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사회의 전개
(1) 문벌귀족사회의 성립
고려의 건국은 호족들의 연합된 힘에 의지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일 뒤에도 호족이나 그 출신들의 세력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국왕은 계속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지만 호족들의 견제와 반발에 부딪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오히려 호족들의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형국이 지속되었다.
태조에 이어 혜종(惠宗)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어난 ‘왕규(王規)의 난’은 당시 왕권을 능멸하는 호족들의 기세를 잘 드러낸 것이었다. 왕규는 광주의 호족 출신으로 왕실의 외척이 되어 득세한 사람이었다. 그의 두 딸은 이미 태조의 제15비(妃), 제16비로 들어가 그 사이에서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은 바 있었다. 그런데 왕규는 다시 딸 하나를 혜종에게 출가시키고 광주원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기 위해 마침내 혜종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혜종은 항상 갑사(甲士)로써 신변을 호위해야만 하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죽었다. 이는 호족의 그늘 아래 숨을 죽이고 있는 국왕의 초라한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왕규의 난을 진압하고 즉위한 것이 정종이었다. 그러나 그의 왕권도 미약하기는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경의 개국공신들의 포위망을 뚫기 위하여 서경(西京) 천도를 강력히 추진하기도 하였다.
고려의 왕권은 정종을 이은 광종(光宗) 시대에 와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는 노비의 안검법(按檢法)을 시행하여 호족 출신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와해시키고자 했으며, 나아가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실시하여 호족 출신의 관계 진출을 봉쇄하고 학문을 익힌 새로운 문신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왕권 강화 정책에 호족 출신 무장들이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광종은 반발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그 결과 태조를 도와서 고려 건국과 통일 전쟁에 공을 세운 호족 출신들의 기세는 크게 꺾이고, 대신 왕권은 매우 강화되었다.
성종(成宗) 시대에 이르러 지방에 중앙관이 파견되기 시작했다. 지방 호족들에 대한 국왕의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성종은 향직 개편을 실시해 지방 호족들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한편, 호족들을 가급적 중앙관료로 흡수코자 호족 자제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그리하여 지방의 호족들은 향리(鄕吏)로 지위가 바뀌었고, 중앙에서의 호족은 관료로 위치가 바뀌어 갔다. 한 마디로 지방에서든 중앙에서든 호족들에 대한 국왕의 지배는 명실상부해져 갔다.
그러나 중앙에서 호족을 대신하여 새로운 관료층으로 발돋움한 계층에 대한 국왕의 절대적 지배권은 확립되지 않았다. 새로운 관료층이라고 해도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특권을 허용받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귀족이었다. 아무리 국왕일지라도 이 귀족들의 공동의 권익은 누를 수 없었다. 이 새로운 귀족층이 고려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가는 지배계층이 되었다.
지배계층으로서의 이 새로운 귀족들은 신라의 진골 귀족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신라의 진골 귀족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성(姓)을 달리하는 여러 귀족들이 동시에 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고려 시대에는 신라와는 달리 이성귀족(異姓貴族)들에 의한 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이성귀족들은 호족이었던 시절의 자신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칭하였고, 이 본관들은 그들의 세력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벌이라는 것이 중시되었고 호적마저도 평민과는 별도로 작성되었다. 이처럼 문벌을 중시했으므로 고려의 새로운 이성귀족들을 일반적으로 문벌귀족(門閥貴族)이라고 부르며, 이들 문벌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으므로 고려를 문벌귀족사회라고 일컫는다.
문벌귀족의 중심지는 이제 지방이 아니라 개경(開京)이었다. 이들은 모두 개경에 거주하는 개경인이었다. 다만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만 귀향을 하였다. 개경에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게 된 이들 문벌귀족들은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켜 문벌을 드높이기 위하여 혼인 정책을 펴 나갔는데, 통혼(通婚)의 대상이 되는 가문
이 사회적으로 유력하면 할수록 명예로운 일이었다. 또 이들과의 통혼은 곧바로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의 통혼을 가장 원했다.
이는 가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권력에의 접근을 가능케 해 주는 확실한 방도였다. 그리하여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는 명문세족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이야말로 문벌귀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다.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그러한 귀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했다.
(2) 문벌귀족으로서의 안산 김씨
안산 출신으로서 이곳에 본관을 둔 김은부(金殷傅)는 그의 세 딸을 현종의 비로 들인 이후 일약 고려 최고의 문벌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즉 안산 김씨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안산 김씨는 그 뒤 문종(文宗) 시대까지 4대 50여 년 간에 걸쳐 왕실의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우선 「고려사」와 금석문을 두루 참고하여 김은부의 가계를 그림 1-1과 같이만들어 참고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46)
그림 1-1 김은부의 가계도
「고려사」 및 금석문에서 전하는 관련 기록들을 통해 김은부의 가문을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가 있다. 사료에 의하면, 김은부가 출세하게 된 것은 그가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로 있을 때 거란군의 침입을 피하여 이곳에 온 현종을 극진히 떠받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공주에서 그의 장녀를 현종에게 비(妃)로 들이고, 이어 차녀·삼녀까지 현종비로 들였다. 이렇게 해서 그의 집안은 왕실의 막강한 외척이 되었고, 김은부는 절도사에서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중추사(中樞使)·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김은부의 부 김긍필은 상서(尙書)·좌복야(左僕射)였지만 그것은 그 손녀들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받게 된 사후(死後)의 증직(贈職)이었다. 그는 안산 김씨의 시조에 해당하지만 중앙의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사서(史書)에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김긍필과 그의 선대는 보통의 농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이허겸(李許謙)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허겸은 안산 김씨에 이어 권세를 떨치게 되는 인주 이씨의 시조로서, 유명한 이자연(李子淵)이 그의 손자였고, 이자연의 손자가 이자겸(李資謙)이었다. 그의 선대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47) 즉 그의 선대는 본시 신라의 대관(大官)으로서 당(唐)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당의 천자(天子)에게서 이씨(李氏) 성을 사여받기도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그의 선대는 신라의 귀족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진골이 아니면 6두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의 자손이 거주지를 소성현(邵城縣), 즉 인주(지금의 인천)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후예가 바로 이허겸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허겸의 선대는 대대로 인천 지방에서 살면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해 왔으며, 인천 지역의 호족으로 행세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다만 이허겸대에 이르러 그 위세가 어느 정도 줄어들어 중앙의 관리는 되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기록으로는 그가 소성백·소성현후 등의 지위에 있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그의 외손녀들이 왕후가 되었기 때문에 사후에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먼 선대는 대대로 호족이었지만, 이허겸의 가까운 선대에 와서는 개경으로 진출하지 못했으며, 그 뒤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향리로 지위가 격하되었을 것이다. 인주 이씨가 개성의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허겸의 아들대에 와서의 일이었다.
이허겸과 그의 선대의 사회적 지위를 이상과 같이 이해할 수가 있다면, 그와 같은 맥락으로 김긍필의 경우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김긍필이 이허겸과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둘 사이의 사회적 지위가 비슷했음을 시사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김긍필의 선대는 이허겸의 선대의 경우처럼 호족과 같은 유력한 세력가는 못 되었다. 그러나 몇 개의 촌락 정도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집안은 되었을 것이다.
1世 |
2世 |
3世 |
4世 |
5世 |
6世 |
7世 |
8世 |
9世 |
10世 |
(김알지) (大輔公) |
(세한) 이찬 |
(아도) 파간 |
(수류) 각간 |
(욱보) 각간 |
(구도) 파진찬군주 |
味鄒(미추) 김씨최초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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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 |
추봉갈문왕 |
伐休王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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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분왕외조 |
조분왕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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祇摩王妃 |
(벌휴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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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봉갈문왕 |
保反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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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왕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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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반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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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西知 |
3 實聖王 |
至鳥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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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지) |
實聖(실성) |
(치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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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仇(말구) |
2 奈勿王 奈勿 (내물) |
4 訥祇王 訥祇(눌지) |
5 慈悲王 慈悲(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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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留夫人 |
阿老夫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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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부인 |
아노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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卜好 (복호) |
習寶 (습보) |
始祖10世 |
11世 |
12世 |
13世 |
14世 |
15世 |
16世 |
17世 | ||
5 慈悲王 |
6 炤智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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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悲 (자비) |
炤智 (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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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寶 (습보) |
7 智證王 |
8 法興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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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大路 |
原宗(원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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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로 |
立宗(입종) |
9 眞興王 |
銅輪 (동륜) |
11 眞平王 |
12善德女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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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麥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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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淨(백정) |
德曼(덕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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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飯(백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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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飯(국반) |
13眞德女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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勝曼(승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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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眞智王 金輪 (김륜) |
龍春(용춘) |
14 武烈王 春秋(춘추) 16세손 |
15 文武王 法敏(법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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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文 인문 (대각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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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注 문주 (시중,천왕) 무열왕 셋째아들(10형제) | ||
始祖17世 |
18世 |
19世 |
20世 | ||||||
文注 문주 (시중,천왕) 무열왕 셋째아들(10형제) |
大忠 대충 (각간) |
思仁 사인 (상대등) |
惟精 유정 (시중) | ||||||
始祖20世 |
21世 |
22世 |
23世, 24世, 25世 | ||||||
惟精 유정 (시중) |
長男 : 周元 주원 (강릉김씨 시조) |
경주김씨 족보 강릉김씨 족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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奈興 내흥 (갑간) 둘째아들(次男) |
慶徵 경징 (대아간) |
23 榮 영 (상공) 24 宗儒 종유 (아간) 25 宮一 궁일 (군윤) | ||||||
始祖25世 |
26世 |
27世,28世,29世 |
30世, 31世, 32世 | ||||||
宮一 궁일 (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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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殷義 은의(군윤) 女-壻 李翰 (전주이씨 시조모) 양자 27세 경영 26康義강의 (경영父) 좌복야 |
27 景暎 경영 (아진찬)
28 頊成 욱성 (한림랑)
29 承興 승흥 (아찬) |
30 獻 헌 (사도) 31 支柱 지주 (각간)
32 肯弼 긍필 안산개국후 좌복야 (兢弼 긍필) | ||||||
☜ |
경주김씨 |
↔ |
안산김씨 ☞ | ||||||
安山金氏 始祖
1世 (32世) |
2世 |
3世 |
4世 | ||||||
兢弼 긍필 (안산김씨 시조)
(肯弼 긍필)
안산개국후, 상서좌복야 |
殷傅 은부
(고려 현종 장인)
안산개국후,호부상서 상호군, 안평공
딸3명 태후, 왕후 |
충찬 (忠贊)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弟 난원 : 문종 왕사 경덕국사 대각국사 의천 스승 공정공 |
원황 (元晄)
공부상서, 병부상서 의경공 | ||||||
安山金氏 5世 |
6世 |
7世 |
8世, 9世 | ||||||
경용 (景庸)
문하시중, 낙랑공 |
인규 (仁揆) 이부상서 참지정사 |
지우 (之祐) 합문지후, 안서도호부판관 |
8세 충언, 위위승동정 9세 위 (渭) 충익공 문하시중, 낙랑군 |
참고 : 벼슬소개
좌복야 (左僕射)
고려 시대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속한 정이품 벼슬. 성종 14년(995)에 두어 문종 때 품계와 정원을 정하였는데, 그 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공민왕 11년(1362)에 없앴다.
≒상서좌복야.
조선 전기에, 삼사(三司)에 속한 정이품 벼슬. 정종 2년(1400)에 좌사(左使)로 고쳤다.
≒상서좌복야.
아진찬 [阿珍飡]
[명사]<역사> =파진찬(波珍飡) ≒ 아진찬·파미간·해간.
신라시대의 관등. 17등관계 중의 제4등관계로서, 일명 해찬(海0xC89F)·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때에 제정되었다고 하였으나, 520년(법흥왕 7)의 율령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명칭으로 미루어 본디 바다와 관계 깊은 관직이름에서 전용(轉用)된 것이 아닌가 하며, 따라서 이를 일종의 해관 혹은 수군 사령관으로 보는 설도 있다.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으로,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이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참고문헌≫ 三國遺事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上(朝鮮總督府, 1919)
≪참고문헌≫ 新羅 上古의 官位制의 性格에 대하여(李鍾恒, 國民大學論文集-
人文社會科學 7-, 1974)
한림랑 (翰林郞)
신라시대의 관직. 통일신라시대 왕명을 문서로 작성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던 한림대(翰林臺)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신라의 한림대는 당나라의 한림원(翰林院)을 모방하여 경덕왕대에 종래의 통문박사(通文博士)를 개칭한 것으로, 거기에는 한림랑·한림대조(翰林待詔)·한림서생(翰林書生) 등의 관원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한림대의 학사직(學士職)으로, 이 관직에는 문장과 학문에 능한 사람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특히 한림대의 최고 관직인 한림랑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당대의 문사(文士)들로써 충당하였고, 6두품 출신이 이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다.
880년 경에 한림대가 서서원(瑞書院)으로 개명됨에 따라 한림랑은 서서원 학사(學士)로 바뀌어 신라 하대 문한기구의 중추적 존재로서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李基東,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아찬 (阿飡)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아찬은 세분화하여 아찬부터 중아찬(重阿飡) ·3중아찬 ·4중아찬으로 올라가는데, 6두품 신분층은 중아찬으로 승급이 끝나며, 17등 관계에는 아찬만 포함되어 있다.
아찬(阿飡)은 신라의 여섯째 관등이다.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같다.6두품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직이었다.
사도(司徒)
고려시대의 관직. 태위(太尉)사공(司空)과 함께 삼공(三公)이라 총칭되었다.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문종 때 1인으로 하고 정1품으로 정비하였다. 충렬왕 때 없어졌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두었으며 1362년 다시 없앴다. 주된 기능은 임금의 고문역할을 하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사도가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것이 왕족에게도 수여되어 봉작(封爵)처럼 호칭된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정연한 봉작제가 시행되었으나, 봉작은 당대에 끝날 뿐이었고 상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들 사도나 사공이 공주(公主)와의 족내혼(族內婚)을 통해 왕의 사위가 되면 백작(伯爵)이 수여되었다. 고려의 공주들은 거의 전부 족내혼을 하였으므로 실제 이러한 사례는 많이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봉작이 상속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종친들의 봉작이 연속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참고문헌≫ 高麗史節要
≪참고문헌≫ 勳官檢校考-그 淵源에서 起論하여 鮮初 整備過程에 미침-(韓0xC365劤, 震檀學報 29,30 合倂號, 1966)
≪참고문헌≫ 高麗朝의 王族封爵制(金基德, 韓國史硏究 52, 1986)
각간 [角干]
신라 때의 최고 관위(官位).
이벌찬(伊伐飡)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飡) ·각찬(角粲) 등 다른 이름이 많으며, 처음에는 주다(酒多)라 하였다. 진골(眞骨)만이 하는 벼슬로, 신라 17관등제(官等制)와는 별도로 제정되었다. 중대(中代)에 이르러 이 위에 대각간 ·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이 관등을 주었다.
그러다가 김긍필 당대에 이르러 이허겸과 비슷한 정도의 사회적 지위까지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김긍필이 향리가 되었거나 또는 이에 버금가는 안산의 유력자로 부상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아들의 결혼 상대를 안산이 아니라 그와 인접해 있는 소성에서 구했다는 사실로써도 이 같은 견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안산 김씨는 김긍필의 아들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즉 김은부가 성종 시대에 벼슬자리에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과거를 거쳤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게 해서 등용되었는지는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그후 김은부는 앞서 설명했듯이 딸 셋을 현종의 비로 들이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일약 최고의 문벌로 등장하였다.
김은부의 맏딸은 원성왕후였는데, 그의 소생으로는 9대 덕종(德宗;1032~ 1034년), 10대 정종(靖宗;1035~1046년)이 있고, 문종의 비가 된 인평왕후와 경숙공주가 있었다. 둘째딸은 원혜왕후였는데, 그의 소생으로는 11대 문종(文宗;1047~1083년)과 평양공(平壤公) 기(基), 그리고 덕종의 비가 된 효사왕후가 있었다. 셋째딸은 원평왕후로서 효경공주를 낳았다. 김은부는 현종에 이어 차례대로 즉위한 9대 덕종, 10대 정종, 11대 문종 등 3명의 임금을 외손자로 두었던 셈이다.
그리고 문종의 비 인평왕후와 덕종의 비 효사왕후 등 두 명의 왕비를 외손녀로 두었던 것이다. 외손자들이 왕위에 올라 있었던 기간만 계산해도 1032~1083년에 이르는 51년이었다.
김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김충찬(金忠贊)이었는데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나아갔다. 작은아들 난원은 화엄종(華嚴宗) 승려로서 경덕국사
(國師)에 봉해졌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스승으로도 유명했다. 큰아들은 세속의 정치계에서, 작은아들은 불교계에서 각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김은부(金殷傅)
○金殷傅水州安山縣人性勤儉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이니 성품이 부지런하고 검박하였다.
成宗朝授甄官丞穆宗時累遷御廚使顯宗初爲公州節度使.
성종(成宗) 때에 견관승(甄官丞)으로 임명되었다가 목종(穆宗) 때에 어주사(御廚使)로 되었고 현종(顯宗) 초년에 공주 절도사(公州節度使)로 되었다.
王避契丹南下次公州殷傅備禮郊迎曰:
왕이 거란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남녘으로 피난가던 도중 공주에서 머물렀더니 김은부가 예의를 갖추고 교외까지 마중 나와 말하기를
"豈意聖上跋涉山川凌冒霜雪至於此極." 獻衣帶土物王遂更衣以土物分賜扈從官.
“성상(聖上)께서 험한 산천을 지나시며 찬서리 눈바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오실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까?”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옷과 띠며 지방 산물을 바치니 왕이 드디어 옷을 갈아 입고 호종 관리들에게 물건을 나누어 주었다.
王至巴山驛吏皆遁御廚闕膳殷傅又進膳羞分供朝夕
왕이 파산(巴山)역에 이르니 역의 아전들이 모두 도망가고 식사 공궤조차 못 하게 되었는데 김은부가 또 반찬을 장만하여 조석으로 왕에게 식사를 공궤하였다.
契丹兵退王還次公州殷傅使長女製御衣以進.
그 후 거란군이 철퇴하고 왕이 국도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공주에게 유숙하였는데 김은부가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지어 바쳤다.
因納之是爲元成王后元惠元平二王后亦其女也
이것이 인연으로 되어 그의 딸이 궁으로 들어 가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원성(元成) 왕후이다. 원혜(元惠), 원평(元平) 두 왕후도 역시 그의 딸이었다.
尋除刑部侍郞如契丹賀生辰還至來遠城契丹 女眞執之以歸數月乃得還.
그는 미구에 형부 시랑으로 승차되어 거란 왕의 생일 축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내원성(來遠城)에 도착하였을 때 거란이 여진을 시켜 그를 붙잡아 갔다가 몇 년 지난 후에야 돌려 보냈다.
進知中樞事轉戶部尙書拜中樞使上護軍八年卒以王后故贈推忠守節昌國功臣. 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食邑一千戶妻封安山郡大夫人又贈其父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母安山郡大夫人妻父李許謙亦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
그 후 벼슬이 지 중추사(知中樞事)로 올라갔다가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전직되었고 중추사 상호군(中樞使上護軍)으로 재직하다가 현종 8년(1017)에 죽었는데 왕후들의 부친이라 하여 추충 수절 창국 공신 개부의동삼사 수 사공 상주국 안산군 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 호(戶)를 주었으며 그의 처(妻)는 안산군 대부인(安山郡大夫人)을 봉하고 또 그의 아버지에게는 상서 좌복야 상주국 안산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安山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으며 어머니에게는 안산군 대부인으로 추증하였고 장인 이허겸(李許謙)에게도 상서 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 1천5백 호를 주었다.
【피난길에서 맺은 사랑 (난중가연 亂中佳緣 )】
*가연(佳緣) : 부부관계나 연인관계를 맺게 된 연분
강조가 죽은 후에도 고려의 여러 장군들은 선전 분투했고 여러번 적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꾀하기도 했으나 적군은 집요하게 남으로 남으로 진격해 내려왔다. 이렇게 되자 왕성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적의 예봉을 피하여 왕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 길을 떠났다. 도중에 왕을 원망하고 있던 김치양의 잔당들의 장난으로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겪다가 공주(公州)땅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주절도사 김은부(金殷傅)의 영접을 받게 되었다.
김은부는 수주 안산현(水州安山縣) 사람으로 성품이 몹시 근검했다. 성종 때엔 견관승(甄官丞)이란 벼슬을 지냈으며, 현종 때에 이르러서는 공주절도사가 되어 그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전진 속에 시달린 왕을 대하자 김은부는 눈물을 흘리며 애석히 여겼다. 그는 동분서주(東奔西走)하여 예의를 갖추고 왕을 영접했다. 은부는 왕의 모습을 보고 무엇보다도 피난길에 조석조차 변변히 취하지 못한 것을 짐작했다.
그는 곧 왕을 자기 거처로 인도하고, 산해진미(山海珍味)를 갖추어 대접하니 실로 오랜만에 대하는 별식이었다.
이때 음식 시중을 드는 여자들 틈에 끼어 한층 아리땁고 품위 있는 처녀가 왕의 눈에 띄었다. 특히 피난길에 여인을 멀리한 왕의 눈에는 그 처녀의 모습이 실물 이상으로 아름답게 보였다.
"김절도사, 저기 저 처녀는 어떠한 처녀이오?"
왕은 앞에 끓어 앉아서 대접하는 은부에게 물어 보았다.
"예, 바로 신의 장녀이옵니다."
왕은 다시 곁눈질로 그 처녀를 바라보며
"경은 좋은 딸을 두었구료. 이런 시골에서 보기 드문 가인인걸."
하면서 슬며시 눈웃음을 띄웠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은부가 장녀를 데리고 왕의 침실로 들어왔다.
처녀는 비단옷 한 벌을 들고 있었다.
"폐하 변변치 못한 것이오나 갈아입으시도록 준비했사옵니다."
은부가 이렇게 말하자 처녀는 그 옷을 왕의 앞에 공손히 놓았다.
그러고는 딸에게 "그럼 너는 폐하가 갈아입으시는 걸 도와 드리도록 해라."
이렇게 일러놓고 은부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처녀와 단 둘만이 되자 왕은 처녀의 얼굴과 비단옷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탐스럽고 그윽한 정이 느껴지는 처녀였다. 왕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몹시 끌렸지만 처음 대하는 처녀일뿐더러 왕이라는 지위를 생각해서라도 경한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겨우 이런 말을 던질 뿐이었다.
"어느 틈에 이렇게 옷 한벌을 다 지었는고?"
"어젯밤에 지었사와요."
"어젯밤에... 혼자서?" "예." "그렇다면 밤을 꼬박 새웠겠구먼."
처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살포시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가냘픈 눈두덩이 약간 분 것 같기도 했다.
왕은 더욱 고맙고 애틋한 정이 피어 올랐다.
왕은 잠자코 戰陣에 헐고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기장이며 품이며 몸에 대고 잰 듯이 꼭 맞았다.
"어떻게 짐의 체격을 알고 이렇게 잘 맞는 옷을 지었을고?"
"눈짐작으로 지었사온대 맞으신다 하시니 다행이옵니다."
"눈짐작으로? 그대는 아리답고 마음씨가 고울 뿐 아니라, 대단히 슬기로운 처녀로군." 왕은 칭찬해 마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었으니 이제 떠나야 한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니 길이 몹시 바쁘다. 욕심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깊은 정을 맺거나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지금의 처지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은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내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
라는 한 마디 말 속에 모든 정을 표시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었다.
왕에게는 이미 두 왕후가 있었다.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로 피난길에도 왕을 따라오기는 했다. 그러나 두 왕후는 모두 혈족으로 정략적인 맺어진 결혼인만큼 살뜰한 정을 느끼지는 못했다. 또 등극하기 전에는 정적의 독수(毒手)를 피해서 중이 되어 산중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여인과의 접촉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이 28세나 되어 김은부의 딸에게 첫사랑을 느끼게 된 셈이었다.
김처녀의 모습을 가슴에 안고 다시 남으로 내려간 왕은 그 해 정월 13일에 나주땅에 당도했다. 여기서 왕은 거란 진영에 가서 적군의 철병을 요구하도록 보낸 하공진의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공진은 지난날 여진인을 친 때문에 거란군의 침공을 초래케 한 장본인인만큼 이렇게 왕이 황성을 버리고 피난길을 떠나게까지 된데 대해서 통렬히 책임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왕이 남쪽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보다 앞서 죄가 풀려 원직을 복구했던 하공진은 왕의 앞에 꿇어 엎드려 진언했다.
"거란은 원래 딴 뜻이 있어서 신이 여진인을 친 것을 기화로 침공하였사오나, 겉에 내 세운 명분은 어디까지나 전왕을 내몰은 강조의 죄를 따진다는 것이었사옵니다. 그러하온데 이미 강조가 그들 손에 잡혔사오니 더 이상 전화를 확대시킬 명분이 없을 것이온즉 사람을 보내어 철병을 청하면 응할 수도 있을 줄로 아뢰오."
거란군의 철병은 왕도 간절히 원하던 바였다.
일이 뜻대로 될는지 아니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진의 진언을 받아들여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거란 진영으로 보냈다.
창화현에 당도한 공진 등은 낭장 장민(張旻)과 별장 정열(丁悅)에게 왕의 친서를 주러 먼저 거란 진영에 들어가서 할 말을 일러 주었다.
'우리 국왕께서 친히 오시기를 원합니다만 귀군의 군세가 두려울 뿐 아니라, 내란을 만나 남쪽으로 피신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배신 공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하려 합니다만 공진 등도 역시 겁을 먹고 진영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군대를 물려 주셨으면 합니다.'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장민 등이 적진에 당도하기도 전에 적의 선봉이 이미 창화에 쳐들어 왔다.
공진은 하는 수 없이 직접 적진으로 들어가서 거란왕을 만나서 장민 등을 시켜 하려던 말을 얘기했다. 공진의 말을 들은 거란왕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공진을 쏘아보며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의 왕은 지금 어디 있는고?"
하고 물어 보았다.
공진은 시침을 뚝 떼고
"남쪽으로 행차하신 것까지는 알고 있사오나 어디 계신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희 국왕이 갔음직한 남쪽 땅이 얼마나 먼 곳인고?"
거란왕은 다시 이렇게 물어보았다.
하공진은 거란왕이 고려 남쪽 땅의 지리에 밝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으매 천연스럽게 얘기했다. "우리 땅이 대국과 비길 바는 못됩니다마는 그래도 남쪽 끝까지 가자면 몇 만리나 될는지 짐작도 가지 않을 정도이옵니다."
"몇 만리나 된다? 그렇다면 속히 불러올 수도 없는 일이로군."
하고는 일단 회군하기로 했다.
이것은 물론 하공진의 청을 들어 주었다기보다 전선이 몇 만리나 연장된다면 보급에 큰 고생을 해야 할 것이며, 장졸들의 사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일단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쨌거나 거란군은 하공진 등을 볼모로 끌고 갔다.
적군이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자 왕은 그달 21일 나주를 떠나 황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왕의 마음은 황성 궁중으로 향하기보다 공주 땅에 있을 김처녀에게로 곧장 달렸다.
두 왕후만 사람을 달려 먼저 보내고 왕 자신은 다시 공주땅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이 행차한다는 기별을 받자 김은부는 멀리 마중을 나와 지난날보다도 한층 더 융숭히 영접했다. 김은부가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는 산해진미도 물론 달가운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아쉬운 것은 한시도 잊지 못하던 김처녀의 모습이었다.
"이곳에 오니 마치 오래 비어 두었던 자기 집에 돌아온 것 같구료. 모든 것이 반갑고 모든 사람이 정답고..."
나이 젊고 수줍은 왕은 자기 심중을 직접 드러내지 못하고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김은부는 왕의 뜻을 재빠르게 짐작했다.
"이곳에도 폐하의 성덕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사옵니다. 특히..."
하고 잠간 말을 끊다가
"밤이나 낮이나 폐하를 사모하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낸 한 처녀가 있사옵니다."
그리고는 슬쩍 눈웃음을 쳤다.
그 말에 단순한 왕은 낯이 붉어지며 다급히 묻는다.
"그 처녀가 누구요?"
"곧 들여보내겠사옵니다."
김은부가 눈짓을 하니 시종을 들던 자들이 일제히 물러가고 그 대신 꿈에도 잊지 못하던 김처녀가 들어왔다. 전보다 어딘지 초췌해 보이는 김처녀는 그래도 정성껏 단장한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다소곳이 절을 하더니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고운 보따리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느덧 방문은 굳게 닫혀지고 방장마저 내려진 속에 처녀와 단둘이만 대하자 왕의 가슴은 그저 뛰기만 했다.
"고개를 드오. 무엇이 그리 부끄럽다고?"
왕은 자기 자신의 수줍음을 꾸짖기라고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처녀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 반짝이는 처녀의 두 눈은 억만가지 정을 담고 호소하는 듯 왕에게는 느껴졌다.
처녀를 만나면 이런 말도 하리라, 저런 말도 하리라, 벼르고 벼르던 왕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하고 보니 말문이 막혀 그저 망설일 뿐이었다.
방안 공기가 어색해졌다.
그러자 처녀가 앞에 밀어 놓았던 보자기를 펴기 시작했다.
수줍은 왕은 그것을 보자 겨우 말할 거리를 찾았다.
"그건 또 무엇인고?" 하고 보따리 속을 들여다보았다.
왕의 이마가 처녀의 이마와 거의 마주 닿게 되자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왕은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찔끔해서 물러 앉았다. 수줍어 보이고 연약해 보이는 처녀가 오히려 왕보다 대담했다. "폐하, 이것을 갈아입으시어요."
처녀는 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말에 왕은 다시 용기를 얻었다.
"오, 또 옷을 지었구먼. 그대가 손수 지은 건가?"
"예."
"솜씨도 참 곱구먼. 감도 좋고..."
왕은 손으로 부드러운 비단옷을 어루만졌다.
"이 옷을 짓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했을고?"
별로 그렇게 느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말꼬리가 끊어질까 보아 그저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줍음을 거둔 처녀는 정이 넘치는 눈으로 왕을 응시하면서
"한올 한올 바늘을 뜨면서 폐하의 용안을 그리어 보았사옵니다... "
한다.
그 말에
"오, 그렇듯 짐을..."
왕은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외치다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 머뭇거린다.
다른 일에는 상상히 슬기롭고 과단성도 있는 왕이었지만 이런 일에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막막할 뿐이었다.
"폐하, 어서 갈아입으시어요."
처녀는 먼저 하의를 펴든다.
"오, 갈아입어야지. 누가 지어 준 옷이라고.. "
왕은 헌 옷을 훌훌 벗고 처녀가 들고 있는 옷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처녀는 그 옷을 내어주지 않고 들고만 있었다. 입는 것을 돕겠다는 시늉이었다. 왕은 하의에 한쪽 다리를 꿰다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기우뚱하고 몸이 기울어졌다.
"폐하.."
처녀는 육중한 왕의 상반신을 풍만한 자기 가슴으로 안아 받들었다.
아무리 수줍은 왕이었지만 이미 두 왕후를 맞은 몸이었다. 그러나 처녀는 왕의 두 팔이 허리에 감으려 하자 재빠르게 빠져나가 두어 걸음 물러섰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여전히 눈으로는 웃고 있었다.
"안 되다니... 이제 와서..."
왕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다가 갔다.
수줍었던 왕이지만 한 번 불길이 당겨지자 자제 할 줄 모르는 짐승처럼 변해 벼렸다. 그러나 처녀는 요리조리 피하며 지껄여댔다.
"폐하,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시면 소녀는 혼사길이 막히옵니다."
"혼사가 무슨 상관인고? 궁중으로 데려가면 될 것 아닌가!"
"궁중으로 데려가시면 소녀를 후궁으로 삼으시려는 뜻이옵니까? 소녀는 그런 자리는 싫사옵니다. 그런 뜻에서 소녀를 가까이 하신다면 혀를 끊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뜻을 쫓지 못하겠사옵니다."
"누가 후궁을 삼는다고 했는고? 어엿한 왕후를 삼겠다는 거지."
왕은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왕후를 봉하시다니요? 지금 폐하께는 왕후가 두 분이나 계시지 않사옵니까? "
"왕후는 몇 사람이든지 봉할 수 있는 거야. 둘이면 어떻고 셋이면 어떻담."
"셋중에 하나란 말씀이어요? 그런 건 싫사옵니다. 소녀는 소녀만을 사랑하는 분에게 몸을 맡기고 싶사옵니다."
"아따, 왕후가 셋이라고 다 한결같이 사랑하겠소? 사랑이 가는 곳은 오직 한 곳 뿐이지."
욕정이 제법 왕의 입을 매끄럽게 했다. 처녀는 왕의 두 눈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는 왕이 식언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는지 비로소 품에 안기었다.
그 후 왕은 김은부의 집에서 엿새를 묵은 다음 황성으로 돌아갔는데 왕은 과연 환도 즉시, 처녀를 왕후로 삼았으니 곧 원성왕후(元城王后)이다. 원성왕후는 왕에 제9대 덕종(德宗)과 제10대 정종(靖宗)을 낳았으니 깜찍한 시골 처녀의 야망은 최고로 이루어진 셈이다.
장녀를 왕후로 미는데 성공한 김은부의 세력은 갑자기 강대해졌다. 그리고 세력이 강해지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김은부는 장녀와 의논해서 자기 세력을 공고히 하는 뜻에서 두 딸을 다시 왕후로 들여보냈으니 곧 원혜(元惠)왕후, 원평(元平)왕후가 그렇다.
이렇게 되니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던 처녀의 속삭임도 결국 왕의 마음을 낚으려는 술책이 아니었다면 부친의 정략결혼에 순정을 희생시킨 셈이다.
그 후 김은부는 형부시랑(刑部侍郞), 호부상서(戶部尙書), 중추사(中樞使) 등을 역임하다가 현종 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딸들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은부
고려시대에는 현종에게 딸을 셋이나 왕비로 보낸 김은부(金殷傅)가 있다. 고려사열전에 보면 김은부는 안산현 사람으로 여러 높은 벼슬을 지내고 안산군개국후(安山郡開國候)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안산이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것은 그의 작위를 받은 것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도 안산현개국후라는 높은 작위를 하사받았는데, 그를 안산김씨의 문중 조상이라고 받들고 있다.
개국후란 그 지역을 처음 세운 제후, 즉 봉건주란 뜻이다. 나라에 유명한 인물에게 사후 시호를 내려주는 예로 충무공이니 문정공이니 하는 것을 임금이 하사해도 개국후란 큰 작위는 좀체로 내려주지 않는다.
안산을 처음 개국한 인물이 있어도 그 개국인만이 안산의 이름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람 어느 성씨라도 같은 지명을 시호의 명칭으로, 또는 본관의 명칭으로 사용할 수는 있다.(김정현 향토사가)
김은부 가계도
시조 : 김긍필 金兢弼 (肯弼)
안산김씨 시조는 김긍필(金兢弼)이며, 고려 초기 사람으로 대보공 김알지의 32세손이며, 문헌상 신라 태종무열왕의 17세 직계 후손으로 안산현개국후에 봉작되고 벼슬은 상서좌복야이다.(식읍 1500호)
안산김씨 족보에 전하는 시조 김긍필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이며, 선조로는 신라국 원성대왕의 후예로서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보공 은열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은부가 고려 성종의 장인으로 호부상서, 상호군이며 딸 3명이 고려 현종의 태후 및 왕후가 되어 국구(왕의 장인)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에 이르러 안산군개국후에 봉해졌다.(식읍 1000호)
김은부의 외손인 덕종, 정종, 문종이 왕에 오르면서 4대 50여년동안 고려시대의 최고 문벌귀족이 되었으며. 김태후 집안(안산김씨)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하도록 정해져 고려시대 문벌귀족(재상지종) 가문의 지위를 계속 누리게 되었다.
○ 안산김씨 세계도
시조 |
2세 (1대손) |
3세 (2대손) |
4세 (3대손) |
5세 (4대손) |
6세 (5대손) |
7세 (6대손) |
8세 (7대손) |
9세 (8대손) |
김긍필 |
은부 |
충찬 |
원황 |
경용 |
인규 |
지우 |
충언 |
위 |
안산현 개국후 |
안산군 개국후 |
병부상서 |
공부상서 |
평장사 |
좌승선 |
예빈주부 |
위위승 동정 |
문하시중 |
안종사돈 |
세딸현종 |
중추원사 |
중추원사 |
판형부사 |
이부상서 |
선경부사인 |
이후 벼슬 실전 |
판리부사 |
상서좌복야 |
호부상서 |
우산기상시 |
병부상서 |
문하시중 |
문하성지사 |
합문지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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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
식읍1500 |
상호군 식읍1000 |
지중추원사 |
|
낙랑공 식읍1000 |
참지정사 |
안서도호부 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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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익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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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9대손) |
11세 (10대손) |
12세 (11대손) |
13세 (12대손) |
14세 (13대손) |
15세 (14대손) |
16세 (15대손) |
17세 (16대손) |
18세 (17대손) |
원상 |
성경 |
정경 |
지 (별장) |
암 (상호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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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학 |
진주목사 |
좌명공신 |
관 (상호군) |
을신(사직) 맹강(학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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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군 |
삼사우사 |
안산군 (연성군) |
척 (별장) |
지 (대제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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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문학 |
의정부사 |
이조전서 |
개 |
맹린 (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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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삼사사 |
자헌대부 |
숭정대부 |
중추원사 |
맹전 (사재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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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공 |
중추부사 |
맹종 (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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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참찬 |
맹균 (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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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중추부사 |
맹일 (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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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강 |
필 |
원회 |
수온 |
계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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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문원 교감 |
문과장원 |
수의부위 |
동지중추 부사 종2품 |
군관,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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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
전적 |
문화유씨 |
3형제 장남 |
조헌문하학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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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유 (첨중추) |
홍문관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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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 |
율곡,성혼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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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호군) |
맹철 (판서) |
증 부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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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금산전투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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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혁 (참판) |
4형제 넷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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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정랑 한유행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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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 (판서) |
이용 (별장) |
정 (판결사) |
맹현 (첨지중추 부사) |
전주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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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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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김긍필의 14세손(13대손)에서 분파되었습니다.
(참고자료 안산김씨족보 1776년, 1989년)
o 상호군파 휘 암 (의주,용천) ** 휘(諱)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o 사직공파 휘 을신 (강진)
o 학생공파 휘 맹감 (강진,황주)
o 대제학공파 휘 지 (합천)
o 부정공파 휘 맹린 (포천1동)
o 사재정공파 휘 맹전 (안산)o 첨정공파 휘 맹추 (한산)
o 참봉공파 휘 맹균 (황해)
o 직장공파 휘 맹일 (포천)
o 교감공파 휘 맹강 (천안)
o 첨중추공파 휘 맹유 ?
o 판서공파 휘 맹철 (괴산)o 참판공파 휘 맹혁 (포천, 청산)
o 첨지중추부사공파 휘 맹현 (장단)
11세 (10대손) |
12세 (11대손) |
13세 (12대손) |
14세 (13대손) |
분 파 내 용 (집성촌) | |
성경 |
정경 |
지 別將 |
암 (상호군) |
의주파 |
의주파, 용천파 |
진주목사 삼사우사 의정부사 자헌대부 |
좌명공신 연성군 (안산군) 이조전서 숭정대부 위정공 |
관 上護軍 |
을신 (사직) |
강진파 |
강진파 |
맹감 (학생) |
강진파 |
황해도 황주파 | |||
척 別將 |
지 (대제학) |
합천파 |
괴산파,합천파,산청파,만경파 | ||
개 左參贊 |
맹린 (부정) |
포천, 안산, 천안파 |
포천파, 양주파 | ||
맹전 (사재정) |
〃 |
안산파 | |||
맹추 (첨정) |
〃 |
한산파 | |||
맹균 (참봉) |
〃 |
황해도파 | |||
맹일 (직장) |
〃 |
포천파 | |||
맹강 (교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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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파(청산파), 천안파 | |||
맹유 (첨중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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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 大護軍 |
맹철 (판서) |
괴산파 |
괴산파 | ||
맹혁 (참판) |
포천, 청산파 |
포천파, 청산파 | |||
주경 (판서) |
이용 (별장) |
정 判決事 |
맹현 (첨지중추부사) |
장단파 |
장단파 |
2세 김은부 (金殷傅) 945(고려 혜종 2년)∼1017(고려 현종 8년).
* 부인 인주이씨 이허겸 딸 (이허겸 아들 이한 -이자상 -이자연 - ---이자겸)
고려 초기의 문신. 수주(水州) 안산현(安山縣) 출신.
본관은 안산(安山). 성종 때 견관승(甄官丞), 목종 때 어주사(御廚使)를 거쳐 현종 초에 공주절도사(公州節度使)가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왕이 거란의 침입으로 남행(南幸)하자 극진히 영접했고, 왕이 나주까지 피란갔다가 다시 공주에 돌아오자 장녀로 하여금 어의(御衣)를 지어 바치게 하여 왕비가 되니 그가 바로 원성왕후(元成王后)이다. 뒤에 다시 두 딸을 왕비로 바치니 원혜왕후(元惠王后)와 원평왕후(元平王后)이다.
그해 형부시랑으로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거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원성(來遠城)에서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인에게 붙잡혔다가 수개월 만에 풀려났다.
1015년에 지중추사(知中樞事), 이듬해 호부상서가 되었다가 뒤이어 중추사상호군(中樞使上護軍)에 제수되었다.
죽은 뒤 국구(國舅)로서 추충수절창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사공 상주국 안산군개국후(推忠守節昌國功臣開府儀同三司守司空上柱國安山郡開國侯)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閔丙河>
3세 김충찬(金忠贊) ?∼1036(정종 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안산(安山). 김은부(金殷傅)의 아들. 1025년(현종 16)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고, 1033년(덕종 2)에 예빈경지중추원사(禮賓卿知中樞院事)를 거쳐서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035년(정종 1)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옮겼다가 이듬해 지중추원사 병부상서로 죽었다. 거란에 대하여는 화호책(和好策)을 썼다. 시호는 공정(恭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黃雲龍〉
경덕국사(景德國師)
고려 목종 2년(999) ~ 문종 20년(1066)
고려 시대의 왕사(王師). 본관은 안산(安山). 속성은 김(金), 속명은 난원(爛圓). 안산현(安山縣;현 안산시 장상동) 출신으로 아버지는 호부상서 김은부(殷傅), 형은 병부상서 충찬, 할아버지는 안산김씨 시조 상서좌복야 긍필이고 문종의 외숙부이며,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다.
문종 12년(1058)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왕사가 되었고, 도승통(都僧統)을 역임하였다. 문종 19년 5월 문종의 아들인 후(煦;의천, 대각국사)를 중이 되게 하였고 화엄교관(華嚴敎觀)을 가르쳤다.
구룡산(九龍山) 복흥사(福興寺) 주지를 지냈다. 죽은 후에 복흥사에 비를 세우고 시호로 경덕(景德)을 내리고 국사(國師)로 추존하였다. 그의 묘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대 |
고려 |
연대 |
1072년(문종26년) 추정 |
유형/재질 |
묘지명·묵서명 / 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기 |
|
출토지 |
미상 |
소재지 |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용산구용산동6가 168-6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미상 / 미상 / 미상 |
판 독 문
贈諡景德國師墓誌幷序」
國師諱爛圓俗姓金氏其先安山」
郡人也故尙書左僕射諱兢弼祖」
也故檢校太師上柱國諡安平公」
諱殷傅父也故安孝國大夫人李」
氏妣也故中樞使兵部尙書忠賛」
兄也故首座弘睡師也 師自削」
周羅脫身于豪戚間遭遇累朝歷」
揚緇秩纔及順耳陟爲 王師智」
慧花果自然成就賛謂人中之師」
子矣烏乎以咸雍二年丙午冬十」
月八日示化報年六十八僧夏五」
十七▨▨震悼咸▨迦文定入涅」
槃卽以其月 詔護葬事權之于」
五龍山南崗更取▨子冬十月竪」
碑塔▨九龍山福興寺軋隅尋奉」
靈骸移安于玆地順也門弟等弗」
杇是圖乃爲墓誌」
九龍山兮山之秀」
景德師兮師之尊」
彼佛刹兮旣證果」
此靈本兮且安魂」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복흥사 경덕국사묘지명 (福興寺景德國師墓誌銘)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돌아가신 왕사 도승통(王師 都僧統)이며 시호 경덕국사(景德國師)의 묘지명 및 서문
국사의 이름은 난원(爛圓)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며, 선조는 안산군(安山郡) 사람이다.
돌아가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긍필(兢弼)이 조부이고, 돌아가신 검교태사 상주국(檢校太師 上柱國)으로 시호가 안평공(安平公)인 은부(殷傅)가 아버지이며,돌아가신 안효국대부인 이씨(安孝國大夫人 李氏)가 어머니이다.
돌아가신 중추사 병부상서(中樞使 兵部尙書)인 충찬(忠贊)이 형이고, 돌아가신 수좌(首座) 홍주(弘疇)가 은사이다.
국사는 머리를 깎고 호척(豪戚) 사이에서 몸을 빼어낸 이후 여러 대에 걸쳐 계속 승계(僧階)를 높여나갔다. 예순에 이르러 왕사(王師)가 되었으니, 지혜의 꽃과 과실이 스스로 무르익어 사람 중의 스승이라는 찬상을 받았다.
아, 함옹(咸雍) 2년 병오년(문종 20, 1066) 10월 8일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8세이고, 승랍은 57세이다. 매우 슬퍼하여, 모두 “석가모니가 열반에 드신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곧 그 달에 조칙을 내려 장례일을 돌보게 하여 오룡산(五龍山) 남쪽 언덕에 임시로 모셔두었다가, 다시 임자년(壬子年? : 문종 26, 1072 ) 10월에 비와 탑을 구룡산 복흥사(九龍山 福興寺)의 서북쪽 모퉁이[乾隅]에 세우고, 영해(靈骸)를 받들어 이 곳으로 이장하여 모셔두었으니, 순리에 따른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이 위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이에 묘지(墓誌)를 짓는다.
구룡산(九龍山), 산 중에 빼어나고 경덕국사(景德國師), 스승 중에 으뜸이시다. 저 사찰에서 이미 성불(成佛)의 진리를 깨우쳤으니
이 영혼의 터전에서 또 평안히 하리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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