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자료들
출처 : http://cafe.daum.net/ku-history
원본출처 : http://www.nojum.co.kr/
100년전 사진박물관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 용포 입은 임금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 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936년 8월9일 베르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24살의 나이로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점을 통과,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으나 가슴의 일장기가 일본 식민 통치하의 나라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아프다.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시호는 헌의.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 (5월16일 ~ 7월3일) 을 단행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 낭인배에 시해되어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 후 3.1 일 운동에도 재현되어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들은 재판 없이 체포되어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손가락 2절을 잘라서 배포에 '조선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쓰고
35세 북경으로 가서 중국신문 중화일보의 논설을 하셨으며,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10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별세.
세분 중에 제일 왼쪽 분 이시다.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1904년 영국 통신원으로 로일전쟁 취재차 내한했다가
양기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일본침략을 기사로 우방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판과 영문판을 발간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다시 입국하여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박재혁 투사는 부산 경찰서장에게 면담 후
책속에서 폭탄을 꺼내들어 서 장앞에 던졌다.
박재혁 선생은 오직 조국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쳤다.
1919년 두손들고 만세부르다 일본경찰대에 검거되어 한 쪽 팔이 짤렸다.
사진에 외과 안내판이 보인다.
팔이 짤린 한국인은 눈동자 초점이 없이 땅만 바라 보고 있다.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을 수색하는 데 이용했다.
명성왕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배에 의해 소 정각 정자앞에서
불태워졌다.
조문객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모여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이다.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옥호루에서 시해된 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 용하던 곳이며
오른 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1940년 형무소 출옥 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로 체포도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 3번째)-가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 고문으로 옥사 했다.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1909 년 이등방문 암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당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촬영-(안중근)
전쟁 중 소식 불명이 된 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한국에 인도 되었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조선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일본 75연대와 대항하기 위해 야산에 은신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중앙 앞줄 김구 선생님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단기(4252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
중국 연해주 지역에서 광복활동.
중국 복장으로 촬영되었다.
이동녕 선생의 시구절 일부.
<국내공기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즉석재판을 하는 광경이다.
일본 경찰들은 장검을 들고 재판 분위기를 위협하고 있다.
북간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 직전
눈을 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일가족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 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모습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덩이에 심한 상처가 보인다.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 된 유골들.
100년 전 우리나라 어린이들 모습
출처 :★ⓔ세상모든정보★ 원문보기▶ 글쓴이 : ˚엔젤˚♧˚
===========================================================================================================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여성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권이 전혀 없는
오히려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외국처럼 결혼한
여자의 성을 없애는 일은 없었다.
조선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간의
결합이었으므로 각자의 가문에 대해서는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농민과 하층민의 부녀자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18세기 이후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의 생활상을 그려낸
풍속화를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여인네들이 사진 촬영을 꺼려했을 뿐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촬영되어
대부분의 자료가 국외에 소장되어 있다는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빚어진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16세기 이후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여성을 삽화를 통해 살펴봄으로
우리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 이고 가는 촌부 1900년대
이완용의 부인 (1880년대)
명성황후 1890년대
조선여인의 전통복장 1890년대
1890년대초창기의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인1895-1901년
가족사진1900년대
결혼 예복을 입은 신부
1902-1903년
귀족 1900년대
기생을 지도하는 여인 1900년대
양반댁 여자아이
"조선 말 일제시대,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기생 장연홍" 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새하얀 한복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 짙은 눈썹에 순진해 보이는 눈,
도톰한 콧날과 작은 입술로 단아한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원래 개화기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에 포함됐던 것이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이 한 네티즌의 눈에 띄어 여러 커뮤니티나 블로그사이트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실 여인 190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이화학당의 소풍행렬 1908년
일반 부녀자의 모습 1900년대
일본 장교와 두 기녀 1901
젖가슴을 드러낸 기생 1900년대
중산층 가족사진
신식결혼 1910년대
이화학당 졸업생들 1911년
조선회화: 달구경 "경직도 병풍" 중에서19세기 이후
서양인이 그림 조선여인"널뛰기
색동 겨울옷
조선여인의 식사
조선여인들의 빨래
죄 지은 여인의 매질 "행정도첩 (刑政圖帖)" 중에서19세기 말 작품
단오추천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19세기 작품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행상 "풍속화첩 (風俗畵帖)" 중에서
다림질 19세기 초 작품
춘야밀회 (春夜密會) 19세기
기방무사 (妓房無事)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조선회화: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여인풍속 (女人風俗) 18세기 작품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해설 1904년 1월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황태자비 시절,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 김상덕은 세자(나중의 순종)의 스승이었는데, 순명효 황후가 의지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안부와 황실의 근황, 그리고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詩箋紙)가 이채롭다. 궁체 흘림체의 세련된 글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순명효 황후는 병세가 더욱 깊어져 그해를 못 넘기고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역 사 방 > 역사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90~1903년도 귀중한 사진자료 (0) | 2010.09.13 |
---|---|
이방자 여사의 초충도 및 영원 (영친왕묘, 합장묘) (0) | 2009.12.11 |
정조 임금은 왜 청화백자를 금지했을까 (0) | 2009.12.05 |
북관대첩비의 귀환 (0) | 2009.01.11 |
조선시대 기네스북 (0) | 2009.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