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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북관대첩비의 귀환

by 연송 김환수 2009. 1. 11.

--- 우리나라의 문화재을 훔처간 나라는 敵이니라 ---

 

북관대첩비의 귀환

 
 일본에서 발견된 북관 대첩비

1926년 일제 식민시절이었던 당시, 도쿄(東京) 야시쿠니 신사(靖國神社)를 방문중이던 이생은

“(일본) 국가전사장졸의 초혼제가 매년 봄, 가을로 거행되는 곳으로 그 내부에는 조선 고대의 갑옷, 군기(軍旗), 창(槍), 총(銃), 대포(大砲) 등과 청, 러, 독 전쟁시에 획득한 전시기계를 다수로 진열해 일반에게 관람하게 하였다”고 소개했다. 이미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적 시설이라기 보다는, 제국주의를 홍보하고 그 성과를 상징하는 장소로 변질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에서 정원 한쪽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비석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비석앞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인 목패를 세워 놓고 있었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명천군 임명진에 있었는데 일본이 조선과 전쟁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그 비문에는 대첩(大捷)이라고 하였지만, 그 당시 사실과는 전혀 다르니 세인(世人)은 비문을 믿지 말라..”
 

 그러나 이와같은 금기는 오히려 그냥지나칠 수도 있었던 이생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 후면 정원에 높이가 5자 가량의 웅장한 비석이 서 있어서, 그 비석을 정면에 서서보니 북관대첩비라 새겨져 있었다. 

 


 이생은 매우 놀라 비문을 자세히 보려하였지만, 헌병이 제지하여 보지 못하고 비석 좌측의 목패만 보게된 상황을 전하여, 마땅히 우리땅에 있어야 할 이 비석이 일본으로 건너 간 사실에 대해  옛날의 전례로 추측하여 보면 일본이 강탈한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록 이생은 북관대첩비의 내용은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조선인은 고래(古來)부터 패하고서 이겼다고 자찬하며 비석을 세우는 일이 없는 이상에 그 비문의 당당한 정신을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적(史蹟)이 임명진에 있다가 이역의 일본 땅에 방치 당하고 있는 사실을 깊이 기억(記憶)하여 두자
”며 마음가짐을 다졌다.


.(동아일보 1926년 9월19일자 3면)

1926년 동아일보에 '북관대첩비'라는 제목으로 올려지기도 하였지만, 당시만 해도 이 내용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언론이 통제되고 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홍보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곧 이생이 투고한 내용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져 가기 시작하였으며, 북관대첩비의 존재역시 희미해져 갔다. 그렇다면 과연 북관 대첩비는 어떤 것이며, 왜 일본이 그토록 내용공개를 꺼러 하였는가?

잊혀졌던 위대한 승리

북관대첩비는 1709년 숙종임금이 임진왜란당시 의병장 정문부가 주축이 되어 관북지방에서 일본군을 8차례나 격퇴한 것을 기려,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에 세웠다. 
 1592년 당시 정문부는 이붕수(李鵬壽)를 비롯해  경원부사(慶源府事) 오응태(吳應台)등과 힘을 합쳐, 함경도에 피신중이던 두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 일당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장평(長坪)전투에서 왜군 1천여 명을 상대하여 820여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는 등 여덟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승하였다.

 이 위대한 승전비는 숙종 35년(1709)으로서 임진왜란이 끝난지 100여년 지난 후에 세워졌다.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 세워지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관찰사였던 윤탁연(尹卓然)이  정문부의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역모죄에 억지로 연류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그의 무고함이 밝혀져, 현종 7년(1666)에 비로소 정문부에게  판의금부사를 특증(特贈)하고, 이붕수등 남북도 의병장 20명에게 차등을 주어 각각 증직(贈職)을 내리고 숙종때는 승전기념비까지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러시아군을 두만강 밖으로 구축하기 위해 함경도북도 임명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사스케(池田正介) 소장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북관대첩비가 현지에서 철거된 이유에 대해 일본은 "양국의 화의(和意)를 손상할까 우려하여 옮겼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한 편 일본에 옮겨진 이 비석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일본에 파견된 조소앙이, 1909년 야스쿠니신사에 갔다가 우연히 이 비를 발견하였고 앞선 글 처럼 이생등이 1924년 재차 발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상태여서 반환운동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100년만의 귀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1978년 당시 도쿄[東京]에 있는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은 조소앙과 이생등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야스쿠니 신사내있던 북관대첩비의 존재사실을 확인하였다.

 최서면원장은 당시 박정희 정부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고, 한국 정부는 일본에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1979년 박정희의 암살과 더불어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 후 일본 정부는 야스쿠니 신사 소유물로 정부가 관여하기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야스쿠니 신사측은  원소재지가 북한임으로, 남북당국자 간의 합의를  반환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반도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을 고려할 때, 당시 야스쿠니 신사측의 그 같은 입장은 사실상 반환거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북관대첩비 반환운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남북 불교단체가 주축이 되어,우리나라를 경유하여 북한에 반환한다는 내용에 우선 합의하였다. 그런데 이에대해 야스쿠니 신사측은 2003년 12월  남북간 협의 후 일본 정부의 공식 요청이 있을 경우 비를 반환할 수 있다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남북한의 공식적인 반환요구과 일본정부의 수락이 있어야 된다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북관대첩비의 문제는 민간외교차원에서 정부차원의 외교로 바뀌었다. 아마도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때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한가지 목표를 위해 나갔던 일도 없을 것이다.
 2005년 5월  우리나라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위한 "남북 문화재 당국간 회담"을 북한당국에게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그리고 주한 일본대사관은 "남북 당국간 합의 뒤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반환이 가능하다"라는 긍정적인 내용을 전하였다.  이렇게 북관대첩비의 반환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서울에서 개최된 제 15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북관대첩비 반환 사업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한 후 외교통상부를 중심으로 반환 요청 작업이 가속화 되었다. 
  
  2005년 6월  대한민국 정부,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하고, 10월 3일 야스쿠니 신사의 이사회는 북관대첩비 반환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무려 1백년동안이나 적국의 땅에 있었던 승전기념비는, 2005년 10월 20일 항공화물기 편으로 고국의 품에 오게 된 것이다.

 


 신축된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식때 일반 공개되었다. 잠시 박물관에서 전시를 한 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 2005년 11월 17일 - 경복궁에서 북관대첩비의 복원공사 후, 공식 제막식을 하였다. 이 날은 을사조약 체결 100주년이었다.
  • 2006년 2월  - 남북간에 북관대첩비 북조선 환송에 관한 협의를 가져, 3월 1일에 개성에서 인도하기로 했다.

     

  • 2006년 3월 1일 - 서울특별시에서 해체 작업을 한 뒤 개성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넘겨졌다.
  • 2006년 4월 25일 - 북관대첩비 복제비가 건립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왼쪽 사진이 이때 복제한 북관대첩비다)

  • 다시 돌아보는 북관 대첩비의 반환운동.

     북관대첩비의 귀환은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가 함께 이루어낸 몇 안되는 대단히 긍정적인 성과임에 틀림없다. 비록 유물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언젠간 그 유물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또한 북관대첩비의 반환운동에도 볼 수 있듯, 남북한이 반드시 정치적 물리적 통일을 하지 않는상태라 하더라도, 얼마던지 동반자의 관계로서 긍정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국제사회에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자면, 현재 우리나라와 북한은 적지않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정치관계를 뒤로하고서라도, 중국과의 관계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이나 대미관계에 의존적인 우리나라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북관 대첩비의 귀한은 말없이 증명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