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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이방자 여사의 초충도 및 영원 (영친왕묘, 합장묘)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1.

영왕(영친왕)비

가혜 이방자 여사의

한-일 화합을 위한

 

 - 草蟲圖 초충도 -

 

 

 

가혜(佳惠)라는 호를 쓰셨던 조선마지막 황태자 세자비 영왕(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여사의 초충도(草蟲圖) 입니다.


일본의 개나리꽃과 한국의 국화꽃이 지구를 상징하는 둥근 타원형의 땅 위에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개나리꽃은 만개하고 국화꽃은 이제 꽃망울을 맺혔습니다.

만개한 봄의 꽃,  개나리꽃은 일본을 상징합니다.


이제 꽃망을 피운 가을의 꽃 국화는 가을을 맞이하려 합니다.

벌 두 마리가 만개한 개나리꽃을 향해 날아들고 있습니다.


이 꽃은 60년이나 70년대 경제부흥을 이룩했던 일본과

이제 피어 오른 한국이 어우려 잘 살아보자는 뜻이 담긴 화충도 입니다.


그림 상단 모서리가 액자에서 뜯어 내면서 조금 훼손됐으나

표구를 하면 아무 하자가 없겠습니다.


이 그림은 단아하면서 얼핏보면 유치원생의 그림처럼 단조롭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저변에는 평생을 불우한 한국민을 위해 희생했던 이방자 여사의 사상이 잘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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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영왕과 이방자 여사

 

이방자(李方子, 일본어로는 리마사코 1901년 11월 4일~1989년 4월 30일)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의민태자 이은(李垠)의 비이다.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후 존호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이다.

 

이은과의 결혼

1901년 11월 4일, 메이지 천황의 조카이자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모리마사(守正)와 그의 부인 이쓰코(伊都子)의 장녀 마사코(方子)로서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촌인 구니노미야 나가코(후에 고준 황후가 됨) 및 화족 이치조 도키코 등과 함께 황태자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후보로 떠올랐으나, 미미한 정치적 기반과 불임의 가능성을 이유로 1916년, 유학을 명목으로 일본에 볼모로 있던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과 약혼하였다. 1920년, 일본 황실의 교육기관인 학습원(學習院) 여자고등과를 거쳐 같은 해 4월 28일, 도쿄 롯폰기의 이왕저에서 이은과 결혼식을 올렸다. 비록 일본의 의도로 이루어진 정략 결혼이었으나, 둘의 사이는 화목했고 불임이라는 진단과는 달리 1921년, 장남 진(晉)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첫돌도 채 지나지 않은 진을 조선 방문 중에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또한 1923년 일본인들이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혼란의 희생양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1] 관동 대학살로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충격과 자책의 나날을 보냈다.

1931년, 둘째 (玖)를 낳고 다시 단란한 생활을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이왕가(李王家)가 폐지됨에 따라 신분이 강등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의민태자의 복권을 두려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방해로 귀국마저 좌절되자 재일 한국인으로서 고된 삶을 살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청으로 1963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창덕궁(昌德宮)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사회봉사활동

이방자는 한국에서 지내며 평소 남편과 구상해 온 사회봉사를 시작해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하기도 하였으며 1966년, 심신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자행회(慈行會)를, 1967년, 농아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해 명휘원(明暉園)을 각각 설립하는 한편, 해외 모금 활동과 칠보(七寶)를 통해 복지 사업 자금을 모았다. 1970년, 남편을 잃고 1971년, 정신박약장애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수원자혜학교(慈惠學校)를 설립하였다. 1973년, 숙원 사업이었던 영친왕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으며 1982년에는 광명시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등, 국가의 생활비 보조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도 사회봉사에 정열을 쏟아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다. 일본에서는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서거

말년에는 직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일본에 있는 아들 구(玖)와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1989년 4월 30일,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운명하였다. 장례는 1989년 5월 8일, 각계 인사 등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 홍유릉 영원(英園)에 의민태자와 합장되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하였고 그 밖에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되었다.

2006년 11월, 일본 후지TV에서 의민태자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되어 논란이 되었다. 2007년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탤런트 김희애씨를 주연으로 이방자의 일대기를 그릴 드라마가 기획 중이며, 그 이전에도 탤런트 이휘향씨가 이방자 역할로 출연한 드라마한국방송에서 방영된 바 있다.

 

                     마지막 황태자 부부가 잠든 영원. 오른쪽 건너편에 황세손 이구 공이 묻혀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내 위치)

 

홍유릉

홍유릉은 조선 26대 고종 부부(홍릉)27대 순종 부부(유릉)가 잠들어있는 황제릉이다. 

명나라 태조 효릉의 능 제도를 본떠 이전의 조선 왕릉과 형식과 상설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 대신 커다란 침전이 있으며, 기린, 코끼리, 사자 등의 석수가 늘어서 있다.

 


영친왕 영원 (비공개 묘역) 

 

 

칭호에 대해

  • 부군인 의민태자를 부르는 칭호는 대개 영친왕(英親王) 아니면 영왕(英王)이다. 이 영친왕(英親王)이란 칭호에 대해 두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친왕제는 일본식 제도이기 때문에 친親을 뗀 영왕(英王)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일본 친왕제의 뿌리가 당나라 율령에 있기 때문에 중국 제도를 참고한 대한제국에서 영친왕(英親王)으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의민태자비(세칭 이방자여사)의 경우 생전에 영친왕이라는 칭호는 일본식이니 영왕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했었는데, 그것은 의민태자가 일제에게 친왕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1조에는 왕이 만15세에 달한 후 대훈위에 서훈하고 국화대수장을 준다(王ハ満十五年ニ達シタル後大勲位ニ叙シ菊花大綬章ヲ賜フ)고 되어 있다. 대훈위와 국화대수장은 일본에서는 천황의 친족인 황족(皇族) 중에서도 친왕(親王)(천황의 친자식)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태자비의 말대로라면 영왕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왕 칭호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영왕이든 영친왕이든 둘 다 칭호로서 적합하지 않으며, 사시이긴 하지만 의민황태자로 부르는 것이 옳다. 종묘의 신위표와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에는 의민황태자 영왕이라고 씌여있는데, 이는 의민이라는 황태자 시호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영왕 칭호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인 듯 하다.
  • 황태자비를 부르는 명칭은 영친왕비, 영왕비, 이방자 여사 등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은의 영왕 칭호는 결혼 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황태자비 또한 태자비(세자비)로서 혼인한 것이며, 친왕(왕자)과 황태자(왕세자)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영친왕비가 아닌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옳다. 흔히 이방자 여사라고 부르는데, 이방자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식으로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마사코方子에서 신부의 성인 나시모토(미야宮는 경칭임)를 떼고 신랑의 성인 이李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게 된 것이고 여사라는 명칭 또한 황태자비의 존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 원래 왕실의 예법대로라면 시호와 존호가 있어야 하지만, 황태자비에게는 존호만 있을 뿐 시호가 없다. 선례가 되는(세자빈(태자비) 신분으로 승하했으며 이후에 왕후나 황후로의 추상이 없는 경우) 순회세자빈 윤씨와 소현세자빈 강씨의 경우 각각 공회빈(恭懷嬪),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시호가 있다. 황태자비로서 시호를 받은 예는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의 경우가 있는데, 순명비(純明妃)였다.[2] 선대의 경우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마땅히 황태자비에게도 'ㅁㅁ妃' 라는 식의 두 글자 시호가 올려져야 하지만 올려지지 않았다.

자녀

  • 장남 이진(李晉,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조선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두고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의문사하였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석연치 않은 경과(진 왕자는 죽기 전 초콜렛 색의 덩어리를 계속 토해냈었다고 한다)때문에 독살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일본인들이 왕가의 대를 끊기 위해 저지른 것이라는 견해만이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굳이 진을 죽일 필요성이 없었고 오히려 조선에서 일본인 피가 섞인 왕자를 증오하여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이 견해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당시 이진을 진찰했던 의사의 견해처럼 소화불량이 원인일 가능성도 있다. 고종의 독살설은 여러가지의 자료들이 발견되면서 거의 확정되었지만 이진의 경우 일본에서 독살했을 가능성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독살했을 가능성과 힘겨운 여행(당시 교통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고, 이진은 생후 8개월이었다)과 소화불량 때문일 가능성 또한 충분히 있으므로, 명확한 증거가 제기되지 않는 이상 이 세 가지의 경우를 모두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 차남 이구(李玖, 1931년 12월 29일 - 2005년 7월 16일). 부인은 미국 태생의 줄리아 멀록. 부친의 죽음 이후 황실의 수장을 맡아 한국에 거주하다가 아내와 별거했으며, 사업에 실패하자 일본으로 돌아가 이혼하였다. 일본에서 지내던 중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난 곳 옆에 세워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평소 건강에 이상이 없었고 사망 3일 전까지도 건강했었는데 갑자기 죽은 점, 일본측에서 시신을 방부(표백) 처리하고 비밀리에 장례를 치르려 했던 것 때문에 독살을 숨기기 위해 그런것이 아니냐 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워낙 증거도 없고(고종과 이진의 경우 사망 전후로 증언과 기록이 존재하지만 이구는 사망후 3일이 지나서야 발견되었고, 특별한 기록도 없다) 그를 독살할 뚜렷한 이유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고종은 유럽에 특사를 보내려고 했었고, 이진은 그 핏줄이 문제가 되었다) 큰 설득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방자에 대한 전기

  • 本田節子(혼다세쓰코)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 李方子》(범우사 1989년)에 따르면, 리마사코(李方子). 한국어로는 이방자로 읽으며 일반적으로 이방자 여사로 불린다. 그녀의 본명은 니시모토노미야마사코(梨本宮方子)이며 황족인 니시모토노미야 모리사마(梨本宮守正) 왕의 첫째 왕녀이다. 1901년 (메이지 34년)에 출생하여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의민태자)와 일본에서 결혼했다. 영친왕이 서거한 후 구 조선왕조의 왕궁인 창덕궁 낙선재에 거처했다. 이방자 여사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조선왕조 오백년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 느껴야했던 여인ㅡ. 일본의 王女로서 영친왕과 정략결혼을 하게되지만 일본 패망 후 '쪽발이 세자비' 라는 수모를 받으면서 살아가야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황태자비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광란으로 상처받고 한과 속죄로 점철되는 운명적인 삶을 살았다. 이방자 여사는 황족이자 평민이었고, 일본인이자 조선인이었으며, 조선의 몰락과 일본 패망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남편 영친왕(英親王)과 戀敵 민갑완에게 인간의 연민과 속죄의 짐을 이고 애증의 삶을 살았다."[3]

저서

  • 《지나온 세월》
  • 《The World is one》
  • 《세월이여 왕조여》

수훈

주석

  1.  《먼나라 이웃나라》일본편:일본의 역사/이원복 글, 그림/김영사
  2.  이후 남편인 순종이 황위에 오르면서 황후로 추상되었는데, 사후 왕비로 추상된 다른 세자빈(문종비 현덕왕후, 예종비 장순왕후, 성종비 공혜왕후, 경종비 단의왕후)들처럼 황태자비로서 받았던 시호 순명純明을 그대로 황후 시호로 사용했다.
  3.  本田節子(혼다세쓰코)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 李方子》(범우사 1989년)

 

 

 

 

 

영왕(英王)은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로 1897년 10월 20일 엄귀비(嚴貴妃) 몸에서 탄생하였다. 영왕의 이름은 은(垠). 1900년 영왕(英王)으로 책봉되고 해아밀사사건 직후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양위식이 거행되고 이어 8월 7일 경운궁(慶運宮) 돈덕전(敦德殿)에서 황태자 책봉식을 가졌다.

 

순종과는 이복형제 사이이다. 이토(伊藤博文)에 이끌려 10세 나이로 1907년 12월 5일 신교육 이수를 위한 일본 유학의 명분이나 인질로 일본에 가 그곳에서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本宮)의 딸 마사코(한국명 方子)와 1920년 4월 혼인하였다. 일본에 강제체류하는 동안 일본육사에 입학하게 된다.

 

이어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국의 어머니 엄귀비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였다. 1911년 7월 18일 사후에야 귀국, 모자상봉을 하게된다. 일본황실의 예우의 명목으로 영친왕(英親王)으로 칭호를 하였다. 영왕은 1922년 5월 4일, 1938년 4월 23일, 1943년 7월 1일 세차례 방자비와 함께 진명학교를 방문한 기록이 있다. 1963년 11월 23일 인질생활 56년만에 정식으로 환국, 방자비와 동행하였다.

 

그러나 귀국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하여 실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영왕은 불우이웃을 돕는 사회봉사의 뜻을 펴고자 부인과 함께 1966년 심신장애자재활원 자행회(慈行會), 1967년에는 신체장애자훈련원 명휘원(明暉園)을 설립 하였다. 사후에 방자비에 의하여 1971년 영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 자혜학교(慈惠學校), 1982년 신체장애아 교육시설 명혜학교(明惠學校)를 설립, 영왕의 사회봉사정신은 계승되었다.

 

방자비와의 사이에서 진(晉), 구(玖) 두 아들을 두었으나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은 성장하니 곧 황세손(皇世孫) 구이다. 유택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내에 영원(英園) 이다. 1989년 4월 30일 방자전하가 작고하자 합장하였다.

 황세손 구(玖)는 아버지 영왕과 어머니 방자비 사이에서 1931년 12월 29일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왕공귀족학교(王公貴族學校) 학습원 중등과 재학 중 해방을 맞았다.

 

1950년 8월 학습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이어 맥아더 사령부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캔터키주 센터칼레지고등학교에 편입하고, 1956년 5월 보스톤 메사추세츠 MIT 공대에 입학하여 건축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여인과 혼인하였다가 이혼했다. 슬하엔 자녀가 없다. 15년은 일본에서, 15년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셈이다. 1963년 11월 12일 국적을 회복하여 일시귀국,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건축설계학을 강의하였다. 1966년에서 1978년까지는 트란스아시아사 부사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에는 본원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71년 5월에는 사단법인 영왕기념사업회를 설립하였다. 1973년 신한항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96년 11월 25일에는 영구환국하였다.

 

 외국귀빈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황손 이구 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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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 삶  : 이루고자 했던 꿈이 있지만 이루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거나 혹은 어떤 사정으로 인해
                 안타깝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삶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스러지다  [동사]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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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 황실의 그림자는 쓸쓸하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영원(英園)
  한성희(maldoror1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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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황태자 부부가 잠든 영원. 오른쪽 건너편에 황세손 이구 공이 묻혀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내 위치)
ⓒ 한성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잠든 영원(英園)을 찾은 것은 지난해 11월 초순이었다.

경기 금곡의 홍유릉 담장의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자기 늦가을 단풍이 물든 나무가 늘어선 길이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 읽은 동화 '비밀의 화원'의 숨겨진 문을 열고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난 영친왕(1897~1970)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도착하자마자 앰뷸런스에

실려 성모병원으로 향했다.

7년간의 입원 생활 끝에 임종을 맞으러 낙선재로 돌아온다. 1970년 5월 1일 영친왕은 한맺힌 일생을 마치고

끝없는 휴식에 들어갔다.

▲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영친왕 부부.
ⓒ 이혜원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합장묘인 비공개 사적지 영원은 조선의 13개 원(園 왕세자

세자빈·왕의 부모가 묻힌 묘)중 마지막으로 조성됐다.

영원은 원임에도 무인석과 난간석을 조성해 왕의 예우를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잘 생겼지만 하체가 도무지 비례가 너무 안 맞을 정도로 아주 짧다. 상체가 3분의2, 하체가 3분의1이다.

▲ 영원 무인석과 문인석
ⓒ 한성희

무인석과 문인석을 보고 갑자기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생각나는 건 무슨 까닭일까. 황태자의 신분

에서 평민으로 격하된 영친왕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짧게 머리 속을 스쳐갔다.

영친왕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오른쪽에 아직 떼가 뿌리를 내리지 않은 커다란 묘 하나가 비닐로 덮여있었다.

2005년 7월 작고한 영친왕의 아들 이구의 묘다. 저 영친왕 부부는 아들이 일본에서 숨져 돌아와 옆에 묻힌

것을 어떤 심정으로 봤을까.

황실에서 밀려난 의친왕

고종과 순헌 황귀비 엄씨 사이에 태어난 영친왕은, 순종이 등극하자 형 의친왕(1877~1955) 이강(李堈)이

있음에도 황태자로 책봉된다.

의친왕은 고종과 귀인 덕수 장씨 사이에서 고종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궁녀였던 장 귀인이 고종의 아들을

낳자 명성황후의 노여움을 사서 의친왕 모자는 궁궐 밖으로 쫓겨난다.

▲ 의친왕 이강과 의친왕비 김수덕
ⓒ 이혜원

유일한 아들 순종이 병약해 후사를 걱정했던 명성황후가 1891년 의친왕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의화군에

봉했다. 궁에서 지내던 의화군은 17세이던 1893년 의친왕비 김수덕 여사와 결혼한다.

이듬 해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자격으로 파견되었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달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을 순방했다. 의화군은 조선의 왕자로 대외 특사 역할을 톡톡히 해냈

으며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등극했고 영친왕이 태어난다. 의친왕의 반일 감정을 잘 알고 있던 일제와 황제의

아들을 낳은 엄 귀비의 눈에 의친왕의 존재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영친왕이 태어나자 엄비의 획책에 밀려난

의친왕은 189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미국 여성과의 연애설 등 모략이 끊임없이 고종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미국 유학 당시 의친왕은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교류를 나누었고 도산 안창호를 만나 미국에 사는 조선인을

위해 써달라고 금일봉을 전해주기도 했다 한다.

1905년 귀국을 위해 일본 동경에 도착한 의친왕은 8개월이나 귀국을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귀국하라고

고종이 보낸 전보는 중간에 번번이 없어지곤 했다.

▲ 영친왕 생모 순헌 황귀비 엄씨의 양장차림.
ⓒ 이혜원

1906년 4월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궁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수제일은행 근처 여관에서 머물렀는데 자객에게 살해당할 위기를 맞기도 한다. 의친왕이 암살당할 뻔한 일은 무려 14번이나 된다 한다.

누가 보낸 자객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제의 소행인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귀국한 직후 대한제국 육군부장으로 임명된 의친왕은 부황 고종을 만나고 온 날이면 피를 토하며 통곡을 했고 일제의 야욕에 근심하던 고종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의친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술 마시고 기생을 부르는 등 위장을 펴지만 그 호방한 기상은 여전히 일제의 감시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의친왕이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잔치를 벌인다고 기생을 부르라 하면, 기생을 태우고 오는 인력거꾼은 독립군 밀사였고 의친왕과 밀사들은 골방에서 밀담을 나누곤 했다.

1907년 순종의 등극과 함께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다. 한때 순종 대신 술주정뱅이로 소문난 의친왕을 즉위시키는 것이 거론됐지만 의친왕의 기상이 만만찮아 일 하기가 어렵다 해서 무산됐다.

부전자전 독립운동

의친왕의 독립운동 기록은 그동안 묻혀 있었으나 뒤늦게 하나 둘씩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1909년 경남 거창군에 가서 의병을 양성할 계획을 세운 것과 1919년 상해로 탈출을 기도하다 일제에

검거돼 실패한 일이다.

의친왕은 거창군에서 정태균(鄭泰均)을 만난다. 정태균과 함께 지방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집해 의병단을 양성

하려고 북쪽 사선대 근처 땅을 사들이다가 탄로나 일본헌병에게 호송돼 서울로 돌아온다.

▲ 의친왕 아들 이우 공
ⓒ 이혜원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 11월 10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힌다. 의친왕 이강전하가 궁을 탈출한 것 같다는 보고

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사동궁(寺洞宮)에 살던 의친왕은 비밀리에 상해의 독립지사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지사들은 망명정부

를 세우려고 했고 민족의 일체감을 모으려는 역할로 의친왕을

옹립하려 한 것이다.

의친왕이 탈출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상제차림으로 변장을 하고 기차를 탔던 의친왕은 만주

안동(단동)에서 붙잡혔고 서울로 돌아와 총독관저 안에 감금

된다. 제 아무리 일제라도 의친왕을 재판정에 세울 수는 없는

일. 황제를 잃은 조선 백성들에게 의친왕의 존재는 고종을

대신한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일명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라

하는 상해 탈출 사건은 일제에 의해 '의친왕 납치사건'으로 조작

되고 말았다.
2005년에 작고한 황세손 이구를 마지막으로 황태자 영친왕의

후손은 끊겼다. 현재 고종의 혈통은 의친왕 후손만 남아있다.

13남9녀를 둔 의친왕은 일본에 귀화한 맏아들 건(鍵)을 아들로

치지도 않았고 의친왕의 기개를 이어받은 아들이 둘째 우다.

얼짱 왕자로 화제를 모았던 우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지원했고 일본여자와 결혼

시키려는 일제의 압력에도 끝내 거절하고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한다. 일제가 망하기 바로 직전 일본

에서 귀국한 우는, 일본으로 가라는 일제의 독촉에 딸에게 설사약을 먹여 병을 핑계대고 피하려 했으나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 얼마되지 않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일본군 군대로 출근하다 원폭에 희생되고

만다.

▲ 의친왕 묘
ⓒ 한성희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 묘

영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의친왕과 의친왕비 김씨(1881~1964) 합장묘에는 비석도 안내판도 없다.

옆에 있는 덕혜옹주의 묘에는 비석이라도 있는데 이곳은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만 서 있어 모르고 찾는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알 수 없다.

▲ 덕혜옹주 칼라복원 사진.
ⓒ 이혜원

전쟁통에 먹을 것도 없이 고생하다 1955년 작고한 의친왕이 처음 묻혔던 곳은 이곳이 아니다. 전쟁 끝이라

사유지에 가매장되었던 의친왕은 서삼릉 한 자락 한양골프장 구석으로 옮겨져 묘비도 없이 방치되다가

의친왕비가 있던 현재의 금곡으로 이장된 것은 1996년이다. 의친왕의 5녀 이해경씨가 갖은 노력과 고생 끝에

부모를 한 곳에 합장한 것이다.

이곳 금곡 홍유릉 경역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주인공이었던 고종과 순종, 영친왕, 의친왕, 황세손 이구,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덕혜옹주까지 잠들고 있다.

의친왕 묘에서 돌아 나오는 길목에 영원 재실이 사라진 왕조의 묵은 때를 껴안고 조선의 마지막 그림자처럼

고즈넉하게 서 있었다. 영원 재실은 경종의 의릉 재실을 헐어내어 지은 것이다. 무슨 연유로 수백년 동안

의릉을 지키던 재실이 이곳에 와서 머나먼 마지막 후손의 재실로 둔갑했는지 내막은 모른다.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대한제국 망국의 역사는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지만 주인공들은

잠들었다. 그리고 시간의 발자국은 지금도 어김없이 역사를 밟고 지나가고 있다.

  ▲ 영원 재실     ⓒ 한성희

 

     

     

    영원(홍유릉) 가는길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내 위치)
    서울시내 -> 내부순화도로 -> 북부간선도로 -> 춘천방향 -> 남양주시청방향 -> 이정표

     

     

         

     

                                                                        

    < 영원 | 英園 >

    영원 (비공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1897~1970)과 방자비의 합장묘이다. 영친왕의 이름은 은(垠)이며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비 엄씨이다.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광무 4) 영왕(英王)에, 1907년(융희 1)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1907년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되면서 융희황제(순종)가 이왕(李王)으로 폐위되자, 그도 황태자에서 왕세제가 되었다. 1920년 일본의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정략결혼을 했다.

     

    1921년 얻은 아들 진(晉)은 다음해 한국 첫 방문길에 잃고, 1931년 둘째 아들 구(玖)를 얻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으로 불렸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1963년 국적을 회복하고 방자비와 함께 귀국했다. 

     

     

    영원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에 있다.

     

    이 외에 홍유릉 능역 안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며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의 소생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의 묘,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光華堂, 1887~1970) 이씨의 묘,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三祝堂, 1890~1972) 김씨의 묘,

    고종과 후궁 귀인 양씨의 딸인 덕혜옹주(1912~89)의 묘,

     

    그리고 의친왕 계비인 수인당 묘가 있으며, 영친왕의 아들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회인원이 최근 2005년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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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친왕(義親王)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대한제국의 황족으로서 본관은 전주, 는 강(堈),

    초명은 평길(平吉), 는 만오(晩悟)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1877년에 태어났다. 어머니 귀인 장씨는 의친왕을 낳고 명성황후의 박해를 피해 궁

    밖에서 살다가, 1900년 숙원(淑媛) 칭호를 받고 1906년에야 겨우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귀인 장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11년 묘소를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6년과 1911년 사이인 것은 분명하다.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봉해졌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김수덕(金修德)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의 게이오 대학교

    거쳐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와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의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및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같은 해 8월,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해 6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주색에 빠진 폐인행세로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던 의친왕은 항일 독립 투사들과 끊임없이 접촉, 묵묵히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

     

    황실인사를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으나 도중 만주 안동에서 발각,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어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이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끝까지 저항하여 배일 정신을 지켜내었으며 광복

    후에도 망국의 황자로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55년 8월 16일, 서울 안국동의 별궁에서 79살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묘는 부황인 고종황제의 능인 홍유릉내에 위치한 의친왕묘(義親王墓)이다.

     

     

    의친왕 가족관계 12남 9녀

     

    순서 황실명 아명 호적명 출생 사망 생모 거주지 출계
    1남      이건(李鍵) 용길 X 1909년 1991년 수관당 정씨 X -
    2남      이우(李鍝) 성길 X 1912년 1945년 수인당 김홍인 X 운현궁
    3남      이방(李鎊) 흥길 해진 1914년 1951년 수현당 정운석 X -
    4남      이창(李鎗) 창길 해직 1915년 사망 조병숙 X 완평궁
    5남      이주(李鑄) 수길 해일 1918년 1982년 수인당 김홍인 X 대궁
    6남      이곤(李錕) 명길 X 1920년 사망 수인당 김홍인 X -
    7남     이광(李鑛) 형길 해청 1921년 1952년 송씨 X 계동궁
    8남     이현(李鉉) 경길 X 1922년 1996년 수경당 김씨 X -
    9남     이갑(李鉀) 충길 해룡 1938년 생존 함씨 뉴욕 거주 -
    10남     이석(李錫) 영길 해석 1941년 생존 홍정순 전주 거주 -
    11남 이환 문길 해선 1944년 생존 김혜수 산호세 거주 -
    12남 이정 정길 해준 1947년 생존 홍정순 LA 거주 -
    1녀 이영 길순 해완 1915년 1981년 수덕당 이회춘 X -
    2녀 이진 길운 해원 1919년 생존 수덕당 이회춘 하남시 거주 -
    3녀 이찬 길연 해춘 1920년 2009년 수완당 김씨 X -
    4녀 이숙 길영 해숙 1920년 사망 수길당 박영희 X -
    5녀 이공 길상 해경 1930년 생존 김금덕 뉴욕 거주 -
    6녀 이장 희자 희자 1940년 생존 김혜수 순천 거주 -
    7녀 이용 숙기 해란 1944년 생존 홍정순 LA 거주 -
    8녀 이현 숙향 해련 1950년 생존 홍정순 서울 거주 -
    9녀 이민 창희 창희 1953년 생존 김혜수 산호세 거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