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판 ‘현대사 버리기’와 옛 지배층의 마지막 저항이 묻어버린 ‘시대의 모순’을 파헤친다
971년까지 고려군과 대립했던 신라 부흥군
고려 건국사는 김부식 공(公)에게는 ‘현대사’다.
왕건의 후손(:고려 인종)이 주는 녹봉(:봉급)을 받던 고려 문관(文官)은 그가 모시는 고려의 황실을 추켜세우는 글을 써야 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우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멸망이 ‘반쪽짜리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으며, 이는 조선의 역사 기록과 강원도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이야기 덕분에 보다 설득력 있는 가설이 되어 ‘신라는 - 후백제와는 달리 - 고려에 얌전히 항복했다.’는 통념을 뒤흔드는 것이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같은 사실(史實)을 다룬 세 책의 기사(記事)를 견주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윤동주의 시「참회록」의 싯구)”이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왕은 …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의논했는데 … 왕자가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은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충신과 의사(義士)들과 함께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천년 사직을 어찌 하루아침에 남한테 넘겨주신단 말입니까?’라고 말하자, 왕이 ‘나라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약해질 수도 없게 되었으니, 나는 죄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이는 짓을 할 수가 없구나.’ 라고 대답했다. …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걸친 뒤 풀뿌리를 캐 먹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삼국사기』「신라본기」경순왕 조
“태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먹다가 일생을 마쳤다. <또 그(:경순왕 김부 - 옮긴이)의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출가해 ‘범공(梵空)’이란 법명(法名)을 얻었는데, 이후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 한다>.”
―『삼국유사』「기이」김부대왕 조 (『삼국유사』는 서기 1281년 -충렬왕 7년- 에 나옴)
“(경순왕이 - 옮긴이) 고려에 귀순할 때 <석(昔)씨의 막내아들 분(奮)과 박(朴)씨의 맏아들 일(鎰) 두 분이 간곡히 아뢰다가, 왕이 들어주지 않자 어전에서 목놓아 크게 운 다음 영원히 이별하고 함께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를 집으로 삼고 삼베옷을 걸치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
―『신라삼성연원보』(서기 1642년 - 조선 인조 20년 - 에 나온 족보)
가장 오래 전에 나온 기록인『삼국사기』에는 왕자 한 사람만이 항복에 반대했다고 나오는데, 그보다 온 서른일곱해(137년) 뒤에 나온『삼국유사』에는 ‘태자’와 ‘막내 왕자’가 항복에 반대했다고 전하고『삼국유사』가 나온지 362년이 흐른 다음 인쇄된『신라삼성연원보』(이하 『삼성연원보』)에는 개골산으로 간 왕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며 그들의 이름이 ‘김분’과 ‘김일’이었다고 적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 흐를 수록 신라 왕자를 다룬 기사(記事)가 점점 자세해지는 것이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삼국사기』에 나오는 기사만이 진짜고 다른 책의 기사는 모두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고려 중기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김부식 공이『삼국사기』를 엮기 시작한 서기 1140년 ― 에는 적을 수 없었던 진실이 시대가 바뀌면서 바깥세상으로 튀어나왔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고려의 황실은 무인(武人)들이 정권을 손에 넣은 뒤부터 형편없이 약해져서, 문인(文人)들이 건국자를 깎아내리는 말을 해도 제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최씨 무인정권 때의 집권자인 최우(崔瑀)의 명령을 받들어 당시의 문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당대의 군주 가운데 글씨를 잘 쓴 인물로 태조(:왕건을 가리킴 - 옮긴이)와 함께 인종/명종을 꼽는데, 그중에서 지존의 작품은 품평(品評. 사물의 좋고 나쁨을 논하여 정함 - 옮긴이)할 수 없다고 하여 왕건의 글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평을 꺼렸다.
그러나 이규보에 이어 최자(崔滋)가 쓴『보한집(補閑集)』에는 훨씬 더 자유로운 견해에서 평가하려는 적극적 자세가 나타난다. 최자는 ‘태조의 문장과 필법은 천연적으로 타고나서 능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은 제왕가(家)가 여가삼아 한 일이니 족히 칭찬할 것은 못 된다.’고 하여, 태조 왕건의 글씨를 한 뼘 깎아내리는 듯한, 왕조 체제 아래에서 쉽사리 찾아보기 어려운 과감한 견해를 내비쳤다.
(중략) … 이처럼 태조의 글씨를 과감하게 평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최자가 이 글을 쓸 당시가 왕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무인집권자의 권세가 왕위를 갈아치울 만큼 드높았던 시대였기 때문은 아닐까.“
(참고로 최자는 서기 1188년에 태어나 서기 1260년에 세상을 떠난 고려의 문신文臣이다. 그는 이규보보다 스물 한 해 뒤에 활약했기 때문에, 선배인 이규보와는 달리 자신의 견해를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옮긴이)
― ‘부경역사연구소’의 책인 『10세기 인물열전 - 쇠유리부터 능창까지 22인의 삶』에서
김부식 공은 서기 1145년에『삼국사기』를 다 엮었고, 무신정권은 그가 죽은지 스무 해가 지난 서기 1170년에 나타나지 않았던가?
또한 일연 선사는 (고려 황실의 실권을 빼앗았을지언정 고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은) 무신정권이 사라지고 고려가 원의 속국이 된 때에『삼국유사』를 엮었고,『삼성연원보』를 정리한 선비는 고려가 무너진 지 251년이 흐른 해에 살았으므로 이 두 사람이 김부식 공과는 달리 왕건을 반대한 신라 왕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적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삼국유사』는『삼국사기』와는 달리 정부 관리들이 정리한 책이 아니라 개인이 엮은 책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책이 아니므로 붓을 보다 자유롭게 놀릴 수 있었다.
다만 일연 선사가 불교 승려였기 때문에 출가出家한 왕자를 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고, “신라의 왕손인 박(朴)/석(昔)/김(金) 세 성씨의 족보로 가장 오래 된[:박성수 교수의 글인「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삼성연원보』에 실린 “그 자리에서 자결한 왕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이기는 하다 - 그는 불교 교리가 금하는 ‘자살’을 한 사람을 다루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
반대로『삼성연원보』는 ‘마의태자’가 된 두 왕자와 자결한 왕자는 자세히 다뤄도, 출가한 왕자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으니, 두 기록이 서로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고려 승려도, 조선 선비도 아닌 우리는 두 기록을 모두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록에 나오는 사실을 모두 모아 ‘삭제되지 않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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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1 :
독자 여러분은『삼국유사』와『삼성연원보』의 내용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어볼 텐데, 기록에 나오는 왕자들의 수를 세어보면 그 의문이 괜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승려가 된 왕자 : 1명 (『삼국유사』)
- 스스로 목숨을 끊은 왕자 : 1명 (『삼성연원보』)
- 마의태자 : 1명 또는 2명 (전자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이고 후자는『삼성연원보』. 그러나 마의태자를 다룬 이야기가 금강산과 설악산 두 곳에 남아있어 후자의 기록이 더 정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보시다시피 행적이 남아있는 왕자는 모두 네 명인데,『삼성연원보』는 경순왕이 모두 ‘여덟 왕자’를 두었다고 설명하므로 이들은 여덟 명 가운데 네 명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나머지 네 명은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투항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뤄지진 않았을 것이다). 도라산 이야기도 경순왕의 왕자 열한 명이 나라가 망한 다음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고 전하느니만큼, 그가 많은 아들을 둔 것은 사실이리라.
따라서 나는 - 김부식 공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고 다른 관리들과 함께 엮은 ‘국정 교과서’인 -『삼국사기』가 마의태자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신라 조정의 우울한 분위기를 감추었다고 판단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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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지에 남아있는 이야기를 읽어보아도 -『삼성연원보』의 기사가 말해주듯이 - 고려왕조가 신라의 멸망을 ‘선양(禪讓 : 왕위를 다른 집안에게 양보하는 일)’으로 꾸미려고 진실을 감추었다는 의심이 드는데,
우선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도라산(都羅山)리(:개성 남쪽 20리에 있음)에는
“신라가 경순왕 10년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 경주를 (그의) 식읍으로 삼아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 경기도 파주시의 누리집(http://www.pjt.hs.kr/cult/paju_old/main06_4_5.html)에 실린 글 <도라산(都羅山)에 얽힌 전설>에서
는 이야기가 내려와 경순왕이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려태조의 인질(이는 서기 2000년 4월 15일 한국방송[KBS]의 <역사스페셜>에 나온 홍승기교수가 주장한 견해이기도 하다)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만약 김부가 ‘고려의 귀빈’이었다면 경주를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갈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도라산리에서 눈물만 흘린 까닭은, 왕건이 경순왕 김부를 송악[:개경]에 붙잡아 둚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반발을 억누르려 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충청북도 월악산에는 “마의태자와 동행하던 덕주공주(德周公主)가 자신의 모습을 새겨 놓은(<문화유산탐방기/월악산과 마의태자[http://travel.waw.co.kr/yusan.wolak1.htm]>에서)” 덕주사 마애불이 남아있는데 마의태자는 마애불이 완성된 뒤
“미륵입상 옆으로 난 하늘재를 넘어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다. 동생과 헤어진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머물며 나라 잃은 회한을 달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고 한다.”
- 대한불교 천태종 구인사의 누리집[http://www.chentae.org/kumkang/2002/02/06.htm]에 실린 글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가는 ‘마의태자’ 전설>에서
는 이야기가 남아있어 마의태자가 혼자 떠나지 않고 다른 왕족들과 함께 떠났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려의 ‘국정 교과서’인『삼국사기』에도 경순왕이 항복하려고 할 때 “어떤 신하는 왕의 의견이 옳다고 말했고 다른 신하는 옳지 않다고 했다.”고 전해 신라 귀족들 가운데서도 마의태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이 마의태자와 함께 달아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용문산에도 마의태자가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강원도 강릉시 명주군 삼산리의 소금강(小金剛)에 자리잡은 아미산성에는 “마의태자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30여 리 길이의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온다(월간『산』2001년 1월호에 실린「소금강 ~ 노인봉르포」에서).”니, 전설에 나오는 마의태자는 기록과는 달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고려에 맞서 싸울 사람들을 모으고, 그 다음 강원도에 들어가 군사를 키웠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경주에서 출발해 “하늘재(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 - 옮긴이), 월악산(덕주골), 용문사, 명성산(철원의 명성산鳴聲山.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목놓아 우니 산천도 함께 따라 울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음 - 옮긴이), 단발령을 연계시켜보면 금강산까지의 태자가 밟은 길을 그려볼 수 있(<문화유산탐방기/월악산과 마의태자>에서)”으니, “지리적으로도 이 노정이 무리가 아니고, 금강산까지 가장 쉽게 이어지는 길(<월악산과 마의태자>에서)”이라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김부리와 갑둔리에는 김부대왕, 아니 마의태자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적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김부리의 가마산아래 하단지골 북쪽골짜기에 있는 바위를 옥쇄바위라고 하는데 … 마의태자가 신라의 옥쇄를 가져와 두 개로 포개어진 바위에 숨겼는데 바로 옥쇄를 숨겼던 바위라 하여 옥새바위라 부르는 것(산림관리청 인제 국유림관리소가 만든 누리집[:홈페이지]의 글 <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과
“김부대왕이 전쟁때 사용할 소금을 많이 구해다가 묻었다고 하는 전설(<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 ‘김부대왕’이 “칡넝쿨 때문에 다니기가 불편하다고 하여 부하들에게 칡넝쿨을 모두 캐어 없애라고 명령(<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했는데 실제로 “김부리 일대는 오늘날에도 칡넝쿨이 드물게 있으며 무성하지 못하다(<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는 사실,
“김부대왕이 김부리에 머무를 때 맹장군(孟將軍)이 의병을 모아 왕건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자 김부대왕이 찬성하여 여러 신하를 통해 의병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양구 군량리 넓은 벌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한편으로는 그곳에다 군량고를 쌓고 군량미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이 거사를 하기 전에 맹장군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모였던 수백의 의병들이 산지사방으로 흘어지게 되었다(<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는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신라 유민들은 한강 물줄기를 따라, 혹은 백두대간 능선을 밟아 마의태자가 있는 귀둔리(: 이곳은 - 전설에 따르면 - “왕승골에서 고려군에 밀려난 마의태자가 재기의 기회를 엿보던 곳이다[:http://members.tripod.lycos.co.kr/galgae/2501.htm에서]”)로 모여들었고 더 깊은 산 속 필례 원진개(遠鎭介 : 군대가 진을 쳤다는 뜻 - 옮긴이)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의 일전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마의태자의 전설이 슬픈 영원한 피난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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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2 :
강원도 인제군 남면 김부리(金富里)에는 ‘김부대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대왕각이 남아있고 “매년 단오와 중량절에 대동제를 지내는 등 신격화(<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하는 풍습이 최근까지 이어져 왔는데(박성수 교수가 서기 2000년에 증언한 바를 따르면, 김부리와 갑둔리는 “육군에서 이 일대를 재빨리 사격연습장으로 수용”하는 바람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산골”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실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이 서기 1839년에 쓴 책『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하『장전산고』)에도 나와있어 김부리 사람들이『삼국사기』와『삼국유사』가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규경은『장전산고』에 자세한 것은 “인제[강원도 인제군 - 옮긴이] 읍지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 : 항복한 임금 - 옮긴이]인 김부”라고 적었고, ‘김부대왕’은 “제천, 강원도 원주 등에서 지방민이 신봉하고 있다[<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는 말을 덧붙였다)
독자 여러분은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이니 인제군의 대왕각은 마의태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적이지 않느냐고 되물으시겠지만, 경순왕은 - 도라산 이야기가 말해주듯이 - 죽을 때까지 개성 근처를 벗어나지 못했고 만약 그가 강원도로 달아나서 왕건과 싸웠다면 죽고나서 ‘(고려를) 순하게 받들었다’는 뜻인 ‘경순(敬順)’이라는 시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김부대왕’을 신라 경순왕으로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게다가 서기 1984년 부령 김씨와 통천 김씨들이 대왕각에서 “경순왕제1자김부지신위(敬順王第一子金富之神位. ‘경순왕의 맏아들[:제1자]인 김부金富의 위패’라는 뜻이다 - 옮긴이)”라고 새겨진 신위(:위패)가 나왔기 때문에 ‘김부대왕’으로 알려진 사람이 실제로는 마의태자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양구의 군량리나 한계산성과 관련된 전설을 보면 설득력을 더 가진(<김부대왕 관련 전설을 찾아>에서)” 가설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김부리의 김부대왕을 ‘마의태자’로 보고 논지(論之 :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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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유물도 마의태자의 항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바, 김부리에는 “마의태자를 따라온 충신 맹장군 일가의 고분군(박성수 교수의 글인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http://www.horn.co.kr/history/1.html]>에서)"과 ”대장간(:당시 대장간은 무기도 만드는 곳이었다 - 옮긴이)에서 무사하기를 비는 부적(<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이었던 철마상(鐵馬像), 인제군 북면 한계 3리 1번지에 자리잡은 한계산성(寒溪山城), 한계산성의 천제단(天祭壇)에 새겨진 ‘의선운장(義仙雲將 : 의병장)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김세진(金世震)’이라는 비명(碑銘 : 비석에 새겨진 글씨)가 남아있어 ‘어떤 무장 세력’이 한 인물의 지휘 아래 모여 고려왕조와 맞서 싸웠을 가능성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이는 최복규 교수가 한계산성이 “삼국 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도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스페셜 - 신라최후의 미스테리, 마의태자>에서)"고 증언한 사실과도 일치하며(이 말이 옳다면, 마의태자는 이미 있던 산성을 요새로 사용했기 때문에 시간과 힘을 덜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계산성 천제단에 새겨진 간지干支는 경오[庚午]와 신미[辛未]인데, 박성수 교수의 풀이에 따르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일 가능성이 크니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 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
(지금의 강릉인 명주의 호족이었던 김순식도 궁예가 망한 뒤 열한 해 동안 왕건에게 복종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신라 유민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강원도의 깊숙한 곳에 숨어서 고려에 항복하지 않고 버텼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한계산성에는 “한계산성 아래 동네 총각에게는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왜 그런 말이 돌았을까. 마의태자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까(<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
앞서 살펴본 김부리의 맹장군 이야기에 따르면, 신라 저항군은 맹장군이 죽은 뒤 뿔뿔이 흩어져 그 세력이 약해졌고, 한계산성의 천제단에 새겨진 간지의 연대로 볼 때 흩어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서기 971년까지는 그곳을 지켰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고려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한계산성 위쪽과 아래쪽을 ‘전혀 다른 세상’ - 그러니까 신라와 고려 - 으로 여겨 경계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측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마의태자가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은 어떻게 되는가. (중략) … 사람들은 태자릉(太子陵. 금강산 비로봉 밑에 있음 - 옮긴이)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여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 (중략) … 지금 남아 있는『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 : 이미 펴낸 책을 거듭 박아 냄 - 옮긴이)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 『삼국사기』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고려사』부터다.
…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 그러니까 삼국시대에는 상악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불렀지만 일반인은 풍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골산도 풍악이란 이름과 함께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금강산과 설악산이 연접돼 서로 암수 하는 사이이고 보니 혼동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국시대의 상악(금강산)과 설악(설악)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 (중략) … 본시 금강산은 예국의 영산(靈山 : 신령스러운 뫼 - 옮긴이)이었다. 신라가 이를 계승하여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골짜기마다 불사가 들어서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불단으로 변하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불교 이름이 지어지고 말았다.
태자 유적지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태자성(城)은 둘이나 있고 망군대와 장군봉이 모두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으로 이름지어졌다. 심지어 단발령까지도 고려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멀리 금강산 절경을 보고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금강산의 전설은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
따라서 마의태자는 금강산이 아닌 설악산 인제군에 자리잡고 고려군과 싸웠을 가능성이 높으며, 설령 금강산 비로봉에 전해지는 마의태자릉이 진짜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제군이 고려군의 손에 넘어가고 난 뒤,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금강산 장안사 계곡으로 달아난 마의태자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 머무르다가 죽은 사실을 증언할 뿐 그 이상의 다른 의미는 지닐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금강산 비로봉에 전해지는 마의태자릉 전설에 따르면, 금강산에 온 태자는 “고려의 군사와 싸울만한 인원이 없는” 상태였고, 그 때문에 황천강 물줄기에 횟가루를 풀어 고려군이 “횟가루를 쌀 씻는 뜨물로 생각하여, 산 골짜기에 신라의 대군이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퇴각”하게 하는 방법을 써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고 하니, 인제군의 ‘김부대왕(마의태자)’과는 달리 금강산의 ‘마의태자’는 궁지에 몰린 망한 나라의 지배층이 어떤 처지가 되는지를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현재 마의태자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金幸)이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고 하지만, 마의태자가 죽은 뒤 신라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고 여진 땅으로 달아난 김행의 후손은 여진족에게 완전히 동화되면서 ‘후(後) 신라’가 아닌 ‘금(金)’을 세워 우리 역사와는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으니(여진족의 시조는 나중에 다른 원고에서 따로 다루겠다),
이로써 마지막 “누런 잎(최치원은 "송악[:개성]은 푸른 솔이요 … 계림[:신라]은 누런 잎이다.”라고 말해 신라가 쇠락하고 고려가 융성할 것임을 내다보았다)”이 지고 옛 시대는 막을 내리며 992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대 서사시가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쯤에서 조금(?) ‘삐딱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과연 마의태자 김일의 마지막 저항은 ‘올바른 일’인가? 그의 싸움은 박성수 교수가 주장한 대로 “장한 일이며 진실한 역사”인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의 저항이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 : 힘을 다해 싸우고 죽음으로써 지켜냄 - 옮긴이)했던 것(<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의 비밀>에서)”일지라도 그가 지키려고 했던 신라라는 나라는 “불어닥치는 변화의 바람”을 가로막는 ‘낡은 담장’이었기 때문이다.
서기 900년, 진훤(:견훤)이 백제를 다시 세우면서 “내가 완산(完山. 오늘날의 전주 - 옮긴이)에 도읍을 정하여 의자왕의 옛 원한을 씼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주장하여 지지를 받았고 서기 901년, 궁예가 나라를 세울 때 “예전에 신라는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쳐부수었기 때문에, 평양의 옛 도성은 황폐해져 풀이 무성하게 자랐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다(『삼국사기』/『삼국유사』).”라고 선언했으며 서기 898년 궁예에게 귀순한 평산 박씨의 우두머리인 박직윤(朴直胤)이 ”고구려의 장군직명인 대모달(大模達)을 자청[:『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2』에서]”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신라는 마의태자가 마지막 항전에 나서기 전부터 민심을 잃었음이 분명한 것이다.
고려(태봉/마진)와 후백제의 건국은 어디까지나 경상도 바깥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지 않느냐고 물으시겠지만, 이미 “9세기 초 헌덕왕 때 녹진(祿眞)이란 사람은 신라의 관리 인선이 ‘사(私)를 쫓아 공(公)을 버리며, 사람을 위해 관직을 택하며, 좋아하면 비록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높은 지위로 올리고, 미워하면 비록 유능한 사람이라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불공정한 체제라며 비판했다. 이러한 인식은 신라 하대로 내려 갈수록 6두품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고 공감대를 얻어갔다(『10세기 인물 열전, 쇠유리로부터 능창까지 후삼국 22인의 삶』에서).”
게다가 신라 귀족이 관직을 독차지한 채 백성에게 고리대를 물리며 사치스런 삶을 즐기고 자기네끼리 권력싸움이나 일삼는 상황은 경상도에도 다른 곳과 똑같은 괴로움을 안겨주어 왕건은 진훤(:견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기 889년(신라 진성왕대)의 상황을
“삼한(三韓)이 지난번에 액운을 당하고 모든 땅이 흉년이 들어 메마르니, 많은 백성들이 황건적(黃巾賊 : 여기서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성주[城主]들과 도적떼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 옮긴이)에 속하게 되었고 논밭과 들 가운데 적지(赤地 : 흉년이 들어 거둘 것이 아주 없어진 땅 - 옮긴이)가 안 된 곳이 없었노라(『삼국사기』「열전」진훤(견훤)조).”
고 말할 정도였으니, 민심이반은 경상도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순 없었다고 봐야 한다.
만약 경상도 사람들이 경주의 신라 왕실을 지지했다면 지금의 상주에서 진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스스로 장군(將軍)을 칭하고 독립했다가(신라의 법률에 따르면 장군은 진골 귀족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으므로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위법행위’이자 독립선언이었다. 신라 말기에 - 흔히 ‘호족’이라고 불리는 - 지방 성주[城主]들이 ‘장군’을 칭하고 독립해 군벌이 되는데, 이 가운데 궁예나 진훤이 들어가 있다) 나중에 고려로 투항하는 일이나 김인광(金仁匡)이라는 왕족이 서기 890년대부터 서기 900년대까지 김해의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스스로 ‘장군(將軍)’이라고 칭하는 일이 벌어진 사실, 서기 925년 “고울부(高鬱府 : 오늘날의 경상북도 영천 - 옮긴이)의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에게 항복하니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는데, 그 성(城)은 신라의 서울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의태자는 그런 사실을 무시한 채 오로지 ‘왕건은 나라를 훔친 놈’이라는 명제 하나만 붙들고 ‘신라를 되살리자’고 외쳤고(정사건 야사건 그가 ‘왜’ 신라를 배반하는 무리가 많고 고려의 힘이 세졌는지를 진지하게 따진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결과 그가 이끄는 저항군은 철저히 고립되어 서기 971년 이후 개성 왕씨와 성주(城主)들의 연합군(:쉽게 말해 ‘고려 군사’)에게 깨지고 만다.
이후 생존자들은 철저히 숨어 살아야 했으며 김부리와 갑둔리 사람들은 ‘대왕각’을 세워 마의태자를 모시되, 본명인 ‘김일’ 대신 그의 아버지인 ‘김부’의 이름을 써서 고려왕조의 검열을 피한다(이규경에 따르면, 백성들은 경순왕이 죽은 뒤 ‘나라와 백성을 전란에 빠뜨리지 않고 무사히 지킨 공로가 있다.’고 해서 곳곳에 사당을 세우고 신령으로 받들어 모셨다고 한다. 김부리와 갑둔리 주민들도 이 상황을 틈타 “경순왕의 넋을 모신다.”는 구실을 내걸고 실제로는 마의태자 김일을 모시는 아슬아슬한 반항을 시도했을 것이다).
비록 ‘신라의 후손’인 경주 김씨지만 고려에 충성하는 관리였던 김부식 공은 고려의 건국자에게 활을 겨눈 신라의 마지막 왕자를 다룰 용기가 없었고 고려 조정도 마의태자가 왕건과 싸운 사실이 - 김부식 공이 진압한 - 묘청 세력의 봉기와 비슷해 ‘국정 교과서’인『삼국사기』에 싣지 않기로 결정했으리라. 그래서 ‘반 고려 봉기’를 다룬 부분은 다 잘라내고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죽은 사실만 실어 신라계의 반발을 잠재우려 들었을 것이다(이는『삼국사기』가 고려군이 후백제를 - 진훤을 앞세우고 - ‘평화롭게’ 접수했다고 주장해 후백제가 망할 때 많은 난민이 중국 남부로 달아난 사실을 감춘 사실과 비슷하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개인이나 집안이 몰래 숨긴 기록까지 다 없애진 못했고, 이 기록들은 사회가 흔들리고 정권이 바뀌면서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국정교과서가 감춘 진실을 밝히게 된다.
지금까지 신라 왕족의 마지막 저항과 그 한계점을 간단히 살펴보았거니와, 독자 여러분은 이 검증과정을 보면서 일단 국정교과서가 사실을 왜곡하면 그걸 고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어느 시대나 ‘현대사’는 늘 권력의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왕조의 역사왜곡과 구시대 지배층의 우직함(내지는 멍청함)을 비웃을 만한 자격을 지녔을까? 우리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환경에서 살고 있을까? 최근에 일어난 일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두 해 전(서기 2002년), 교육부는 19~20세기사(사람들은 이 시기의 역사를 ‘근현대사’라고 부르나, 19세기는 앞으로 200년만 지나면 ‘근대’가 아닌 ‘근세’가 될 터이므로, 나는 후손들이 내 글을 읽을 때 이질감을 품지 않게 하기 위해 ‘19-20세기사’라는 이름을 쓴다)를 고 3의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이다(우리는 이 조치를 ‘제 7차 교육과정’의 일부분인 ‘선택과목제 도입’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모든 국민이 초/중/고 과정을 똑같은 과목만 배워 전(全)과목 총점을 기준으로 한 줄을 세워 대학에 가게 하는 교육체제의 경직성을 탈피(<연합뉴스> 서기 2003년 8월 21일자 기사)”하고 “고교 2,3학년 때는 진로에 맞춰 각자 다른 심화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연합뉴스>)”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새 교과서가 “교육부의
‘사회적 논란이 있는 부분의 서술은 자제해 달라.’는 검인정 교과서 가이드라인(: 지침 - 옮긴이)으로 인해 특히 언론계의 친일 행적 등은 구체적으로 기술되지 않았(『미디어 오늘』의 서기 2003년 7월 4일자 기사)”으므로,
이 조치가 실제로는 한국의 기득권자들이 저지른 죄악(여성 억압, 나라와 겨레를 팔아먹은 일, 노동자/농어민을 쥐어짠 일, 일제의 아시아 침략 지지, 양민학살, 독재, 군사반란, 정경유착, 언론탄압, 사상검열, 고문, 환경파괴, 언론재벌의 왜곡보도, 제 나라 시민에게 ‘강대국의 군대를 위해 꾹 참고 희생하라.’고 강요한 일)을 알리기 싫어서 내려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육부의 새 방침이 일으킨 파동은 서기 1994년 3월 문민정부(김영삼 전前 대통령이 이끈 정부)가 “친일파 문제를 초/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제대로 서술하겠다는 국사교과서 개편위원회의 시안(손석춘 기자의 책인『언론개혁의 무기』에서)”을 받아들이자,『조선일보』가 “운동권선 사실보다 미화(美化) [에] 치중(『조선일보』서기 1994년 3월 20일자)”하며 “주사파(主思派)등 [이] 80년대부터 <새 작업>(『조선일보』)”(이하 []는 옮긴이)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모함해 결국 정부가 개편위원회의 제안을 내버려야 했던 일과 비슷하며, 달라진 점은 정부가 ‘사실(史實)을 알리는 곳’에서 ‘사실을 감추는 곳’으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않은가?
교육부의 방침만 놓고 보면 우리는 ‘정권 안정’을 위해 마의태자의 항쟁을 잘라낸 고려왕조와 다를 바가 없는 정부를 두고 있으며, 대한제국이 망할 때 왕조에 반발한 사람들이 많았고 사회가 엉망진창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왕조를 멸망시키려는 세력과 맞서 싸웠으니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림들은 신라가 ‘왜’ 망했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막연히 ‘고려 반대’만 외치다가 망한 마의태자와 비슷하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 생각이 맞다면, 우리는 국정교과서가 강요(!)하는 역사관에 맞서 싸워야 하며 민주공화국은 왕조나 독재국가와는 달리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헌법』)”있기 때문에 진실을 덮어버리려는 모든 검열과 시도를 물리치고,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한테 ‘나라의 주인’다운 당당한 태도로 “진실을 담은 교과서를 쓰라.”고 요구해야 한다.
나아가 역사속의 인물이 자기 집안 출신이라고 해서, 고향이 같다고 해서, 같은 성(性)이라고 해서, 같은 이익집단에 속했다고 해서,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같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한 일을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게 꾸미거나 잘못을 말하지 않는 태도도 내버려야 할 것이며, 이것은 신라의 멸망사를 배운 우리가 멸망사뿐 아니라 신라의 모든 역사를 배우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깨우침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는 바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린내나는 역사에 향수(香水)를 뿌리는 일이 아니라,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는 것(신봉승 선생이 지은 책『신봉승의 조선사 나들이』에서)’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멸망한 나라의 지배층을 무조건 훌륭하게만 그리는 일은 그들을 마구 깎아내리는 일 못지않게 위험한 짓이다. 우리는 신라의 마지막 저항을 인정하되 그들의 싸움이 ‘시대착오적인 짓’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덧붙임 :「<백두대간마을> 인제군 한계리[http://www.angangi.com/jung6.htm]」라는 글에는 “전설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21세에 경주를 떠나 신라가 망한지 1백년이 되던 1036년, 1백 21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마의태자가 “21세”에 경주를 떠났다는 말은 믿을 수 있어도 “1백 21세”에 죽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마의태자는 36년 후인 서기 971년에 설악산에서 도망쳐 나와(추정 나이 56세) - 전설대로라면 - “몇 년 후”에 죽었으므로 아마 60대 초반에 죽었을 것이다. 서기 1036년에 마의태자가 죽었다는 말은 달아나지 않고 남아있던 그의 아들이나 손자가 죽었다는 뜻은 아닐까? 이 문제는 앞으로 자세히 연구할 과제로 남는다.
▶ 덧붙임 2 : 옛이야기에 나오는 ‘마의태자’는 경순왕 김부의 맏아들일 것이다. 맏아들은 흔히 남을 지휘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부안김씨의 족보에도 경순왕의 맏아들 이름은 김일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출처 : http://tong.nate.com/eissiang/15463272
< >경순왕 자녀 (안렴사공파 김주회 자료제공. 2001. 09. 02)
1. 자료1(문온공파 김윤만 자료 제공)
첫째 왕비는 죽방부인 죽주박씨로 슬하에 마의태자, 그리고 경주김씨 관조
영분공을 비롯한 3남1녀가 있었고
후비는 태조 왕건의 따님이시고 충주태사 유긍달 외손녀이신 낙랑공주 개성
왕씨로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그리고 또 한분 육비께서는 1남을 두었다.
2. 자료2 (<김씨의 뿌리>)
신라 경순왕 가계
昭元王后 박씨 소생 - 1남 김일, 2남 김굉(범공), 3남 김명종
왕씨(낙랑공주) 소생 - 4남 김은열, 5남 김석, 6남 김건, 7남 김선,
8남 김추 -(참고)낙랑공주는 왕건의 딸.
순흥안씨 소생 - 9남 김덕지 라고 정리되어 있고.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 이외에 세딸이 있었는데,
첫째딸은 제5대 경종의 왕비 獻肅夫人이 되었고,
둘째딸은 長水人 黃瓊(황경)의 부인이 되었으며,
셋째딸은 신라 시중 李今書의 부인이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경순왕의 딸
월악산 국립공원내 미륵사지와 덕주사, 덕주산성, 덕주골 등지에는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과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산재해 있고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에 있는 원주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련 기록에는 경순왕의 딸 중에 덕주공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덕주공주가 경순왕의 딸이 맞다면 윤만 종친의 의견대로
첫째부인 죽방부인의 3남 1녀중 1녀일 것이다. 덕주공주는 신라가 망하기 전의
신라공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순왕에게는 딸이 셋이 있었다고 하는데 덕주공주가 첫째부인 죽방
부인 소생이라면 딸 셋 (경종왕비, 황경, 이금서)중 낙랑공주는 2녀(경종왕비,
황경)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딸 하나 (이금서)는 어느 소생인지 불분명해
지게 되고,
전체적으로 경순왕의 딸은 넷(덕주공주, 경종왕비, 황경, 이금서)이 된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이 어떻게 퍼져 나갔는가를 [김씨의뿌리] 책자에 나와
있는 데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경순왕의 9아들
◈ 1남 김일
첫째아들 金鎰(김일)은 昭元王后 박씨 소생으로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이를 통분히 여겨 금강산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산 마의태자를
가리키는데, 기록에 보면 그에게는 입산 전에 낳은 金較(김교)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마의태자 김일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부령(부안)김씨, 부여김씨, 통천김씨
마의태자와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중 [2000.4.15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 마의태자]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고, 인제군청
홈페이지를 보면 김부대왕각 동제, 김부리와 군량리(軍糧里), 김부리의
옥새바위, 마의태자 유적지비, 김부 대왕각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2남 김굉
장남 김일과 함께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차남 金 (김굉)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가자 자기도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梵空(범공)이었으며 나중에 해인사에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이 범공이란 중이 마의태자의 막내아들이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己未譜 같은 족보에 보면 범공은 둘째아들 김굉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사가에 전하는 족보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
설을 택했다.
김굉은 중이 되기 전에 낳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의 이름은 金雲發
(김운발)이고, 차남의 이름은 金雨發(김우발)이었다.
김굉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교하김씨, 울산김씨, 나주김씨, 안로김씨, 해주김씨
*(2남 김굉의 후손에서 울산김씨가 분관되었다는 것은 2005. 1. 21. 울산김씨
김강씨의 주장과 요청에 의하여 일단 삽입하였으나 사실 여부는 계속하여
조사 연구 중에 있음)
◈ 3남 김명종
3남 金鳴鍾(김명종) 또한 소원왕후 박씨 소생이다. 각간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永芬公(영분공)인데 뒤에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3남 김명종과
4남 김은열 두 명인데, 이처럼 경주김씨의 시조를 두명으로 한 것은 김명종
이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데 반해, 김은열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소생
이었기 때문이다.
3남 김명종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강화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낙안김씨, ... <생략>
◈ 4남 김은열
4남 金殷說(김은열)은 왕씨 소생이다. 왕씨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를 가리
킨다.
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김명종과 함께 경주김씨의 시조로서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 사람이다.
김은열에게는 김태화, 김숙승, 김염(→김품언, 김심언)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나오는 손자들이 또 분파를 해나갔기 때문에 많은 성씨가 나오게
된다.
첫째아들 김태화는 김은열의 경주김씨를 이어받으나,
둘째아들 김숙승은 안동김씨(구안동)의 시조가 되며,
셋째아들 김염은 김해김씨(후김)의 시조가 되었다.
김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아들 김품언은 수원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김심언은 영광김씨의 시조가 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에서 대구김씨, 사천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되며, 수원김씨
에서는 용담김씨, 용성김씨, 인동김씨, 한남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된다.
김은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를 가나다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무 많아 생략>
◈ 5남 김석
5남 金錫(김석)은 왕씨 소생이다. 김석은 金重錫이라고도 불리며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의성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석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개성김씨, 고령김씨, 광주김씨, 설성김씨, 의성김씨, 적성김씨
◈ 6남 김건
6남 金鍵(김건) 역시 왕씨 소생이다.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강릉김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고,
다른 하나는 김건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다.
이 두파를 구분하기 위해 김건의 강릉김씨를 후강릉김씨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김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강릉(후)김씨, 강서김씨, 청주김씨, 홍주김씨
◈ 7남 김선
7남 金繕(김선) 역시 왕씨 소생이다.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담양김씨, 언양김씨, 예천김씨
◈ 8남 김추
8남 金錘(김추) 역시 왕씨 소생이다.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삼척김씨의 선조가 되었다.
김추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진주(晋州), 영월(寧越), 경산(慶山 ), 남원(南原), 길안(吉安), 옹진(甕津),
진위(振威), 춘양김씨(春陽金氏) 등 8개 분파(分派)가 있다.
◈ 9남 김덕지
9남 金德摯(김덕지)는 순흥안씨 소생이다. 학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뒤에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옛이름이다.
김덕지 계열은 울산김씨 하나밖에 없다. (이 내용은 사실 여부를 연구중에
있음)(*현재 상기 내용 중 2남인 김굉의 후손에서 울산김씨시조로 분관되었
다는 울산김씨 김강씨의 주장(2005. 1. 21)에 의해 사실 여부를 조사 연구
중에 있음)
3, 경순왕과 고려의 1대에서 5대까지와 8대왕의 재위기간과 자녀 비교
-신라56대 경순왕 김부 ?-978, 재위 927-935, 부인 3명, 자녀 9남 3녀
-고려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2대 혜종 왕무 912-945, 재위 943.5-945.9 (2년4월) 부인 4명, 자녀 2남3녀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5대 경종 왕주 975-981, 재위 975.5-981.7, (6년2월) 부인 5명, 자녀 1남
-(현종 아버지) 안종 왕욱 (? - 997)
-8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2-1031.2 (22년3월) 부인13명, 자녀5남 8녀
참고문헌
* 신라삼성연원보(계림김씨 연원보)
안동김씨의 계보 중 경순왕--방경까지의 계보를 밝힘(11세손)
1세 2세 3세 4세 5세 6세 7세 8세 9세 10세 - 11세
敬順王 - 殷說 - 叔(承) - 습돈
-元姜 -文雄 -日兢 -利請 -義和 -敏成 -효종
孝印 - 方慶
* 기존 안동김씨 족보에 없는 元姜, 文雄 두 분의 휘가 더 있음
* 서흥김씨(삼성연원보)
1세 → 2세 → 3세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부賦경순왕 - 대안군 - 深(강릉군) - 정구 - 계삼 - 환공 - 경보
순보 - 세익
세우(*書興)
* 문헌에 따라서는 6대손, 7대손, 8대손등 제 각각이다. 이것은 世와 代
구분을 잘못해서 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즉 5代孫=6世孫, 6代孫=7世孫이 올바른 표기이다.
* 신라의 멸망과 후삼국의 통일과정
1. 중대에서 하대로의 전환
신문왕(689) 녹읍폐지 → 경덕왕 16년(757) 녹읍부활
혜공왕대 : 진골내부의 상쟁
4년(768) 7월 대공의 난: 96각간의 난
6년(770) 8월 대아찬 金融의 난
11년(775) 6월 이찬 김은거의 난 8월 이찬 염상·시중 정문의 난
16년(780) 4월 이찬 지정의 난. 상대등 김양상과 이찬 김경신이
진압 김양상 즉위(선덕왕)→ 나물왕 10세손
785 상대등 경신 즉위(원성왕)→ 원성왕계 왕위계승 시작
왕위는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이나 무장력의 우열에
의해 결정됨으로써 연립적 정치체제로 전환되게 되어 정치와 사회의
혼란은 더욱 가중
2. 육두품세력과 지방세력의 대두
중앙귀족이 분열하여 항쟁하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때에 이 사회모순을
가장 민감하게 인식하고 그 극복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던 계층은 육두품세력
왕거인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골품제와 관련된 이들의 불만은 그들 자신 역시 골품제에 기생하는 지배층의
일부였기 때문에 현실비판도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행동도 제한적일 수
없는 한계
참고사항
국립 중앙 도서관에는 2종류의 신라삼성연원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연원보 책의 간지 표식이 김씨부분부터는 <계림김씨연원보>라 되어 있다.
경주김씨 계보연구회본에는 신라삼성연원보라 되어 있다.
내용과 활자 등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김씨 부분으로 넘어 가면서
약간 상이한 편집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부천족보전문도서관 소장 http://www.jokbo.re.kr/
순번 |
책 명 |
발행인 |
출판지역 |
출판년도 |
분류번호 |
333 |
新羅三姓淵源譜 신라삼성연원보 |
金澤俊 |
未詳 |
1931 |
576-1931-001 |
334 |
新羅三姓淵源譜 신라삼성연원보 |
金景大 |
평안남도 의주 |
1934 |
282-1934-001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http://www.nl.go.kr/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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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을 적어본다면
삼성연원보는 연도 등 진위(진실)성 논란으로 족보장사를 하기위해 만든 것이라는 평이 있긴 하지만 성씨별로 논란이 되는 기록때문에 핵심에 접근을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때는 이기록이 1642년 간행자료를 1934년대 재 간행한 자료냐가 논쟁의 쟁점이 아닌 담고 있는 기록의 진실성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80년전 기록을 위보로 판단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할 수도 있기에 논란이 되는 부분은 무엇이고 정사기록을 비롯한 고문서나 각 문중에 전해지는 기록과 대조하여 맞는 기록, 다른 기록, 없던(위조) 기록으로 분류하여 평가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합니다.
위조된 기록이라면 이번 기회에 자세하게 밝혀 다시는 이러한 기록들이 발 붙이지 못하게도 해야 하며, 족보기록 진위여부의 기준 잣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조된 책이라는 선입관 부터 갖고 연구대상에서 제외하기보다는 비교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전혀 가치가 없는 책은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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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와 저작년대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48
여러 검토를 거친 결과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는 김종거가 분명해 보인다.
김종거를 삼성연원보의 저자로 보는 이유는 삼성연원보에 기록된 두 개의 서문에서 모두 저자의 이름 김종거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1.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서문에서-
<경주인 유생 김종거는 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승학)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2. 경순왕 44세손 김택준(金澤俊) 간행 서문에서-
<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이와같이 삼성연원보 두 개의 서문에서 저자의 이름-김종거를 언급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연원보의 저자가 누구인가를 명백하게 밝혀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이것외에 더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
3. 경주김씨족보(영분공파 후손록)에서-
김종거는 경주김씨 족보 어딘엔가 기록되어 있는 실존인물임에 틀림없는데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그는 바로 경순왕의 아들 명종(영분공파조)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삼성연원보 두개의 서문(이승학-김택준)에서 말하는 종거(김종거)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초휘(初諱)는 경대(景大), 개명은 만정(萬錠 ) 자(字)는 수옥(水玉) 호는 제암(濟庵)
바로 이 족보에는 종거의 이름 뒤에 그가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문적을 베끼고 또 6대조 대우공이갖고 있던 것과 중조 적선공의 필사본을 참고하여 계대계보(系代系譜)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덧붙어 있다.
여기서 주목해 볼 점은 종거의 초휘(初諱)는 경대(景大)라는 기록이다.
삼성연원보 맨 뒷장에 붙어 있는 저작발행자(著作發行者) 김경대(金景大)와 삼성연원보 첫 서문(이승학, 김택준)에서 언급되는 종거(김종거)와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서문에는 족보의 이름에 올려진 이름 종거로, 뒷면 인쇄판 편저자엔 초휘의 이름 경대로 기록되어 있는 차이만 보인다.
이런 근거로 "삼성연원보의 저자 김종거=김경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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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新羅三姓淵源譜)의 서문(序文)과 저자(著者)에
대하여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47
신라삼성연원보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소화(昭和)9년(1934년 인쇄) 김경대 편저가 원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
계보연구회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신라삼성연원보(김경대 편저,소화9년 5월 30일 인쇄, 1997년 1월 27일 고서 등록(75648))를 가지고 영인본을 만든 것이다.
간행서문에서 원본은 '경순왕 44세손 택준'으로 되어 있으나, 영인본에는 24세손 택준으로 바뀌어 있다.
아마도 계보연구회에서는 '44세손 택준'이 뭔가 맞지 않는 오기로 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어떤 족보든 예전에 만들어진 것은 그것대로 보학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토씨한자라도 손을 대서는 안되는 건데 이 점이 좀 아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삼성연원보의 가치가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라삼성연원보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저자는 누가인가, 저작년대는 언제인가, 소하 9년(1934)에 인쇄된 삼성연원보의 편저 김경대는 원저자와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논의에 앞서 한문으로 빽빽하게 기록된 신라삼성연원보의 두 개의 서문(이승학, 김택준)을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의 국역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삼성 연원보 서문(이승학)
(국역: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
많은 씨족 중에 선대에 영화가 있고 후예가 번성한 씨족은 그리 흔치 않다. 영화가 한 세대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으며, 번성함이 몇 대에 그치지 않고 백세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우리나라의 박,석,김 삼성(三姓)의 영화와 번성은 쉽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삼성(三姓)은 신라건국이래 서로 양위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분점하였으며 수차례 이와 같은 일이 있었기에 박씨는 10왕 석씨는 8왕 김씨는 38왕이 나오게 되었다. 박씨, 김씨의 자손은 천여년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관과 파가 백여개 또는 수십개에 이르게 되었다.
석씨 후손은 이 정도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역시 관이 셋 있었으니 어찌 다른 이들과 비길 수 있으리오.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공적을 쌓을 때 후한 보답이 있으며 공적을 쌓지 아니하고 후한 보답을 받을 수 없다는 이치에 따라 삼성(三姓)을 말한다면 그 고귀함, 번성함이 예로부터 윗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선인(先人)들은 정치에 참여하여 은덕을 베풀었고 이로써 민심을 단합시켜 국가의 맥을 이었고 후손들은 충효를 다하고 학문에 근면하였으며 이로써 왕정을 돕고 세상을 가르침에 힘썼기에 그 영예로움이 이와 같이 드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삼성(三姓)으로 하여금 선인들의 뜻을 계승하고 업적을 이어받게 하며 시종일관 태만함이 없다면 앞으로 더욱 번영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경주인 유생 김종거는 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앞에는 단기삼국세계대기, 그 다음에는 신라 궁정과 고도의 유적, 그 다음은 신라 군왕의 연보(年譜 ) 및 삼성(三姓)의 분파상황 끝으로 명성과 칭송을 받은 김씨에 대하여 기재하고 있다.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신라 건국후 1699년 임신(壬申)년 여름 토산 이승학 삼가 서함
신라 박석김 연원보를 간행하며(김택준)
(국역: 중국 연변대 역사교육학과 우영문 교수)
옛날 공자는 책을 만들어 태평성대를 이룬 요나라를 역사에 기록하였고, 사마천은 사기를 써서 시황제(始皇帝)를 기록해 놓았다. 이들은 모두 고적을 고찰한 후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니 지극히 잘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사 5천년 간 영역은 삼천리에 이르고 경주는 신라의 도읍이었으며 박-석-김 삼성은 서로 양위하면서 나라를 다스렸으며 윤리, 기강, 예의, 법도 등 교화에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우리 문화는 동방의 큰 빛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웃나라로부터 예의지국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온땅을 적셔주고 있으며 대지의 정신 속에 흠뻑 스며들어가 옛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러름을 받으며 쇄퇴하지 않고 있다.
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나는 재배하고 일어나 소리친다. 지금의 시기는 세상을 구할 기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진가는 매몰 되고 은패되어 있어 이와 같거늘 이 큰일을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엎드려 사해를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이 동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연원보를 만들어 모시며 도리를 이어나가고 융성시켜 종가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법도로 삼아, 풍속을 이에 따르게 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서 옛것을 이어받아 계승발전시키고 후세인을 깨우치는 귀중한 땟목(나무로 역어만든 평평한 배)이 되기를 바라며 이에 당부의 말을 대신한다.
신미(辛未) 가을의 첫달 경순왕의 44세손 택준(澤俊) 삼가 씀
요약하자면,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서문에서
1. 경주인 유생 김종거는 삼성의 연원이 가보, 국사 및 야사에서 잘못 유출되어 다시 고찰하여 바로 잡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된 것이 안타까워 있는 힘을 다하여 지방 여러 전적을 널리 수집하고 그 가운데 요점을 간추려서 이 연원보를 편찬하였다.
2. 앞에는 단기삼국세계대기, 그 다음에는 신라 궁정과 고도의 유적, 그 다음은 신라 군왕의 연보(年譜 ) 및 삼성(三姓)의 분파상황 끝으로 명성과 칭송을 받은 김씨에 대하여 기재하고 있다.
3. 이 연원보를 인쇄 출판하여 세상에 내놓으며 본인(승학)에게 서(序)를 부탁하니 외람되지만 상식 밖의 일이 세상에 퍼지는 이때, 내나라의 옛일에서 내 집의 선적(先跡)을 찿아 남겨둠으로서 후세에 잊지 않게 하는 것이 본받을 일이라 생각하고 이에 서문으로 대신한다.
김택준(金澤俊) 간행 서문에서
1.벽동 종장(宗丈) 종거(김종거)께서는 인심은 옛날과 같지 않고 세도는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양약을 구하는방법을 찾으려면 양의(良醫)의 지도에 의거해야 한다고 초려에 왕립하여 일일이 말씀하셨다. 삼성연원보를 새로 만들면 그 깊은 이치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에 족할 것이다.
2. 연원보를 편찬할 때 심사와 교정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읽기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이에게 널리 전할만한 것이며, 이세상을 밝게 비추어줄 만한 문헌이라고 생각한다.
3. 모든 사람들이 동심으로 예의를 갖추어 연원보를 만들어 모시며 도리를 이어나가고 융성시켜 종가의 전통을 계승해 나가는 법도로 삼아, 풍속을 이에 따르게 하기 바란다. 오랜 세월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서 옛것을 이어받아 계승발전시키고 후세인을 깨우치는 귀중한 땟목(통나무로 엮어 만든 평평한 배)이 되기를 바라며 이에 당부의 말을 대신한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자는 김종거라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결론을 바탕으로 신라삼성연원보를 봐야 할 것이다.
2010년 2월 17일
제갈량과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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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삼성연원보의 저작년대에 대하여
출처 : http://blog.daum.net/wprkffid7/8360850
1. 1642년(인조20년) 저작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삼성연원보에 기록된 내용에는 저작년대를 추론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
신라삼성연원보 26쪽
고종정해(高宗丁亥 八月三十日(1887년, 8월 30일)
신라삼성연원보 28 쪽
大德先生碑文(대덕선생비문)
康熙 四十八年 一月 十日(강희48년 1월 10일, 1709년) (청나라 강희 48년, 1709년)
이는 삼성연원보의 저작년대가 1642년(인조20년) 이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신라삼성연원보 1642년 저작설은 근거가 없는 오류라고 본다.
서문을 썼던 토산(兎山) 이승학(李承學), 경순왕 44세손 김택준(金澤俊)은 저작자 김종거와 동시대 사람으로 판단되며, 승학이 서문을 썼던 임신(壬申)년은 1932년, 택준이 서문을 썼던 신미(辛未 )년은 1931년으로 본다.
경주김씨족보 영분공파후손록에는 김종거(김경대)는 경진(庚辰)년 9월 1일 생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진년 1880년으로 보인다.
그리고 종거는 을묘(乙卯) 1915년 秋(가을)에 족보를 만들었는데 7-8년 간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해져 내려오는 고적을 모으며, 6대조 대우공이 가지고 있던 것을 참고로 족보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뒤따라 등장한다.
<참고>
60갑자표
이 족보를 보면 김종거(김경대, 1880년생)의 배위에는 두 명의 숙부인이 나오는데 첫째 부인은 丙子(병자, 1876년)생이고, 둘째 부인은 申辰(갑신,1904년)생으로 나와 있다.
김경대(김종거)는 평생 선대의 계보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은 어른이었다.
그가 <신라삼성연원보 1934년> 보다 먼저 만든 족보(경주김씨족보)가 하나 있다.
대정(大正)13년 10월 2일, 1924년 10월 2일에 출판한 <경주김씨족보 1924년, 김경대 편저>가 그것이다(부천족보도서관 소장).
<신라삼성연원보1934년>는 <경주김씨족보1924년>을 편찬하고 나서 10년이 지난 후에 만든 것이다.
이와같이 종합적으로 검토해보면, 신라삼성연원보는 김종거(김경대)가 20년이상 선대의 자료를 참고로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여 1934년에 출판한 족보라는 것이다.
2010년 2월 20일
제갈량과 사마의
<신라삼성연원보1934>
<신라삼성연원보 1934>
<경주김씨족보 김태훈 편저 1934>
<경주김씨족보 김태훈 편저 1934>
顯宗元文大王甲子十五年冊景興院主金氏爲德妃
현종원문대왕갑자십오년책경흥원주김씨위덕비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정월에 경흥원주 김씨를 책봉하여 <덕비>로 삼았다는 기록이다. 경흥원주 김씨란 김인위의 딸을 가리킨다.
흔히 원순숙비라고도 하는데 현종 즉위 이후 귀비로 간택되어 경흥원주로 불리고 있다가 현종15년(1024)년 정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어서 고려사절요에는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9월에 "김인위를 상서좌복야참지정사로 삼고 치사하게 하였다(以金因渭爲尙書左僕射參知政事仍令致仕)는 기록이 등장한다.
고려사에는 덕비(원순숙비)의 아버지 김인위에게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懸開國男)으로 삼고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주고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치사(致仕)하게 했다는 것은 나이 70세가 되어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고 이를 왕이 윤허하는 것을 뜻한다.
현종(992-1031)은 재위기간이 1009년 2월-1031년 5월로 22년 3개월이다.
인위의 딸 원순숙비가 왕궁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현종 즉위년인 1009년 이후가 될 것이다.
1024년에 김인위의 나이가 70세였다면, 그의 생년은 955년이 된다.
그후 그는 얼마나 더 오래살았는지 아직 발견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김인위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현종의 왕비인 원순숙비가 되고 작은 딸은 이자연의 처(계림국대부인)가 된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현종원문대왕갑자15년(1024년) 3월에 이자연 등 9명과 명경 10명에게 급제를 주었다고 나온다(賜李子淵等九人 明經十人及第).
"이허겸의 아들은 한(翰)이고 한의 아들에는 자연(子淵)과 자상(子祥) 두 사람이 있었는데 자연의 처인 계림국대부인은 경주김씨 김인위(金因渭)의 딸로 현종의 원순숙비의 동생이 된다"(한민족의 역사 고려시대(1983년) p.23)
경주김씨 족보 가운데 김인위의 딸 가운데 하나는 현종과 혼인하여 원순숙비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이자연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어려서부터학문을좋아하였고특히시에능하였다.
부인 왕씨(王氏)는 왕가도(王可道)의 셋째 딸로 상당현군(上黨縣君)에 봉해졌다. 6남 4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자인(資仁)·둘째 자의(資義)·셋째 자충(資忠)·넷째 자효(資孝)는 모두 벼슬을 하였고 다섯째는 승려로 법명이 세량(世良)이다.
1077년(문종 31) 53세에 병으로 작고하였다.
김원정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임진 6년(1052)
壬辰六年 宋皇祐四年 契丹重煕二十一年 三月以金元鼎爲御史大去
(임진륙년 송황우사년거란중희이십일년삼월이금원정위어사대거) :
임진 6년(1052), 송 황우 4년, 거란 중희 21년 3월에 김원정(金元鼎)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以崔冲爲內史令仍令致仕李子淵爲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
(이최충위내사령잉령치사이자연위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
최충을 내사령으로 삼아 그대로 치사하게 하고, 이자연을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로 삼았다.
乙未九年(을미구년) : 문종 을미 9년(1055)
金元鼎爲尙書左僕射參知政事兼太子少保:
(금원정위상서좌복사참지정사겸태자소보) : 김원정(金元鼎)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겸 태자소보로 삼았다
1057년 병부가 동서양계에 군사를 보내어 수비하기를 청하므로 김원정은 문종대왕에게 “근래 군사와 백성이 책봉사(册封使)를 송영하느라 시달렸고, 또 흥왕사(興王寺)의 역사로 쉬지 못했으며, 자량도 거의 떨어져가니 봉책군(封册軍)의 예에 의하여 물품을 주어 보내소서.”라고 청하여 이를 윤허받았다.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무술 12년(1058)
五月制工部尙書庾逵子仲卿降等授蔭職門下侍中李子淵等駁曰仲卿母是平章事李龔
오월제공부상서유규자중경강등수음직문하시중이자연등박왈중경모시평장사리공
奸兄女所生仲卿平章事李龔不宜齒於朝列班列平章事金元鼎等議 此乃李龔之罪非仲
간형녀소생중경평장사이공불의치어조렬반열평장사금원정등의차내리공지죄비중
卿父子所犯且功臣黔弼之裔不宜防塞仕塗請依前制降授蔭職王從元鼎等議
경부자소범차공신검필지예불의방새사도청의전제강수음직왕종원정등의
5월에 제하기를, 공부상서 유규(庾逵)의 아들 중경(仲卿)을 강등하여 음직에 제수하라." 하자,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이 논박하기를 중경의 어미는 이형의 딸을 간음하여 낳은 소생이니, 중경을 조정의 반열에 둠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평장사 김원정 등이 의론하기를, “이것은 이공의 허물이고 중경 부자가 범한 것이 아니며 또 공신 금필(黔弼=유금필)의 후손이니, 벼슬길을 막음은 마땅치 않습니다. 앞서 내린 명대로 강등시켜서 음직에 제수하소서." 하니, 왕이 원정 등의 논의를 따랐다.
이처럼 평장사 김원정은 문종대왕 앞에서 문하시중 이자연과 설전을 벌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김원정은 비록 이자연과는 처남매부지간이라 할지라도 국사를 논할 때는 아주 냉정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권지사/문종인효대왕/신축 15년(1061)
辛丑十五年(신축십오년) : 신축 15년(1061)
十二月(십이월) : 12월에
契丹遣檢校太傅蕭述來賀生辰
거란견검교태부소술래하생진
거란이 검교 태부 소술(蕭述)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以王寵之爲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金元鼎爲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이왕총지위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금원정위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왕총지(王寵之)를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로, 김원정(金元鼎)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로 삼았다
김원정은 덕종 때 감찰어사(監察御史)· 정종때 우사낭중(右司郞中)을 거쳐 문종 때 어사대부(御史大夫)·중추원사(中樞院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내사시랑(內史侍郞), 동내사문하평장사(同內史門下平章事),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문종15년(1063년)에는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경주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원정은 문종 15년(1063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김원정이 이르렀던 수태위문하시중은 임금 바로 다음으로 높은 자리다.
고려시대 삼공(태위, 사도, 사공)과 삼사(태사,태부,태보)는 정1품의 벼슬이었으며 국정고문으로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위치였다.
경주김씨 족보에는 김원정의 아들 김지예만 기록되어 있지만 서균(1060-1132)의 묘지명에는 서균의 어머니가 평장사를 지낸 김원정의 딸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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