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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자료들

by 연송 김환수 2009. 12. 10.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자료들 

 

출처 : http://cafe.daum.net/ku-history

원본출처 : http://www.nojum.co.kr/

100년전 사진박물관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기억해야 할 자료들
                                    
순종황제 (융희)

1875년  세자 책봉.
1897년  황태자에  책봉.
일제의  앞잡이  이완용의  강요로 1 907년  헤이거 밀사
사건에  책임을지고  고종이  양위 하자  황제에  즉위했다.
서양식  황제 복장을  입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손기정

1936년 8월9일   베르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24살의 나이로
2시간 29분 19초로  결승점을 통과,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으나  가슴의   일장기가  일본 식민 통치하의  나라 현실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아프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자적 용포 입은 임금 모습은 전통적인 의관 차림을 보여준다. 경복궁 뜰에 나와 바닥에 카페트를 깔고 뒷배경은 지금의 사진관처럼 천으로 스튜디오를 만들어 퍼시벌 로엘이 촬영한 것이다.

 
흥선 대원군

이름은  이하응.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시호는   헌의. 영조의  5대손이며  고종의 아버지.
안동김씨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내다가  고종의
즉위로  1863년  대원군에  책봉,  10년간 집권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시   청으로   납치되어  3년간 유패 생활을  보내다가  1885년에  귀국하였다.
신미양요 아시아 함대 선상의 장병(1871)

미국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  총병력 1230명 함재,
대포 85문을  장비하고  조선원정 (5월16일 ~ 7월3일) 을  단행했다.

명성황후 장례 준비(1897년)

명성황후의 시신은   일본 낭인배에  시해되어
 불에   탄 뼈  조각과  숯덩어리뿐  이었다.
운구준비를  위해   임시 사당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
 명성황후   시신은   보자기에  쌓여져있다.


1910년 형장으로 끌려가는 안중근의사-(당32세)

여순(만주)감옥에서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모습.
한말 군인
항거하는 독립군
철도 방해죄로 독립군 처형 (1905년)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남. 이춘근. 안순서이다.
1904년 9월  오전에 
 용산 마포간  철도부근  야산에서   처형되고 있는   현장의  사진이다.
로일전쟁 당시의 의병 처형(1904년)

이와 같은   장면은   일본 통치 후   3.1 일 운동에도  재현되어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
손을  뒤로   묶고   철사줄로   목을  매어   치명적으로   처형시켰다.
비참한  이 광경을   볼 때마다   탄압이   주는  일본의   만행은
 무엇을   위한   선택 이었는지   묻고  싶어진다.
 
항의하는 농민 처형 (1905년)

당시 일본 통치하에   있는  한국인들은   재판 없이   체포되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즉석에서  처형되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 하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민족의 애환은
국권을  지키지 못한  무능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  밖에....
중앙에   있는  일본 관헌은   복부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다.

영친왕 일본 유배-1905

이등방문은  1905년 11월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초대  한국 총감이  되었다.
영친왕은   11세 어린나이로   도일했으나   내용은 인질과   다름이   없었다.
영친왕의   정식 칭호는  영왕이다.
일제시대에   조선왕실을   격하시키려고
  '친' 이란 단어를   넣어서   영친왕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의왕을   의친왕으로  개칭  격하했다.

1904년 좌측이 이승만씨 (미국)
안중근 마지막 유언(1910)

일본 헌병대에게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사형 당하는   그날까지   애국충정으로   더욱   당당했다.
사형을   2일 앞두고   여순 감옥에서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은
프랑스 신부  홍석구씨와   두 동생이
   형님의   유언을   들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1930년 항일 학생 교화시간

일장기 좌.우   충효가   무엇을   강요하는   것일까?
모두  죄수복장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남자현 여사 사진

손가락  2절을   잘라서   배포에  '조선독립원' 이라는 혈서를   쓰고
손가락을   조사국에 보내   우리의 독립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한
  독립운동가  이시며
1933년  62세로   하얼빈에서   별세하여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채호 선생님

35세  북경으로  가서  중국신문 중화일보의   논설을  하셨으며,
독립운동을  주도 하다가  10년형을   받고  옥중에서  별세.
세분 중에  제일  왼쪽 분  이시다.

서대문 형무소 구치장 내부-(여름)
부관 연락선

1921년  부산 부관(부산~시모노새끼)  연락선  출항 직전.
당시 이 연락선은  조선인을  전쟁터  또는  공사장으로  수송하여
 일본 중국 등   제 삼국의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이 배를   타고간   많은   한국인은   되돌아   오지 못 했다)
놀이터가 된 궁궐-(1929)

처마  밑에  일장기로  장식되고  문짝은  유리로   바꾸어놓고
  아동관이라  홍보하고 있다.
         

          

배델

1904년 영국 통신원으로  로일전쟁  취재차  내한했다가
양기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고
일본침략을 기사로  우방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한국판과 영문판을  발간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었고  다시  입국하여
1909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박재혁의사 비-1920년

박재혁 투사는  부산  경찰서장에게  면담 후
책속에서  폭탄을  꺼내들어 서 장앞에 던졌다.
박재혁 선생은 오직 조국을 위해 깨끗이  목숨을  바쳤다.
 
독립군 수난

1919년  두손들고  만세부르다  일본경찰대에  검거되어  한 쪽 팔이  짤렸다.
사진에  외과 안내판이 보인다.
팔이 짤린  한국인은  눈동자 초점이 없이  땅만 바라  보고 있다.
통감부 파출소

1909년, 1910년 조선은  경찰권을  일본에  위임하는  각서를  조인했다.
사냥개까지  동원하여  항거하는  독립군을  수색하는 데  이용했다.
        

    꼭기억하여 잊지못할그날을 상기합시

소정각-명성왕후(민비) 화장된 곳

명성왕후의  시신이  일본 낭인배에  의해 소 정각  정자앞에서
불태워졌다.
조문객들이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달고  모여 있다.
---(일본 낭인배들이 옥호루에 난입하여 시해함)---


민비는  일제가  명성왕후를  함부로  부르기  위해  붙인
것이다.
 

 
옥호루

명성황후가  친러반일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자  일제가  
일본 낭인배(깡패)를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 옥호루에 난입 하여  시해함.
옥호루에서  시해된 후  며칠이  지나  명성왕후의 새끼손가락이  문틈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이 건물은  궁중의  나인들이  자주 사 용하던 곳이며
오른 쪽에  아궁이가 있어  나인들이  목욕을  즐기던  부엌이다. 뒷편에  박물관 상단이  보인다.
학도병 출옥

1940년  형무소 출옥  당시 모습--(학도병)
피골이  앙상한  체구는  X선에  나타난  형상과  같아  보인다.

민족해방 책임자-박달씨

1936년  민족해방 책임자로  체포도  항일 투쟁본부 책임자
박달씨- (우측에서 3번째)-가  딸과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고  있다.
심한 고문으로  옥사 했다.

광복단 사건

1920년  광복단  사건 발생
광복단 사건으로  인하여  주동자를  즉석에서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다.
 

  

안중근 의사

1909 년 이등방문 암살.
1910년 3월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 집행.
당시  체포되어  법정에서 촬영-(안중근)
조선 유해 보관소-1940년

전쟁 중 소식 불명이  된 유해가 일본에서  임시 보관되었다가 얼마 후  한국에  인도 되었었는데  성명을 알 수 없는 유해는  조선이란  보자기에  쌓여 있다.

1920년대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신궁 참배--(매일 아침마다)
시체 수송--(1930)

조선인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중국인 노무자들이  관을  운송하고  있다.
한일합방 동의 전달--(1910)

1910년 8월 29일  순종이  마침내  한일합방  조약을  공포하니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완전히  일본에  탈취 되었다

북간도 독립군 모습

일본 75연대와   대항하기  위해  야산에  은신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독립신문 편집
임시정부 요인-(1940)

중앙  앞줄  김구 선생님
살기위한 도전

부모를  여의고  혼자 살아 남은  어린 소녀가  혼자서  짐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일송 김동삼 선생

단기(4252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
중국  연해주 지역에서  광복활동.
  

이동녕 선생

중국 복장으로  촬영되었다.
이동녕 선생의 시구절 일부.
<국내공기 가슴이 답답 망명의 자유가 바람처럼 그리워....>
독립군 재판-(1920)

애국지사를  체포하여  즉석재판을  하는  광경이다.
일본 경찰들은  장검을  들고  재판 분위기를  위협하고 있다.
간도 국민회소속-(1910)

북간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압송 직전
 주막집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젖먹이  아이까지  있다.
형장으로 호송되는 독립투사-(1904)

눈을  가리고  인력거에  태워져  형장으로 가는 독립투사.
독립군
민족의 수난

일가족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 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모습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은  눈덩이에  심한  상처가  보인다.

전시된 유골들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 된  유골들.
잔혹한  행위에 무참히  숨져간  수많은  영혼들을
  무엇으로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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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우리나라 어린이들 모습

 

출처 :★ⓔ세상모든정보★ 원문보기   글쓴이 : ˚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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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인들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여성은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만이 학문을 하게 되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과거를 볼 수 없어 관직에 진출할 길은 전혀 없었다.

물론 관직에도 내명부라
하여 남편의 지위에 따라 그 부인도 관품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권이 전혀 없는
오히려 여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외국처럼 결혼한
여자의 성을 없애는 일은 없었다.

조선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만남이 아니라 집안간의
결합이었으므로 각자의 가문에 대해서는 존중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조선전기에는
유교적 가치관의 남녀관이 정립되지 않아 여성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산의 상속도 남녀의 차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으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봉사(輪廻奉祀)가 보편적이었다.

또한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어서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일 필요가 없었다.

특히 남녀간을 맺어 주는 결혼은 여성의 입장이 더 유리하였다.

결혼식은 신부집에서 치러졌으며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사회의 남녀 관계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의 지배이념이
확고하게 성립되면서 반전된다.
이후 조선사회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가 강요되어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점점 열악해진다.

특히 결혼이 시집살이를
강요하는 형태로 변모하자 여성들의 지위 향상은 물론이고
사회진출은 완전히 차단되게 된다.

전통사회의 결혼은 임신, 출산, 양육, 가사노동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결혼에 따른 시댁에
대한 여러 가지의 의무사항은 여성으로 하여금 더 이상
사회활동에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제약이 성립된 후의 조선시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방갓을 쓰거나 장옷을 입고 얼굴만 조금 내민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다.

그렇지만 모든 여성이 집안일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농민과 하층민의 부녀자들은 얼굴을 가리지도 가릴 것도 없었다.

오히려 19세기가 되면 영남의 일부와 관북지방에서는
여자가 장터에 나가 상인과 상대하며 흥정을 벌였다.

특히 관북의 여성은 목축과 밭일을 남자 이상으로 하였다.
이것은 제주도의 여성이 바다에 나가 일하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삶의 터전이 척박한 곳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18세기 이후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민중의 생활상을 그려낸
풍속화를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의 생생한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여인네들이 사진 촬영을 꺼려했을 뿐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 촬영되어
대부분의 자료가 국외에 소장되어 있다는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빚어진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16세기 이후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여성을 삽화를 통해 살펴봄으로
우리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항아리 이고 가는 촌부 1900년대



이완용의 부인 (1880년대)


명성황후 1890년대


조선여인의 전통복장 1890년대


1890년대초창기의 이화학당 학생들


한국 여인1895-1901년


가족사진1900년대


결혼 예복을 입은 신부
1902-1903년


귀족 1900년대


기생을 지도하는 여인 1900년대


양반댁 여자아이



"조선 말 일제시대, 장안에 이름을 날렸던 기생 장연홍" 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입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새하얀 한복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 짙은 눈썹에 순진해 보이는 눈,
도톰한 콧날과 작은 입술로 단아한 조선 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원래 개화기 조선 여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에 포함됐던 것이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이 한 네티즌의 눈에 띄어 여러 커뮤니티나 블로그사이트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실 여인 1900


윤비(순종비)와 궁중 여인들1900년대


이화학당의 소풍행렬 1908년


일반 부녀자의 모습 1900년대


일본 장교와 두 기녀 1901



젖가슴을 드러낸 기생 1900년대


중산층 가족사진



신식결혼 1910년대


이화학당 졸업생들 1911년


조선회화:  달구경 "경직도 병풍" 중에서19세기 이후


서양인이 그림 조선여인"널뛰기


색동 겨울옷


조선여인의 식사


조선여인들의 빨래


죄 지은 여인의 매질  "행정도첩 (刑政圖帖)" 중에서19세기 말 작품


단오추천 "기산풍속화첩 (箕山風俗畵帖)" 중에서 19세기 작품


1780년 경 작품으로 추정 행상 "풍속화첩 (風俗畵帖)" 중에서


다림질 19세기 초 작품


춘야밀회 (春夜密會) 19세기


기방무사 (妓房無事) "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조선회화:  청금상연 (聽琴賞蓮)"혜원풍속도첩 (蕙園風俗圖帖)" 중에서1805년 이후

작품으로 추정



여인풍속 (女人風俗) 18세기 작품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내용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셩후: 성후(聖侯). 임금의 안위.
예후: 예후(睿候). 왕세자의 병환.

해설 1904년 1월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황태자비 시절,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

김상덕은 세자(나중의 순종)의 스승이었는데, 순명효 황후가 의지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안부와 황실의 근황, 그리고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詩箋紙)가 이채롭다.

궁체 흘림체의 세련된 글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순명효 황후는 병세가 더욱 깊어져 그해를 못 넘기고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