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고려사 열전(신하) 오류는 누가 정정하는가 ?

by 연송 김환수 2010. 2. 27.

 고려사 열전(신하) 오류는 누가 정정하는가 ? 

 

조선 초기 김종서(金宗瑞:1390~1453) · 정인지(鄭麟趾 : 1396 ~ 1478)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인 고려사의 기록중에 우리 선조의 기록에 대한 오류가 있음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서 문제 제기를 해 봅니다.

 

---------------------------------------------------

 

고려사 열전(신하)의 김은부 기록은 1072년(문종26년) 경덕국사 묘지명의 기록으로 정정되어야 하는데 담당하는 곳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의 묘지명(1061년,문종15년)에도 그 기록이 있습니다.

 

 정정사항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 ===>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고려사 오류 발췌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경덕국사 묘지명 발췌 (1072년)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 이후 생략 -

 

                                                           ▲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 - - 이후 생략 - - - -

 

 

 

이자연 묘지명 발췌 (1061년)

 

高麗國故推誠佐運保社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大傅

三重太匡門下侍中判尙書吏部三司事上」

柱國監修國史贈守太師中書令章和李公墓誌銘幷序」

        將仕郎尙書兵部員外郎知制誥賜緋魚袋李成美製」

公諱子淵字若冲其先邵城人也高曾大父皆歷貴稱名芬俊域籍」

繼 王家故中樞副使吏部侍郎累贈司空諱翰樂浪郡大夫人崔」

氏考妣也考之長娣安孝國大夫人是爲德靖二宗與 今上之」

外祖母也其族系之滋盛實 社稷之源府 公天生偉量嶽降英」

- - - - - -   이하 생략 - - - - - - -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고려국의 돌아가신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부 삼중태광 문하시중 판

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傅 三重太

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이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

증받은 장화 이공(章和 李公) 묘지명 및 서문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이성미(李成美)가 짓다.

 

공의 이름은 자연(子淵)이고, 자는 약충(若沖)이며, 그 선조는 소성(邵城) 사람이다. 고조,

조와 조부가 모두 귀한 ▨을 거쳤으므로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왕가의 후손을 잇게 하였

다. 작고한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이자 거듭 추증되어 사공(司空)이 된 한

(翰)과,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친의 큰 누이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인데 바로 ▨ 덕종· 정종(德宗· 靖宗) 두 임금과 지금 임금<文宗>

의 외조모이니, 그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실로 사직의 근원이 되었다.

- - - - - -   이하 생략 - - - - - - -

 

===============================================================================================

 

고려사 부내용

 

김은부 (金殷傅)

○ 金殷傅水州安山縣人性勤儉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하였다.

 

주) 1009~1031년 현종 초에 양광도() 남경수부 양주 소속의 수주군() 안산현()이

      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덕종·정종·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곳이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된 뒤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成宗朝授甄官丞穆宗時累遷御廚使顯宗初爲公州節度使.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으로 임명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어주사(御廚使)로 되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되었다.

 

王避契丹南下次公州殷傅備禮郊迎曰: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녘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豈意聖上跋涉山川凌冒霜雪至於此極." 獻衣帶土物王遂更衣以土物分賜扈從官.

 

“성상(聖上)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띠며 지방 산물을 바치니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王至巴山驛吏皆遁御廚闕膳殷傅又進膳羞分供朝夕

 

왕이 파산(巴山)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 공궤조차 못 하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하여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공궤하였다.

 

契丹兵退王還次公州殷傅使長女製御衣以進.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게 유숙하였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因納之是爲元成王后元惠元平二王后亦其女也

 

이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원성(元成) 왕후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

 

尋除刑部侍郞如契丹賀生辰還至來遠城契丹 女眞執之以歸數月乃得還.

 

그는 미구에 형부 시랑으로 승차되어 거란 왕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에 도착하였을 때 거란이 여진을 시켜 그를 붙잡아 갔다가 몇 년 지난 후에야 돌려 보냈다.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고려사. 열전(신하)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시대

고려

연대

1072년 (문종26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세로 37.5cm,  가로 75.5cm, 글자지름 2cm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용산동6가 168-6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九龍山福興寺故 王師都僧統」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

 

이자연 묘지명 (李子淵 墓誌銘)

 

이자연 [李子淵, 1003~1061]

고려시대 문종 때의 문신. 세 딸이 각각 인예태후·인경현비·인절현비로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으며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러 공신이 되었다. 1055년 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겸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그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사(太師) 겸 중서령(中書令)·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이 되었다.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안효국대부인 (安孝國大夫人)

 

高麗國故推誠佐運保社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大師守大傅

三重太匡門下侍中判尙書吏部三司事上」

柱國監修國史贈守太師中書令章和李公墓誌銘幷序」

 

        將仕郎尙書兵部員外郎知制誥賜緋魚袋李成美製」

公諱子淵字若冲其先邵城人也高曾大父皆歷貴稱名芬俊域籍」

繼 王家故中樞副使吏部侍郎累贈司空諱翰樂浪郡大夫人崔」

氏考妣也考之長娣安孝國大夫人是爲德靖二宗與 今上之

外祖母也其族系之滋盛實 社稷之源府 公天生偉量嶽降英」

標襟韻淸通▨華頴秀大平中 顯宗右文興化親選殼雄 公以」

二上得進▨乙科鸎手恣飛龍頭騁價解褐良醞令尋遷御書留院」

官直史館秘書省校書郎監門衛錄事參軍事擢拜監察御史衣繡」

之譽允洽於朝倫演綸之能須歸於大▨就加右補闕知制誥賜緋」

德宗繼統 禹服屢軫 高恣簡喉舌之攸司匪賢良而莫處帶授」

中樞院右副承宣賜金紫又加刑部吏部二員外吏部郎中御史雜」

端左副承宣寃滯之獄精斷而用銓衡之權正擧而毋枉霜綱再」

肅 天咫不違 靖宗繼統 睿眷彌厚特授起居注餘並如故又」

加鸎史舍人中樞院知奏事給事中知尙書吏部事侍郎禮賓卿朝」

請朝議二大夫再知吏部事未幾冊拜中樞副使餘如故又加▨▨」

大夫知中樞院事右散騎常侍柱國▨拜中樞使餘並如故▨▨▨」

寵於▨晝以誰聯萬民之膽屬赫師而僉仰信乎股肱良▨▨事康」

哉  今上唐啓運稷契爲臣以謂天下安危非伯始而不究朝」

中倚賴非▨公而勿居以  公爲檢校尙書右僕射册拜吏部尙」

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又加興祿大夫守司空上柱國遙授西」

京留守使▨▨▨餘並如故册拜内史侍郎同内史門下平章事又」

加特進檢校▨▨權判尙書刑部事重熙中社稷之設因巡未置」

詔稽舊制  命築新壇  公監視其事酌宜以畢  鑾輿備」

采  躬展於報祈雷解沛 恩普沾於▨庶以領使之重」

詔加開府儀同三司其年  公之長女封爲 王妃尋加守大」

尉册拜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又加檢校太保推誠佐運保」

社功臣拜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  國家順」

天心之眷佑固邦本於緜長克樹  元良俾登  儲副以元舅」

之貴加檢校大師又加守大傳重大匡三重大匡判三司事辛卯年」

▨知貢擧事人之麟鳳與琳瑯梓皆出門下矣  公樞庭翊亮」

相府經綸二十有年閒公家之利知無不爲以寵戚之貴不驕」

於人以祿之重不矜於物懸忠貞於日月服禮義於衣裳其▨泰」

山之高早歌於頽秀台星之爛先兆於殞芒寢疾數夕以辛丑秋八」

月三十日卒于妙覺寺法宇中享年五十有九嗚呼痛極  王宸」

悲纒椒掖朝市之喧幾罷緇黄之涕交流  上函命有司申▨襚」

之禮復  遣中貴將法賻之儀  詔贈守大師中書令諡曰章」

和蓋  聖皇褒紀國戚元臣之至也  公啓手之際方寸益明」

綽有遺言俾從佛域茶毗之法爰禀  理命奉  靈骨以其年」

十月初六日歸葬于臨津縣境內所願也  公娶樂浪郡京兆氏」

陰儀婦德眞一代之秀以  王妃副君之故累加鷄林國大夫人」

有子八人長曰頲檢校衛尉卿行尙書右丞知閤門事次曰頔殿中」

中少監次曰碩禮部員外郎次曰顗閤門祇侯出爲楊州使次曰韶」

顯少削周羅一捷于瑜伽業大選場爲大德次曰顥尙食直長同正」

次曰顓先 公而逝次曰顔禮賓主簿同正員女三人並」

配 至尊長爲延德宮主王妃  大子及國原侯其子也次爲壽寧宮」

主朝鮮侯其子也次爲崇慶宮主世嗣繁延家聲▨赫自有書契巳」

來未見踵於  公而同日語者歟惜哉命之在天匪生人之能制」

乎握管咨嗟爲之銘曰翠阜兮寥寥  寒泉兮咽咽  玄扃兮一閉」

素凡兮長別嗟琁昊之莫問  痛▨林之遽折  陵遷谷變兮珉斯貞」

雪白蘭芳兮名不滅」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고려국의 돌아가신 추성좌운보사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 수대부 삼중태광 문하시중 판

상서이부 삼사사 상주국 감수국사(推誠佐運保社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大師 守大傅 三重太

匡 門下侍中 判尙書吏部 三司事 上柱國 監修國史)이고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

증받은 장화 이공(章和 李公) 묘지명 및 서문

 

장사랑 상서병부원외랑 지제고(將仕郞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로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은

이성미(李成美)가 짓다.

 

공의 이름은 자연(子淵)이고, 자는 약충(若沖)이며, 그 선조는 소성(邵城) 사람이다. 고조,

조와 조부가 모두 귀한 ▨을 거쳤으므로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왕가의 후손을 잇게 하였

다. 작고한 중추부사 이부시랑(中樞副使 吏部侍郞)이자 거듭 추증되어 사공(司空)이 된 한

(翰)과,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 崔氏)가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친의 큰 누이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인데 바로 ▨ 덕종· 정종(德宗· 靖宗) 두 임금과 지금 임금

<文宗>의 외조모이니, 그 집안이 더욱 번성하여 실로 사직의 근원이 되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큰 도량과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고, 마음씨와 인품이 맑고 ▨ 그

빼어남이 남달랐다. 태평(太平) 연간에 현종(顯宗)이 학문을 장려하고 교화를 일으켜 친히

뛰어난 인재들을 뽑을 때, 공이 두 번째로 진사(進士)에 을과(乙科)로 급제하니, 앵수(鸎手)

는 이리저리 나부끼고 용두(龍頭)는 값어치를 더하였다. 벼슬길에 나가 양온령(良醞令)이 되

고, 얼마 있다 옮겨 어서유원관 직사관 비서성교서랑 감문위녹사참군사(御書留院官 直史館

秘書省校書郞 監門衛錄事叅軍事)가 되었다. 발탁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자 승진의

영예가 조정의 질서에 부합되고, 임금의 뜻을 펼치는 능숙함이 오로지 대▨(大▨)에 돌아갔

다. 곧 우보궐 지제고(右補闕 知制誥)에 임명되고 비어(緋魚)를 하사받았다.

 

덕종(德宗)이 우(禹)임금의 검소함을 계승하자 여러 차례 높은 품계를 거쳐 후▨(喉舌)의 직

책에 뽑히니, 이 자리는 현량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중추원 우부승선(中樞

院 右副承宣)을 지니면서 금자(金紫)를 받았다. 또 형부(刑部)와 이부(吏部)의 원외랑(員外

郞)과 이부낭중 어사잡단 좌부승선(吏部郞中 御史雜端 左副承宣)에 임명되었다. 억울하고 정

체된 옥사를 정밀히 결단하여 ▨하고, 전형(銓衡)의 권한을 바로 들어 잘못됨이 없었으며,

추상같은 법망을 다시 엄하게 펴서 임금과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정종(靖宗)이 왕위를 계승하자 대우가 더욱 두터워졌는데, 특별히 기거주(起居注)를 제수하

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또 내사사인 중추원지주사 급사중 지상서이부사 시랑 예빈

경 조청·조의대부(內史舍人 中樞院知奏事 給事中 知尙書吏部事 侍郞 禮賓卿 朝請·朝議大夫)

를 더하고, 다시 지이부사(知吏部事)가 되었다. 얼마 후 중추부사(中樞副使)에 임명되고 나

머지는 전과 같았다. 다시 ▨▨대부 지중추원사 우산기상시 주국(▨▨大夫 知中樞院事 右散

騎常侍 柱國)이 되었다. 또 중추사(中樞使)에 제수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 총애

가 대낮에 ▨. 누가 만 백성의 풍족함을 그러모아서 뭇 사람을 빛나게 하고 높이 받들고 모

두 우러르게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고굉(股肱)의 어진 ▨ 있어야 ▨사(▨事)가 편안해지는

것이다. 지금의 임금께서 요순(堯舜)[唐虞]처럼 시운을 열었으므로 직설(稷契) 같은 이도 그

신하가 될 수 있는 것이니, 곧 생각하건대 천하의 안위(安危)는 백시(伯始)가 아니면 찾아내

지 못하고, 조정이 믿고 의지하는 곳은 곧 ▨ 공이 아니면 있지 않다.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로 삼고,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상서예부사(吏部尙書 叅知政

事 判尙書禮部事)로 책립하였으며, 또 흥록대부 수사공 상주국(興祿大夫 守司空 上柱國)을

더해 주고, 멀리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로 삼았으며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였다. 내

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책립하고, 또 특진 검교▨▨ 권판상

서형부사(特進 檢校▨▨ 權判尙書刑部事)를 더하였다.

 

중희(重熙) 연간에 사직(社稷)을 건립하려던 일이 아직도 미루어지고 있자, 조서를 내려 옛

제도를 살펴서 새로이 단(壇)을 쌓게 하였다. 공이 그 일을 감독하여 적절하고 마땅하게 일

을 마치자 임금이 수레에 고운 옷감을 가득 실어 몸소 보답함을 보였으며, 바라던 우레가

치고 비가 내려 은택이 널리 ▨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 영사(領使)의 중책으로 인하여 조

서를 내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주었다. 그 해에 공의 큰딸을 봉하여 왕비로

삼고, 이어 수대위(守大尉)를 더하고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에 임명하였다. 또 검교태보 추성좌운보사공신(檢校太保 推誠佐運保社功臣)을 더하고 문하

시중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에 임명하였다.

 

국가는 천심의 보살핌과 도우심에 순응해야 길이 나라의 근본이 굳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맏아들을 세워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임금의 장인[元舅]이라는 귀함으로 인하여 검교

대사(檢校大太師)를 더하고, 또 수대부 중대광 삼중대광 판삼사사(守大傅 重大匡 三重大匡

判三司事)를 더하였다. 신묘년(1051, 문종 5 )에 지공거(知貢擧)가 ▨되니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공의 문하에서 나왔다.

 

공이 추정(樞庭, 中樞院)에서 임금을 돕고 상부(相府, 中書門下省)에서 정책을 편 지 20여

년이나 되었으나, 국가의 이로움을 알아서 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총척(寵戚)의 귀함으로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작록(爵祿)의 중함으로 남에게 뽐내지 않았으며, 충정(忠貞)이 해

와 달에 걸리니 예의가 겉모습에서 우러나왔다. 태산의 높음도 쓰러진 이삭에서 미리 노래

로서 알리는 것이고, ▨ 태성(台星)의 빛남도 떨어지는 별에 먼저 징조를 보여 닦는 것이다.

병이 든 지 며칠 만인 신축년(문종 15, 1061) 8월 30일 묘각사(妙覺寺) 법우(法宇)에서 돌

아가시니, 향년 59세이다.

 

아, 슬프다. 임금의 슬픔이 후비(后妃)의 친정을 에워싸고, 조정과 저자의 시끄러움도 거의

그쳤으며, 승려와 도사들도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바로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수(▨襚)의

예를 펴도록 하고, 다시 중귀(中貴)를 보내어 법부(法賻)의 의식을 관장하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수대사 중서령(守大師 中書令)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화(章和)라고 하였으니, 성황(聖

皇)께서 국척 원신(國戚 元臣)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공이 임종할 때에 잠깐 정신이 맑

아져서 유언을 남겼는데, 모두 불교의 다비법(茶毗法)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하늘에 여쭙

고 유해를 받들어 그 해 10월 초 6일에 임진현(臨津縣) 경내에 장례지내니, 뜻에 따른 것이

다. 공은 낙랑군 경조씨(樂浪郡 京兆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내조하는 부덕(婦德)이 진실로

일대(一代)에 으뜸 갔다. 왕비의 어머니인 까닭에 거듭하여 계림국대부인(雞林國大夫人)이

더해졌다. 아들이 8명 있는데, 첫째는 정(頲)으로 검교위위경 행상서우승 지합문사(檢校衛尉

卿 行尙書右丞 知閤門事)이고, 둘째는 적(頔)으로 전중소감(殿中少監)이며, 셋째는 석(碩)으

로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며, 넷째는 의(顗)로 합문지후(閤門祗候)인데 양주사(楊州使)가

되어 나갔으며, 다섯째는 소현(韶顯)으로 어려서 출가하여 바로 유가업 대선장(瑜伽業 大選

場)에 나아가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여섯째는 호(顥)로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이며,

일곱째는 전(顓)으로 공보다 일찍 죽었고, 여덟째는 안(顔)으로 예빈주부동정원(禮賓主簿同

正員)이다. 딸이 3명 있는데 모두 임금에게 시집갔다. 큰딸은 연덕궁주(延德宮主)로 왕비이

며 태자와 국원후(國原侯)가 그 아들이다. 둘째는 수령궁주(壽寧宮主)가 되었으니 조선후(朝

鮮侯)가 그 아들이고, 셋째는 숭경궁주(崇慶宮主)이다. 대대로 번성함을 이어서 가문의 명성

이 빛난 것은 글자가 생겨난 이래로 공과 비교하여 말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슬프다, 명(命)은 하늘에 달린 것으로 사람이 능히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붓을 잡고 슬피

탄식하며 명(銘)을 짓는다.

푸른 언덕은 쓸쓸하고 고요한데, 찬 샘의 물소리는 급하기만 하다.

무덤 문이 한 번 닫히니 속세와는 영원한 이별이구나.

슬프다, 넓은 하늘에 물어볼 곳이 없으니, ▨나무가 급하게 부러짐을 애통해 하도다.

 

언덕과 골짜기가 변하여도 옥돌은 굳건하듯, 흰 눈 속 난꽃 향기는 흩어지지 않으리.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안효국대부인 판독오류 수정완료 (안효국태부인 ===> 안효국대부인)

 

 

---------------------------------------------------------

=========================================================

 

고려사 [高麗史]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총 139권으로 되어 있다. 1392년(태조 1) 10월 태조로부터 이전 왕조의 역사책을 만들라는 명을 받은 조준() ·정도전() 등은 1396년 37권의 《고려국사》를 만들어 바쳤다. 정도전과 정총()이 책임을 지고 예문춘추관의 신하들이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우선 통사인 이제현()의 《사략》, 이인복() ·이색()의 《금경록》, 민지()의 《본조편년강목》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역대 고려실록과 고려 말의 사초()를 기본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그 내용과 서술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414년 하륜() ·남재() ·이숙번() ·변계량()에게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태조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1416년 대표자인 하륜이 죽자 중단되었다. 이를 잇고자 하는 논의는 세종의 즉위 후 왕 자신에 의해서 제기되고, 마침내 1419년(세종 1) 9월 유관()과 변계량 등에게 일을 맡기니, 이들은 14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다. 이리하여 본래의 사초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이 바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관계가 고려된 부분에서는 유교적이고 사대적인 관점이 오히려 강화되어 제칙() ·태자() 등을 교() ·세자() 등으로 고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책도 반포되지 못하다가 1423년 12월에 다시 유관과 윤회()로 하여금 이 부분을 실록에 따라 바로 쓰도록 하고 있다.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변계량의 반대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세종은 1431년에 《태종실록》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고려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1442년 8월에 신개(槩) ·권제(踶)가 《고려사전문()》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다.이 책은 1448년에 양성지()의 교감을 거쳐 일단 인쇄되었으나 편찬자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청탁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배포가 곧 중지되었다.

 

세종은 다시 1449년에 김종서 ·정인지 ·이선제() ·정창손()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김종서는 드디어 1451년(문종 1) 8월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최항() 등이 열전, 노숙동() 등이 기() ·지() ·연표, 김종서 ·정인지 등이 교감을 맡았다.

 

열전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14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인쇄, 반포되었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진고려사전()에는, 본기()라 하지 않고 세가()라 함으로써 명분이 중요함을 보이고, 거짓 왕인 신우() 부자를 열전에 내림으로써 분수 넘치는 것을 엄하게 처벌하고 충직하고 간사함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였으며, 제도를 나누고 문물을 헤아려서 비슷한 것끼리 모음으로써 계통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연대를 헤아릴 수 있게 하며, 사적을 상세하게 하는 데 힘을 다하고, 빠지고 잘못된 것을 메우고 바르게 하려 하였다는 편찬의 방침이 제시되고 있다.

 

이 방침은 다시 범례에서 각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먼저 세가에 관한 것을 보면,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넘는 칭호도 그대로 써서 사실을 보존하며, 일상적인 일은 처음과 왕이 직접 참여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고려세계는 실록에 있는 3대추증 사실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였다.

 

또한 우왕 ·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시켰으며, 이전부터 내려오던 이제현 등의 평론을 그대로 실을 뿐, 따로 작성하지 않도록 하였다. 세가에서는 32왕의 왕기가 46권에 수록되어 전체 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된다.

 

서술의 방식은 《원사()》를 모방하여 첫머리에 왕의 출생, 즉위에 관한 것을 쓰고 끝부분에 사망, 장례 및 성품에 관한 것을 썼다. 왕의 연대는 실제로는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삼고 있다. 세가 다음에는 지()를 두었는데, 천문 ·역지 ·오행 ·지리 ·예 ·악 ·여복 ·선거 ·백관 ·식화 ·병 ·형법 등 총 12지 39권으로 되어 있다.

 

이 지()도 《원사》에 준하여 분류하였으며, 실록 등이 없어져서 빠진 곳은 《고금상정례》 《식목편수록》 및 여러 사람의 문집 등으로 보충하였다 한다. 그런데 실제 고려의 제도는 당나라 것을 기본으로 삼고 송나라 것이 덧붙여지고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고유의 전통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원구(圜) ·사직 등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토속적인 연등회 ·팔관회 의식이 중요시되었고, 중국의 아악()과 당악()을 사용하면서도 예로부터의 속악이 성행하였으며, 중국의 관제와 산관계()를 이용하였으나 또한 도병마사 ·식목도감 및 향직 등 독자적인 제도를 아울러 썼고, 당률을 채용하면서도 실제 고유의 관습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지의 맨 첫머리에는 편찬자의 서문이 놓여 있는데, 대개 일반론과 실제 사실에 대한 개설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설명의 큰 줄기는 태조 이후 문종 때까지의 고려 전기를 제도가 정비되고 국세가 번창한 시기로 보고, 무신란 이후 몽골 간섭기에 들어서는 제도가 문란하여 나라가 쇠망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어 본문에서는 먼저 연월일이 없는 일반 기사를 쓰고 그 뒤에 연대가 있는 구체적 사실을 열거하였다. 세가 ·지 다음으로 표가 들어 있는데, 실제 본문에서는 연표라 하여 하나의 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를 따랐다. 제일 위에 간지를 쓰고 그 아래 중국과 고려의 연호를 썼으며, 고려 난에는 왕의 사망과 즉위 및 중국과의 관계 등 중요한 일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표에 이어 마지막으로 열전을 두었는데, 후비전() ·종실전() ·제신전() ·양리전() ·충의전 ·효우전 ·열녀전 ·방기전() ·환자전() ·혹리전() ·폐행전() ·간신전 ·반역전() 등 총 50권, 1,009명으로 되어 있다.

 

열전의 구성은 역시 《원사》를 모방하였지만, 그 서문은 이제현이 쓴 제비전()이나 종실전의 서문처럼 이미 있던 자료를 이용하였다. 그 내용 중 반역전에 우왕 부자를 넣어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고 있고, 문신 위주, 과거 위주로 인물을 선정하여 조선 유학자의 입장이 나타나고 있으며, 흥망사관에 입각하여 개국공신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별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려고 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차례의 개찬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종래의 편년체의 역사서술에서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는 첫째, 동양의 전통적인 왕조사 편찬방식과 같이 기본적으로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그 나름으로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둘째, 이렇게 사실을 있는 대로 쓰려고 애썼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성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셋째, 그러면서도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관을 큰 원칙으로 하여 고려시대를 이해하고 있는데, 첫째, 흥망사관에 의해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둘째, 무인()을 천하게 보는 관념과 왕실의 권리를 도둑질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한 데 대한 정통론의 입장에서 무신정권을 부정적으로 쓰고 있다.

 

셋째, 원나라를 섬긴 부분에 대하여 대명관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사 편찬자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고, 그 이전 시기에 기록된 고려사 속 사신()의 견해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여 있다. 넷째, 고려 말 개혁론자의 견해를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에서 고려 당시의 사실과 다른 점이 생기게 되었다.


- ⓒ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8746


====================================================================================================

 

 돈이 없어도 할수 있는것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 털털이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주지 뭘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니라.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누구나 다 있는 것이다."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요 
              둘째는 언시(言施) 
               말로써 얼마든지 베풀 수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셋째는 심시(心施)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넷째는 안시(眼施)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으로 베푸는 것이요. 
              
               
              
                
                  다섯째는 신시(身施)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 것이요. 
                  여섯째는 좌시(座施)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이고, 
                
                 
                
                  
                    일곱째는 찰시(察施) 
                     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라고 하셨답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보시가 
                  이토록 아름답고도 좋을줄이야~ 
                  저도 몰랐습니다~  
                  성경에서든~ 
                  불경에서든~ 
                  금언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님들도 가진게 없다고
                  불평 마시고 베풀고 보살피며
                  한세상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복흥사 (福興寺,復興寺)

                   

                  경기도 개풍군(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圓通洞)에 있었던 절이며

                   

                  복흥사(復興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초 명승인

                  원융국사(圓融國師, 964∼1053)가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

                  (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된 기록으로 보아 991년 이전에 창건된 절이다.

                   

                  이후 고려 문종의 왕사를 지낸 경덕국사(景德國師, 999~1066)가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주지를 지냈으며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1038~1097)이

                  1049년에 복흥사(福興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절에는 승려를 출가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마련한 계단(戒壇)인 관단(官壇)이

                  있었으며 원융국사(圓融國師)·경덕국사(景德國師)·혜덕왕사(慧德王師) 등을 배출한

                  유명한 사찰이다.

                   

                  경덕국사는 휘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원경왕사와 대각국사 의천이 대표적인

                  인물이.

                   

                  경기도 개성시 영북면 월고리 원통동 (국사봉)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사지에는 법당터의 주춧돌과 삼층석탑, 2기의 석재, 부도(浮屠), 귀부(龜趺) 등이

                  있다. 이 절은 신라말 고려초에 개성 부근에 세워진 절 중에서 유일하게 쌍탑가람

                  (雙塔伽藍)의 형식을 보이고 있는 매우 희귀한 유지(遺址)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오학린(吳學麟, 1035 문과급제)과 변계량(卞季良,1369~

                  1430)의 시가 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 초기에는 법당과 수각(水閣)이

                  있었고 매우 한적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참고문헌≫ 松都의 古蹟(高裕燮, 悅話堂, 1977)

                   ---------------------------------------------------------------

                  오학린 (吳學麟) : 1035년(고려 정종 1) 문과, 1057년 사목, 도병마사

                  한림학사를 지냈으나 생몰연대가 자세하지 않다.

                  오린(吳麟)이라고도 하며 오세재(吳世才)의 조부이다.

                  1035년(고려 정종 1) 문과에 급제하고, 1057년(문종 11)에 사목으로(도병마사)

                  압강에서 북쪽 오랑케를 토평한 공으로 고창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 뒤 6세손 오계유가 고려 충숙왕 때 좌리공신으로 삼중대광 도첨의 찬성사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모양은 고창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창을 본관으로 삼았다.

                   

                  都兵馬士 吳學麟의 功積 補充 (도병마사 오학린 공적 보충)

                  옛學者들은 文을 崇尙하여 武를 내세우지않는 時代性때문에 武官으로서의 직위는

                  나타내지를 않았고 오학린이 문종11년에 국왕에게 올린 제걸 추훼압강성 궁구장의

                  문장이 훌륭했다는 칭송의 글이 고전(동문선)등에 기록되어 있어서 압록강국경에서

                  사목을 지냈으며 그공으로 고창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는 기록에 의해서 거기에서

                  큰 공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는 있었으나 당시의 직위는 알지를 못하였는바 고려사

                  절요의 주인공이 도병마사라는 기록에 오학린의 당시직위는 도병마사(三품 이상

                  군사 12,500여인) 로서 봉임 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림학사는(四품)직위만으로는 고창같은 좋은 곳을 식읍으로 하사받을수는없는일

                  이오나 항상 그직위가 의문이던 중 이번에 고려사절요의 기록에서 도병마사로 봉임

                  하여 그 지방을 평정한 큰공이 있었슴을 알게되어 이를 보충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구룡산 복흥사에 놀며 (重遊九龍山福興寺) : 오학린 시

                   

                  날이 바뀌니 물색 또한 달라지고, 일이 변하니 사람 역시 바뀌누나.

                  학은 새 새끼를 거느렸고, 소나무 묵은 가지는 늙었구나.

                  절은 옛 절이지만 새롭고 중들은 구면인 듯 초면이네.

                  느긋하게 수각(水閣)에 올라가며 지난날 지은 시를 거듭 훑어보네.

                   

                  日改物亦改 事移人又移 鶴添新歲子 老松去年枝 院院古非古

                  僧僧知不知 悠然登水閣 重驗舊題詩 (三韓詩龜鑑 卷上)

                   

                  변계량 (卞季良, 1369~1430)

                  고려 말 ·조선 초 문신. 진덕박사, 사헌부시사, 성균관학정, 예문관의 응교, 직제학,

                  예조우참의, 예문관제학, 대제학 ·예조판서, 참찬, 판우군 도총제부사을 지냈다.

                  대제학 재임 시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었고 《태조실록》 편찬, 《고려사》

                  개수에 참여했다.

                   

                  숙복흥사(宿復興寺) - 변계량(卞季良)
                  복흥사에 묵으며-변계량(卞季良)



                  失路投山寺(실로투산사) : 길을 잃고 산사에 드니
                  人傳是復興(인전시복흥) : 사람들이 이곳을 복흥사라 전한다
                  青松唯見鶴(청송유견학) : 푸른 소나무에는 오직 학만 보이고
                  白日不逢僧(백일불봉승) : 대낮에도 스님을 만나 볼 수 없도다
                  古壁留金像(고벽류금상) : 오랜 벽에는 금 부처상이 있고
                  空梁耿玉燈(공량경옥등) : 빈 들보에는 옥등잔 불빛이 깜박거린다
                  前軒頗淸切(전헌파청절) : 앞마루가 자못 정결하니
                  過客獨來憑(과객독래빙) : 지나는 나그네 홀로 와서 기대노라

                  ===========================================================================================

                   * 원융국사(圓融國師) : 964∼1053 고려초의 명승으로 자는 혜일, 속성은 김씨이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승려가 되어 복흥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고려 성종 10년(991)에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이 되었다.

                  현종 초에 승통에 오르고 정종 7년(1041)에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되었다.

                  묘지사의 주지를 지내고 부석사에서 법사가 되었다.

                   

                  * 경덕국사(景德國師) :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

                  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

                  국사)를 스님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혜덕왕사(慧德王師) 소현(韶顯 : 1038,정종 4년 ~ 1097, 숙종 2년)

                  고려 중기 법상종의 대표적인 고승, 유식학(唯識學)에 밝던 스님

                  이름은 이민(李民). 휘는 소현, 자는 범위, 중서령(中書令)

                  이자연(李子淵)의 아들

                  1048년(문종 2)에 해안사(海安寺)지광(智光) 해린(海麟)을 은사로

                  모시고 <금광명경>과 <성유식론>을 배웠다.

                  이듬해 복흥사(福興寺) 관단(官壇)에서구족계를 받았다.  

                  1084년 다시 승통에 올라 왕명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 원경왕사(元景王師) : 속성은 신씨(申氏), 이름은 낙진(樂眞)이고 시호는 원경(元景)이다.

                  경덕국사(景德國師)와 대각국사(大覺國師)에게 사사하였으며

                  고려 숙종(肅宗:재위 1095∼1105) 때 승통(僧統)이 되었고,

                  예종(睿宗:재위 1105∼1122) 때 왕사(王師)가 된 후 귀법사(歸法寺)에 머물다

                  입적하였다.

                   

                  위의 네분 스님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은 아래 클릭

                  경덕국사 난원 (고려 문종조 안산김씨)

                   

                  *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 : 고려의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한 고승. 성은 왕(王)씨.

                  이름은 후(煦), 호는 우세(祐世), 시호는 대각국사 (大覺國師). 송악출신.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 인 문종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다.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출가를 자원하였다. 1065년 5월 14일에 경덕국사(景德國師) 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10월 불일사 (佛日寺)에서 구족계

                  (具足戒)를 받았다.

                  좀 더 자세하게 클릭 경덕국사와 영통사, 대각국사 의천

                   

                   

                  ++++++++++++++++++++++++++++++++++++++

                  ++++++++++++++++++++++++++++++++++++++

                   

                  구족계[具足戒] : 출가(出家)한 비구 ·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

                   

                  불교 교단의 승려 중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 모든 계율이 완전히 구비되었다 하여 구족계라 하며,

                  이를 잘 지키면 열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구족계를 받으려면 20세 이상 70세 미만의 승려로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몸이 튼튼하여 병이 없으며, 죄과가 없는 이로서, 사미계(沙彌戒) 또는 사미니계(沙彌尼戒)를 받은 뒤

                  3년이 경과되어야만 한다.

                  비구의 경우에는 구족계가 250계, 비구니의 경우에는 348계이다. 이 계를 주고받는 의식은 별도로 계단

                  (戒壇)을 만들어서 행한다.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되 수계자의 자유로운 지원을 받아서 행하며, 우리나라

                  에서는 범어사·통도사·해인사의 계단이 유명하다.

                  이 계의 수계는 삼사(三師)·칠증(七證)이 배석한 가운데 계사(戒師)가 부처님을 대신해서 전수하는데,

                  수계자가 계를 받을 것을 청해오면 계사는 구족계의 내용을 일일이 설하여주고,

                  수계자로부터 하나하나의 계율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을 받은 뒤에 계를 주는 형식을 취한다.

                  ≪참고문헌≫ 佛敎戒律解說(默潭, 法輪社, 1981)

                   

                   ---------------------------------------------------------------------------------

                   

                  서울 견지동 한국불교 태고종 총무원에서 불기 2553년도 구족계, 전법사계 수계산림이 봉행되고 있다.

                   

                   제8차 구족계 수계산림 금강계단 (2009.11.25)

                   

                   

                   

                    

                   

                   

                   

                   제7차 구족계 수계산림 봉행 모습 (2008.12.3)

                   

                  -----------------------------------------------------------------------------------

                   

                  관음종(총무원장 홍파) 서울 숭인동 낙산 묘각사 구족계, 사미계, 법사계 수계식 2009.10.13 

                   

                  2008.9.24 구족계 수계식 (관음종 총본산 낙산 묘각사 종루)

                  2009.10.13

                  수계자는 3점, 사미계는 1점, 법사계는 향으로 연비했다 (2009.10.13)

                   

                  -----------------------------------------------------------------------------------


                   

                   대만 까오쑝 광덕사 구족계 모습

                   마운스님 2009.01.30 02:56

                   

                  구족계를 수지하기 위하여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

                  3인이 일조가 되어 세사람씩 들어가서 구족계를 수지한다.

                   

                  삼화상 칠증사께서 자리하고 있으며 인례의 도움으로 포살계를

                  수지하는 장면이다.

                   

                  93년 대만 광덕사 삼단대계에 칠증사 자격으 로 참석하신

                  석가산 큰스님의 모습

                   

                   구족계와 포살계 수지를 위해 인도 해주신 인례사부

                   

                   

                  연비를 위하여 연비할 곳을 정하고  있다.

                   

                  머리에 연비를 하고 있는 장면

                   

                   

                  불이 꺼질때까지 참회진언을 하고 있다.

                   포살계 수지후 삼화상과 인례사부들과 함께 한 자리

                   

                   삼화상 칠증사 인례10사와 삼단대계에 동참한 비구들과의 사진

                   기념촬영후 탁발 출정식

                   

                  갈마 아사리께서 탁발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체 대중이 탁발을 시작하는  모습

                   

                   

                   수계 형제들과의 마지막 만찬

                   

                  일부발췌 출처 : 가슬나암 원문보기   글쓴이 : 마운스님

                  ------------------------------------------------------------

                  수계 [受戒]

                   

                  불교에서 재가(在家)신도나 출가(出家) 수행승의 구별 없이 석가의 가르침을

                  받는 자가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한 서약.

                   

                  이에는 일정한 의식이 있는데, 가장 엄격한 것은 비구·비구니가 되기 위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의 의식이다.

                   

                  수계에는 계를 주는 수계사(授戒師), 계단(戒壇)에 대한 여러 가지 작법을 가

                  르치는 교수사(敎授師), 그 작법을 실행하는 갈마사(羯磨師)의 3사와, 그 자

                  리에 입회하여 그의 수계를 입증하는 7명의 증인(이를 三師七證이라 한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작법은 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 즉 갈마사가 참석한 대

                  중에게 수계 희망자의 뜻을 말하고, 그들의 승인을 세 번묻는 의식이다. 이

                  를 백사갈마(白四羯磨:즉 1백 3갈마)라고도 한다. 또한 이 경우 수계의 자격

                  으로서 10차(遮)와 13난(難)을 묻는다.

                   

                  전자는 ① 수계자가 만 20세에 이르렀는가, ② 부모가 허락하였는가, ③ 빚

                  이 없는가, ④ 건강한가 등 수계에 필요한 조건을 묻는 것인데, 후자는 본질

                  적으로 악한 행위의 유무를 묻는다. 예컨대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일이 없

                  는가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소승률(小乘律)의 규정인데, 재가신도는 5계, 사

                  미·사미니는 10계,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받는다. 대승에서는 앞

                  에서 말한 3사중 어느 한 사(師)만에 의한 수계와, 사 없이 스스로 서약하는

                  자서수계(自誓受戒)가 있다.

                   

                  사미계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은 남자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

                  기 전의 수행자.

                  그러한 여자를 사미니(沙彌尼)라고 한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되기 위하여

                  지켜야 할 십계를 사미계 또는 사미니계라고도 한다. 이는 살생·도둑질·음행·

                  거짓말·음주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식사하는 것, 춤과 노래를 보고 듣

                  는 것, 향수를 바르고 몸을 단장하는 것, 높고 큰 평상에 앉는 것, 금은 보물

                  을 지니는 것 등을 금지하는 10가지이다.

                   

                  불교에서 사미가 지켜야 하는 10가지 계율이 있으며 예비승려에 해당한다.

                  사미니의 경우도 동일하다. 사미·사미니의 단계를 근책(勤策)이라 하고 이를

                  근책율의(勤策律儀)라고도 한다. 10가지 계율은 ① 살생하지 말라(不殺生戒),

                  ② 훔치지 말라(不偸盜戒), ③ 음행하지 말라(不淫戒), ④ 거짓말하지 말라

                  (不妄語戒),⑤ 술 마시지 말라(不飮酒戒),⑥ 향수나 꽃다발로 바르거나

                  장하지 말라(不塗飾香鬘戒), ⑦ 노래와 춤을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라(不歌

                  觀聽戒), ⑧ 사치스럽고 화려한 자리에 앉거나 눕지 말라(不坐高廣大牀戒),

                  ⑨ 때 아닌 식사를 하지 말라(不非時食戒), ⑩ 금이나 은 등의 보물을 받거

                  나 비축하지 말라(不蓄金銀寶戒) 등이다.

                   

                  법사계

                  불교의 교법을 전하는 사람.

                  산스크리트 다르마 바나카(dharma-bhanaka)를 번역한 것이다. 부처의 가르

                  침에 정통하고 교법(敎法)의 스승이 되는 승려를 이른다. 법주(法主)라고도

                  부른다. 가르침을 설하는 이, 또는 중생을 이끄는 승려라는 뜻도 있으며, 단

                  순히 승려 또는 출가한 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 포교사의 역할도 하는

                  승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출가법사는 보살승으로 정의하고 재가법사는 사교육을

                  이수한 불교 지도자로서 구법수행, 설법포교 등의 실천과 활동을 한다.

                   

                  《묘법연화경》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 법사가 하는 주된 일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수지(受持)는 경전을 받아서 항상 잊지 않고 머리에 새겨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고, 독(讀)은 경전을 읽는 것, 송(誦)은 경전 글귀나

                  게송을 암송하는 것을 말한다. 해설(解說)은 어려운 교리를 설명하는 것을,

                  서사(書寫)는 경전을 쓰고 모사하는 것을 뜻한다. 이들 다섯 가지 종류의 법

                  사가 별도로 있어서 이를 오종법사(五種法師)라고 부른다. 한편 《화엄경》

                  에 나오는 법사의 십덕(十德)은 제9품 선혜지(善慧地)에 든 보살이 대법사

                  (大法師)가 될 때 갖춰야 하는 열 가지 덕을 말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설해 포교하는 사람.

                  원래는 항상 설법하고 수행에 힘쓰며 세상의 모범이 되어 중생을 인도하는

                  승려를 의미했으나 점차 승려 일반을 가리키고, 근래에는 더 일반화되어 승

                  속을 불문하고 불교에 정통한 포교사를 뜻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은 인도에서 대승불교를 흥기시키는 데 법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데서 유래한다. 대승불교 이전에는 법사의 전신으로 경전을 암송하

                  는 사람인 송경자(誦經者)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며, 인도의 불탑 명문을

                  통해 법사들의 존재가 입증된다.

                   

                  이들은 성지를 방문한 순례자들을 위해 경전을 암송하는 등 찬불 공양의 의

                  식을 집행하고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가르침을 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승불교가 애초에 불탑신앙을 중심으로 흥기했던 점에서 보면, 이들은

                  〈법화경〉에 표출된 대로 대승의 담당자였다.

                   

                  또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에 의하면 이들 중에는 남녀를 불문한 재가신

                  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재가의 보살이란 이들을 가리킨다. 특히 〈법화

                  경〉은 법사품에서 법사의 가치를 설하고, 또 법사공덕품에서는 경전을 간직

                  하고(受持), 읽고(讀), 암송하고(誦), 해설하고(解說), 서사하는(書寫) 5종 법

                  사를 열거하며 그 공덕을 제시한다. 법사의 책무에 대해서는 〈십지경 十地

                  經〉에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구족계(具足戒)

                  비구 · 비구니계

                   

                  모든 계가 완전히 구비되었다고해서 구족계(具足戒)라 한다. 비구나 비구니

                  임을 구족(具足)하는 일 또는 비구와 비구니가 받는 계(戒)를 말한다.

                  즉, 교단에서 비구, 비구니가 되기위해 받는 계가 구족계이다.

                  모든 계가 완전히 구비되었다고 해서 구족계라 하며, {사분율}에는 비구는

                  250계가 있으며, 비구니는 346계가 있다.

                   

                  비구(니)가 되면 계를 수지(受持) 해야 하기 때문에 비구(니)가 되는 일이 곧

                  비구(니)계를 수지하는 일이 되어서 중국이나 한국, 일본 등의 북방권에서는

                  구족계를 비구(니)계라 한다.

                   

                  비구(니)의 계품(戒品)이 갖추어진다(具足)는 뜻으로 해석한다. 사미와 사미

                  니의 10계 등은 구족계라 부르지 않는다. 사미(니)계라 한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구족계를 수지해야 정식 승려가 된다. 그 이전단계는

                  미(니)계를 수지한 예비승려이며, 예비승려 이전은 "행자"다. 조계종에서는

                  최소 6개월 이상의 행자기간과 4년의 예비승려 기간을 거쳐야 구족계를 수

                  지할 수 있다. 예비승려 기간에는 전국의 각 강원이나 동국대, 중앙승가대

                  등 종단의 기본교육기관이나 기초선원에서 수행해야 한다.

                   

                  구족계를 수지하는 의식은 별도로 계단(戒壇)을 만들어야 한다. 매년 정기적

                  으로 실시되며, 엄격한 심사제도인 갈마를 거쳐서 받게 된다. 계의 수계는

                  삼사칠증(三師七證)이 배석한 가운데 전계사(傳戒師)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전수하는데, 수계 제자가 계를 받을 것을 청하면 전계사는 구족계의 내용을

                  일일이 설하여 주고, 수계자로부터 하나하나의 계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다짐

                  을 받은 뒤에 계를 주는 형식을 취한다.

                   

                  -------------------------------------------------------------------

                   

                  구족계

                   

                  새로 출가한 사람이 최고 단계의 승려위계인 비구(팔리어로는 bhikkhu이고,

                  산스크리트로는 bhikṣu) 또는 비구니(팔리어로 bhikkunῑs)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불교 계율.

                   

                  사미 또는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구족계라고 한다. 수계법에 의하면, 구족계를 수지한 자는 곧 바로

                  비구·비구니의 자격을 가지게 된다.

                   

                  현재 상좌부(Theravāda:'장로들의 길'이라는 뜻) 전통에서 행하고 있는 이

                  구족계 수계의식은 원칙적으로 석가모니 생존 당시와 같다. 구족계 수계란

                  한 번 받으면 다시 받을 필요가 없는 영원한 것은 아니어서 일부 국가에서는

                  승려들이 일생 동안에 구족계를 여러 번 받기도 한다.

                  승려들이 구족계를 받으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나이는 20세가

                  넘어야 하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병역에서 면제되어야 하고, 부채가

                  없고 전염병걸리지 않아야 하며,

                  불교에 대해 적어도 몇 가지 기본적인 교육은 받아야 한다는 것 등이다.

                   

                  구족계 수계의식은 우기(雨期)의 하안거 기간(vassa)을 제외하고는 길일

                  (吉日)이라고 생각되는 어느 때라도, 그리고 이미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참석한 신성한 장소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행할 수 있다. 다만 구족계를 받을

                  때에는 특별한 수계작법이 있다. 즉, 삼사칠증(三師七證:삼사는 계율을 직접

                  설하는 수계아사리, 계율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교수아사리 그리고 갈마아

                  사리를 말하는 것이며, 칠증은 수계의식이 원만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증명해주는 법사 7명)을 모시고 위의를 갖추어 설하게 되어 있다.

                   

                  새로 출가한 자에게 수여하는 사미계(구족계보다는 낮은 단계의 기본 계율)

                  수계식은 수계자가 이전에 이미 수계한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다. 수계자는 승려의 법복을 입고 삼보(三寶 Triratna), 즉 붓다(Buddha)·

                  다르마(Dharma 法)·승가(僧伽 Sangha)에 귀의할 것과 십계(十戒:승려가

                  켜야 하는 기본적이고 윤리적인 행동규범→계)를 지킨다는 말을 따라한다.

                   

                  그리고 수계자는 스승과 함께 수계사(授戒師) 앞에 서서 해당 계율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이때 수계자는 3번 질문을 받는데,

                  만일 계율을 받아 승려가 되는 데에 반대 의견이 없으면 이 출가자는 승려

                  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여성 출가자도 이와 유사한 의식을 통하여 비구니가 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비구계는 250가지이고, 비구니계는 348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복잡하고 많은 계율을 〈사분율 四分律〉에 근거하여 나누면,

                  바라이(波羅夷)·승잔(僧殘)·부정(不定)·사타(捨墮)·단타(單墮)·바라제제사니

                  (波羅提提舍尼)·중학(衆學)·멸쟁(滅諍)의 8가지이다.

                   

                  구족계는 〈십송율 十誦律〉과 〈오분율 五分律〉·〈선견율비바사 善見律毘

                  婆沙〉·팔리어계본·티베트어계본 등에 담겨 전해지나 그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수계의식은 수와 당 이래로 대개 〈사분율〉에 의거했고

                  사미계·구족계 이외에도 보살계(10가지의 중요한 계율과 48가지의 가벼운

                  계율)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 선덕왕 당시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율사

                  (慈藏律師)가 통도사에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난 뒤 지금까지 독자적인 계단

                  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