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데이비드 韓人특공대, MB도 알았을까 ?
▲ 1950년 10월 16일자 타임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표지 인물로 등장했다
이승만 박사와 美OSS 한인 유학생 9명 선발캠프 데이비드에서
항일 특수훈련 시켜
"존경하는 부시 대통령,
저는 먼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6년 전, 그러니까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4월 지금은 캠프 데이비드로 불리는 바로 이곳에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미국의 청년들과 함께 특공대 훈련을 받으며 피땀을 흘렸던 한국 청년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당시 미국의 전략정보국(OSS)과 재미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는 극비리에 대일(對日)전쟁에 투입할 한인 특공대를 육성하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에 따라 미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 12명이 1차로 선발돼 그중 9명이 바로 이곳에서 수개월씩 생사를 넘나드는 특수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를 비롯해 훗날 나라 건설을 위해 크게 기여했던 장기영, 이순용, 장석윤, 정운수, 김길준, 현승염, 황득일 등의 청년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미국이 보여준 희생과 배려에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며 동시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민들도 자유와 독립을 강력히 바랐던 한국의 자랑스러운 청년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20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초청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함께 가진 기자회견에서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더라면….
이 연설은 가상이지만 그 내용은 픽션이 아니라 100% 사실이다. 미국과 엇박자를 내기로 한 지도자라면 모르지만 전략적 동반자를 꿈꾸는 한국의 지도자라면 한미 우호의 밑거름이 된 9인의 청년을 잊어서는 안 된다.
OSS는(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 정보국)으로 제2차 세계 대전시 미국의 정보 기관이었으며, 훗날 CIA로 개편되며, 원래 루스벨트의 지시에 따라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분석을 전담하기 위해 1941년 7월에 설립된 정보조정국(COI·Coordinator of Information)이 이듬해 6월 13일 특수 군사작전 업무도 할 수 있도록 확대개편된 조직이다.
이승만은 COI의 핵심직책을 맡고 있던 육군 정보참모부 소속 굿펠로우 대령과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굿펠로우는 OSS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과 굿펠로우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이승만은 OSS 참여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내려 했고, 굿펠로우는 미국 내 한인 청년을 훈련시켜 대일(對日)공작을 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7월경 두 사람은 20~44세 한인 50명을 선발키로 했다.
10명은 무선통신 훈련, 10명은 해상전술 훈련, 30명은 주요 작전 조직훈련을 받은 다음 중국 한국 등에 배치돼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했고 그중 12명이 선발됐으며 다시 그중 9명이 "모처"에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그 "모처"가 바로 지금의 캠프 데이비드였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요인들로 인해 이승만과 OSS의 "합작사업"은 성공적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임정 승인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요구였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포항공대 고정휴 교수는 "이승만이 임정 승인과 같은 정치적 요구는 일단 유보하고 대일전쟁에서 한인 무장조직의 효용성을 충분히 입증한 다음 단계적으로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냈다면 장기적으로 임정에 대한 승인 획득도 가능하지 않았을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캠프 데이비드 땅속에, 66년 전 학업도 포기한 채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졌던 한국 청년들의 고귀한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한우 기자, 2008/04/26 매스타임즈]
장준하 선생
국회의원 시절 장준하
광복군을 oss요원으로 훈련시킬 것을 협의하는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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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독립운동기 군사외교 활동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Ⅰ. 태평양 전쟁기 이승만의 군사 외교노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대한정책은 두 가지 중요한 방침을 정했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으나 한국에 대해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둘째, 임시정부 승인은 현실성을 결여한 정책이지만, 비정규 한국군(게릴라부대) 창설 계획은 전쟁 수행 상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이제까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평화적이면서 간접적인 외교노선과는 달리 임시정부와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지지성명과 대일 선전포고를 하도록 적극 권유하는가 하면, 미국에 대해서는 한인부대 창설 및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ㆍLend-Lease Act)에 따른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국제정세의 흐름에 맞는 보다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치게 된다. 특히 그는 ‘한인병력을 무장시키고 한인부대를 창설해 미군에 배속해 전쟁에 참전’하게 하는 적극적인 대미 군사외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승만이 이러한 외교노선을 채택하게 된 배경에는 전후 한반도의 자주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의 승인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실질적인 한인병력 및 한인군대의 태평양 전쟁 참전만이 미국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승만은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에 서, “만일 지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승인을 받지 못하면 전쟁이 끝났을 때 공산 정권이 수립되는 불행한 결과가 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전쟁에서 지면 한반도가 소련에 넘겨지든가, 아니면 공선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좌우합작 연립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이승만은 헐 국무장관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에서 “어느 약소민족이든지 자기 나라의 자유를 지키지 위해 싸우지 않은 국민들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할 자격이 없다”라는 말에 크게 자극을 받고 군사외교노선을 채택하게 됐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대미군사 외교노선의 선회는 태평양전쟁이 몰고 온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커다란 조류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 전략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미국의 대한방침도 임시정부 승인에서는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한인부대 창설에 대해서는 서로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이승만 주도의 군사외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1941년 12월 태평양 발발 직후부터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과 결합하거나 아니면 재미한인(在美韓人)만으로 독립적인 한인부대 혹은 특수부대(게릴라부대)를 창설해서 대일특수전ㆍ정규전에 투입시켜 달라는 요청을 미군 당국에 제기해 왔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발족상태에 있던 정보조정국(COI: Coordinator of Information)과 접촉하면서 군사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1941년 12월 7일 이승만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시 미국의 대표적 군 전략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미국 내 한인(韓人)을 이용한 첩보 수집을 위한 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태평양 전쟁시 미 전략사무국(OSS)이 한인들을 이용하여 한반도에서의 대(對) 일본에 대한 첩보활동은 중국과 워싱턴 등 크게 두 개로 대별된다. 먼저 중국 전구의 미 전략사무국(OSS)이 추진한 한미군사합작훈련으로는 독수리작전, 북중국 첩보작전, 옌지그-4(YENZIG4)작전, 불사조작전(Phoenix Project), 칠리미션(Chillimission) 등이 있었고, 워싱턴의 OSS 본부가 추진한 한미군사합작훈련으로는 냅코작전이 있었다. 첫째, 냅코작전(Napko Project)은 미국내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작전이다. 둘째, 북중국첩보작전(North China Intelligence Project)은 중국 연안(延安)에 있는 중국 공산당 및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활용하려는 작전이다. 셋째,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은 광복군을 활용하려는 작전이다. 이중 광복군과의 한미합작훈련은 1945년 4월 3일 임정 주석(臨政 主席) 김구(金九)의 최종적인 승인을 받아 광복군에 대한 OSS의 훈련이 실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됐다.
그 후 계속해서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인 2세로 구성된 ‘니세이부대’와 같은 미군 소속의 외국군 부대로 한인부대 창설, 50만 달러의 무기대여요청(1943.9.29), 태평양섬의 한인노무자를 이용한 특수작전(1944.7.19) 등을 제의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대일(對日) 정보수집을 책임지고 있는 정보조정국(COI)의 중국책임자인 에슨 게일(Esson McDowell Gale)과 미 전쟁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COI의 제2인자이자 도노반의 오른팔인 프레스톤 굿펠로우(Preston M. Goodfellow)와의 친분을 이용하여 한인들의 대일 특수작전 및 정보공작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의했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 1942년 1월 창설)와 기독교인친한회(Christian Friends of Korea, 1943년 8월 창설), 그리고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군사외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 동안 미국 수도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을 개소하고 군사외교 활동을 실시했다. 그가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펼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먼저 일본의 군사력 영향력에 있는 만주나 시베리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둘째, 미국은 외교선전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조성 및 사관양성을 위한 활동에 있어 일본의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는 미국이 세계 외교무대의 중심지로서 한국을 사정을 알리는데 적합하고, 또 일본의 직접적인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만주나 시베리아에서 처럼 일본 군경(軍警)의 박해를 박지 않은 다는 이점이 있었다. 셋째, 미주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 선전 및 외교의 전선의 중심이었고, 독립자금 조달의 유일한 제공처가 됐다. 광복군을 창설할 때에도 재미교포들이 보내준 성금으로 창설식을 가졌다. 광복군을 창설시 군비(軍費)는 주로 하와이의 대한인동지회와 국민회가 중심이 돼 미주동포로부터 조달했다.
Ⅱ. 이승만과 정보조정국(COI) 및 전략사무국(OSS)과의 관계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정보기구인 COI와 OSS를 통해 군사 외교노선을 견지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군 정보수집기관으로 전략사무국(OSS)을 창설하였는데, 이 기구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동시에 초기 미군 정보기구인 정보조정국(COI)의 후신이기도 하다.
COI는 1941년 7월 11일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의 명령으로 창설되어 영국 정보기관의 협조를 얻어 아시아 지역의 적 후방 지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는 등 적정 수집활동을 했다. 1943년 6월 13일 COI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OSS로 개편되면서 미군의 정보업무를 총괄하게 됐다.
OSS는 크게 두 개 파트로 편성됐다, 첫째는 정보공작을 담당하는 부서로 여기에는 비밀첩보과, 방첩과, 연구 및 분석과, 대외첩보과, 문서 및 검열과 등이 있다. 둘째는 행동공작을 담당한 부서로 특별공작과, 심리전과, 해상공작과, 야전투입훈련부대, 공작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냅코작전을 위해 재미한인들 이용한 특수요원 훈련을 받은 곳이 행동공작부서 예하의 야전투입훈련부대(FEU)이고, 광복군과 관련 있는 독수리작전은 정보공작부서 예하의 비밀첩보과에서 담당했다. 하지만 북중국첩보작전은 인도 뉴델리의 OSS지부에서 담당했다.
미국의 OSS는 대일 정보수집 및 적 후방교란 등 첩보활동을 위해 한국 내 사정을 잘 알고 있고, 한국어 및 일본어가 가능한 한국인 첩보대원의 유용성에 주목했다. 즉, OSS는 한국인 중에서 한국사정을 잘 아는 한국에 거주한 자로서 현지에 친척, 친구, 반일단체 등과 연관이 있는 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첩보활동이나 테러 활동을 한 경험이 있는 자, 한국어와 일본어가 가능한 자를 첩보원으로 선발했다. 이들 첩보원의 선발 대상은 주로 미주교포, 미군에 포로가 된 한국인, 한국광복군 및 조선의용군이었다.
태평양 전쟁기 군사외교활동을 펼쳤던 이승만에게 미군 정보기관의 핵심 멤버인 게일, 굿펠로우, 도노반과의 친밀한 관계는 이를 추진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이승만은 친분이 두터운 미국 정보조정국의 중국 관련 특별고문이던 게일을 통해 OSS의 부국장인 굿펠로우를 만나, 미국 내 한인들을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발발 직전인 1941년 9월부터 COI는, 중국을 통한 대일정보 수집계획을 추진하면서 적임자로 게일을 뽑았다. 게일은 전형적인 한국통이자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COI는 게일 사절단의 파견을 위해 1941년 9월부터 12월까지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부간회의(interdepartmental conference)를 개최했고, 이승만은 바로 이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COI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COI 책임자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제2인자였던 굿펠로우가 이승만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미 1941년 여름부터 전쟁부 정보참모부에 근무하고 있던 굿펠로우와 교류했고, 이후 이승만은 굿펠로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간 회의에서 게일은 이승만을 “중화민국의 아버지인 손문 박사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며, 주위에 한국인 애국자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러한 게일의 평가는 COI의 제1, 2인자인 도노반과 굿펠로우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Ⅲ. COI의 최초 특수작전부대인 101부대에 한인 추천
이승만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COI가 중국 중경의 한인들을 이용하여 비밀정보 및 사보타지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1942년 1월 24일 게일은 ‘적후공작을 위한 한인 고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 본토와 한반도, 만주에 있는 한인들을 대일 정보수집과 사보타지에 활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게일은 이 때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광복군이 35,000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고, 그 중 9,250명이 중경에 있다는 정보를 인용했다. 그는 이러한 인적 자원을 대일공작에 활용키 위해 미국에서 선발된 요원들로 하여금 중경에 한인을 대상으로 한 특수훈련학교를 건립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1942년 1월 27일 COI가 올리비아계획(Olivia Scheme)을 수립했다. 이는 COI본부를 중경 인근에 설치해서 한국ㆍ만주ㆍ화북ㆍ양자강 등에서 정보 및 사보타지 그룹을 지휘하고, 이 때 한국인을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COI는 일본 점령지역에서 특수공작을 수행하는데 한국인이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COI는 올리비아 계획을 위해 보다 구체화된 훈련과정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COI의 최초 특수작전부대인 101부대를 창설했다. COI의 구상은 중국-한국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에 침투한다는 것이었다. COI의 계획을 주시하고 있던 이승만은 자유한인대회(1942.2.27-3.1)가 폐막되자 바로 장석윤(張錫潤)을 COI의 제1기생으로 추천했다. 이 때 장석윤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주미외교위원부를 연결시킬 이승만의 편지를 휴대한 채 입대했다. 굿펠로우는 중국주둔 미군사령관 스틸웰 장군과 협의해 아이플러(Carl Eifler)를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선발했고, 1942년 3월 이승만과 친분이 있는 장석윤ㆍ정운수(鄭雲樹) 등 한국인 20명을 COI 제1기생으로 소집했다. 이들은 COI 특수부대 제101지대(Special Unit Detachment 101)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한편 게일은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1942년 2월 8일 뉴욕을 출발해 3월 중경에 도착해 활동했다. 그러나 COI의 계획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중국 정보당국이 강력히 반발하고, 또 이 계획의 중국내 대리인으로 이승만을 지명했다는 COI의 계획에 중국측이 반대함으로써 이 계획은 최초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게일 사절단의 계획의 일부 차질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COI는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이승만과 미군 정보당국은 이 계획을 계기로 한인들을 대일 특수작전 및 정보공작에 활용하는 논의를 보다 활발하게 논의했기 때문이다.
Ⅳ. 자유한인부대 창설 및 광복군의 미군 지휘체계하 편입 추진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대한정책은 공식적으로 임정 불승인ㆍ신탁통치 실시로 굳어졌지만, 한편으로 COI 등 정보부대가 한인 게릴라부대의 창설ㆍ활용에 우호적인 상황 속에서 한인들의 대일특수전 참가시도는 활발해졌다.
이 무렵 이승만은 재미한인들을 훈련시켜 단위부대로 미군에 배속시키거나 독자적인 자유한인부대 창설을 구상하였다. 그는 1942년 6월 전쟁부로부터 한인 입대지원자 50명의 선발을 요청받았다. 이에 기초해 그는 그해 10월 게릴라 훈련에 필요한 한인지원자 60명의 명단을 제공했고, 이 기회를 이용해 한인게릴라부대 창설을 제안했다.
그는 1942년 10월 굿펠로우에게 “미국 군사당국에 한인군사지원제공”이라는 공문을 발송하여, 미국내에 대대급 규모(500명)의 자유한인부대를 창설하고, 또 극동에서 25,000명의 한인병력을 미군의 지휘체계로 이관하자는 제안을 했다. 또한 필요시 5,000명 단위의 추가 증원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는 미군 현지사령관과 한국 광복군의 연결은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한인들이 맡을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미군 부대 혹은 자유한인부대의 핵심이 될 수 있는 한인지원자 50명을 추천하면서 추가로 500명의 지원자를 추천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승만이 추천한 사람 중에는 장기영(張基永ㆍ체신장관 역임)ㆍ이순용(李淳鎔ㆍ내무장관 역임)ㆍ장석윤(張錫潤ㆍ내무장관 역임)ㆍ김길준(金吉俊ㆍ미군정장관 공보고문)ㆍ정운수(鄭雲樹ㆍ대한정치공작대)ㆍ김세선(金世旋ㆍ뉴욕영사)ㆍ한표욱(韓豹頊ㆍ주미공사)이 있다.
자유한인부대는 미주에서 한인청년과 유학생들로 편성하고, 극동에서는 임정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에 동원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이렇게 함으로써 임정의 참전외교를 현실화시킬 구상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자신의 계획(Korean Project)을 합동참모부의 소관 위원회로 넘겨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계획이 승인된다면 이승만은 미국인 고문(한미협회 회장 크롬웰)과 함께 인도의 캘커타로 가서 임정 및 광복군 지도자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그 목적은 중국-버마-인도전구 미군사령관인 스틸웰 장군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다고 했다. 이승만은 광복군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이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임정승인까지 얻어낸다는 복안이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비밀각서를 A, B안으로 작성해 미 전쟁부에 제출했다. A안은 극동에서 미군지휘 하로 편입될 한인 병력 25,000명에게 필요한 물품과 군사장비 품목이었다. B안은 미국에서 구성될 대대급 한인자유부대 모병에 소요되는 경비내용으로 매월 3,940달러가 책정됐다. 이승만은 B안이 빠른 시일 내에 착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통해 광복군과 미군간의 협력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이승만은 이 계획안을 전쟁부로 보내 승인을 받으려고 했으나 이에 대한 답신이 없자, 전쟁장관 스팀슨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이에 대해 통보가 없음을 지적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육군차관 맥클로이에게 전보를 보내, 미군 내 한인부대 창설은 극동의 연합군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맥클로이 차관은 답신에서 “한인부대 조직은 비현실적이며 전술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 유지가 어렵다.”고 했다. 결국 이승만의 이 계획은 OSS에서 부정적인 결론은 내림으로써 실현을 보지 못하게 됐다.
Ⅴ. 재미 한인들의 대일 특수작전 참가 요청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 미국과 협력토록 하면서 일본에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도록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특히, 그는 미 OSS의 육군 소장 도노반 장군과 그 실무자인 굿펠로우 대령과 친분관계를 이용하여 이를 추진시켰다. 이승만에게 있어 굿펠로우 대령은 대단히 친절하고 융통성이 있는 군인이었다. 이승만은 그의 사무실로 찾아가 “한국이 미국 국민의 전쟁 수행에 협조할 것을 갈망하고 있으나 정객들로부터 빈번히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말하자, 그는 “미국 정부가 한국인의 협조 제공을 거절한다는 것은 큰 실수”라면서 한국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특히 그는 “한국 임시정부가 미국 정부에 의해 승인이 안 되었다 하더라도 미국 전쟁부는 한미합동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해 이승만을 한국지도자로 승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OSS가 1944년 한반도침투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한 냅코계획(Napko Project)도 1941~1942년 이승만이 주장한 재미한인의 대일무장투쟁과 한인게릴라부대 창설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됐다. 또한 이 계획은 유럽전선에서 OSS의 역할과도 관련이 있었다. OSS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를 위해 창설되었음에도 유럽전선에서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이에 유럽에서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난 1944년 중반 OSS가 최종적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 태평양전선이었다. 이는 1945년 1월 23일 워싱턴 OSS의 기획단이 작성한 ‘비밀정보수집을 위한 일본적진에 대한 요원침투 특수계획’(Special Program for Agent Penetration of Japan's Inner Zone, for Secret Intelligence Purposes)으로 나타났다. 이 계획에서 중국전구가 한반도침투작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근거지로 확정됨에 따라 중국전구 OSS의 활동을 강화하고 한인들을 이용한 침투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또한 워싱턴의 OSS도 이를 위해 별도로 냅코작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냅코계획은 OSS가 미국 내에 수용되어 있던 한인 전쟁포로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려고 구상한 계획이다. 이 계획은 일찍부터 미국내 한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OSS 워싱턴 본부의 아이플러(Carl F. Eifler) 대령과 굿펠로우 대령 등은 유일한(柳一韓)ㆍ장석윤 등과 함께 미국 내 전쟁포로수용소의 한인포로들을 훈련시켜 태평양 오키나와에서 잠수함으로 한반도에 비밀리에 침투시키는 작전이었다. 이는 아이플러와 장석윤이 태평양 초기 중국으로의 진출에 실패했던 것을 고려하여 중국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서 곧바로 한반도로 침투하기 위한 것이었다.
냅코계획은 1945년 2월 26일 아이플러가 도노반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가시화됐다가, 1945년 3월 7일 아이플러가 도노반에게 ‘NAPKO PROJECT'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냅코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워싱턴의 OSS 기획단에서는 1945년 5월 31일 냅코작전을 공식 승인했고, 미 합참도 6월 19일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냅코작전은 태평양 초기 이미 시작됐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이 시기에 나왔을 뿐이다. 즉, 냅코작전은 OSS의 부책임자인 굿펠로우가 1942년 중국을 우회한 한반도침투작전계획인 올리비아계획에서 출발해, 1942-44년 OSS의 전신인 COI의 특수부대인 제101지대의 활동경험을 통해 간접경험을 축적한 후, 1944년말-45년 초에 본격화 됐다. 특히 장석윤이 위스콘신주 멕코이(McCoy) 포로수용소에서 얻은 정보 및 공작원 확보, 미얀마 학병탈주자들이 냅코작전을 구체화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냅코작전에 동원된 한인들은 모두 19명이었다. 이들은 재미한인 출신인사, 미군에 입대했던 한인병사,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출신 등으로 구성됐다. 이 때 장석윤은 맥코이 포로수용소 위장 잠입하여 냅코작전에 필요한 한인 학병 및 노무자 출신을 선발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맥코이 수용소 출신으로 사이판에서 노무자 출신으로 수용된 사람은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 등 3명이고,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미얀마전선에서 탈출한 사람은 박순동, 박순무, 이종실 등 3명이다. 이들 포로 및 노무자 출신을 제외한 13명은 미국시민으로 미 육군에 입대했다가 OSS배속된 사람과 민간인 신분으로 있다가 OSS에 참여한 인사로 구분된다.
미 육군에 입대 후 OSS에 배속된 인사로는 장석윤을 비롯하여 변일서, 유일한, 이태모, 차진주, 최창수 등 6명이고, 민간인 출신으로 OSS에 들어온 사람은 김강을 비롯하여 변준호, 이근성, 이초, 최진하, 하문덕 등 7명이다. 이들 냅코작전에 투입될 한인 요원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에 위치한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강도높은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유격훈련을 비롯하여, 무선훈련, 폭파훈련, 그리고 첩보교육 등을 3-4개월 정도 받았다. 그밖에 독도법, 촬영, 낙하산훈련, 선전 등의 훈련도 포함됐다.
그리하여 1945년 3월에는 한반도에 투입될 두 개조를 편성하였는데, 조 이름은 유일한)을 조장으로 하는 아이넥조(Einec Mission)와 차로조(Charo Mission)가 바로 그것이다. 먼저 아이넥조는 조장 유일한을 포함하여 이초, 변일서, 차진주, 이종흥 등 모두 5명으로 서울로 침투하여 경제사정과 일본군 부대의 주둔위치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차로조는 이근성, 김강, 변준호의 3명으로 이들은 평남 진남포(鎭南浦)를 경유하여 평양(平壤)에 잠입, 근거지를 세운 다음 일본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1945년 5월 냅코팀은 한인포로를 획득하게 되자, 무로조(Mooro Mission)라는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하게 된다. 아이플러는 이들 맥코이 포로수용소 한인노무자들이 모두 황해도 출신임을 고려하여 편성했다. 이들의 작전지역도 항해도 앞 바다의 섬을 정하고 그곳에서 섬 주민을 전향시키는 것이었다. 1945년 6월 23일에는 다시 차모조(Chamo Mission)라는 새로운 공작조를 편성하였는데, 이들의 임무는 함경남도에 연합군 비행장을 건설을 위해 이근성, 김깅, 변준호, 하문덕 등 4명을 공수로 낙하시켜 비행장 활주로와 공작원 양성소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냅코작전도 한인 요원들이 훈련을 끝내고 중국 및 태평양 지역 미군 사령관들의 승인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실행에 들어가지 못하고 끝나게 됐다. 냅코작전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극동지역 미군사령관들의 그들의 작전지역내에서의 냅코작전을 위해 투입될 한인요원들의 활동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 냅코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나 태평양지역 미 육군사령관 맥아더, 그리고 태평양 지역 미 해군사령관 니미츠 제독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이들 사령관들은 새로운 작전을 시도함으로써 기존 전투력을 감소시킬지 모른다는 우려와 자체 정보활동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또한 중국전구 미 OSS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 중국주재 OSS 간부들은 냅코작전계획이 한반도 실정을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과 최악의 경우 중국전구 OSS가 주관한 독수리작전을 위험해 빠뜨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점을 들어 이의 실행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중국의 OSS에서는 독수리작전이 한국의 임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냅코작전은 주중 OSS의 지휘하에 진행되거나 독수리 작전의 일부로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냅코작전은 일제의 패망으로 그 시기를 놓치게 됐고, 미 합참도 극동지역사령관들의 반대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일본 항복 1주일후인 1945년 8월 23일 그 실행이 불가능해졌다는 명령서를 하달함으로써 냅코작전은 공식 취소됐고 한인 요원들의 임무도 종결됐다.
이리하여 이들 한국 청년들은 직접 작전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나 종전 후 일본 점령시기에 극동에 배치되어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이 때 OSS에 참가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승만을 따르는 재미청년지식인들이었다. 그들로는 장기영(張基永)ㆍ유일한(柳一韓) 등이 있다.
Ⅵ. 이승만의 군사외교 평가
이승만은 한국이 낳은 탁월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국제정치학자로서 뛰어난 국제정치 감각과 통찰력, 미국인 저명인사로 구성된 한인우호단체를 결성해 목표를 추구해 나가는 그의 외교술은 가히 그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천부적 자질의 소산이었다. 그는 국제정치 상황에 맞게 적절한 강온전략의 외교술을 구사하며 적극적인 대미외교를 수행해 나갔다.
그는 미국 및 강대국과의 외교전쟁을 전개하면서 갖은 수모와 고초, 좌절과 회의, 동지들의 배신 등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꿋꿋하게 헌신하는 초인의 자세를 보여줬다. 그는 시련이 강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기, 특히 태평양 전쟁기를 통해 이승만의 군사외교는 많은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망명객의 신분으로 미군 당국을 설득하여 재미 한인을 미군 특수작전부대에 참가시켜 대일 전쟁에 참전하게 했다. 비록 이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태평양 전쟁기 한국인이 연합국의 일원이 되어 미국과 함께 싸웠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승만은 대미군사외교를 통해 6.25전쟁 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한국인으로 하여금 한미연합작전을 경험케 하는 군사외교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특유의 국제정치 감각을 발휘하여 임시정부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지지성명을 발표케 하고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한 것은 탁월한 국제정치학자로서의 소양과 안목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미군에게 한인부대 창설과 광복군을 미군 지휘하에 편입시켜 한미 양군으로 하여금 대일전선에 참가시키려고 한 것은 그 일의 성패에 관계없이 그것은 그의 뛰어난 현대국가의 통치에 필요한 연합작전 및 동맹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한 근대 국가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쾌거였다. 6.25전쟁에서 미군을 참전케 하고 유엔군으로 끌어들이는 그의 외교수완은 이미 이때부터 태동하여 그 빛을 발했던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립운동기 그의 군사외교에 대한 평가는 다각적인 분석의 틀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추진하는 그의 외교에 대한 평가를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여기에 얽히고설킨 주변 강대국간의 이해관계, 미국의 임시정부 불승인정책 및 연합국인 소련에 대한 미국의 우호정책, 그리고 미국 및 한인 지도자들의 무지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소련의 용인 및 공산주의자와의 좌우합작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그에 대한 평가도 올바르게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틀 속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기 군사외교는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독립운동기 이승만의 군사외교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으며, 그가 세운 외교 목표도 신념으로 가득 찬 그만이 수립하고 추진할 수 있는 탁월한 외교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태평양전쟁기 그의 대미군사외교 활동을 실패라고 규정짓는 기존의 일부 연구 성과는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싶다.
기사입력시간 : 2009년 03월13일 [18: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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