 포폄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윤원형이 흐느끼며 말하기를, “임공은 나라의 원훈으로, 시호에 충(忠)자가 없으니, 그들의 마음이 너무 흉측하다.”하고는 모두 국문하여 죄로 다스리려 하자, 온 사류가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고, 임금이 공에게 중형을 가하려 하였으나 구원하는 이가 있어 파출만 명하였다.

 

처음에 공이 의금부에 자진 출두해서 임금의 처분을 기다리기 위하여,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태연히 나왔으므로, 집안사람들은 일이 생긴 줄을 알지 못하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적에는 어린 딸이 나와서 맞이하므로 공이 그 손을 잡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하마터면 너를 다시 만나지 못할 뻔했다.”하였다.

 

그 이튿날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임술년(명종 17, 1562년)에 한산군수로 제수되었는데, 1년 만에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이 부모처럼 친애하였고, 공무가 끝나면 으레 정자에 나가 독서로 일과를 삼으므로 인근 고을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계해년(명종 18, 1563년)에 성균관 사성으로 들어와서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 차자를 올려 시사를 논하였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이후로는 승지가 결원되면 공의 이름이 그 추천 명단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조참의에서 사간원 대사간으로 전임되었다가 체직되었고,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어서는 요승 보우의 죄를 논하고 처벌할 것을 주청하는 한편, 윤원형의 파출까지 논하였다.

 

이는 을사사화 이후로 윤원형이 임백령 · 허자 등을 심복으로 삼아 선비들을 제거하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쳐 국세가 불안, 조석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때문이다.

 

공이 개탄하기를, “양기를 탄핵하고 외척 두헌을 베어서 세도를 만회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하고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이 일을 의논하자, 이공도 처음에는 난색을 보이다가 공의 차분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승락하므로, 곧장 집으로 돌아와 조복도 벗지 않은 채 촛불을 켜놓고 계사를 작성, 날 새기를 기다려 입궐하여 계사를 올렸다.

 

그러나 그때 문정대비가 승하한 지 겨우 5개월이었으므로 임금이 차마 이를 윤허하지 못하다가 공의 논쟁이 더욱 강경해지자, 마침내 좌의정 심통원까지 파출시키므로, 백성들은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외방의 선비들은 선으로 향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에 육행을 지닌 선비를 선발하여 벼슬길을 깨끗이 하는가 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여 그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나라를 좀먹거나 백성을 해치는 일을 일체 혁파하였다. 한편 문순공 이황 이하 여러 현인이 다 세도를 바로잡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하여 원우 시대와 같은 성세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번의 혁신을 주창한 초기에는 문순공 역시 의문을 품고 위험하게 여겼으니, 공이 아니었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특별히 제수되었다가, 이후부터 체직과 관직 제수가 거듭되었다.

 

병인년(명종 21, 1566년)에 부제학으로 있으며 문순공에게 서찰을 보내어, 다시 조정에 나오기를 권유하였으며, 융경 1년 정묘년(명종 22,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무진년(선조 1, 1568년)에 사신 구희직이 황제의 명으로 와서 명종의 시호로 대행왕을 전하므로 공이 원접사로 나가 영접하였는데, 조사가 공의 절도에 맞는 예의를 보고는 늠연히 존경심을 가졌고, 함께 시를 수창하면서 감탄하기를, “송대의 인격에 당대의 시격이로다.”라고 하였다.

 

구희직이 돌아간 뒤 그해 3월에 황제가 또 검토 성헌과 급사 왕새를 보내 황태자 책립조서를 전달하므로 공이 막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제수되어 있다가 다시 접반사를 맡았는데, 그들로부터 이전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성공이 공을 위하여 평원정 십절을 써 주었는데, 평원정은 나주에 있다. 공이 이 임무를 마치고 나서 대제학의 자리를 문순공에게 옮겨 주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계사에 이르기를, “제학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직책이기는 하나 결국 대제학과 같은 중요한 직분은 아닙니다.

 

지금 이황은 고령의 큰 선비로 제학이 되고 신은 그 위에 있으니, 이는 너무 전도된 일입니다.”라고 하므로 임금이 대신과 의논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문순공이 다시 사퇴하여 공에게 넘겼다.

 

공은 도학에는 『심경』 · 『근사록』을 근본으로 삼고 문장에는 한유 · 사마천 · 이백 · 두보를 주로 하니 선비들의 습속이 크게 달라졌다. 기사년(선조 2, 1569년) 4월에 주강에 나아가 고봉 기대승과 함께 문소전 부례에 대해 논하였다.

 

원래 이기 등이 문정대비의 뜻을 받들어, 인종은 재위 기간이 1년도 되지 않은 임금이라 하여 문소전에 합사하지 않고 연은전에 합사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고 분개해하였다. 이때 공이 이를 통절하게 논하였고 문순공도 전옥을 변통할 제도를 논하였으나 모두 대신에게 저지되었다.

 

이해 여름에 판서 김개가 몰래 기회를 보아 공과 제현들을 모함하기 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선비들의 습속은 이미 기묘사화 때처럼 되어 버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남곤 · 심정의 남은 수법을 그대로 따르려는 속셈인 것이다.

 

송강 정철이 지평으로 입시하였다가 김개의 간특한 형상을 면박하자, 그가 흐느껴 울면서 물러갔다. 문순공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서찰에 이르기를, “요즈음 한 차례의 소동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을 공격하였으나 그 의도는 사실 나에게 있었다.”하자, 삼사가 함께 김개의 관작 삭탈할 것을 논하였다.

 

이때 공이 선류의 종주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문성공 이이가 권유하기를, “선비들을 모아 임금의 마음을 계도해 드려야 하고, 소인들로 하여금 이를 무너뜨리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고 임금도 공의 사퇴를 윤허하지 않으므로 드디어 출사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본직을 사퇴하고 예조 판서로 체임되었으며, 신미년(선조 4, 1571년)에 무주 적상산성에 실록을 봉안하였고, 다시 이조 판서에서 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임신년(선조 5, 1572년)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연경에 사행가 신종황제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고사에, 외국의 진주사는 으레 협문을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공은 표문은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논의하여, 그것이 이내 정식으로 되어 버렸고, 이 사행을 통해 평소 공의 명성을 들은 중국 사람들이 연도에 나와서 시를 청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그곳 주사가 교역하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우리 임금은 재물을 좋아하신 적이 없소.”라 하였다.

 

계유년(선조 6, 1573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왕수인의 그릇된 학설을 적극 논하였고, 좌의정에 승진되어서는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사헌부에 통사시키기를 주청하였다. 갑술년(선조 7, 1574년)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자, 옥당에서 임금에게 공의 유임 권유를 주청하기를, “심복을 부탁할 만한 충현이 없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을해년(선조 8, 1575년)에 의성대비의 상을 당하자, 두 차례나 의론을 올려 3년 동안 백의관으로 지낼 것을 주청하였고, 그 뒤 인순대비의 상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당시의 속론이 공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으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이해 가을에 물러났다가 다시 나왔는데, 일찍이 경연에서 문성공 이이의 훌륭한 학문 · 도덕을 상세히 논하였고, 겨울에 본직을 사퇴하여 체직되었다.

 

기묘년(선조 12, 1579년)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건의한 바가 많았다. 즉, 노산군의 묘를 봉식하자는 일과, 문간공 성혼의 진술한 것을 채택하고 그가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자는 일과, 김효원을 수용하여 동서의 당론을 씻어 버리도록 하자는 일과, 문성공 이이를 주청사로 삼지 말자는 일과, 경제사를 설치하여 공물에 대해 기록한 문부를 개정하자는 여러 가지 일로, 혹은 시행되기도 하였고 혹은 물정에 어둡다 하여 쓰여지지 않기도 하였다.

 

소재 노수신은 의견의 차이가 거의 없었고 김우옹은 일마다 강력히 찬동하였다.

임오년(선조 15, 1582년)에 서교에 나가서 조사 황홍헌 · 왕경민을 영접하였다.

 

계미년(선조 16, 1583년)에 이호 탕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공이 북쪽 지방을 염려하여 계책을 세운 바 있었고 또 인재를 구별해 놓았었는데, 이때에 와서 문성공이 병조판서가 되어 안으로는 군사의 모책을 마련하고 밖으로는 병마를 조달하여 모든 처사에 실책이 없으므로 임금이 이를 의지하여 적도를 토벌하려 하였다.

 

하루는 문성공이 부름을 받고 입궐하였다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켜 오랜 시간을 끌게 되자, 임금이 어의를 보내 병을 보게 하고 또 물러가서 조리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대간의 탄핵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자, 문성공이 소를 올리고 죄를 기다렸다.

 

공이 동료 재상들과 함께 임금에게, 문성공의 출사를 간곡히 권유하기를 주청하였는데, 그 뒤에 대간의 탄핵이 다시 일어나, “나랏일을 멋대로 다루고 임금을 무시하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하였다. 한편, 이호가 여러 진보를 연달아 함락시켜 정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는데, 대간의 계사가 그치지 않고 기어이 문성공을 제거하려 하므로, 공이 병조판서를 잠시 체직시키기를 주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라 공에게 병조판서를 겸임시켰다.

 

이때 문간공이 소를 올려, 당시 무리배들이 붕당을 만들어 참소하는 정상을 극론하자, 공이 청대하여 충과 사를 분별하여 그 시비가 매우 뚜렷하였다.

 

이에 삼사에서 공의 열 가지 죄를 논하고 이이와 성혼, 두 현인을 아울러 탄핵하므로 공이 강사로 물러났다. 조정의 신하들과 유생들이 함께 글을 올려 신변한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우의정 정지연이 공을 구원하는 데 전력하므로 임금이 친히 교서를 지어, 주론자를 특별히 유배시키고 나머지 도당은 모두 외직에 전보시키면서 이르기를, “나는 주자를 본받기 위하여 이이와 성혼의 당을 불러들여야겠다.”하였다. 공에게 다시 들어오기를 간곡하게 권유하므로, 공이 할 수 없이 명에 응하였다.

 

갑신년(선조 17, 1584년)에 문성공이 별세하자, 공이 고단해진 처지로, 함께 협력할 사람이 없는 것을 자나 깨나 근심하고 탄식만하다가 을유년(선조 18, 1585년)에 사직하고 체직되어 강사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노수신의 직언으로 귀양간 사람들이 특별 사면되었고, 가을에는 이발 등이 공과 제현을 무고 훼방하여 그 이름을 당적에 써 넣었다.

 

병술년(선조 19, 1586년) 8월에 공이 휴가를 얻어 영평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중사를 동문 밖까지 보내어 술을 내려 전송하였다. 영평에는 백운산이 있어 시내와 못의 절경이 뛰어났으므로, 공이 이내 집을 짓고 살았는데, 깨끗이 속세에서 벗어나 시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매일 촌민 야로들과 함께 자리를 다투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냈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서로 토론하여 지칠 줄을 몰랐다.

 

거기에는 유명한 배견와 · 이양정 · 토운상이 있고 백운계 · 금수담 · 창옥병이 둘러 있는데, 흥이 날 적에는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소요하였고, 혹은 금강산 등 여러 산을 유람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영원히 떠나 버릴 뜻이 있음을 알고 어의를 보내어 문병하고 세 차례나 소명을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으며, 기축년(선조 22, 1589년) 7월 21일에 일찍 일어나 시를 읊조리다가 훌쩍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

 

이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우레가 진동하다가 이윽고 상서로운 광채가 대지를 비춰 달처럼 환하므로 산중의 백성들이 놀라고 의아하여 달려왔는데,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해 9월에 종현산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고씨로 딸 하나를 두어 군수 이희간에게 출가시켰다.

 

공은 어린 나이에 도를 구하여 가정에서 이미 학행을 닦은 데다가 화담 서경덕을 따라 수업하였고, 만년에는 문순공 이황의 가르침을 받아 세도의 성쇠를 일체 함께하였으며, 또 문성공 이이와 함께 이기의 깊고 아득하고 크고 작고 열리고 닫히는 오묘함을 논하였으니, 그 학문의 연원과 조예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조정에 나가 반열에 서서는 오직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일생 동안 힘쓴 바는 선악을 분별하여 현인과 악한 사람을 진퇴시키는 데 있었으므로, 공과 함께 재직하고 협력한 이는 모두 어질고 덕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조정이 맑아지고 백성이 안정되었다.

 

공이 만약 끝까지 재직하여 배운 바를 다 발휘하였다면 그 치도의 성과가 어찌 이 정도에서 그쳤겠는가. 참소를 만나 버림을 받고 임천으로 돌아와서는 매일 초야의 수재들과 함께 선왕의 도덕을 노래하면서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채 지냈고, 묵묵히 마음에 터득되는 바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곤액을 겪을수록 더욱 드러난 이가 아니겠는가.

 

상공 백사 이항복이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었는데, 그중에는 자못 빠진 데가 있으니, 이는 위간재의 묘문과 같은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군수 이희간의 아들 탁이 문정공 청음 김상헌에게 공의 문집에 대한 서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공의 모든 행적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추중되어 있다.

 

그 뒤 조정에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고 남방의 선비들이 많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으며, 영평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는 1백 년도 가지 않아서 공에 대한 공론이 확정된 셈이다. 은산공의 묘소가 회덕 선암천 서쪽 기슭에 있는데, 공이 일찍이 그 앞에 집을 짓고 그 이름을 사암이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공을 사암 선생이라 칭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세도의 성쇠는 바로 그 인물에 달려 있고

그 인물이 말미암는 바는 오직 의와 인이라네

 

의로는 임금을 바르게 하고 인으로는 백성을 안정시키네

본조의 치도가 밝고 공은 남방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때는 우리 명종 선조시기였으니 진정 성세였지

많은 인재 포용하니 덕이 어찌 이웃이 없을 것인가

 

율곡을 따르고 퇴계를 존경하여

본체 밝혀 실제에 적용하니 진실로 참된 유자로다

 

현명한 인재 길러낸 교화로 수많은 인재들 많아졌네

예로 불러들임 계속되어 태공과 이윤 같은 이 있었네

 

조정에서 자문할 때 공이 이를 주도하니

간악한 무리 물러가고 준수한 인재 활약하여

 

거의 태평성대 이루어 요순의 임금과 백성 보려다가

평지에 험난함 없을 수 없어 현자의 길 가시밭길 되었네

 

공더러 붕당을 짓는다라고 열 가지 죄 열거하니

공이 끝내 초야에 숨어 어느 누가 큰 경륜 맡을 것인가

 

백운산은 높고 험하며 물 또한 깊고 넓은데

배견과 창옥병 등 그윽한 곳에

 

지팡이 나막신으로 목욕하고 봄바람 쐬면서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이는 저 서방의 미인이었네

 

유연히 이 세상 뜨고 나니 우레와 비 새벽에 시끄러웠지

옛날 유원성이 죽을 적에 이 같은 이변 있었네

 

유원성의 그 기상 철벽 은산 같았는데

공도 진실로 그와 같아 끝내 물들거나 부숴지지 않았네

 

내가 이 명 지어 이 곧은 옥돌에 새기노라


개국 518년 기유년(1909년) 5월 일에 삼가 세운다

외십대손 이승회는 삼가 전액을 하고

외십일대손 이최수는 삼가 글씨를 쓰다.

 

숭현각

  

 서재 송월당

 

동재 창옥재

  

 신도비

   

==========================================================================

 

김성대 묘비


연대

유형/재질

크기

소재지

서체

찬자/서자

/각자

1727년(영조3년)

비문 / 돌

높이 206cm, 너비 74cm, 두께 46cm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해서(楷書)

좌의정,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 김창집

/ 미상

 

 

 

 

 

해석문


김성대묘비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덕랑 제릉참봉 김공성대묘

배 증정부인수원백씨부좌


공의 휘는 성대이고 자는 이원이며, 본관은 안산으로 고려시대 좌복야를 지낸 김긍필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정경이 계셨는데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숭정대부 이조전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위정공이시다.

 

위정공께 막내아들 휘 개가 계셨는데 숭정대부 이조판서로 시호가 평호공인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부호군 휘 언량과 사복시정으로 증직된 휘 태록과 좌승지로 증직된 휘 찬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정삼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임술년(광해군 14, 1622년) 정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오랑캐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에 공은 15,6세의 소년이었지만 날마다 한 가마의 쌀을 등에 짊어지시고 험한 길을 넘어 운반하셨다. 비록 난리 속이었지만 부모 공양에 빠뜨림이 없었던 것이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의 상을 당했는데, 병환에 계실 때부터 탕제 다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고, 손수 분뇨를 맛보아 달고 쓴 것을 징험하였으며, 위독하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올려드려 상당 기간 효험을 얻었었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자제들이 늙은 아버지께서 몹시 슬피 우셔 몸 상하심을 걱정하여 권변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그 지성스런 효성이 이와 같았다. 이 정성을 미루어 여러 누이와 아우 및 조카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니, 향당에서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여 성대히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일시의 선비들이 모두 먼저 등제하라고 사양하였다. 공도 이에 이르기를, “시험 하나도 취할만 하지 못하는데 여러 차례 향시에 입격하는군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시에는 낙제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이 72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하여 방목이 보고되니, 주상께서 관직을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어 즉시 제릉참봉에 제수되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에 공께서 감격하여 주상의 은혜를 사례하였으나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2월 4일이었다. 후에 아들 절도사 석명의 추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백씨는 정부인에 추봉되었는데 부사 대진의 따님으로, 착하고 어질어 부인의 덕이 있었고 공보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요, 2남 석범은 무과로 절충을 지냈고, 3남 석규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4남 석구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고, 5남 석보는 무과 중시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을 지냈고, 딸은 사인 이제안에게 출가하였다.

 

상규는 석명의 소생이요, 상두 · 상진과 감찰 서명신, 사인 이탁, 이환의 처는 석범의 소생이요, 이세무의 처는 석규의 소생이요, 상태 · 상정 · 상복과 조윤적의 처는 석구의 소생이요, 상기 · 상익 · 상벽 · 상성은 석보의 소생이요, 담석과 김요경 · 정운길의 처는 이제안의 소생인데 아들은 어리다. 상규는 1남 양오를 두었고, 상두는 4남을 두었으며, 상태는 1남을 두었고, 양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이미 늙어서도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이 영평 백운산 밑에 있어 자못 전원으로 숲과 시내의 경치가 좋았고, 자손들이 그 집 근처에 둘러 살면서 각자 농사짓고 뽕과 삼을 심고, 혹은 출사하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이며 맛있는 반찬을 두루 갖추어 공을 봉양하였다.

 

공께서 좌우로 봉양을 받으면서 조용히 문묵을 스스로 즐기고 생산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혹 흥이 나면 자손들을 거느리고 이웃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소일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한한 복은 누구도 미치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아들의 고을로부터 무슨 선물이 들어오면 문득 얼굴을 찡그리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 하시고 매양 청렴결백과 절제근검을 당부하여 경계하였다. 절도사가 여러 지방을 역임하며 간소하다는 것으로 칭찬받았으니, 그 법도를 얻음이 이와 같아서이다.


공을 집에서 남쪽의 도성산 아래 정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백부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절도군의 형제가 장차 묘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자 나 창집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진실로 글을 못하는데 어찌 영원히 전할 글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해보니, 옛날에 나의 선군께서 백운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고 이곳에 사실 뜻이 있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혼자 말을 타시고 이 산중으로 오시어 공을 만나 머무르셨으며, 시를 지어 산을 나누는 약속을 증거로 삼았었다. 내가 때때로 따라가서 가만히 보니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순박하여, 마음속으로 덕의가 훌륭한 분임을 알았었다.

 

그 후 선군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씨의 낚시터 위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게 하여 후일에 거처할 계교를 삼았는데, 이곳에서 공의 집과의 거리는 몇 리였다.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공의 집을 드나들면서 더욱 친하여졌다. 그러나 선군께서 마침내 그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기사년(숙종 15, 1689년)의 사화에 돌아가셨다.


공께서 이에 우리 모자와 형제의 궁박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맞아 자기 집 아래 집을 마련하고 또 힘을 다하여 옛 집을 수리하고 거처를 정하여 주셨다. 무릇 어루만져 주시고 도와주심에 극진한 은의가 있어 비록 가슴속이 불처럼 타올랐으나, 돌아보지 않으셨다. 지난날 그 어진 마음과 옳은 기개가 아니었다면, 쇠퇴한 세속에 멀리 생각하심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공에게 실로 종신토록 감격함이 있어 그 여러 아들들과 모두 서로 대하길 골육과 같이 지내었다. 이제 이 묘문의 부탁이 또한 이 때문이라. 어찌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감히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말을 간략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이 어찌 공의 사행을 영원히 전하는데 족하다 하겠는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창집 지음.

제 4남 석 달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글씨를 쓰다.


비문이 이루어진 뒤 5년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백운산 아래 구정천 기방을 뒤로 한 언덕에 이장을 하였고, 다시 그 뒤 13년만에 비로소 비석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의 현달한 자와 어리거나 성인이 된 사람 중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를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석 달은 곧 석구의 고친 이름이다. 석보는 수사, 상두는 군수, 상태는 감찰, 상정 · 상기 · 상익은 급제, 상벽은 부사이다. 상두는 5남을 두었는데, 양호는 부사, 양일은 선전, 양정 · 양중은 모두 무과 급제하였고, 막내는 양검이다. 상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상태의 아들은 양록, 딸은 아직 어리다. 상정은 2남 2녀를 두었고, 상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상기의 아들은 양성이다.

 

상익은 3남 2녀를 두었고, 상벽은 4녀를 두었으며, 상성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오는 4남을 두었으니, 처눌 · 처밀 · 처열 · 처필이고, 양일은 3남을 두었으며, 양중은 1녀를 두었다. 처눌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으나 생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영조 3, 1727년) 3월 일 세움.


판독문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戶曹叅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德郞」

齊陵叅奉金公聲大墓」

配 贈貞夫人水原白氏祔左」

公諱聲大字而遠安山人高麗左僕射肯弼之後入我 朝有諱定卿爲 太宗佐命功臣崇政吏」

曹典書封蓮城君謚威靖公威靖有季子諱漑崇政吏曹判書謚平胡公寔公六代祖也副護軍諱」

彦樑 贈司僕寺正諱台錄 贈左承 旨諱讚卽公曾祖祖考若考而妣安東金氏鼎三之女公」

以天啓壬戌正月二十二日生自少行誼過人丙子奉二尊人辟冠山谷中時公甫成童能日負一」

斛米越險輸致以故雖在搶攘而供養無乏辛卯遭承 旨公憂目疾時湯劑不委人手嘗糞以驗」

甛苦及其革也斮旨進血得以復甦者有間甲寅丁內艱子弟愍其老而毁泣請權變竟不聽其誠」

孝如此推以及於諸姑弟姪敬愛篤至鄕黨爲之歎服公蚤游場屋蔚有文聲一時輩流咸讓其先」

登公亦謂一第不足取而屢捷解額輒困於省試蹭蹬留落人皆嗟惜䄵七十二始中進士榜 聞」

特命除職卽授 齊陵叅奉盖異數也公感激謝 恩俄而棄不仕越二年乙亥以疾卒二月初四」

日也後以子節度使錫命推 恩贈戶曹叅判配白氏貞夫人府使大璡之女淑哲有婦德後公五」

年以卒公凡生五男一女男長卽節度使次錫範武科折衝次錫圭武科早圽次錫龜業文次錫保」

武科重試都摠府經歷女適士人李齊顔相奎錫命出相斗相軫監察徐命新士人李濯李絙妻錫」

範出李世懋妻錫圭出相兌相鼎相復曹潤迪妻錫龜出相箕相翼相壁相星錫保出聃錫金堯鏡」

鄭運吉妻李出一男幼相奎一男養吾相斗四男相兌一男養吾一男二女竝幼公爲人木訥寡言」

待人遇物眞實無矯飾少好讀書旣老猶手不釋卷家在永平白雲山下頗有田園林澗之勝子姓」

環其宅而居各自理菑畲藝桑麻或出爲州郡具輕煗甘毳以奉公公則左右受養肅然以文墨自」

娛不復問生産事興至雋子姓呼鄰竝倘佯山水間人謂其淸福不可及然見有物自子邑來輒蹙」

然曰無乃病民乎每申戒以廉白節儉節度君在弁鞈中以簡素著稱其得於義方者然也公葬于」

宅南道成山下負丁之原白夫人柎其左節度君兄弟將樹石墓前屬昌集識其隧昌集誠不文何」

足以當不杇之託獨念昔者先君子愛白雲山水有卜居之志嘗匹馬會公於山中留詩證分山之」

約昌集時從行竊公儀度豊偉氣味淳厖心知爲長德人矣其後先君子命昌集作小屋於李氏」

釣臺之上以爲異日計去公家盖數里昌集因得與公還往益親然先君子竟未能歸而有己巳之」

禍公於是哀昌集母子兄弟窮無所歸亟迎置宇下因又出力葺舊屋以定其居凡所以撫視賙救」

曲有恩意雖凶熖如火而不顧問焉向非其仁心義氣遠邁衰俗何能及此盖昌集於公實有沒身」

之感而其諸子皆相視如骨肉今茲墓文之託亦以此耳又何忍以不文辭遂敢不揆僣妄觕記其」

本末如右嗚呼此豈足以不朽公也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

秋館事 世子傅金昌集述 苐四男錫達泣血謹書 文成後五䄵乙未移竁于白雲山下九政遷」

負己之原又後十三年碑始具凡子姓之顯若冠若丱而未及載者謹追識于左錫達卽錫龜改名」

也錫保水使相斗郡守相兌監察相鼎相箕相翼及第相壁府使相斗五男養浩府使養一宣 傳」

養正養中及第皆武次養儉相軫一男一女幼相兌男養祿女幼相鼎二男二女相復一男二女竝」

幼相箕男養性相翼三男二女相壁四女相星二男竝幼養吾四男處訥處謐處說處養一三男」

養中一女處訥一男竝幼外出曾玄甚蕃苐略焉 崇禎紀元後再丁未三月 日立」

 

묘비명을 지으신 영의정 김창집에 대하여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景宗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辛壬提要
≪참고문헌≫ 黨議通略
≪참고문헌≫ 夢窩集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지은이: 이종호 | 브랜드: 역사의 아침 | 출간일: 2008-10-24
 

너희들은 마땅히 (사형당하는) 나를 경계 삼아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갖고 벼슬에서는 높이 드러나는 요직을 피하도록 해라. 집에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할 것이며, 사람을 사귐에 신중하고 의논하는 말은 간소하게 하여라.

 

(……) 너희들은 여러 자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문헌에 전하는 충효의 가르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가문을 지키되 반드시 과거를 보아 벼슬할 필요는 없다. 기사년 4월 초7일 문곡文谷(김수항의 호) 늙은이가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주노라. 그리고 여러 자손들이 자라면 역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224쪽, ‘죽어서야 깨달은 아버지의 유훈 : 김수항-김창집’ 중에서) 
 
 ================================================================================================

 

 창옥병 암각문

 <창옥병 암각문>

향토유적 제41호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674-1

 

 

이곳은 선조 19년(1568) 영평에 왔다가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 배견와(拜鵑窩)를 지어 은거생활을 하던 박순 선생이 주변의 경치가 수려한 이곳의 이름을 붙이고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이라는 제하의 시를 지었는데 이것을 김수증이 쓴 것이다. 또 이곳에는 선조의 윤음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석봉 한호가 쓰고, 신이가 새긴 것이다.

 

박순의 자는 화숙, 호는 사암, 본관은 충주이고, 시호는 문충이다.

명종 8년(1553)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한산군수, 이조참의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인접한 곳에 선생을 배향한 옥병서원과 신도비가

있다.

 

<박순 시>

題二養亭壁(제이양정벽)

谷鳥時時聞一箇(곡조시시문일개) / 골짜기의 새소리 때때로 한마디씩 들려오는데

匡牀寂寂散郡書(광상적적산군서) / 침상은 쓸쓸하고 여러 책덜 흩어져 있네

每憐白鶴帶前水(매련백학대전수) / 언제나 안타까운건, 백학대 앞의 물로서

出山門便帶於(재출산문변대어) / 산 입구를 겨우 나가면 곧 흙탕물을 띤다네

纔 -겨우 재/  =겨우재 

便 - 문득 변/ 편할편

淤 - 흙탕물 어/ 진흙어 번역에 德田

 

右思菴先生詩 金壽增書(우사암선생시 김수증서)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의 방대한 65만여 글자의 문적(文籍)을 덕전(德田)께서 모든 한문의 문자 아래에 한글로 독음(讀音) 덧말을 달고, 현토(懸吐)하여 쉬운 우리말로 완전하게 풀이해서 상재(上梓)하게 되었음.

 

 

65만자 전체의 문장 아래에 한글 덧 말 달기를 한 <풀어쓴 주역전의대전

 

○ 제이양정벽(題二養亭壁) :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쓴 사암의 시.

    골짜기에 새소리 때때로 들리고        谷鳥時時聞一箇  곡조시시문일개

    적적한 책상 위엔 책들만 쌓였네       匡牀寂寂山群書  광상적적산군서

    매번 백학대 앞의 물이 보고 싶어서   每憐白鶴臺前水  매련백학대전수

    산입구를 겨우 나서니 흙탕물이네     出山門便帶於 재출산문변대어

 

<선조윤음>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

 

<암각문>

산금대(散僸臺)·란장(瀾障)·수경대(水鏡臺)·청학대(淸鶴臺)·토운상(吐雲床)·와준(窪尊)·청냉담(淸冷潭)

  

 박순 시<題二養亭壁(제이양정벽)>을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써서 암각한 것

 

谷鳥時時聞一箇    골짜기의 새소리 때때로 한마디씩 들려오는데

匡牀寂寂散郡書    침상은 쓸쓸하고 여러 책덜 흩어져 있네

每憐白鶴帶前水    언제나 안타까운건, 백학대 앞의 물로서

出山門便帶於    산 입구를 겨우 나가면 곧 흙탕물을 띤다네

 

右思菴先生詩金壽增書

 

  

    창옥병(蒼玉屛) / 영평8경.    * 오른쪽으로 바위굴 입구 옛날에는 버스도 다녔다

 

 

 37번 일반국도 창옥굴

 

 창옥굴내부 

 

금수정 [金水亭]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546

지정번호 : 포천시 향토유적 제17호

 

소유자 : 안동김씨 문온공(文溫公) 종가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에 있는 금수정은 영평천 절벽 위에 위치한 정자로서 정자 아래 기암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노송이 어울러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영평8경이라 불리우는 절경이 맑은 계곡물과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지는데, 8경은 저마다 독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정자 앞에는 창건을 기념하여 심은 진송이 있는데 그 수령이 400년으로 추정된다.

 

 

이곳 금수정은 안동김씨 선대(先代)의 사위들인 지봉 이수광. 교산 허균을 비롯하여 이곳 금수정에 얽힌 인물들인 봉래 양사언,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번암 채제공, 농암 김창협, 화서 이항로. 면암 최익현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인, 학자들의 詩.文 등, 기록들이 전해진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에서 금강산 을 유람하기 위해 오가며 기록한 名人들의  기행문에 이곳 영평천의 금수정을 경유하는 코스는 명승지로 많이 등장하여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짐작할수 있다.

 

이 누각에서 앞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금수정이 날아갈 듯 날렵하게 서 있고, 금수정옆 바위 위에는 琴翁 선생(金胤福)이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琴臺'가 있으며, 단정한 해서체로 '금대'라 새겨져 있다.

 

 

금수정앞으로는 영평천이 휘돌아 나가며 그 냇물에는 다도해의 작은 섬들이 떠 있는듯, 많은 바위들이 물위에 솟아 있다. 이곳을 연화암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 또한 많은 암각문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瓊島(또는 浮島)라고 짐작되는 80 x 120센치미터의 대형 초서가 있고, 그 옆 바위에는 초서로 된 한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봉래집에 의하면 贈琴翁詩 라고 되어 있으며 이시는 많은 문인들 사이에 알려진 자료이다. 

 

  <金水亭(금수정)>

  - 글씨크기 : 110 × 31cm

  - 제작연대 : 조선 선조대

     한석봉의 글씨로 금수정 아래 절벽 중간에 각자되어 있다.

      금수정 건물 동북방 벼랑에 세겨진 金水亭 -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로 전해온다.

       위치 -정자에서 계단을 타고 물가로 내려가 수로에서 좌회전하여 100여 m 지점 벼랑이다.

 

 

 증금옹시(贈琴翁詩) 암각문

             금수정 정자로부터 서남방 약 200 m 지점 물가 바위에 봉래 양사언 선생의 글씨로

             전해오는 초서 글씨.

 

금수정(金水亭)의 돌에 새긴 시를 국역 '성호사설'에서 옮겼다.

 

녹기금 백아의 마음 / 緣綺琴伯牙心

한 번 타고 또다시 한 번 읊노라니 / 一鼓復一吟

종자기가 바로 지음을 하는구려 / 鍾子是知音

허뢰는 선들선들 먼 봉우리서 일어나고 / 虛籟起遙岑

강 달은 곱고 고와라 강물은 깊고 깊네 / 江月涓涓江水深

 

 

나는 이 곳에서 노닌 지가 이미 수십여 년이 지났는데, 몽상(夢想)이 오히려 괴롭다.

두자미가,

 

어쩌면 생각이 저 도ㆍ사의 솜씨 같아서 / 焉得思如陶謝手

그네들의 술작과 함께 끼어를 볼거나 / 令渠述作與同遊

 

하였는데, 이 한 글귀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먼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註>

⑴녹기금(綠綺琴) : 거문고 이름임. 장재(張載)의 시에, “故人遺我綠綺琴”이라 하였음.

⑵백아(伯牙) : 춘추 시대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인데 성련(成連)에게 배웠고 종자기(鍾子期)와 더불어 친했었다. 종자기가 죽으니, 백아는 다시 거문고를 타지 아니하였다 함. 《呂氏春秋 孝行覽 本味》

⑶허뢰(虛籟) : 공산(空山)에서 바람 없이 일어나는 소리를 이름.

⑷도ㆍ사(陶謝) : 시인(詩人) 도잠(陶潛)과 사영운(謝靈運)을 이름.

 

 금수정 정자

 

 

 

현판 글씨 金水亭은 물가 바위에 봉래 양사언이 새긴 글씨를 모사하여 걸었다. 

 

 편액은 양사언의  태산이 높다하되-----

 금수정 내 봉래 양사언 시비

금수정에 세워진 봉래(蓬萊) 양사언 시조 시비는 포천 지역에서 서예 문화 활동을 하던

故 외길 김진동(金縉東 1937- 2006)에 의하여 그 글씨가 쓰여졌다.

양사언은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로 본관은 청주이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봉해(蓬海) 등 다양한 필호(筆號)를 사용하였다. 

 

   금수정에 걸려 있는 시문으로 그 한구절인  蓬萊創建遂成功(봉래창건수성공)이란 문구로 보아

   봉래선생이 창건 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사언 이전에는 우두정(牛頭亭)이었던것을 봉래 양사언

   선생이 개축하면서 정자의 명칭을 <금수정>으로 하였다는것이 포천지역의 옛 기록에 나온다.

 

散襟臺(산금대) / 지은이 박순, 18x20cm, 글쓴이 한석봉

 

 淸冷潭(청냉담)  45x45cm, 박순 짓고, 한석봉 쓰다

 

  

水鏡臺(수경대) / 吐雲床(토운상). 박순 짓고, 한석봉 쓰다

 

 

宣祖가 박순선생에게 하교한 윤음 : 松筠節操水月精神

글씨크기 60x60cm, 제작년대 1588년(선조21), 글쓴이 한석봉 

 

 

 와준 (窪尊)

 

 

막걸리 1말이 들어간다는 와준 지금은 물만 가득하다

영평강 바닥이 들러난 반석위로 가서 조금 큰 웅덩이의 턱에 쓰인 희미하게 남은 와준(窪尊)이란 글씨를 음미한다. 사암 선생이 이곳 영평강에서 노닐며 이곳 반석의 깊은 웅덩이에 막걸리를 부어놓고 마시며 영평강의 승경을 즐겼다는 고사가 그럴듯하다. 와준(窪尊)뒤의 글자가 높을 존(尊)자 이지만 술통 준(樽)자와 통하므로 와준으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백학대

 

 

<琴臺(금대)>

  - 글씨크기 : 41 × 98cm 

 

  - 제작연대 : 조선 선조대

    안동김씨세천비와 금수정 사이에 있다. 이곳은 봉래 양사언이 대를 짓고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廻瀾石(회란석)>

  - 글씨크기 : 40 × 45cm

  - 제작연대 : 조선 선조대

    중국 황제의 사신으로 온 許國(허국)의 친필로서 현재 '瀾石'만 남아있고

    '廻'자는 떨어져 나아갔다.  

 

<洞川石門(동천석문)>

  - 글씨크기 : 33 × 34cm

  - 제작연대 : 조선 선조대

    한석봉의 글씨로 현재 '洞川'만 표출되어 있고 '石門'을 땅속에 묻혀 있다.

 

 

 <武陵(무릉)>

  - 글씨크기 : 30 × 45cm

  - 제작연대 : 조선 선조대

    금수정에서 절벽사이 계단을 내려와 마주치는 물가 바위에 각자되어 있다. 

 

<瓊島 尊巖(경도 준암) 바위 전경>

 

 금수정 앞 한탄강 상류 물가운데 바위에 세겨진 양사언의 휘호 <경도>

 

 

 옥병서원(玉屛書院)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