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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수집방/국내주화,엽전

호대 당백전 궁금증 풀어보기

by 연송 김환수 2009. 10. 16.

당백전(當百錢)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아봅니다

 

정식(正式) 이름은 '호대(戶大) 당백전'으로 당백전(當百錢)은 조선

말기인 1866년(고종 3년)에 흥선 대원군이 부족한 국가 재원을 채우기 위해 주조한 화폐이다.

 

경복궁을 중수하는 데는 당시로 가히 천문학적인 경비가 소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병학(金炳學) 등의 건의로 주조에 들어가 그해 10월부터 사용하였다.

 

그러나 당시 화폐가치가 무려 20% 이상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발생

하자 이듬해 주조를 중단했다.

 

  당백전 모전 (크기 42mm) 

통용전 (크기 39mm-40mm)                                    모전 (크기 42mm)

당백전의 두께는 보통 25mm 이나 백동질의 당백에서는 30mm이상도 있습니다. (가품에서 40mm도 발견되는데 모전을 보고 가품을 제작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당백전 (백동재질)

 

조선시대의 당백전 한냥(100푼)을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되나요 ? 

 

당백전 한 냥은 엽전 백 푼과 맞먹던 돈으로

조선() 시대() 고종() 3년(1866)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만들었으며, 정식() 이름은 '호대() 당백전'입니다.

 

조선시대의 물가는 여러가지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추정해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당백전 1냥(100푼) = 현재 돈으로 약 2만원 정도 된다고 계산할수 있습니다.

이는 당백전의 가치가 하락된 인플레이션 이후 기준 입니다.

 

예전 화폐의 단위인 냥은 철전이 주조된 996년 고려성종때 부터인데, 그 이후 다양한 엽전이 주조되고 또 시대에 따라 화폐가치는 달라지니까 정확한 수치를 말하기는 힘들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조선후기 당백전 8냥이 쌀 1석에 해당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쌀 1석이 요즘 한 16만원쯤? 그럼 1냥은 약 2만원이되고 1000냥은 2000만원 정도의 가치가 되겠습니다. 

 1냥 = 10돈 = 37.500094g,    1냥 = 0.062498근,   1근 = 16.0006냥 

 

한냥은 큰돈으로 물가변동에 따라서 다르나 지금으로 치면 30~40만원 쯤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대원군의 실정으로(돈을 너무 많이 찍어냄) 화폐가치가 떨어지면서 1냥의 가치가 폭락하여 2만원까지 떨어진 것이지 실제 한냥이 2만원이 아닌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보조화폐가 있었습니다.

 

단위는 문이 있었고 말기에는 푼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중간에도 푼으로 속칭하기도 한듯함)

 

10문이 모이면 1전이라고 했습니다.

10전이 모이면 1냥이 되었는데... 즉 1냥 = 10전= 100푼(문)

1냥은 매우 큰돈이었습니다.(지금 돈으로 30~40만원)

당시는 큰 재산인 황소 한마리 가격이 50냥 지금 황소가격이 약 400만원에서 500만원 정도 하나요 

 

이후 당백전 가치하락으로 당전에서 땅전으로 다시 땡전으로 그리고 한푼으로

애칭? 이 붙고 이러한 시대상이 반영된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아주 적은 돈조차도 없다는 의미로 표현하던  "땡전 한푼 없다.

거지들이 한푼(한냥)만 보태줍쇼"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녔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요. (한푼은 200원정도지만 여기서의 한푼은 당백전 한냥으로 해석가능)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냥(100푼) 2만원의 1/100인 이백원을 달라는 이야기

 

화폐산식 (단위)

1894년(고종 31) 7월 신식화폐발행장정()이 제정 공포되고, 은본위() 제도가 채택되었으며, 화폐산식()은‘1냥()=10전()=100푼’으로 정해졌다. 한 냥의 100분의 1에 해당되는 한 푼은, 그 이전부터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상평통보()인 엽전의 화폐산식 ‘1관()=10냥=100전=1,000문()’에서의 문과 같이 1푼=1문(엽전 한닢)이라는 등가관계가 되었다.

장정 공포 후 2전 5푼짜리 백동화()와 한 푼짜리 황동화를 발행·유통시켰다. 은본위 시절의 푼과 문은 혼용된 것으로 보이며, 1901년(광무 5) 금본위제의 화폐조례가 공포됨으로써 화폐산식은 1환=100전으로 정해졌다. 법제적으로는 푼·문의 보조적 화폐단위는 없어졌지만, 엽전과 푼 표시 주화의 유통은 계속되었고 푼·문의 단위 사용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호대  당백전 뒷면                                           호대 당백전 앞면

 

흔히 쓰던 천냥 빚의 천냥을 현재가치로 환산하여 보면

 

약 300년전 기준으로 1678년에 제정된 행전절목이라는 문헌에 따르면 

당시 1냥(兩)은 400문(文, 1문은 상평통보 1장)에 해당하고,

400문은 쌀(米) 10말(斗)과 같다고 기록되었는데요. (1냥 = 쌀10말 = 20만원)

 

이 기록과 10말이 1섬(석)인 옛날 척관법에 따르면 당시의 만냥은 쌀 1만섬의 가치와 같고, 현재 쌀 1섬은 약 144kg 정도이고 80kg짜리 쌀 한 가마니 값은 약 20만원

정도이므로 당시 만냥을 현재 돈의 가치로 바꿔보면...

약 36억원(1만섬 × 1섬당 144kg / 1가마니당 80kg × 1가마니당 20만원)

따라서 1000냥은 1/10인 약 3억 6천만원 정도 된다고 합니다.

 

 

 * 쌀 한 되(2000원), 한 말(2만원), 한섬(20만원)

    당시에 쌀은 돈과 같은 개념이었기에 쌀을 기준으로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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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고종때 만들어진 당백전을 가지고 계산하겠습니다.
옛날 조선사회에서 당백전 8냥이면 쌀 1석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쌀 1포대(20kg)를 4만원이라고 계산하면 1석(80kg)에는 16만원이 됩니다.
즉 현재의 16만원은 당백전 8냥의 가치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1냥은 현재돈 2만원, 1000냥이면 2천만원이 됩니다.
(쌀 20kg를 5만원으로 계산하면 1석 20만원, 1냥은 25,000원, 1000냥=2,500만원)


결론적으로 조선사회에서의 당백전 1,000냥의 가치는 현재의 원화 2천만원 상당의 가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쌀 20kg을 4만원으로 144kg(28만원)으로  계산하면 1냥은 35,000원 1000냥은

   약 3,500만원이 되고

* 쌀 20kg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144kg(36만원) 1냥은 45,000원, 1000냥=4,500만원

  이 됩니다.

 

 

오랜만에 해보는 산수 계산 재미가 쏠쏠합니다. 숫자를 쓰다보니 천원단위에서 만원단위로 바꿀시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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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28년 조례에서는 당시의 1량 은화를 통용 화폐의 주본인 원화로 정했으며,

2전5푼 백동화와 5푼 청동화 및 1푼 황동화를 보조 화폐로 하고 있었는데


1푼 = 엽전(常平通寶) 2푼과 동일한 가치로 정하고

10푼 = 1전

10전 = 1량으로 환산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화폐

 

1닢 = 1푼,  10푼 = 1전,  10전 = 1냥

1냥(19세기 초 기준) = 현 시가 약 4만 원(대체로 2만원 정도로 봄),  4냥 = 천은 1냥


품목 시세(19세기 초)

쌀 1석 = 5냥,  콩 1석 = 2.5냥,  무명과 삼베 1필 = 각 2냥


서울의 집값(19세기 초)

초가 7간 = 50냥,  초가 3간 = 15냥,  토담집 2간 = 2.5냥,  홍삼 시세(1797년),  1근 = 천은 100냥

 

  

 

 

 

 

1866년 당백전 - 쌀 14섬(벼 28가마니)

 

* 제가 산출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쌀 1섬 = 쌀 144kg(10말) = 36만원(쌀 20kg x 5만원 계산)

                                     = 28만원(쌀 20kg x 4만원 계산)

 - 당백전 가치하락시는 8냥으로 한섬을 구입하였음

 # 쌀14섬은 현재가치로 보면 약 350만원에서 450만원으로

   조선시대 상황으로 접근해 보아도 너무 높은 가격으로

   보입니다.

 

 

1914년 100원(조선은행권) - 쌀 11가마니

 

 

1950년 1000원 - 14장이 쌀 한 가마니

 

 

1962년 500원 - 65년 도시 6인 가구의 한 달 평균

 생활비(9810원)의 20분의 1

 

 

1972년 5000원 - 쌀 반 가마니

 (당시 쌀 수매가격은 한 가마니 9888원)

 

 

1973년 1만원 - 대졸 초임(4만5000원)의 약 5분의 1


 

                                                                                                             출처:중앙선데이,2009.02.01

 

 

다시 본론으로 가서 당백전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당백전이란 흥선대원군 정권이 1866년(고종 3)에 발행한 화폐로

1866년 10월 우의정김병학(金炳學)의 제의에 따라 금위영에서

11월 6일 주조, 발행하여 1867년 6월 17일 중지될 때까지 주조

총액은 약 1천 6백만 냥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7-8냥 정도였으니 지금 시세로 쌀 200만석을 1석 80kg 16만원(실제 1석 = 144kg)으로 계산

해도 3,200억원이며  쌀 20kg을 4만원으로 144kg(28만원)으로  계산하면 1냥은 35,000원 x 1,600만냥 = 5,600억원이 넘는 거액이 시장에 풀린 셈이지만 당시 경제상황을 고려한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그리고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1100여년 동안 속리산 법주사를 지키던 ‘금동미륵대불’도 당백전 재료로 쓰기 위해 녹여 없어지게 된 슬픈역사가 숨어있습니다.

(# 계산하기 좋게 쌀 20kg 4만원 80kg하면 1냥 2만원 x 1,600만냥 = 3,200억원)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옆에 위치한 미륵대불을 설명하고 가야 하겠습니다.

 

1996. 8월 청동대불 모습

국보도, 보물도 아니지만 천년불교의 역사를 대변하며, 중생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미륵부처님으로

 

33m 높이의 미륵불은 진표율사가 청동으로 주조했다고 합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공사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했습니다. 당백전을 찍기 위해 청동이 필요

했던 흥선대원군은 천년문화유산을 훼손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1939년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로 불린 김복진 선생이 독립의 염원을 담아 시멘트로 대불을 조성하기
시작했지만 대작불사는 6.25사변으로 인해 중단됐다가 1963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조선 순종의 비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완공을 봤습니다. 하지만 시멘트는 부재의 성격상 100년을 넘지 못하고
 
1987년 시멘트 미륵대불을 그대로 본떠 청동대불을 조성했습니다. 쓰인 청동만 116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문화재 전문가와 서울대 비철금속 연구진이 함께 참여해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들어 불상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시작하였고 순금 80kg이 소요된 이 불사가 17개월만에 완공되면서 비로소 미륵금동대불의 원형이 완성된 것입니다.

 

현재 미륵금동대불 모습 

 

당백전은 모양과 중량이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5,6배에 지나

않으면서도 당백전 1매의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할 정도로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다.

 

조선정부가 이러한 악화를 발행한 것은 당시 국가재정의 위기와 밀접

한 관련을 가진다. 조선 후기 이래 국가의 재정지출이 날로 확대되는

반면에 재정수입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어서 정부로서는 이러한 위기

타개해야 했다.

 

더구나 대원군집권기(1863∼1873)에는 안으로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

를 회복하려고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이고, 밖으로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대를 증강하고 군비를 확장하는 사업을 벌여야 했다.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일시적으로 타개하는 방안으로 악화를 발행

하여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차액을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정부는 당백전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려고 이 악화를 모든 공사거래에

서 종래의 상평통보와 함께 통용하게 하고 각 관청에서는 경비를

지출할 때 당백전 2/3, 상평통보 1/3의 비율로 통용하게 하였다.

 

그 결과 당백전 발행 초기인 1866년 12월경에 7∼8냥에 지나지 않았

던 미곡 1섬의 가격이 1∼2년 사이에 약 6배로 폭등하였다.

 

당백전 발행으로 말미암아 폐단이 매우 심하게 되자 정부는 1867년

5월 당백전 주조를 중단한 상태에서 서울과 서울 밖 각 관청의 공납과

사사로운 채무보상 등에 모두 당백전을 쓰되, 1냥(100푼) 이하 거래에

상평통보, 1냥 이상 거래에는 당백전을 사용하도록 하는 등 그 유

통영역을 넓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아무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1868년 5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당백전 통용을 금지시키고 말았다.

결국 당백전의 발행은 재정난을 타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물가앙등과

체제위기를 가져왔다. 

 

통용금지된 당백전은 중국 동전 또는 상평통보를 대급(代給)하고 환수하여 철재로 전용하게 되었던 것이라 많이 남아 있다고 들하지만 구하기 힘든 것을 보면 앞으로

자녀들의 교육용으로 소장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가 당백전을 구하고자 인사동 옛날돈 취급 가게를 다 돌아다녀도

진품은 하나도 안보이고 가품도 한 곳외에는 없는 것을 보면 알음

알음으로 분양받거나 사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구하기가 어려운것

같습니다.

 

소장자가 도매상에 2만원에 넘긴다고 들었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물량자체도 없어진지가 2년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인터넷 경매에 일부나와 있는것은 진품(상태불량 통용전)은 30,000원 가품은 8천원정도에 거래되고 있고 일부 통용전은 모듬으로 끼워팔기로 3만4천원에 거래되고 있으나 상태는 그냥 별로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진품입니다.

 

 * 인사동 옛날돈 가게에 새로 찍은 당백전이 꾸러미에 있던데 가격은 5,000원 신품이라 구입은 안하고

   벽에 걸려있는 가공전(당백전) 사진만 허락을 받아 촬영 (본문 하단에 사진게재)  

 

참고로 이곳에서는 당백전에 대한 언급만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엽전이야기는 본 블러그 내 엽전(葉錢)의 가치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가기http://blog.daum.net/yescheers/8597675

                   화폐박물관은 자료는 많은데 상세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http://museum.komsco.com/

 

상평통보를 크게 분류하여 보면

 

‘상평통보 무배자전(無背字錢)’

‘상평통보 단자전(單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2자전(當二錢下部二字錢)’

‘상평통보 당2전 하부 천자문순전(當二錢下部千字文順錢)’

‘상평통보 중형전(中型錢)’

‘상평통보 당1전(當一錢)’

‘상평통보 당5전’

‘상평통보 당백전(當百錢)’ 등으로 구분됩니다.

  

아래 당백전은 제가 가장 아끼는 물건인데 당채(단청)색이 일부 사라지고 두께는 얇아졌지만 멧돌출신은

아니고 폼 낸다고 얇게 갈아내고 채색을 한 진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가지 색을 기본으로 하여 궁궐, 사찰, 사원 등에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려 장식 하는 것을 말한다.

 

단청은 단벽(丹碧)·단록(丹綠)·진채(眞彩)·당채(唐彩)·오채(五彩)·화채(畵彩)·단칠(丹漆) 등의 다른 이름이 있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단청장(丹靑匠), 화사(畵師), 화원(畵員),·화공(畵工).·가칠장(假漆匠),·도채장(塗彩匠) 등으로 부른다.


 상평통보 당백전 뒷면

 상평통보 당백전 앞면

 

당백전에 당채(채색)가 보이니 설명을 하고 가야 하겠습니다.

 

별전이나 열쇠패, 당오전, 당백전 등 엽전에 채색을 하는것은 시각적으로 보기 좋기 위한것도 있겠지만 오행사상에 입각한 채색이란 것을 알려드립니다.


오행의 색상과 방위와 계절의 상징을 표로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기본빛깔은 5색이며 이를 혼합해서 수많은 빛깔을 낸다. 5색은 청·적·백·흑·황이다.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 〈잡찬집(雜纂集)〉에 단청의 5색은 오행사상과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청(靑)은 동(東)이며 용(龍)이고 계절로 봄[春]이며 5행으로 목(木)이다.

적(赤)은 남(南)이며 주작[雀]이고 계절로 여름[夏]이며 5행으로 화(火)다.

백(白)은 서(西)이며 호랑이[虎]이고 계절로 가을[秋]이며 5행으로 금(金)이다.

흑(黑)은 북(北)이며 현무(玄武)이고 계절로 겨울[冬]이며 5행으로 수(水)이다.

황(黃)은 중앙이며 계절로 토용(土用:환절기에 해당)이며 5행으로 토(土)이다.

위에 보듯이 단청의 오행사상에는 현세의 강녕(康寧)과 내세의 기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위에 설명에 있듯이 근대에 와서는 단청이라는 개념이 건축물에 채색 하는 일 또는 그 상태를 일컬어

한정하여 쓰여지는 경향이 있으나 원래의 개념으로 되돌아가 우리가 흔히 엽전 채색을 당채(唐彩)라고 하고 있는것을 단청(丹靑)이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은 중국당백전과 일본 당백전 이미지 입니다 

  

  

중국 함풍원보(1851-1861) 보원국 주조 당백전입니다

 직경 49mm에 보통 크기이지만, 두께가 4mm로 다른것들에 비해 두꺼운 편입니다 

 

 

유구통보 당백전 (유구는 현 일본 오키나와)

 한국, 중국, 일본 의 당백전 3종으로 진품사진입니다.('09.10월 옥션가 15만원)

                      

옛날 단위 냥과 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근을 16냥인 600g으로 100돈인 375g으로 계산을 합니다.

상품이나 지방에 따라서 16냥을 1근, 100돈을 1근으로 각각 상품이 거래되고

있으나, 미터법 통일로 법률상 상거래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근의 유래는 고대 중국에서 생긴 것으로, 한대(漢代)에는 약 223g, 당(唐)나라에서는 이것의 약 3배였으며, 송(宋)나라 이후 16냥이 600g으로 정립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1633년(인조 11) 이후 주조하여 통용한 상평통보(常平通寶)는 1문(文)의 무게가 2돈 5푼[分]이고, 100문이 1냥이 되었으며, 10냥이면 1관(貫)이 되었다.

 

한국의 냥 단위는 996년(성종 15) 철전(鐵錢)을 주조한 뒤 생긴 것으로, 1101년(숙종 6) 처음으로 동전(銅錢)인 해동통보(海東通寶) 1,500관(1만 5,000냥)을 주조하여 대신(大臣) 및 양반과 군인에게 나누어주고 화폐로서 쓰게 하면서 기본적인 화폐단위로 통용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동전의 단위로 통용되다가,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이후부터는 일본의 원(圓)과 혼용되었으며, 이때 서울지방에서는 2전(錢)을 1냥, 1원을 50냥이라 하고 지방에서는 교환율로서가 아니라 편의상 1전을 1냥이라고도 하였다.

 

냥의 무게도 당초에는 1문의 무게가 2돈 5푼이던 것이 영조 때인 1750년대부터는 1돈 2푼으로 가벼워진 동전이 통용되었으며, 이는 화폐경제(貨幣經濟)가 발달됨에 따라서 각 계층의 화폐가치 인식이 심화되어, 종래의 실용성 중심의 화폐가치관(貨幣價値觀)이 명목가치(名目價値) 중심의 화폐가치관으로 이행(移行)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866년(고종 3) 11월부터 1867년까지 주조한 당백전(當百錢)은 그 실질가치가 1문전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하였으며, 거기에 명목가치만 100배로 고액화(高額化)하여 놓은 악화(惡貨)로서 화폐가치의 폭락을 가져왔다. 당시 금위영(禁衛營)에서 주조발행한 당백전 1,600만 냥은 쌀값으로 환산하면 당백전 통용 초인 1866년 12월경에는 약 200만 석에 해당하는 당시는 거액이었다. (한석 = 한섬 = 쌀한가마)

 

 참고로 심청전의 쌀 300석은 쌀 144kg짜리 300가마로 석은 원래 벼 두가마로

 쌀로  도정( 방아찧으면)을 하면 한가마(144kg)가 나오게 됩니다.

 

 계산해 보면 

 # 8천6백40만원 = 300석 × 1석당 144kg(216천원 = 20kg당 4만원

 # 1억8백만원 = 300석 × 1석당 144kg(36만원 = 20kg당 5만원

 # 4억5천만원 = 당시 정1품 녹봉 100석(현재총리 1억5천만원) x 3배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몸값으로 받은 공양미 300석의 가치를 현실적으로 계산하면

1석(섬)이 144㎏이니까 300석이면 4만3,200㎏. 이를 80㎏ 쌀 한가마니로 환산하면 540가마니가 된다.

지금 80㎏ 쌀 한가마니 가격이 16만원(20kg x 4만원)정도로 계산하면 공양미 300석의 지금 가격은 8,640만원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 300석에 대한 당시의 가치는 이를 훨씬 넘어선다. 조선시대 정승인

정1품의 1년치 녹봉은 쌀과 명주 등을 모두 합해 쌀 100석 정도였다고 한다.

 

쌀 100석이면 현재 가격으로 2,880만원. 당시 정승인 현 국무총리의 연봉이 1억5,000만원 정도니까 가치 차이는 5배가 난다. 이를 감안하면 심청이 몸값 공양미 300석의 현재 가치는 4억5,000만원 안팎이 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다시 당백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당백전의 주조는 간단한 기구로서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처벌규정이 엄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무리의 불법주조(不法鑄造)가 근절되지 않아 물가의 폭등을 조장, 1868년 10월에는 유통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888년(고종 25)에는 명목가치가 상평통보 5문에 상당하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였으나 2배에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후에는 더욱 가치가 폭락하여 상평통보 5문과 대등한 값이 되어 버렸다.

 

또한 1888년은 근대적인 화폐가 주조된 해이기도 한데, 1환(圜) 은화(銀貨) 1,300여 매에 10문 ·5문 적동화(赤銅貨)를 합하여 모두 4,000원(元)을 발행한 것이 그것이다. 이때는 새로이 냥 대신에 환 ·원의 화폐단위가 등장하는 것이 눈에 띈다.

 

1892년에는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5푼 백동화(白銅貨),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黃銅貨) 등 모두 23만 4,744환(圜)의 화폐를 주조하여 환이 화폐단위의 기본을 이루었다.

 

이때는 일본화폐도 국내에 다량 유입되어 혼용되었으며, 조선화폐와 일본화폐의 값을 비교해보면 1푼 황동화는 2리(厘), 5푼 적동화는 1전, 2전 5푼 백동화는 5전, 1냥 은화는 20전, 5냥 은화는 1환으로 환산되었다.

 

1905년(광무 9) 1월에는 금본위(金本位)화폐제를 채택하면서 구화폐의 교환과 회수에 관한 사항이 규정된 칙령(勅令) 4호 ‘구화폐 정기교환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으며, 이에 의하면 우선 구화 10냥 은화는 신화(新貨) 1환에 상당하는 비가(比價)로 정부의 편의에 따라 점차로 교환, 또는 회수하기로 하여 1911년까지 960만 8,636환을 회수하였고,

 

1678년(숙종 4) 이후 법화(法貨)로서 통용된 상평통보의 환수 비가(比價)는 1문을 1리 5모(毛)로 하였다가 종이 ·구리의 값이 급등하므로, 1908년에는 2리로 다시 상향조정하여 1909년(국권피탈 전년)까지 327만 8,958환 68전을 회수함으로써, 고려 이후 조선시대 전기(全期)에 걸쳐 화폐의 기본단위로 사용된 냥은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의 화폐단위 냥은 한(漢)나라 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5수전(五銖錢)이 사용되었으며, 24수전을 1냥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시대[德川幕府時代]에 1냥을 금화 4푼, 은화로는 4돈 3푼으로 하였다.

 

당백전 소평이란

당백전 전면의 상평통보 글자 중에서 평자가 약간 작은 당백전을 말합니다.

희귀성은 3배,  가치는 일반 당백전의 2내지 3배정도 된답니다.

 

 

  

 

 

 

   

아래 당백전과 平(평)자 크기를 비교해 보시면 바로 답이 나옵니다

 

 

 

     

 

엽전 읽는 순서(order of reading)

 

○ 대독 : 읽는 순서가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기준으로 위에서 아래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대칭되게 읽는 방법

 

○ 회독 : 읽는 순서가 가운데 네모난 구멍을 기준으로 위에서 시계

              반대방향이나 시계방향으로 읽어가는 방법으로서 대개

              동양권은 시계방향이 일반적이다.

 

글자의 위치와 서체에 따라 대독해서(對讀楷書), 회독해서(回讀楷書), 회독전서(回讀篆書), 회독팔분서(回讀八分書), 회독행서(回讀行書)등 5종류로 세분된다.

  

멧돌  출신 진품을 몇 점 구했습니다. 시장에 유통되었던 엽전으로

멧돌(두부콩을 갈던 기구) 멧쇠(아래사진)에 끼워져 서민과 함께

이시대를 살아온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온 주인공 입니다. 모양새는 험하지만 사랑스런 엽전들 입니다.

 

 엽전을 끼웠던 곳 = 멧쇠(멧돌쇠) :  아랫 맷돌에 박아놓은 를 일컫는 말이다.

 

멧돌 : 두부를 만들기 위해 물에 불린 콩을 갈던 기구 

곡식(팥,콩,메밀,녹두)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 때나 물에 불린 곡식(콩)을 갈 때 사용하던 농기구

 

 위 중간은 백동, 오른쪽 1개는 가품이며 당백전 재질의 다양함(백동,황동,적동)을 한눈에 볼수 있음 

 왼쪽 맨위 1개(당채) 및 오른쪽 중간에 있는 1개(가품) 제외하고는 맷돌 출신 

위에 있는 당백전을 옆에서 본 모습 (동일한 크기인데 각도를 잡았더니 탑모양이 되었음)

 

통용전 중 상태양호한 당백전 소장품

                    고형틀에서 떼어낸 자국(우측중간)                                 두께  30mm

엽전제조 고형틀에서 나온 모습 

 

  

상평통보 당백전으로 만든 가공전 

 

인사동에서 본 당백전 가공전 (옛날돈 가게)

 

장식품으로 사용된 당백전 (가공전)

   가공전 화동양행 경매시 25만원에 팔렸다고 해서 판매가격은 물어보지 않았지만 10만원대로 구입이 가능

   할 것으로 생각되었음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가격이나 물어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상평통보 당백전 가공전 개당 244,000원

    常平通寶 當百 加工錢 50種組  화동양행 낙찰가 12,200,000원

  

 

  가품(가짜) 당백전에 당채도 입혔군요

위 사진의 당채를 입힌 백동재질의 당백전은 소장자님 께서 정밀감정 결과 잘 만들어진 진품 백동 통용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내용 수정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래 댓글 참조) 

 

   가품(가짜) 당백전

 

   가품(가짜) 당백전

  

  가품(가짜) 당백전

진품 아니면 가품 ? 참 어렵습니다. 일단 가품에 무게를 둡니다.

아래에 있는 가품 당백전과 쌍둥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백전 앞면 진품 3개, 가품 1개 (가짜 = 오른쪽 아래 당백전)

 

당백전 뒷면 진품 3개, 가품 1개 (가짜 = 오른쪽 아래 당백전)

 

윗줄 우측의 것은 전형적 당백전의 관주전 재질이고,  아랫쪽 좌측것은 노란빛을 더 띄며 재질감이

약간 떨어(무른 느낌) 지게 보이지만 진품입니다.

위쪽 좌측것은 주석이 보다 많이 함유되어 보다 단단한 느낌을 주며 진품입니다.


오른쪽 아래 당백전이 인위적으로 색깔을 넣은 것을 아실수 있으면 진품을 구입하실 확률이

높아집니다.

 

肉부분(바닥면 테두리)을 보시면 석고나 실리콘 같은 걸 이용하여 만든것으로 가짜 중국 대형전의

형태로 우리나라 鑄沙는 고운 海沙로 주형을 뜨기 때문에 이런 형태의 결과물은 나올수 없습니다.

 

현재 이베이에 나오는 중국 고전중 이런 색깔과 느낌의 물건은 모두 가짜일 확률이 높고 또한 이베이

경매 중국 고전중에는 진품이 5%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베이(eBay) : http://www.ebay.com/    온라인 경매, 인터넷 쇼핑몰 회사

 

 

 

 보너스 별전 등재

 

 

중국별전 금옥만당 

금옥만당의 사전적인 뜻은 금옥관자가 방 안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한자성어이며, 금옥영실(金玉盈室)과 같은 뜻입니다.

(* 금관옥자 : 망건에 금관자와 옥관자를 붙인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
 

 

: 쇠금 , : 구슬옥, 滿 : 찰만, : 집당

노자도덕경()》제9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쥐고 있으면서도 더 채우는 것은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두드려서 날카롭게 만들면 오래 가지 못한다. 금옥관자가 방 안에 가득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없고, 부귀하여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을 이루었으면 그만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退 )"

금옥만당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금은보화가 방 안에 가득하다는 말로, 여기서는 아무리 많은 재물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만(滿)'은 '영()'과, '당()'은 '실()'과 뜻이 같아 금옥영실로도 쓴다. 뒤에 어진 신하가 조정에 가득함을 비유하는 말로 뜻이 커졌다.

 장명부귀 (오래 살며 부귀를 누림)

 구사벽악(驅邪辟惡)  벽사엽전 뒷면(?)

벽사엽전인데 구벽사악으로 읽어야 할지 비교대상을 못찾음

* 구사 : 해악을 내쫓는 것   * 벽악 : 몸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악기(惡氣)를 몰아내는 효능임

 

 벽사엽전 앞면(?)  # 벽사(辟邪) :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

 벽사엽전  

 벽사엽전 

 

출입평안(出入平安) 하시라고 마지막으로 장식합니다. 

 

 

 

60년전 물가변동 자료 : 붙임

60년전 물가자료.pdf


60년전 물가자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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