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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국내주화,엽전

내 엽전(葉錢)의 가치는? 복(福) 금섬(金蟾)이란?

by 연송 김환수 2009. 8. 1.

엽전(葉錢)이란 ?

 

놋쇠로 만든 옛날의 주화(鑄貨)를 말합니다.

 

 

 

엽전이란 이름은
놋쇠와 구리로 만든 주화가 고형틀에서 떼어낼 때 나뭇잎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엽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전 버드내마을 아파트에 ‘화폐조각공원' 조성

 

내 소장 엽전들 이제는 호강하네 예전에 제기 만들고 맷돌에 넣고 푸대접했는데 이젠 옷까지 입었다.  

 

 상평통보 당백전

 

통용전 중 상태양호한 당백전 소장품

                    고형틀에서 떼어낸 자국(우측중간)                                 두께  30mm

 

대개 둥글고 납작하며 가운데에 네모진 구멍이 있다. 엽전의 시초는 중국의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반량전(半兩錢)을 주조하였는데 이것이 원형방공전(圓形方孔錢:엽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반량전 

그 후 이러한 형태의 엽전은 청(淸)나라의 광서통보(光緖通寶)에 이르기까지 중국 화폐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거의 같은 형태의 엽전이 주조되었다.

 

   

광서통보 (1875-1908)

 

광서통보 보광국 고평1전

621년 당(唐)나라에서 주조 ·발행된 개원통보(開元通寶)와 758년에 주조된 건원중보(乾元重寶)가 고려시대에 다량으로 유입되어 996년(성종 15) 이를 모방한 ‘건원통보’를 주조한 것이 한국 엽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개원통보

개원통보

  

건원중보

  

         건원통보

   1910년경 개성(開城) 부근의 고려고분에서 발견된 무문철전(無文鐵錢)과 뒷면에 ‘동국(東國)’이라 새겨진 ‘건원중보’는 이것을 뒷받침 하고 있다.

              

         건원중보 (앞)                    동국  (뒤)                  동국 (뒷면)  996년               건원중보     

 성종15년(996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乾元重寶(건원중보) 뒷면 東國(동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로 알려져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 2년 (759년)부터 주조된 엽전인데 중국의 건원중보와 구별이 어려워 상, 하부에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동국중보를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주화가 되었다.

 

이 중에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方孔圓形)의 형태를 갖추었을 뿐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이는 당시 민간에서 만든 일종의 부장품(副葬品)으로 추측되며, 주조전(鑄造錢)인 ‘건원중보’는 관주전(官鑄錢)으로 여겨진다.

 

뒷면에 ‘東國’자를 넣은 것은 중국 엽전과의 구별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후에 이 ‘東國’자는 앞면의 ‘乾元’자 대신으로 앞면에 새겨져 ‘동국중보(東國重寶)’라 하였다.

 

동국통보 

     

동국중보

 

한편 목종(穆宗) 연간에는 중국의 ‘개원통보’를 모방한 고려주 ‘개원통보’가 만들어졌으며 이로부터 숙종(肅宗) 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 ·삼한중보(三韓中寶) ·삼한통보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 ·해동통보 등 전명(錢名) 별로만 약 8종이 주조되었다.

    

동국통보

  

           삼한중보  숙종2년-10년, (1097-1105)                                           삼한통보

   

해동원보

      

      해동중보 [海東重寶] 1103년(숙종 8년)                                     해동중보

  

해동통보 

그러나 이들 엽전이 유통화폐로서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당시의 중요 화폐인 은병(銀甁) ·쇄은(碎銀) 등과 함께 대외무역의 결재수단으로 사용된 듯하다.

 

 고려시대 화폐(은병)

   

              소은병                   소은병                조선전기 은병

 

 

                                             고려 은병                                                   쇄은   충렬왕 13년(1287)

 

은을 재료로 하여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 만든 소은병

1101년 고려 숙종은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 만든 은병을 발행하였다. 은병 1개의 가치는 포목 100필에 해당하는 고액으로 주로 국가간의 교역에 사용되었다. 그 후 은의 조달이 힘들어 지고, 동을 혼합한 위조가 성행하자 1331년 은병의 크기를 크게 축소한 소은병을 발행하였으나 이 역시 위조가 나돌아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1408년 유통이 금지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초(國初)에는 포전(布錢)과 저화(楮貨)가 백성들 간에 통용되고 있었으나 1423년(세종 5) 명(明)나라의 ‘만력통보(萬曆通寶)’에 준하여 ‘조선통보(朝鮮通寶)’를 주조하였다. 이것을 ‘해서(楷書) 조선통보’라 하며 1625년(인조 3)에 주조한 것을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라고 한다.

 

    

                     명도전                                               포전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화폐 명도전 (길이 13.2-15cm)

              

    

 

 포전 : 농구() 모양을 한 청동화폐()

 

 중화민국31년명 포전도안반원백동화(中華民國31年銘 布錢圖案半圓白銅貨)

 

조선 건국 때인 1402년에 닥나무 껍질로 만든 '저화'가 등장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지폐인데 대중화에는 실패 했다고 하는군요.
 
고려시대는 1391년(공양왕 3) 종래에 발행하였던 철전()·은전() 등의 주화가 원료의 부족으로 유통의 감소를 초래하자 화폐제도를 개혁하고자 자섬저화고()를 설치, 남송()의 회자(), 명나라의 보초(鈔)를 참고하여
저화를 인조()하여 유통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고려의 멸망으로 저화는 회수되고 인판()도 소각하였다.
조선의 태종은 즉위한 1401년
사섬서()를 설치하여 이듬해부터(1402) 저화를 발행하였다.
 

저화(楮貨) : 고려 말기·조선 전기에,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쓰던 종이돈.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발행하였지만 본격적인 유통은 안되었으며,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사섬서를 설치하고 이듬해(1402) 저화 2,000장을 발행하였다. 발행 초기에는 한 장이 쌀 두 말의 값어치를 가졌으나

그 뒤 돈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겨우 쌀 한 되의 값어치를 가지게 되었으며,

중종 7년(1512)경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저폐.

 

호조태환권(1893년)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는 ?
1893년에 발행된 호조태환권 이에요.(고종 30년)
호조 태환권은 5냥, 10냥, 20냥, 50냥,짜리등 4종류의 지폐 입니다.

그러나,당시 화폐로 쓰고 있던 엽전을 회수하여 새로운 화폐-제도를 정착하기 위해, 발행한 지폐로 50냥, 20냥, 10냥, 5냥 짜리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못하다가 결국엔 단 1 장도 사용되지 못 하고 모두 소각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통보 (조선 세종때)

     

조선통보

 

 이들은 모두 소형전(小形錢)이며 대형전으로는 배면(背面)에 ‘호일전(戶一錢)’이라 새긴 것과, 무배자(無背字)인 해서전(楷書錢)과, 배면에 ‘十’자가 새겨진 팔분서전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시주화(試鑄貨)로 알려지고 있다.

 

1446년(세조 10)에는 전폐(箭幣)라고 하는 살촉 모양의 유엽전(柳葉錢)이라는 화폐가 발행되었으나 실물은 전하지 않으며 다만 길이 약 5.4 cm, 둘레 5.1 cm인 끝 쪽에는 ‘팔방통보(八方通寶)’라는 4자가 새겨져 있었고 화살촉으로 사용되었다는 점만이 알려져 있다.

 

1651년(효종 2)에는 ‘십전통보(十錢通寶)’가 주조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하기 위한 수단으로 엽전 50문(文)씩을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으며, 이것을 지니고 다니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주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형엽전이다.

 

그러나 이들 조선 전기의 엽전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때까지 통용되던 포전과 저화만을 백성들이 중히 여기던 점과, 엽전을 만드는 원료인 구리의 부족으로 엽전을 다량으로 유통시키지 못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십전통보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숙종 ·영조 연간에 발행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한국 화폐사상 가장 오랫동안 유통된 엽전으로 그 종류를 세분하면 약 300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이 종류가 많아진 이유는 당시 엽전의 주조가 국가에 의하여 한 곳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고 각 지방별로 또는 관아(官衙)별로 주조소가 있어 이들 주조소에서 발행하는 엽전의 질이 저하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엽전 뒷면에 주조소의 약호를 새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상평통보 (1678년)

 

 상평통보 당백전

 

  

상평통보 당5전

 

 상평통보 당2전

상평통보 당1전 

  

    

 

상평통보를 크게 분류하면 ‘상평통보 무배자전(無背字錢)’ ‘상평통보 단자전(單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2자전(當二錢下部二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천자문순전(當二錢下部千字文順錢)’ ‘상평통보 중형전(中型錢)’ ‘상평통보 당1전(當一錢)’ ‘상평통보 당5전’ ‘상평통보 당백전(當百錢)’ 등으로 구분된다. 조선 후기에는 ‘대동 1전(大東一錢)’ ·2전 ·3전 등이 주조되다가 마침내 신주화(新鑄貨)로 바뀌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 '대동은전' 

1882년 대동 은전(대동 1,2,3전) 최초 주조 (고종 19년)

1883년 대동 은전 주조 중단          * 재질 : 금속-은제 

                                     당백전                                                               마제은

          조선 고종 때 경복궁 짓기 위해 만든 돈                              말발굽처럼 생긴 '마제은' 등장

 

  일본제일은행권

                            1902년, 일본 영향으로 대한 제국에서는 '일본제일은행권' 사용됩니다.

 

 

국내最古 금화 경매 

 

 

국내 최초의 근대적 금화로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 발행한 5환짜리 금화(평가액 1억6000만원)가 국내 경매시장에 나온다.

화폐 전문업체인 ㈜화동양행은 29일 서울 반포동 서울팔래스호텔에서 고려시대 주화에서 현재 사용 중인 동전까지 국내의 진귀화폐 총 506종을 경매한다.

회사측은 “이번 경매는 우리나라 첫 근대적 금화인 5환, 10환, 20환 금화 3종(사진)이 모두 출품돼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하기 직전인 1908년(융희 2년)에 비운의 대한제국이 근대국가 위상을 천명하기 위해 주조한 5환 금화를 비롯해 10환(평가액 3500만원)과 20환(평가액 9500만원) 등 세 금화의 총 평가액만 3억원에 육박한다.


         
화동양행은 “금화뿐 아니라 국내 경매사상 처음으로 출품되거나 관련 서적에서 탁본으로만 보았던 희귀한

별전들로 구성된 ‘조선별전 220종 세트’(평가액 7000만원) 등도 출품된다”고 말했다.

이 밖에 구한말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수리 문양 주화 3종, 1966년이후 2007년 현재까지 발행된 ‘대한민국 현용주화 200종 세트’(평가액 800만원)도 경매된다.

이번에 출품되는 희귀 화폐들은 국내외 화폐 수집가 또는 소장자들이 화동양행에 경매를 의뢰한 것들이다. (02)3471-4586∼7

 1906년에 발행된 20원 금화 

 신권 수집시 참고자료

 

내가 가진 엽전 22개 + 휴대폰 고리 엽전 1개 + 당백전 알파 ?

 

앞서 소개한 금화의 소장가치가 높지만 역사의 숨결이 스며 있는 아래 엽전에 관심을 더 가져본다. 

 

 

 

 

개원통보 [開元通寶]

개원(開元)은 연호가 아니고 개국건원(開國建元)의 준말로 당나라의 창업을 기념한 것이다. 당나라 초기인 621년(武德 4) 처음으로 주조 발행되었으며, 지름 2.4 cm, 무게 3.7 g이었다. 이 동전은 그 후 역대 왕조의 표준형이 되었다.

 

그 후에는 845년(武宗 5) 회창(會昌)에서 주조한 예가 있으며, 오대삼국시대의 남당(南唐:937~975)에서도 발행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목종 때(998~1009) 같은 이름의 주화를 발행하였는데, 전문(錢文)을 예서와 전서로 주조한 두 종류가 있었다.

 

개원이란 당나라 초기 건원의 준말로 최초발행은 621년 발행되었으며, 그후 오대 삼국시대 975년까지 발행된 대표적인 중국 청동전입니다. 그 크기는 23밀리-24밀리 정도로 한국에서도 고려시대 목종(998년-1009년) 같은 이름의 주화가 발행되었다고 합니다.

   

지도원보(至道元寶) 995년 ~ 997년

송 태종지도년간(宋  太 宗 至 道 年 間)

 

상부원보는 북송에서 주조한 것을 일본과 안남(베트남)에서 흉내낸 것이 있습니다.

 

황송통보

황송통보는 송나라 인종(1023년-- 1063년) 시대 발행된 주화중 한개이다. 그당시 약 40년동안 "명도원보"-- "황송통보 전서체" -- "황송통보 해서체"-- 명도원보 29.5밀리 대형

 

주화가 서민 생활과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본 주화는 무역전으로 한국 고려 시대 동국통보에 영향(997- 1097)을 주었으며, 동국통보 전서체는 황송통보 전서체와 그 서체가 비슷하다는 것이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일본 무역전으로도 사용되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황송통보가 다수 발견되고 있다. 특히 개성공단 유물 발굴터에서 주먹도끼와

 

"쇠소" 그리고 황송통보가 수백점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왕족이나

귀족층의 부장품으로

 

발견된 것으로 봐서 그당시 귀족들의 노리개 감으로 사용된 것 같다. 따라서 그당시 무역전은 상당히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여 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상태가 좋은 주화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본토의 주화들은 거의 푸석푸석할 정도로 상태가 안좋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황송통보는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되는 주화가 더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그 크기는 23.1밀리, 24밀리, 24.2밀리, 25밀리. 25.5밀리, 27밀리, 29밀리 등이며,

 

아직까지 뒷면에 "점", "월" 등은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철전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크기에 따라서 24밀리와 25밀리가 가장 일반적이며, 23.1밀리, 25.5밀리, 27밀리,29밀리 등은 상대적으로 고가측에 든다.

 

2007년 10월 현재 한국에서는 천원-- 오천원-- 만원 정도에 상태좋은 것을 쉽게 구할수 있으나 일본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특히 상태좋은 것은 고가로 취급되고 있다. 그당시

 

황송통보는 "모전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것같다. 상태가 좋은 모전급은 있으나 "모전"이라는 명칭은 일본책이나 한국책에서 검색할 수 없었다.(상대적으로 원풍통보는 있었음)

결국 황송통보는 상태가 좋은 것이 "모전급"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고려유입전  가우통보 (嘉祐通寶)(1056~1063)  송 인종가우년간  宋  仁宗嘉祐年間

송전을 감상하다 보면 대체로 고요하고 조용하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그 당시 송나라의 잔잔한 시대상을 엿볼수 있는게 이 엽전의 특징입니다.

 

  

 가우통보

 

 

   유물명칭 : 가우통보
 국적/시대 : 중국(中國) / 송(宋)
 재질 :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크기 : 최대지름 : 25 cm / 안지름 : 7 cm
 용도/기능 : 산업/생업(産業/生業) / 상업(商業) / 화폐(貨幣) / 엽전(葉錢)
 출토(소)지 :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소장처 : 학교(學校) / 서울시립대(서울시립대)
 유물번호 : 서울시립대(서울시립대) 500161


이 유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무덤유적으로 알려진 화성 둔대리 유적에서 발견된 동전으로, 토광묘인 7호유엽의 북송과 남송대의 동전이 대부분인데, 수적으로 당대의 개원통보가 12점으로 가장 많다. 출토된 가우통보(嘉祐通寶)는 전통적인 동전과 같이 외형은 둥글고 중앙에는 사각의 구멍이 뚫린 형원공방(形圓孔方)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독법(讀法)은 회독(回讀)으로 중앙에 있는 사각의 구멍을 중심으로 위에 가(嘉) 오른쪽에 우(祐) 아래에 통(通) 왼쪽에 보(寶)의 순서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새겨놓았는데, 서체는 예서(隸書)이며, 송(宋) 인종 가우원년(1056년)에 주조되었다.

 원풍통보

원풍통보 元豊通寶 송 신종원풍년간 宋 神宗元豊年間(1078~1085)

當二錢 전서 篆書

 

원풍통보는 송나라 신종 원년(1078년)에 처음 발행하여 1085년까지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 그리고 일본 유럽에 이르기까지 무역을 석권한 주화로 글씨체를 크게 전서체, 행서체, 예서체(흘림체)3종류로 나누고 있으며. 그 크기도 다양하여 24밀리를 기본으로24.5밀리. 25밀리, 25.5밀리,27밀리,28밀리,29밀리,32밀리,34.5밀리 등으로 분류된다.

 

교역도 활발해서 한국과 일본 고분에서도 부장품용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무역결제 수단이나 양반들의 놀이개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다.한국에서는 그후 독자적인 동국통보,해동통보,삼한통보 등이 만들어져 원풍통보를 모방하지않았으나 일본에서는 1580년에 처음 원풍통보를 모방한 주화가 나왔으며,그 후 1659년에 3종류의 원풍통보 모방품들이 나왔다.

 

그러나 그 주화들은 중국 것과는 조금 다르게 주조되어 판별이 아주 쉽게 되고 있다. 그것이 일명 나가사키전으로 상당히 초고가로 나와 있다. 특히 모전 같은 것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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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貨泉 ]

중국 왕망대(王莽代)에 제조된 동전(銅錢)으로 우리 나라 초기철기시대에도 사용되었던 화폐. 30여 종의 왕망전(王莽錢) 중 하나이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는 천봉원년(天鳳元年 : 서기 14)에 화포(貨布)와 함께 처음으로 주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서≫ 왕망전에는 지황원년(地皇元年 : 서기 20)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원전(圓錢)의 형태로 내부에 네모난 구멍〔方孔〕이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자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오수전(五銖錢)보다 약간 작은 지름 1촌(약 2.25㎝)이며, 무게는 5수(銖: 5수는 약 3.19g)이다.

왕망대에는 10여 년(서기 7∼23)의 짧은 기간동안에 전후 4차례의 폐제개혁(幣制改革)이 단행되어 모두 37종의 화폐가 주조, 발행되었다.

제1차 폐제개혁 때에는 거섭(居攝) 2년(서기 7)에 대천오십(大泉五十)·착도(錯刀)·계도(契刀) 등을 주조해 전대(前代)의 오수와 병용하였다. 제2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원년(始建國元年 : 9)에 대천오십만을 남기고 도폐류(刀幣類) 및 오수를 폐지하였고, 따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하였다.

제3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2년에 보화제(寶貨制)를 채용했으며, 대포황천(大布黃千) 등의 포화십품(布貨十品) 등을 주조하였다. 마지막 제4차 개혁 때에는 천풍원년(天風元年 : 서기 14)에 새로이 화천과 화포를 주조하였다.

왕망전의 특징은 주조기술이 정교하고 미려하며 동질(銅質)이 양호한 점이다. 유통연대는 후한 광무화건무16년 (後漢光武華建武十六年 서기 40)에 다시 오수전이 부활할 때까지가 정식으로 유통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상당기간 비교적 많이 통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한 유적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화천과 같이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류가 출토되는 경우, 그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당시 중국과 한반도가 하나의 교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中國古代的錢幣(吳榮會, 考古通訊 56-4, 1956)
≪참고문헌≫ 中國歷代貨幣(北京, 1982)

신나라

(新, 8년~23년)은 전한(前漢)의 외척 왕망(王莽)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흥한의 기치를 내세운 후한에게 멸망한다.

왕망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족이었다.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인 왕정군(王政君, 또는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숙부인 왕망이 계속되는 어린 황제들의 즉위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BC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왕을

죽인 다음 2세(歲)의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황제에 즉위한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井田法)

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과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도(專賣制度)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왕망은 토지의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의 정책을 폈으나,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흉노(匈奴)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잦은 재해(재위 2, 5, 11년의 황하 범람)와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적미(赤眉) ·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15년 만에 적미군(赤眉軍)의 침공으로 왕망은 죽임을 당하고 신 왕조는 멸망

하였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집권하였다.

신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 호

재위기간

제1대

-

가황제(假皇帝)

(섭황제<攝皇帝>

건흥황제<建興皇帝>)

왕망

(王莽)

시건국(始建國) 9년 ~ 13년

천봉(天鳳) 14년 ~ 19년

지황(地皇) 20년 ~ 23년

8년

~ 23년


 

 

 

 

 

 

 

 

 

 

 

 

 

 

별전이나 열쇠패, 당오전, 당백전 등 엽전에 채색을 하는것은 시각적으로 보기 좋기 위한것도 있겠지만 오행사상에 입각한 채색이란 것을 알려드립니다.


오행의 색상과 방위와 계절의 상징을 표로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기본빛깔은 5색이며 이를 혼합해서 수많은 빛깔을 낸다. 5색은 청·적·백·흑·황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 〈잡찬집(雜纂集)〉에 단청의 5색은 오행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청(靑)은 동(東)이며 용(龍)이고 계절로 봄[春]이며 5행으로 목(木)이다.

적(赤)은 남(南)이며 주작[雀]이고 계절로 여름[夏]이며 5행으로 화(火)다.

백(白)은 서(西)이며 호랑이[虎]이고 계절로 가을[秋]이며 5행으로 금(金)이다.

흑(黑)은 북(北)이며 현무(玄武)이고 계절로 겨울[冬]이며 5행으로 수(水)이다.

황(黃)은 중앙이며 계절로 토용(土用:환절기에 해당)이며 5행으로 토(土)이다.

위에 보듯이 단청의 오행사상에는 현세의 강녕(康寧)과 내세의 기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설명에 있듯이 근대에 와서는 단청이라는 개념이 건축물에 채색 하는 일 또는 그 상태를 일컬어 한정하여 쓰여지는 경향이 있으나 원래의 개념으로 되돌아가 우리가 흔히 엽전 채색을 당채(唐彩)라고 하고 있는것을 단청(丹靑)이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통용전 중 상태양호한 당백전 소장품

          고형틀에서 떼어낸 자국(우측중간)                                 두께  30mm

 위 중간은 백동, 오른쪽 1개는 가품이며 당백전 재질의 다양함(백동,황동,적동)을 한눈에 볼수 있음 

 왼쪽 맨위 1개(당채) 및 오른쪽 중간에 있는 1개(가품) 제외하고는 맷돌 출신 

위에 있는 당백전을 옆에서 본 모습 (동일한 크기인데 각도를 잡았더니 탑모양이 되었음)

 常平通寶 當百 加工錢 50種組  화동양행 낙찰가  12,200,000원

 

 

엽전 읽는 순서(order of reading)

 

○ 대독 : 읽는 순서가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기준으로 위에서 아래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대칭되게 읽는 방법

○ 회독 : 읽는 순서가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기준으로 위에서 시계

              반대방향이나 시계방향으로 읽어가는 방법으로서 대개

              동양권은 시계방향이 일반적이다.

 

글자의 위치와 서체에 따라 대독해서(對讀楷書), 회독해서(回讀楷書), 회독전서(回讀篆書), 회독팔분서(回讀八分書), 회독행서(回讀行書)등 5종류로 세분된다.

 

 

서체 書體 (a calligraphic style)

 

○ 동일한 엽전이라도 종류에 따라서 글자의 체형에 따라 아래와 같은 서체로 분류된다.

 

1) 해서체(楷書體)

후한시대(後漢時代)에 전대(前代)의 예서(隸書)를 좀더 유연하고 쓰기 쉬운 형태로 단순화시켜 발전시킨 중국 서체여서 방정하고 당나라 때는 예서라고 불렀으나 현재는 해서라고 한다. 주로 공문서에 이용된 양식이며,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이다.

 

2) 예서체(隸書體)

전서(篆書)를 간략화한 것으로 좌서(左書)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중국이 감옥에서 종사하는 사무원들의 문서가 번잡한 것을 줄이기 위해 개선하여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예서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대(漢代)에 공식문자로 통용되었다. 글자체의 삐침이 없는 소박한 서체가 특징이며, 후에 더욱 유연하고 매끄러운 서체로 변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완당 김정희의 독특한 예서와 이광사의 예서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3) 팔분서체(八分書體)

예서체와 전서체를 2:8로 혼합한 형태의 글자체로 체형에서 오는 미려한 멋은 안정감과 세련된 멋이 곁들여져 엽전을 수집하는 수집가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서체이다.

 

4) 행서체(行書體)

전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의 글자체로서 해서와 거의 동시에 생겨나서 발전되었으며, 흘린 경향이 약간 나타나는 글자체이다.

 

엄격히 구분 한다면 행서의 근원은 초서(草書)이다. 다만 초서는 자체(字體)가 너무 간략한 탓으로 판독하기가 힘든 험이 있어 이런 결점을 보안하기 위해 예서의 형태에 근접시켜 놓은 것이 행서였던 것이다. 청나라 초기와 중기에 비학의 풍토가 일어나면서 다시 문인묵객의 작품에 전서와 예서가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5) 전서체(篆書體)

대전과 소전으로 나뉜다.

 

대전은 주문(주문)이라고도 하는데 주나라 대 사주(史주)가 문자의 짜임을 실용적으로 간소화시켰으므로 붙여졌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문자의 통일을 꾀할 때에 李斯가 대전의 서체를 더 간략하게 만들었는데 그 서체가 소전이다.

 

소전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진시황의 공적을 기록한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비가 있다. 소전은 모두 원필이며 자형이 위 아래로 길다.

 

6) 초서체(草書體)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서, 중국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전한(前漢) 무렵, 전서의 필기체로서, 고초(古草)가 있고, 후한(後漢) 초기에 장초(章草)가 생겼으나 이것은 예서의 자획을 간략하게 한 것이며, 붓을 치키는 팔분(八分)의 필법을 가진 기복(起伏)이 심한 것이었다. 왕희지나 그의 흐름을 따르는 서가들에 의해서, 간략 ·민속한 필기체라는 편리성보다도 초서 독특한 미가 발휘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더욱 흘려 쓴 체가 발달되었다. 또한 초서를 해서의 흘림글씨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해서는 초서보다 후에 성립된 것이다.

 

 

엽전 발행구분(issue type of brass coin)

 

1) 관주전(官鑄錢) : 관청에서 합법적으로 제작한 화폐

2) 민주전(民官錢) : 개인이 합법성을 인정받아 제작한 화폐

3) 사주전(私鑄錢) : 개인이 합법성을 인정받지 않고 제작한 화폐

4) 통용전(通用錢) : 국민이 사용한 화폐

5) 시주전(試鑄錢) : 시험적으로 제작한 화폐

6) 모전(母錢) : 통용전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화폐

 

엽전의 가격은 얼마 정도인가 ? 

 

고려시절 엽전중의 해동원보, 구한국시대의 시주화 및 금화

대한민국 5천년 기념금화 등은 천만원을 훌쩍 넘는것들입니다.

 

기타 수량이 많은 엽전은 상태가 양호해도 500원부터 4000원정도에

많이 거래되며 마음에 드는 정도는 1만원에서 3만원정도 입니다만,

비싼 것은 몇백만원으로 가격이 높아 일반 수집가는 소장하기가 어렵다고 보셔야 합니다.

 

조선 말 구한국시대 우리나라 최초화폐는 수천만원에 거래된다. 10문 청동화는 2007년 화동옥션에서 35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대부분의 수집품은 오래될수록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오래됐다고 해서 모두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엽전’인 상평통보는 상태나 액면가에 따라 1000원 미만에 거래되기도 한다. 흔한 만큼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실물은 존재하지않으나 문헌상에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철전)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기자조선 흥평왕 9년 (BC958년)의 자모전(子母錢)입니다.

 

우리나라의 해동통보는 제작연대가 확실하며 본격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동전(銅錢)으로 숙종 7년(1102)에 제정된 고주법(鼓鑄法)에 의해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주조되었다.

 

송(宋)·요(遼)의 화폐사용을 본받아 만들었는데, 유통의 활성화를 위해 해동통보 1만 5,000관을 주조하여 재추(宰樞)·양반·군인 등에게 나눠주었고, 개경(開京)에 주점과 점포를 설치해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고액상거래에는 가치척도가 높은 은병을 사용하게 되고, 소액상거래에는 주로 해동통보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명목화폐인 동전을 수용할 사회·경제적 조건이 미비하였고, 화폐가치에 대한 인식부족 등으로 예종대에 이르러서는 해동통보를 비롯한 각종 동전의 유통이 중단되었다.

  

상평통보 / 조선시대의 화폐.

 

화폐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었으며, 모양은 둥근 엽전으로 가운데에는 정사각형의 구멍을 뚫고, 앞면에는 구멍을 둘러싸고 상하좌우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는 한자를 한 자씩 찍었으며, 뒷면의 구멍 위에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박았다.

 

1633년(인조 11) 김신국(金藎國)·김육(金堉)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하였다. 그후 1678년(숙종 4) 정월에 다시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유통하게 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상평통보 단자전 주전소별 분류

                                                                       (기록은 가나다 순)

순서

뒷면

주전소

비   고

한자

한글

1

江原監營

강원감사가 사무보던 관아

2

開成管理營

개성을 관리하던 관아

3

司僕寺

궁중의 가마, 말, 목장을 관리하는 관아

4

京畿監營

경기감사가 사무보던 관아

5

京水

경수

京畿監營

경기감사가 사무보던 관아

6

工曹

산림·수리·교통·건축·공예품제작의 일을 맡은 관청

7

廣州管理營

 

8

武備司

 

9

兵曹

 

10

備邊司

 

11

慶尙監營

 

12

尙左

상좌

慶尙左營

 

13

尙右

상우

慶常右營

 

14

尙水

상수

慶尙水營

 

15

宣惠廳

 

16

水原管理營

 

17

守禦廳

 

18

御營廳

 

19

原州管理營

 

20

全羅監營

 

21

全左

전좌

全羅左營

 

22

全右

전우

全羅右營

 

23

全兵

전병

全羅兵營

 

24

昌原管理營

 

25

精抄廳

 

26

摠戎廳

 

27

忠淸監營

 

28

統營管理營

 

29

平安監營

 

30

平兵

평병

平安兵營

 

31

咸鏡監營

 

32

咸南

함남

咸鏡南營

 

33

咸北

함북

咸鏡北營

 

34

海州管理營

 

35

糧餉廳

 

36

戶曹

 

37

黃海監營

 

38

訓練都監

 


 

상평통보 당이전 하부이자전 주전소별 분류

                                                                         (기록은 가나다 순)

순서

뒷면

주전소

비   고

한자

한글

1

강원감영

 

2

개성관리영

 

3

司僕司

 

4

京水

경수

京畿監營

 

5

工曹

 

6

廣州管理營

 

7

武備司

 

8

兵曹

 

9

備邊司

 

10

慶尙監營

 

11

尙左

상좌

慶尙左營

 

12

尙右

상우

慶常右營

 

13

尙水

상수

慶尙水營

 

14

宣惠廳

 

15

水原管理營

 

16

守禦廳

 

17

御營廳

 

18

原州管理營

 

19

全羅監營

 

20

全兵

전병

全羅兵營

 

21

賑恤廳

 

22

精抄廳

 

23

忠淸監營

 

24

統營管理營

 

25

平安監營

 

26

平兵

평병

平安兵營

 

27

咸鏡監營

 

28

海州管理營

 

29

糧餉廳

 

30

戶曹

 

31

黃海監營

 

32

訓練都監

 


 

상평통보 배면(뒷면) 상부에 나타난 문자는 엽전의 질이 저하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주전 발행기관의 약자로


호(戶)는 호조, 훈(訓)은 훈련도감, 평(平)은 평안감영으로 발행 관청별 주전소 표시가 다양하며,

 

배면하부에 있는 문자 또는 좌부우부에 있는 부호, 숫자, 문자 등은 주전소의 주전가마(노야)를 표시한 것으로 여러 개의 노야를 한 가마의 문자나 부호로 표시하기도 하였으며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상평통보는 무배자전, 단자전, 당2전 하부 2자전, 당2전 하부 천자문순전, 중형전, 당1전, 당5전, 당백전 등으로 구분됩니다.

 

 구 한국은행 1원권(화홍문)

                       제조사 : 일본 대장성 인쇄국

                       발행년도 : 1910.12.21   크기 : 131.5x73mm

 

 

 

1972년 한국은행은 앞면에는 석굴암을 뒷면에는 불국사를 그린 만원권을 발행

키로 결정했으나 종교계의 거센 반발과 여론의 부정적 흐름에 따라 발행이 취소

되었다.  위 사진 은행권(시쇄품)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명이 써있다.

 

일본금권 1엔 일본 은행태환권(1916년발행) 

  

조선은행권 100원 (일본 칠복신중 수노인 : 김윤식의 초상을 모델로 그림)

 조선은행(朝鮮銀行) 100원권 지폐 (1905-1945) 1947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

        

187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황해도 암행어사,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1881년(고종 18년) 영선사로 청나라에 파견됐다.

 

1882년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집정을 배척하는 민씨 일파와 결탁하여 흥선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시키게 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전권대사 자격으로 러시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1908년 중추원 의장을 역임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인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박탈당하였다. 한일 병합 당시 “불가불가”(不可不可)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소극적인 반대를 표명했다. 당시 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보냈다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2개월 간 투옥되었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85세의 고령임을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 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1916년 박제순의 뒤를 이어 경학원 대제학을 지낸 것 외에는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김윤식 사망 후에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운동 진영이 분열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코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화폐 경매사이트에 나왔던 엽전꾸러미  

 조선시대 상평통보 1,004종 보품-미품 100만원

당 1전 789종=훈자 181종. 호자 241종. 개자-경자 등등 357종

당2전 109종. 당 5전 103종. 당 100전 3종


 
 

 고종 19년 (1882년)
대동전 청색칠보 3전
서기 1651년,1735년, 1792년 설
십전통보
 인조 11년 (서기1633년??)
조선통보  3전


 대조선개국 495년 (서기1886년)
10환 경성전환국 제조
 대한제국 광무 5년 (서기1901년)
독수리 반원
 대한제국 융희 3년 (서기1909년)
봉황새 1전

 

 고종 3년 (서기1866년)
상평통보 당100전
 숙종 5년 (서기1679년)
상평통보 당2전
숙종 4년 (서기1678년)
상평통보 당1전

 



 서기 1945년 발행
조선은행 을권 100원
 서기 1915년 발행
조선은행 금권 5원
 서기 1904년 발행
제일은행 구권 1원
서기 1910년 12월 21일 발행
한국은행 1원
 서기 1932년 6월1일 발행
조선은행 10원
 서기 1947년 6월 3일 발행
조선은행 100원



 서기 1962년 5월 16일 발행
한국은행 100환
서기 1962년 6월 10일 발행
한국은행 100원
서기 1969년 3월 21일 발행
한국은행 50원



 서기 1962년 6월 10일 발행
영국인쇄 시리즈 (10원)
 서기 1962년 6월 10일 발행
영국인쇄 시리즈 (5원)
 서기 1962년 6월 10일 발행
영국인쇄 시리즈 (1원)

 






동국중보[東國重寶]
(998~1097년)
동국중보[東國重寶]
(998~1097년)
해동통보[海東通寶]
(1097~1105년)
삼한통보[三韓通寶]
(1097~1105년)
 
조선통보[朝鮮通寶]
(1633년)
상평통보[常平通寶]
(1633년)
상평통보[常平通寶]
(1633년)
상평통보[常平通寶]
(1633년)
상평통보[常平通寶]
(1633년)
 
 당오전[當五錢]
(고종 20년 이후)
당오전[當五錢]
(1883년)
당오전[當五錢]
(1883년)
당일전[當一錢]
(1678년)
당백전[當百錢]
(고종3년 1866년)
모전[母錢]
(1678년)
십전통보[十錢通寶]
(1651년)
십전통보[十錢通寶]
(1651년)
압인화(시주화)압인화(시주화)오문 청동화[五文 靑銅貨 太極徽章]
(개국497년, 서기1888년)
 
십문 청동화[十文 靑銅貨 太極徽章]
(개국497년, 서기1888년)
닷량 은화[五兩銀貨]
(개국 501년, 서기 1892년)
 

한국은행 다 1원 주화
(서기 1983년)
한국은행 다 5원 주화
(서기 1983년)
한국은행 가 10원 주화
(서기 1966년)


한국은행 다 10원 주화
(서기 1983년)
한국은행 가 50원 주화
(서기 1972년)
한국은행 가 100원 주화
(서기 1970년)


한국은행 나 100원 주화
(서기 1983년)
한국은행 500원 주화
(서기 1982년)
현행주화 프루프세트





일본제일은행 1원권 구권
(광무6년, 서기1902년)
일본제일은행 10원권 신권
(육희3년, 서기1909년)
일본제일은행 1원권 신권
(육희2년, 서기1908년)




조선은행 100원권
(서기1914년)
조선은행 10원권
(서기1915년)
조선은행 5원권
(서기1915년)




조선은행 1원권
(서기1915년)
조선은행 을 100원권
(서기1945년)
조선은행 갑 100원권
(서기1945년)




한국은행 개 500원권
(서기1961년)
한국은행 1000원권
(1953년)
한국은행 100원권
(서기1953년)




한국은행 신 100원권1[黃色紙]
(서기1953년)
한국은행 개 갑 100원권
(서기1962년)
한국은행 나 100원권
(1962년)
 
 
 영제set[英國에서 인쇄]
(1962년 화폐 개혁)




한국은행 가 10원권
(서기1962년)
한국은행 가 50원 권
(서기1962년)
한국은행 나 50원권
(1969년)




한국은행 다 100원권
(서기1965년)
한국은행 가 500원권
(서기1962년)
한국은행 나 500원권
(서기1966년)




한국은행 다 500원권
(서기1973년)
한국은행 가 1000원권
(서기1975년)
한국은행 나 1000원권
(1983년)




한국은행 나 1000원권
2연 연결 은행권

(서기2001년)
한국은행 가 5000원권
(1972년)
한국은행 나 5000원권
(서기1977년)




한국은행 다 5000원권
(서기1983년)
한국은행 가 10000원권
(서기1973년)
한국은행 나 10000원권
(1979년)




한국은행 다 10000원권
(서기1983년)
한국은행 라 10000원권
(서기1994년)

한국은행 마 10000원권
(2000년)


 

                  

십장생[吾君萬年, 壽富多男]     다섯마리박쥐[주머니형열쇠牌]              쌍어[雙魚]

 

                            

당초문열쇠패[唐草紋열쇠牌]  영신배명자구다복[永言配命自求多福]           쌍[雙龍]

 

                              

쌍동[雙童]                              박쥐형열쇠패[女人 腰飾形]          상평통보열쇠패[常平通寶열쇠牌]

 

                    

쌍용쌍봉열쇠패[雙龍雙鳳열쇠牌]      쌍희열쇠패[열쇠牌]      화연열쇠패[花緣열쇠牌]

 


   


 

90억원 호가 희귀 동전 세트 화제

 

 


 

 

 


영국의 더 타임스가 2일자 기사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희귀 동전 세트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90억원에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

1804년 은동전을 포함한 11개 동전 세트를 구입한 사람은 수집가인 스티븐 콘터시. 동전의 이전 주인은

2001년 400만 달러에 구입했다가 이번에 콘터시에게 850만 달러(약 88억원)에 되팔았다.

동전 세트는 지난 1836년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이 샴(현재의 태국)의 왕에게 기증했던 것인데, 결국은

미국인 갑부의 손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

스티븐 콘터시는 이 동전 세트 덕분에 당시 신생 국가인 미국의 아시아 교역 길이 열렸다면서 동전 세트는

단순한 동전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라고 평했다.


 

한국의 기념주화

 

비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주화로 대접받는 것은 1896년에 만들어진

건양중보(建陽重寶)라는 게 통설이다.

 

건양중보는 개화파인 김홍집 내각이 정권을 잡은 후 일본을 등에 업고 연호를

건양으로 사용하면서 만든 액면가 5전짜리의 백동화다.

 

발행과 동시에 親露派에 의해 김홍집이 피살됨으로써 건양중보는 반역정권이

만든 돈이라 하여 시중에 유통되지 않고 역사속에 묻혀버렸지만 몇 개가 남아

있어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주화는 70년 3월에 발행한 대한민국

5000년 영광사 기념주화.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화

 

       

 1970년대 초에 100여만원 하던 12종 금은화 세트의 거래 가격은 수직상승을  거듭,

약3,000만원을 호가하게 됩니다.

금화6종, 은화6종으로 구성된 이 기념화의 도안의 소재는 세종대왕이나 고려청자, 신라금관등

한국적인 미를 상징하는 것들이며, 유일하게 금,은화 양쪽에 등장한 도 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으로서 당시의 정치적 배경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박정희 주화의 뒷면 도안은 다른 주화들과는 달리 대통령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금화명세

도안

액면

중량

소재

직경

세종대왕

25,000원

96.8gr

금90%

60mm

신라금관

20,000원

77.44gr

금90%

55mm

박정희

10,000원

38.72gr

금90%

40mm

거북선

5,000원

19.36gr

금90%

32mm

선덕여왕, 불국사

2,500원

9.68gr

금90%

26mm

남대문

1,000원

3.87gr

금90%

16mm


 

은화명세

도안

액면

중량

소재

직경

UN참전용사

1,000원

56.02gr

은99.9%

55mm

석굴암보살상

500원

28.01gr

은99.9%

40mm

박정희

250원

14.00gr

은99.9%

30mm

고려청자

200원

11.2gr

은99.9%

28mm

이순신

100원

5.6gr

은99.9%

21mm

유관순

50원

2.8gr

은99.9%

 


 

당시 우리정부가 외화획득의 수단으로 미국의 세계적인 화폐상인 ‘이탈캄비오’

와 계약해서 (기념주화 제조는 독일의 주화 제조업체가 맡고 매는 당시세계적인

화페판매망을 갖고 있는 이탈리아 이탈캄비오가 대행함)만든 것으로 금화6종,

은화6종 등 모두 12종으로 전량을 국내시판은 하지 않고 미국과유럽에서만 팔았다.

 

발행물량은 금은화12종 한세트로 된 것이 350세트, 은화6종을 한세트로 한 것이

5000세트 발행. 그후 75년 8월 광복30주년 기념주화이다.

 

            건양통보                          건양(조)통보               대조선건양원년 중보           5전

            대조선건양원년중보                   5전                    대조선건양원년 중보           5전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조선은 청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즉 형식적으로 조선은 청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조선 왕실 고유의 새로운 연호인 '건양' 써서 발행한 기념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화라

할 수 있는 건양중보건양통보이다.

 

                                    건양통보 - 일전(建陽通寶-壹錢)

 

건양전은 5전 백동 시주화 3종과 5푼 청동화 등 4종이 발행되었으며, 액면의 주변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만 보인다는 불로초로 디자인했다.

 

건양통보 5푼 시주화는 엽전 모양으로 주조되어 앞면은 대독으로 되어있고 뒷면 윗부분에는 '五' 아래에는

'分'이 쓰여 있으며 왼쪽에 월표(달 모양 표시)가 있다.또 건양 원년 중보 시주화 3종의 경우, 하나는 앞면에

표시된 '五錢'의 액면에 원이 둘러쳐져 있고 뒷면에 '大朝鮮國 建陽 元年 重寶'라 쓰여 잇으며 또 하나는

액면을 둘러싼 원이 없고 가장 귀한 마지막 하나는 뒷면이 '大朝鮮 建陽 元年 重寶'로 國을 생략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주화들이 근대 주화 제조 방식인 압인이 아니라 주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해방'

기념하여 조상 전래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인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유자후의 <조선화폐고>에 의하면

이 시주화들은 1896년 1월1일부터 2월 말일 사이에 주조되었다고 한다. 이 주화들은 진귀주화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시주화라는 것 이외에 당시의 정치적 요인 때문이다.

 

당시 친러파가 득세하면서 김홍집 총리 대신이 살해당하는 정변이 있은지 여섯달 후인 건양 원년  8월에

건양이란 연호는 역적이 정한 것이라 하여 폐하고 연호를 '광무' 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건양전

역적의 돈이 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우리나라 기념주화 발행 현황


구 분

발행년도

종류 및 액면가

최초 판매금액(원)

소 재(%)

광복 30 주년

1975 년

백동 100 원화

100

Cu75, Ni25

제 42회 세계사격 선수권 대회

1978 년

은 5,000 원화

5,000

Ag95, Cu5

백동 500 원화

500

Cu75, Ni25

제 5 공화국

1981년

은 20,000 원화

20,000

Ag90, Cu10

니켈 1,000 원화

1,000

Ni100

백동 100 원화

100

Cu75, Ni25

올림픽 유치기념(1차)

1982 년

은 20,000 원화

30,000

Ag90, Cu10

은 10,000 원화

15,000

Ag90, Cu10

백동 1,000 원화

1,200

Cu75, Ni25

올림픽 유치기념(2차)

1983 년

은 20,000 원화

30,000

Ag90, Cu10

은 10,000 원화

15,000

Ag90, Cu10

백동 1,000 원화

1,200

Cu75, Ni25

천주교 전래 200 주년

1984 년

은 10,000 원화

10,000

Ag50, Cu50

백동 1,000 원화

1,000

Cu75, Ni25

아시아 경기 대회

1986 년

은 20,000 원화

30,000

Ag90, Cu10

은 10,000 원화

15,000

Ag90, Cu10

백동 1,000 원화

1,200

Cu75, Ni25

서울 올림픽 대회

1987 년~1988 년

금 50,000 원화

770,000

Ag93, Ag3,Cu4

금 25,000 원화

350,000

Ag93, Ag3,Cu4

은 10,000 원화

28,000

Ag93, Cu7

은 5,000 원화

14,000

Ag93, Cu7

니켈 2,000 원화

2,400

Ni100

백동 1,000 원화

1,200

Cu75, Ni25

대전 세계박람회   

1993 년

금 50,000 원화

600,000

Ag93, Ag3,Cu4

금 25,000 원화

273,000

Ag93, Ag3,Cu4

은 10,000 원화

30,000

Ag93, Cu7

은 5,000 원화

15,000

Ag93, Cu7

적동 1,000 원화

2,000

Cu92, Ni6,Al2

광복 50 주년

1995 년

은 10,000 원화

10,000

Ag90, Cu10

니켈 5,000 원화

5,000

Ni100

유엔 창설 50 주년

1995 년

백동 1,000 원화

1,000

Cu75, Ni25

정부 수립 50 주년

1998 년

은 10,000 원화

10,000

Ag92.5, Cu7.5


 

 

우리집 복(福) 금섬(金蟾) : 족 복두꺼비  

 

  삼족 재물지키미 두꺼비 (엽전을 입에 물고있다)

 

동전을 물고있거나 지폐를 물고 있는 것들도 있다.

중국에서는 이 삼족 두꺼비가 재물을 갖다 준다고 한다.

황금색은  재물의 색깔이다. 

손님을 기다릴때는 두꺼비가 앉는 방향을 현관을 향하게 둔다.

손님이 나가면 집 안을 향하게 둡니다.

재물을 지킨다는 관습이다.

  

 

삼족오-두꺼비 신화가 중국문화의 산물이니 아니니 하는 주장 또한중화문명 중심주의적인 사고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건 고구려에서 도입해 활용했다면 고구려 문화의 요소라고 보아야 할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데 삼족오와 두꺼비가 대표하는 신화상징은 중국대륙이나 고구려 문화권은 물론이고 신라, 백제에서도 발견된다.

 

무령왕릉 출토 허리띠에서 확인되는 두꺼비 문양,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자주 출토되는 각종 동물 토우 중의 두꺼비 등은 삼족오-두꺼비 신앙이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만의 전매특허가 결코 될 수 없음은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일본열도 고대문화에서도 이런 요소가 더러 발견된다.

따라서 삼족오-두꺼비는 고구려만의 신화상징이 결코 될 수 없으며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통의 유산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강희년제(康熙年製) 1662-1722

강희(康熙)는 청나라 성조 강희제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61년 간 쓰인 연호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쓰인 연호로 중국 역대 왕조 중 마지막 전성기인 강건성세(康乾盛世)를 연 치세이기도 하다. 강희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하며 실제로 강희제는 자신의 치세를 중국의 평화로운 조화를 위해 온 힘을 기울여서 오배와 삼번의 난 진압, 대만 수복, 몽골과 티베트 원정 등으로 청나라의 국위를 세웠다.

 

 招財進寶(초재진보)

초재진보는 "재화를 부르고 보배가 있는 곳으로 나아간다"는 뜻

 

초재진보(招財進寶) 자를 한자로 합성하여 만든 글자입니다

한자는 회의(이미 만들어진 자를 두 자 이상 결합하여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방법)라는 조자 법으로 새로운 글자를 만들수 있으므로 이런 형태의 글자도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상점이나 백화점 주점 등의 실내에는 작품과 같이 만들어 장식해 놓은것을 흔히 볼수 있다.

 

 

 

 

 

관광 기념품 초재진보 (위앞면, 아래뒷면)

 

 

 (부를 초), (재물 재), (나아갈 진), (보배 보)

4글자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재물을 불러들이고 보배에 나아간다 ㅡ 곧 이것도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청나라 광서연간에 발행된 光緖元寶 招財進寶 참고품

 

 

 

 중국전설에 나오는 삼족복두꺼비로 재물을 불러오는 상상의

동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삼족 복두꺼비는 결코 보통 두꺼비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두꺼비는 4개의 다리를 가졌으나

다리가 3개을 가져 삼족복두꺼비로 알려졌습니다.

이 삼족복두꺼비는 유해신선(유해선인) 옆에 자리하는 신령한 동물이며, 민간에선 집안의

재운을 증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왕재의 신령한 동물로 여깁니다.

* 유해 선인 : 정확하게는 유해섬. 당나라 오대 사람으로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짐.

                    긴 머리를 뒤로 내려뜨리고 앞머리는 이마 앞에 가지런히 자르고

                    다녔다고 함 

이 신수를 왕재방에 기술적으로 놓아야 그의 입에서 동전을 토해냅니다.

이 신수가 토해내는 돈이 곧 왕재이니 입을 집안을 향하게 하여 재운을 증강 시킵니다.

만일 입을 밖으로 향하게 하면 집안의 재물이 밖으로 나가게 되니 이 신수를 놓을 때는

입이 집안을 향하도록 해야지 밖을 향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삼족 복두꺼비님 돈 많이 벌어 좋은 일 많이 하세요.

 

 

 

 

 

금섬(삼족 복두꺼비) 자사(紫砂 : 자주빛 모래)로 만든 두꺼비

입니다.

금섬의 유래는 도교에서 시작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북경도사님

칼럼을 인용하겠습니다.

 

북경도사님 인용글 - "금섬은 요물로 법력이 강하고 재물을 매우 좋아했으며, 인간 세상에 자주 해를 가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도교 수행자인 유해섬에 의해서 수복을 당합니다.

 

유해섬은 재물에 욕심이 없고 인간세상을 돕는것을 아주 좋아 했었는데, 금섬의 천성이 금은 재물을 좋아하고 불러 모으는 것에 탁월하여, 유해섬이 인간세상을 재물로 돕는것에 크게 일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 전설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발달린 금섬이

재물을 불러 모와주는 신성한 요물로 여겨지게 됩니다.

요즘에는 집안의 금고위, 장사를 하는 사람은 문앞에 놓아두면,

매일 매일 재물복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섬의 생김새가 좀 이상해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면서 차를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리 쯤은 기르는 애완동물 같은 존재입니다.  

금섬은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일종의 재신財神입니다. 그래서 차판 위에 금섬을 놓고 기르면 돈이 굴러들어온다는 생각이 있는 거지요.

(기른다 : 차를 마실때마다 찻물을 부어주면 찻물을 먹어 색상이 변하며 윤기가

             나고 오래되면 소장가치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삼족 금섬의 머리를 바깥으로 향하게 두고, 저녁에는 집안으로 머리를 돌려 놓은후, 유해선인이 도착했다고 외치면, 금섬이 주인이 도착했다는 목소리를 듣고 매우 기뻐하는 동시에, 낮에 물고 있던 재물을 바깥으로 내 뱉는다고 합니다.

금섬 있는 분들은 모두 "유해선인(劉海仙人) 도착 했다" 라고 외쳐 주세요 ! " 이상 북경도사님 글을 인용했습니다.

 

맘 편하게 기를 수 있는 금섬을 소개합니다.

지금까지 판매했던 범지봉작가의 금섬은 정말 명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지금 소개하는 금섬들은 범작가의 금섬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공예수준이나 니료에서 차이가 나고 가격은 많이 쌉니다. 

기르다 깨먹어도 가슴이 아주 많이 아프지는 않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두 마리는 그런대로 잘 만든 금섬입니다.

크기가 조금 차이가 납니다만, 1점에 3만원으로 소개되어 있네요. 

 이 두 마리는 가격이 위에 소개한 것의 반값입니다. 조금 멍청하면서 귀여운 맛이 있습니다. 

 

이런 금섬을 차판 위에 올려놓고 찻물을 부어주면 점점 찻물을 먹어서 보기 좋게 변합니다.

 

그런 걸 기른다고 하지요. 차인들이 이렇게 찻물을 부어 기르는 자사재료의 동물들을 중국에서 차총茶寵이라고 합니다.

애완동물을 중국어에서는 총물寵物이라고 하는데, 차인들의 애완동물이라는 뜻이지요.

 

 

 

이것은 범지봉 작가의 대표작인데 가격이 무척 비쌉니다.

환율변동과 상관없이 인민폐 3900元(약70만원)입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금섬(삼족 두꺼비) 이야기로는

삼국시대의 전쟁 종결 후 신라는 치욕적인공물 상납들을 해야만 했다.

 

그중 고구려의 국가 상징인 삼족오(해)와 삼족섬(달)이 있었으며

황금으로 만들어진 삼족섬이 공납물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삼족섬은 금섬이란 이름으로 돈을 먹고 살며 항문이 없어 뱉지는 못하는 영물로 중국인들에게 재복을 불러다 주는 신으로 남아 있다 한다.

 

 

 

 

우리 토속신앙 안에 부귀를 뜻하는 업신이 있는데 구렁이, 두꺼비,

돼지 등으로 형상화하여 이야기를 간혹 한다.

 

한 집안의 부귀영화를 책임지며 집 안의 부귀가 다해갈 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뒤 자신이 그 집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삼족금섬의 특징은 세발이며 엽전을 입에 물고 양어깨에 금전을

매고 있으며 등짝에는 북두칠성이 각인되어 있다.

 

 

금섬(金蟾)과 유해신선 이야기 


중국인들의 사상적(思想的)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는 도교(道敎)에서는 여러 종류의 재신(財神)들이 등장(登場)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도처(到處)에 재신을 모신 사당(祠堂)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금섬과 관련된 재신으로는 돈을 풀어 빈자(貧者)를 구제(救濟)하는 준재신(準財神)인 유해섬(劉海蟾)을 들 수 있습니다.


준재신準財神)은 재신(財神)의 봉호(封號)를 얻지 못한 신령(神靈)이지만 인간에게 일정한 재운(財運)을 가져올 수 있으며, 재신의 일부 직책(職責)을 담당(擔當)하고 있으므로 재신으로 간주(看做)되었는데 유해섬(劉海蟾)은 준재신(準財神)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유해섬은 전진교(全眞敎) 오조(五祖)의 하나로 이름은 조(操), 자(字)는 소원(昭遠), 또는 종성(宗成)이라고 합니다. 혹 이름은 철(哲), 자(字)는 원영(元英) 또는 현영(鉉英), 혹은 유해(劉海)라고 합니다. 오대(五代) 시기의 사람으로 연산(燕山 : 현재의 북경) 출신이며, 요나라에서 진사(進士)가 되어 훗날 승상(丞相)으로 연나라의 왕 유수광(劉守光)을 보좌하였으나 이후 여동빈(呂洞賓)을 만나 관직(官職)의 위태로움을 깨달아 재상(宰相)의 지위(地位)를 버리고 도사(道士)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호(道號)를 ‘해섬자(海蟾子)’라고 하며, 수도(修道)를 한 결과 신선(神仙)이 되어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에서 노닐었다고 합니다.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忽必烈)가 [해섬명오홍도진군(海蟾明悟弘道眞君)]으로 봉하였으며, 무종(武宗)은 [해섬명오홍도순우제군(海蟾明悟弘道純佑帝君)]으로 봉하였습니다. 이처럼 유해(劉海)는 깨달음을 얻은 도사로 본래는 재물(財物)과는 무관(無關)하였으나 재신이 된 것은 아마 그의 도호인 ‘해섬자(海蟾子)’로 말미암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꺼비는 용모(容貌)가 괴이(怪異)하고 분비물(分泌物)에 독을 품고 있어 사람에게 해로워 오독(五毒 : 전갈蝎, 뱀蛇, 지네蜈蚣, 도마뱀壁虎, 두꺼비蟾)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약재(藥材)로도 사용되어 병을 피하고, 사마(邪魔)를 진압(鎭壓)하며, 장생(長生)에 유익(有益)하고, 부귀(富貴)를 주관(主管)하는 상서(祥瑞)로운 동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두꺼비와 연계(連繫)되어 유해(劉海)는 ‘섬(蟾)’자가 들어간 도호로 유명하였으며, 또한 ‘유해희금섬(劉海戱金蟾),이라는 전설로 말미암아 재신(財神)의 지위(地位)로 격상(格上)되었다고 합니다.


유해가 희롱(戱弄)하고 있는 금섬(金蟾)은 영물(靈物)로 일반적인 두꺼비가 아니라 세 발을 가진 커다란 금섬이며, 세상에 매우 드물어 이것을 얻으면 부자(富者)가 된다고 합니다.


유해가 금섬을 희롱하면 금섬은 돈을 토해내었으며, 유해가 이르는 곳마다 돈을 풀어 수많은 빈자(貧者)를 구제(救濟)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존경(尊敬)하여 “활신선(活神仙 : 살아있는 신선)”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유해묘(劉海廟)를 짓고 이러한 이야기는 희곡(戱曲)으로 편집(編輯)되어 도처(到處)에서 공연(公演)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금섬의 유래(由來)는 도교(道敎)에서 시작되었는데 금섬은 항문(肛門)이 없어 구조적(構造的)으로 자기가 삼킨 것을 배설(排泄)할 수 없으므로 재물도 밖으로 새지 않고 뱃속에 차곡차곡 쌓인다고 하는데 금섬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입 외에는 구멍이 전혀 없습니다.


금섬은 요물(妖物)로 법력(法力)이 강하고, 재물(財物)을 매우 좋아했으며, 인간 세상에 자주 해(害)를 가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도교의 수행자(修行者)인 유해섬에게 복종(服從)을 당합니다.


유해섬은 재물에 욕심(慾心)이 없고. 인간세상을 돕는 것을 매우 좋아 했었는데 금섬의 천성(天性)이 금은(金銀)을 비롯한 재물을 좋아하고 불러 모으는 것에 탁월(卓越)하여 유해섬이 인간세상을 재물로 돕는 것에 크게 일조(一助)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 전설(傳說)은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물건이 뱃속에 쌓인다는 세 발 달린 금섬의 특이한 모습과 재신의 하나인 유해섬과의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재물을 불러 모아주는 신성한 요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금섬복지’(金蟾伏地)

 

삼성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세계적인 기업이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토속적인 이야깃거리를 많이 간직한 기업이다. 우리 기업 중에서도 삼성만큼 다양한 풍수설화(風水說話)를 지닌 기업도 드물 것이다. 삼성과 관련되는 대표적인 풍수설화가 ‘금섬복지’(金蟾伏地) 이야기다.

‘금섬복지’는 창업자인 이병철씨 선대의 묏자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섬’(蟾)은 두꺼비를 뜻한다. ‘금섬복지’는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자리이다. ‘금 두꺼비가 엎드려 있는 형상을 한 묏자리’에다가 이병철의 증조부 묘를 쓰면서 이 집안이 발복했다는 이야기가 풍수가에서 회자된다. 사연은 이렇다. 그 시대의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병철의 조부도 명당 신봉자였다.

 

조부는 자기 아버지, 즉 이병철의 증조부 유골을 궤짝에다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좋은 묏자리를 찾으면 그 자리에 쓰기 위해서였다. 10년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명당자리를 찾지 못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이란 경남 의령군 정곡면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 뒷산의 절에 놀러갔는데 스님을 만나서 선친 묏자리를 찾기 위해 10년을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 정성에 감복한 스님이 자리를 하나 알려줬다. 그 자리가 바로 동네 뒷산에 있던 ‘금섬복지’였다.

 

‘십년구산(十年求山)에 가후장(家後葬)’이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산을 보러 다녔지만 결국 자기 집 뒤에 묘를 썼다는 말이다. 이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가운데 국부(國富)가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병철과 이건희가 나왔다.

풍수가에서는 이 집안이 선대에 쌓은 적선과 명당의 결합으로 이처럼 국부가 나왔다고 믿는다. 

 

 

 

 

 

말이 나왔으니 國富 삼성그룹 발복의 근원인 이병철 증조부, 증조모 산소를 살펴 보자.

 

아래 사진은 경남 의령군 유곡면 마두리  대밭골에 있는 삼성그룹

창업주 故 이병철회장의 증조부모(이건희회장의 고조부모) 묘입니다.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해 있어 속사들의 눈에는 비혈지로 볼 것이나

보기드물게 맺은 속발 富貴地로 國富之地의 면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특히 당판 밑 좌선익 쪽으로 붙은 바위로 된 첩신귀(요성)이 압권이며, 진응수로 샘물이 솟고 있어 재물이 넘치는 대혈임을 증명해 주고 있습

니다.

* 요성(曜星) : 산형(山形)을 오행에 짝 짓거나 九星, 九曜에 짝지을 때에 붙이는

                     木形 木體를 이룬 것을 말한다.

* 오성(五星) : 산의 모양을 성(星)이나 요(曜)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금성 : 종(鐘)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생긴 산

                  목성 : 나무가 곧게 선것 같이 솟은 산

                  수성 : 꾸불 꾸불 물결처럼 뻗은 산

                  화성 : 불길처럼 뽀족이 솟은 산

                  토성 : 평평하고 벽돌 처럼 생긴 산

 

貼身鬼(첩신귀) : 혈상 어느 곳이라도 붙어서 생긴다. 생김새는 유방과 같다.

                        때로는 크게 생겨서 결혈하는 수도 있다. 귀성으로서 결혈돤 것은

                        전순(氈脣)이 분명해야 결혈이다.

귀성의 종류 : 三台鬼(삼태귀), 후장귀, 첩신귀, 일변귀, 양변귀로 귀한 오성의 귀가

                    있고 險(험)한 암석의 귀가 있다.

 

 

이병철 증조부 묘

청룡작국의 좌수도우, 우선룡이며, 卯입수 甲坐庚向입니다.

입향은 조안산이 아닌 가까운 앞쪽에 있는 옥인사를 바라보고 점혈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신의 배꼽에 해당하는 지점을 택하는 것을 점혈(명당에서 혈이 뭉친 한 지점을 찾는 것)이라 부른다.

 

풍수학의 고도의 테크닉이 구사되어야 하지만 초보자도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한다. 

1) 산등성에서 보아 우측 계곡이 넓고 깊으면 산등성의 왼쪽에 치우쳐 점혈하고, 좌측 계곡이 넓고

    깊으면 오른쪽에 치우쳐 점혈한다. 산등성에는 점혈하지 않는다. 
2) 산기슭이나 비탈에서는 되도록 그 중심부에 점혈한다. 양쪽 가로 치우치면 바람을 심하게 받는다. 

3) 공원묘지에서는 계곡을 메워 편편하게 고른 지역은 피한다. 생기를 받지 못하며 폭우시에는 휩쓸려

    버릴 위험이 크다. 
4) 주위에 다른 묘가 있다면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지기가 쇠약해져 있다. 
5) 땅을 넓게 파보아 잡돌이 없고 고운 흙이 비치는 곳을 점혈한다. 
6) 밭에서는 앞쪽에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아 물길이 둥글게 감싸안고 흐르는 지점과 뒷산에서 밭으로

    뻗어 내린 용맥을 찾아 그 일직선의 중심에 점혈한다. 
7) 바닷가나 큰 저수지가 앞에 있는 경우는 되도록 바다나 물이 적게 보이는 지점으로 점혈한다. 
8) 혈에서 보아 앞쪽에 흐르는 물이 되도록 굽어 흐르는 곳을 택한다. 앞쪽에서 보아 일직선으로 빠지

    는 곳과 물이 혈장으로 곧게 쳐들어오는 곳은 흉지이다. 
9) 주변의 산세가 혈장을 감싸안아 예를 표하는 곳이 좋고, 등을 돌리거나 배반한 형세이면 점혈하지

    못한다. 
 

묘는 오래된 돌을 다듬은 상석이 지킬 뿐 어떤 비석도 갖추지 않았다. 잘 뻗어온 용(龍)은 손사(巽巳 : 남동쪽) 방향에서 45도 각도로 60m 가량을 힘차게 내려오며 가파른 곳에서 갑묘(甲卯 :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로 휘어진 후 서쪽을 향해 치달아 묘좌유향(卯坐酉向)의 탱글탱글한 정혈(正穴)을 맺고 있다.


직선 거리로 5백m도 안되는 곳에 서있는 안산은 둥그런 삼태(三台)를 연상케 하는 노적단이요, 좌청룡(左靑龍)이 힘차게 뻗은 반면에 우백호(右白狐)는 약간 허전하여 눈에 띄는 결함을 안고 있다.

 

묘 앞의 여기(餘氣)는 좁은 듯하지만 하늘을 향하여 선 바위들이 절벽을 이루며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다.


물은 지척의 사병(巳丙 :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서 발원하여 구곡간장(九曲肝腸)처럼 돌고 돌아 신술(辛戌 : 북서) 방향으로 유곡천을 이루고 마침내 성산리에서 낙동강으로 빨려들어간다.

 

이것은 당나라 때 풍수지리학의 대가였던 양균송(楊筠松)의 길한 수법에 합치되어 대부(大富)를 이룰 자리였다.

 

 

 

 8~9부능선의 힘찬 기세로 쏟아져 내린 일맥이 급하게 그치며 결혈한

자리 혈장을 충분히 살펴보면 높은 곳에 결혈하기 위해 형성된 엄청난

암반으로 둘러쳐진 전순에 놀라게 된다.

 

진응수로 보이는 샘물

진응수란 땅속에서 샘솟는 물이 혈의 앞으로 물이 흐르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진짜의 의 혈을 맺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개 좋은 용은 기가 왕성하여 이미 결혈된 후에도 빼어난 기가 넘쳐 흘러 땅속에서 샘솟듯이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그 물맛이 맑고 감미로와야 한다.

 

봄, 여름에도 넘치지 않고, 가을 겨울에도 마르지 않고 웅덩이에 모여 흘러가지 아니하며 고요하며 물소리가 없어야 한다. 이것을 역시 신령스러운 땅속에서 샘솟는 물이라 한다. 이러한 곳은 “대귀(大貴)의 땅으로 삼공의 벼슬이 나온다”라고 한다. 진응수의 예로는 삼척의 준경묘, 인촌생가지, 한란묘 등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좌선익쪽 당판에 붙은 귀성과 그 위에 놓인 옥인사

좌측 선익이 강하게 발달이 되어 있고, 그 끝이 거대한 바위로 뭉쳐있는데 이는 귀성(또는 요성)으로 이 혈의 역량을 말해주는 것으로 혈을 맺고도 남는 여기가 대단함을 말해주고 있으며, 거기에다 어보에 버금가는 玉印을  바쳐들고 있으니 국부가 나올만한 자리

조안산 전경

조안산

이병철 증조모님 묘는 증조부 우측 50여 미터 위쪽 

  증조부 묘와 같이 경사지에 결혈한 자리

  입수처에 묵묘를 그대로 두고 용,사하였다.

  * 사(捨) : 취하여 쓰거나 내버림의 뜻보다는

     풍수지리설의 지상법(地相法) 기본용어로 용(龍)은 땅의 기복을 뜻하며 산맥의

     기복이 용과 같다는 뜻이며,

     사(砂)는 혈지(穴地) 부근의 산이나 언덕, 요지를 말하는 것으로 사지(砂地)의 뜻

      은 아니고 용혈이 지키고 있는 철지(凸地)를 가르킨다.

 

증조모 묘의 조안산 전경

안대는 이자리가 좋아 보임  * 안대(案對) : 직접(直接) 만남

* 안산(案山) : 혈(穴) 앞에 사(砂)의 일종으로 조금 낮고 작은 산

* 혈(穴) : 지룡(地龍)이 머물고 있는 생기(生氣)가 담긴 곳이며,

              흔히 용혈(龍穴)이라고 한다.

측면모습 : 증조부 묘와 같이 산진처(용진처) 급경사지에 결혈한 자리

 

고 이병철 회장의 증조부는 틀림 없이 남 모르는 덕(德)을 쌓았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 안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묘는 후손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그룹을 형성토록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삼성가(三星家)가 적수공권(赤手空拳)이나 다른 없었던 해방후의 이 사회에서 '독점 재벌'이라는 일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이 나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한 점은 불후의 업적이라 하겠다.

  

* 적수공권(赤手空拳) : 맨손과 맨주먹이라는 뜻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 ≒ 척수공권(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