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0.12.04 00:23 / 수정 2010.12.04 00:23
“150발 맞았으면 300발 쏘는 게 해병대 전통이다”
“북한의 포격 직후 대통령으로 하여금 ‘확전하지 말고 상황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도록 한 청와대와 정부 내 개자식들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다.”
북한의 연평도 무력도발 다음 날 해병(130기) 출신인 6선의 한나라당 홍사덕(67·대구 서구) 의원 발언이 장안의 화제가 됐다.
홍 의원은 “대통령께서 시간이 지난 다음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몇 배의 보복을 하도록 했지만, 처음에 주변에서 잘못 오도했던 참모들은 이참에 청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었다.
그는 특히 “해병은 절대로 공매(헛된 매)를 맞는 군대가 아니다”라며 “몇 배의 보복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뒀어야 했다”고 강조해 의원 사무실에 격려 전화가 줄을 잇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홍 의원으로부터 ‘해병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성시윤 기자
● ‘개자식’이란 용어까지 썼다.
“별별 험한 말을 다 해도 상관이 부하한테 야단칠 때도 우리 해병 시절에는 그 말만은 안 썼다. 금기로 돼 있었다. 온갖 흉악한 말을 다 해도 그 말을 입에 담으면 동기 사이에선 바로 결투였다.
신병훈련소부터 해병대 특유의 뭐가 있는데, ‘지금부터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로 시작하지만 개자식이라는 말만은 못 쓰게 돼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 그런데 왜 썼나.
“150발을 맞았으면 300발 쏘는 게 해병대 전통이다. 소대장·중대장한테 맡기든, 사령관한테 맡기든 그게 전통이다. 왜 못 하게 만들었나, 그게 진짜 화가 난 이유다. 내가 말수 많은 사람도 아니고, 험한 말 쓰는 사람도 아니다.
상당히 위험한 인계점까지 가 있는 상황에서 화력이나 장비를 이런 식으로 해놓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에 주둔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죽으라고 하는 것은 안 되지 않느냐. 해병대가 거기에 있는 이상 북한 4군단은 절대 꼼짝을 못 한다.
진짜 북한의 옆구리 내지 목에 칼을 들이댄 형세로 가 있는 거다. 해병대니까, 그게 가능한 거다. 한국전 때 기억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그렇게 대비를 해온 거다. 해병대가 저렇게 맥없이 당하고, 일본에서도 ‘한국군 약하다’ 망신당하면서 다른 군 사기는 저절로 떨어지는 거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걸로 본 것 같다.
“그것은 군 통수, 군령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 거다. 반성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험한 말을 한 거다. 충격은 어지간히 받은 모양이다.”
● 말하길 잘했다고 보나.
“충격 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본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대한민국 사활의 문제 아니냐. 그래서 작심하고 얘기한 거다.”
● 앞으론 달라질 것으로 보나.
“우리 해병대에서는 연평도나 백령도에 있는 병력은 사실은 개전 시 죽을 각오를 하고 주둔해 있는 거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거다. 개전 시에 거기서 살아남을 확률이 뭐 그리 크겠냐. 그래도 해병대 전통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거다.”
● 앞으로 이 사안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소위 게임이론, 1970년대 이후 정치학에서 게임이론이 많이 발전, 숙성됐다. 관대한 사람과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의 게임에서 승률을 제일 높이는 방법은 로버트 엑슬로드가 개발한 ‘팃포탯(tit-for-tat: 반드시 보복하기)’ 전략이다.
처음에는 한 번 용서하고 관용을 베푼 다음, 그 다음에는 상대가 하는 대로 맞대응하는 방식이다. 대북 전략은 기본적으로 팃포탯 전략을 택해야 한다.
이 정부 들어서서 첫 번째 단계, 먼저 한 번 베푸는 단계를 생략했던 게 유감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또 하나는 프랑스 클레망소(1917∼20) 총리가 한 얘기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군인과 장군들한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전쟁은 정치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구상을 잡아야 한다.”
● 현 정부 초기에 베푸는 단계를 생략한 게 유감이라는 것은.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한 번 베풀고 용서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고약하게 나올 때는 바로 단호히 응징한다’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했어야 한다는 거다. 메시지가 분명해야 승률이 높은 거다.”
● 천안함 사건으로 그 단계를 한 번 거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상대가 용서받은 걸로 생각하느냐 그걸 봐야 한다. 그런 메시지가 전달됐을지에 대해선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한다.”
● 해병대를 지원한 계기는.
“그때 (대학)등록금도 없었고, 기왕 군대 갈 바에야 해병대를 가자. 그냥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거였다. 거창한 건 없었다. ”
● 해병대 가면 고생한다는 이미지 있지 않았나.
“하여튼 서울대생 중 사병으로선 내가 1호였다. 사람들이 좀 놀랐더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극한점까지 가서 그걸 견뎌내야 신병훈련소를 마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내가 6월 22일 입대했다. 그런데 아직 군복 입기 전 4시간 만에 해병대를 만들어내더만. 3시간40분 구보를 시키고 나서 수돗물이 안 나오더라.
결국 훈련소장 막사 앞의 30평쯤 되는 연못에 400명이 달려들어 마셨다. 연못이 반으로 주는 것 같더라 그 순간 해병이 된 거다. 그게 말하자면 시작이다. 장구벌레 떠다니고, 이끼 떠 있는 연못인데, 다른 데 물이 없으니까.”
● 아들(홍재선)도 702기로 해병대 복무를 했는데.
“그놈도 뭐 비슷했다. ‘기왕 갈 거면 해병대 간다’ 그랬다. 신병훈련소를 1등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부모로서 초청받아서 훈련소 가서 상 받는 것을 봤다. 높은 놈 자식은 최전방 보내는 게 전통이어서 훈련소에서 바로 연평도로 가서 거기에서 3년 복무한 뒤 제대했다.”
● 홍 의원은 어디서 복무했나.
“당시로선 내가 큰 키였다. 그래서 나는 사령부 의장대에 있었다. 군기가 제일 센 데다.”
● 그간 해병대에 대해 우리 사회가 큰 관심을 가질 계기가 없었다.
“한국전 때 정말로 어려운 전투는 예외 없이 해병대가 맡았다. 통영·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는 물론 양구 김일성 고지 탈환작전은 미 해병대도 못 했던 것을 우리가 해냈다. 북한 인민군이건, 중공군이건 해병대가 떴다 하면 실제 벌벌 떨었다.
정말 지독하게 싸웠으니까. 목표가 정해지면 반드시 해냈다. 그 결과 서해 5도에 해병대가 둥지를 트니까 불과 4000, 5000명 때문에 1개 군단(북한 4군단)이 거기 묶여 꼼짝을 못 하고 있다. 해병대니까 그렇다. 그런데 백령도 가서 내가 확인도 했는데, 한국전 때 쓰던 탱크를 고정시켜 아예 대포만 쓴다고 하더라. 포병을 강화해 달라고 내가 국방장관한테 부탁도 했었다.”
“해병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남는 장사라는 걸 내가 보증하겠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포기하거나 무릎 꿇지 않는 근성, 그 해병정신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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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시윤 기자 [copip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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