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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국내주화,엽전

두돈오푼에 얽힌 일본의 다섯가지 악행

by 연송 김환수 2010. 1. 24.

한국의 고전 / 과거와 현재 (110)

 

 

 한국의 고전 / 과거와 현재 (110)

 

 

 

 

직경 20mm, 무게 5g으로 양복소매에 매달린 단추 크기 만한 두돈오푼(二錢五分. 동 75%,니켈 25%) 백동화는 우리나라 화폐사에서 그 시대국민들의 가슴을 가장

멍들게 했던 악화(惡貨)였다.

 

그러나 오늘날 화폐 수집가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은 뒤로 한 채 두돈오푼 제작연도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光武二년을 제쳐놓고 개국 504년 조선, 光武元年~五年등 현존매수가 적은 특년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시대 두돈오푼으로 쓰라린 경험을 했던 선조들이 혹시라도 아신다면 깜짝 놀라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읽었을 것이다.

 

 

 

두돈오푼은 1892년 제작이 시작되어 1901년 중단되었고 구한말 처음에는 엽전 25매의 가치였다. 신식화폐 중 두돈오푼은 가장 값싼 제작비로 대량 제조할 수 있는 화폐였다.

 

이 때문에 정부는 급박한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그때그때 무계획하게 남주(濫鑄)했다. 일본은 위조 두돈오푼을 본국에서 만들어 가져오는 등 사주전을 대량 제조하여 백성들은 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 후 화폐 교환에서 한국민들이 갖고 있던 두돈오푼은 대부분 불량주화로 취급되어 한푼의 가치도 없게 되자 앉아서 화폐재산을 송두리째 잃고 마는 처지가 된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체결 후 한일합방과 침략의 발판을 굳히고 있던 일본인들은 두돈오푼이 발행되어 교환되기까지(1892~1909) 17년 동안 5가지의 악행(惡行)을 저질렀다. 한국정부와 관리들도 국운이 기울고 있던 그 시대 어떻게 보면 공범자 또는 방조자였다.

 

다섯 가지 악행 중 첫째는 두돈오푼의 계획적인

①사주전(私鑄錢)제조,

②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제조기기 및 밀수(密鑄)된 두돈오푼 수입,

③화폐교환 정보 사전 입수, 양화(良貨)의 매점 매석,

④ 불량한 두돈오푼으로 벽지의 땅 투기,

⑤상평통보 등 구엽전 地金으로 외국수출 등을 들 수 있다.

 

 

1902년 10월 1일 주한일본공사 林權助가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는 「...인천에서는 본국 주요 거류민으로서 백동화 밀수입에 관여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들은 大阪에 관계자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선박을 빌려 거액의 백동화를 수입하고 있다... 제 3국에 대해 우리의 자세를 의심케 하는 원인이 되므로 차제에 엄중한 처분을 요하는 동시에 일본국내에 있어서의 취체(取締)를 엄히 하지 않으면 그 효력이 없을 것이니 엄중히 취체토록 지방장관에게 훈령해주기 바람...」

 

제 3국이라 함은 이보다 앞서 그 해 3월 19일 백동화의 폐해를 보다못한 서울 주재 각국 공사들이 사신회의(使 臣會議) 결의로 한국정부에 백동화의 주조중지,사주행위 및 위조품 수입엄단을 촉구해 왔기 때문이다.

 

하버트(H.B.Hulbert)는 기행문에서 「...백동화가 유통되자마자 위조범들이 날뛰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위조에 필요한 기기를 공급하고 밀수입했으며 동시에 수십만 달러의 대가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고 다시 자재가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적었다.

 

岡庸一이란 일본인은 「불란서의 천주교회당에서도 10여대의 수압 각인기(手押刻印機)를 장치하고 관주전보다 품질이 더 좋은 백동화를 사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 고관 중 일부는 그들의 사저에 이런 기계를 2~3대씩 장치하고 찍어낸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일본 오사카에서 제조된 위조 백동화는 정미업자 주물업자를 가정하여 한국에 대량밀수출 되었는데 원가는 6~7푼 가량이라고 했다. 일본 관헌에 의해 단속이 되자 아예 한렝構@?운행하던 정기기선 안에서까지 백동화 밀조가 성행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왕실에서는 일정한 상납금을 받고 암암리에 제조를 인정해준 묵주(默鑄),주전액의 일부를 받고 개인이 나 회사에 허가해 준 특주(特鑄), 아예 전환국에서 왕실용으로 찍는 어용분(御用分)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가치는 3푼정도 밖에 안 되는 금속으로 명목가치 2전 5푼은 5~6배 이상의 주전차익(鑄錢差益)을 올릴수 있을 뿐 아니라 엽전보다 더 손쉬운 방법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건양원년(1896) 총예산 중 26.6%인 128만 여 원을 백동화 제조에서 오는 이익금으로 충당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인 것이다.

 

위조 백동화를 만드는 각인기는 일본을 통해 영국과 미국에서도 밀수입되었다고 하니 당시 한국의 위조백동화에 전 세계의 눈귀가 쏠렸던 것이다.

 

仁川 府史라는 책에는 당시 경인지방에는 전환국 외에 백동화 사주기계가 150대일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은 백동화에 대해 미온적으로 나가다가 국제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자 1902년 11월 「한국의 백동화위변조범 처벌령」을 자기 나라에 처음으로 공포했는데 위반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벌금 200원 이하 등 조폐범으로서는 가벼운 처벌 내용이었다.

 

 

 

 

 한국의 고전 / 과거와 현재 (111)

황성신문은 그 해 7월 12일자에서 「… 통용된 것이 모두 무가치한 악화였으니 사럼着공렌?모두가 도산 탕업(蕩業)할 것이 명백하다. 갑,을,병의 차별로 교환되는 것이니 그로 인해 손해보는 사람은 더욱 많아진다. …」고 보도했다.

 

당시 한국경성상업회의소에서 일본총리 대신에게 보낸 청원서에는 「…그 기밀(화폐교환)은 제정 이전에 재빨리 일부에 누설되어 양화는 점차로 일부의 손에 들어갔고 한국민은 악화만을 움켜쥐어 부지불식 간에 단두대에 올려 놓이게 된 꼴이 된 것이다. … 이는 실로 …악덕(惡德)을 돕고 무고(無辜)를 죽이려는 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고 지적했다.

 

여기서 그 기밀이란 경제정보와 이재에 밝은 일본 상인들과 일본관리 등 약삭빠른 일본인들이 화폐교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것을 말함인데 이들은 교환 전에 불량 백동화로 양화를 매점매석해 놓았다가 교환, 횡재를 해 부자가 된 자도 있다는 것이다.

 

정보에 어두운 대부분의 선량한 한국 백성들은 약 1,000만원, 당시 쌀값으로 치면 약 200만석에 상당하는 악화를 움켜쥐고 하루아침에 파산과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두돈오푼 위조주화 제조의 주범인 일본인들은 화폐교환에 다시 치고 빠지면서 다 먹은 김칫독에 한국민들을 몰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강점기의 문턱에서 화폐로 인한 경제적 수탈은 너무 야비하고 괘씸하면 서도 치욕스런 실상인 것이었다.

 

  

백동화 인플레이션과 교환의 부작용 으로 서울에서만 대기업 23개 업체, 중소상인 수백명이 점포를 폐쇄했고 한국인 경영 전당포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일본인들의 보고서에도 「개항장마 다 휴업한 것이나 다름없이 불꺼진 항구가 되었고 하루 2~3백원씩 매상 을 올렸던 점포는 2~3원 밖에 올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팔면 팔수록 손해를 본다고 했다. 중간 이하의 가게들은 금융압박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고 적었다.

 

1905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4만 2,460명 한국인 총수는 약 970만 명이었는데 화폐교환에 응한 3,178명 중 일본인이 51% 1,623명 한국은 중 국인까지 포함해 48.6%인 1,545명 이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인이 갖고 있던 두돈오푼 백동화는 거의가 불량품인 병종으로 교환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교환 전에 재빨리 갑,을,종으로 바꿔치기 하여 교환에 응했던 것이다. 교환액수로 쳐도 총 교환액 852만원 중 일본이 53% 한국인 45.57%에 불과했다.

 

백동화는 서울을 중심으로 평안북도까지 통용지역이 넓었으나 경상도와 함경도 전남 지방에는 끝까지 통용 되지 않았다.

 

백동화 교환시기에 더욱 기가 찰 일이 벌어진 것은 순진한 농민을 등쳐먹는 교활한 일본인들의 등장이었다.

 

일본상인들은 못쓰게 된 불량한 백동화를 모아 가지고 화폐개혁 사실을 전연 모르고 있는 벽지의 농민들을 찾아가 그 돈으로 다시 토지를 사 들였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백동화일 망정 아주 비싸게 팔 수 있었기 때문에 다투어 매물을 내놓았는데 결국은 못쓰게 된 쇠조각 뭉치만 움켜잡게 된 것이다.

 

그 시대 한국민들은 당백전, 淸錢, 당오전 두돈오푼 백동화 등 새로운 주화가 나올 때마다 앉아서 손해를 보았고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렸기 때문에 地金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상평통보 당이전, 천자문전 등 구 엽전만을 신뢰했고 종이돈이나 얄팍한 동전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대형전인 상평통보 당이전, 천자문전 중에는 명목가치가 다섯배나 높은 당오전보다도 중량이 무거운 것도 있었다.

 

당오전은 발행(1883)되자마자 다시 사주가 시작되었고 일본인 및 한국인 일부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는 구 엽전으로 공납금을 받으면 최종적으로 나라 금고에는 신주 당오전으로 대납했다.

 

 

구엽전은 地金, 즉 구리 값이 높아지 면서 일본으로 수출하면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개항장에 는 당오전의 원료인 구리와 상납을 팔러온 일본의 큰 상인들과 구 상평 통보를 구리 값으로 거둬 가는 상인들 로 양면을 이뤘는데 일본인들에겐 항상 한국의 상평통보가 타겟이 되었다.

 

구 엽전의 수출은 갈수록 심해져 1905년에는 수출을 지원하라는 일본 의 내훈 속에 포함되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우리 엽전을 수출하여 부 자가 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엽전을 처음에는 녹여서 가져 가다가 노일전쟁 전에는 엽전채 가져가 전쟁 물자로 활용했다. 통용화폐의 지금 수출은 그 나라 재정과 가정경제를 그만큼 빈약하게 만드는 화폐 강렝壎? 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1905년 구 화폐를 정리할 당시 일본 제일은행이 조사한 엽전의 유통액은 총 650만원 정도였는데 백동화의 질서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적어도 150~350만원 정도의 엽전이 일본상인들에 의해 地金으로 수출, 주로 옛 상평통보가 다른 용도로 녹여진 것이다.

 

1전은 구한말 은본위 시대 엽전 10매, 금본위 시대는 5매로 교환되었는데 엽전 1,000매를 1원으로 볼 때 국내에서 유통된 65억매의 엽전 중 절반 이상인 35억매가 밀수출 된 것이다.

 

상평통보의 地金 밀수출은 국제 구리값이 폭등할 때마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당일전 시대부터(1809) 이루어져 소급해보면 그 규모가 40매를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 시대 대다수 한국민들은 구리 값이 높아져도 이를 수출하여 국제시장에 내다 팔 만큼 정세에 밝지를 못했고 우리 돈을 녹이는 행위는 죄악시했다.

 

당백전 등 새 화폐가 발행될 때마다 물가폭등으로 인한 고통과 구매력의 상실, 금전사회와 신용사회가 함께 붕괴되는 참혹한 현실을 겪어온 백성들은 옛 상평통보만은 제가치를 지니고 있는 만고불변의 화폐로 국보같이 아껴왔기 때문에 신화폐 교환에 최종까지 응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정부는 자국에서 통용중인 화폐를 외국인들이 地金으로 팔기위해 공공연히 가져가는 것도 지키지 못했으니 화폐에 관한 법률이나 통화정책은 사문화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구한말 백성들도 나라의 화폐제도 및 허물어진 화폐가치에 등을 돌려 왕권이든 정권이든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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