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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국내주화,엽전

五錢 白銅貨 - 隆熙 3年 出現

by 연송 김환수 2011. 2. 23.

오전 백동화 (융희3년) 출현 <五錢 白銅貨 (隆熙 3年) 出現>

 

요즘 며칠 눈이 호강을 합니다.

 

 

                                          출처 http://cafe.naver.com/donmarket/4651

 

융희3년 5전은 2000년 제7회 화동옥션 경매에 한번 나타난 이후 온라인상에 처음 선보이는 아주 귀한 녀석이기 때문입니다.

 

前後面에 눌린 자국이 2000년 출품된 화동경매품과 위치만 약간 다르고 비슷합니다.

 

앞면 상부에 오얏꽃 문양과 그아래에 五錢(오전)이라는 글자 있고, 우측에 오얏꽃 가지와 좌측에 무궁화 나뭇가지가 교차되어 있으며 뒷면 중앙에 봉황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둘레를 따라 "大韓 隆熙 3年오젼 5CHON"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미품급으로 보입니다.

 

소장자님이 일년치(?)를 투자하여 영국에서 구입하여 현재 국내로 배송 중이라고 모 카페에 소개했습니다.

 

진위 여부야 소장자님이 그레이딩 보내면 결정되겠지만 문양도 좋아 보이고 저 또한 진품이기를 간절히 바라기에 여기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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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0년전인 2000년 11월 30일(서울메리어트호텔) 화동경매에서 당시 일천만원에 낙찰된

오전 백동화 융희3년 관련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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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錢 白銅貨 - 隆熙 3年

Lot 번호 : 183

국명 : KOREA

액면/연도 : 五錢/隆熙 3(1909)년

품위/중량/크기 : 白銅/ - /

CAT.NO : KM.1138, KS.35.1

상태 : VF+

 

내부평가액 : 5,500,000

낙찰가 : 10,000,000

 

 

2000년 7회 경매 출품

大阪造幣局 製造

 

우리나라 近代鑄貨 中 가장 稀貴한 品目 中의 하나로서,

최근 20여년 동안 한번도 出廻된 적이 없었음.

 

前後面에 눌린 자국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미품이상 상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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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발행된 1909년 백동화 “오전”, 1910년 청동화 “일전”
1930년대 서울의 다방
 
1930년대에 들어서 다방은 서울의 명물로 자리잡게 된다.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었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이었다가 다음에는 다실, 찻집으로 불렸다.
 
또, 우리나라에 카페가 등장한 때는 서울에 다방이 생겨났던 시기와 비슷한 무렵이었다. 카페가 충무로 2가 큰길에 일본의 아카다카 지점으로 첫 출발선을 끊었다. 초기에는 제과점이면서 홍차나 커피도 함께 팔았는데, 차츰 커피맛을 찾아 모여드는 손님 때문에 다방으로 변모하였다.

이 다방이 당시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끌자 그 건넛집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두 다방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이고,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다방은 동경 미술대학교를 졸업한 조각가 이순석이 조선 호텔 건너편에 문을 열었던 낙랑팔러가 최초였다. 바로 이 낙랑팔러를 기점으로 서울 곳곳에 다방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우리주화는…. 없군요….
대신 아래는 구한말 마지막으로 발행된 1909년 백동화 “오전”, 1910년 청동화 “일전”입니다.


   대한제국 조폐기관 전환국(典圜局)

 
1883년(고종20) 8월 7일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폐기관.
 
개항 이후 고종은 종래에 통용되어오던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동전 이외에 금전•은전과 지폐를 동시에 유통시킴으로써 근대적 본위화폐제도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면한 재정난 타개책으로 1883년 악화인 당오전을 발행하게 되었다.
 
당오전 주조시 처음에는 종래와 같이 여러 정부기관에 의뢰하여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주출(鑄出)되었으나 이러한 임시적 주전소만으로는 계속 다량의 주조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화폐를 발행할 수 없었으므로 별도의 국(局)을 설치했다.
 
설립 당시에는 종로구 원서동 소재의 대가(大家)를 전환국 건물로 사용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885년 전환국 건물을 현재의 남대문국민학교의 북쪽으로 생각되는 당시의 선혜청(宣惠廳) 별창(別倉) 자리에 신축했는데, 이것이 경성전환국이다.
 
1892년 전환국을 서울에서 지금의 인천여자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가, 1900년 다시 용산의 군자감(軍資監) 창고(지금의 용산구 원효로 근처)로 옮겼다.
 
전환국 설립초에는 민태호가 관리, 이중칠이 총판을 맡았다가 1884년 묄렌도르프가 맡았으나 곧 이조연으로 바뀌었고, 묄렌도르프는 공조참판이 되어 경성전환국 신축에 힘썼다.
 
경성전환국은 연와조 건물로서 모두 3동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1동은 기관실, 제2동은 지금실•조각소•평량소, 제3동은 용해•신연•극인•분석공장으로 사용되었다.
 
독일에서 주조에 필요한 압인기(壓印機) 3대 등 조폐기계를 수입한 이후, 1884년(고종 21)에 '을유년'(乙酉年)이라는 연기(年期)가 표시된 1냥 은화와 5문 동화(五文銅貨)를 시주(始鑄)했고, 1886년(고종 23)에는 '개국 495년'(開國四百九十五年)이라는 연기가 표시된 금화•은화•동화 등 15종의 압인주화(壓印鑄貨)를 시주했다.
 
그러나 경성전환국은 대체로 시주화를 주조하는 데 그치고 신식기계를 이용한 다량의 당오전을 주조하지는 않았다.
 
1891년 은본위제를 표방하는 '신식화폐조례'가 반포되면서 이에 필요한 화폐주조를 위해 1892년 인천전환국이 설립되어 5냥 은화 1만 9,923원을 비롯하여 1냥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을 소량 시주했다.
 
그러나 인천전환국은 그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자 그에 관련된 일본인들이 철수함으로써 주조사업이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신식화폐조례도 본위화폐의 주조가 적은 가운데 사실상 공문(空文)에 그치고 말았다.
 
1894년 일본과 동일한 은본위제를 표방한 '신식화폐발행장정'이 선포되면서 본위화폐인 5냥 은화의 주조가 사라지고 주조이익이 큰 보조화폐인 백동화가 발행되었다.
 
1900년 용산구 원효로에 용산전환국이 설립되었으며, 내부시설로 화폐주조시설 외에 우표인쇄를 위해 설치된 농상공부 인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폐 제조에 필요한 제지고와 인쇄소가 설치되었다.
 
사실상 전환국이 대량의 화폐를 발행하여 실제의 유통화폐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발행한 용산전환국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시주화의 제조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1904년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賈田種太郞]는 전환국에서 백동화를 남주한 것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는 구실 아래 고종의 재가를 얻어 백동화의 주조를 정지하고 전환국을 폐지했으며, 전환국 소유의 기계•물품 등을 탁지부에서 조검(照檢)•보관하도록 함으로써 조선 자체의 조폐시설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