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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김 뿌리찾기/뿌리찾기

통천김씨 족보관련 공지

by 연송 김환수 2009. 2. 15.
신라 김씨의 후손으로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2009.2.28자로 블로그 내용을 삭제합니다. 관련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는 연락처를 남기시면 별도 설명드리겠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하여 주시고 마음이 아프셨을  통천김문의 김규남 선생님께도 감사드리며 통천김씨 문중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합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아래 댓글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

다른 블로그 및 홈페이지에 통천김씨 족보 오류 내용들이 이미 제기되어 있어 부득이 제가 안김문중 입장을 대변하여 제 블로그에 오류 수정 요청 글을 올리게 된 것 입니다.  제 글이 등재된 2009. 2.15이전의 자료를 제시하겠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제가 화합차원에서  2009.2.28자로 블로그 내용을 삭제하면서 전문을 이미지로 보관한 내용중 첫페이지의 기록입니다.

 

 

아래 이미지는 2009. 1.30자에 올라와 있는 글입니다. 제 블로그가 아닙니다.

이글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 2009. 3.20일에 다시 확인하고 이미지를 복사하였습니다. 

 

 

 

 

광산김씨 시중공파 홈페이지 게시판 12번 작성일 2006-12-17 (일) 10:51

http://www.kwangsankim.org/tech/board.php?board=pds&page=14&command=body&no=23

 위 자료는 2009. 3.20 확인결과 삭제되어 자료가 없어 검색이 가능한 아래 내용을 올립니다.

 2004.8.15 광산김씨 대종회 자료 : 2009. 3.20일에 다시 확인하고 이미지를 복사하였습니다

 

윗글 내용 

<朝鮮氏族統譜>와 <東國萬姓譜>에 依하면 通川金氏는 系代를 알 수 없는 金憑
(1549 -1590)을 始祖로 기록하고 있는데 김빙이 무고로 죽임을 당한 기록은
丁若鏞의 <東南小史>나 金時讓의 <부溪記聞>, 安邦俊의 <混定錄>,
李肯翊의 <燃藜室記述>등의 문헌에 보인다.

통천김씨의 初刊譜는 1701년(肅宗27)의 辛巳譜인데
通川君 金較 이후부터 판도판서 金遠登이전의 世系는 알 수 없어

경순왕-(子)鎰- (子)較- - -(諱)以淸- (子)渭 라 하고 章을 바꾸어

(1世) 中祖 諱 遠登- (2世) 浩- (3世) 如山/ 中齡/ 中福으로 하였으며
1861년(哲宗12)의 辛酉譜와
1913년의 癸丑譜및
1956년의 丙申譜 까지는 위와  同一한 系代로 편성했으나

1970년의 庚戌譜 修譜時에
敬順王 - 鎰(麻衣太子)- 較 - 昱 - 以淸 - 渭 - 元祥 - 守雄 - 光中 - 체 - 守剛 - 子廷 - 漆守 - 遠登 으로
편성하였으니 고려사 열전 김광중傳에 貫鄕의 기록이 없음을 착안하여 그 아드님 체 까지
통천김씨로 등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바  이는 경술보 수보당시 <金義元墓誌銘>과 <光山金氏族譜>
등을 살펴보지 못한 당시 임원들(允錫, 世昌, 哲旭, 聖萬, 炳玉)의 큰 실수였던 것인데

그 뒤 1988년의 戊辰譜와  2003년의 癸未譜 修譜時에도 訂正하지않고 위 庚戌譜와
同一하게 系代編成을 하고있어 이 그릇된 族譜를 근거로 하여
<新羅金氏二千年史>와 <韓國族譜大典>,<韓國人의族譜>, <韓國人의姓譜>等에도
光金 先代祖인 諱 광중과 그 아드님 諱 체가 通川金氏로 登載되어 있으니
한수일가의 지적처럼 광김 대종중에서는 이제라도 통천김씨측에 시정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내 그릇된점을 바로잡아야 할것이다.

>통천김씨 족보를 보니 7세 광중(비서감)-8세 체(현령)라 하고
>고려사에 전기가 있다 하였는데 광산김씨인 비서감 김광중(9세)과
>그 아드님 순안현령 체(10세)를 통천김씨로 알고 족보에 올린것이 아닌지요?
>광산김씨인 동명인을 자기네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통천김씨측에서
>누가 어느 시기부터 이렇게 했으며 광김대종중에서는 통천김씨측에
>시정을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는지 여부와 통천김씨측의 시정의사 여부를
>알고싶습니다.

 

 

2009.02.27  제가 김규남 선생님 의견에 대한 답글 근거자료 입니다. 아래에 원문을 올립니다.

 

 

 

 

2009.02.27 

 

 

 

우리 선조 김위, 김원상 기록이 있는 1776년의 족보는 1766년에 이어 2번째 발간으로 족보 간행인 김양심은 조선 시대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을 지내신 분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으신 분으로 족보 편찬시에 잘못된 기록이 있었다면 그 직책상 탄핵을 받았을 것이 자명하지요.

 

그리고 1863년 안산군(연성군) 김정경의 신도비를 쓰신 분이 예조판서이며 글씨와 전서체를 쓰신 분이 수록대부 영명위(정조의 사위)이므로 그 내용의 진위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당과 같은 모습에 높이가 4척이며 광주 고을 서쪽의 현천에 해방을 등진 언덕은 곧 연성군 김공 정경의 묘소이다.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이하 생략....

 

다음은 규남 선생께서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1970년 통천김씨 휘 위(渭) 이후의 실전된 조상기록을 추가하면서 계대 편성하신 원상(元祥)의 기록을 오류로 삭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로 인하여 약 35년에서 38년간 각종 문헌상 기록에 원상 선조님이 통천김씨로 여러 사이트에 퍼져 있는 오류기록의 정정은 짧게 보아도 수십년이상 오류기록이 남게 될 것이 자명하고 일부는 정정되지 않고 계속 그 기록이 남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渭)자 휘를 쓰시는 분이 서로 다른 분이시라면 왜 원상이란 분을 계대 편성하셨는지 그 내용으로 오류 기록이 상당기간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우리 안김 문중 후손 개개인의 명예와 정체성에 문제가 발생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위(渭)자 휘를 쓰시는 분이 안김의 휘 위(渭)자 선조님과 다른 분이라면 뿌리공원의 기념비 문장 내용의 위는 정승에 올랐다는 기록은 수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05년도 통천김씨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중시조 이전의 계대를 초간본(1701년)대로 환원하고 경술보(1970년)에 보충한 계대는 인정하지 않음을 결의하여 종회보에 실어 각 종원과 관련 기관에 통보한 바 있다는 내용을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yescheers@yahoo.co.kr (종이문서는 디카로 관련내용을 찍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통천김씨 문중에 대하여 어떤 사적인 감정을 갖고 글을 올리지는 않았음을 말씀드리며   2009년 3월초에 관련 블로그 내용은 삭제하겠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문제는 있지요. 다른 블로그 및 홈페이지에 이런 내용들이 이미 제기되어 있어 부득이 제가 안김문중 입장을 대변하여 제 블로그에 오류 수정 글을 올린 것이니까요

* 관련 내용

뿌리를 찾아서 블로그 통천김씨 족보의 오류 2009.1.30

http://blog.paran.com/rootsfind/29800581

광산김씨 시중공파 홈페이지 게시판 12번

작성일 2006-12-17 (일) 10:51

http://www.kwangsankim.org/tech/board.php?board=pds&page=14&command=body&no=23

 

삭제이유는 같은 신라김씨 후손으로 화합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산김씨는 통천김씨 문중과는 같은 신라김씨 후손으로 가승 계보상으로는 같은 경순왕 후손이며, 현재 나타나는 문헌상의 기록으로 태종무열왕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하여도 지증왕의 직계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통천김씨 다음 블로그를 보세요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2003년에 올린 자료가 그대로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http://cafe.daum.net/tckim

 

인물란에 시조 김교에 대한 내용중 본관연혁을 발췌하였습니다.

김교 이후에 김이청. 김주 부자 말고는 여러 대의 세계를 유실했다. 그러다 중조까지의 계대를 찾아 고려 말에 판도판서에 오른 김원등을 중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시조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으며, 증손 위(渭)는 정난공신으로 태사시중에 올랐다.

위(渭)의 아들 원상(元祥)은 대제학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수자(守雌)는 한림학사와 이부시랑을 거쳐 예주방어사를 역임했다.

 

**안산김씨 김위 벼슬기록**

려조 벽상삼한삼중대광 금자광녹대부 (정1품 문산계)

추충수의분용망구 정난공신 상주국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중

상장군 판리부사 락랑군 개국백 증시 충익공 부인 충원군부인 안씨

 

**안산김씨 김원상 벼슬기록**

대제학, 정당문학, 상호군, 판삼사사

 

=== 내용상 동일인을 언급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

 

  

위의 댓글에서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물론 관리하시는 카페는 아니시겠지만 회원이 27명이고 종친회도 개최한 내용이 있지만 본관연혁이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블로그 내용을 삭제하고 나서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다시 댓글이 달리다 보니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인물란에 시조 김교에 대한 내용중 본관연혁 발췌내용입니다. 

김교 이후에 김이청. 김주 부자 말고는 여러 대의 세계를 유실했다. 그러다 중조까지의 계대를 찾아 고려 말에 판도판서에 오른 김원등을 중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시조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으며, 증손 위(渭)는 정난공신으로 태사시중에 올랐다.

위(渭)의 아들 원상(元祥)은 대제학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수자(守雌)는 한림학사와 이부시랑을 거쳐 예주방어사를 역임했다.

 

 

새로 개설한 네이버 카페를 중심으로 오류를 수정하려는 의지만은 높이 평가합니다만, 

 

2009.3.20까지도 통천김씨 다음 카페에는 본관연혁이 오류상태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김규남 선생님의 댓글과 보내주신 메일을 아래에 먼저 올려드리겠습니다.  추가 설명드린

자료와 아래내용의 삭제를 원하시면 댓글을 남겨주시면 원하시는데로 조치 하겠습니다.   

 

댓글 전문임 : 필요시 보관 이미지 제공 

 

김규남김규남Y

2009.02.26 10:16

통천 김씨 중시조 이전 계대보 관련

 

귀하께서 제기하신 통천 김씨 중시조 이전 계대보 사건은 이미 우리 통천 김씨 문중 안에서도 물의를 일으킨 바 있습니다. 1970년 경술보 편집에 관여했던 분들은 모두 작고하셔서 그 경위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2005년도 통천김씨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위의 사실을 확인, 중시조 이전의 계대를 초간본(1701년)대로 환원하고 경술보(1970년)에 보충한 계대는 인정하지 않음을 결의, 종회보에 실어 각 종원과 관련 기관에 통보한 바 있습니다. 뿌리공원 조형물에 기재된 내용은, 통천 김씨 초간본(1701년)에 의거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희망나라희망나라Y

2009.02.27 06:59

답변 감사합니다.

선대의 조상님을 찾아서 모시기 위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선대의 기록이라도   근거가 없는 초간본은 후손들이 수정하여 바로 잡는 것이 조상님을 바로 모시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1701년의 기록에 대하여 문중어르신들이 아시게 된다면 어떠한 조치를 취하게 될런지 저 또한 장담할 수 없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더 이상 이문제를 가지고 언급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통천김씨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김규남 선생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있어 통천김문의 미래도 밝은 희망이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규남김규남Y

2009.02.27 10:59

1970년 경술보 사건에 대해서는 통천 김 씨의 일원으로서 충분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귀하의 문제 제기가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천 김 씨 종회보(2006년 6월 9일자)에 따르면 당시 문중회의에서 경술보 인수 거부 사태까지 벌어졌던 기록이 있더군요. 그리고 보충된 계대가 광산 김 씨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광산 김 씨 대종회에 충분한 이해를 구한 바 있습니다.

 

귀하께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이미 우리 종원 모두가 씻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안고, 몇몇 종원의 그릇된 역사 의식에서 비롯된 오류을 바로잡아 가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통천 김 씨의 역사에 대해 좀더 정확한 자료나 오류 수정 사실 여부를 확인할 자료가 필요하시거든 주소를 일러주시면 관련된 자료를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1701년 통천 김 씨 족보 초간본에 기록된 '이청'과 '위' 두 분의 기록에 대해서는 뿌리공원 조각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기록은 있으나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고려 말기의 원등을 중조로 모셔 계대하고 있음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하께서 뿌리공원의 문구 중에 '위'에 대한 기록이 근거가 없으므로 수정하여 바로잡으라고 주장하시는 태도는, 고증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고증할 수 없으므로 잘못된 사실이며 그러므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결코 실증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구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소통의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요구해야 할 일이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귀 문중의 선조를 숭모하고 그 빛나는 업적을 널리 알리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일이나 검증할 수 없는 정황만으로 다른 문중의 일에 나서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일도 아닐 뿐더러 좀더 신중했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역사가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데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박제된 역사를 훈장처럼 자랑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가문 의식은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가문과 비교하여 우월한 의식을 갖기 위한 것이나 상대 집안을 무시하거나 혹은 파당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가정이나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듯, 후손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어느 선조나 마찬가지일 것이며 그 마음을 숭모하는 마음이 모여 아름다운 문중이 형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아름다운 마음에 뿌리를 둔 우리의 가문 의식이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진정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계승되기를 기원하면서 가문 의식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서도 좀더 신중하고 현명한 자세를 견지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드립니다.

 

이 사이트의 글을 읽으시는 통천 김 씨 후손들과 다른 집안의 관계자들 그리고 모든 네티즌께서도 이번 사태에 대해 좀더 냉정하고 공정한 태도로 생각하고 대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희망나라희망나라Y

2009.02.27 13:54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 이해는 됩니다.

통천김씨 족보 오류내용을 통김문중 전체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감안하여 조용히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각종 발간물과 인터넷 사이트에 잘못된 기록의 전파 내용이 너무 많아서 부득이 공개적으로 수정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우리 안김측 입장에서 후손 개개인의 명예와 정체성을 모욕당하고 훼손당하는 아픔을 간직하고 명예회복을 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이긴 했지만, 다수가 접할 수 있는 글의 특성상 본의 아니게 통천김씨 문중에 피해가 가게 된 것은 죄송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김문중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고려해 보셨다면 선의의 피해자가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글을 끝으로 더 이상의 논쟁은 없으면 합니다.

 

 

김규남김규남Y

2009.02.27 18:36

유감스럽지만 인터넷에 귀하의 글이 떠 있는 이상 논쟁은 끊일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논쟁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여기신다면 정중히 요청하건데 위 글을 삭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그럴 의향이 없으시다면 아래 사항을 읽어 보시고 시시비비를 가려 명백하게 그 진위를 가려 주시기 바랍니다.

 

귀 문중의 족보는 영조 52년,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병신년 서기 1776년에 만들어졌으며, 통천 김 씨의 족보는 1701년에 발간되었으니, 귀 문중의 족보는 저희보다 75년이 늦습니다.

 

통천 김 씨 족보 초간본에서도 이미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 초, 중기의 기록은 실전하여 그 계대를 알 수 없고 단지 두 분의 이름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우리 또한 그 두 분은 그저 기록으로 여기고 중조 이후부터 계대를 잇고 있음을 명백히 해 왔습니다.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찌하여 귀 문중 후손 개개인의 명예와 정체성을 모욕하고 훼손한 것인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문의 선조 이름과 우리 조상님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안산 김씨의 족보에 기록된 '위'와 통천 김 씨의 족보에 기록된 '위'가 같은 분이 아닐 것은 분명하지만 만약 같은 분이라면 그 증거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있게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을 증명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공개사과, 뿌리공원의 기념비 문장 수정 요청 등을 인터넷 상에 유포하여 공개적으로 문제를 삼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학적이지도 실증적이지도 못한 감정적 태도에 불과합니다.   부디 상황을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통천 김 씨는 그 수가 아주 적은 문중입니다. 그러나 선비 집안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며 분명한 혈통 의식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문중입니다. 게다가 백성의 고충을 생각하지 못하고 나라를 어렵게 만든 벼슬아치 따위를 부러워할 까닭은 추호도 없으며 기축옥사 이후에 일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가난할망정 줏대 있게 살아온 조상님들의 삶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친회 임원 몇 사람의 잘못된 역사 의식으로 말미암은 실수 때문에 통천 김 씨 전 종원을 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그 내막을 몰랐던 종원들 역시 가슴에 피멍이 드는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귀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문제의 경술보(1970년 족보)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피해를 입었던 광산 김 씨 문중에서는 그 문제를 서면으로 제기해 주었으며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같은 김 씨 문중으로서 서로의 발전을 염원해 주신 바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사려깊음과 대승적 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희망나라희망나라Y

2009.02.27 23:34

우리 선조 김위, 김원상 기록이 있는 1776년의 족보는 1766년에 이어 2번째 발간으로 족보 간행인 김양심은 조선 시대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을 지내신 분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으신 분으로 족보 편찬시에 잘못된 기록이 있었다면 그 직책상 탄핵을 받았을 것이 자명하지요.

 

그리고 1863년 안산군(연성군) 김정경의 신도비를 쓰신 분이 예조판서이며 글씨와 전서체를 쓰신 분이 수록대부 영명위(정조의 사위)이므로 그 내용의 진위는 의심할 바 없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당과 같은 모습에 높이가 4척이며 광주 고을 서쪽의 현천에 해방을 등진 언덕은 곧 연성군 김공 정경의 묘소이다.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이하 생략....

 

다음은 규남 선생께서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1970년 통천김씨 휘 위(渭) 이후의 실전된 조상기록을 추가하면서 계대 편성하신 원상(元祥)의 기록을 오류로 삭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로 인하여 약 35년에서 38년간 각종 문헌상 기록에 원상 선조님이 통천김씨로 여러 사이트에 퍼져 있는 오류기록의 정정은 짧게 보아도 수십년이상 오류기록이 남게 될 것이 자명하고 일부는 정정되지 않고 계속 그 기록이 남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渭)자 휘를 쓰시는 분이 서로 다른 분이시라면 왜 원상이란 분을 계대 편성하셨는지 그 내용으로 오류 기록이 상당기간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우리 안김 문중 후손 개개인의 명예와 정체성에 문제가 발생된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위(渭)자 휘를 쓰시는 분이 안김의 휘 위(渭)자 선조님과 다른 분이라면 뿌리공원의 기념비 문장 내용의 위는 정승에 올랐다는 기록은 수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2005년도 통천김씨 대종회 정기총회에서 중시조 이전의 계대를 초간본(1701년)대로 환원하고 경술보(1970년)에 보충한 계대는 인정하지 않음을 결의하여 종회보에 실어 각 종원과 관련 기관에 통보한 바 있다는 내용을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yescheers@yahoo.co.kr (종이문서는 디카로 관련내용을 찍어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통천김씨 문중에 대하여 어떤 사적인 감정을 갖고 글을 올리지는 않았음을 말씀드리며   2009년 3월초에 관련 블로그 내용은 삭제하겠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문제는 있지요. 다른 블로그 및 홈페이지에 이런 내용들이 이미 제기되어 있어 부득이 제가 안김문중 입장을 대변하여 제 블로그에 오류 수정 글을 올린 것이니까요

* 관련 내용

뿌리를 찾아서 블로그 통천김씨 족보의 오류 2009.1.30

http://blog.paran.com/rootsfind/29800581

광산김씨 시중공파 홈페이지 게시판 12번

작성일 2006-12-17 (일) 10:51

http://www.kwangsankim.org/tech/board.php?board=pds&page=14&command=body&no=23

 

삭제이유는 같은 신라김씨 후손으로 화합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산김씨는 통천김씨 문중과는 같은 신라김씨 후손으로 가승 계보상으로는 같은 경순왕 후손이며, 현재 나타나는 문헌상의 기록으로 태종무열왕에 그 뿌리를 둔다고 하여도 지증왕의 직계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통천김씨 다음 블로그를 보세요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2003년에 올린 자료가 그대로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http://cafe.daum.net/tckim

 

인물란에 시조 김교에 대한 내용중 본관연혁을 발췌하였습니다.

김교 이후에 김이청. 김주 부자 말고는 여러 대의 세계를 유실했다. 그러다 중조까지의 계대를 찾아 고려 말에 판도판서에 오른 김원등을 중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

 

시조의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냈으며, 증손 위(渭)는 정난공신으로 태사시중에 올랐다.

위(渭)의 아들 원상(元祥)은 대제학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수자(守雌)는 한림학사와 이부시랑을 거쳐 예주방어사를 역임했다.

 

**안산김씨 김위 벼슬기록**

려조 벽상삼한삼중대광 금자광녹대부 (정1품 문산계)

추충수의분용망구 정난공신 상주국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중

상장군 판리부사 락랑군 개국백 증시 충익공 부인 충원군부인 안씨

 

**안산김씨 김원상 벼슬기록**

대제학, 정당문학, 상호군, 판삼사사

 

=== 내용상 동일인을 언급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

 

 

김규남김규남Y

2009.02.28 09:32

우선 귀하께서 신라 김 씨의 후손으로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 이상 이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블로그의 글을 지우시겠다는 결정을 내려주신 데 감사를 드립니다.

 

몇번 반복해서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경술보(1970년) 기록에 대해서는 가슴에 피멍이 든 채로 잘못된 것들을 고쳐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귀하께서 우려하고 계신 것처럼 잘못된 정보들이 일정 기간 동안 혹은 수정되지 않은 채로 유포될 위험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통천김씨 대종회에 홈페이지 제작을 건의하고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는 잘못된 정보들을 통천김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통천 김 씨 초간본에 기록된 위와 귀문의 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좀더 시간을 두고 고증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저희로서도 실전된 계대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 또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든 지금으로서는 귀문의 '위'는 고려 말((김정경(1345-1419)의 조부))의 인물인 바, 통천 김 씨의 '위'는 적어도 고려 중기나 그 이전에 해당하는 분으로 추정되어 전혀 다른 분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초간본의 기록에 따르면 통김의 위는 '첨의정승'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 역시 이런 문제가 있어서 살펴 보니, '위' 이외에도 '권(조선 초기에 대구판관을 지낸 분)'의 이름이 청풍 김씨 족보에도 올라있고(동명이인인 것이 밝혀졌음), '호(고려말에 중랑장을 지낸 분) 역시 금산 김씨 족보에도 올라있기도 하더군요.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보통 1700년대 이후의 일이며 그 전에는 가승 정도로 기록해 두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따라서 몇 백년 혹은 심지어 천 년 전의 기록을 찾아 정확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벼슬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들은 학자의 몫이거나 혹은 거대한 한국사의 일부로 남겨두는 것도 미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안산김씨 대종회에도 저희 종회보 등 한국의 성씨 연구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들을 송부하도록 건의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귀 문중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통천 김씨 중시조 이전 계대보 관련

 

다음은 2006년 6월에 발간된 종회보에 위와 관련하여 실렸던 기사의 내용입니다.

 

 

그림 1)) 2006년 6월 통천김씨 종회보 기사 1

 

 

 

그림 2)) 2006년 6월 9일 통천김씨 종회보 기사 2

 

 

 

 

 

 

그림 3)) 통천김씨 초간본 사진과 위(渭)에 관한 기록

 

 

 

네이버에 개설하신 통천김씨 대종회 카페는 잘보았습니다. 개설을 축하드립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1701년 간행된 족보 초간본, 1861년에 간행된 중간본     1701년 간행된 족보 초간본이나, 1861년에 간행된 중간본을 보면 "마의태자의 장자 교(較)공이 통천군으로 사성을 받은것이 분명히 기록되나 그 후손들 기록이 확실치 않아 간격을 두어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대수를 정확히 기록할 수 없어 아들자 대신 휘(諱)자를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알 수가 있다. 마의태자가 고려에 항전하기 위하여 개골산으로 입산하여 후손들이 은거하는 상황에서 계대를 분명히 이을 수 없는 처지라 몇 대가 지난 뒤 후손들이 관직에 오르게 되자 휘 이청(以淸)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아들 위(渭)가 첨의정승에 오른 이후에 마의태자의 아들 교(較)가 통천군으로 사성을 받았을 것이다. 어느 문중의 족보든지 중시조 이전의 상대 기록이 실전된 예는 흔한 일이며 외줄로 계속 내려온 계대는 오히려 최근에 첨가된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 휘(諱) 이청(以淸)의 기록을 보면 구보에 "통천군으로부터 이분까지 대 수를 연결하여 써놓은 곳도 있고, 대 수의 간격을 두어 써 놓은 곳이 있어 확실치 않아 간격을 두어 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 위(渭)의 기록에는 족보를 난리로 인하여 실전하여 중시조에 이르기까지 대수를 상세히 기록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라고 기록된다.
  1701년에 간행된 초간본 제(際, 발문)의 기록에 의하면 각 집에 유전되어 내려온 가승과 위 문건등 토대로 족보를 간행하고 위 문건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원석의 집에 풀로 잘 배접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족보 초간본 발간 이전에 이미 가승이 있었고 각 집에 유전되는 문건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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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안김집안 어르신께서 인김 중시조 역사에 대하여

구전 되어오는 족사를 편지로 남기셨는데 통천김씨 관련 내용이

있어 참고가 될까 하여 올려 드립니다.

 

조심스럽지만 이후에 고증될 만한 자료가 나온다면 연구해 보아야 할 과제인듯 합니다. 

 

 

 

 

 

위 붉은선 안의 내용을 원문에 충실하게 읽어 보면

 

 

참고

신라김씨 대종보에 보여 고려사에 보면 원자 상자 조는 만능박사라 하여 명국에서 특혜를 네려(내려) 함경도로 귀향 하였다.

통천에(통천에서) 도라가시였음(돌아가셨음) 족보에 명시되어 있음

통천김씨 시조가 원자 상자로 되어 있어 의문이 많이 감

통천김씨를 보면 디에에이(DNA) 검사를 권장하고 십품(싶음)

 

 

1701년 통천김씨 족보에는 渭(위)자 분이 첨의정승으로 족보에 등재되어 있는데 1970년 통천김씨 경술보 족보간행시에 원자 상자 조(祖)를 통천김씨 족보에 계대편성하였다가 이후 계대에서 제외하였음.

 

우리 안산김씨 원(元)자 상(祥)자의 부(父) 되시는 渭(위)자 할아버지는 문하시중이고 통천김씨 족보에 渭(위)자 분은 첨의정승으로 족보 등재시 가승기록 등을 토대로 벼슬명칭을 정확하게 올렸다면 동명이인이 맞다고 보아야 한다. 

 

동일한 벼슬(관직)이지만 문하시중과 첨의정승 관직은 사용 시기가

서로 다르다.  

 

982년(성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 설치

1308년(충렬왕 34)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1356년(공민왕 5) 문하시중

1362년(공민왕 11) 첨의정승

1363년(공민왕 12) 첨의시중

1369년(공민왕 18) 문하시중

 

안산김씨 문하시중 渭(위)자 할아버지의 그 아드님 되시는 원상 조(祖)는 1308년 이전에 문과급제 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1309년에 검교평리 벼슬을 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渭(위)자 할아버지는 982년-1307년 사이에 문하시중을 역임하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김원상 (金元祥) ? ~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말의 문신. 충렬왕(재위1274~1308년)때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비서윤(祕書尹)·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좌승지가 되었고 지신사·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1309년(충선왕 1) 검교평리(檢校評理)가 되었다가 회주목사(懷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320년(충숙왕 7) 삼사사(三司使)·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1322년 심왕 고(瀋王暠)의 왕위 찬탈 음모를 도운 죄로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으나 원제(元帝)의 명으로 곧 풀려난 뒤 판삼사사에 이르러 돌아가시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시대의 최고 관직.

고려시대의 중앙관제는 2성 6부 제도로, 초기에는 당나라의 삼성을 모방하여 문하성(門下省:왕의 명령하달과 신하의 건의 수용), 중서성(中書省:조칙에 관한 사무 수행), 상서성(尙書省:6부를 두고 국무 집행)을 설치하였으나 이후 문하성과 중서성의 업무가 서로 밀접하자,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고 ‘중서문하성’으로 불렀다.

 

문하성의 장관은 ‘시중(侍中)'이었으며, 중서성의 장관은 ‘중서령(中書令)',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尙書令)'이었다. 이 셋을 보통 재신(宰臣)이라 하고 관리중 최고의 관직에 해당하였다. 그 가운데, 문하성의 장관인 시중을 보통 ‘문하시중’이라고도 칭하였는데, 이가 수상직을 수행하였다.

 

태조 때 ‘시중’이란 관직을 최고 관직으로 사용하다가, 982년(성종 1)에 이전의 내사성(內史省)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개편하면서 처음으로 ‘문하시중’을 설치하였다. 문하시중의 품질은 종1품이며, 정원은 1인이다. 같은 종1품직인 상서령과 중서령이 종친이나 원로 재상에게 주어지는 영예직 또는 증직이 보통이었으므로, 문하시중은 명실상부한 고려 최고 관직이었다.

 

1061년(문종 15)에 관제개혁으로 ‘문하시랑(門下侍郞)'이라고 불렸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정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낮추어 부르게 되었고, 장관직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어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좌첨의중찬과 우첨의중찬을 두어 권력이 약화되었다. 충렬왕 기간인 1298년(충렬왕 24)에 세자가 충선왕으로 즉위하였다 같은 해 말에 다시 상왕이 왕좌를 회복한 정치적 혼란기가 있었다. 이 동안에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쳐 부르다가, 상왕의 복귀와 함께 관직도 다시 복귀되었다.(충렬왕은 왕 34년까지 즉위했음)

 

1308년(충렬왕 34)에는 충선왕이 복위하여 첨의부가 ‘도첨의부’로 바뀜에 따라 수상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바꾸어 불렀다. 정원도 1인으로 줄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반원운동의 일환으로 전면적으로 관제가 복구되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고 다시 수상도 ‘문하시중’이라 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도첨의부(都僉議府)'로 바뀌면서 ‘첨의정승’으로 되었다가 다음해에 ‘첨의시중’으로 고쳤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도첨의부가 ‘문하부’(門下府)로 개편되면서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고,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 둘을 두었다. 창왕 때 상좌(尙左)의 원칙에 따라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으로 각각 바뀌었다. 초기의 문하시중이 변화를 수없이 하였으나 결국 본래의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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